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복음은 순종을 요구함
나의 복음과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생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난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롬16:25~27)
녹취자: 이경순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위대한 서신서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 사도바울은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가르치는 것으로 서신서를 끝내고 있습니다. 사도에 의하면 이 복음은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체험되어서 나의 복음이 되었고 그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곧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느 순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영원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 속에 감추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어떤 부분들을 선지자의 글들을 통해서 조상들에게 미리 알리셨다가 그 복음이 완전히 형체를 드러내고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렇게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일 먼저 복음을 대할 때 우리는 이 복음이 새로운 복음이지만 사실은 아주 오래된 복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만 이 복음이 오늘 우리를 복음의 시대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복음은 저 멀리 인간이 타락하면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그림자와 같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지금은 그 복음이 완전히 드러나서 이제 명백히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통해서 암시된 복음이 희미한 촛불이었다면 오늘 우리는 밝은 태양빛 아래서 주님을 뵙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복음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경륜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살면 마지막에 이 세계가 어떤 식으로 완성될지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그 완성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교회는 왜 존재하고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복음이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르기를 이 세상의 통치자들과 지혜로운 자들을 말합니다. 아마 통치자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를 가리키거나 혹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의 지식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임금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틀림없이 철학자들을 가리키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조차도 알고자 했던 인생의 의미, 세계의 의미 그리고 앞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의미 이런 것들을 복음이 밝히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크게 세 가지를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복음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을 때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그 믿음이 결국 없이는 우리가 그분께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믿음을 통해서 순종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못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순종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복음이 제시하는 순종의 원리는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5장 8절에서 고백한 내용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복음을 접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었고 그런 사랑을 입을 아무 공로가 없는데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그 피로 우리를 구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며 섬기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전의 사람들은 이런 것을 신약시대처럼 충만히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눅 7:28)”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 뜻입니다. 알다시피 세례요한은 엄격한 의미에서 신약시대의 첫 선지자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들 중에 가장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눈으로 뵈었고 죽었습니다.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전체에 말라기서가 마지막인데 세례요한에 대한 예언으로 구약이 끝나고 신약성경은 세례요한의 등장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중요한 인물입니까? 이사야 4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의 때를 제시하실 때에 그때 제일 먼저 등장한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그 예언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끝나고 위로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 구약에서 그렇게 탁월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한 후에 신약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그 영적인 축복에 비교한다면 그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성도들은 이 복음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잘 모릅니다. 그리고 이 복음 때문에 알게 되는 하나님의 경륜의 지혜, 이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의 의미를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통해서 아주 철학적인 지혜가 없었던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할 수가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이 짤막한 한 문장의 의미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하나님이 왜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타락한 인류는 왜 불행해졌고, 타락한 그 인류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게 당신의 경륜을 펼치셨고, 그래서 한 사람 한 가정 한 국가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은 미래의 구원 계획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신 그 의미가 어떻게 오늘 우리의 인생과 세계의 경륜에 빛을 던져주는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 우연히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복음의 시대가 올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그랬습니다. 믿음은 순종과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믿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힘으로 순종할 수 없는 사람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셔서 그 하나님 사랑 때문에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성장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그 때 교황에게 쓴 편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시 교황이 레오10세였습니다. “선행은 사랑을 가져다주지 못하지만 믿음은 우리에게 반드시 사랑을 가져다준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이전에 선을 행할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기 위해서 혹은 내가 선을 행하는 것에 공로를 많이 쌓아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었지만 이제 복음을 알고 난 후에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 풍성해진 사랑을 가지고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나도 기쁨이 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사랑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가져다줍니다. 