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장 수련회 특강
5주정도 기간을 주고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를 꼭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지난겨울 사경회 때 이루어진 말씀인데, 충분히 소화가 안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말씀 들으며 은혜와 충격을 많이 받았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언제든지 꺼내서 쓸 수 있게 우리 안에 정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속히 이 책을 쓰고 싶었는데, 시간이 도저히 안 되어 다음으로 미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중에 3개정도를 간략하게 정리해서 성장반 성경공부 교재 뒤에 추가를 했습니다. 따라서 그이후의 사람들을 접할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꺼내서 풀어 좀더 상세히 정리를 해서 5과로 만들어 교정을 끝내고, 책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너무 시간이 없어서 완전하게 쓰지는 못했습니다. 녹취한 것을 중심으로 해서 부분적으로 설명이 필요한 것은 보태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양이 너무 많아서, 사경회 때 준비한 것 가운데 2/3밖에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꼭 들어가야 하는데 못 들어 간 것은 정리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읽기에는 불편이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금년에 했으면 좋겠지만, 금년은 매우 할 일이 많아서 금년에 안 되면 내년이라도 연구한 것을 깨끗이 정리한 것을 첨가해서 ‘자기 깨어짐’처럼 책을 만들어서 다시 한 번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이 내용이 너무 중요해서, 모든 지체들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것을 중간에 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스승의 날 교역자들과 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교역자들이 많아서 음식점 가기도 불편해서 교육관 4층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녁만 먹고, 모였다 흩어지기 그래서 1시간짜리 특강이라도 해 주마 해서 밥을 먹고 9시 반쯤 특강을 시작해서 새벽 1시 48분에 끝났어요. 그때 한 것이 정리가 되어서 교역자들에게만 한권씩 주었는데, 그것을 좀 정리해서 ‘왜 오늘날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회심이 사라지고 있는지 앞으로의 목회환경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특별한 준비 없이 강의를 했는데, 9시 반부터 시작해서 4시간 반쯤 특강을 했습니다. 이 내용을 정리를 하니, A4용지 30 매가 좀 넘었습니다. 이것으로 2주정도 공부할까 했는데, 주제가 아까워서. 제대로 한번 가르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것은 다음기회로 넘겼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공부하고, 그 다음에 이것을 공부하면 교리를 공부해야할 필요성을 훨씬 더 강력하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칠 때, 아는 게 이만큼 있고 아는 이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만약 바다에 떠있는 스티로폼처럼 밑에 아무것도 없이 가르친 다면,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요? 단지 말재주로 가르칠 수 있겠지만, 대부분 자기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가져다가 그대로 가르치게 됩니다. 알게 된 내용을 소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소화하여 내 것이 되어 가르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전달되는 내용이 똑같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전달할 때 다가오는 느낌 자체가 벌써 틀립니다.
예를 들면, 먹는 것을 좋아해서 배가 나와서 산이라면 언덕도 싫어하는 사람이 “산을 오른다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들은 “당연하지, 그렇게 먹고 산에 올라가는 것이 쉽겠어”라고 빈정거릴 것입니다. 밑에 깔려 있는 게 전혀 없는 사람이 한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황원길(?)대장이 이야기 할 때는 영적으로 자신의 느낌 속으로, 숨길 수 없이 다가옵니다. 이것이 바로 권위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시작하려면 3주정도 남았는데, 이런 권위를 얻기 위해서는 3주 남은 기간 동안, 몇 가지만 공부하면 후자처럼 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시리즈, 두 번째 ‘성도의 공동생활’을 필수적으로 꼭 들어야합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시편84편 강해’, ‘시편 23편 6절’, ‘미워하는 마음과 영적생활’을 들으면 좋습니다. 2006년 새해말씀으로 주일시리즈로 설교한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도 같은 교회론이지만,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 아우구스티누스적 접근이라면, 이번에 나온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는 오웬적인 접근입니다. 나중에 글쓰는 사람들이 설교를 비교할 때, 오웬과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가, 혹은 개혁파 전통주의적 접근이고 다음이 어거스틴입니다. 물론 너무나 방대한 교회론 전체를 다룬 것은 아닙니다. 질서와 관계 지어 다룬 것 뿐 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들어본 사람은 이상하게 이것이 책 ‘자기 깨어짐’과 밀접한 연계가 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은 개인적이 지평이고, 이 개인적인 지평이 교회로 확장되었을 때, 그것이 바로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시리즈를 숙독 및 숙지 하셔야합니다. 이시리즈가 기반이 된 다음에, 우리가 지금 하려고하는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를 읽어나가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과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시리즈를 이해하고 난 다음에는, ‘고린도 전서 13장’이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산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어떤 사람이 산을 본다면, 아마도 삼겹살밖에 생각나지 않을 것입니다. 삽겹살 구어 먹기에는 산이 좋습니다. 사방이 트여져서 산소가 계속 돌기 때문에 맛있게 많이 먹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고기구울 판이 어디 있나 만을 생각하며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식물학을 공부한 사람이 산을 본다면 “우와~이게 무슨 풀일까? 이게 제주도에서 나는 풀인데, 이게 왜 여기와 있을까? 이거 식물도감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인데”라고 자신의 전공과 관련하여 많은 질문과 호기심을 갖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올라갈 것입니다. 즉 한사람은 고기구울 판만 찾으며 올라가고, 한사람은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온갖 신기함을 경험하며 올라갈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식물학과 지질학, 미술 풍경화등 세 가지를 다 공부했다면, 산 하나를 보면서 다양한 부분이 확~다가오지 않을까요? 즉 이렇게 새롭게 어떤 사실이나 진리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안에 무엇이 있느냐를 볼 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가끔 ‘어렸을 때 그 책을 읽을 때는 별로 감동이 안 되었는데, 한 20년쯤 지나서 읽으면 놀랍게 감동이 되는 책도 있고, 반대되는 경우 있구나’ 란 생각하실 거예요. 옛날에 들었을 때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들었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매우 놀랍겠 다가오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내안에 이것들이 얼마나 형성되었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것이 틀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미 내가 안 것이 안 것이 아니라, 그때는 이 크기가 계속 변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옛날에 안 것이 지금 안 것이고, 옛날에 모른 것이 지금도 모르는 것이지만, 자신의 앎의 크기가 계속 상승하고 변화되는 사람은 옛날에 안 것이 안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것을 보면 전혀 다른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서 성장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크기들을 계속해서 키워가야 합니다. 