교리반 강의
녹취자: 김혜진, 박은희, 김혜진
기도는 이제 했고 그러면 이제 사실은 지난 시간에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 후루룩 넘어가긴 했는데,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를 다루었어요. 그게 뭐냐하면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문제였거든요. 그래서 아무래도 이거는 시간이 아무리 바빠도 한번쯤은 깔끔하게 정리를 해 주고, 나가는 게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이 형상을요, 잘 써야 돼요. 요렇게 써야 됩니다. 요렇게! 형상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게 아니예요. 이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거는 우상을 가리키는 거예요. 형상, 라틴어로 이마고라고, 영어로는 image 라고 그러죠. 이거는 사실은 창세기 1장 25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거기에 형상이라는 말하고 그 다음에 그 뒤에 모양이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이게 우리말로는 그렇게 의미가 크게 없구요. 원래 히브리어로 보면 첼레미라는 단어로 되어 있고, 이거는 데무트라는 단어로 되어있어요 애써서 그릴 필요는 없어요. 데무트라는 단어로 되어 있어요. 요 첼렘하고 데무트에 대해서 이게 두 개가 다 같은 것이다 라고 보는 견해가 있었고, 아니다 두 개는 다른 것이다 라고 보는 견해가 있었어요. 이것들이 크게 이제 일기로 얘기하면 이레나이우스라고도 하고 이레네스라고도 하는 우리 세미나에서도 가끔 나오는 유명한 교구예요. 테루툴리아누수라고 하는 교구가 나와요. 테루툴리아누스라는 교구가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다 2세기 교구예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냐 하면, 이렇게 머리가 나뻐! 이렇게 하면 간단한 걸,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이 사람들은 어떻게 했냐하면 요거는 신체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거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했어요. 그러면 인제 어떻게 되죠?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하나님이 무슨 신체적인 형상을 가지고 계신 분인 것처럼 오해하기 쉽잖아요? 그래서 이러한 주장을 했는데 여기서 클레맨트라는 사람이 나와요. 그 다음엔 오리겐 이런 교구들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보구요. 그리고 인제 이 형상과 모양을 신체적이고 영적이고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지 않고 어떻게 봤냐 하며는 형상은 인간다운 특성이다 인간다운 특성, 특성 근데 요거는 본래적으로 주어져요. 근데 요거는 그 위에 덧붙여지는 또 다른 특성 이예요. 요것만 해도 인간인데 이거는 그 위에 덧붙여진 또 다른 특성이예요. 덧붙진 특성인데 이건 비본래적 이예요. 그래서 주어지기도 하고 도로 사라지기도 하는 그런 거죠. 그런데 이것이 더 발전 되어서 중세스콜라주의자들로 넘어가요. 스콜라주의자들로 넘어가면 이것이 어떻게 해석 되냐 하면 요거는 지적능력이다 이렇게 봤어요. 인간의 지성적 능력이다 이렇게 보고 그 다음에 데무트는 원의 타락하기 전에 있는 원의다 이렇게 해석을 했구요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을 뭐라고 해석했냐 하며는 육체의 저급한 기능을 통제하는 초자연적 은사다, 이렇게 봤어요. 이렇게 봅니다. 여전히 이렇게 나누어 진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냐 그러면 타락했을 때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나오잖아요? 그러면 타락했을 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런 것들이 깨뜨려지는 거죠. 이것도 마찬가지고, 여기서도 마찬가지야 원의가 사라져 버리고 통제하는 은사가 사라져요. 후기에 와서 지적인 능력은 그대로 살아있는 거죠 아직까지 이렇게 되면 어떤 현상들을 가지고 올까요? 이성에 대한 능력을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높이 평가하게 되는 그런 쪽으로 가게 되는 거죠 그러다가 루터와 칼빈에 이르게 되요 루터하고 칼빈에 이르게 되는데 이 사람들이 일치하는 의견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형상과 모양은 이런 게 아니다 이런 게 아니고, 이거 전부 다 똑같은 말을 투톨로지로 반복하는 거다 그래서 형상이나 모양이나 이거는 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그리고 어떻게 봤냐하면, 이 형상과 루터는 같은 거라고 보고 루터는 어떻게 봤냐하면, 형상과 모양이라는 거 자체가 원의다 이렇게 보는 거죠, 원의란 뭐냐 하면 인간이 원래에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의예요. 그것이다 이렇게 본거죠 하난데 바로 그거다 그래서 이게 타락과 함께 사라져 버린 거예요. 완전히 이 원의 자체가 사라져 버린거죠. 그러면 이제 풀리지 않은 것이 무슨 얘긴가 하면. 그러면 넓은 의미에서 모든 인간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라고 보는데. 그러면 원의가 상실되어서 아주 없어져 버리면 인간과 동물사이에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점이 나오는 거죠. 그래서 칼빈은 여기서 이렇게 과격한 견의보다 조정을 해요. 그래서 이거를 어떻게 보냐 하며는 자연적 능력 더하기 그 다음에 원의 이렇게 봐요. 원의의 구성요소가 무엇인가 하면 지식과 의와 거룩함 이예요. 이게 에베소서에 나오는 것처럼 이렇게 보는 거죠. 교구들이 전체적으로는 이렇게 개별적으로 얘기하지만 교구들의 경우에는 이것을 이제 뭐라 그러느냐 하면, 인간의 지성 그 다음에 도덕성 그 다음에 성성 거룩성 이렇게 세 가지 정도의 요소로 보았어요, 인제 조금씩 차이는 있어요, 여기 와서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타락함으로써 이거는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타락한 인간에게는 거룩함이라든지 의라든지 그 다음에 여기는 지식이라고 그랬는데 이거는 진리예요 진리, 진리라든지 이런 게 없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게는 거룩함과 의, 진리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느냐? 그렇지 않고 희미한 것들이 남아있는 거예요. 그것들을 자연적인 능력이 찾아가는 거죠. 뭐 자연적인 능력이라는 것이 아까 뭐 지성이라든지, 그 다음에 도덕성이라든지 이런 거죠. 그럼 어떻게 되죠. 이런 이야기가 되죠. 원의가 완전히 사라져도 인간은 여전히 이런 지성이라든지 도덕성이라든지, 이런 능력 때문에 동물들과 구별되는 거죠.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뭔가 하면 이런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자연적인 것들은 이 원의의 기초에 있을 때에 가장 아름다운 특성을 드러내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자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여기에 흔적들은 남아있어요. 그게 바로 학문이라든지 철학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통해서 진리를 찾아가고, 그 다음에 사람들이 올바로 되려고 하고 그렇게 종교를 갖고 하는 것들은 남아있지만, 이런 것들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올바르게 규명을 해 주지는 못 하는거야. 그래서 결국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성경계시를 통해서, 이 진리를 터득하고,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의와 거룩함으로 옷 입어 새롭게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예요. 그래서 인제 인간이 타락했다 그럴 때, 인제 여러분들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읽으니까 상세하게 나오겠지만 타락했다라고 그럴 때 우리가 이야기 하기는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거잖아요. 전적 타락의 교리는 종교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범위와 관계된 것 이예요.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영향이 인간의 모든 기능에 다 스며들었기 때문에 어느 한군데도 인간이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타락했다라고 얘기 하는 거죠. 이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가 변천되어온 그런 모습이예요. 그러니까 이제 변천이 없다고 하더라도 좁은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지만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모든 특성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리고 이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이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 자신의 대한 사랑과 놀랍게 일치를 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에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죠. 이것이 바로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책이나 시리즈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내용들이고, 지난주에 있었던 설교도 이런 내용들을 강조했고, 내일 이루어질 설교도 이런 내용들을 강조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인간을 사랑해야할 근거를 하나님이 사랑해라 그랬으니까 사랑하는 거지만 사랑해야하는 근거가 인간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걸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하는 것이죠. 그걸 바라보는 것이죠. 자, 이렇게 해서 시간은 좀 들였지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정리를 해드렸습니다.
그 다음 13과로 넘어가겠습니다. 12장, 12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 그렇죠. 성경은 죄는 낙원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세상에 왔다고 한다. 이 최초의 죄는 뱀의 형태로 가장한 사단의 시험에 의해 발생된 것인데, 사단은 인간의 마음에 의혹과 불신의 씨앗를 뿌렸다. 그래서 우리들이 뱀을 막 싫어하잖아요. 그렇죠? 미워하는데 그 뱀은 도구일 뿐이지 뱀을 그렇게 미워할 필요는 없어요. 뱀이 뭐 그렇게 사단의 도구가 되었다 그런데 어쨌든 꿈에 뱀 같은 게 나오면 좋은 것은 아니죠. 수련회를 한 번 갔는데 그 기도원 장로님이 나와서 광고를 하면서, 여기 기도원 가까이에 바로 울타리 쳐진 옆에 뱀들이 많으니까 조심하라고 그러니까, 여 성도님들이 으악 막 그러는데 남자 성도님들은 정말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아담이 만약에 한국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거예요, 뱀을 먼저 잡아먹었을 거예요, 선악과 보다 뱀이 훨씬 정력에 좋으니까! 나 참,
어느 집안에서 아이한테 교리 공부를 시켰어요. 한 네 살 다섯 살 된 아이니까 엄마가 아담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그러시는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쫒겨났단다. 그러니까 갑자기 네 살 짜리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러더래요. 뭐를 그러니까 나는 왜 쫒겨났는지 알아! 그래서 왜? 그러니까 당연하지, 선악과를 땄으면 하나님이랑 나눠먹어야지. 아이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신화가 아니냐, 이렇게 보거든요? 그러면 이제 실제로 신화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아요. 1장서부터 한 3장까지 근데 그러면 얼마나 웃기는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신화 속에 벌어진 죄 때문에 예수님은 역사 속에 오셔서 죽으셔야 해요 그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최초의 죄는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은데 있다. 그래서 이 열매가 매우 특별한 뭐가 있느냐? 그게 아니라, 이거는 하나의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정된 조항이예요.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줄 치세요 지적인면에서 1번 불신앙과 자만심을 2 의지의 면에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을 3 감성 면에서는 금지된 실과를 먹으려는 호기심을 나타내는 것이다..그 결과로 인간은 엄밀한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전적으로 타락하여 죽음의 지배하에 있게 되고 말았다. 그렇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를 해요. 아니 그 선악과를 아담은 맛이라도 보았으니까 벌 받는 게 마땅하지만 그 할아버지 먹은 거 때문에 왜 끝도 없는 손자인 우리들이 이 고생을 해야 되나? 그리고 또 여자들이 교회에 많은 이유가 바로 이렇게 더 많이 죄가 많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여야 하기 때문에 많은 거다 그런데 둘 다 틀렸어요. 첫째는 왜 틀렸느냐 하면 많은 학자들은 이 시험이 영원히 지속되는 시험이라고 보지는 않거든요.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으면 계속 낙원에 있게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자신은 무얼 순종한 게 있어요? 그 할아버지가 순종했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되죠? 문학적으로? 이해되죠?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거죠. 그게 대표의 원리예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어 물론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 먹었죠, 그리고 남편에게도 줬죠, 그거는 뭐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러나 하나님은 하와와 언약을 맺지 아니하시고,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어요. 그러니까 아담이 이 여자가 내게 주어서 내가 먹었습니다 라고 한 그 고백은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의 그 얼굴에 오물을 뿌리는 수치예요. 이런 할아버지를 우리가 모시고 있다는 게 창피해요. 왜 그거를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셨는데 자기의 책임성을 가지고 대답을 해야지, 이 여자 때문입니다 또 뭐라 그랬느냐 하면 이 여자 때문인데 또 이 여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한 이 여자가 내게 주어서 내가 먹었나이다 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그러니까 여성들이 훨씬 그러니까 죄에도 민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도 민감한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유혹이 있을 때 먼저 움직인 것도 여자였고, 구원의 은혜가 주어졌을 때 먼저 움직인 것도 여자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은혜롭잖아요. 얼마나 은혜로워요. 그 때는 여자 때문에 고생했지만 요새는 여자 때문에 덕본다 이렇게 생각하고 마누라가 예수 믿어라 그러면 열심히 예수 믿고, 교회 빨리 가자하면 가고 순종해야 되요. 왜 남자들 대답을 안 해요. 네 대답한 사람들만 빨리 장가가길 바래요.
