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고난과 자기죽음
녹취자: 이경순
오늘 주제가 목회사역 고난과 자기의 죽음인데요 어느 목사님이 심방을 하러 길거리를 지나가시다가 큰 고목나무를 만났답니다. 고목나무에 구멍이 뚫려 있었답니다. 목사님이 심방가방을 들고 나무를 만지면서 “나무야, 나무야. 너는 목회도 안했는데 왜 이렇게 구멍이 뚫렸니? 너도 굉장히 속상한 것이 있었나보구나.” 했다고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요새 몇 주째 계속 회자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어서 마르틴 루터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신학공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진정으로 신학을 공부해서 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하고 명상함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신학자가 되는 것은 진리에 대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통해서 신학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는 길을 세 개를 이야기합니다. ‘오라치오’(oratio), ‘메디타치오’(meditatio), ‘텐타치오’(tentatio), 기도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시고 그담에 ‘메디타치오’는 묵상인데 그냥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현실과 씨름하면서 연관성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괄목할만한 것이 ‘텐타치오’라고 하는 것인데 시련입니다. 시련 중에서도 아주 고통을 동반한 불같은 시련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당 시대에 어떤 이야기를 했느냐면 “참된 설교자와 거짓된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무엇일까? 그것은 고난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고난 받는 설교자는 참된 설교자요 고난 받지 않은 설교자는 참된 설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해하도록 가르쳐줄 뿐 아니라 그 지혜가 얼마나 참되고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능력 있고 위로가 되는지를 경험하게 해주는 시금석입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쥐똥같이 보잘 것 없는 내가 후추같이 고급향신료에 빗댈만한 그 당시에는 후추가 무지하게 비싸서 거의 금값에 못 먹었다.”고 합니다. “후추같이 고급 향신료에 빗댈만한 신학자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당신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이렇게 훌륭한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교황주의자들 덕분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로부터 한없는 고통을 경험했으니까 그들은 악마의 분노로 저를 공격하고 탄압하고 괴롭혔습니다. 말하자면 저들은 나를 꽤 좋은 신학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고난이 없었더라면 저는 그렇게 되지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의 고백입니다. 당시 가톨릭에서는 마르틴 루터를 멧돼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짓밟고 다니는 미친 멧돼지를 하나님이 처단해 주십시오.”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 모든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이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럼 종교개혁자의 원조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을 1917년에 불을 질렀던 마르틴 루터라고 하는 사람은 사실은 고난을 통해서 참된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진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말년에 그가 불같은 시련을 수없이 당했지만 말년에 그가 마지막에 온몸에 신열이 나고 질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마지막 남긴 말은 “하나님, 내 어릴 적 고향은 아이스레벤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아이스레벤으로 보냅니다. 거기서 생을 마감합니다.” 제가 무엇을 말씀드리려고 이 말씀을 드리냐면 결국은 하나님이 쓰신 모든 사람들의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 사람이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의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고난의 사람입니다.
목회자는 외적으로 내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일 큰 것은 모함과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마지막 죽을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길에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서 청해놓고 유언적인 설교를 남깁니다. 그 때에 했던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행20:18-19)”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강제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그래서 자신의 섬김을 이야기 할 때 죽은 자도 사랑하게 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이 대 사도가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것이 눈물입니다. 아시아에서 섬김 3년여의 그 모든 사역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겸손과 눈물과 시련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에서 불구하고 결국은 주님을 섬겨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렇게 사도바울로 하여금 그 모든 시련 속에서 겸손하고 눈물로 목회를 하고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기게 했던 그 기본적인 동기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속성 중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을 참고 덮어주고 견디는 것 이 모두다 인내와 관련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12절을 보시면 사도의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그러고 나옵니다. 자 이것이 어떤 뜻에서 이런 이야기 입니까? 고린도 교회가 사도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그 사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도전가운데 하나가 바울이 진짜 사도냐? 열한사도만 사도라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 그가 생전에 주님을 뵙고 주님 밑에서 사사받은 적도 없는데 자기 스스로 사도라고 했는데 그게 진짜 사도냐 하고 도전을 합니다. 사도바울이 “나 사도가 맞다. 내가 증거를 댈게.” 그리고 대는데 “그 사도들 같이 똑같은 기적을 내가 일으켰다.” 그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고 “오래 참음과” 그러니까 “내가 사도라는 것이 틀림없는데 가장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내가 오래 참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은 사랑이죠.