그래야 새롭게 다가오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책이 몇 권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시편입니다. 아우그스티누스를 공부하고 나서, 시편을 읽으면서 예전보다 더 많이 사랑하게 됐습니다. 시편이 그렇게 위대합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속으로 항상 ‘내가 만약 몇 년 후에라도 주석을 쓸 것인데, 주석을 쓰게 되면 아마 에베소서나 시편에서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옛날 시편이 오늘날의 시편과 틀리겠습니까? 히브리서 성경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틀리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다른 구도를 가지고 보니깐, 어렸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장엄한 광경들이 성경을 통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제가 수많은 시리즈들을 설교했지만,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어떤 내적인 크기를 가지고 대하느냐에 따라 전혀 새롭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려워 도저히 듣지 못하던 시리즈들도 요즘 들어가 다시 한 번 들으면 이해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플라톤의 제자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세계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 합니다. 특히 서양문화권은 아리스토텔레스 영향권아래에 있다고 봐야할 정도입니다. 제가 예전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아주 조금 읽고 공부했었는데, 요즘에 와서 다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신학생들이 아무래도 공부를 해야 할 것 같고,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시 한번 쭉 들쳐보게 되었는데, 매우 놀랍게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나 신학을 다 배우고, 중세의 역사를 배우면서 이 사람들이 어떻게 철학에서 잘못하고 실수해서 신학을 망가뜨렸나 하는 것을 머릿속에 다 그림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보기 때문입니다. 450쪽 정도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같은 책을 보면, 이게 결국 이렇게 평범하게 보이는 이 구절들을 후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을 해서 결국은 교회에 어떤 결과를 미쳐다는 것을 알고, 그 후에 일어날 일들을 모두 알고 들여다보니깐, 예전에 그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젊었을 때 본 것과는 전혀 새로운 마음으로 다가 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지금은 너무 바빠서 못하지만, 이 바쁜 여름행사 끝나고 나서 5시간만 가르쳐주겠다. 5시간만 나한테 배우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신학적 해석을 너희들이 들을 것이다 ”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난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역사 속에서 너무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을 비롯해서 조나단 에드워드나, 심지어는 존 켈빈조차도 기본적으로 논리학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영향 아래 있다고 봐야합니다. 이러한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어떤 것을 가지고 그것을 보느냐에 따라서 훨씬 다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가 하는 해석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만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동의 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들은 신학적인 입장에서 그것들을 보는데, 일관되게 보면서 우리들이 해석해 낼 수 있는 마음을 갖는 다고 봅니다.
이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들이 계속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그 구절의 의미를 완벽하게 드러내는 적은 없다. 더 심오하고 더 깊은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해야합니다. 또 누구도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접했을 때, 전혀 문을 열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정당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경을 펼치면, 성경 자체에 있는 명백성의 교리에 의해 어떤 진리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여기에 어떤 종류의 사상을 가지고 이것을 보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 됩니다. 그래서 말로만 듣지 말고, 여러분들이 직접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에서 구역장정도 하려면, 상태가 아주 좋았을 때 최소한 3년은 열심히 교회를 다녔을 것이고, 평범할 경우에 5년 정도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면 맨 처음 우리 교회에 강력하게 가슴에 다가왔던, 혹은 안 다가와 왔던 내용도 괜찮으니 그 시리즈로 돌아가서 실험을 해보세요. 다시 들어보세요. 완전히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3년 내지 5년 동안 여러분에게 상태가 좋아진 면도 있지만, 그 상태뿐만 아니라 해석학에서 말하는 이러한 전이해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다시 예전에 대한 것들과 똑같은 것을 대해도 새로운 해석의 활동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표면에 들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각도에서 여러분들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야하고, 이것과 때놓을 수 없는 것이 ‘천지 창조의 목적’,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시리즈입니다. 이 말씀들이 모두 연결이 됩니다.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이 배경이라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은 그 배경위에 서있는 이것의 핵심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생각을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시리즈를 듣고, ‘천지 창조와 목적’을 듣고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들으면 매우 일관되게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이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2005년 가을 기도학교 사경회 때 설교한 것이고, 1년 후에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했습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지만, 여전히 어렵다면 ‘창조의 목적’부터 먼저 듣고, 그 다음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성도의 공동생활’ 듣고 나머지는 틈날 때 들으십시오. 그런데 도저히 시간이 안 나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만 들으세요. 그러나 사모한다면, 시간이 없겠습니까? 이렇게 하면서 이 내용을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완벽한 것은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천지 창조의 목적’ 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시간이 없으면, 이 시리즈를 다 듣지 마시고, 총신대 대학원에서 한 90분 정도 되는 개강 수련회 강의를 들으십시오. 그것을 듣고,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중에 ‘창조의 목적’이라는 3장, 50쪽 정도 되는 부분을 읽으시며, 잘 이해하면 끝납니다. 그런 다음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성도의 공동생활’을 듣고, 가르쳐야할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는 조금 꼼꼼하게 들으시면 됩니다. 3주면 소화하실 수 있습니다. 적용과 부록이 되는 부분까지 모두 연결이 되므로 링크해서 들으시면 됩니다. 여기까지가 서론입니다.
