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상반기 교역자 수련회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계2:1)
녹취자 : 윤은정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일곱별은 그 앞에 나오는 것처럼 교회의 사자를 가리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사자가 혹시 ‘교회를 지켜주는 천사가 아닐까?’ 라고 해석을 하는 사람이 있지만, 사실은 여기에 말하는 사자는 그 교회의 감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소개함에 있어서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이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은 2장부터 일곱 교회가 등장하는데 그 앞부분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내용이 나오고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뒤따라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그 묘사가 일곱 교회가 다 다릅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 같은 경우는 ‘좌우의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 그랬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 틀린데 이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교회에 소개하는 이 예수님의 자기 묘사는 그 교회의 영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가 아주 밀접한 연관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는 예수님이 좌우의 날선 검을 가진 이이심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는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는 일곱별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시고, 또,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이시다.’ 그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이 에베소 교회의 영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베소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이 교회는 여기서 제일먼저 주님께 책망을 받고 있지만,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다른 교회는 말만하는데 행위가 있는 교회였고, 다른 사람들은 다 이야기만 해도, 이 교회는 수고하는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환란과 시련 가운데서도 신앙의 정죄를 잃지 않기 위해서 인내했던 교회였습니다. 나아가서 윤리적으로도 순결하여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는 교회였고, 뿐만 아니라, 자칭 사도라는 거짓 사도들이 돌아다니는데 그들을 정확하게 분별해서 거절할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말씀의 깊은 지식과 그리고 영적인 분별력과 악한 것을 용납지 않는 도덕적 결단력까지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참고, 이름을 위해서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그런 교회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이제껏 까지 본 교회들 중에, 이런 종교의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교회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이 한마디의 말이 앞에 나온 모든 과거의 좋은 점을 한 번에 뒤집어 버리는 예수님의 획기적인 선언입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다.’ 만약에 우리가 평신도라면, 아, 그러면 ‘처음사랑이 이 교회의 이 모든 장점보다 중요하구나’ 생각하겠지만, 남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이 자기계시, 일곱별을 붙잡고 계신이가 그리스도시라는 자기계시는 이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하면, 에베소 교회가 처음에는 그런 훌륭한 점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훌륭한 점들 중에 대부분은 그 이후에도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그게 교회의 전통이라는 거잖아요. 그죠? 그런데, ‘그러나’ 그런 모든 형식적인 것들이 윤리적인 것들이 아직 남아있지만, 그러나 ‘너희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도대체 이 에베소 교회가 그렇게 사도행전 19장에서 기적적으로 세워진, 부흥과 함께 세워진 이 교회가, 그렇게 훌륭하던 교회가 왜 처음 사랑이 식었을까? 나는 이 대답을 여기서 찾고 싶은 것입니다.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게 어렵습니다.
아까도 몇몇 목사들하고 만나서 이야기했는데, 전도사나 부목사 때 설교하면 반듯이 교인이 큰 은혜를 받고, 그리고, 교인들의 인상에 담임목사 설교보다 더 대단한 설교로 마음에 각인이 돼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일 년에 두 번하지만, 나는 매일하잖아요. 그것이 목회를 위해서 충분히 내가 준비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매우 교만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심을 불러 일으켜 첫사랑을 갖게 하는 것도 목회에서 매우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첫사랑을 유지하면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역에 있어서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그 여러분 자신도 그것을 경험하지 않아요? 그러면, 존 오웬 목사님이 목회의 대의가 회심과 회심의 보존이라 그러시는데, 그러면 우리가 회심을 위해서 열열히 기도하고 하나님이 회심의 은혜를 주시도록 간구하며 선명한 복음을 전한다고 칩시다. 그래서 회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회심을 보존하는 것은, 보존하게 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사역이고, 심오한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회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간단하고 아주 명료한 메시지만 사용하시면, 회심이 일어나지만, 회심의 보존은 심오한 복음 교리 속으로 들어가야지만 회심의 보존이 가능하고, 설교만 그렇게 한다고 회심이 저절로 보존되는 것은 더더욱 아닌 이유고, 앞에서 은혜 받고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교인들이 이게 드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종합적인 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외국의 선교지에 가서 설교를 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 선교지를 몇 번을 갔는데, 영어가 전 능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정도 설교는 들을 수 있잖아요. 아무 내용이 없고, ‘Jesus saved us. 할렐루야. 아멘’만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뼈아픈 얘기 이지만, 그 설교 받고 과거의 회심한 저 사람들이 다루어 지겠습니까? 절대 다루어 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목회자의 피나는 분투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많은 연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요점은 뭐냐하면은 그런 점에서 회심을 보존하는 것이 회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일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를 하고, 그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영혼들을 먹여야 하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본질적인 것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목회자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본질적인 일입니다.
