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장 수련회 새벽예배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어느 목사님이 시골길을 가다가 고목나무가 큰 게 있으니까 가던 길을 멈추고 고목나무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보니까 나무가 구멍이 뚫어지고 이제 늙어서 속이 다 파이고 파인 그 곳에 벌레들도 있고 또 새들도 깃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걸 붙들고 그러더래요.“야. 넌 어떻게 목회도 안 했는데 이렇게 가슴이 뻥 뚫어졌냐” 영혼을 돌보는 이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어려운 거죠. 왜냐하면 이 세상의 일 같으면 할 수 없을 때는 안 하면 되고 그리고 하지 못 하게 할 때에는 싸우면 되고 그리고 무엇인가 힘들고 어려우면 쉬면 되는데, 근데 이 목회의 일은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양들이 필요가 있는 한 영혼을 돌보는 이 일에는 그 어디에도 한계가 없어요. 누구도 ‘나는 충분히 이 일을 다 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는 거죠. 이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제 이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유로 부르실 때 그 때 하나님이 이 베드로를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를 잘 지으려면 기도 많이 하는 사람만 가지고는 안 되고, 돈 많은 사람 가지고 안 되고 건축에 은사가 있는 사람이어야 되겠죠? 그렇죠? 또 만약에 우리가 하는 일이 교회에 여러 가지 디자인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 가지고만은 안 되고 어쨌든 미술에 감각이 있고 소질이 있어야지 그 일을 위해서 섬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교회에 많은 일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필요한 많은 일들은 은사가 필요해요. 그래서 그 은사는 각각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데 꼭 필요한 것으로써 하나님의 일에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재능들이에요. 그러면 내가 묻고 싶어요. 영혼을 돌보는 일에는 어떤 은사가 있어야 될까요? 어떤 재능이 필요할까요? 만약에 재능이 필요했다면 예수님이 그것을 물어보시지 않았겠어요? “ 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런 은사가 있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신학교를 나왔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러이러한 능력이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거예요. 물론 영혼을 돌보는데 있어서 말씀의 은사도 필요하고 또 영혼을 돌보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많은 자연적인 은사들과 영적인 은사들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영혼을 돌보는 일에 있어서 이 모든 일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주시면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물어보지 아니하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도 하나님이 그냥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그런데 이 사랑은 달라요. 은사는 하나님이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그런 것 필요 없이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은사,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어보시고 주셨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은사들도 하나님이 우리의 동의를 받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주십니다. 그러나 사랑은 다릅니다. 사랑은 은사와 달라서 그 사람에게 손에 쥐어지듯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심령 속에 주어지고 그 거룩한 은혜의 감화가 그의 지성 속에 설득되고 의지 속에 받아들여져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는 거죠. 그리고 그 사랑의 깊이는 그의 본성이 거룩해져가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렇게 그 은혜는 깊어지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그래서 사도 요한이 말하기를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랑이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선도되는 사랑이에요. 그렇지만 그 사랑은 물건을 주듯이 우리에게 쥐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받아 들여져서 변화되어가는 그러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거죠.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도 자신의 책 속에서 기독교인의 영적인 특성 가운데 최고봉이 사랑이다..라고 얘기했어요. 다른 것들은 자신의 본성과는 상관이 없이 주어진 것들이지만 은혜는 그 사람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은사 중 하나를 물어보지 아니하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던 것이죠. 이것은 쉽게 얘기하면 ‘네가 내 은혜를 아느냐 네가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느냐 하나님의 사랑이 네 마음에 있느냐’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양떼들을 맡기십니다. 이 예언에 따라서 이제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담임 목회자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어제 간증을 들으면서도 제가 그 몇 분들 간증을 듣고 영성을 보면서도 참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실 어제 위경련이 너무 심하게 일어나서 집에 가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러다가 참고 앉아서 들으면서 ‘아 참 내가 안 가기를 잘 했다 참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구나’ 네가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게 하는 것, 원천이 무엇입니까?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에게 좋은 은사가 있다고 해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변화시키니까 그렇게 꿈을 꾸는 거예요. 아무 말 없이 만나서 밥만 먹고 돌아가는 통곡하게 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거죠. 사실은 바로 그 마음이 하나님이 저에게 주셔서 열린교회를 시작하게 하신 마음이고 또 그 마음은 예수님이 하늘에 계셔서 이 세상이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보시면서 느끼시는 그 마음이에요. 그리고 그 마음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한 것이죠.