자~그럼 여러분들이 받으신 프린트 물을 좀 보세요. 여기에 보면, 크게 5장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복음적 교회의 기원과 영원성, 2장은 교회의 질서와 성도들, 3장, 4장 5장 전체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질서의 기초가 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있는 단체와 구별되는 교회의 특성입니다. 교회의 질서는 교회에서 제일 높은 어른이나 누구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원천으로 해서 그에게 위탁받은 권세로써 교회가 성경이 허락한 범위 안에서 권세를 가지고 스스로를 위한 질서를 세우는 기도하는 입법적 질서와 습관적인 질서, 주님께로부터 권한을 받은 질서, 성경에 이미 제정되어있는 성경적 입헌 질서 속에서 교회의 구체적인 질서들이 세워져 갑니다. 이 내용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면 된다고 생각됩니다.
이 내용들을 날개 까지 달아서 깔끔하게 책으로 나와서, 여러분들이 늘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보고 여기에 나와 있는 틀을 가지고 계속 보십시오. 다행히 이 틀들이 이번 책속에는 모두 다 들어 갔습니다. 성장반 교재에는 모두 뜯어내고 시편23편처럼 제목만 뚝뚝 달아서 했는데, 암기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그대로 집어 넣었습니다. 설교를 2번 정도 잘 듣고 은혜를 받은 분들은 제목만 보면 구역원들에게 그냥 이야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교회사 속에서는 이것을 논문식 설교라고 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고나면, 그것이 한편의 논문처럼 되는 것입니다. 교리 설교들은 대부분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이 목차를 보면 무슨 내용이 전해졌는지 다 알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쭉 보면서 하나하나씩 정리해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는 것이 매우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한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영적으로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접붙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개념이 오늘날의 교회에서 완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기준으로 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수준이 세상에서의 공동체의 수준하고 차별이 없어집니다. 영적인 부분이 없어지면 차별이 없어집니다. 세상에 있는 공동체와 다를 바가 별로 없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들이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하면, 회심과 중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공부하고 나면, 잠시 후에 들어가게 될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서 구원이 왜 이렇게 절실한 문제가 되었는지가 보게 됩니다. 특별히 교회론에서 교회문제가 새롭게 다가오게 됩니다.
어제 첫 시간에 간증해 준 구역장이 있는데, 그 구역장님이 특별히 나쁜 게 아니라, 평균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의 토대가 아니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산발적인 개념들, 교회를 통해 받은 나쁜 인상이나 좋은 인상들, 상처들이 뒤범벅이 되어 일관된 체계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연적으로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내뱉고 하면서 나름대로 이론도 아닌 이론들을 세워가면서 대충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충 살아갈 때는 문제가 안 되지만, 체계적으로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신앙의 체계를 가져야할 때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면, 밭갈다가 들어와 잠이나 자고 나가면 초가집도 상관없지만, 2층 3층을 올린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초가집은 그 위에 층을 더 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상이 안 세워지고 체험만 많은 신앙이, 결국은 부패하고 맙니다. 또 작은 요소라도 굳게 붙들고 날마다 살면 되는데, 그런 정도의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무엇을 믿는 지도 모르고, 삶도 신앙도 엉망진창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옛날에 배운 건 싹 쓸어 버려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아마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잘못된 것들이 아니라 참된 것도 있는데 참된 것과 거짓된 것들이 섞여서 형체가 없이 되어있어, 결국은 건물을 짓는 것처럼 싹 걷어내고 다시 지어야지, 그것을 어떻게 부분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면 판자체가 틀려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한계들을 우리 모두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체들도 다르다보니, 회심도 도덕적 회심과 신학적 회심을 한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도덕적 회심은 특별히 진리에 대해 사상적으로 깊이 깨달은 것은 없지만, 그냥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이 후회가 되고 눈물이 나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에 반해, 신학적 회심은 자신의 모든 실패한 삶이 잘못된 사상과 지적인 기반위에 새워진 것이라는 생각을 깨닫고 거기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신학적인 의미를 새롭게 알고 회심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이 말하는 회심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이 다시 보면, 설명에 들어가면, 머리되심에 대해서는 유기체적인 생명, 유기체적 통치, 유기체적인 섬김 3가지로 나옵니다. 기존의 개혁신학에서는 3장과 4장은 별로 다루지 않습니다. 대부분 5장을 할애해서 다룹니다. 그 대신 존오웬 같은 분은 3장을 다룹니다. 어디에서도 3장 부분을 다루지 않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간단한 서술로 되어있고,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5장에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5장은 3장의 토대이고, 4장은 전적으로 개혁신학에서 부족하다고 생각이 되어서 제 나름대로 소화해서 새롭게 제안하는 구도입니다. 이 4장 같은 경우는 거의 반영이 안 되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3장에서는 은혜에 의해 그리스도를 원천으로 해서 성도들이 함께 연합을 이룬 생명적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고, 5장은 통치적 공동체를 이야기한다면, 4장은 섬김의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그냥 봉사권 이라고 하는 간단한 것으로 끝냅니다. 그래서 5장에 보면, 교리권, 질서 유지권, 순결권으로 이루어지는데, 2개가 하나로 합쳐져서 교리권, 도덕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권, 질서유지권, 봉사권으로 대개 나누어집니다. 이것들이 다시 확장된 논의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되어 개혁신학의 틀 속에서 소화를 해서 4장을 새롭게 생성을 했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심에 대해 충분한 이야기들이 따라온다고 봅니다. 사실 이것들의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왜 4장이 강요되지 않고,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5장이 강조되었느냐 하면, 당시에 교회는 불신자들에게 에워싸여 있어서 지금처럼 일을 많이 해야 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단 같은 것들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자체가 교회가 쭉쭉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서 순결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4장 같은 내용이 거론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개혁신학은 오늘날에는 많은 한계성을 갖는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오히려 종교개혁시대의 맥락과 같지 않고, 사도시대의 맥락과 비슷합니다. 교회는 아주 소수이고, 이방 문화와 불신 세계 속에 대부분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안으로 안으로 오그라들어 교회가 순결을 지키고 도덕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밖을 향해 뻗어나갈 수 있는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특별한 성령의 능력 속에서 이 진리를 세상 속에서 퍼뜨리고 뻗어나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세상에서 뒤잇도록 만들어야합니다. 또 기존에 있는 개혁신학에서의 교회론은 너무 수세적인 교회론이였다는 신학적인 반성을 나름대로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이 사상 안에서 이런 상황들을 그들에게 주었을 때, 교회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사역적인 이해를 이렇게 했을 것이며,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사역하셨던 정신에 비춰볼 때, 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되어 4장은 철저한 창작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제 하나씩 찬찬히 보겠습니다. 우선 첫째 복음적 교회의 기원과 영원성입니다. 여기서 복음적 교회라는 것은 ‘Evagelica Church’라고 존오웬목사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럼 율법적인 교회도 있느냐?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라고 할 때, 기원이 어떻게 되느냐하는 것은 학설들이 나누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 보면,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무리들을 가리켜서 광야교회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은 사실 ‘에클레시아’라는 말로 ‘불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신약교회가 세워집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 이스라엘이 하나의 교회였지만, 교회인 동시에 국가인 신정국가 체제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아주 넒은 의미에서 보면 교회의 시작이 아담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죄가 들어온 후엔 아벨이 하나의 씨가 됩니다. 