죄의 본질, 죄는 특별 악이다 .죄와 악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 했죠 그죠? 죄는 절대적 성질을 가진다. 절대적 성질은 악, 악은 인간이 책임져야할 도덕적 악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정죄 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죄라는 생각을 하려면 선과 악의 기준이 되는 절대적이 규범이 있어야 되요. 그래서 알빈 플란트와 같은 철학자가 악을 자꾸 이야기 하는 철학자들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악이 어디 있냐, 왜 그게 악이어야 하느냐, 그렇게 물은 것도 바로 그런 것들 때문이죠, 죄는 하나님의 뜻에 관계 된다. 오늘날 죄는 이웃에 대한 잘못이라고 관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요점을 파악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줄 치세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때에만 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죄란 불법이며, 1번 2번 율법에 대한 복종의 결여이며 ,3번 율법에 의해 요구되는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다. 성경은 항상 죄를 율법과 관련시켜서 생각한다. 율법이 기준이 되는 거죠. 4, 죄는 죄책과 오염을 내포한다. 줄 치세요. 죄란 1 인간으로 하여금 형벌에게 빠뜨리게 하는 죄책 이건 뭐냐 하면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 이예요. 그 다음에는 오염이 나오는 데 그 오염은 뭐냐 하면 선천적 부패성 혹은 도덕적 오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가 있으므로 부패한 성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죄의 자리, 5 죄의 자리는 인간의 마음이다 이 중심에서부터 인간 전체에 영향을 미치며 육체의 행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6 죄는 외부적 행위만이 아니다. 죄란 외부적 행위에만 있지 않고 악한 사상과 감정 마음의 악한 의도까지 모두 내포한다. 인류 생활에 있어서의 죄, 아담의 죄와 후손의 죄와의 관계 이거는 영혼 기원에 대한 가설이 있었죠. 그죠? 그거와 연결이 되는 거야. 실제설, 최초의 설명은 실제설인데 줄 치세요. 하나님께서 하나의 일반성을 창조하셨는데, 각 개인으로 분류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이 전체의 인간성을 소유했는데, 죄를 지음으로 전체가 더럽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서 나온 개인적 인간성도 죄책과 오염을 공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호수에 비유 해봐, 저수지에 오물이 떨어졌는데 거기서 나오는 것들도 다 더럽혀졌다는 이 얘기예요. 대표설 이것은 개혁주의의 대표적인 학설 이예요. 줄 치세요. 이 견해에 의하면 아담은 이중적 관계를 갖는데, 모든 인류의 머리가 되었고 언약의 머리로서 대표였던 것이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인류에게 죄가 전가 됐으며, 그 결과 인간은 부패한 상태 아래서 탄생하였던 것이다. 이게 이제 대표설이예요. 대표설을 가지고 설명을 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때에 제가 내포적 대신이라는 말을 쓰거든요, 내포적, 그래서 뭐냐 하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을 실 때 우리 모두를 끌어안고 그리고 당신 자신이 죽으심으로서, 그 당하신 형벌이 우리 모두도 함께 참여한 형벌이 되게 하신 거죠.. 우리는 죽지 않은 거죠 그분이 대신 죽어주셨으니까, 이런 것들이 아주 잘 설명이 되고,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성경적인 교리와 일치를 이루게 되는 거죠. 그 다음 간접 전가설,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만, 아담의 죄책과 직접 관계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부패가 전가된다. 부패성들이 죄 되게 한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들은 줄치세요. 아담 안에서 유지하기 때문에 부패한 것이 아니라 부패하기 때문에 죄가 된다. 이런 것은 도덕적인 기독교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마음에 맞는 거죠, 그러니까 죄에 대한 책임은 없다 그것은 개인이 질 문제이고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도 죄인은 아니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런데 이런 것들은 경험적으로 잘 납득이 안돼요. 왜냐하면 여러분 아이들을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죄짓는 방법을 교육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내버려두면 그냥 죄인이 되는 거야, 그런데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교육이 필요해요. 그리고 때로는 그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강도의 교육이 필요하죠. 그걸 보며는 인간은 마치 부패하기 쉬운 사물과 같아서 무슨 뜻인가 하면 음식물 같은 것을 여름에 부패하게하기위해서 거기다 무슨 조치를 취해야 되는 것은 아니예요. 그냥 먹던 음식을 깜빡 식탁위에 놔두고 한 이틀 여행을 갔다 오면 곰팡이가 피는거죠. 그것을 부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끓인다던지 얼린다던지 아니면 기름에 담궈 놓는다던지 굉장한 많은 노력들이 필요하죠. 인간이 악하다 라고 하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입증이 되지 않아요? 사실은 동의를 안 하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진짜 나쁜 사람들한테 고생을 안해 봐서 그렇지. 원죄와 범죄, 우리는 죄를 원죄와 범죄로 구분한다. 이것은 인간이 죄 된 상태와 신분에서 출생하므로 원죄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많은 실제적인 죄들을 가리켜서 본죄 혹은 자범죄 혹은 고범죄 혹은 실행죄라고 부른다. actual sin이라고 그래서 실행죄라고 부른다. 자, 원죄 줄 치세요. 원죄는 죄책과 죄의 오염, 두 개다 동그라미를 치시고, 포함 한다. 아담의 죄책은 전가 되었다. 대표자로 범죄 했기 때문에 우리도 죄 된 인간인 것이다. 아담의 부패성을 상속하고, 죄를 향한 적극성내지는 긍정적 태도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질상 전적으로 타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계속 줄 치세요. 인간이 하는 모든 바가 악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인간 본성 전체를 부패시켰고,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영적 선 동그라미 치세요. 영적 선이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적 선을 설명 드릴께요. 영적 선은 무엇인가 하면 이거는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 마음이 합치된 게 선이예요. 무슨 뜻인지 이해되세요? 그러면 영적 선이 아닌 것은 무엇이냐? 일반적인 도덕적 선 이죠. 일반적인 도덕적 선은 영적 선의 모양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그러나 그 궁극적인 목적에 있어서는, 기원과 목적에 있어서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 선은 거듭나고 은혜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이예요. 그런 의미에서의 선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예요.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인간은 아직도 동료와의 관계에서 가치있는 일을 할지 모르지만, 최선이 아니더라도 그런 행위는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야기 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순종 할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불완전한 것이다. 전적타락과 무능력은 펠라기오가 아니라 펠라기우스파와 알미니우스파와 현대주의자들에 의해 부인되었지만, 성경은 이 두 가지를 입증해 주고 있다. 다 줄 치셔야 되요. 본죄 혹은 자범죄 혹은 실행 죄라고 이야기 하죠. 실행 죄란 줄 치세요. 외부적 행위 죄 뿐 아니라 의식적인 생각 욕망 결심 등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이 고유한 성질과 경향으로부터 구별하여 행동한 죄이다. 원죄는 하나지만 실행죄는 여럿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요. 그죠? 실행죄는 교만 질투 증오 육욕과 같이 내적 생활의 죄이다. 사기 도적 간음 불법복제 그것도 다 들어가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음란물 유포 뭐 이런 거 다 들어가는 거예요 그 다음에 욕설 남편과 아내가 서로 깔보는 거 다 들어가는 거예요. 뭐 집에 가서 한 번 다 적어보세요 얼마나 많은가, 그런 외적 생활의 죄이기도 하다. 그들 중에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즉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있다. 이 죄를 범한 후에는 심령의 변화가 불가능하며 그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궁극적으로 배교의 죄인데 이것은 사실은 참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런 죄를 지을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걸 불가능하다 이렇게 보는 거죠 왜냐하면 이렇게 굉장히 예수 믿는 사람 같았었는데 어떻게 하나 그것은 이제 진리를 아는 빛에 비췸을 받아서 커다란 각성이 일어났고 상당한 지식도 소유했지만 구원받은 사람으로 볼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죠. 죄의 보편성, 성경과 경험적으로 볼 때 죄는 보편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팰라기우스파까지도 그들은 나쁜 환경이나 악한 본보기등 외부적 조건으로 탓으로 돌리지만 보편성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모든 세상 사람들이 죄의 영향아래에 있다는 걸 인정한다 이거예요 대체적으로. 성경은 나면서부터 인간이 죄악 되다고 가르치는데 이 보편성은 모방의 보편성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모방이 아니예요. 이런 것들이 하나의 천성이예요. 천성, 제가 여기서 그 이야기 했나? 어떤 사람이 시험을 했어요. 고양이하고 쥐가 태어난 첫 날 아직도 눈도 못뜨잖아요. 고양이 쥐도 한 삼일 있어야 눈 뜨거든요. 강아지도 일주일 되야 눈뜨나? 눈을 감고 나와요. 눈도 아직도 못뜨는 놈을 그 둘을 유리박스 안에다 집어넣어 놨어요. 그리고 같이 먹이를 주고 자랐어요. 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1번 친구로 좋게 지냈다. 2번 가끔 싸웠지만 죽이지 않았다. 3번 쥐가 고양이가 크기 전에 물어버렸다. 4번 고양이가 쥐를 죽여버렸다. 그걸 뭐라 그래요? 그런 관계를 뭐라 그래요? 천적이라고 그렇죠 천적, 그러니까 학습되어서 적대감이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본성속에 깃들여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이 그런 관계다 이런 얘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면 희망이 없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요즘은 복음을 전하면서도 왜 전하는지 몰라. 마치을 모집하듯이 참 교회 크게 만들려고, 그렇게 하면 안 돼죠.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진리의 소중함과 하나님의 사랑의 고귀함을 알면서 전도를 해야지 올바로 알게 되면 전도하지 않을 수 없어요. 여러분도 아마 교리반 마치기 전에 전도하게 되어 있죠? 한 사람 전도하게 되어 있죠? 없어요? 원래 교리반에서는 전도하게 경건생활표에 나오지 않아요? 안 나와요? 나오죠? 마지막에 종강하기 전에 열매를 맺어야 되는거야. 그게 교리반의 전통이었어요. 교리반의 목표는 여러분 생소하고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번에는 강조를 안 한 모양인데, 교리반의 목표는 무엇인가 하면 교리반을 배우는 것은 구실이고, 교리반을 통해서 기도 성경읽기 전도생활 모든 것을 all-court press으로 다시 만드는 게 교리반의 목표예요. 그래서 이전에는 다 체크했어요. 열심히 전도해서 막 협박도 했거든요 전도 안하면 졸업장 안 준다고 막 협박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너무 널널 해져서 큰일 났어요. 제가 직접 챙길 때는 사람들이 기말고사 볼 때 청심환을 들고 와서 기말시험보고 했거든요. 그리고 본당에 가가지고 절대 컨닝 못하게 의자 세 개씩 띄어놓고 뒷자리는 나란히 앉지 못하게 어긋나게 해서 성도의 교제 못하도록 그렇게 해서 시험을 보았는데, 그러니까 청심환 먹고 그렇게 시험을 보았는데 너무 물렁물렁해져서 큰일났어, 이제 다시 강화를 해야 겠어요. 여러분들 이제 몇기죠? 18기? 34기, 34기를 졸업한 것을 행운으로 여기게 될꺼예요. 35기면 큰일날뻔 했어요. 이렇게 설렁설렁하고서 밖에 나가서는 성도들하고 이야기 할때에는 얼마나들 엄살을 떠는지, 뭐 죽을뻔 했다고 그러 뭐 친구도 못 만났다고 그러고, 밤을 샜다고 그러고, 뭐 아이 참 11시까지 텔레비 보다 숙제했으니 밤을 샜지, 아이 참! 모든 인간은 날 때 부터 정죄아래 있으므로 구속이 필요하다. 아이들도 제외될 수 없다.
