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목회신학대학원 개강수련회
Ⅰ. 서론
저에게 존 오웬에 대해서 강의를 해달라고 하는데 사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다 다룰 수 있는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한 대목인데……. 존 오웬에 대해서 그래도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존 오웬의 책을 한권이라도 끝까지 읽으신 분들이 아마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책도 그렇게 많지 않고 그리고 또 나와 있는 책들은 워낙 번역이 어렵게 되어서 친근하게 그렇게 여러분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이제 오늘의 강의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존 오웬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그리고 ‘내가 이사람 좀 한번 읽어보아야겠다.’ 그런 마음을 여러분들이 갖게 된다면 그것으로서 이번 강의는 의미가 있는 강의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존 오웬에 대해서는 제가 진 빚이 너무 많고요, 이제 제 강의를 듣고 나서 집에 가셔서 그 책을 찬찬히 읽어보시면 제가 그 책을 정확하게 말하면 이틀 만에 썼습니다. 이틀 만에 썼고, 좀 상세히 말하자면 삼일 만에 썼는데 제가 그렇게 쓸 수 있었던 것은 뭐냐 하면 평소에 존 오웬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착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그렇게 쓸 수 있었습니다.
존 오웬은 저의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커다란 자극을 준 인물이었습니다. 저는 1988년도와 1989년도 사이에 모종의 깊은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면서 청교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어요. 그때는 이미 벌써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을 때의 일이었는데 그러면서 이제 청교도의 실천적인 특성, 하나님을 향한 탁월한 열심과, 그리고 성경적인 경건, 이런 것들에 대해서 깊이 흠모하면서 이제 청교도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쪽의 책들을 좀 읽었어요. 그리고 열심히 그쪽 책들을 수집하고 모았어요. 지금도 제 서가에 청교도에 관한 책이 적지 않아요. 한 2500권 정도를 청교도에 관한 책들로 가지고 있는데 그 청교도들 중에서 이 존 오웬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의 책이 지금 24권으로 되어있습니다. 페이지로 따지면 한 17000페이지 되는 깨알 같은 영어글씨로 18000페이지 되는 그런 책인데 그 당시에는 이 사람에 대한 책들이 번역된 것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청교도들을 그렇게 좋아하고 있었는데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어요.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1993년도에 열린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어요. 1년쯤 되었을 때인데 사실 그 때는 이제 교수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했어요. 그런데 자만은 아니지만 1년 열심히 전도하고 설교하면 설마 300명이야 안모일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교회를 개척을 했지요. 자만심은 아니고 그렇게 교회를 개척을 했고 이미 개척할 때쯤에는 저 나름대로 이제는 내가 어디다 내어놔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래도 말씀되게 설교할 준비가 어느 정도는 되어있는 것 같다는 스스로의 위로가 있었어요. 그랬고, 실제로 12월 12일에 7명이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어쨌든 1월 달에 예배시간에 한 30명이 모였으니까 그러니까 1년 열심히 하면 300명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국은 1년 동안에 학교는 학교대로 가서 봉사를 해야 되고 그러면서도 그 때는 밖으로 집회를 많이 다녔어요. 그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밖에서 열심히 사역하고 주일날 와서 설교를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막 부어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니까 성도들이 주일이면 펑펑 울면서 예배를 드리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상하고 놀랍게 교회는 성장을 안 한 것이에요. 다른 교회의 교인들이 와서 은혜를 받고 그리고 예배참석은 하는데 두 가지는 절대로 안 해요. 등록과 헌금……. 그래서 목회가 아직 무엇인지 몰랐던 때였지요.
그러다가 1년쯤 되었는데 제가 거의 burn out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 도저히 어떻게 할 힘도 없고 몸까지 아픈 것이에요. 그래서 아파서 드러누워서 ‘하나님 나는 아무래도 목회에 자질이 없는 사람이 실수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낙심하고 있는데 마음속에 ‘야 존 오웬을 한번 읽어보아라.’ 어렴풋이 존 오웬이 이렇게 말하자면 영적으로 깊은 침체 속에 떨어졌을 때에 어떻게 벗어나는지에 대한 비결을 가르쳐주는데 있어서 탁월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언제 사다놓고 읽지 않고 있었던 존 오웬의 책 24권중에서 내가 고민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을 다루는 것이 어디인가 보니까 6권과 7권이에요. 그래서 6권을 쑥 빼서 거기에 보니까 제일 처음에 On the Mortification of Sin 이라는 제목이 나와요. 그래서 그것을 펼쳐놓고 읽기 시작했어요. 알다시피 이 청교도의 영어가 400년 전입니다. 1616년생이니까 정확히 400년 전이에요. 그리고 존 오웬의 글쓰기는 그렇게 친절하고 그런 글쓰기가 아니에요. 아주 격정적으로 화산이 폭발하듯이 그냥 확 쏟아놓는, 그러면서도 막 꼬치꼬치 캐고 드는 그런 글이었거든요. 저는 영어를 그렇게 못하지는 않는데 보는데 글이 여태까지 읽은 글하고는 무게감이 틀려요. 그래도 뭐 기본은 하니까 침대에 누워서 6권을 찬찬히 읽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내가 여기다가도 썼는데 막 침대에 누워서 이 책을 읽는데 여태까지 내가 한 번도 들어가 본적이 없는 그런 말씀의 세계 속으로 나를 데려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책을 읽다가 ‘야 이거 참 기가 막히다…….’ 이런 적은 있잖아요. 그런데 온 몸에서 소름이 쫙 돋는 거예요. 그 진리에 대한 어떤 인식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쭉 읽어나가는데 아니 칼날 같은 논리, 폭풍 같은 감동, 불같은 사랑, 따뜻한 이런 것들이 막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 오죽했으면 제가 3일 동안을 앓았는데 그 책을 읽고 집에서 절대로 안 나오고 침대에 베개를 베고 기대어서 줄을 치면서 그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읽었는데 오죽했으면 우리 집사람보고 그랬어요. ‘여보,’ ‘왜?’ ‘여보, 이 책 좀 한번 봐. 여보, 우리는 여태까지 짐승같이 살았어. 여보, 우리는 짐승이야.’ 그때 제가 생각난 단어가 그것이었어요. 그러면서 그 순간이 제가 이제껏 까지 배워온 신학의 세계와는 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경험과 이론을 통합하는 말하자면 청교도의 신학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는 순간이었어요.