물론 여기 아담이 있지만, 이때 자체는 또 다른 교회가 필요가 없는 때였습니다. 교회라는 것이 구원과 관련지어 나오기 때문에, 아벨이 그 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벨에서 셋에서 이어지고 하면서, 구속사를 통해서 쭉 하나의 개인, 가족, 민족, 국가로 되면서, 하나의 구원받은 무리의 공동체들이 나옵니다. 이것이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교회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넓은 의미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교회에 들어가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협의로 보자면, 교회의 시작은 신약교회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승천하시고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교회의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앞부분은 이스라엘시대이고 뒷부분은 교회의 시대가 됩니다. 이스라엘 시대는 국가지만, 교회의 시대는 영적인 교회로써 이스라엘의 성취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교회이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교회의 모형의 시대이고, 신약에서 진정으로 교회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교회라는 표현도 쓰시는데, 이것은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고, 성령이 세워지는 신약의 교회를 진정한 교회라고 보고, 이를 복음적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정의를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들어가 보면, 교회의 기원이 나옵니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교회라는 나오는 것은 모두 신약교회를, 좁은 의미의 교회인 복음적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기원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교회가 실체로서 등장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교회에 대한 계시가 나오는데,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교회와의 연관관계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주어진 내가 신앙 고백한 베드로에게 “내가 그 터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니, 음부의 권세가 흔들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적으로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적인 교회의 기원이 명백하다는 것을 A항에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명백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인간이 경험적으로 만든 공동체가 아니라,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교회는 그냥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들, 호의적인 감정을 가진 단체가 아니라 신앙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 있기 위해서는 구속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한 구속(救贖)을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심으로써 교회의 기초를 놓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한 권위를 주십니다. 이 권위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교회에 위임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위한 권위는 두 가지 방식으로 행해지는데, 외적인 방식과 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내적인 방식과 외적인 방식의 관계는 마치 신자 개인에 있어서 도덕적인 삶과 은혜 생활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교회를 위한 권위는 외적으로는 제도와 질서 속에서, 내적으로는 말씀과 성령의 행하심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두 개의 관계의 유비는 마치 신자에 있어서 외적인 도덕생활과 내적인 은혜 생활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외적인 은혜 생활이 내적인 것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그것들에 참예함으로써, 즉 은혜가 충만하면 그 삶에 열매가 그 삶에 아름다운 도덕생활로 나타난다. 그러나 생활의 일정한 제도와 규칙을 따르는 것인 도덕생활을 무시하면서 내적인 은혜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식의 자유를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은혜가 유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사람들의 삶은 자유로운 마음이지만, 하나님의 법대로 살고자하는 외적인 특성들을 갖게 된다. 이것이 거룩함의 생활적 표현입니다. 그것이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교회에 적응시킨다면, 결국 외적으로는 분명한 제도와 교회 질서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내적으로는 그것대로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와 사랑 속에서 살아가야 가장 이상적인 것이 됩니다. 둘 중에 하나를 집어던지고 살아가는 것은 옳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풍조가 옳지 않은 쪽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은혜를 사모하다, 신비주의계통에 빠져서 또 다른 자기만족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3번으로 가면 통치의 권위가 나오는데 이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권위는 우선 그리스도의 존재적 권위입니다. 존재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중 제 2위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계시는 모든 곳에 아버지와 성령이 함께하시는 그런 존재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고,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이시죠. 또, 행사적 권위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몸소 세우셨고, 질서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 질서는 직무를 정하시고, 사람을 지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교회 목사와 교사와 선지자들과 복음전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교회가 해야할 할 일을 정하시고, 다음에 그 일을 감당하실 사람들의 직분을 주님이 세우셔서 교회의 질서를 만드십니다. 이러한 질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권위를 행사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인 B번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통치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가 오늘날 내게 말씀하시는데.....” 라는 식은 안 됩니다. 어느 날, 그 당시 6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를 담당하는 스펄전 목사님께 어떤 목사가 찾아와 “목사님, 제가 어디에서 온 oo목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이 교회에 가서 설교하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참 황당하지요? 초정도 안 했는데 와서, 설교하라고 하신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께서 “저 보고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명답입니까. 또한 사실입니다. “주님이 저에게 설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저에게 아무 말도 안 하셨습니다.” 놀랍지요.? 그 수준에 맞춰 사람들을 대해 주는 것이죠. 하나님을 아무리 주님으로 모셔도, 구역장인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절대 이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이것이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내는지 모릅니다. 나도 여러분께 이렇게 말한 적이 거의 없을 것입니. 항상 “주님이 제게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생각이 떠오르기를 - 너는 이렇게 이렇게 하라. 라고 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권위야 좀 떨어지겠지만 안전합니다. 누가 잘못되면, “그때 착각이였어.” 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회심조차도 의심되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담대하게 할 때 “우리의 실수가 참 크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절대 그런 얘기하지 말고, 구역원 중에 그런 사람 있으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하고 잘 타이르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싶으면, “보여주세요. 보여주세요” 하지 말고, “나에게 정확하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성경을 통해 그것들을 알아가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과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에게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문의 경첩처럼 항상 함께 옵니다. 말씀을 떼어 놓고는 성령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해야 해요. 아무래도 여러분들이 공과공부 하다가 중생쯤으로 들어가면 교역자들이 이것에 대해 특강도 해 주었습니다만, 상세하게 설명해 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해하십시오.
