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을 위한 교육1
녹취자 : 오희열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교회를 늘 가까이 하는 것도 힘듭니다. 그래서 그냥 주일에 예배를 간단하게 드리고 교회와 상관없이 일주일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등록을 하지 않고 그냥 다닙니다.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앙생활은 하려고 하지만 교회 생활은 점점 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게 왜 심각한가 하면, 이렇게 되면 교인들을 잘 목양할 수가 없습니다. 목양을 한다는 것은 교인들을 잘 돌보는 것입니다. 돌보려면 관계가 필요합니다. 무슨 관계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상업적인 관계를 갖지만 교회에서 목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 자체가 잘 성립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인들은 교회를 건성으로 다니고 교회와는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중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목회자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려고 하고 학습을 하려고 하고 자신의 삶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까? 어떤지 한 번 얘기를 들어봅시다. 누구든지 일어나서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 것이 습관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질문 : 그런 것이 그 교회만 그렇습니까? 모든 교회가 그렇습니까?
답변 : 보편적으로 그렇습니다.
질문 : 다른 분, 한 분 정도 이야기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답변 : 성도는 심방받기를 원하는데 목사는 기도해 주는 것이 두려워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할까봐 심방을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오해를 하고 교회 나가는 것도 방해를 받습니다.
자, 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이런 경우에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데에 굉장히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목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글자 그대로 말하자면 목자가 양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은 굉장히 다양할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목자가 나가서 양들이 먹을 수 있는 꼴을 베어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양이 도랑 같은 곳에 빠졌다면 건져내야할 것입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염병이 돌면 그 병에 걸리지 않도록 주사약을 사서 예방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질병에 걸리면 치료를 해 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목자는 온전히 그 관심을 양떼들에게 온전히 쏟아야 합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양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부득이한 예외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목회자는 다른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관련되었다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도 교회의 목사이면서 작가이면서 교수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직분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굉장히 중요한 장입니다. 우리가 “목자 장”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보면 선한 목자와 삯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 나오는 삯꾼을 보면 그 당시 문맥으로 보자면, 한 사람이 양을 치는데 헌신하려면 양의 수가 많아야 하는데 그 양을 돌볼 때 그 양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자신의 가정을 충분히 꾸려갈 수 있을 정도의 소득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양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혼자 그 일에만 온전히 헌신하기에는 소득이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그럴 경우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양을 1천 마리를 쳐야 한 사람의 품값이 나올 수 있다고 하면 어떤 사람이 100마리밖에 없는 사람, 200마리 가진 사람, 이런 사람들이 모두 양을 한 데 모읍니다. 그리고 양에 자기 표시를 합니다. 그리고 양의 마리 수에 따라서 돈을 모아서 목자를 고용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양을 돌보게 합니다. 그 사람이 삯꾼입니다. 그래서 삯꾼이라는 말을 너무 나쁜 뜻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삯꾼이라고 하면 사기꾼, 도둑놈, 나쁜 놈, 이런 생각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품삯이 동기가 되어서 양을 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이 사람이 양을 돌보는 모습이, 선한 목자이든지 아니든지 거의 비슷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낮에 가서 꼴을 베어오고, 양들을 데리고 가서 물을 먹이고, 저녁이 되면 양떼를 모아서 우리에 집어놓고, 목마르면 물을 갖다 줍니다.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 양을 돌보는 참 목자와 삯꾼 목자가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것처럼, 주인이 집에 돌아왔는데 양이 한 마리가 없습니다. 삯꾼 목자는 그 저녁 시간에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그 양을 찾으러 길을 떠나겠습니까? 안 떠나겠습니까? 안 떠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빨리 계산을 할 것입니다. 양 한 마리가 얼마인가? 그런데 내가 거기를 갔다가 다리를 다친다거나 맹수를 만난다거나 혹은 강도를 만난다든지 하면 자기 손해가 얼마나 크겠는지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산으로 움직입니다.
다윗의 생애를 기록한 성경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은 선한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양들이 맹수의 공격을 받으면 기꺼이 싸울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또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삯꾼 목자는 양을 밤에 데리고 있다가 맹수가 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의 생명이 위협을 받으면 당연히 양을 버려두고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물론 그 양들을 기르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우유를 먹고 또 그 양을 팔아서 자기 생계를 꾸려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목자와 양 사이에 있는 관계입니다.