이전에도 청교도의 책들은 꽤 읽었거든요. 그런데 비유를 하자면 이전에 읽었던 청교도의 책은 초등학교 학생들의 책이에요. 이 사람 책은 대학생 책이에요. 후에 나중에 더 공부를 하면서 이 사람의 이러한 엄청난 신학적인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이렇게 웅장한 구조를 갖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나중에 개혁신학사의 측면에서 새로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아! 그런데 어마어마했어요. 그리고 막 순식간에 읽으면서 엄청난 감동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이제 그 때부터 읽기 계속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읽기 시작하다가 이제 그 후에 목회를 하는 동안에, 그 다음에 학교를 아직 못 떠났기 때문에 사실 아주 엄청나게 조금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마 학교에 계속 있었으면 공부를 계속 못했을 거예요. 얼마나 일이 많은지 눈코를 뜰 새가 없어요. 그렇지요. 교회는 교회대로 해야지요. 새벽기도 다 나와야지요. 그러면서도 그 당시에 제가 그저 한 석 달에 책 한권씩을 쓸 정도로 그렇게 건강을 소진하면서 그렇게 살았거든요. 그리고 몇 해가 흐르고 나서 학교를 그만두고 나니까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역시 한 가지만 해야 되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2년 있다가 그 교회가 도저히 안 되어서 한 천명이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으로 옮기고 간지 다시 한 삼년 만에 도저히 안 되어서 이쪽으로 7년 전에 온 것이거든요. 그러고 나서 다시 틈틈이 오웬을 읽었지만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제 전집이 16권으로 되어있고 8권은 히브리서 주석이고 그 다음에 1권이 비브리까데알라지라고 해서 성경 신학에 대한 논문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25권인데 그래서 이제 히브리서 주석은 내놓고 그리고 전집 16권하고 이 책을 가지고 제가 여러 해 동안 10년 가까이 씨름을 했어요. 그 때에 받은 감동과 이런 것들은 이루 말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이제 공부를 하면서 한 15년 동안 이분에게 배우면서 나는 존 오웬에게서 멘토링을 받았다고 자부하고요. 그래서 항상 목회나 경건이나 문제가 생길 때에 오웬 목사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안 읽은 부분도 읽고 또 신학적인 논의들도 더 많이 공부해야 되겠지만 그러나 원천적으로 이 존 오웬의 신학을 통해서 많이 배우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릴수가 있겠습니다.
Ⅱ. 존 오웬은 누구인가?
그런데 요즘에 이 존 오웬은 쉽게 얘기하면 청교도들 중에서도 아주 거목에 속하는 사람이에요. 비유를 하자면 이 사람은 다른 많은 청교도들이 묘목이면 이 사람은 남대문을 복원하는데 쓸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거목이에요. 사실 그 전에 청교도의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오웬에 심취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사실 다른 청교도의 글들이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수준 자체가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이제 이분의 신학 책에 아주 깊이 몰두를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요. 1616년에 태어나서 오십 몇 세까지 살다가 죽는데 이 사람의 때가 어느 때였느냐 하면 이 사람은 영국의 성공회 치하에서 태어나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자라고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 사람이 옥스퍼드에 들어가게 되는데 옥스퍼드 안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파트가 퀸스 칼리지였는데 지금도 있어요. 거기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사람의 시대가 바로 여러분들이 역사 속에서 잘 아는 올리버 크롬웰이 혁명을 일으켰던 청교도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혁명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왕정 복고운동이 일어나는 어간에 살았던 사람이고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있었던 그런 시기였지요. 만약에 혁명이 성공을 했더라면 여러분은 아마 오웬의 위치나 이런 것들은 엄청나게 달라졌겠지요. 그런데 결국은 그 혁명의 기간 동안에 이 올리브 크롬웰이 이 사람을 군목으로 임명합니다. 그래서 올리버 크롬웰도 오웬을 깊이 존경하는데 올리버 크롬웰이 왕이 되려고 했어요. 그 속셈을 알고 정면으로 맞서게 되지요. 그래서 결국은 고난의 길에 접어들게 되고 혹은 또 올리버 크롬웰과 그렇게 결별을 했기 때문에 왕정이 복고된 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설도 있어요.
어쨌든 이 사람이 이제 그 요새 새로 조명을 받게 되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요새 지금 소위 얘기하는 개혁파 정통주의 그래서 우리는 이 개혁주의의 유산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 하나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수되어 내려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고 칼빈의 전후좌우앞뒤로 직물처럼 조직되어 있는 가운데 사실은 칼빈은 그 하나의 무늬에요. 그러니까 칼빈은 혼자 그것을 세운 것이 아니라 좌우로 동시대에 많은 개혁신학자들과 협력을 했고 일생동안 4000여 통의 편지를 쓰게 됩니다. 이 편지들 중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대륙에 있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오고갔던 신학적 서신들이에요. 그리고 앞으로는 이제 이전에 있었던 종교개혁 말기에 그런 철학자들, 그 다음에 스콜라주의자들, 중세 철학자들, 그 다음에 앞으로는 중세의 교부, 그다음에 더 앞으로는 고대의 교부들, 그리고 그 앞으로는 속사도 교부들과, 성경, 이렇게 연결이 되면서 칼빈이 지적 유산을 가지고 기독교 강요를 쓰게 되고 그리고 소위 얘기하는 칼빈오페라라고 하는 그 여러 가지 작품들을 쓰게 되는데 이 칼빈의 신학이 뒤에 베자 그 이후의 세대들로 내려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이제 칼빈의 신학이 아주 정교하게 발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자신들이 믿는 기독교 신앙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내적인 욕구와 그 다음에 외적으로는 벨라르민 같은 탁월한 가톨릭 신학자들이 나타나서 이제 종교개혁을 말하자면 정치적인 논쟁의 대상이 아닌 신학적으로 공격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이러한 공격에 대해서 방어를 하기 위해서 또 종교개혁 어간에도 일어나기 시작한 수많은 개신교 안의 이단들로부터 정통적인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이제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엮어놓은 이 신학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상세하게 기독교 신학을 설명하는 작업을 해나가게 됩니다. 칼빈 자신도 이렇게 해야 될 필요를 말년에는 충분히 느끼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의 신학이 발전하는 것을 이제 허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래서 그 베자로부터 그 이후에 이어지게 되는데 칼빈이 왜 그렇게 종교개혁 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느냐하면 신학적인 독창성면에 있어서는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사람의 판단에 의하면 신학적 독창성에 있어서는 칼빈보다는 루터가 훨씬 뛰어나다고 보는 것이죠. 