그 다음 보겠습니다. 교회의 영원성. 그 다음 교회 질서와 성도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통치, 질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교회의 정치는 신적질서입니다. 여기에서 정치는 원래 나쁜 뜻이 아닙니다. 정치라고 하는 것은 ‘권한을 행사하는 방식’입니다. 정체라는 것도 있습니다. 정체라는 것은 이것에 권한을 행사하는 것 즉 공화제, 입헌군주제, 입헌제 등과 같이 나누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의 정치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반영합니다. 그 다음, 교회와 입교자들 나옵니다. 입교라는 것은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것을 간단하게 생각하지만, 예전에는 입교자들에게는 뚜렷한 의무가 있었습니다. 현재는 많이 빠졌는데,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스도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겠다.’ ‘내 교회의 질서에 복종하겠다.’ 등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입교자들의 의무이며, 교회도 의무를 갖는데 일반적인 의무와 특별한 의무로 나누어집니다. 특별한 의무는 개별적인 의무를 가리키며, 일반적인 의무는 신앙에 대한 도리를 가리킵니다. 2번이 빠졌는데 1번은 믿어야할 규칙이고, 2번은 살아야할 교훈으로, 이것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거예요. 그것이 말씀에 대한 지식입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고 성경에 대한 지식은 믿어야할 규칙과 살아야할 교훈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회중들을 위해 기도함, 성도를 돌봄, 특별한 의무는 세상으로 돌아가게 못하게 함. 회심과 회심의 은혜를 보존함. 추문이 될 죄를 금함.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복종하게 함. 즉 일반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복종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의 말을 안 들으려고 합니다. 교회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주님이 세우신 직분 등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마음대로 생활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 자신의 망가진 삶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다음 3번으로 가서 교회의 질서와 성도의 복종. 교회의 질서와 외적 복종, 교회의 질서와 내적 복종이 나옵니다. 외적 복종은 껍데기고 내적 복종은 알맹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내적복종은 외적복종 속에서 잘 보호되고 외적복종이 있을 때 내적복종의 진실성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말을 잘 안듣습니다. 개신교 교회는 오합지졸이에요. 큰 교회를 보면, 청년부는 청년부 지도자가 오는 대로 갑니다. 즉 지도자의 색깔대로 갑니다. 건물 잘라 임대주고 나면, 그곳에서 무엇을 팔든 상관 안 하는 것처럼 각 부서에서 그냥 알아서 하는 거예요. 교회학교는 교회학교대로, 장년은 장년대로 각자 따로 그런 식으로 형편없이 돌아갑니다. 이것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15년 목회하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은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신학적 통일성에 기초한 은혜’입니다. 어제 발표한 구역장께 “그대는 열린 교회의 표준 구역장이다”라고 말했는데, 모든 구역장들이 열심만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처럼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세워지기 바랍니다. 그래야 담임목사에게 헛소리 하지 않습니다. 신학적 일관성이 있어야 헷갈리지 않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담임목사에게 교리를 배웠는데, 구역에서 구역장이 다른 것 가르치고, 배운거 정리좀 해보려는데 주일날 아침에 목사님이 또 다른 것 가르치면 성도가 얼마나 머리가 복잡하겠습니다. 모여앉아서 차 마시고 담소 나누면 상관이 없지만 무엇을 가르치겠다고 하면 고통이 생깁니다. 이것은 교회가 통일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교리에 의해 통일되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럼 3장에 들어가면,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인데, 3장에서는 생명을 먼저 다룹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되심의 세 측면으로, 생명의 머리, 통치의 머리, 봉사의 머리로 서술합니다. 이것을 A, B, C로 나누어 그 이후에 서술합니다.
그리고 Ⅱ장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유기체적 생명’인데,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가르치기 전에 중생과 회심부분 중 부르심부터 시작해서 회심, 믿음과 회개, 중생 부분을 꼼꼼하게 각주까지 읽고 정리하셔야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계시고, 몸에 많은 지체들이 중생함으로서 영적으로 접붙이게 되는데, 이는 성령으로 인해 이루어 집니다. 예전에는 어떤 부분에서는 영적인 사람이었으나, 죄로 타락하여 참다운 영적이 사람이 아닌 육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신비적인 것이기에, 이성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구속에 의해서 이것들이 연결이 되면서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은 신비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이것을 무시합니다. 요즘에 쏟아져 나오는 그리스도 삶에 대한 모든 것들, 이렇게 살아보자 저렇게 살아보자 하는 책들은 이 뿌리를 무시하는 거예요. 이 영적인 뿌리에서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접붙여 질 때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렇게 하늘의 자원들이 내려와서 영적인 교통의 본질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 주어지고 이것들을 토대로 해서 우리들이 도저히 예전에는 행할 수 없던 의무들을 행하면서,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외적인 생활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생활 중에 한부분이 섬김이고, 통치에 복종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오늘날 이런 것들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회심이나 중생의 개념들이 다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다 버립니다. 이성에 부합하다고 하더라도 다 버립니다. 자기에게 힘들므로 다 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사라져갑니다. 이런 것들이 사라져 가니까 죄라는 개념 자체도 없어져 가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지정된 어떤 죄를 지었고, 그 죄는 마음속에 있는 죄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상적인 인식인데, 현대인은 죄를 인간의 연약함정도로만 봅니다. 즉 죄를 ‘인간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으로 추상화 시킵니다. ‘죄란 모든 인간에게 다 있는 그런 것’ 그런 정도로 보고 자기 자신의 결함 정도로 인식합니다.