제가 교수 생활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점심을 먹으러 학교에서 내려왔습니다. 거기 부자들이 굉장히 많이 사는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길거리에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자매둘이서 자기들이 만든 전단지를 붙이고 다녔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사진도 붙어있었습니다. 아주 조그맣게 생기 하얀 강아지였습니다. 한 25년 전 일인데, 그 강아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강아지를 찾아주면 당시 돈으로 5000위안은 주겠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25년 전에는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제가 환산을 해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요만한 강아지인데 저렇게 많은 돈을 현상금으로 걸었을까?’ 그럼 그 강아지는 얼마짜리겠습니까? 실제로 그 자매들이 강아지를 얼마 주고 샀겠는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얼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에서 강아지 한 마리에 10만원하기도 합니다. 방금 대답하신 분들은 강아지를 키워보지 않으신 분일 겁니다. 그리고 키워봤다고 하더라도 아마 식용으로 키우셨을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강아지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는 전혀 기르지를 않았고, 아이들이 강아지를 그렇게 갖고 싶어 했는데 제가 절대 반대했습니다. 그러면 생각하실 것입니다. ‘김목사는 강아지를 싫어하는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사랑해서 기르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 상처가 있습니다. 나는 서울에 유학을 와서 할머니 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아지와 그렇게 친했습니다. 형제들도 다 시골에 있으니까 강아지와 거의 식구처럼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강아지가 쥐약 같은 것을 먹고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한 일주일 동안을 눈물로 가슴 아픈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게 너무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내가 먼저 죽지 않고 늘 강아지가 먼저 죽었습니다. 그게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그 강아지는 가격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게 똥개, 잡종일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 얻어온 잡종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이 들고 사랑합니다. 맨날 같이 밥 먹고 침대에서 뒹굴고 뽀뽀했습니다. 그런데 없어졌습니다. 큰 개가 물어 죽였는지, 차에 쳐서 죽었는지, 보신탕을 하는 아저씨가 잡아다가 삶아 먹었는지, 너무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있는 모든 돈을 다 걸고 그 강아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참된 목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 교인이 헌금을 얼마나 할까?’, ‘계속 잘 돌봐주면 내 편이 되어줄까?’, ‘교회를 지을 때 몇 십만 원 내 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목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한 인간 앞에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가엾어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목자입니다. 그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심지어 때로는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사람에게 참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줄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면서 이 사람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 참된 목자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자신에게 아무 이익도 없이 끊임없이 희생이 요구되는 일에 헌신하는 동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양은 사람이 동기가 되어서 목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베드로가 만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예루살렘교회의 첫 번째 지도자로 삼으시려고 마음을 잡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 전에 예수님께 질문을 받았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받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이렇게 물어보지 않으셨겠습니까? “네가 양떼를 사랑하느냐?” 왜 그러셨습니까? 만약에 양떼를 사랑하는 것이 목회의 동기가 된다면, 교인들에게 실망할 때는 목회를 더 이상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도 목회를 하다가 보면 한 때는 내게 정말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었던 사람들이 있는데 때로는 이 사람들이 돌이켜서 나를 배신하고 아주 해롭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목양의 동기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사람을 향한 사랑이 끝났을 때 목회도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인 허드슨 테일러를 기억하십니까? 허드슨 테일러의 말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를 존경하는 많은 선교사 후보생들이 중국에 와서 허드슨 테일러를 만났습니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가 젊은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왜 선교사가 되려고 합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선교의 위대한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이 일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일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말했습니다. “나는 이 중국 사람을 너무 사랑합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들이 중국 사람들을 아무리 사랑해도 그것으로서는 선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언젠가 실망할 때도 있고 싫어질 때도 있는데 그것을 끊임없이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양떼를 돌보는 무한대의 헌신을 하게하는 그 동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뭘 그렇게 열심히 쓰십니까? 집에 가서 보지도 않을 것을 말입니다. 여기를 보십시오.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목양에 종사하는 제일 중요한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자, 여기에서 소명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면 목회자, 목양을 하는 사람의 소명이 어떻게 오는가?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왔습니다. 목사가 되어야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어떻게 인도하셨습니까?”, “직장에 들어갔더니 쫓겨났고, 사업을 했더니 망했고, 돈을 투자했더니 다 날렸고,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완고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목회자가 되게 하시려고 어떤 역경과 난관을 사용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주된 증거일 경우에는 그것이 진정한 목회자의 소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소명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게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경험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이고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아주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시는 고난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증거라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체험이 얼마나 절실한지, 도저히 다른 일에 종사해서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 높은 지위를 주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아도 그것 가지고는 만족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경험하고 나니까 그 사랑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가엾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을 수 없고 잘 수도 없고 일반적인 직업에 종사할 수도 없는 긴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경험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내가 빚진 자로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찬양)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값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람이 가엾다기보다는 그 가엾은 사람 때문에 아파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떼들이 자신의 노고와 고통을 알아줄 때나 알아주지 않을 때나,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님을 보고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초창기에 한국교회를 지탱해 가도록 만들어준 우리 선조들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우리 한국이 일본 사람들에게 36년 동안 점령을 당했습니다. 