저는 몇 차례 종교개혁지를 여행을 했는데 아주 많지는 않고 한두 번 정도 한 거 같은데 개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 돌고, 한번은 성도들을 데리고 한번 돌았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비텐베르크를 비롯해서 그담에 아이젠나흐나 아이스레벤 같은 마르틴 루터의 개혁지를 돌때는 가슴은 뛰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보름스회가 열렸던 카제탄으로부터 기소를 받았던 그 장소에까지 가봤는데 감동은 엄청 되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까 마르틴 루터는 나 같은 사람과 비교하기에는 너무너무 혁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인물자체가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그러고 나서 여정 끝에 제네바를 갔습니다. 제네바에 가서 칼빈이 목회하던 피에르 예배당에 들어가서 앉았는데 눈물이 한없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르틴 루터는 나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위대한 혁명가이지만 칼빈은 학문과 모든 면에서 나와 비교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똑같이 연약한 목회자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느껴졌습니다. 원래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칼빈을 다 조사해 보니까 칼빈은 그런 일을 할 성격의 사람이 아니고 조용히 앉아서 수줍음이 많고 글을 쓰면서 살 선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선비 중에서도 무사 같은 선비가 아니라 소년 같은 그런 선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종교개혁의 격랑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큰 파도 속에 휘말리고 그러면서 온갖 시련을 경험하게 됩니다. 칼빈의 주위에는 칼빈이 아주 탁월한 사람으로서 기독교 각료를 남기는데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게 안 느끼겠지만 그 당시에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저기서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고는 있었지만 정확하게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소위 후에 개신교가 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신조를 삼는지에 대한 통일적인 정보가 없을 때 그것을 한 번에 일목요연하게 보여준 책이 기독교 각료입니다. 1536년에 초판이 나오고 1556년에 마지막 판이 나올 때 그것은 분량이 점점 늘어나서 3배 이상 늘어났고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조직신학에서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 하는 그 모든 조직신학적인 구분들이 칼빈이 기독교 각료 최종판에서 틀이 잡힌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데 칼빈 파에서는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신학을 조직화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학을 배우기 굉장히 쉬웠습니다. 그래서 접근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루터 파에서는 이것이 정리가 안 되었기 때문에 멜란히톤의 Loci communes 같은 그런 『신학총론』 같은 책으로 중세시대에 있었던 논제중심의 신학방식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것도 쉽지 않고 전달받는 사람도 깊이는 있지만 일목요연하지 않아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말하자면 비범하리만치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부지런한 독서가였고 그리고 암기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교부들의 글을 비롯해서 이미 인문학적인 훈련이 인문주의에 의해서 철저하게 학습했고 그리고 그는 가톨릭의 사람이었지만 파리에 있을 때 깊은 회심을 경험하고 이제 복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개신교에 정초를 놓는 중요한 작업들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교부들을 통해서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동시대에 개혁가들과 함께 고민을 하면서 그 개혁신학을 아주 놀라운 언어로 피력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화란에 갔을 때 제가 잘 알고 있는 지금은 90세가 훨씬 넘으신 노학자가 있는데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그래서 그분에서 한번 물어봤습니다. 칼빈 당시에는 그렇게 수많은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있었는데 왜 칼빈만 이렇게 유명해진 이유가 무엇이냐 그랬더니 그분이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그 당시에 수없이 많았지만 그러나 그 중 아무도 칼빈과 같은 쉬운 방식으로 깊은 신학을 대중과 교통할 수 있는 소통의 능력을 가진 신학자는 없었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그 분이 세계적인 마르틴 루터 연구가 입니다. 스페이커르 교수님이라고 합니다. 그분이 자기가 연구하는 마틴 부처의 예를 들면서 그분은 사실은 영적으로 칼빈의 스승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제네바 1차 종교개혁에서 쫓겨났을 때 칼빈이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마틴 부처 밑에서 목회를 배웁니다. 그래서 한없이 깊고 칼빈 못지않게 탁월한 개혁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너무 말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글이 어려워서 일반대중들이 소통을 못합니다. 그런데 칼빈에게는 그 능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칼빈의 글에 매료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목회하던 교회도 5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 가서 마지막에 거기서 사역을 마치고 운명할 때는 만 5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의 규모가 됩니다. 그 시절에 그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목회를 했다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엄청난 개혁의 힘이 그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당연히 요새나 그때나 한 사람이 아주 탁월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망을 받게 되면 시기하는 사람들이 늘 따라다니게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물고 늘어지면서 전하다 보니까 옳지 않은 사람들이 수없이 공격을 하게 됩니다. 특히 가톨릭과의 싸움은 두 사람 다 장군처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그 많은 대적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피에르 아모(Pierre Ameaux)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칼빈이 아주 천한 피카르드 사람에 불과하고 거짓교리를 선포하는 불량하기 짝이 없는 목회자라는 비난을 공공연하게 쏟아놓습니다. 