예를 들면, 20세기 한국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세계적인 심리학자인 김재건 박사가 수반 심리학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수반 심리학은 곧 물리학입니다. 물리라는 것은 인간을 어떤 사람은 사랑이 많고, 어떤 사람은 성격이 급하고, 어떤 사람은 살인적 성향이 많다고 보며, 이러한 특성들은 그 사람 자신의 몸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으로 정신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사랑이 많은 것은 도파민이 많이 나와서 그런 것이며, 폭력적인 사람은 신경의 어떤 계통에 물질이 조절이 안 되서 과격해 지는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죄가 있고, 책임이 있는 존재라는 근거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삶을 보면, 하나님 앞에 올바른 관계를 세우지 못하고 살 때, 고통과 어려움은 계속되는데 설명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꾸 심리치료를 받으려고만 합니다. 죄에 의해서 문제들이 긍극적으로 생겨났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심리적 방법으로 자신을 고치려고 합니다. 그리니 이러한 것들이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가 있어야지만, 용서, 회개, 중생,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성력의 역사 등이 다가오는데, 안 들어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성경에서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그래서 제가 중생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관계없던 사람이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서 생명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하나의 공동체를 누리는 것. 이것이 곧 생명이고,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이것에 의해서 끊임없이 그런 사랑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기반이 구속 안에서 마련이 됩니다.
그다음 뒤로 내려가면, 중생과 접붙임,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생명의 근원임), 그리스도께 접붙여짐(생명에 참여함), 영적 생명의 본질은 곧 영적 교통, 은혜를 통해 성품을 바꾸시고, 은혜가 다양한 덕행으로 나타남.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연합과 성령, 곧 성령과의 연합입니다. 성령 역사에는 세차원이 있는데, 우주론적 차원, 인간론적 차원, 구원론적 차원이 있으며, 교회와 관련된 차원은 특별히 세 번째 차원이 강조됩니다. 세 번째 차원이 두 번째 차원으로, 두 번째 차원이 첫 번째 차원으로 확장되면서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을 신비적 연합, 언약적 연합, 영적 연합으로 설명합니다. 성령을 통한 구속의 적용. 그로크함머의 연합, 그리스도에 의해 전가, 그리스도 연합과 생명의 역사,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4장은 유기체적인 섬김입니다. 그리스도의 연합과 성도의 교통을 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공동체적인 현실화가 교통입니다. 내적으로는 생명에 참여한다는 내용을 3장에서 다루었습니다. 외적으로는 그의 은사를 사용하고, 즉 타인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이 은사를 사용함으로써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접붙임과 사역의 관계는, 접붙임을 받아도 계승할 수 없는 사역과 계승할 수 있는 사역로 나누어집니다. 그 계승할 수 없는 사역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고, 계승할 수 있는 사역은 그의 봉사적 사역이에요. 머리되심과 그리스도적인 섬김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가 계셨다 하면 계속하셨을 일들을 뒤이어 가는 것으로 바로 유기체적 공동체가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유기체적 섬김 안에 세차원이 있는데,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과 사랑을 드러냄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마음, 모범, 통치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통치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 모든 질서로운 통치들을 교회 안에서 구현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만 생각하더라도 혼자 예수를 믿어도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생겨나면서 무질서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에 질서가 생깁니다. “이것은 주님이 기뻐 하시는 거야. 안 기뻐하시는 거야. 주일은 교회가야해. 이런 생각은 하면 안 돼. 이런 생각을 많이 해야 해. 이런 섬김을 해야 하는데, 섬김을 하면서라도 이런 일은 하면 안 돼” 라는 규칙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똑같이 공동체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때 하나님이 그 전체에게 주신 규칙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 외딴 섬에서 혼자 예수님을 믿어도 내가 경험을 하는데, 그렇잖아요. 그것이 바로 교회론적인 차원입니다.
그 다음에 섬길 수 있도록 공급하시는 하나님, 개별적 영혼 안에서 하늘 자원과 은혜를 주시며, 일반적 섭리 안에서는 지상자원과 환경을 주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질서와 유기체적인 섬김. 교회 질서를 주신 권세에 질서를 유지하는 권세와 순결을 유지하는 권세를 주십니다. 이것은 5장과 관련이 되는데, 왜 이렇게 뛰어들어 왔느냐 하면, 봉사를 한다고 한다면서 “나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다. 열심히 있다. 헌신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주일날 예배드리고 축도하기 전에 도망가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문제이긴 하지만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려고 해도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헌금이나 하고 가기 때문에, 그 자체가 문제가 될 뿐 커다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 많이 내고, 열심히 봉사하고 그 다음 교회 지을 때 집 팔고 했던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 아니므로, ‘많이 바치면 문제를 일으키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유기체적인 섬기의 질서라는 것이 뼈저린 경험에 의해 들어간 것입니다. 교회의 영적 질서와 유기체적 섬김을 보면, 교회는 커다란 두 개의 질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령적 질서와 봉사적 질서인데, 신령적 질서는 목양적 질서이고, 봉사적 질서는 일을 하는 질서입니다. 이 두질서에는 관계와 통합이 있습니다. 이 양쪽 질서가 “내가 목회자니깐 내 말을 들어, 모든 일은 교역자가 결정 할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해”라는 것은 안 됩니다. 신령적 질서이든 봉사적 질서이든 간에, 진리에 대한 복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의한 일치가 이루어져야합니다. 대개 보면, 장로님들이 “아무개 전도사, 전도사” 하는 교회에 전도사들이 “장로들, 장로들” 하고 부릅니다. 나이어린 학생이라도 ‘전도사님,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장로들이 있는 교회는 “장로님, 권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서로 복종하면서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야합니다.