이엔 바운즈 목사님이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설교도 때로는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지원진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혈란한 지식으로 해도, 그 사람 자신이 그리스도의 그 사람 자신이 별이기 때문에 그 별이 예수의 손에 꽉 붙잡혀 있어야지만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뭐냐하면은 교회가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는 예수님의 위협까지, 경교까지 받았는데, 이 교회가 명심해야 될 바는 목회자 자신이 주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이 돼야 된다 이 얘기입니다. 우리 잘 쓰는 말이잖아요? 주님의 손에 붙들려야 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 말이 무엇인지를 알면서 쓰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늘도 아까 몇 사람이 강권적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획기적이라는 얘기도 했는데, 그렇게 주님이 자기의 의지 작용을 초월하는 것처럼, 자기를 어느 한 순간에 어떤 결정이나 결단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주님의 손에 붙들렸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인도입니다. 주님께 붙들렸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면은 자기의 자신의 의지의 작용이나 이런 것들을 초월해서 주님이 강압적으로 그를 끌고 당신 하고 싶은 데로 일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그렇게 간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오바하는 간증이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의 작용은 인간의 의지와 함께 있고, 인간의 의지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의지를 거스려서 하나님의 역사하는 작용이라면 자기는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제가 조목사 손을 붙들고 양목사 빰 맞게 됬다면, 조목사에게 무슨 비난받을게 있겠습니까?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런 거거든요. 그런데 주님의 손에 붙들렸다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상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은 이 예화를 들으면 여러분들이 이해가 쉬워질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가 읽을 때에는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처음 성경을 대할 때에는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고 우리가 주체가 되는 것이고 성경이 객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보게 되고 성경을 보면서 성경의 어떤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성경을 분해하고 해석을 합니다. 성경은 가만히 있고 우리가 움직이고 우리의 정신 작용이 움직이면서 성경의 뜻을 알아내고 성경을 적용을 하고 성경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좀 더 들어가게 되면 그러면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그러면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오래된 습관이 있습니다. 무슨 우리 큐티한다고 그러는데 아무래도 제 체질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은 성경을 순서대로 쭉 읽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읽다가 양에 대해서 너무 압박받지 말고 읽어가다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와 닫는 다고 생각되면 다시 빽 해서 다시 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내야 됩니다. 시간을 안 내고 한 15분에 몇 장 읽어버릴려고 하는 이런 작업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읽습니다. 또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마음에 떠올랐던 인상이 별로 사라나지 않으면은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말씀이 딱 걸립니다. 그러면은 반복해서, 반복해서, 반복해서 읽는 것입니다. 1990년도에 제가 누가복음 11장 1절 한절을 3시간동안을 읽었습니다. 11장 1절을... 3시간을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그게 한절이었습니다. 3시간을 읽었습니다. 그리고서 생애적인 깨달음을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잘 들어보세요. 처음에 내가 성경을 읽었는데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면 내가 성경에 의해서 읽혀지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에 의해서 읽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주체가 되시고 나는 객체가 되어서 그 진리의 의해서 내가 읽혀지는 것입니다. ‘너는 이런 인간이고, 이걸 잘못했고, 그리고 너는 이 점에 있어서는 칭찬을 받을만 하고, 내가 너를 위로하노라.’ 이렇게 하면서 성경말씀이 나를 읽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들이 겪게 되는 경험은 뭐냐하면, 자기 상실입니다. 자기 상실이 뭐냐하면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의해서 읽혀지는 객체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자리로 들어가고 성경은 이리로 나와서 성경의 말씀이 성령과 함께 나를 해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수술하고 고쳐가는 것입니다.