칼빈은 있는 것들을 잘 종합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끼친 영향이 루터와는 비교가 안 되는 중요한 이유가 뭐냐 하면 제네바아카데미라는 신학교를 가지고 있었어요. 여기에서 일 년에 600명에서 900명씩 이 학교를 입학했어요. 그러니까 총신만 큰 게 아니라 이 제노바신학교도 막강하게 큰 신학교였어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전문적으로 이 개혁신학을 고도로 훈련받은 사람들이 구라파 각지로 제네바의 스위스 신학을 실어 나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존 오웬이 오늘날 재조명 받고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저도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존 오웬은 영국 청교도들 가운데 아주 걸출한 그런 학문과 지식을 겸비한 뛰어난 학자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존 오웬은 영국청교도 중에서 위대한 사람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대륙에서 일어났던 개혁파 정통주의의 큰 물줄기 속에서 그러니까 그 유명한 프란시스 튜레틴이라고 하는 이 제네바 아카데미의 사람과 거의 동시대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베자이후의 사람들이죠. 개혁파 정통주의가 항상 절정에 다다랐을 때에 그 때에 말하자면 그 학풍을 그대로 이어받은 그러한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한 산맥인데 다만 이 사람이 대륙에서 활동을 안 하고 영국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자꾸 영국에 국한되어서 이해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요새 이제 다시 개혁파 정통주의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이 청교도 신학의 유산들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이 사람이 바로 대륙에서 뻗어 나온 개혁파 정통주의의 산맥이 영국청교도의 산맥으로 이어지는 그 최고봉이었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쪽으로는 영국청교도의 영적인 유산들의 근원이 되고 저쪽으로는 이제 튜레틴이나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이어오는 구라파의 개혁파 정통주의 역사에 거대한 산봉우리를 이루는 인물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보니까 이제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한 연구가 다시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칼빈과 칼빈 이후에 학자들 사이에 계속해서 불연속성만 있다고 보았던 것을 이제는 70년대 이후에 새로운 연구들이 이루어지면서 불연속성보다는 연속성이 훨씬 더 많다는 판단을 가지고 새로운 태제들이 등장을 하게 되어요. 그래서 이 시대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는 가운데 이제 영국의 개혁주의 신학의 거봉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오웬을 거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영국의 이런 거봉이 몇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이전에 있었던 윌리엄 아메시우스라는 사람과 에임스라고도 하는데 그리고 여러분들이 잘 아는 윌리엄 퍼킨스 그리고 존 오웬 이런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지난해에도 캠브리지대학교에서 '존 오웬 투데이'라는 논제를 가지고 이 개혁파 정통주의자로서의 존 오웬에 대한 연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생애는 나중에 거기서 읽어보십시오.
Ⅲ. 존 오웬의 학문적 배경
읽어보는데 오늘 이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뭐냐 하면 존 오웬의 학문적인 배경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죠. 이 존 오웬이 13살 되던 해에 옥스퍼드에 입학하고 그리고 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신학사 과정에 들어갔는데 공부는 결국은 못 마치게 됩니다. 종교개혁의 상황 때문이었죠. 그래서 이제 그만두고 혼자 공부를 하게 되는데 이 사람은 이제 그래도 옥스퍼드 대학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이 사람에게 큰 학문적인 영향을 끼쳤던 두 인물이 있었는데 토마스 발로와 존 프리도 라는 사람이었어요. 이 두 교수가 신학과 철학 이런 것들에 대한 아주 풍부한 가르침을 물려주게 됩니다. 우선 이 존 오웬의 신학의 배경은 한 대여섯 가지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데
(1)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
우선 첫째는 기본적으로 이 사람의 학문의 뼈대가 되는 것은 성경과 개혁주의에요. 그래서 이제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이에요. 그래서 목회자의 가정에서 철저한 개혁주의 신앙을 물려받기도 했지만 특별히 성경에 대한 탁월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서 성경을 굉장히 많이 읽은 것으로 여겨져요. 개인적인 간증이나 이런 것들이 안 나와서 모르는데 무엇을 보면 알수있느냐하면 신학논쟁을 하면서 우리는 그런 성경구절이 거기에 그렇게 있었나? 할 정도로 그 요소, 요소에서 정확하게 찾아내서 자기의 신학논쟁에 활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존 오웬만의 특성이 아니라 당시의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의 공통점이었어요. 성경에 대한 충실한 사랑과 헌신 이것이 말하자면 개혁신학자들이 신학을 하는데 있어서 기본이었어요.
이 사람이 이제 아주 원문에 대해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공통점은 어학에 아주 능한 사람들이었어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원래 인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존 오웬도 이런 전통을 따라서 성경 원어에 대한 훈련이 철저히 되어있었어요. 그래서 희랍어, 히브리어, 70인역, 그리고 심지어는 고대 랍비들의 자료들을 자유롭게 읽어낼 수 있었고요. 라틴어는 영어보다 더 잘했다고 해요. 그래서 그 디브리칼라지라는 책은 아프로레고메나라고도 불리는데 원래 라틴어로 기록을 했고요.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는데 존 칼빈의 로마서를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 존 오웬입니다. 그때에 벌써 번역해냈던 것이죠. 그리고 그 다음에 고대 랍비들의 자료들은 물론이고 희랍교부들, 라틴교부들, 희랍어는 그 위로 올라가서 희랍고대의 신화들을 읽어낼 수 있는 희랍어. 심지어 호모와 일리아드오디세이 이런 글들까지 자유자재로 인용할 수 있을 정도로 어학의 훈련이 철저하게 되었던 사람이에요. 제가 작년에 영국에 갔을 때 도대체 이 사람의 장서가 어떻게 되어있을까 하고 이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대개 외국에서는 목회자들이 죽으면 그가 가지고 있던 장서들을 옥션에 붙여버립니다. 그 때 그 옥션목록을 아주 힘들게 옥스퍼드대학에서 구했어요. 그런데 그 목록을 보니까 이분이 아랍어까지 하셨어요. 그래서 그 아랍어사전이 두 권이나 나왔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플라톤의 주석부터 시작해서 아무튼 그 목록을 보면 그 사람의 학문의 배경을 알게 되잖아요. 그런데 아주 폭넓은 책들을 가지고 계셨고요.