두 번째는 유기체적 생명과 나누어지지 않는 섬김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유기체적 생명과 나누어 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섬길 때, 그 섬기는 일을 가지고 대판 싸우고, 목회자와의 관계, 지체들과의 관계가 깨져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가 존중되어야하는 목양의 정입니다. 그래서 일 하다가 교역자들과 다투고 장로들고 싸우고 하는 것은 기본적인 신학적 개념들이 안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5장으로 넘어갑니다. 5장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교회의 유기체적인 통치’가 나오는데, 통치는 다스리는 것입니다. 통치가 성립되려면 첫 번째는 법과 기준이 있어야하고, 두 번째는 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 하며, 권한이 있다는 것은 법을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을 시행 했을 때, 그 법에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상을 주고, 법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는 벌을 줄 수 있는 힘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복음적 교회에서는 그 권세를 로마카톨릭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카톨릭은 행정에 관한 권세를 직접 가지고, 사람들을 가둘 수도 있고, 사형 시킬 수도 있으나, 복음적 교회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런 시절이 로마 카톨릭 사람들은 그립겠지요. 만약 지금 교회도 그렇다면 편리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 계속 결석하면, 지하에 유치장 만들어서 가두고, 거기서도 말 안 들으면 손발에 수갑 채우고 독방주고, 회개하면 수갑 풀어 주고, 새사람이 되면 본당에 올라오라고 한다면, 얼마나 교회의 질서가 잡히겠어요.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질서가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질서는 영적 권세입니다.
권위의 원천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재정하시고 은혜의 방편과 성례를 정하시고 교회에 헌법과 직원을 주시고, 임재에 따라 질서에 따라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통치의 원천은 그리스도이며 주관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객관적으로는 말씀 안에서 통치하십니다. 통치의 실행은 개교회가 하며, 일차적으로는 개교회 자체 안에서 이차적으로 통치의 실행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 합니다. 특히 장로교회는 대외적인 정치제입니다. 장로제가 좋습니다. 싸우는 교회들을 봤는데, 회중교회는 대책이 없습니다. 회중 교회는 교인 전체가 직접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담임목사가 청빙이 되면, 은퇴할 때까지 그 교회에 있습니다. 목사님이 워낙 훌륭하고 말씀의 깊이도 있고, 행정적으로도 탁월하고, 사고도 합리적이고 윤리적이라면 회중제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도 장로회주의자였다가 회중주의자로 바꾸고, 로이든 존슨 목사님,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도 회중교회 목사님이 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그 관계가 깨뜨려지고 싸움이 벌어지면, 조종할 사람이 없습니다. 서로 평행선을 달리면서 교회가 큰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노회가 조정을 하여, 목사와 교인들을 화해시키거나 목사에게 문제가 심각하면 목사를 내보내거나 하는 이런 상위의 단체가 있어서 사태가 벌어질 경우 조정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너무 대책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 대신 장로교는 대의적 정치제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교인들이 자유롭게 선거를 해서 장로를 세우면, 장로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위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에 의해 통치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장로들이 세워지는데, 세워진 사람이 자신보다 학벌도 높고, 자신보다 젊고 돈도 많고, 마음씨도 착하고, 도덕적이고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은혜도 더 많이 받아서 나무랄 때 없는 사람이면 좋겠지만, 항상 그런 사람들이 장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도 장로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장로가 될 수 도 있습니다. 그래도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렇게 질서가 세워지면,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분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교회 제도입니다.. 장로교회에서는 그동안에 이런 당회 제도를 옛날 이조 시대 때 아버지 혼자 모든 집안을 다스리는 것처럼, 그런 가부장적인 생각으로 장로들 위에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비합리적으로 움직여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 원래 이 제도는 매우 좋은 것입니다. 교회가 신약시대에 영적인 수준을 유지하기만 하면, 최고로 아름다운 제도가 장로제도입니다. 거기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장로제도는 나름대로의 많은 한계를 드러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순들을 잘 극복하면서 지혜롭게 나가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교회에서 보면, 장로 임기가 2년입니다. “아니 2년 동안 무엇을 합니까?”라고 물어보니, “하기는 뭘 합니까, 그냥 명예로 한 번씩 돌아가면서 해 보는 것이죠.” 나머지는 담임 목사님이 다 알아서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대는 좋을지 모르지만, 자기처럼 교회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목사로 온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너무 인간적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교회에서는 예배를 드리는데, 강대상 쪽이 환해야 사람들이 쳐다 볼 텐데, 목사님이 사회를 보는데 저 위에 앉아있으니까 불을 안켜서 목사님 얼굴이 검게 보여요. 그래서 예배 마치고 “목사님 쪽에 등을 환하게 달고, 다른 쪽은 등을 줄여서 목사 쪽이 환하게 해야지요.” 라고 했더니, 그 분이 “목사님, 우리 장로들에게 말씀해주세요” “뭘요?” “당회에서 못 달게 해.”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목사님은 그 교회를 개척하신 분인데, 그런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가 등도 하나 달 수 없다니, 세상에 참 못된 장로들입니다. 실화입니다. 7 ~8년 전 이야기입니다. “당회에서 반대를 해서 강대상 쪽에 등을 못 달았어요.” 참으로 짜증나고 답답한 노릇입니다.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와서 보면, 그 교회 다닐 마음이 생길까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고 있으니, 그 교회 다닐 마음이 생길까요? 참으로 한심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어느 장로가 심각하게 “목사님, 부흥회를 통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우리 목사님과 공동목회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열린 교회와 미국에 있는 우리교회를 합쳐서 한 달씩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라고 물었습니다. ‘됐네, 내가 왜 그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합니까. 등도 안달아주는 그 교회에 가서’ 그 말이 목까지 나오다가, 싸울 일 생길까봐 참았습니다. 여러분은 웃겠지만, 웃을 일 매우 많습니다. 어느 교회에 장로님이 주일 예배 때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훌쩍 훌쩍 웁니다. “하나님, 드디어 우리 교회에 자판기가 들어 왔나이다.” 참으로 짜증스러운 일입니다. 은혜를 그런데 쓰다니 말입니다.