수술대 위에 누워본 적이 있어요. 나는 대수술은 아니었지만은 마취가 되어서 수술실로 들어가면 수술 받는 환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취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를 오직 그 의사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병원에 수술 신청서를 쓰러 갈 때 까지는 내가 주체였고 의사가 객체였는데, 내가 그 의사를 선택하잖아요. 수술실에 들어가는 그 순간 나는 객체이고 주체는 그가 됩니다. 그가 내 배를 가르고 떼어 낼 것인지, 말 것인지, 짤라 버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자기가 쭉 봅니다. 그분에게서 읽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자기 상실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게 뭐냐면은 ‘난 없다.’ 어떤 면에서 없는지를 지금 이 시간에 설명을 할 수 없지만은 ‘나는 없다.’ 그리고, 말씀이신 그분이 말씀의 객체가 된 나를 쭉 해부해 뒤지시면서 그 진리에 합당하지 않는 것은 다 도려내고 수술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기 상실의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이 나를 난도질을 하고 고치는 과정을 통해서 나는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이 될 것이라는 그 기대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상실의 경험입니다. 우리가 맨 처음에는 주님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깊이 들어가게 되면 주님이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에 붙들린다는 것은 진리 없이는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진리가 없이는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얼마 전에 총신에 홈커밍데이를 어느 목사님이 오셔서 아주 은혜롭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깨어져야 됩니다.’ 한 40분 동안 계속 ‘깨어져야 된다’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설교가 계속 되면서 처음에 굉장히 은혜로운데 마지막에 답답하게 느껴졌던 이유가 뭐냐 하면은, 마지막에 설교를 닫을 때까지 깨어짐이 무엇인지, 어떻게 깨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안 깨어진 자들은 어떻게 해야지 깨어질 수 있는지 답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렸다는 것은 진리 없이는 그 말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아주 공허한 주관적인 신비의 경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붙들린다고 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에 붙들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칼빈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The Servant of the word of God’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The Servant of the Gospel fo Christ'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이라고 그랬습니다. 모두 다 ‘word’, ‘Gospel'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깊이 사고자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른 것들은 다 못 배워도 괜찮아요. 좀 아프긴 하지만은 피 흘리면서 목회를 하다 보면은 다 터득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강하게 붙들리는 것, 그것은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에 있는 동안에 그 진수가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외치지 않으면은 견딜 수 없는, 그 어떤 피를 토할 것 같은 메시지는 주석을 모아다 놓고 설교문을 쓴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내가 읽혀질 때에 어떤 ‘아낭케’, 필연적으로 자기의 정신 안에 그 진리를 외치지 않으면은 안될 것들이 뼛속깊이 베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설교자의 영성의 진수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한번 설교자가 만나서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가 확 읽혀지고 나면은 그러면은 항상 나는 그렇게 읽혀질 때까지는 설교를 한다든지.. 그런거 관심을 가지면 안됩니다. 자기가 그 말씀에 의해서 읽혀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읽혀졌을 때에 회개하고, 결단하고, 그다음에 이제 오리지날 텍스트도 보고, 이게 진짜 내가 은혜 받은 말씀이 오리지날 텍스트에 있는 내용인가 보고,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들도 검토해보고, 그 다음에 이렇게 나를 깨운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적어 놉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만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 그래서 한 8주정도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1장 1절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고 마치시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그것을 전도사 때에 3시간을 읽고 은혜를 받고 나서 한달 동안 설교를 했습니다. 4주에 걸쳐서... 그렇게 하면 설교 하라고 그러면 설교준비를 안했어도 설교 하라 그러면, 그 노트 펼쳐놓고 몇 시간 전에 쭉 읽으면서 옛날에 은혜 받았던 것을 다시 한번 쭉 보고나면 그 말씀이 다시 나를 읽습니다. 정리해서 갖고 올라가서 설교하면 이미 그것은 머리로 지성으로 자기를 뒤집고 지나가고 이 안에 말씀을 외쳐야할 필요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 나옵니다. 그 다음에 또 해달라고 그러면은 그 다음 꺼를 또 하는 것입니다. 또, 또, 또, 또,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하고는 생각이나 사상이 많이 다르시기는 했지만은 박희준 목사님을 보면은 성경을 참 사랑하던 목회자였습니다. 평생 하루에 4시간씩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는 이분이 자기 사택에 공부방에서 히브리어 성경을 머리에 이고 방을 막 뛰어다닙니다. ‘정말 놀랍다. 이런 말씀이 여기에 있었구나.’
여러분들에게 묻는 것은 그것입니다. 사역이 중요하지... 그리고 여러분들 중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신학 사상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뭐냐면은 사역에 대한 철학이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성경을 읽을 때 다른 것 말고, 성경을 읽을 때 이 성경이 내가 성경을 읽다가 그것이 깊어져서 성경에 의해서 내가 읽혀서 이 속에 필연처럼 가슴에 깊이 남아서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이 가슴속에 남아있는 그러한 성경읽기의 삶을 사느냐 내가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게 많이 설교자의 이 속에 마치 알집처럼 이게 이 속에 쭉 맺혀있으면 그래서 그것이 설교되야 합니다. 그게 바로 목회자가 해야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게 바로 자기가 진리를 찾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의 주제가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다양한 것을 다루니까...