이 피에르 아모라고 하는 사람이 제네바의 시의회 의원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볼세크(Jérôme-Hermès Bolsec)라고 하는 이 사람은 칼빈의 예정론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을 범죄자로 만드는 사악한 이론이라고 욕하며 그를 비방하는 악의에 찬 전기를 출판하게 됩니다. 심지어 칼빈은 색광이랍니다. 눈에 보이면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먹어치우는 미치광이 호색광이라고 내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출판물에다 쏟아놓습니다. 사실 이런 비난들이 부분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서 그래서 칼빈이 많은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뜨롤리에(Zeraphine Trolliet) 같은 사람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Scbastian Castellio) 같은 사람에 의해서 집요한 공격을 당합니다. 심지어는 평신도와 목회자를 대상으로 매주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거기에 불쑥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칼빈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칼빈이 이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하는 그 많은 비난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칼빈이 31가지의 질병에 걸려있어서 그 사람 별명이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를 속으로 삭이지 못하는 울분과 분노들이 수많은 질병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칼빈이 경험일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이 목회라고 하는 것을 하면서 늘 겪는 경험입니다. 어떤 때는 정말 목회자가 잘못해서 비난을 받거나 욕을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잘못해서도 그렇게 악의에 찬 비난을 받을 정도는 아니고 사실 그렇게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그렇게 아주 악의에 찬 비난으로 목회자의 명예를 추락시고 가슴을 후벼 파서 결국은 포기하게 만드는 상황도 얼마든지 벌어집니다. 저는 지금도 신학교 다닐 때 들었던 한 이야기가 잊히지 않습니다. 조그만 교회인데 교회에 다니는 처녀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배가 점점 불러오는 것입니다. 요즘 같았으면 그냥 모르는 척 하고 그냥 지나가는 세대지만 그 당시에는 교회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아무개 처자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계속 배가 나오는데 저게 도대체 뭐냐 해서 결국은 당회에서 불러서 문초를 했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 하고 물으니까 “목사님 애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목사님은 사모님과 사별하고 교회에 붙어있는 사택에서 혼자사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가 실제로 밥을 해준다. 빨래를 해준다 하고 가끔 드나들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아니라고 그러는데 사람들이 그런 일이 일어날 때에는 안 좋은 쪽으로 훨씬 더 전염이 됩니다. 믿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변명을 하는데도 목사님을 노회에 고발을 해서 아예 면직을 시켜버리고 파면을 시켜 버리고 퇴직금 한 푼도 안줘서 쫒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상당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몇 년인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 얼핏 잡아도 5-6년 이상은 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게 되었답니다. 이 상황에도 그 자매가 아기를 낳았습니다. 아기를 낳아서 그 목사님한테 준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 아이까지 데리고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되었는데 그 후로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그 교회가 부흥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큰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전에는 은혜를 받으면 나와서 자기 죄를 고백을 합니다. 온 교회가 뒤집힐 무시무시한 고백을 이 자매가 나가서 합니다. “여러해 전에 목사님의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목사님을 모함한 적이 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목사님과 교회에서 정치적으로 대적관계에 있었던 그 어느 집사님과 자기가 내연의 관계가 있었고 그 집사님의 아이인데 그 집사님이 나에게 강요를 해서 목사님에게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을 하고 무릎을 꿇고 회개를 하기 시작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큰일 난 것입니다.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사절단을 만들어서 목사님이 어디계신지 수소문하게 되었습니다. 한참동안 수소문한 끝에 그 목사님이 강원도에 있는 어느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거기 가서 광부로 품을 팔아서 그 아이를 기른 것입니다. 마침 이 교회는 있었던 목사님이 떠나시고 공석이 되어서 온 교회의 중직들이 그 목사님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그 목사님을 다시 청빙을 해서 그 교회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목회를 하셨답니다. 어떻게 보면 전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우리나라 교회역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요즘 그런 일이 상황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법원에 고소가 들어가고 명예훼손부터 시작해서 엄청난 법적 투쟁이 벌어지고 법원에서 판단을 하면 복종을 못하겠다는 사람이 교회를 가르고 온갖 험한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도 하던 고민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이 고난을 걸어온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여러 곳에서 자기가 사도라고 하는 사실을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항상 앞서는 것은 참음이었습니다. “내가 진짜 그리스도께 소명을 받은 사도라고 하는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내가 모든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인내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께 사도로 소명을 받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럴 수가 있었겠느냐?” 