이것은 실제 들은 이야기입니다. 요새 일어난 일은 아니고, 10여 년 전 쯤 일입니다. “당회에서 담임목사 컴퓨터 한 대 사주는 거 어떻겠습니까?” 했더니, “컴퓨터는 너무 비싸니, 타자기를 쓰시오”라는 결정이 났다고 합니다. 짜증난다고 생각 안하고 이런 일을 해결하며 살아야한다는 목회자들, 장로님들이 있습니다. 너무너무 어지럽습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 그렇게 좋은 은혜를 올라가서 흐느껴 울면서, “우리 주변에는 자판기 하는 가게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면서 울어야지. 자판기가 들어왔다고 우니, 매우 짜증이 납니다.
그다음에 교리권입니다. 교리권은 교리에 관한 권세입니다.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 교회에서 울려 퍼지지 않도록하며, 그것에 의해 교인들이 미혹 당할 때는 하지 못하게 하고, 계속 미혹 당할 때는 잘라 버려야합니다. 그것이 몸을 보호하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선포와 성례를 집행함, 신조와 신앙고백을 작성함, 성경과 신학연구를 진작함.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 D번이 개혁교회에서 크게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대게 가난한 사람을 돕고, 선교를 돕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신학교를 돕고, 신학연구를 돕고 하는 것을 아주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몇 년전에 어느 교인이 했던 이야기인 “도대체, 우리 목사님 신학교가서 돈을 퍼 부어주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돌아돌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퍼 부어준 것도 별로 없지만은 성경과 신학연구를 진작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에는 교회에 박사라는 직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경 교사입니다. 성경의 직제를 보면 목사 아래입니다. 사도와 선지자들과 목사와 교사. 교사가 주일학교 교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독도르 에클레시아라고 해서 교회의 박사를 가리킵니다. 즉 신학자입니다. 이 신학자들 그룹이 담임 목사보다 아래 단계에 있어서 통제를 받으면서 교회 안에서 봉사해 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임무는 신학을 철저히 연구해서 목회를 후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신천지라는 이단이 들어왔는데, 그들의 가르침의 특성이 무엇이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그리고 하문을 하면 거기서 연구를 해서 밝혀냅니다. 또 예를 들면, 핵폐기물 관련해서 동네에서 편을 나누어 싸운다. 그러면 생태학적 입장에 대해서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하면 좋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박사들이 연구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담임목사들에게 조언을 해 주는 것이에요. 이것을 종합적으로 판단을 해서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박사들의 일입니다. 요즘에는 이런 제도를 하고 있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제도가 매우 그립습니다. 향수가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지금 신학교수중에서도 그런 학식과 인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근처에 있는 교회에서, 너무 은혜로운 교수님이 계셔서 계속 설교시켰더니, 1년쯤 설교하더니 교인들을 뚝 잘라서 가 버렸습니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말씀을 훈련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으니 괜찮지만, 몸인 교회 입장에서는 얼마나 안 좋은 일입니까? 나간 사람에게 좋은 감정으로 나갔겠어요. 그런 일들이 문제가 되지만, 그렇게 해서 좋은 신학자들이 교회에 포진하여 신학적 자문에 대답하며 이끌어 가는 교회는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교회에 대한 사랑과 신앙을 겸비한 사람들을 찾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 될 것 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신학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교회에서 돕고, 신학교를 후원하고, 거기에서 나온 결과들을 가지고 성도들을 잘 가르치고, 성도들은 유익을 얻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아직은 빚도 많고 형편이 어렵지만, 형편이 나아지면 교수님들에게 논문을 쓸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우리가 매우 사랑하는 개혁파신학, 청교도신학 쪽 글들을 써달라고 부탁하고, 후원해서 연구비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분들은 연구하니 좋고, 교회는 영적인 유익을 얻어 좋고, 그렇게 해서 서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크고 돈이 많아도, 세상을 보는 안목과 식견이 있으면, 돈이 많아도 고상하게 삽니다. 그러나 수전노처럼 돈을 벌었는데, 돈을 어떻게 쓰는지 모르면 백화점가서 옷만 잔뜩 사서 입고 동춘 서커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색깔도 안 맞는 이상한 옷 입고 금니해서 나타납니다. 이처럼 교회가 신학적인 식견을 가질 때, 하나님이 주신 자원들을 아주 고상하게, 바르게 쓸 수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통하여 교회 뿐 만이 아니라 조국교회 전체적으로 신학적인 수준을 높이고 연구해야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후원하면 매우 좋을 것 같습니다. 해외에 자주 나가면서 생각하는 것인데, 정말 정신이 올바르고, 청교도나 개혁사상을 제대로 공부해 와서,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꼭 우리 교회로 돌아오지 않아도, 이 사람들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5년이나 7년 정도 도와주면 똑똑한 학생들은 박사학위 마치고 돌아온다면, 좋은 선생을 길러 내는 건데...’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일들에 헌신하면서 영향력을 잘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교회 100개보다 신학교 1개가 훨씬 중요하고, 때로는 신학교 10개보다 아주 훌륭한 출판사 하나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 다음에 질서 유지권으로 교회의 법을 시행하고 규칙을 정하고 하는 것입니다. 순결 유지권은 권징의 목적, 권징의 시행을 하면서 교회전체가 유기체적인 질서 안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대충 한번 훑어지만 개념들을 들어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 테이프 4개듣고 가르치면 좋은 구역장이 되리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