그때에 들어보세요. 그때에... 잘 들어봐요. 그 때에 그렇게 말씀이 부딪혀서 말씀에 의해 자기가 읽히는 경험을 하게 되면 확신 있고 생동감이 있는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런 거는 읽히는데 이 사람이 공부를 안합니다. 신학적인 얼개가 없습니다. 그러면 꼭 무엇처럼 되냐하면 벽돌을 쌓는데 지게로 싸다고 구리는 것처럼 이렇게 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쌓을 수 있는 설계도가 별로 없기 때문에 가슴에 부딪히는 것들이 산발적으로 나오기는 하는데, 그게 무질서한 벽돌처럼 쌓이는 것입니다. 얼만큼은 쌓이는데 그 다음부터는 이게 자꾸 무너지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높이가 안 올라갑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얼개와 사상의 얼개가 있는 그런 설교자의 경륜은 깨달은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설계도를 가지고 박스 스타일로 쌓아져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길이 6m, 높이가 2.4m인 콘테이너가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길이가 6m이고 높이가 2.4m.. 경우에 따라서는 12m짜리도 있습니다. 40피트짜리. 12m짜리 콘테이너 높이 2.4m 인 그 어마어마한 대형 콘테이너가 오차율이 있습니다. 그 오차율을 넘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톱으로 켜서 파기처분 합니다. 그 현대 콘테이너 만드는 회사 이름이 현대 콘테이너 주식회사가 아니라 현대 정밀 주식회사입니다. 그 12m, 2.4m, 집채 만한 콘테이너의 오차의 한계가 얼마인지 알아요? 2mm입니다. 2mm를 초과해서 오차가 나면은 다 절단해서 버린답니다. 큰 50만톤씩 되는 벌크선은 콘테이너를 1만개를 실어요. 그런 콘테이너를... 그런데 오차가 2mm를 넣으면 두 개, 세 개 쌓아놓고 갈 때에는 2cm 가 차이나도 문제가 안되는데, 2mm나 차이가 나도 이것을 5층, 6층 높이로 쌓아 올리면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이게 기울어져가지고 쏟아져 버리거나 배를 전복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정밀한 치수가 요구됩니다. 이게 내가 주서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 회사에서 근무하던 사람이 나한테 20년 전에 증언해 준 것입니다. 20년 전에... 절단기로 잘라서 버립니다. 그렇게 지식이 벽돌처럼 쌓아올려지는 것입니다. 차곡차곡... 그러니까 성경을 읽으면은 이 성경을 읽어서 그렇게 깨달은 것들이 착착착착 쌓아올려지는 것입니다. 쭈욱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말씀과 부딪히는 뜨거운 경건과 냉철한 이성이 한 설교자의 가슴에 만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서 가슴에 쾅 부딪히는 경건은 종교의 핵심이고 그것들을 쌓아올리기 위한 이 학문적인 토대는 핵문이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문과 경건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삐에따스 쓰켄띠아’를 일평생 외친 것입니다. 경건과 학문, 두가지를 위해서... 그래서 주님의 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돼야 됩니다. 매일 불만 때가지고는 주님의 손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일 도서관에 엎드려서 공부나 하고 세미나나 다닌다고 해서 사로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최근에 몇 주 사이에 성경을 읽다가 가슴이 터질 것 처럼 그 성경말씀에 의해서 여러분들이 읽혀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매일이야 그럴 수 없다고 그러지만 이 일이 3개월, 4개월, 6개월이 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러면 여러분들은 주님 손에 붙잡힌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선하게 살고 싶습니다. 진실한 일꾼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다루어지는 실제적인 경건이 없으면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누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확 불들리는 것, 거기에서 그 본문을 들고 섰을 때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람의 신앙의 인격이 설교 속에서 함께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전에 꽉 붙들렸던 대표적인 사람 둘만 들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구약에서 예레미야 아니겠어요? 시민의 뜰에 갖혔을 때 ‘나는 이제 여호와의 이름만 말하지 아니하겠다. 그럴라치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게 뭐겠어요? ‘너는 이제 애굽을 의지하지 마라. 순순히 포로로 끌려가라.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 그게 가슴속에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신약성경에 사도바울 아니겠어요? 그게 뭐에요? 언제 예수님이 복음 전하지 않으면은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셨어요? 그런데,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뼛속깊이 이 안에서 타들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뭐에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읽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데서 지나쳐서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읽히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수시로 우리의 영혼을 컨파운드 세척기로 수도관을 세척하고 지나가듯이 확 휘집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때 그 통증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겠죠? 그죠? 그래서 사도 요한이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천사가 두루마리를 주는데 입에서는 그렇게 달콤하고, 배에 내려가니까 쑥처럼 쓴 것입니다. 자기를 깨뜨리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주의 종이 주님의 손에 붙들렸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단순한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밖에 살 수 없도록 은혜에 의해서 주장된 삶. 그런 삶들을 여러분들이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