전설에 의하면 사도바울은 키가 작고 목이 짧고 그리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그리고 아주 독선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독선적이었다고 하는 것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체포하러 가는 그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깊이 변화됩니다. 그 가장 큰 변화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신학적으로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전에 사도바울에게 두 가지 신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학적인 신념이었고 하나는 심리적인 신념이 있었습니다. 신학적인 신념은 나사렛에서 태어난 그 젊은이는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 이었고 두 번째는 유대인 이외의 모든 이방인은 쓰레기다 그것이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표준적인 신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이 신학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었을까 요점은 이것입니다. 자 의심할 수 없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만났고 음성도 듣고 대화도 나눕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도바울에게 커다란 혼란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었는데 그것은 모두 예수의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담에 혼란은 그 다음입니다. 자 그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어떤 문제가 벌어지냐면 자기는 믿기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매달려 죽었다고 믿었거든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여 버리십시오. 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예수를 죽이는 방법까지 지정해서 빌라도에게 요구를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뒤에 유대인들의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 음모는 예수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죽은 사람으로 만들자 그래서 다시는 예수에 대해서 희망을 갖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의 혼란은 “난 부활한 예수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러면 만약에 부활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살리신 것인데 구약에 보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린 에녹과 같은 사람 혹은 병거타고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와 같은 사람 그들이 표준적으로 믿기는 모세가 부활하고 승천했다고 보았거든요. 이런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다시 죽은 예수를 살리셨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매우 특별하게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특별히 인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이 죽이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죽이셔야 했던 사람이면 살리실 이유가 없는 것이고 이런 혼란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보게 되는데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이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죽음이었다면 하나님이 살리실 수 없지만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백성들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더욱 살리실만 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두움을 찢으면서 한 줄기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울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신학을 우리에게 최초로 정리에서 남겨준 그런 사도바울이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쓰레기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그렇게 거룩하고 순결한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사람 몸을 입혀 보내어 죽게 하셨을까? 그것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인생의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아무리 놓고 인간이 누구인가를 고민해 봐도 그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성경이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관계 속에 있는 존재라는 시각으로 인간이 누구인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그 속에서 참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관계 안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사랑하게하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입니다. 그 사랑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은 사람을 보고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모든 죄에서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으로서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중국에 갔을 때 부끄럽기도 하고 충격적인 이야기 들었습니다. 교회가 하여튼 목회자하고 교인들하고 지겹게 싸우는 것입니다. 거기도 교회가 분쟁이 많습니다. 아주 싸우니까 어느 날 공산당이 나왔습니다. 하도 교회가 시끄러우니까 그 사람은 물론 무신론자입니다. 공산당원 자신은 무신론자여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종교국 직원이니까 수요예배 연설은 “내가 하겠다.” 그리고 올라온 것입니다. 올라가서 이 사람이 성경도 안 읽고 무엇을 이야기 했냐면 “야 성경에 보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다는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 싸우냐? 이렇게 싸우는 것을 너희 예수님이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느냐” 한 것입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공산당이 무신론자가 연설을 했는데 사람들이 마음에 깊이 “너희가 그렇게 싸우면 예수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느냐” 이 말에 찔려서 사람들이 회개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이야기 입니까?
