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히 6:10)
녹취자: 장미연
히브리서 6장은 특히 우리에게 배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많은 빛을 받고 그리고 또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하였는데 그 사람이 복음을 배반하고 불신앙의 길을 걸어갔을 때 그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과연 한 번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도 다시 타락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용서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단언합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놓고 많은 논증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표준적인 해석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배교한 사람은 그 사람은 원래 구원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많은 개혁자들과 청교도의 표준적인 해석입니다.
오늘의 관심사는 사실 그 논증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다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 하면서 사도는 이 히브리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잘 예수를 믿는 것 같지만 배교해 버린 사람들이 있다고 우리들이 이야기를 하지만 너희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너희에게는 더 좋은 것 즉, 진정한 구원의 이르는 믿음이 너희에게 있다고 우리는 확신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10절이 나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표명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마음을 판단하시고 그 판단에는 착오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렇게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배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지만 여기서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단순히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자신의 온 삶과 고백으로 복음을 배반하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면 이 당시에는 예수를 믿다가 큰 핍박의 바람이 불어오니까 배교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냥 이렇게 어느 한 부분을 배교하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나는 내가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과 모든 것을 부인하고 심지어는 이교도가 되어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정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인데 그럴 수 있을까?’ (그런 혼란스러움 때문에 사도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한 번 구원하신 사람들을 결코 버리시는 법이 없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셔서 당신이 우리의 모든 삶의 행위와 마음을 판단하시는데도 착오가 없고 당신 자신이 불의한 일을 우리에게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면 사도의 이 첫 번째 가르침은 우리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든지 결국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 나타나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나의 살아가는 삶을 하나님이 안 보시는 것처럼 그리고 주님이 의로우신 분이 아니신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명백히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라고 말합니다. 휘지 않는 당신의 법으로 우리 모두를 감찰하시고 우리의 매일매일 살아가는 모든 삶이 주님의 판단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보시는 의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이 위로가 될 것이고, 불의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불안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로우신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 때 예전에는 자기가 이 모든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인생에 자기를 임금 삼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만큼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 임금이 되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정말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한 번쯤은 겸손해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리고 결국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분만이 우리의 삶에 흔들릴 수 없는 기준이 되시고 흔들릴 수 없는 규범이 되시고 흔들릴 수 없는 통치를 펼쳐 우리를 안정되게 살도록 만드시는 분이시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공정하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달아보시고 우리의 모든 삶에 주인이 되셔서 우리의 인생에 의미를 결정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나의 삶을 바라보시는 의로운 분이시니까 그분이 보실 때 합당하고 알맞은 삶을 살아야 되겠다.’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뻐하실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삶의 큰 길을 결정합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보기에 그런 일들이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하나님은 진실을 가장하거나 혹은 겉으로 보이는 인간의 모습에 의해서 현혹되지 않는 분이시고 언제나 살아있는 판단을 가지고 우리를 측정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섬김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제일 먼저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과 믿음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나 배교할 수 있었거나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차이가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말씀에 맛을 보고 내세에 능력을 경험하고 그것이 아니라 더 깊은 신자의 참됨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이 경험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그 무엇에 달린 거라고 그것이 바깥으로 나왔을 때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성도를 섬기고 있는 것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그 섬김이 구체적으로 성도들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성도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이미 교회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왜냐면 이 성도들은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부름을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이 성도를 부지런히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섬기는 동기가 두 가지가 나오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섬깁니다. 이것은 뭐냐면 한 사람, 한 사람 성도들을 잘 섬겨서 그 성도들이 그렇게 지식과 총명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고 그런 목양적인 돌봄 안에서 분별력을 갖고 그리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성도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목표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함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주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동기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마음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하나님의 복음 경륜 안에 합치시킨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거나 명예를 얻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결국 자신의 인생에 참된 의미와 기쁨은 하나님의 경륜이 성취되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데 인생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하나님의 경륜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자꾸 종교의 세계에서도 야망이 생깁니다.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인정받고 싶고, 저 사람의 지시를 받고 저 사람의 감독을 받기 보다는 내가 저 사람을 지배하여 내가 원하는 질서 속에 그 사람을 복종시키고 싶어 합니다. 그런 더러운 욕망이 속에서 솟아나옵니다. 그러니까 결국 동기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당신의 이름은 이 땅에 두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인간의 의해 높아지거나 낮아지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 이름이 정말 존귀하게 높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그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보면서 다른데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았던 것을 회개하게 만들고 그래서 자신을 임금삼아 살았던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내 인생에 의미를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찾을 수 있게 사람들을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제일 먼저 하도록 가르쳐 주신 기도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그 분의 이름을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관심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얼핏 보면 하나님의 이기심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내 인생에 의미를 내 인생 자체에 있는 것처럼 찾으면 그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그 질서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한 사람이 자기가 다만 하나님의 의에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찾게 됩니다. 