그렇게 하면서 이제 교리를 전개해 나갈 때에 이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분만의 특징이 아니라 제네바아카데미의 학자들을 포함해서 신학이 완전히 이성주의로 넘어가지 전까지 중기까지 철저한 원칙이 어떤 교리를 세울 때 성경을 철저히 주해하면서 교리를 세우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신학의 중요한 논점들을 원어를 가지고 해설을 하면서 자기의 주장 점들을 전개해나가는 것이죠. 그것이 이제 이 사람의 특징이었어요. 이러한 성경에 대한 철저한 해석의 작업은 이제 두 가지 요소와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철저한 성경에 대한 해석, 그 다음에 두 번째 지평이 무엇이냐 하면 이제까지 그 교리에 대해서 논의되어왔던 역사, 이게 기본적으로 이 사람 속에는 희랍교부들과 그 다음에 서방교부들의 신학적 유산, 그 책이 몇 년 전에 독일에서 터널키 새판이 1950몇 년도 부터 다시 새로 비평본이 출간이 되거든요. 말하자면 교부전집이에요. 그 때의 목록을 다 헤아려보니까 한 460권에서 500권 정도가 되더라고요. 희랍교부들의 문헌과 라틴교부들의 문헌이……. 그런데 사실 그것이 모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쨌든 거의 모을 수 있는 것들은 모아서 비평장식까지 달았는데 이 자료 속에 나오는 신학에 대한 논의들이 이 당시의 걸출한 신학자들 속에는 거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던 것이에요.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자기가 성경을 해석해 낸 것, 그 다음에 그 교부들의 해석, 물론 거기에는 중세 가톨릭에 속한 사람들까지 다 들어가요.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지평이 무엇이냐 하면 당시의 개혁신학자들의 해석, 그 다음에 마지막 네 번째 들어가는 것이 자기 자신의 신학의 경험, 이것들을 모두 녹여내서 그래서 자신만의 신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교리를 진술해 나갔던 것이에요.
이런 성경에 대한 철저한 사랑은 개혁신학에 대한 훈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성경에 충실했던 신학자들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가지고 그들의 작품들을 천착하며 연구하고 친근하게 지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마틴 부처, 존 칼빈, 피터 버미글리, 테오도르 베자, 볼프강 무스쿨루스, 하인리히 불링거, 윌리엄 에임스, 윌리엄 퍼킨스, 그 다음에 저쪽 화란의 신학자들인 프란시스쿠스 유니우스, 요한네스 피스카토르,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 독일의 히에로니무스 잔키우스, 프랜시스 튜레틴, 슈펜하임, 사르피우스, 이런 제네바의 신학자들과, 조사들과 깊은 교분을 갖게 됩니다. 이때에 쏟아져 나온 것이죠.
그러니까 저는 어제도 주일날 설교하면서 그런 얘기를 드렸는데 저는 이런 배경들을 공부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제가 스승처럼 생각하고 오랫동안 그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을 공부해오고 있는데 저의 목회에도 대단히 많은 영향을 준분입니다. 저의 신학의 눈을 뜨게 해준 분인데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면서부터는 기독교인이 된 것에 깊은 자부심을 느꼈는데 이 개혁파 정통주의를 공부하면서부터는 내가 기독교의 갈래 중에서 개혁파 정통주의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거의 천재들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리고 그 천재성을 가지고 성경을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경건한 천재들이 신학을 쏟아내는 것이에요. 그 깊이는 어마어마합니다. 제가 작년에 이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한 자료들, 대부분 라틴어로 되어있고요. 그리고 불어, 화란어, 그렇지 않으면 다행히 영어로 되어있는 경우도 있는데 어쨌든 이쪽에 있는 자료들을 제가 한 500권 정도를 구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가 제일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자료들의 목록만 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논의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가톨릭하고 겨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이론들과 신학의 깊이들이 갖춰지게 되요. 그런 속에서 성경을 철저히 사랑했던 그런 탁월한 신학자들의 그 엄청난 저술들을 접하면서 그러면서 이 사람이 그것을 지적인 영양분으로 삼았던 것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의 첫 번째 학문의 배경이 성경과 개혁신학이라는 것입니다.
(2) 인문주의 교육
그리고 이 사람의 두 번째 배경은 인문주의 교육이에요. 여러분 인문주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이제 그 이전까지는 중세시대에 신 중심의 세계관이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이었어요. 그래서 뭐냐 하면 인간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것이고, 인간은 하나님 한분을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인간의 모든 살길은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모든 질서나 이런 것들이 체계를 갖추게 되고 특별히 이것이 로마 가톨릭에 교권체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통치가 가시적인 교회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니, 교회는 다스리는 사제들이 이제 다스림을 받는 평신도들, 가르치는 교회가 가르침을 받는 교회들을 통솔하면서 이제 이끌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이죠. 그런데 르네상스가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냐? 인간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인간에 대한 재발견이 희랍의 역사와 고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촉발이 되요. 왜 희랍의 고전과 연구를 통해서 이런 인문주의 사상들이 촉발되었느냐하면 사실 그리스를 여행해보면 이 세상에서 신앙을 떠나서 생각해보자면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인간답게 살던 시기를 들라면 희랍시대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희랍시대에 인간이 모든 사유에 있어서 중심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희랍신화에서 보면 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신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사는 모습들을 투영해 놓은 신이에요. 그러니까 그 신을 공경하고 경배하는 것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유일신적인 이런 종교적인 숭배가 아니죠. 그런데 그 희랍이야기가 나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만 어쨌든 거두절미하고 그렇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았던 그러한 시기가 말하자면 희랍시대였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이 시대에 문헌들뿐만 아니라 고전을 연구해나가면서 이제 옛날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라는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사실은 그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희랍의 신화나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그 고대의 사상들에 대한 연구에 필요하니까 있었겠지만 인문주의에 의해서 이것들이 새로운 해석의 옷을 입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고전에 대한 강조의 때에 나타나던 시기의 사람들이 에라스무스 같은 사람이거든요. 이런 사람이 탁월하게 희랍어를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니까 그다음에 뭐냐 하면 성경을 한번 원어로 읽는, 고전 연구의 일환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 때에 회의를 품기 시작하면서 과연 우리가 중세교회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있는 이 기독교신앙의 본질에 대한 설명들이 과연 정말 이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인가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회의론들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죠.