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에게, 아들의 마음이 목회자에게, 목회자의 마음이 회심한 사람에게, 그리고 회심한 사람의 마음이 그들 안에 있어서 그래서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 다 생각은 다르고 살아온 배경도 다르고 그리고 우리들의 행동 양식도 같지 않아요. 교회에 어떤 행정적인 문제가 있을 때 사람마다 각기 견해가 다를 수 있고, 생각이 각각 다를 수 있어요. 그래도 그런 다양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에요. 그렇게 함으로 교회는 획일적인 상황이 아니라 아주 다양한 상황이에요. 상황에 대응하면서 자신의 몸을 세워 가는 거죠. 그러나 그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마음의 놀라운 일치, 그 마음의 놀라운 일치, 목자 잃은 양 같이, 이 세상에 있는 당신을 떠난 타락한 인간을 바라보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주동적인 원인이 되어서 그 영원하신 예정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자들을 인하여 통곡하며 아파하셨던 그 마음은 사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그 마음이었습니다. 그 분이 오셔서 여러 가지 일로 섬기셨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외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이렇게 하시면서 사셨던 모든 섬김의 그 주동적인 원인은 바로 그렇게 가슴 속에 불타오르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목자 잃은 양들 때문에 눈물 흘리는 그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저에게 주셔서 그래서 교회를 세우게 하신 것이죠. 그래서 저는 맨 처음에 교회를 세울 때 이런 마음을 하나님이 주셔서 교회를 세우셨으니까 내가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교회에 오는 모든 사람은 나처럼 될 거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고난의 근거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을 전할 때 한 번의 그 말씀에 변화되어서 목회자의 통곡을 이해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흐느낌을 이해할 수 있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못 박게 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영혼을 돌보는 일보다 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긴 세월이 걸리고 어제 그 자매는 그렇게 긴 세월 동안 결국은 하나님께 돌아왔지만, 그렇게 돌아오는 사람보다는 안 돌아오고 영혼을 돌보는 사람을 통곡하게만 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는 것이에요. 그렇게 그런 일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돌보는 이 일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변하잖아요. 완전히 변하잖아요. 마지막 시대에는 언제 기회 있으면 얘기하겠지만, 이제 예수 믿기 점점 어려운 시대가 돼요. 그래서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하시는 것은 이 세상 전체가 사상적으로 배도의 길에 이미 들어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면서도 하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정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 예전에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만 예수를 믿었지만 지금은 이런 성령의 역사 일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기적에 가까운 일들이 그의 지성 속에 벼락이 치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로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거죠.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변화될 때 또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를 믿었어도 이 세상의 혼탁된 사상과 섞여진 그 속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구원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방향 자체를 잘 못 정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나무가 생겨나기는 했는데 꽃 피고 아름답게 열매를 맺어 거목처럼 자라야 될 텐데 그럴 수 없는 사상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난 거예요. 오늘날 은사 운동이 요즘같이 합리적인 시대의 한 구석에서는 신비주의적인 은사 운동들이 많이 일어나요. 이게 모순이에요. 결국은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복음적인 영성이 아니라,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의해서 조절되어서 자기 자신에게 만족을 주기 위한 그런 종류의 영성으로 이게 탈바꿈이 되어 가는 거예요.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의 세상이란 말이죠. 그런 속에서 주님을 믿고 올바른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이것은 놀라운 일이고 한 사람의 인생의 변화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씨앗으로 삼아서 이 세상을 향해 가져오실 그 위대한 변화를 꿈꾸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런 위대한 일들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은 얼마나 초라한 사람입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미 지어주신 이름이 있는데도 ‘요한의 아들 시몬아’하고 물으신 것은 결국 부름 받기 전의 요한의 아들 시몬, 그를 생각나게 하는 호칭이었습니다. 이 호칭의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연약함 그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위대한 일을 할 때에 중간에 있는 요소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거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니까 하나님이 그는 연약하지만 그를 들어서 위대한 일들을 하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약한 자를 부르시어 하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경험하는 거죠. 그래서 요한이 바로 이러한 예수님과의 문답을 옆에서 보고 배우면서 결국은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사랑을 느꼈기 때문에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라고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한 예수 잘 믿고 세상에서 부자 되고, 명예가 아주 높아지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좋은 대로의 해석이지 영광 받으시는 방법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베드로,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려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이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결국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받을 큰 고난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젊어서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스스로 띠 띄고 다녔거니와 우리가 목양의 사명을 받지 않을 때에는 부담되는 게 없었습니다. 