왜 그럴까요? 그 믿음이 예수가 누구시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신 제일 위대한 일이 바로 도저히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는 죄덩어리인 인간을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 우리들이 당할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직접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죗값을 치러야하고 그리고 그것은 죽음이어야 했는데 그것으로도 그 죗값은 충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 앞에 제물로 죽을만한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범하지 않은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범죄하여 망가뜨렸으니 이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우선 순결한 인간이어야 했고 무한한 크기의 희생을 드릴 수 있는 인간이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인간은 참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어야 했습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인간은 죄를 지었지만 책임을 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기껏해야 진노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죄인을 당신이 모두 끌어안으시고 당신 자신이 죽으심으로써 그 죽음의 효과를 당신이 끌어안은 우리 모두에게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고 그 일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왜 예수께서 우리같이 하나님을 스스로 버리고 범죄한 인간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 동기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입니다. 죄인을 향해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할 때 어떤 마음일 거 같습니까? 그 부모가 정말 참 부모라면 자기자식이 세상의 흉악한 죄를 짓고 비참하게 되어서 죽어갑니다. 그때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을 볼 때에 지금 겪고 있는 그 비참함과 그가 지은 끔찍한 죄의 인과관계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렇게 고통을 받고 비참하게 되는 것보다도 사람들 마음속에는 덜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안 그럽니다. 부모는 그 자식을 자식 그 자체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인과관계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새끼가 저렇게 비참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 그 하나에 대한 슬픔이 자기를 압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해도 부모는 그 자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죄인인 부모가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 사랑을 무한정으로 확대시켜서 생각해보십시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그 무한한 사랑으로 그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렇게 자기의 그 비참한 자신을 그 비참한 상태에서 건져주시기 위해서 예수가 그렇게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광경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그 깊이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가져다줍니다. 그 사랑으로 무엇을 하기 위함입니까? 순종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신자가 살면서 주님 앞에 순종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사랑의 크기만큼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제 설교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전했던 말씀, 곧 우리가운데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은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 사랑이 점점 우리 안에 풍성해 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만 언제나 우리가 그렇게 끊임없이 주님의 그 충만한 사랑 속에 살려고 사모하고 애쓰는 사람들의 의지 안에서 하나님이 은혜로 역사하셔서 우리로 그런 충만한 사랑 속에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아주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살아가면 그는 그 나이에 그런 건강을 유지하고 살면 그는 삶의 방식에서 건강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보다는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에 비해서 아주 뛰어나고 젊어 보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삶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을 많이 들입니다. 시간을 많이 들입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은 별 효과가 없는데도 그냥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들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그 속에서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아, 이렇게 무엇이든지 저절로 되는 것이 없구나.’ 한 사람이 꿈을 가졌답니다. 대학교수인데 그냥 평범하게 살던 아저씨인데 55세에 자기가 육체미를 건강하게 가꿔서 화보를 찍고 싶다는 꿈을 가졌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자신의 몸을 한 5년 동안 단련했는지를 쭉 썼습니다. 그것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영혼을 위해서 노력하면 정말 최소한 한 교회에서는 최고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구나.’ 먹는 거부터 마시는 것부터 모두 계획을 세우고 운동을 하면서 자세 하나하나에 따라서 어느 실 근육이 발달하게 되는지를 다 공부해서 각도까지 맞춰서 역기를 드는 것입니다. 결국 꿈을 이뤘습니다. 55세에 화보를 찍었습니다. 별로 예뻐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해야 예쁜데, 머리는 벗어지고 그렇게 했는데 어쨌든 자기의 것을 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되게 부끄러웠습니다. ‘아 나는 정말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이렇게 몸부림을 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믿게 하셔서 그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셔서 마지막에는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뭘 순종하라는 것일까요? 그 답은 삶의 모든 방면에서 모든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능하냐? 그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매순간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모르니까 순종할 수 없지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발견하고 깨닫게 된 것에 대해서는 삶의 모든 방면에서 기꺼이 순종할 마음을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우리가 누군가를 너무 사랑하면 우리가 몰라서 못해주는 것이지 너무 사랑하면 몰라서 못해주거나 돈이 없어서 못해주지 그것을 알면서 못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십자가의 은혜로 주시는 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충만하게 되면 당연히 주님의 뜻을 알았으니 우리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왜 그렇겠습니까?