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들도 있었고요. 이런데다가 중세시대에 들어오면서 아주 획일적으로 관념론으로 지배되어오던 이런 중세철학의 기반이 유명론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이제 인간의 위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하게 떠오르게 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종합되면서 이제 인문주의 교육이 교회 속에 침투되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 사람도 역시 그런 인문주의의 영향권 안에서 그렇게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이 사람의 이러한 공부는 몇 가지를 보여주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성경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이 쓴 신학서론이라는 책에서 성경의 역사뿐만 아니라 성경 밖에 있는 역사까지 넘나들면서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 점을 개진하며 역사를 해석하는 시야들을 갖게 되는데 이런 것들은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해석뿐 아니라 이 사실을 해석하는 역사관에 있어서도 철저히 준비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이제 인접학문에 대한 지식을 넓히게 되는데 철학, 문학, 논리학, 수사학, 천문학,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을 섭렵하였으며 이것이 이제 이러한 신학 서론 같은 책들을 진술해나가는데 있어서 아주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개혁신학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희랍의 고전과 고대 문학, 유대교의 자료와 역사, 이런 지식이 아주 풍부해서 그래서 성경을 해설하고 개혁파 교리를 옹호하면서도 그가 많은 이 세속의 자료들을 넘나들면서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본성적 지식 같은 것들을 입증하는 방증자료로 사용하게 되요. 칼빈주의의 5대 교리를 튤립이라고 부르는데 그중에서 가장 먼저 심각하게 공격을 받았던 것이 L이에요. Limited Atonement(제한 속죄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위한 죽음이었느냐? 선택한자들만을 위한 죽음이었느냐? 하는 논쟁이었어요. 이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7년에 걸쳐서 책을 한권 쓰게 되는데 그 책이 바로 제목도 이상한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라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신자의 죽음의 종식이라는 책을 씁니다. 이 책속에서 악한 자들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논증하는 가운데 유리피데스, 헵, 오더스, 호모, 호라치우스, 아이리아누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우투스, 스웨니투스, 플리니우스, 베르길리우스, 등등의 작품들을 거론하게 되는데 수백 권의 책들이 인용됩니다. 이 지식이 참된 지식이 될 수 없고, 그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자기의 신학을 전개해갈 때에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분적으로 있다는 이 개혁파의 교리를 방증하는 자료로 이 고대문학을 넘나드는 이것으로 볼 때에 이 사람이 인문주의에 의해서 철저하게 훈련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3) 고대와 중세의 교부학
세 번째는 고대와 중세의 교부학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것은 사실은 오늘날 우리 교육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에요. 뭐냐 하면 오늘 내가 성경을 읽다가 어떤 진리를 발견하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리수도 있잖아요. 또 맞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이것에 대해서 발견해온 많은 발견의 궤적들이 있잖아요. 거기에서 자기가 발견한 것을 비추어볼 때에 여기에서 내가 발견한 것이 정당하게 성경을 해석한 것인지……. 등등에 대한 반성, 그리고 대적 자들이 이것을 내가 이것을 해석했을 때에 어떻게 악용해서 말하자면 문제를 일으켰는가? 하는 등등의 반성들을 할 수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전혀 공부를 안 하는 것이죠.
저는 지금 50대 중반입니다만 뼈저리게 후회가 되는 게 뭐냐 하면 저도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까지 교회를 사역하면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거의 밤잠을 안자고 저 나름대로 그래도 성실하게 공부를 하려고 애를 썼고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한 것이 많지만 늘 내 마음속에 하는 이야기가 내가 다시 한 번 신학대학원을 들어가도 나는 그 이상은 살수 없을 정도로 사실은 최선을 다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50대 중반에 와서 신학이 무엇인지를 이제 대충 얼개를 알고 나니까 뼈저리게 후회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라틴어 공부를 철저하게 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요. 물론 그 때도 라틴어를 공부했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험 때문이었어요. 저희 때는 신학대학원 입학시험에 라틴어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두 달 동안 코피 터지게 공부를 해서 쪽지시험을 봐서 그것을 가지고 MD부 과정을 뽑았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벼락치기로 했으니까 하루에 150개씩 단어를 외웠는데 그게 뭐 얼마나 머리에 남겠어요. 그 이후로 계속 공부를 해서 지금쯤에는 우리말을 읽는 것처럼은 안 되더라도 영어를 읽는 것처럼 자유롭게 라틴문헌을 읽을 수 있었더라면 내가 신학에 날개를 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나이 50이 돼서야 라틴어 과외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결국은 까막눈은 면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교회사속에 나오는 이런 거창한 작품들을 단숨에 읽어내기에는 이제는 역부족이고 아마 제 생애에 그런 꿈들이 이루어지기가 힘들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요. 문제가 되는 부분이나 이런 것들을 대조할 수 있을 정도로 만족을 해야 되지 않는가? 정도로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 당시에는 신학을 하면 이 두 가지는 기본이었어요. 그래서 뭐냐 하면 교회의 역사를 보면 서방교부들과 동방교부들로 나눠지잖아요. 그래서 물론 동방교부들은 그 이후로 넘어가면서 이제 신비주의 계통에 빠지면서 신학적인 가치가 별로 없는 글들이 나오지만 그러나 갑바도기아학파 교부들의 글 같은 것들은 그것의 중요성을 그렇게 무시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동방교부들과 초창기에는 이 동방신학이 훨씬 더 강했습니다. 그래서 이 동방교부들의 문헌을 읽어낼 수 있는 희랍어 지식과 서방교부들의 문헌을 읽는 라틴어 지식, 이 두 가지가 모든 신학자들이 거의 완벽하게 구비되지 않으면 사실 신학을 할 수가 없어요. 지금은 그저 뭐 학교도 안다니고 그냥 소명을 받았다고 그러면서 신학교에 들어오지만 그 때에 목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신학자가 된다,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말하자면 오늘날 소명을 느끼는 사람이 의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다루는 신학의 내용들이 그 공부를 못하고는 접근을 할 수 없는 것이었죠. 그래서 귀족집안의 사람들이 대개 목회자가 많이 되었지요. 그래서 철저하게 청소년기에 이 교육을 받고 고전의 문헌을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접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들어가면서부터 읽어야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저기 속사도 교부의 글부터 시작을 해서 그 다음에 자기의 개혁파 학자들에게까지 내려오는 이 글들을 끊임없이 읽어야 했어요. 모국어처럼 했으니까 400권이라고 해봐야 그것 1년? 1년이면 조금 벅차나? 2년 정도면 읽지 않겠어요? 바짝 덤벼들어서 이틀에 한권씩만 던지면 읽지 않겠어요. 그런 정도의 독서량은 기본이었기 때문에 그런 고대와 중세의 교부들을 천착하면서 쭉 읽어낸 것이죠.