위대한 계획이 시작이 되는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그 위대한 계획은 제일 먼저 삼위일체 안에서 먼저 시작되고 그 영원한 삼위일체 안에서 시작이 되고 그것이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전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삼위일체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이제 구속의 계약이라고 부르고 그 다음에 구체적으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들과 관계 속에서 펼쳐지게 된 것을 은혜계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계약은 은혜계약의 기초가 되는 것이 마치 작정과 창조가 작정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서 창조가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해되시죠? 신적작정 배웠지 않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의 의지 혹은 뜻 이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구속의 계약, 스가랴 6장 13절에 나오는 명칭인데, ‘평화의 의논’이라고 나옵니다. 캬운실 오브 피스(council of peace) 라고 불리우는데 이것은 삼위를 대표하는 성부와 선택 받은 자의 대표이신 성자 사이의 언약입니다.
성경적 근거, 아, 참 여러분들 다 삼위일체 다 다운받으셨습니까? 다 받을 줄 알죠? 이제 지웠죠? 오늘까지랍니다. 못 받으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아직 다운 못 받으신 분? 오늘 집에 가서 빨리 받으십시오. 오늘 밤에 셧(shut) 한답니다. 없어집니다. 꼭 받으십시오. 구속의 계획이 작정 속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시기 전에 맺으신 계약에 대하여 말씀 하셨고 성부로부터 받은 부탁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한 계약의 머리가 되십니다. 시편에 보면 계약의 당사자들이 언급되어있고 약속이 지시되어있습니다. 메시야는 죄의 희생제물이 됨으로서 하나님 뜻을 행하려는 준비를 나타내신다.
구속계약에 있어서의 성자, (줄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계약의 머리이실 뿐 아니라 보증(둘 다 동그라미 치십시오.)이 되신다. 보증인은 타인의 법적 의무를 책임지는 인물이다. 죄인을 대신해 형벌을 짊어지셨고 백성을 위한 법적요구에 응하셨다. 그리스도는 생명주는 마지막 아담이 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이 계약은 행위계약이었으나 당연하죠? 왜냐하면 이 행위계약은 이제 말하자면 인간이 타락함으로서는 이 행위계약을 실행할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게 된 것입니다. 죄가 없어야지 이 계약을 지킬 수 있는데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이 계약을 따라서 그래서 우리 행위계약에 따르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 처해질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계약의 조건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 판단이 된 것입니다. 이 계약의 효능은 (줄치십시오. 매우 중요합니다. 시험에 꼭 나옵니다.) 선택받은 자에게 제한되어 있다. 그들은 다만 구속을 받으며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해 이룩하신 영광을 상속 받을 뿐이다.
구속계약의 요구와 약속. 구속계약의 요구, 성자 자신은 죄가 없으시지만 인간의 나약성을 책임지도록 성부께서 요구하셨다. 성자는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 형벌 받으시고(계속 줄치십시오.) 영생을 제공하기 위해 법아래 처하셔야했다 3.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자신의 공적을 백성들에게 적용하사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생활을 유지하게 하셔야 했다.
구속계약의 약속. 성부께서는 성자를 위해 (줄치십시오) 1.몸을 준비하시고 2.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시며 3.그의 사역을 지원하시며 4.사망에서 건져내어 보좌우편에 앉히시며 5. 성령을 보낼 수 있게 하시며 6.택한 자를 불러 보호하시고 7.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후사를 허락하실 것이라고 성자에게 약속하셨다. 그래서 이 구속계약이 성부와 성자사이에만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지 않고 성령도 이 계약에 참여했다고 보는 것이 통상적인 견해입니다. 여기서는 빠져있지만.
은혜의 계약, 하나님께서는 구속계약에 근거해서 은혜의 계약을 확립하셨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 하시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성령을 단순히 하나님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위격으로서 이 구속계약에 동참하셨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은혜의 계약, 하나님께서는 구속계약에 근거해서 은혜계약을 확립하셨다. 1.계약의 당사자. 하나님께서는 계약에 있어서 (줄치십시오.)1당사자이다. 2당사자와의 관계를 결정하시는데 2당사자는 누구인가가 결정하기 쉽지 않다.(줄치십시오) 개혁파의 통상적 견해는 2당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은 죄인들이라고 한다. 이 계약이 두 가지 면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목적자체로서의 계약,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의 계약. 그렇죠? 상호 친교 또는 생명의 교통의 언약, 즉 계약의 목적 그 자체는 역사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역사로 실현되는 것이다. 계약이란 (계속 줄치십시오.) 어떤 특권이 영적 목적을 위해 증진 되어지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약속은 산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지며, 이렇게 해서 약속된 축복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줄치십시오.) 이 계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택받은 죄인들과의 은혜로운 계약으로서 (거기 꼭 시험에 나옵니다. 꼬불꼬불하게 줄치십시오.) 이 계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택받은 죄인들과의 은혜로운 계약으로서 하나님이 택함 받은 죄인에게 구원의 축복과 함께 자신을 주시고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로 체결한 은혜로운 협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은혜로운 협정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그것 자체를 체결해서 인간이 손해 볼 게 없다 그런 뜻입니다.
(예화) 자, 우리 계약 합시다. 방황하는데 왜 그래요? 그러니까 집이 없어서요. 그래요? 우리 집에서 그냥 한 5년 사세요. 빈집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몇 달 있다가 비워달라시면 어떡해요? 어휴, 그래요? 아니 5년 동안 안 달라고 그럴게요. 그러면 전세금은요? 아이 우리 돈 필요 없어요. 그냥 노는 집이니까 편안하게 5년 쓰세요. 그런데 그래도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잘 미덥지 않으세요? 계약합시다. 이게 부담스러운 계약이에요? 다음 집을 5년 동안 빌려주고 무료. 미리 나가라 그러면 모든 법적책임을 지겠음. 주인백. 그런데 그게 부담이에요? 부담 아니죠. 그런 게 은혜로운 협정입니다. 감지덕지죠. 은혜로운 협정.
자 6.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의 계약, 이것은 영적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법적 협정을 말한다. 성경은 이스마엘, 에서,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요, a번은 하나님이 이런 언약 안에서 핵심이 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계약하셔서 실제로 시간 속에서 실지로 실현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계약에 이런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계약을 체결하고 이 계약 안에 들어오면 실제로 이 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측면이 있는데 뭐냐 하면 어떤 목적으로 데려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격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계약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을까요? 헷갈리죠?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계약은 계약이 체결된 것은 훨씬 넓고요 그다음에 그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 계약에 충실하지 아니 함으로 구원받지 못 하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만약에 은혜계약 체결한 사람들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그러면 유아세례 받은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그게 은혜계약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못된 놈들 많습니까? 4살 때에 이미 교회에 다녔고 6살 때에 어린이 성가대에서 열심히 봉사했고 청소년까지 교회를 다니다가 그다음에 교회를 뛰쳐나왔고 그다음에 유대인 처녀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는데 그 자매가 공장에 다니는 직공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장 주인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성폭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에 대해서 이를 갈기 시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역사의 아주 커다란 격변은 이렇게 아주 사소한 개인적인 체험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에 대해서 증오하면서 600만 명을 죽이게 되는 살육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전부 다는 아니지만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러니까 얼마든지 교회 안에 가짜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녀들 오늘 책이 한권 나왔는데 내일 소개할 턴데 정말 예쁜 책 나왔습니다. 책이름이 제목이 뭐냐 하면 “아가야, 엄마가 기도해줄게” 그게 아이들 회심을 위해서 출판한 게 아니고 교회에서 찍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심방 갈 때 가지고 가서 하나씩 줄 거라고 하는데 되게 부담스러울 것 같습니다. “아가야, 엄마가 기도해줄게” 그런데 내가 그 책 디자인을 딱 보면서 내가 이거 틀렸다 뭐냐 하면 아니 아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게 어떻게 엄마책임만 되냐 그건 슬쩍 가부장적으로 미루는 게 아니냐? 그래서 책을 딱 뒤집으면 “아빠도” 이렇게 나옵니다. 내 아이디어입니다.
제가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성 평등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 여러분 아십니까? 모르시는구나. 페미니스트가 보면 우습겠지만. 여러분 3000명 모이는 교회에서 권사도 아니고 젊은 여 집사가 그것도 2부와 3부 시간에 그렇게 대표 기도하는 교회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서리집사가. 장로님들이 그냥 근엄한 목소리로 1년 52주 다 차지하지. 그런데 그 젊은 여성들이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젊은 여성들이 제일 기도를 잘합니다. 너무 감동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근데 자녀 회심하는 게 엄마책임이냐 이것입니다. 그렇죠? 그것도 선악과 먼저 따먹어서 책임져주는 것입니까? 먹어보지도 못했는데 그렇죠? 어쨌든 그 정말 그 재미있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책이 나오니까 맘이 좀 위안이 됩니다. 그런데 맘에 안 드는 게 “아가야, 엄마가 기도해줄게” 그거 굉장히 큰 글씨고 그 뒤를 딱 넘기면 똑같은 글씨로 하라고 그랬는데 뒤에 넘기니까 좀 작은 글씨로 “아빠도”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여성이 편집 했는데도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잘 보세요. 이스마엘, 에서, 엘리의 악한 아들, 이런 사람들까지 사실은 은혜계약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계약 안에 있었는데 스스로 적극적으로 이 계약을 파기하고 그리고 언약바깥으로 튕겨져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백성들의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입니다.
자,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죠?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죠? 그다음에 또 누구죠? 그렇지. 등등 많이 태어나지만 그래도 계보를 이어가는 그다음에 누가 나오죠? 그다음에 누구죠? 그러면서 누가 나오죠? 요셉이 나옵니다. 어쨌든 쭉 나가지 않습니까? 그럼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잖습니까?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다 언약의 집안에 언약에 참여한 것입니다. 참여하는데 그런데, 요 사람들이 핏줄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족장으로서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맏아들이기 때문에? 요셉은 맏아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뭐냐 하면 이 은혜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은혜 언약 안에서 그들이 그 하나님이 이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시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 은혜 계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총을 약속하시는데 그런데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죄를 짓고 여기서 튕겨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때 뭐냐 하면 언약의 파기가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언약 안에 있다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들어옵니다. 이렇게. 언약 속으로. 이게 뭐냐 하면 육신의 혈통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가나안 정복에 영웅가운데 한사람이 갈렙 이라는 사람이 나오죠? 그렇죠? 이 사람은 유다지파 사람인데 원래의 족보로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싸워야했던 그 가나안 원주민의 핏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방인 사람 또 누구죠? 또 룻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신앙고백을 통해서 신앙고백과 할례, 이거 물론 신앙고백 이전에 신앙이 있었겠죠? 이것을 통해서 이 약속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인데 이 약속 언약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끊임없이 이렇게 고정된 핏줄 공동체가 아니라 핏줄이었다고 할지라도 언약을 파기하고 끊임없이 빠져나가서 이방인이 되고 그리고 이방인이었는데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음으로서 이쪽에 들어오면서 이게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일단 들어오면 이 사람들은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한 공동체 안에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이름자체가 처음부터 이런 언약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광야로 나올 때에 탈출할 때 출애굽기 12장 몇 절인지 잊어버렸는데 38절인가에 보면 중다한 잡족 들이 따라왔다고 나옵니다. 잡족. 이게 히브리성경에 에레불 네브라고 나오는데 네브는 많다는 것이고 에레블은 씨족입니다. 씨족. 그러면 이 잡족들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처럼 끌려와가지고 애굽에서 강제로 종살이 하던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 그 속에는 흑인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12장에서 구스여인에게 장가를 들었더니 미리암과 아론이 들고 일어나지 않습니까? 미리암과 아론은 이런 원리를 모르고 핏줄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스여인이 오늘날 에티오피아입니다. 오늘날.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 흑인하고 결혼을 했다고 그럴 때 이스라엘백성들이 상식을 깨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어느 교회에 갔는데 목사님이 계시는데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결혼을 했는데 머리 꼬불꼬불한 새카만 사모님이 오셨다고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쉽게 받아들이겠어요? 못 받아들이는 게 이상한 것입니다. 편견입니다. 편견. 그러니까 이제 유아세례 준 그 부모들은 굉장한 부담을 느껴야 됩니다. 이 아이가 얼마든지 언약에서 파기자가 될 수 있다라고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아이의 구원을 자신의 구원처럼 생각하면서 이 아이를 신앙으로 양육하려고 해야 된다 이것입니다. 그다음.