온갖 악한 일을 이 땅에서 저질렀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중국 사람과 가까워지는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일본사람을 욕하면 중국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합니다. 갑자기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그런 때에 훌륭한 신앙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곧 지나간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면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간다.”는 내세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앙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예수님을 위해 죽어야 한다.” 그 신앙이 그 큰 고난들을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목회자는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철저하게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든 것들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은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찰스 스펄젼의 생애에 나오는 감동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찰스 스펄젼이 서재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19세기 사람인데 그 당시에 1만2천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굉장한 양의 장서입니다. 부인이 보니까 남편이 서재에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도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다가가서 물어봤습니다. “여보, 왜 울고 있어요?” 하나님의 사람 스펄젼이 대답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데, 오늘은 내가 목회자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데도 아무런 감동이 없고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런 나를 생각하니까 너무 처량해서 눈물이 납니다.” 그 찰스 스펄젼의 목회가 그렇게 영향력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철저한 두 가지 원이 어우러진 목회를 한 것에 있습니다. 한 원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 또 하나의 원은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 그 생생한 체험 속에서 그 고난을 이기고 목양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솟아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회자만 체험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아주 특별하게 깊이 체험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머릿속으로 계속 계산을 하다가 ‘목회를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결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거스를 수 없는 어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이 힘에 이끌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예수 때문에 살고 예수 때문에 죽는 그 마음이 목양을 하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자, 그러면 보십시오.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래서 양떼들을 위해 희생하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목회자에게 목양을 받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물론 그것은 개인적으로 목회자에게 인간적인 매력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른 데에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가를 의지하며 사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입니까?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의 인생을 살다가 어려움을 만날 때 그 어려움을 모두 쏟고 존경하며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저절로 자기가 생각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뭔가 어떤 일이 자신 안에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추억들이 쌓이면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교회의 많은 사람들과 1대1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주일에 어린이, 청소년을 제외하고 장년들이 3400명이 모입니다. 미안하지만 저는 그 사람들을 다 외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일 무서운 것이 교인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 누군지 아세요?” 굉장히 무섭습니다. ‘학교에서 만난 제자인가? 동네 가게 아줌마인가? 우리 교인인가?’ 온갖 생각이 오고갑니다. 그러면 그냥 웃으면서 “아, 예, 예.”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 외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나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지 않아도 여전히 목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말씀으로써 그를 목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회자를 향해 냉담하고 목양을 받지 않던 사람에게 어떤 계기가 찾아옵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예수님 때문에 소명을 받아서 양떼들을 만나는 것처럼 똑같이 양떼들도 예수님 때문에 목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양이 만났지만 목자가 양을 지배하거나 혹은 양이 목자에게 일방적으로 거의 노예처럼 복종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도 예수님 때문에 목회를 하고 양떼들도 예수님 때문에 목양을 받으면서 서로가 섬기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목양을 하게 하신 원리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 목양을 목회자 혼자 하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교회 전체를 목양이 있는 교회로 만들어 가시겠습니까? 10분만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니”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사실은 문화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 하셨겠습니까? 문이라고 하는 것은 열고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문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 양떼들을 가두는 우리를 돌멩이 같은 것을 쌓아서 대충 울타리로 만들었습니다. 양이 넘나들지 못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저런 완전한 문을 매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양을 다 집어넣고 담장을 이렇게 이렇게 쌓으면 가운데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생깁니다. 그런데 그 목자가 밤에 그 통로, 입구에 다리를 쭉 뻗고 기대어 앉는 것입니다. 담장은 여기까지 쌓이고 여기까지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를 가지고 거기서 지키니까 이 사람이 허락을 하지 않으면 여기를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오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양은 들여보냈고 아무도 못 오도록 해서 우리안의 양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양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또 다른 말씀을 하시는데, 양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목자도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이 문을 통하지 않고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양은 목자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의 양이 되는 것 아닙니까? 양도 똑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전에는 자기 상식을 따라 살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랑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그 분이 부활하신 영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질서를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예수님을 만난 목회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진심으로 형제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양이 만났지만 그 관계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목양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예수님이 진심으로 당신의 교회를 세워 가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목자도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고, 양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목자와 양으로 만나서 교회를 섬기고 전도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우리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을 받는 목회자와 교인이 있어야 합니다.