그러니까 고대의 교부들의 어떤 신학적인 문제점이 나오면 이것들에 대한 교부들의 의견들을 쭉 전개하다가 심지어는 아예 희랍어 문헌과 라틴어 문헌을 한 페이지, 두 페이지씩 원문을 해석도 없이 인용을 해요. 그리고 그냥 자기의 담론을 풀어나가는 것이죠. 그래서 그러나 이 모든 교부의 문헌들을 모두 권위 있게 인용한 것은 아니에요. 자기의 신학적인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것들을 골라서 그래서 자유자재로 인용할 수 있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폴리캅, 이레니우스, 클레멘트, 키프리아누스, 예루살렘의 시릴, 아타나시우스, 암브로시우스, 프로스퍼, 알레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바질, 스테플톤, 그 다음에 만 투아, 만투아에밥티프스, 카노, 발렌티아의 그레고리, 아벨라르도스, 안셀무스, 피터 롬바르드, 끌레보르의 베르나르, 다메섹의 요한, 겐트의 헨리, 알렉산더, 보나벤투라, 이런 사람들의 글들이 쉼 없이 쏟아져 들어오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제 이 사람의 교부문헌에 대한 사용은 교부의 성경해석과 신학을 자신의 신학을 세우는데 있어서 중요한 원천으로 삼게 됩니다. 그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원천은 성경이었지만 성경과 부합하는 교부들의 사상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자신의 신앙적 논지를 세우는데 방증자료로 활용하였던 것입니다.
둘째의 특징은 과거교부들을 당대의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조망해서 그래서 자기 자신의 신학에 활용하였다는 것이죠. 이 사람이 신학을 전개해나가는 방법론에 있어서 아퀴나스주의자였어요. 그러면 이 사람은 아퀴나스의 신학적 철학에 동의하느냐? 그것은 전혀 아니죠. 그러나 이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설명해나감에 있어서 그 방법론의 틀들을 중세 철학에 아퀴나스가 사용했던 틀들을 많이 사용했던 것이에요. 그래서 놀랍게도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가운데 70% 이상이 신학방법론에 있어서 아퀴나스주의자들입니다. 내용은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것이었지만 그것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효율성이 아퀴나스의 철학적 신학의 틀에 있다고 보고 그래서 아퀴나스의 방식을 따라서 이 신학을 수립해 나갔던 것이죠. 때로는 아퀴나스의 그 틀을 가지고 아퀴나스를 비판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이 아퀴나스의 신학의 틀의 사용이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요긴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4)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주의
이 존 오웬의 네 번째 특징이 스콜라주의입니다. 스콜라주의라고 할 때 이 스콜라라는 말은 희랍어 스콜레에서 왔는데 ‘한가한’ 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스콜라라고하는 것에서 영어의 스쿨이 오는데 학교라고 하는 것은 한가한 사람들이 다니는 것이지 이렇게 고달픈 사람들이 다니던 곳이 아니었어요. 원래 이 학교의 유래가 뭐냐 하면 귀족들이 만날 먹고 그저 만찬이나 하고 오찬을 하고 떠들고 차를 마시고 그랬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그러지 말고 우리 양반시대로 말하면 중인들 중에 전문가들이 많잖아요. 의사들도 많고, 세계를 여행하고 온 사람들도 많고 하니까 그런 인간을 하나 불러다가 심심하니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하는 것이 학교의 시작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제 먹고 이 사람은 말하자면 쇼를 하듯이 그렇게 자리에 앉아있는 귀족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실 저는 자연학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인데 제가 오랫동안 별들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별 이야기를 쭉 하는 것이에요. 해부면 해부학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그런데서 이제 말하자면 그 모임이 지적으로 얼마나 유식해지고 고상해지겠어요. 그렇게 하는 수단으로서 이제 이런 공부를 시작하다가 이것이 전문적인 학교의 형태로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스콜라주의는 스콜라주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이 중세 전체를 가리켜서 스콜라주의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부터 한 11세기서부터 13세기까지 계속되는 그 때의(개신교가 나오기 전이니까 가톨릭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그 때의) 교회의 신학의 방법론이었어요.
(5)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 철학
그러면 11세기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하면 여러분이 알다시피 유럽전체가 기독교화 되면서 그 로마의 국교로 넘어가면서 정죄 당했던 철학자가 한사람 있었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기독교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전부 다 불살라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단적인 책으로 규정하게 되요. 그런데 이제 아리스토텔레스는 원래 플라톤의 제자였거든요. 아카데미아의 제자였는데 스승하고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스승의 뒤를 이어서 아카데미아의 수장이 되지를 못해요. 그는 사상이 아주 틀려요. 그래서 플라톤은 이 세상의 만물의 모든 이치를 알려면 아주 놀랍게 신비적인 방식으로 이 모든 세계의 근원인 신과 만나야 된다. 그러면 그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이 만물이 왜 존재하는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인간은 누구인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가 설명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죠.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을 한 것이죠. 그런데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이런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며 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신을 만날 수 있겠으며 또 만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겠는가?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눈에 보이고 접촉할 수 있는 개별사물로부터 시작을 해서 더듬어, 더듬어 그 뿌리로 올라가면 결국은 전체를 통할하는 우주의 원리인 신에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는가하는 가설들을 내세우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것들은 사실은 거꾸로 다시 돌아가면 플라톤으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 플라톤의 사상은 불교사상하고 상당히 흡사한 데가 많아요. 왜냐하면 이렇게 수없이 많은 사물들이 존재해도 이것은 본질이 아닌 허깨비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볼까요? 이 모양이 틀리고, 저 모양이 틀리고, 그 다음에 이 모양이 틀리잖아요? 그런데 불속에 집어넣어 봐요. 다 타버리잖아요. 그러면 이것이 탔을 때에 불에 타고 남는 것이 따로 있고 저것이 타고 남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후루룩 타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는데 그것은 다 똑같다는 것이죠. 그러면 결국은 이것은 모양만 바꾼 것이라는 것이죠. 똑같은 물이 어떤 것은 폭포수로 얼고, 어떤 것은 평평한 호수에서 얼고, 어떤 것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다가 얼고, 그 차이지 결국은 따뜻한 봄날이 와서 녹고 나면 결국 물로 통일이 되므로 중요한 것은 물이지 얼음이 높게 얼었느냐 낮게 얼었느냐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이것이 만물의 형상이라고 본 것이에요. 이 만물의 형상은 본질을 보지 못하도록 현혹시키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그것이나 볼 수 있지 그 위에 있는 것은 못 보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더듬어 가야한다고 해요.