그때 인간이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때만 인간이 분별력이 있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우리 모든 신자들의 최고의 기도 제목으로 삼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우리의 인생에서 나를 주인 삼았던 삶을 내려놓고 이것은 너무 목표가 없는 허무한 삶이라는 것을 생각 하면서 내려놓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연인을 만나고 세상에 기쁨과 즐거움에 취하고 해도 잠시이면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젊음을 쾌락 속에서 낭비하며 사는 사람은 30년 후에 자기가 그렇게 인생을 살았던 것이 마치 어음처럼 되어서 마지막에 돌아옵니다. 마지막에 파산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그러한 허무한 생각들이 파도처럼 계속 밀려옵니다. 그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은 싫증이 나고 매일 매일 지식을 탐구할 의욕은 없고 총명의 빛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사랑의 불은 꺼지고 인생의 분별력은 사라지고 진실하지도 않습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자신조차 속이면서 살아갑니다. 수시로 다른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자기도 넘어지는 허물이 있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한 번 죄와 쾌락으로 눈을 돌려봅니다. 끝없는 실연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들의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우리에게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 줄때는 전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환희와 기쁨 속에서 절정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 토막씩 보여줍니다. 그게 너무 예뻐 보입니다.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전편과 후편을 모두 연결해서 보면 그게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삶의 허물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흔들리지 않는 삶의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이 내 인생에 가장 큰 행복이다. 이걸 믿어야 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다고 했습니다. 정욕과 육신의 안목과 세상사랑 이런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영원히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그 경외 받으시는 그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래서 마음의 손을 얹고 한 번 자신의 삶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인가? 세상 자랑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날 위해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이번에는 내가 주님을 위해 세상의 영광과 자랑을 버린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당신 이름위해 살라고 하신 것은 결국 요동치며 불행해지는 나의 삶을 붙들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내 인생에 영원한 한분인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부르시는구나. 이걸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주님의 이름의 영광과 상관없이 살아온 날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티끌만한 섬김이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섬김의 두 번째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그래서 신자의 마음속에 진리의 빛이 사라지고 사랑의 불꽃이 식어 가면 결국은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아주 흉악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아주 모양이 좋지 않습니다. 흉한 모습이 됩니다. 이유가 뭐냐면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세상에서 주님과 상관없이 인생을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주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죽었던 영혼을 살리시는 방법이 마치 나뭇가지를 꺾어서 또 나뭇가지에 접붙여서 아시지요? 나무를 잘라서 나무를 깎아서 거기다가 접붙이고 묶어놓으면 그 나무 진액을 받으면서 그것이 접붙여 집니다. 그렇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세상에서 잘라져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접붙여진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비밀스러운 영적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그 생명을 받았으면 예수는 나에게만 생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구원받은 지체들에게 생명을 주셨고 이 한 생명은 우리 안에서 서로 유통하면서 흐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사랑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툽니다. 그 이유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이익에 어둡고 또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의 작은 이익 때문에 성도들이 교회를 아프게 하면서 끊임없이 다툽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영혼을 성도를 잘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섬기게 하신 것은 결국 사랑으로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하던 일인데도 성도들을 섬기고 심방하고 격려하고 돌보고 챙기고 말씀으로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간절히 빌고 하는 것들이 어느 한 순간에 말할 수 없이 무거운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사랑이 식을 때 옵니다. 사랑이 마음속에서 살아 있을 때는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들을 불러 성도를 섬기게 하는 것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그게 너무 힘들게 다가오고 사랑이 식고 은혜가 떨어지면 그렇게 됩니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히브리 교인들은 그 마음속에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듣기만 한 사람들은 다른 일을 할 수 있지만 주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영혼을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섬기지 않을 수 없는 사랑의 강제하는 힘이 내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리고 영혼을 섬기는 그 일이 힘들고 어렵지만 그것을 그만두었을 때 인생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깊은 허무를 느낍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유통하는 사랑입니다. 내가 받은 그 사랑을 성도들을 섬기면서 그 사랑을 흘려보내고 그 사랑 때문에 자기 사랑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이렇게 하면서 사랑이 함께 흘러가서 교회 전체가 그런 사랑으로 아주 아름답게 흐르는 그러한 공동체가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겁니다.
(예화) 가뭄이 심하다고 막 염려를 하고 나는 철이 들고 나서 7월 달에 모내는 해는 올해가 처음이었습니다. 농부들이 7월초에 모를 냈습니다. 농사가 잘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이유가 물이 없어서입니다. 그런데 농경지에 농지 정리가 잘 되어있는 곳을 보면 비행기를 타고 보면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있습니다. 바둑판으로 되어있는 수로에 물이 콱 넘치게 흐릅니다. 어느 논이든지 물댄 동산같이 곳곳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면 새파랗게 곡식들이 자랍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핏줄처럼 우리가 모두 함께 얽혀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끊임없이 흐를 때 그때 교회 전체에서 파릇파릇한 섬김의 새싹들이 자라납니다. 그리고 그 새싹은 결국 나무가 되고 가지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것과 나의 이 섬김을 통해서 한 사람 한사람의 지체가 점점 더 지식과 총명으로 그 사랑이 풍성해져서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없이 살 수 있도록 이바지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에게 없는 지식을 주시고 총명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와 은사는 그 주신 목적을 따라서 살아갈 때 그것은 우리 안에서 점점 더 풍성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그나마 믿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들이 소중한 시간을 내어서 오늘 여기서 말씀을 듣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엮여있습니다. 그러면 최선은 맨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처음 경험한 사랑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우리가 즉시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고 우리가 기쁨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자기 사랑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제는 하나님을 떠나 내 인생에 지도를 그리지 말자. 나를 위해서 자기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신 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니까 나는 내 인생에 현재와 미래를 그분의 손에 맡길 수 있습니다. 하고 우리의 인생을 그분의 손에 내려놓는 것 그리고 나의 인생의 꿈을 나를 선택하고 나를 부르신 복음의 경륜 안에 적응시키고 그 속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을 한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초심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뭔가 새로운 것 우리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우리의 깜냥이 아닌 어떤 영웅적인 일을 하라고 주님이 우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맨 처음에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가장 중요한 목적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끊임없이 무엇을 해서 신분을 상승시키는 삶이 아닙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 분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너희에 섬김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시다.”라고 말입니다. 지금 섬기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내려놓은 섬김들은 다시 되찾으십시오. 여러분들의 인생에서 목표와 목적이 하나님의 경륜에 알맞게 하십시오. 그러면서 살아갈 때 의로우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올바른 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섬김, 복된 인생을 살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