중국교회 안에서도 여러분이 이런 일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한때는 정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목회하던 사람인데 나중에 변질됩니다. 그래서 온갖 나쁜 일을 저지릅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교회를 속이려고 목회자가 되었겠습니까? 교회의 재산이나 탐내고 그러고 싶었겠습니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자기를 목회자가 되게 만드셨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 그 십자가의 은혜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쁜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안 그러겠습니까?
제가 아는 목사님이 커다란 고통을 당했습니다. 물론 잘못한 것이 조금 있었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교인이 목사님을 고소했습니다. 끊임없이 몇 년 동안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우리 목사를 감옥에 보낼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지 하겠다.” 그 사람이 처음부터 교회에 살그머니 들어와서 목회자를 그렇게 괴롭히려고 처음부터 계획을 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애를 다 바치고 재산을 다 드려서 주님을 섬기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변질한 것입니다. 무슨 변질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 은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실 때에만 우리가 목자다운 목자가 될 수 있고 양다운 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직접 목회하지 않고, 천사들을 통해서 목회하지 않고, 가장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 목회하십니다. 그 이유는 교인들이 자기를 목양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래서 목자의 목양을 받으면서도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자를 붙들고 계신 예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주님을 의지하며 목양을 하고, 양떼는 주님을 의지하며 목양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목양은 목회자 한 사람이 목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잘 목양을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대신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통일되게 이런 목양사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서있는 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는 산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나무들이 그렇게 서 있는 산에서는 절대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가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땅 밑에서는 그 나무 높이보다 멀리 뿌리가 뻗어서 그 나무들이 서로 뿌리에 엉켜서 산 전체를 휘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목회자가 목회를 잘해서 그 사람이 회심하고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면 그 사람이 자기보다 연약한 사람을 지식으로, 은혜로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말씀으로 온 교회가 다 연결이 되면서 묶여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중국을 한 20년 가까이 다니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심각한 지식의 결핍입니다. 사람이 지식만을 가르쳐서 머리가 커지는 것도 문제겠지만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을 올바로 알지 못할 때 그의 영혼은 절대로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사실 중국에 와서 굉장히 신실해 보이는 목회자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헌신적입니다. 순수합니다. 사람이 대화를 해 보면 압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상에 빠져서 이단 비슷한 것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다. 신학적인 지식이 현저히 부족하니까 어떤 느낌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 그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느낌들이 오고 가기 때문에 그 느낌의 강도가 진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 이 프로그램을 제가 제안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책으로 공부를 한 다음에 여러분이 이것을 아는 것으로 그치면 여러분이 해온 많은 세미나 가운데 하나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 교제는 최소한 20년 가까이 사용한 교재입니다. 물론 20년 동안 계속해서 좋게 바뀌면서 지금까지 흘러왔습니다. 열매가 입증된 책입니다. 제가 일곱 명의 교인으로 시작해서 5천 명이 될 때까지 이 교재가 사실은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저 공과교재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최소한 6백, 7백 명은 있습니다. 교회가 작을 때는 목회자가 다 가르칠 수 있지만 커지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가서 체계적으로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교인들을 세워야 할 이유입니다. 그래서 목회자 자신이 책을 읽고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교인들이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더 많이 알아서 자기를 힘들게 할까봐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못 배웠으면 아이들이라도 배워야 합니다. 아니면 자기가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교인이 40명, 50명밖에 모이지 않았을 때도 교회에 책꽂이가 있어서 교인들이 책을 빌려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예 도서관이 두 개 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 어른을 위한 도서관입니다. 여러분도 중국에 좋은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쁜 책들도 있지만 좋은 책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책을 사서 한쪽에 비치해서 교인들이 자유롭게 그 책을 보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키워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더 열심히 읽고 배워서 그런 책을 교인들이 읽고 물어볼 때 목회자가 지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잘 공부해서 중국에 가서 똑같은 책을 놓고 여러분 가까이 있는 “동공”들부터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가르쳐서 완전히 습득해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소화하고 자기화 시켜서 다른 사람들을 잘 가르칠 수 있도록 동공들을 훈련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3년에서 5년만 노력하게 되면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굳건히 서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내일 아침부터 그룹별로 모여서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절대로 조용히 앉아서 듣기만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여러분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여러분이 스스로 그 수업에 참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목회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십시오. 그러면서 이 말씀이 여러분의 목회에 피가 되도록 그렇게 여러분이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밤 편히 쉬시고 내일 아침에 또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