그래서 이제 예전까지는 이 플라톤의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정반대의 시각으로 볼 때는 완전히 대치되는 구조라고 생각을 했는데 후대의 해석가들은 이제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과연 스승인 플라톤을 완전히 벗어났느냐고 볼 때에 대치된 것도 아니고 벗어나지도 못했다고 보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결국은 플라톤주의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말하자면 후대에 나오는 결론이에요. 왜냐하면 방식이 위에서 아래에로 내려왔고 이 사람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을 뿐이지만 개별자를 이야기해도 결국은 그것을 묶어주는 총체적인 근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그 근원에 대한 설명이라는 힌트는 스승인 플라톤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이러면서 결국은 이것은 기독교를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죠.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을 쭉 읽어보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하면 꼭 회개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머리를 굴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고 그리고 플라톤을 읽어보면 이 사람은 진짜 무엇을 보고 온 사람이에요. 권위가 있는 것이죠. 막 논리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번쩍하고……. 왜 도사들은 내려와서 항상 도사들은 이해하기 쉬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해석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해석하면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하면서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말을 남기잖아요. 플라톤이 계속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사상을 펼 때에 조직신학처럼 하나도 안 남겼어요. 남긴 것이 무엇이에요?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어서 소크라테스는 글자를 한자도 안 남겼거든요. 스승의 이름을 빌어서 등장인물로 사용해서 대화형식으로 만들어서 그 수많은 플라톤의 책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에요. 그래서 읽어보면 대화체로 희곡처럼 되어있는데 수많은 질문들을 던져주는 것이죠. 그래서 스스로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것도 재미있는 게 플라톤의 초기작품은 소크라테스가 늙은이로 나오고 후기로 갈수록 소크라테스는 아이로 나오는 것이에요. 그것도 미묘한 대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어쨌든 이런 대조 속에서 중세교회는 결론을 내린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플라톤의 철학은 기독교를 설명하기에 아주 좋고 그분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미리 보내신 복음 전도자라고 본 것이에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사람은 틀림없이 구원받았다고 얘기할 정도로 플라톤주의 자였어요. 그런데 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에요. 그래서 다 없애버립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하면 그 후로부터 7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이 기독교인들이 사라센의 제국에 있던 사람들과 교통이 이루어지면서 그쪽의 문물들이 유입되게 됩니다. 터키나 그런데서오는 실크로드도 하나의 일환이잖아요. 유입하게 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거기에서 두 사람의 작품이 나오는 거예요. 아베로에스와 아비첸나 라고 하는 이슬람철학자들의 글들이 발견 되요. 그런데 특별히 이 아비첸나라고하는 사람은 천재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페르시아가 모국이고 이슬람제국 속에서 활동했던 이슬람 철학자였어요. 그런데 기록을 보면 18살에 세상의 모든 학문의 이치를 모두 통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글을 남기는데 지금도 엄청나게 많은 양이 남아있어요. 그 중의 유명한 책이 의학정전이라는 책인데 의학에 대한 글을 씁니다. 그러니까 의학, 천문학, 생물학, 과학 모든 학문에 대해서 다 통달했던 사람이었는데 그 의학정전에서 아주 중요한 이슬람의 교리들을 체계화하게 되요. 그런데 그 책이 하도 궁금해서 열 몇 권으로 되어있다고 해서 일단 그 중의 일부만이라도 보자고 해서 주문해 놓았는데 이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본 것이에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만 40회를 정독합니다. 순식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책을 다 읽은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우주를 보는 눈이 열린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슬람의 신학과 철학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담으면서 세계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거대한 철학의 사상을 그 책속에 집어넣는 것이에요.
그런 사람이 두 사람이 나오는데 아베로에스와 아비첸나라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들의 작품이 기독교세계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아이러니컬하게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 사람들이 다 이단자로 정죄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이 중세의 유명한 철학자들, 아퀴나스는 물론이고 그 다음에 윌리엄 옥함을 비롯해서 쟁쟁한 교회의 역사에 나오는 신학자들이 이 아비첸나의 작품을 보면서 말하자면 충격을 받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도대체 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누군가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 결국은 그 사람들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펼쳐놓고 보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독창성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사물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기가 막힌 틀들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것을 신학에 받아들여서 자기 나름대로의 탁월한 천재성을 가지고 기독교 신학의 세계를 이단자들로부터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고 의심하는 사람도 아주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이성적인 체계를 구축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에요. 그 사람의 책이 지금 영어로 최근에 번역되어서 캠브리지 대학에 나왔는데 64권정도 되더라고요. 그런데 가톨릭에서도 아직 이것을 번역하지 못했어요. 이제 몇 권씩 번역해내고 있는데 참 거기나 여기나 갑갑해요.
칼빈을 거의 교주처럼 생각하면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달랑 1권만 번역을 해놨어요. 어쩌면 그래요? 물론 이제 허접하게 낱권으로 번역된 것이 있지만 그것을 그렇게 중역하면 안 되고 칼빈오페라에서 번역을 해야 되잖아요. 그 칼빈오페라 전부다 해봐야 100여권 되나요? 그것은 마음만 먹으면 할 텐데 그런데 그렇게 교주처럼 떠받들면서 교주에게 충성을 안 해요. 그래서 참 그래요. 그런데 가톨릭도 그래요. 그렇게 고전을 안 읽는대요. 오죽하면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이 아퀴나스 좀 읽어라, 읽어라. 평생 노래를 했대요. 우리도 말로만 칼빈, 칼빈 하지 신대원에 서 칼빈 카버에서 커버까지 기독교강요 다 읽은 사람은 한 클래스에서 두 사람이 손을 들더라고요. 졸업할 때까지 안 읽고 끝내는 것이에요. 그게 사실은 엉터리죠. 자기가 그렇게 교주처럼 떠받들려면 충성을 해야지요. 아니 똘마니도 오야한테 충성을 하는데……. 아주 안 읽어요.