은혜계약의 약속과 유보, 모든 계약은 (목사님 이것 좀 틀어주실래요 너무 더운데) 모든 계약은 양면성을 갖는데 그것은 어떤 특권을 제공하며 동시에 의무를 부여한다. 은혜계약의 약속, 다른 약속들도 포함하고 있는 이 계약의 주요약속은 (줄치십시오) “나는 너희와 너희 후손들의 하나님이 된다.” 고 반복하신 말씀 속에 내포되어있다. 이 계약의 약속은 현세적인 축복, 칭의, 하나님의 영, (계속 줄치십시오) 끝없는 생명 속에서의 영화의 약속과 같은 약속들을 포함한다.
은혜계약의 유구, 은혜계약은 행위계약이 아니어서 공로가 될 만한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줄치십시오.) 그러나 의무를 부과시킨다. 인간은 계약의 요구에 응하는 대가로서 무엇을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한 축복을 자기에게 주실 것이라는 뜻에서 자신을 맡길 뿐이다. 더욱이 계약의 유구까지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도 주시는 것을 믿어야한다. 두 가지다. 요번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계약관계에 있는 인간들은 계약과 그 계약의 약속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서 계약의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들이 사실은 계약, 언약 이렇게 번역이 되었는데 사실은 적당한 번역의 말이 없습니다. 베리트라는 단어고 디아데케라는 말인데 희랍어로. 적당한 번역어가 없습니다. 그런데 계약이라는 말하고 언약이라는 말 사이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이렇게 은혜언약 관계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계약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서 계약의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계약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권리도 있고 거기에 상응하는 의무도 있어야 되잖습니까? 거기에 충실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개념이 전혀 없다 그럼 사실은 그런 개념의 의식 속에 없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행하려는 모든 의도도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은혜계약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 인간들은 그들 속에 있는 새 생명의 원리를 따라 이제 생명의 원리는 무엇인지 아시죠? 2주 전에도 설교했잖습니까? 생명과 성령의 법입니다. 그 원리를 따라서 새로운 순종심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 은혜계약의 특성,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의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의무. 의무. 의무를 버리는 것은 신앙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군인이 있습니다. 나라를 지킵니다. 북한에서 넘어와 가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도 지금 눈치도 못 챘다고 바가지로 욕을 먹고 있는데 걱정입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됩니다. 그런데 군인이 있다고 칩시다.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서 군인들을 먹이고 그럽니다. 국방비가 30조원 되는데 요새는 좀 더 올랐을 것입니다. 22조가 월급입니다. 8조 가지고 무기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좀 더 숫자를 줄이고 아주 강력한 군대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거야 교리반에서 역설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고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진짜 강력한 군대를 만들고 군인들이 충성스러운 것은 나라의 깨끗함에 비례합니다. 나라가 구석구석이 깨끗하고 법이 법대로 집행될 때에 군인들이 명예로워지고 자기의 위치나 이런 것들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군인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간에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나 군인이 있는데 군인이 이렇게 전쟁이 났는데 다 도망가고 전쟁도 안하고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왜 그랬냐고 그랬더니 아이고 요새 가정이 어려운 일도 있고 좀 짜증도 나고 약간 우울증도 좀 있고 그래서 내가 전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건 의무입니다. 의무. 그래서 의무에 대한 감각이 없고 의무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은혜계약의 특성, 첫째는 은혜로운 계약이다.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뭐가 은혜로운가? 그다음에 영원한 계약이다. 인간은 계약을 깨뜨리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약에 대해 참되시므로 은혜계약은 영원하고 패할 수 없는 계약이다. 특수한 계약이다. 은혜계약의 범위가 광범위하지만 그러니까 이 은혜계약 안에서 인간들은 이제 실질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게 되면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시죠? 취소되지 않으니까 그것은 취소되지 않는 대신 구원 받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 계약에 따라 살려고 하는 그런 성향을 하나님께서 넣어주시고 이 계약을 충실하게 사는 정도는 각각 다르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 계약을 떠나서는 살수 없고 이 의무를 떠나서는 살수 없게끔 하나님이 묶으시는 것입니다.
특수한 계약이다, 은혜계약의 범위가 광범위하지만 특정한 인간만을 포함하므로 특수한 계약이다. 특수한 계약이라기보다는 개별적계약이다 이렇게 번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약시대의 계약은 그 계약이 구약에서처럼 유대인에게만 제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다 미치게 된다는 의미에서 볼 때에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일한 계약이다, 은혜계약은 단일성이 특징이므로 시대마다 계약이 주었잖습니까? 아브라함 그다음 이삭과 맺은 언약, 야곱과 맺은 언약, 이렇게 죽 나오지만 그렇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고 발전 하는 것입니다.
조건적인 동시에 무조건 적이다.(줄치십시오) 은혜계약은 그리스도공로에 의존하므로 조건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계약이 가져다주는 생활의 기쁨은 신앙의 훈련에 의존하므로 조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은혜계약은 인간의 어떤 공로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무조건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유언적 계약이다. 은혜계약은 하나님 편에서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처분이므로 유언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언은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 하나니 에서 나온 것이므로 유언적 계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말은 다음 몇 가지 사실을 뜻한다. 은혜 계약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협정이다. 은혜계약의 신약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소개가 아니라 도입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요구하시는 바를 계약 속에서 주신다.
계약의 중보자, (줄치십시오) 은혜계약은 중보자가 있다는 면에서 행위계약과는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보자로 나타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하도로 중재하신다는 면과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셨다는 점에서 중보자이시다. 보증인으로서 죄를 담당하시고 형벌 받으시고 완성하심으로 평화를 회복하신 것이다.
은혜계약 안에 있는 회원, a.계약 안에 있는 성인, 성인들은 믿음으로만 순수한 합법적 협정으로서의 계약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은혜계약에 들어가면 생명의 교통의 계약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성인들은 믿고 구원받음으로서 은혜계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불신자였던 성인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믿기 전까지는 그는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좀 다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은혜계약 안에 들어가니까 은혜계약 안에 들어가는 것과 그다음에 구원받은 것이 동시적입니다. 그러니까 즉시 새 생명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2번 계약 안에 있는 신자의 자녀들, 그러나 믿는 자녀들을 믿음 안에 있는 합법적(줄치십시오) 협정으로서의 계약은 들어가지만 곧 생명의 교통의 계약에 들어간다는 것은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꼭 그렇게 될 것 이라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이게 아까 내가 설명한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유아세례 받은 아이들도 회심해야 됩니다. 회심. 회심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줄치십시오.) 계약생활이 그들의 생애 속에 실현 될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우리는 자녀들이 신앙을 반역하지 않는 한 새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전제해야 될 것이다. 그들이 자라면 자발적으로 진실한 신앙을 고백하므로 계약적 책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실패할 때는 자신이 계약의 파괴자가 된다. 그러니까 계약 안에 있는 신자의 자녀들은 계약을 맺은 시점과 새 생명을 누리는 시점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계약 안에 있는 비중생자. 이것은 b번의 결과입니다. 비중생자도 일시적으로 순수한 합법적 관계를 맺는 계약 속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계약의 자녀들로 인정되며 복종하며 직무를 분담한다. 세례의 증표를 받고 평범한 축복을 기뻐하며 성령의 특별한 역사에 까지 참여하게 된다. 이건 특별한 은사나 체험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에 이에 수반되는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계약의 파괴자로 인정될 것이다.
계약의 시대적 경륜, 계약의 최초계시. 계약의 첫 번째 계시는 3장 15절 그게 뭐죠? 여자의 아들이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 발뒤꿈치를 물으리라고 한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 복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형식적인 확립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노아와의 언약, 모든 혈육 있는 자와의 계약이므로 일반적인 성질이 있다. 이것은 (동그라미 치세요.) 자연적 축복이므로 자연의 계약(동그라미)혹은 일반은총의 계약이라고 불리워진다. 그러나 은혜계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계약은 은혜의 산물이요 실현적이고 현세적인 축복을 보증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의 계약, 노아와의 계약 그러면 일반은총의 언약,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아브라함과의 계약 이것은 형식적인 확립을 나타나는 것이다. 이 계약은 구약의 개별적통치의 시작인데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국한되어있다. 신앙은 현저하게 계약의 필연적 요구로 나타나며 할례는 계약의 증표가 된다.
시내산에서의 계약, 시내산에서의 계약은 본질적으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과 동일하지만 형식면에서는 달리 이스라엘 전체 민족과 맺은 계약이므로 국가적인 계약이었다. 이 계약은 율법의 수행을 강력히 강조하지만 행위 계약이 회복된 것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죄의식을 증가시켰으며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 몽학선생이 뭐냐 하면 여러분 옛날 영화에서 보면 부잣집 귀족집 자녀가 학교 갈 때 마부는 따로 있고 그 옆에 나이 많은 종이 따라갑니다. 그리고 얘를 타이릅니다. 학부형처럼. “도련님 오늘은 학교 가셔서 장난치시면 안 됩니다. 끝나면 바로 나오셔서 딴 데로 가면 안 됩니다. 정말 그러시면 안 됩니다. 조심 하셔요.” 그러면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러고 가지 않습니까? 그때 그 아버지같이 생긴 사람이 몽학선생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신분은 종이지만 하는 일은 이 아이의 선생님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가 성인이 되면 그런 선생님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런 역할을 했다 그겁니다.
신약의 새 언약, 신약에 계시된 새 언약은 본질적으로 구약의 계약과 동일하다. 신약의 계약은 특정한 민족이나 사람의 장벽을 깨뜨리고 그 축복이 보든 백성에게 확장된다는 의미에서 우주적이다. 그 계약의 축복은 보다 충만하며 영적이며 구약의 성례를 세례와 성찬이 대신하게 되었다.
기독론, 14과는 매우 쉽습니다. 그리스도 이것도 어떻게 되느냐 하면 14과 그다음에 15과 까지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그다음에 16과 그다음에 17과 이 두과는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존함과 본질, 예수라는 말인데 히브리말로 여호수아 예수아 호세아 모두 다 같은 의미입니다. ‘구원하다’라는 히브리어 야샤에서 나옵니다. 이게 어디 나오냐 하면 호산나 그러고 나오죠? 호산나. 그게 어느 교회가 호산나라고 이름을 진 교회들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호산나가 무슨 뜻이냐 하면 호시아 나입니다. 호시아는 구원하소서고 나는 제발 그런
뜻입니다. 제발 구원하소서. 그게 호산나입니다. 뜻을 그렇게 놓고 하니까 좀 이상하죠? 그렇죠? 그래서 구원하다라는 말에서 파생한 것으로 구주되신 예수를 가리킵니다. 아이를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로 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그 이름을 지정해 주시죠? 그죠? 그 예수가 바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원래 크리오라는 희랍어 동사에서 나옵니다. 크리오. 크리오는 뭐냐 하면 ‘기름을 붓다’ 이 뜻입니다. 그리고 기름을 붓다의 수동태 분사가 크리스토스입니다. 남성분사가. 그래서 기름부음 받은 자. 그런 뜻입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 받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선지자, 제사장, 왕, 기름부음을 받으므로 각자의 직무를 위해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셔서 그 일을 행하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렇게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스도는 희랍어이고 원래 크리스토스입니다. 그리고 메시야는 그 말에 똑같은 뜻인 히브리어입니다. 마샤 기름 붓다라는 말에 피동남성분사입니다. 그게 메시야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똑 같은 뜻입니다.