그저 우리 마음대로 우리 스스로 우리가 주인을 삼고 원하면 하고 안 하면 그만 두고 이렇게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 목양의 길에 딱 들어서게 되면 그 다음에는 우리의 인생을 우리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 가르치고 싶은 때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싶지 않을 때도 가르쳐야 하고 기도할 수 있을 때만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기도할 수 없을 때에도 기도해야 하는 그러한 어미의 운명이 되는 거죠. 그래서 자식이 아직 생기기 전까지는 여자로서 자유롭지만 일단 자식이 생기고 나면 그 자식에 매여서 때로는 남편이 그렇게 같이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도 같이 살아야 하는 그러한 자식에게 매인 어미가 돼요.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부모의 길이 아니겠어요? 제가 신학교에 재직할 때인데, 이 학교에 있다가 5년 있다가 저 학교로 옮겼습니다. 옮기고 그저 한 2년 쯤 3년쯤 지났을 때 학교로부터 아주 황송한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게 뭐냐면 들어온 지 2년 정도 밖에 안 됐는데 그것도 모든 교수들이 보는 앞에서 저에게 제의를 했어요. “당신은 참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2년 동안 여유를 줄 테니까 외국에 가서 공부하고 오겠느냐”그 당시에 2년 동안에 10만불을 주겠다고 제안을 했어요. 그 때 10만불이면 굉장히 큰 돈이었어요. 그러니 평소에 공부하는 게 그 때나 이제나 꿈이었는데 얼마나 황송하겠어요. 내일이라도 내일이라도 간다고만 그러면 2년 동안 휴가 주고 생활비, 학비 할 수 있도록 2년 동안 10만불을 주겠다고..그 돈이면 그 당시에 환율로서는 우리 가족들이 가서 충분히 학교 다닐 수 있는 돈이었어요. 유학을 하든지 여행을 2년 동안 하면서 식견을 넓히든지 아니면 외국에서 2년 살면서 그 영어 공부를 하든지 맘대로 해라...박사 논문을 준비해야 돼서.. 그런데 그렇게 황송한 제안을 받은 지 불과 몇 달 후에 제가 사직서를 냈습니다. 왜 그랬겠어요? 이미 교회를 개척했어요.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지 않았으면 망설이지 않고 떠났죠. 그런데 이미 그 때는 그 자식을 낳아서 주렁주렁 딸려 있었어요. 많진 않았지만...그래서 도저히 기도가 안 나와..갈 수가 없어. 그래서 ‘아. 이것으로서 끝났구나’ 그러고 접었습니다. 그 때에 ‘아 이게 결국은 교회를 한다는 의미이고, 영혼을 돌본다는 의미구나 아 결국은 못 가는구나’
(찬양)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한 동안 마음이 서늘했죠. ‘아 정말 좋은 기회였는데 이제 가면 내가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정말 알아서 거기에 한 번 전념해 볼 텐데.. ’서늘했죠. 근데 최근에 영국에 가서 제가 위로를 받았어요. 영국으로 유학으로 가려고 그랬거든요. 근데 그 중의 어느 목사님이 그래요. “목사님” “왜요?” 영어 얘기가 나왔어요. “나 영어 잘 못 한다..책은 좀 읽겠는데 얘기 좀 하려고 하면 입에서 뱅글뱅글 돌고 안 나오고 식은 땀이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유학도 안 하고 그렇다”고 그랬더니 옆에 있는 어느 후배 목사가 그래요. 진지하게.. “목사님 제가 감사 기도했습니다.” 무슨 감사기도 했냐니까 “우리 김남준 목사님 유학 안 한 것을 감사한다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그랬더니 자기는 한국사람으로서 긍지를 느낀대요. “유학을 안 하고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고 설교할 수 있다는 것,,,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사님 책에서는 버터 냄새가 안 납니다...” 버터를 먹어 봤어야지 냄새를 풍기지..그래 어떻게 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큰 섭리겠구나 그런 생각일 들어요. 영혼을 위한 희생과 수고는 하나님이 지신 빚이야.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그냥 빚지시는 법이 없어요. 언젠가는 우리에게 반드시 갚으시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가 아니면 저 하늘나라에서도 변하지 않는 영광 가운데 우리에게 그 빚을 갚으십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께 꾸이는 삶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보상을 받을 욕망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열심히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그래서 한 때는 마음 속에 그런 게 있었어요. 경쟁심 같은 게 있었어요. ‘그래 공부하다가 연구하다가 힘들 때마다 그래 난 유학도 못 했는데 더 열심히 해야지 다른 사람들은 5년씩 10년씩 공부만 하는데 어차피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시간을 허락을 안 하셨으니까 그저 나는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석탄을 캐러 내려가는 광부의 마음으로 살아야지만 성도들의 마음을 덥힐 수 있지 않겠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던 경험이 있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좀 해이해지긴 했지만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가는 이 길이 항상 순탄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영혼을 돌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자기 말 듣고 한 번에 변화하는 영혼들만 붙여 주시면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그 목회자는 그 영혼을 돌보는 사람은 즉시 부패하고 맙니다. 부패하고 말아요. 오히려 소금이 되는 것이에요. 자기의 영혼에 소금이 되는 것..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소금의 역할을 해서 나를 보호해 줄 필요는 없어요. 여러분 모두가 안 해도 하는 사람이 저절로 많으니까 동참하지 않아도 사절해요. 동참하지 않아도..그렇게 하면서 삽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조금만 더 하면 되지..교회를 시작할 때 결혼한다고 나를 찾아와서 인사하던 자매들이 이제 벌써 많이 늙었어요. 조금 더 있으면 권사 시켜도 될 거 같애..그렇게 늙어가는데 세월이 가는데 앞으로 남은 시간들은 얼마나 빨리 지나가겠어요.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갑니다. 즐겁고 까르르르 웃던 일, 그리고 가슴 터질 듯이 기뻤던 일, 행복했던 일, 다 지나갑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고, 오직 남는 것은 주님을 섬겼던 그 경외하는 마음만이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남는 것이에요. 매일매일 바라보면서 ‘아 그래 얼마 남지 않은 그 길 ’주님이 가셨던 그 길의 뒤를 따라서 우리들이 가고 지금 하나님이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자리가 많이 있는데 영혼을 돌보는 이 자리에 세워 주신 것은 얼마나 감사한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 해서 그렇게 수고하고 애 쓰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