그래서 저는 작심을 하고 우리교회에서는 구역장 성경공부의 교재입니다. 기독교강요6권이……. 그래서 제가 이런 것을 강의하기가 재미없어요. 쓸 때나 그냥 재미있지 이게 뭐가 재미있어요. 지금 지리멸렬하잖아요. 목회하는 이야기나 해야 재미있지……. 그런데 안 해요. 안 해. 그래서 이제 나는 걱정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리적인 토대가 없는 것이에요. 요번에 말도 되지 않는 이만희니 어쩌니 저쩌니 나와 가지고 수지맞는 거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맹문이들인데 불러다놓고 살살 꾀면 원래 아무것도 없는데 기적 일어난 것과 같은 것을 몇 개 보여줘 봐요. 혹해가지고 금이빨 만드는 교회나 찾아다니고……. 틀린 것이죠. 그래서 교리를 가르쳐야 되요. 교리를……. 안양지역에 있는 목사들이 찾아와서 이단대책을 하자고 그래요. 그래서 대책을 세우십시오. 우리도 협력할게요. 그런데 교리를 가르치세요. 교리를 가르쳐야지 교리도 가르치지 않고 말이지 그렇게 해가지고 되겠느냐고요. 철저하게 가르쳐야 되요.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반기에는 교리반 상급반을 하고 상반기 1월부터 6월 사이에는 교리반 초급반을 합니다. 교리반의 제일 기초는 세례 받을 때 우리는 총회에서 나온 교리 문답 집을 완벽하게 외우지 않으면 회심을 했어도 세례를 주지 않습니다. 전통이에요. 그래서 한 달을 교육시킨 다음에 문항을 완벽하게 외워야 되요. 그래서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이냐? 새벽 두시에 발로 툭 차서 일어나면 달달 외울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해요. 떠듬떠듬하면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떨어뜨려요. 그리고 세례문답 공부하러 안 오면, 세례문답을 통과하지 않으면 자녀의 유아세례를 안줘요. 그리고 결혼을 하려고 해도 그 문답을 통과해야지 결혼식장으로 교회를 빌려줘요. 그래요. 그리고 집사 될 때 또 한 번 해야 되요.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집사 된 다음에는 교리반에 들어오게 되죠. 교리 반에 들어오게 되면 루이스 벌콥의 기독교 신학개론을 가지고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넉 달 동안 공부하고 시험을 중간고사, 기말고사로 봐서 90점이 나와야 되요. 안 나오면 졸업이 안 되고 졸업이 안 되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권한을 안줘요. 구역장이나 교사를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거기서 마친 사람은 그 후 몇 년을 거치다가 다시 재교육을 받아야겠다고 상급반으로 올려 보내면 그때에 여기에 와서 이제 무엇을 배우느냐하면 고영민 목사님이 번역한 6권짜리 기독교강요를 가지고 4개월간 공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2400페이지를 읽어야 해요. 그리고 시험을 봐야합니다. 그리고 90점을 받아야 해요. 그래야지만 통과가 되는 것이죠. 거기까지만 하고나면 조금 심이 피지요. 더 이상 괴롭힐 일은 별로 없으니까 그러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기독교강요나 이런 책들을 가져다놓고 혼자서 천천히 읽어나가는 것이죠. 그러면 그 정도의 실력이 되면 웬만한 허접한 책들을 가져다 놓으면 이것은 사기라고 금방 압니다. 금방 알아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철저하게 교리교육을 시키고 그 다음에 수요일, 주일, 주일오후 이 세 번의 설교 가운데 한번은 교리 설교를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해가지고 철저하게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죠. 그렇게 해가지고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도 자기가 아는 교리들을 가르치는 것이죠. 어린이들도 이런 식으로 똑같이 해요. 어린이들도……. 1년에 한 번씩 어린이 교리학교가 있어요. 어린이 교리학교에서 철저히 교리를 배워가는 것이죠.
그래서 이 스콜라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뭐냐 하면 그런 교리를 진술하기에 아주 좋은 틀을 제공해주는 것이에요. 이것은 신학의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론의 문제에요. 그래서 이제 이 사람들의 글들을 쭉 읽어요. 그래서 이제 알바레즈, 로드리고, 아조르, 바네즈, 까젯담, 발렌시아의 그레고리, 멘도사의 알폰소, 슈와레츠라고하는 중세의 유명한 철학자가 있어요, 바스케츠, 이런 사람들을 충분히 공부하고 그 다음에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피터롬바르디의 명제집이라고 하는 초창기 조직신학서들과 그에 대한 주해를 아주 깊이 숙독하면서 26살인가에 첫 번째 작품을 발표해요. Display of Arminianism 이라는 알미니우스의 실상이라는 글을 발표하는데 이 글에서 아주 탁월한 신학적인 능력을 보여서 처음 목회지인데도 교인이 꽤 많이 모이는 교회로 (그 교회를 제가 갔다 왔는데.) 부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이제 목회를 하게 되요 이러한 스콜라주의에 대한 친숙함을 이제 보여주게 됩니다. 그 이외에 아까 설명했기 때문에 넘어갔습니다. 플라톤과 플라톤주의 철학을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이 사람이 특별히 신학서론 같은 작품들을 기술하면서 이제 이런 자료들을 많이 활용하게 되고 신플라톤주의 자였던 2세기에 플로티노스의 엠메아데스라는 유명한 작품을 선호하고 존재론, 인식론, 신론에 있어서 이 신플라톤주의 자들을 많이 참고하게 됩니다. 이 외에 많은 자료들이 있게 되고
(6) 아우구스티누스주의
마지막으로 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사상이 있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주의에요. 이 아우구스티누스주의는 당대에 17세기 18세기에 화려하게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부활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위 얘기하는 ‘스콜라 아우구스티니아 모데르나’ 라고 하는 운동인데 학문적인 운동이 번지면서 여기에서 이제 많은 학자들이 나오게 되요. 그런데 이제 당시에 그런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들을 스콜라주의적인 체계를 가지고 연구하는 데에 많은 학문적인 기류들이 있게 되는데 여기에 있는 것들을 많이 활용을 해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해 나가게 되고 그리고 특별히 같은 맥락에서 영국의 경험주의가 당시에 일어나게 되는데 이 경험주의의 연구의 결과들을 풍부하게 이해하면서 그러면서 자기 자신의 신학적인 과제인 설명할 수 없는 이 하나님에 대한 신비한 경험과 경건의 내용들을 학문적으로 진술해내는 아주 중요한 틀로써 사용을 해서 이일들을 해내게 됩니다.
Ⅳ. 결론
결국 결론은 내리자면 이 존 오웬은 말하자면 역사상 참된 기독교, 특별히 복음적인 이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몇 명 안 되는 개혁신학자들 가운데 한사람이었어요. 그런 탁월한 이 사람의 책이 아직도 있으니 많이 읽어서 신학과 목회에 도움을 받자는 것이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