모든 인간은 정죄아래 있으므로, 구속이 필요하다. 아이들도 제외될 수 없다.
13과. 원시 상태, 죄 아래, 그 다음에 은혜계약 아래,
이 교리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구속계약과 은혜 계약을 구별한다. 밀접한 관계이므로 한가지로 생각할 수 있으니, 구속계약은 은혜계약의 영원한 기초가 된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 우리를 구원하기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시작이 되지 않습니까? 근데 그 위대한 계약이 시작이 되는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그 위대한 계획은, 제일 먼저 삼위일체 안에서 먼저 시작 되고, 그 영원한 삼위일체 안에서 먼저 시작이 되고, 그것이 이제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전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행이 되는 겁니다. 그거를 가리켜서, 이제 그 삼위일체 안에서 이루어 진 것을 구속의 계약이라고 부르고, 그 다음에 구체적으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들과 관계 속에서 펼쳐지게 된 것을 은혜계약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구속계약은 은혜계약의 기초가 되는 것이 마치, 작정과 창조가 작정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서 창조가 이루어 진거나 마찬가지 인 것 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신적 작정 배웠지 않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의 의지, 혹은 그 뜻, 이거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구속의 계약,
스갸랴 6장 13절에 나오는 명칭인데, 평화의 의논이라고 나옵니다. 더 컨설 어브 피이스(the consult of peace) 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삼위를 대표하는 성부와 선택받은 자의 대표이신 성자 사이의 언약입니다.
성경적 근거,
아참! 여러분 삼위일체 다 다운 받으셨습니까? 다 받을 줄 아십니까? 이제 다 지웠습니까? 오늘까지랍니다. 못 받으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아직 다운 못 받으신 분, 오늘 집에 가시면 빨리 다운 받으십시오. 오늘 밤에 없어집니다. 꼭 받으십시오.
구속의 계획이 작정 속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시기 전에 맺으신 계약에 대해 말씀 하셨고, 성부로부터 받은 부탁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한 계약의 머리가 되십니다. 시편에 보면 계약의 당사자들이 언급되어 있고, 약속이 지시되어 있습니다. 메시야는 죄의 희생 제물이 됨으로서, 하나님 뜻을 행하려는 준비를 나타내신다.
구속계약에 있어서 성자, 줄 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계약의 있어서 머리이실 뿐 아니라, 보증이 거기 동그라미 치십시오. 되신다. 보증인은 타인의 법적 책임을 지는 인물이다. 죄인을 대신해 형벌을 짊어지셨고, 백성을 위한 법적 요구에 응하셨다. 그리스도는 생명주는 마지막 아담이 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에 있어서 이 계약은 행위 계약이었으나,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이 행위계약은 이제 말하자 며는 인간이 타락하므로 서는 이 행위 계약을 실행할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게 된 것입니다. 죄가 없어야지 이 계약을 지킬 수 있는 것인데 불가능한 겁니다. 근데 예수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이 계약을 따라서, 그래서 우리 행위 계약에 따르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 처해질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계약의 조건을 따라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겁니다. 율법에 의해서 판단이 된 겁니다. 이 계약의 효능은 줄 치십시오.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시험에 꼭 나옵니다.’ 이 계약의 효능은 선택받은 자에게 제한되어 있다. 그들은 다만 구속을 받으며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해 이룩하신 영광을 상속받을 뿐이다.
구속계약의 요구와 약속
구속계약의 요구
성자자신은 죄가 없으시지만, 인간의 나약성을 책임지도록 성부께서 요구 하셨다. 즉 성자는 선택받은 자들에 의해 형벌 받으시고, 계속 줄치십시오. 영생을 제공하기 위해 법아래 처하셔야했다.
3)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당신의 공적을 백성들에게 적용 하사,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생활을 유지하게 하셔야 했다.
구속계약의 악속
성부께서는 성자를 위해, 계속 줄치십시오. 1) 몸을 준비하시고, 2)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시며, 3) 그의 사역을 지원하시며, 4) 사망에서 건져내어 보좌 우편에 앉히시며, 5) 성령을 보낼 수 있게 하시며, 6) 택한 자를 불러 보호하시고, 7)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후사를 허락하실 것이라고 성자에게 약속하셨다.
그래서 이제 이 구속계약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만 이루어 진 것이라고 보지 않고, 성령도 이 계약에 참여했다는 것이 통상적인 견해입니다. 여기서는 빠져있지만,
은혜의 계약
하나님께서는 구속계약에 근거해서, 은혜의 계약을 확립하셨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면, 예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시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성령은 단순히 하나님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위격으로서 이 구속계약에 동참하셨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계약에 근거해서, 은혜 계약을 확립하셨다.
1) 계약의 당사자 하나님께서는 계약에 있어서, 줄 치십시오. 1) 당사자이다. 이 당사자와의 관계를 결정하시는데 이 당사자가 누구인가가 결정하기 쉽지 않다. 줄 치십시오 개혁파의 통상적 견해는 이 당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죄인들이라고 한다. 이 계약이 두 가지 면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목적 자체로서의 계약.
목적이 수단으로서의 계약. 상호 친교, 생명의 교통의 언약, 계약의 목적 그 자체는 역사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역사로 실현되는 것이다. 계약이란 계속 줄 치십시오. 어떤 특권이 영적 목적을 위해 증진 되어지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약속은 산 믿음에 의해 받아드려지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약속되어진 축복은 약속된 축복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줄 치십시오. 이 계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택받은 죄인들과의 은혜로운 계약으로서, 거기 꼭 시험에 나옵니다. 꼬불꼬불하게 줄 치십시오. 이 계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택받은 죄인들과의 은혜로운 계약으로서, 하나님이 택함 받은 죄인에게 구원의 축복함께 자신을 주시고,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기로 체결한 은혜로운 협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은혜로운 협정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그것 자체를 체결해서 인간이 손해 볼 것이 없다. 그런 뜻입니다.
(예화)“자, 우리 계약합시다. 막 이렇게 방황하는데, 왜 그래요? 아유 집이 없어요. 그래요? 우리 집에서 한 5년 사세요. 빈 집이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또 몇 달 있다가 비워 달라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아, 그래요? 아니 그냥 5년 동안 부담스러운 계약입니까? 안 달라 그럴게요. 그러면은 잠깐만요. 아이 우리 돈 필요 없어요. 그냥 노는 집이니까 편안하게 5년 쓰세요. 그런데, 그래도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미덥지 않으세요? 계약합시다.” 이게 부담스러운 계약입니까? 다음 집을 5년 동안 빌려줌. 무료. 미리 나가라 그러면 모든 법적 책임을 지겠음. 주인 백. 근데 그게 부담입니까? 부담 아닙니다. 그런 게 은혜로운 협정입니다. 감지덕지입니다. 은혜로운 협정
6)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의 계약
이것은 영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법적 협정을 말한다. 성경은 이스마엘, 에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A번은 하나님이 이런 언약 안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생명과 사랑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이것들을 계약하셔서 실제로 시간 속에서 실현되게 하시는 겁니다. 계약에 이런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계약을 체결하고 이 안에 들어오면 실제로 이런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또 하나의 측면이 있는데 뭐냐 하면, 어떤 목적으로 데려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격도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은혜 계약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겠습니까? 헷갈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계약은 계약이 체결된 것은 훨씬 넓습니다. 그 다음에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 계약에 충실하지 아니하므로 구원 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만약에 은혜계약을 체결한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그러면, 모태신앙으로서 모태신앙이나 유아 세례 받은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게 은혜계약을 체결하는 겁니다. 그러면 얼마나 못된 놈들 많습니다.
(예화) 네 살 때에 이미 교회에 다녔고 여섯 살 때에 어린이 성가대에서 열심히 봉사했고, 청소년까지 교회에 다니다가 그 다음에 교회를 뛰쳐나왔고, 그 다음에 유대인 처녀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는데, 그 자매가 공장에 다니는 직공이었습니다, 그 공장 주인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성폭행을 했습니다. 유대인에 대해서 이를 갈기 시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역사의 어떤 커다란 격변은, 이렇게 아주 사소한 개인적인 체험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그리고 유대인에 대해서 증오하면서 600만 명을 죽이게 되는 살육을 감행하는 겁니다. 그게 전부 다는 아니지만, 그게 씨앗이 되는 겁니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러니까 얼마든지 교회 안에 가짜가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녀들, 오늘 책이 한권 나왔는데 내일 소개할 텐데 정말 예쁜 책으로 나왔습니다. 책 이름이 제목이 뭐냐 하면 ‘아가야 엄마가 기도해 줄께’ 그게 이제 아이들의 회심을 위해서 출판한 게 아니고, 교회에서 그냥 찍었습니다. 주일 학교에서 심방 갈 때에 한권씩 가지고 가서 줄 꺼라 그러던데 되게 부담스러울 것 같습니다. 아가야 엄마가 기도해 줄께! 근데 그 책 디자인을 딱 보면서 내가 이거 틀렸다 그랬습니다. 아기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게 어떻게 엄마 책임만 됩니까? 그건 슬쩍 가부장적으로 미뤄두는 것이 아닙니까? 책을 딱 뒤지면 아빠 두! 이렇게 나옵니다. 내 아이디어입니다. 제가 완벽하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성 평등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거 여러분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페미니스트들이 보면 우습겠지만, 그렇지만 교인이 삼천 명 모이는 교회에서 권사도 아니고 젊은 여 집사가, 그것도 2부와 3부 시간에 대표기도 하는 교회가 없을 겁니다. 그것도 서리 집사가! 장로님들이 근엄한 목소리로 일 년 52주 다 차지합니다. 근데 젊은 여성들이 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성들이 제일 기도를 잘합니다. 너무 감동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왜 자녀 회심하는 게 엄마 책임입니까? 그것도 선악과 먼저 따 먹어서 책임져 주는 겁니까? 먹어보지도 못했는데.. 어쨌든 정말 재미있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책이 나오니까 위안이 됩니다. 그런데 마음에 안 드는 게 ‘아가야 엄마가 기도해 줄게!’ 그건 큰 글씨고, 뒤를 딱 넘기니까 내가 똑같은 글씨로 하라고 그랬는데, 뒤를 넘기니까 작은 글씨로 ‘아빠 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여성이 편집했는데도 그렇습니다. 참!