저는 할머니가 저를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이분이 다른 것은 다 하시는데 예수는 안 믿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작심을 하고 할머니하고 둘이 마주 앉았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할머니, 내가 이 세상에서 할머니를 제일 사랑하고 할머니 사랑을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받았는데 나는 예수님을 만났고 내 인생의 갈 모든 길을 포기하고 목회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당신 손자가 그 길을 가게 되었는지를 아시겠지요. 내가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하는데 그 사람들보다 할머니를 더 사랑하는데 할머니가 예수 안 믿는 것을 보면 내가 복음을 전할 자격이 있나 생각이 듭니다.” 심각하게 얘기를 했더니 할머니 말씀이 예전과는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너다. 너의 간절한 소원이 내가 예수 믿는 거라고 하는데 돈을 달라면 내가 능력이 없어서 못주겠지만 내가 그런 거 하나를 못 들어주겠니. 믿으마.”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 다음 주부터 거의 한주도 안 빠지고 돌아가실 때까지 교회를 나오셨습니다. 사랑하면 합니다. 그분은 나중에야 은혜를 받으셨지만 맨 처음에 한주에 한 번씩 교회를 올 때에 주님이 보고 싶으셨겠어요? 손주가 보고 싶으셨겠습니까? 항상 4000원 가지고 오셔서 천원 헌금하시고 3000원은 내 주머니에 넣어주시고 가셨습니다. 사랑 하면 합니다. 사랑하면 우리는 그게 가능하냐고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안될 때 안 되더라도 순종합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면 자신은 이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주도권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껏 내가 주님을 멀리 떠나서 방황하면서 고통 속에서 살았던 이유는 내 인생의 보좌에 내가 앉았습니다. 나를 임금삼고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슬픔과 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지금도 자기를 임금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죄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그 모든 가치를 판단함에 있어서 최종적인 규범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회개는 거기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까지는 내 인생의 임금으로 그렇다고 그 임금이 명예도 별로 없습니다. 고생만 실컷 하는 임금이었습니다. 그 삶 때문에 말 할 수 없이 피곤하고 지치는 그런데 이까짓 왕관을 무엇 하랴 하고 던져 버리고 거기서 내려와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 주님은 내 보좌 아래 계신 것이 아니라 알고 보니 보좌보다 넓은 하늘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걸어 내려와서 그분 앞에 무릎을 꿇으면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를 비는 최고의 죄목은 내가 내 인생의 임금이 되어서 산 것이 그것이 나의 천추의 죄였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찬송하는 것입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라
그러면서 그 아래 무릎을 꿇고 살아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높으신 왕 앞에 무릎을 꿇은 그 신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위엄 있는 왕 앞에 무릎을 꿇은 그 신하 백성이 자신의 면전에서 그 높고 엄위하신 왕을 의식하면서 마지막 가슴속에 간직하는 그 태도는 무엇일까요? 무엇이든지 어명을 내리소서입니다. 그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첫 번째 고백입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믿음의 규칙과 생활의 교훈에 대해서 순종하겠습니다. 왕이 말씀하시길 ‘너는 이런 점이 잘못되었다’ 아주 자비롭게 이야기 합니다. ‘내 나라에 살기 위해서는 너는 이것을 고쳐라,’ 라고 하면 즉각적으로 ‘예!’ 해야 되는 것입니다. ‘쟤도 그랬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요?’ 그것은 왕한테 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친구나 그만두기로 작정한 회사의 말단급 상사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지 왕에게 할 수 있는 언어는 아닙니다. 그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하는 순종은 무서워서 두려워서 그런 순종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순종입니다. 그래서 모든 우리 신앙생활의 문제는 사랑이 풍성해질 때 오래 신앙생활을 합니다. 말씀도 깨닫고 점점 늙어갑니다. 그런데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해지면 그 사람을 볼 때마다 큰 나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예수 믿었습니다. 늙어갑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주님 사랑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고목으로 보이던지 그나마 생명이 붙어있으면 분재나 박제로 보입니다. 그렇게 차이가 납니다.
그 사랑으로 순종하라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적인 회개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삶의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자신의 인생을 보며 온전하지 않는 어느 부분이 있는가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복음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자만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온 힘을 다해서 순교에 이르기까지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사도바울도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황혼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이옵나이다.” 사람들에게 내가 이정도로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실제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죄인 중에 괴수구나 하는 사실입니다. 그 속에서 순종하며 살아가야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아 ,이런 사람을 주님이 용서해주셨구나.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이러면서 순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 회개하는 삶입니다.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삶입니다. 사실은 이 회개의 깊이가 사랑의 깊이입니다. 사랑의 깊이가 말씀을 깨닫는 깊이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는 이것들이 다 조각조각 떨어져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같이 엮어져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보세요. 회개가 풍부했던 때가 사실은 가장 순종을 많이 했던 때입니다. 그리고 가장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자신인 것이 너무나 죄송해서 눈물 흘리고 아파했던 때가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던 때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깨달았던 때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순종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순종 속에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운 하나님” 복음만이 우리를 견고케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전달해 주는 도구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는 짧은 문장의 의미가 성경의 모든 교훈 속에 녹아서 베일 때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율법도 만나지만 복음을 만납니다. 그 복음이 우리의 영혼의 생명과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무엇을 설교하던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 생명과 사랑을 줍니다. 그러니 복음을 더 깊이 그리고 친숙하게 알아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 복음 속에서 지식과 총명이 더하여져 가고 그 속에서 우리의 신앙은 견고한 신앙이 됩니다. 우리들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영적인 생명과 관련해서 견고함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전제로 합니다. 생명이 없이 서있는 것은 그냥 서있는 것이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견고함이 아닙니다. 전봇대를 그 무거운 콘크리트로 덩어리를 쳐 넣으면 뽑을 수 없지만 생명 있는 나무를 심어서 그 뿌리를 많이 내려서 그게 튼튼히 서있을 때 그 때 우리는 그 나무가 견고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견고함이 생명과 사랑으로 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를 순종하게 하고 복음에 끊임없이 순종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 복음 안에서 견고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신자가 이렇게 복음 때문에 순종하고 복음 때문에 견고해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중보자 삼으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해주시고 당신을 통해서 지식과 총명에서 자라가게 하셔서 사랑을 불러일으키시고 당신을 통해서 그 지식과 사랑 안에 견고하게 하시기 때문에 결국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후 그 영광을 우리하나님 아버지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우리를 견고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