그래서 인제 잘 보십시오. 이스마엘, 에서, 엘리의 악한 아들, 이런 사람들까지 은혜계약 안에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은혜계약 안에 있었는데, 스스로 적극적으로 이 계약을 파기하고 언약 바깥으로 튕겨져 나간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빽성들의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입니다. 자,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그 다음에 또 누구입니까? 네? 그렇지! 등등 그리고 많이 태어나지만 계보를 이어가면 그리고 누가 나옵니까? 또 누구입니까? 여기서 누가 나옵니까? 요셉이 나옵니다. 어쨌든 이렇게 죽 나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 사람들이 다 언약의 집안에 언약에 참여한 겁니다. 참여하는데 그런데 요 사람들이 핏줄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렇게 족장으로서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맏아들이기 때문에? 요셉은 맏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거는 무얼 의미하느냐?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은혜언약 안에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은혜언약 안에서 그들이 그 하나님이 이 은혜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시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은혜계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총을 약속하시는데, 믿음으로서 순종하면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죄를 짓고 여기서 튕겨져 나가는 겁니다. 이때 언약의 파기가 이루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빠져 나가게 되는 겁니다. 언약 안에 있다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들어옵니다. 언약 속으로, 이게 뭐냐 하면 육신의 혈통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가나안 종족의 영웅가운데 한 사람인 갈렙 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유다지파 사람인데 원래 족보를 거슬러 올라 가며는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싸워야 했던 그 가나안의 원주민 핏줄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방인 사람 누구입니까? 또 룻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 이고,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됐냐 하면, 신앙고백을 통해서 신앙고백과 할례, 물론 신앙고백이전에 신앙이 있었겠습니다. 이거를 통해서 약속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인데, 언약 속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근데 이것은 끝임 없이 고정된 핏줄 공동체가 아니라, 핏줄이었다고 할지라도 언약을 파기하고 끊임없이 빠져나가 이방인이 되고, 그리고 이방인이었는데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음으로서 ,이쪽으로 들어오면서 영적이스라엘이 되고,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일단 들어오면 이 사람들은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공동체 안의 이스라엘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런 언약 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광야로 나올 때에 탈출할 때에 출애급기 12장 몇 절인지는 잊어버렸는데, 18절인가에 보면, 중다한 접족들이 따라 왔다고 나옵니다. 잡족, 이게 히브리 성경에 에레브레브 라고 나오는데 레브는 많다는 거고, 에레브는 뭐냐 하면 씨족입니다. 씨족, 그러면 이 잡족들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처럼 끌려와 가지고 애급에서 강제로 종살이 하던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 그 속에는 흑인도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민수기 12장에서 구스여인에게 장가를 들었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리암과 아론이 들고 일어납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이러한 원리를 모르고 핏줄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에 집착했던 겁니다. 그 구스 여인이 오늘날 에티오피아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흑인하고 결혼을 했다고 그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식을 깨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어느 교회에 갔는데 목사님이 아직 결혼을 안 하셨는데 아니 목사님이 계시는데, 사모님은 돌아가시고 결혼을 했는데, 머리 꼬불꼬불한 새까만 사모님이 오셨다고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아마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못 받아들이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편견입니다. 편견! 그러니까 유아세례 준 부모들은 굉장한 부담을 느껴야 됩니다, 이 아이가 언약에서 파괴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아이의 구원을 자신의 구원처럼 생각하면서 이 아이를 신앙으로 양육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은혜계약의 약속과 요구
모든 계약은 양면성을 갖는데, 그것은 어떤 특권을 제공하며 동시에 의무를 부가한다.
은혜계약의 약속
다른 약속들도 포함하고 있는 이 계약의 중요한 약속은 줄 치십시오. 나는 너희와 너희 후손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고 반복하신 말씀 속에 내포되어 있다. 이 계약의 약속은 현세적인 축복, 칭의, 하나님의 영, 계속 줄 치십시오, 끝없는 생명 속에서의 영화의 약속과 같은 약속들을 포함한다.
은혜계약의 요구
은혜계약은 행위계약이 아니어서 공로가 될 만한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줄 치십시오. 그러나 의무를 부가 시킨다. 인간은 계약의 요구에 응하는 대가로서 무엇을 얻는 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자신에게 주신다는 뜻에서 자신을 맡길 뿐이다. 더욱이 계약까지도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요건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계약관계에 있는 인간들은 계약과 그 계약 관계에 있는 계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서 계약의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들은 사실은 계약, 언약 이렇게 번역이 되는데, 사실 적당한 번역의 말이 없습니다. 베리트라는 단어고, 비야게트라는 단어인데 희랍어로 적당한 번역어가 없습니다. 근데 계약이라는 말과 언약이라는 말 사이정도라는 것으로 알면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렇게 언약관계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계약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서, 계약의 생활을 해야 되는 겁니다. 계약이라고 하는 거는 무슨 뜻 입니까? 권리도 있고, 거기에 상응하는 의무도 있어야 되는 겁니다. 거기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개념이 전혀 없다. 그러면 사실은 그런 개념이 의식 속에 없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행하려고 하는 모든 의지도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은혜계약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은혜계약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인간들은 그들 속에 있는 새 생명의 원리를 따라 이 새 생명의 원리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2주 전에도 설교했습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입니다. 그 원리를 따라서 새로운 순종심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 은혜계약의 특성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의무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의무, 의무를 버리는 것은 신앙을 버리는 겁니다. 자, 예를 들자면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군인이 있습니다. 나라를 지킵니다. 요새 군인이 북한에서 넘어와 가지고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눈치도 못 챘다고 바가지로 욕을 먹고 있는데, 걱정입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근데 군인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서 군인들을 먹이고 그럽니다. 이십, 국방비가 30조원이 되는데 요새는 좀 더 올랐다고 합니다. 30조원정도가 되는데 22조가 월급입니다. 8조가지고 무기를 사는 겁니다. 이게 사실은 좀 더 숫자를 줄이고, 아주 강력한 군대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 어쨌든 그건 교리 반에서 역설할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그리고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진짜 강력한 군대를 만들고 군인들이 충성스러운 것은 나라의 깨끗함에 비례합니다. 나라가 구석구석이 깨끗하고 법이 법대로 집행될 때에 군인들이 명예로워지고 자기의 위치나 그런 것들이 분명해 지는 겁니다. 그런 군인 정신이 필요한 겁니다. 근데 어떻든 간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랬지, 아! 군인인데 전쟁이 났는데 다 도망가고 전쟁도 안하고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왜 그랬나! 그랬더니, 요즘 가정에 어려운 일도 있고, 짜증도 나고 약간 우울증도 있고, 그래서 전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의무입니다. 의무! 그래서 의무에 대한 감각이 없고, 의무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은혜계약의 특성
첫째는 은혜로운 계약이다 .아까 말씀 드린 거 있지 않습니까? 뭐가 은혜로운가! 그 다음에 영원한 계약이다. 인간은 계약을 깨뜨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계약에 참 되시므로 은혜계약은 영원하고 페할 수 없는 계약이다.
특수한 계약이다. 은혜계약의 범위가 광범위하지만. 이 은혜계약 안에서 인간들은 실질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겁니다. 구원 받게 되며 는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십니까? 취소되지 않으니까 취소되지 않는 대신, 구원받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 계약을 따라 살려하는 그런 성향을 하나님께서 넣어주시고, 이 계약을 충실하게 사는 정도는 각각 다르다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 계약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이 의무를 떠나서는 살수 없게 하나님은 묶으시는 겁니다.
특수한 계약이다. 은혜계약의 범위가 광범위하지만, 특정한 인간을 포함하므로 특수한 계약이다. 특수한 계약이라고 그랬는데 특수한 계약이라기보다는 개별적 계약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약시대에는 그 계약이 구약시대처럼 유대인에게만 제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다 미치게 된다고 볼 때 보편적인 계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일한 계약이다. 은혜계약은 단일성이 특징이므로 시대마다 계약이 주어집니다.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과 맺은 언약 야곱과 맺은 언약, 이렇게 죽 나오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조건적인 동시에 무조건적이다. 줄 치십시오. 은혜계약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하므로 조건적이라 할 수 있으며, 계약이 가져다주는 생활의 기쁨은 신앙의 훈련에 의존하므로 조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은혜계약은 인간의 어떤 공로도 의지 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무조건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유언 적 계약이다. 은혜계약은 하나님 편에서 자유롭고 주관적인 처분이므로 유언 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언은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 하나니, 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 계약은 유언 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말은 다음 몇 가지 사실을 뜻한다. 은혜계약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협정이다. 은혜 계약의 신학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소개가 아니라 도입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요구하시는 바를 계약 속에서 주신다.
계약의 중보자. 즐 치십시오. 은혜계약에는 중보자가 있다는 면에서 행위계약과는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보자로 나타나셨다. 또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하도록 중재하신다는 면과,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셨다는 점에서 중보자이시다. 보증인으로서 죄를 담당하시고, 형벌을 받으시고, 완성하시므로 평화를 회복하신 것이다.
은혜계약 안에 있는 회원,
(a) 계약 안에 있는 성인,
성인들은 믿음으로만 순수한 합법적 협정으로서만 계약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은혜계약에 들어가면 생명의 교통의 계약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성인들은 믿고 구원받음으로서 은혜계약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불신자였던 성인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믿기 전까지는 그는 은혜계약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그는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면 좀 다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은혜계약 안에 들어가니까, 은혜계약 안에 들어가는 것과 구원받는 것이 동시적입니다. 그러니까 즉시 새 생명의 생활이 시작되는 겁니다.
(b) 계약 안에 있는 신자의 자녀들
그러나 믿는 자녀들은 믿음에 의한 합법적 줄 치십시오. 협정으로서의 계약은 들어가지만 곧 생명의 교통의 계약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꼭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이게 아까 내가 설명 한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니까 유아세례 받은 아이들도 회심해야 됩니다. 회심! 회심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줄 치십시오. 계약생활이 그들의 생애 속에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우리는 자녀들이 신앙을 반역하지 않는 한, 새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전제해야 될 것이다. 그들이 자라면 자발적으로 진실한 신앙을 고백하므로 계약적 책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실패하면 자신이 이 계약을 파괴자가 된다. 그러니까 계약 안에 있는 신자의 자녀들은 계약을 맺은 시점과 새 생명을 누리는 시점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그걸 강조하는 것입니다.
계약 안에 있는 비중생자, 이거는 b번의 결과입니다. 비중생자도 일시적으로 순수한 합법적 계약을 맺는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계약의 자녀들로 인정되며, 복종하며 직무를 분담한다. 세례의 증표를 받고, 평범한 축복을 기뻐하며, 성령의 특별한 역사에까지 참여하게 된다. 이거는 특별한 은사나 은혜의 체험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에 수반되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계약의 파괴자로 인정될 것이다.
계약의 시대적 경륜
계약의 최초 계시, 계약의 첫 번째 계시는 3장15절 그게 뭡니까? 여자의 아들이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 발뒤꿈치를 물으리라고 한 그걸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것이 원 복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형식적인 확립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노아와의 언약
모든 효력 있는 자와의 계약이므로 일반적인 성질이 있다. 이것은 동그라미 치십시오. 자연적 축복이므로, 자연의 계약 동그라미 혹은 일반은총의 계약이라고 불리어진다. 그러나 은혜계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계약은 은혜의 선물이며 실현을 위해 필요한 자연적이고 현세적인 축복을 보증하는 것이다. 노아와의 언약 하면 일반은총의 계약이라고 기억해야 됩니다.
아브라함과의 계약
이것은 형식적인 확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계약은 구약의 개별적 통치의 시작인데,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국한되어 있다. 신앙은 현저하게 계약의 필연적 요구로서 요구로 나타나며 할례가 계약의 증표가 된다.
시내 산에서의 계약
시내 산에서의 계약은 본질적으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과 동일하지만, 형식면에서는 달리 이스라엘 전체민족과 맺은 계약이므로, 국가적인 계약이었다. 이 계약은 율법의 수행을 강력히 강조하지만, 행위 계약이 회복된 것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죄의식을 증가시켰으며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 몽학선생이 뭐냐 하면요, 여러분 옛날 영화에서 보면 부잣집, 귀족 집 자녀가 학교 갈 때 마부는 따로 있고, 그 옆에 나이 많은 종이 따라 갑니다. 타이릅니다. 학부형처럼 ‘도련님, 오늘 학교 가서 장난치시면 안 됩니다. 끝나면 바로 나오셔야지 딴 데로 가시면 안 됩니다. 정말 그러시면 안 됩니다. 조심하세요.’ 그러면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러고 가지 않습니까? 그 아버지 같이 생긴 사람이 몽학 선생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신분은 종이지만 하는 일은, 이 아이의 선생님 같은 역할을 하는 겁니다. 언제나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가 성인이 되면 그럼 선생님은 필요가 없는 겁니다. 율법이 그런 역할을 했다 이겁니다.
신약의 새 언약
신약에 계시된 새 언약은 본질적으로 구약의 계약과 동일하다. 신약의 계약은 특정한 민족이나 사람의 장벽을 깨뜨리고, 그 축복이 모든 백성에게 확정된다는 점에서 우주적이다. 계약의 특징은 보다 충만하고 영적이며 구약의 성례를 세례와 성찬이 대신하게 되었다.
기독론
14과는 매우 쉽습니다. 그리스도의, 요것도 어떻게 되냐 하면 14과, 15과 까지는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그 다음에 16과, 그 다음에 17과 이 두 과는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존함과 본질, 예수라는 말인데 히브리말로 여호수아, 예수아, 호세아 모두 다 같은 의미입니다. 구원하다. 라는 히브리어의 야샤 에서 나옵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호산나 그러고 나옵니다. 그게 어느 교회가 호산나라고 이름을 지은 교회가 많더라고, 근데 호산나가 무슨 뜻이냐 하면, ‘호시아나 ’입니다. ‘호시아’ 는 ‘구원 하소서’ 이고, ‘나’ 는 ‘제발’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구원 하소서! 가 호산나입니다. 뜻을 그렇게 놓고 보니 좀 이상합니다. 그래서 구원 하다. 라는 말에서 파생한 것으로, 구주되시는 예수를 가리킵니다. 아이를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로 하라, 그러고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그 이름을 지정해 주십니다. 그 예수가 바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원래 크리오라는 희랍어 동사에서 나옵니다. ‘크리오’는 뭐냐 하면 ‘기름을 붓다’ 이런 뜻입니다. 기름을 붓다의 수동태 동사가 ‘크리스투스’ 입니다. 그래서 ‘기름부음 받은 자’ 이런 뜻입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 받는 자는 누구인가 하면 선지자, 제사장, 왕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각자의 직무를 위해 구별되었을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기름부음 받은 자 그런 뜻입니다. 메시야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스도는 희랍어고, 원래 크리스투스 입니다. 그리고 메시야는 그 말의 똑같은 뜻인 히브리어입니다. ‘마사’ 기름붓다란 말에 피동남성분사입니다. 그게 메시야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똑같은 뜻입니다.
인자
그리스도께 적용된 이 명칭은 다니엘에 근거한 것이므로, 예수님이 자신에게 적용하신 통상적 명칭이며, 다른 사람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인자여, 오셨습니까? 이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인자란 명칭은 예수님의 인간성의 표현이지만, 역사적 기원을 보면 그것은 초인간적 특성을 지정해 주며, 그리스도께서 위엄과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장차 오심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자,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며는 요,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 인자에 대해서 상세하게 나옵니다. 왜 예수님이, 원래 예수님이 정확하게 말하면 인자가 아니라 무슨 자 입니까? 신자이어야지 마땅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리스도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자 이어야지 마땅하다 이 말입니다. 왜 신자라고 안 그러셨다 그랬습니까? 숙제를 잘 하나봅니다. 자, 일어나서, 이리 나와서, “ 유대인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로마의 치하 안에서 해방시켜 주는 그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오해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더 선 오브 맨 이라고 해서 더 라는 말을 붙여서 구약에 나타났던 인자를 뜻 한다.” 박수! 이 정도면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반하는 한 12주 13주 동안에 매일 살아가기를, 운전면허 보는 전날처럼 살아가시라고 내가 이야기 했습니다. 꾸준히 공부 하십시오. 그러니까 지금 공부를 나이 들어서 지금처럼 많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일평생 언제 또 오겠습니까? 열린 교회 에 있으면 공부할 기회가 많이 있겠지만, 이 뜻입니다.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자들을 포함해서 어떤 걸 가지고 있냐 하면, 지금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뭐냐 하면 이스라엘 나라의 영광의 회복이 이 세상에서 실현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거는 강력한 국가의 형태로 실현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필요합니까?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 메시야가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정치적인 지도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왜 배신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 아십니까?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이 그런 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백성들이 그렇게 찬성했겠느냐 이 말입니다. 실망 때문입니다. 실망! 무슨 실망이냐 하면, 그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로마를 무찔러 주시기를 바랐던 겁니다. 그런데 그거는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이미 구약의 껍질을 깨고,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이제 영적 이스라엘로 화하는 그 나라의 임금으로 오신 분 인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러면 그건 사실이 맞는데,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거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사상을 끼워 맞추면, 예수님을 정치적인 혁명가로 둔갑시키려고 하는 소망을 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인자라 그러셨습니다. 인자라 그러셨는데 그냥 인자라 그러시면 모두 다 인자입니다. 여러분도 다 인자입니다. 여러분 사용하셔도 됩니다. “ 너 왜 이제 오니? 인자가 교리 반을 하다 왔나이다.” 인자가 묻노니 화장실이 어디 있느뇨? 내일 아침에 간사들한테 물어보십시오.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기다 더 를 붙이신 겁니다. 인자의 전통은 뭐냐 하면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르 나샤르라고 그래서 초자연적인 인자를 가리키는 겁니다. 알아듣는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어렴풋이 알아듣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실 자에게 나타내시고, 감출 자에게 감추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Sun of God
그리스도는 몇 가지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신다.
1) 삼위 중 2위이시며, 2)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3)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이시며, 4) 그의 탄생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 Load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선생님이라는 말을 존칭으로 사용하듯이, 이 명칭을 예수님에게 사용했다. 이것도 아마 지난 설교시간에 한 것 같습니다. 큐리어스라고 하는 말이 일반적으로는, 그냥 당시에 쓰이던 큐리어스라는 말의 희랍어가 아도나이입니다. 자기보다 지체가 높은 사람에게 존경하는 의미로 늘 사용하던 말이었고, 심지어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근데 이 주 라는 이름이 아도나이인데, 이게 사실은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여호와의 이름과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깨레깨띠브를 설명하면서, 사자신명에 대해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 왜 그럽니까? 이게 하나님의 원래 이름인데, 이게 자음이고 여기에 모음이 붙어야 합니다. 근데 이거를 사람들이 너무 거룩해서, 감히 이거를 발음하는 모음을 여기다 못 붙인 겁니다. 그래서 이걸 감히 못 부르는 겁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황제의 원래 이름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모두들 폐하, 폐하! 그러지 김갑동, 갑동씨! 그러는 사람 있습니까? 구족을 멸하지, 어디에서 감히, 우리나라에서는 MB, 뭐 DB 하고 막 부르는데, 자 이거 보십시오. 이렇게 하니까 이거는 부르지 마라, 어떻게 하냐 하면 이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도나이입니다. 쓰긴 이렇게 썼지만 너희들이 어떻게 감히 이 이름을 부르냐! 그러면서 요게 모음입니다. 요게, 그러니까 이거를 여기다 붙여 놓은 겁니다. 요거는 왜 이렇게 됐냐하면, 요거는 후음이라고 해서 목구멍 속에서 코하고 통하는 이 속에서 나오는 음이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이 요렇게 발음 할 수가 없고 이렇게 발음하는 겁니다. 똑같이 아주 짧은 아입니다. 요거는 짧은 아 이고 요거는 좀 긴 아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사람들이 이 네 개가 이름이 나오면 감히 이거는 못 부르고 요거는 보면서, 이 b를 연상하면서 아도나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이거를 이게 아니라 이거입니다. 이거를 다 아입니다. 이거를 해가지고 붙여버려서 쓴 게 바로 이거입니다. 영어의 이거입니다. 저거 봐! 이렇게 될 리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도나이의 뜻이 결국은 신약성경에서 큐리오스라고 번역이 되는데, 큐리오스라고 번역이 되는데, 이게 결국은 뭐냐 하면 구약에서 여호와를 가리키는 거라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여호와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사람들이 주여, 주여 하는 것과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의 시대가 와서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신학적 차이가 있는 겁니다. 여호와라고 부르는 겁니다. 하나님이라고 , 그 다음 이 주 라는 명칭이 가지고 있는 것은 지배권입니다. 주인이.
이 명칭이 줄치십시오.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부활사건 동그라미부터 이다. 시험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주란 명칭은 교회의 주인이며. 만물의 통치자가 되심을 의미하며, 하나님께 대한 명칭으로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본성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자, 예수그리스도는 두 가지 성품을 지니고 계십니다. 어떻게?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신 겁니다. 그럼 인제 예수님이 설명을 먼저하고, 책의 내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 두 본성이 뭐냐 하면 신의 본성과 인간의 인성을 가집니다. 자,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으니까, 죽으시기 위해서는 참 사람이셔야 되었습니다.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인성을 갖지 않으면 참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깨비든지 뭐 판타지든지 뭐 그렇게 될 거 아닙니까? 참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 다음에 참 사람이 되셔야 했고, 모든 인간은 죄가 없을 수가 없기 때문에, 죄가 없으시기 위해서는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상태를 가지고 얘기 하자면, 인간으로서의 상태로 말하자면, 이 예수님은 범죄 하기 전 아담과 같은 상태였다고 보면 됩니다. 뭐가? 인성에 관한한, 순결하고 부패되지 아니한, 어떠한 죄에도 종속되지 아니한, 아담과의 차이점은, 아담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으신 겁니다. 그러면 자, 이렇게 돼서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으로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다음에 뭐가 문제가 되나 하면, 사람이든지 하나님이든지 참으로 하나님이고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뭐가 있어야 됩니까? 인격이 있어야 됩니다. 인격! 인격!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습니까? 그러면 이 예수님은 신의 인격을 취하셨을까요? 사람의 인격을 취하셨을까요? 만약에 둘을 취했다면 다중인격이 됩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다중입니다. 다중인격! 어떤 사람은 여덟 개 아홉 개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인격이 들어갔다기보다는 다중인격 정신병의 일종입니다. 다중인격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안 되는 거지 않습니까? 인제 예수님의 인격은 인성과 신성을 취하시되 인격은 신의 인격만을 취했다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취하시되, 인격 없이 이런 말을 씁니다. 인격 없이 사람의, 인격 없이 사람의 본성을 취하심. 어렵습니다. 인격 없이 사람의 본성을 취하심. 인격은 신의 인격 하나, 그럼 이걸 어떻게? 이걸 가리켜서 안 휘포스타시스 라고 그럽니다. 휘포스타시스는 인격이구요 안은 없다. 입니다. 인격 없이 사람의 인성을 취하셨다. 안 휘포스타시스, 결론을 이야기 하면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신데, 인격은 하나님의 인격 하나만 가지시고, 인성은 인간의 인격 없이 인성을 취하셔서 참 사람이 되시고, 동시에 참 하나님이 되셨다.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 겁니다. 자, 그 다음
인성
그 다음부터는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쉽습니다.
인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예수의 인성에 관한 증거도 많이 있다.
1) 자신을 사람이라고 말씀 하셨고, 다른 사람에 의해 불렸다.
2) 예수님께서는 인성의 본질적인 요소인 육체와 영혼을 소유하셨다.
3)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따르셨고, 인간적 욕망과 고통에도 영향을 받으셨다.
4) 인간이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다. 죄를 짓지 아니하셨으며 죄를 지으실 수도 없었다.
죄를 지을 수 없었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요, 예수님이 지으려고 애를 써도 못 지었다가 아니라, 그럴 마음조차도 처음부터 갖지 않으셨다 이런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뭐 담배피고 술 먹고, 그러는 거 예를 들어서 이야기 했지 않습니까?
(예화) 어제 신문 보니까 그 얘기 여기서 한 거 같습니다. 칵테일 한 잔에 920만 원짜리가 호텔에서 나왔다고 그러더랍니다. 늘 마시던 거라서 별로 놀라지 않는 거 같습니다. 별로 안 놀라십니까? 한 잔에 이렇게 세모난 커피 잔보다 작은 유리잔 한잔에 920만 원! 안 놀랐습니까? 네,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920만 원주고 먹으라고 하면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100잔정도 먹으면 교회건축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추후도 그런 걸 못 느낍니다. 그런 게 뭐냐 하면 내가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싫은 겁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그래서 언젠가 한 번 설교 시간에도 이야기 했는데, 저는 집을 떠나서 자는 게 정말 싫습니다. 기도원도 정말 싫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밤 12시에 기도원에서 내려올 때도 있습니다. 자고 새벽에 다시 올라가는 겁니다. 근데 외국에나 이런 데 가면은 정말 싫습니다. 호텔이나 이런 데 들어가지 않습니까? 내가 돈이 있고 없고는 상관이 없이 일정 금액이 넘으면 너무 싫고 힘듭니다. 아이 돈이 아까워서 어떻게 하나! 그게 아니라, 돈이 있어도 나하고 너무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싫습니다. 너무 더러운데도 싫습니다. 당연 합니다. 나는 음식이고 그 다음에 뭐든지 간에, 일단 깨끗하면 반은 용서해 줍니다. 맛이 없어도, 맛있고 더러운 집에 갈래? 아니면 깨끗하고 조금 맛이 없는 집에 갈래? 하면 나는 후자를 택합니다. 너무 싫습니다. 화려한 게 아니라 깨끗한 거, 너무 과한 거는 싫습니다. 그거는 뭔가 하면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싫은 겁니다. 할 수 없는 것 보다 더 강력한 게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이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음주 운전에 걸릴 가능성은 없는 겁니다. 그거는 못하게 하는 게 뭐가 있어서가 아니라, 설령 올 한 달 동안은 음주하다 차를 몰아도 일체 처벌하지 않고 벌점 안 준다. 그래도 나에게는 그게 유혹이 안 됩니다. 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으니까. 물론 여러분들은 다르겠지만, 뭘 하다가 이렇게 쓸데없는 이야기가 나왔습니까? 지으실 수도 없었다. 라는 말이 바로 그런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이 되셔야 함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여기 줄 치십시오. 그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셔야 했고, 인간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도 인간이 되셔야 했다, 무한한 희생의 가치를 제공하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인간을 건지실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했다.
한 인격 속에 결함된 두 성품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별표 두 개를 쳐 놓으십시오.
그리스도는 인성을 가지셨지만 인간의 인격은 아니다. 두 줄 쳐 놓으십시오. 시험에 꼭 나옵니다.
중재자의 인격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스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 하나의 인간 인격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요, 계속 줄치십시오, 인간 인격을 취하신 것도 아니다. 신성에 덧붙여 인성을 취하셨는데 인성은 독립적 인격으로 발전할 수 없었으나,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 속에서 인격적이 된 그러한 인격 없이 취한 인성인 것이다. 이러한 인성을 취하신 후 중보자의 인격은 신적일 뿐 아니라 동시에 신인 적이다. 인성과 신성의 모든 존재를 소유하신 신인 적이시다, 신적의지와 인적의지를 소유하셨듯이 신적의식과 인적의식을 소유하고 계시다. 그러나 인격은 하나입니다. 이 진리는 인간으로서 측량할 수 없는 신비이다. 왜? 어떻게 인격이 없이 의지를 가지실 수 있고, 또 인적인 의식을 소유할 수 있느냐? 이런 겁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신적 인격 하나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이렇다 이겁니다. 이 진리는 인간으로서 측량할 수 없는 신비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인격의 단일성을 동그라미 지적해 준다. 말하시는 의식이 인적이든 신적이든지 언제나 동일한 인격이시다. 인간의 속성은 가끔 신적 호칭으로 칭호 된 인격으로 묘사되고, 신적 속성과 행동도 가끔 인간적 칭호로 표현된다.
교리에 대한 오류
초대 교회당시에 알로기파와 에비온파는 당시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고, 그 다음에 소스오키노스 주의와 소키노스 주의와 유니테리안파는 오늘날 현대주의 자들도 이것을 따른다.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겁니다. 일반적인 겁니다. 초대교회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당하다고 보았고 그래서 신성에 가까운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반신으로 간주한대 비해 아폴로나리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적 로고스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영을 대신하여 취한 것이라고 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는 한 인격 속에 두 본질의 결합을 부인했으며, 네티커스파는 두 본질을 완전히 분간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여기에 신성과 인성이 있는데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가 없다. 이것도 잘못된 거고, 그 다음에 이게 없다, 이것도 잘못된 거고, 그 다음에 이 둘은 서로 상관이 없다, 이것도 잘못된 겁니다, 둘이 서로 상관이 없다, 절대적으로는, 그 다음에 둘은 섞였다. 이것도 잘못된 겁니다. 그러면 가장 정확한 학설은 뭐냐 하면, 이 둘은 서로 구분되면서도 한 인격아래서 연합되었다 고 보는 겁니다. 구분되면서도 연합되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게 가장 정확한 견해입니다.
한과 더 나갔으면 좋겠는데 머리가 너무 뻥뻥합니까? 질문, 조금 일찍 끝났습니다. 질문, 두 사람만 받겠습니다. 네, 일어나서 큰 소리로, “4교구의 김 경은 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살다가도 은혜의 계약이 파기가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아니, 거기서 이야기 한 신자라고 하는 것은 그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면 아까 설명 했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면 여기에 있다가 딱 거듭나는 것과 함께 언약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예! “질문이 뭡니까?” “그런데 그런 교리는 그러면 저희가 작정에서 선택과 유기의 교리에 있었을 때,” “선택되지 않은 것입니다, 선택되지 않은 사람.” “그러면 파기된 것은 파기된 것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작정 속에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죠! 근데 이제 조심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인의 경우에는 자기가 한 번에 회심하는 것과 은혜언약 속에 들어가는 것이 한꺼번에 동시에 일어난다. 고 그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 아닙니까? 이 사람은 여기에 들어가서 이거를 은혜 언약의 절대적인 파기 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이 취소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파기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원 받은 자, 다시 말해서 여기서 은혜언약 안에 있다 하고 할 때, 넓은 의미에서 은혜언약 안에 있는 것과, 그 다음에 좁은 의미에서 은혜언약 안에 있는 것이 다른 겁니다. 요거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구원의 개념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겁니다. 여기는 구원의 개념과 안 맞아 떨어지는 겁니다. 여기에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님이 두 가지를 약속하시는 데,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와, 순종하고자 하는 자에게 무한한 능력을 약속하시는 겁니다. 그것에 의해서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게 되어있고, 하나님이 그를 용서해 주시고, 이미 용서해 주셨고, 그리고 순종하려고 하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점에서 이 사람은 여기서 은혜계약을 절대적으로 파기하는 자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뭐냐? 아까도 이야기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계보가 있는데,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영원한 작정의 측면에서 보면 불택자 들입니다. 불택자 들이 아닌데 빠져나갔으면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인데, 사람이 불순종해서 사람이 빠져 나갔으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꺾은 것 아닙니까?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넓은 의미에서 이들이 은혜계약 안에 있는 사람들로 간주가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이들이 아버지로부터 율법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을 충분히 듣고 그 은총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그 표가 바로 할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독특하고 고유한 의미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의 좁은 의미안의 계약 속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렇게 걸쳐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파기 되어서 나갈 수도 있는 겁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종종 예수 믿는 사람의 집안에서 이제 세례를 받고, 그러면 은혜계약 안에 있는 거지 않습니까? 그럼 그 사람이 부모의 신앙을 보고 아이에게 세례를 줬는데, 그 세례 즉시 이 아이가 중생하고 회심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 그 아이는 이런 상태에 있는 겁니다. 이런 상태에, 바깥에 있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돌이킴이란 책속에 보면 은혜언약 안에 있는 유익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실제적인 유익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배우고 회의를 느끼거나 그럴 필요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하면 이런 은총들이 주어집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도 회심해야지만 여기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는 겁니다. 또 어떤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주 어린 상태에 아직 스스로 회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 그런 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이 은혜언약 안에 있는 것을 토대로, 그들을 중생하여 중생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중생하게 하여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우리는 이렇게 믿고 있는 겁니다. 질문에 대답이 됩니까? 네! 한사람만 더, 네 , 저쪽 뒤에,”
“네, 저 그 죄에 대해서 나올 때 간접 전가 설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는데요, 목사님께서 간접 전가 설이 아니라, 대표설이 개혁주의의 입장이고, 그리고 간접 전가 설에 대한 반론은 경험적으로 잘 납득이 안 되는 측면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간접 전가 설은 죄책은 계승이 안 되고 오염만 전가가 된다고 주장을 하는데, 모든 사람이 오염에 빠져서 태어난다면, 태어나서 스스로 죄책을 만들어 내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개혁주의는 성경적으로 어떤 부분이 맞지 않아서 저희가 대표 설을 채택하고 간접 전가 설을.”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이 본성과 일치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은 간접 전가 설에서도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염이 말하자 며는 사람들에게 전가되는 거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오염인데, 그러면 이 오염이 전부 어떻게 되나 하면,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렇게 내려가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이 오염은 우리가 볼 때 사실은 선천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봅니다. 그게 아니라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오염이 이렇게 바깥에서 들어오는 겁니다. 이렇게, 이것이 다시 사람에게 전가되는 겁니다. 다시 오염되고 다시 내려오고, 오염되고, 오염되고, 하면서 이렇게 내려오는 겁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크게 잘 못됐다고 말할 수 없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인간이 이렇게 우리 개혁주의 설에서는 뭔가 하면, 오염과 죄책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죄책, 두 개를 떨어뜨려 놓을 수 없이 함께 묶는 겁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이 오염이 이렇게 경험주의 적으로 한 사람 있었는데, 이것이 이렇게 외부에서 들어오고 또 맞물려지고 하는 것 뿐 만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선천적인 것들을 아울러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사람이 맨 처음 인간이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저지른 이 죄에 대한 책임도 함께 내려온다고 보는 겁니다. 간접 전가 설에서는 이 죄책 자체를 부인하는 겁니다. 이 죄책을 인정을 안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나 하면, 예를 들어서 이렇게 사람들이 있다고 볼 때에, 만약에 한 사람이 아주 굉장히 좋은 환경 속에서 살게 되면, 그러면 그 사람의 죄와 그렇지 않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죄는 현저하게 차이가 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는 우리들이 어느 정도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사회 구조가 아주 나쁘게 되면 바깥으로 생존을 위해서 죄를 아주 많이 짓게 됩니다. 그런 구조들이 아주 좋으면 그런 사람들의 죄가 줄어들고, 주위의 사람들이 다 교통질서를 잘 지키게 되면 나도 그걸 잘 지키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관념들은 죄라고 하는 성격 자체를, 로마 가톨릭에서 보는 것처럼 외부적이고 행위적 것에 집중해서 죄를 생각하기 때문에, 죄가 있다, 없다, 많다, 적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근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죄는 사실은 그런 면 보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이 되는 본질적인 죄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한 사람은 후진국에 태어나서 억수로 고달프게 살면서 죄를 많이 지었고, 한 사람은 좋은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고 할 때에, 실질적으로 이 사람이 더 많은 악을 지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들이 당신과 교통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은 무게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간접 전가 설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경험주의 철학적인 개념들이 많이 들어간 겁니다. 그러면 인간에 대해서 아주 낙관적인 견해를 제공할 수 있는 토대를 갖게 되는 겁니다. 왜? 인간이 노력하고 좋은 환경을 만들면 만들수록 인간은 점점 더 선한 존재가 될 수 있고, 물려받은 죄책이 없기 때문에 오염에 대한 문제만 해결하면 죄에 대한 사법적인 책임으로부터도 면탈 될 수 있다는 이런 법적인 회피 망들을 제공해 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전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절망적인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 이런 것들이 설수 있는 기반들이 매우 약해진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됐습니까? 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