조나단 에드워즈 이야기입니다. 18세기에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가요 부흥가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신학적인 문제로 교인들과 부딪히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22여년이나 섬기던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 때에 그러면서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말하자면 이제 나는 세상의 바다에 내던져졌기에 나와 내가 부양해야할 많은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게다가 좀 더 손에 잡힐만한 것을 위해 열리도록 제가 의지할만한 어떠한 문도 제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목회자들에게 늘 일어나는 일인데 제가 전도사 때 교회를 섬겼던 목사님이 항상 그럴 때 “목회자는 다음 성경구절을 기억하라.” 그리고 읽어주셨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31:19-20) 이것이 신앙의 태도입니다. 어떤 경우는 누가 잘하고 잘못한 뚜렷한 구별이 주어질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 않고 서로 다른 데에 원인이 있기도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워할 때 그 때 갈등이 생겨나게 되는데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아름다움은 만물이 다름에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이 모두 똑같은 크기와 똑같은 빛을 발한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와 같이 하나님은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로 다르게 만들어서 그 다른 사람들이 은혜와 사랑으로 다름을 인정하고 용납하며 서로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유익하게 만들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영적인 성숙도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지식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 이것에 의해서 사실은 교회의 영적인 성숙도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항상 마음에 끊임없는 짐을 가지고 삽니다. 누구도 행복에 겨워서 목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종종 목회가 너무 재미있고 자기에게 딱 맞는 직업이라고 이야기하는 선배들이나 동료들을 가끔 볼 때마다 매우 부럽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는 언제나 이국의 언어고 목회는 내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누구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없고 또 모든 고난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하는 신앙 그것에 의해서 사람은 계속 그리스도의 형상을 받은 사람으로 자라가고 성숙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두 가지로 분류를 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속죄의 죽음으로 당하신 고난 이것은 우리들이 결코 거기에 참여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무엇을 이야기 하냐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위한 고난은 당신 홀로 당하신 고난이지만 그 고난을 우리에게 적용하실 때 모든 성도들이 함께 그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현실에 적용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 감에 있어서 온 교회가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고난에는 모든 성도와 목회자가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그 고난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다시 살아나는 영적인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모든 성도들에게 고난을 어떻게 감당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인가 하는 것을 깨우치고 보여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일에 혈기를 부리고 참지 못하고 이렇게 되면 목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신학교 다닐 때 제가 교수님에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재정부에서 재정을 정리하는데 청구서 하나가 올라왔답니다. 사택에서 올라온 청구서인데 “개줄 300원”하고 올라왔답니다. 그래서 재정 장로가 “목사님, 사택에서 개를 기르시는 것은 좋은데 이 개 줄도 교회 돈으로 사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300원짜리 청구서를 내미니까 목사님이 “팍” 했습니다. “내가 사임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고 확 나가버렸는데 3시쯤 나갔는데 5시에 당회가 모여서 사임을 가결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우리가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참고, 참고, 참고, 인내해야합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직업이 영광을 받는 직업이라고 생각을 하면 괴로워 살수가 없습니다. 성도들이 나를 존경해주고 말씀에 은혜를 받고 사람들이 나에게 존경을 표시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지극히 예외적인 순간이다 생각을 하고 멸시와 모욕을 받으면 아 이게 원래 목사의 길이구나 생각을 합니다. 그 때 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러면서 자기가 현실적으로 당하는 모든 고난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투영시키면서 내가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고난을 당하셨으니 이 고난을 내가 함께 겪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잘못된 번역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 대표적으로 잘못된 번역이 서신서 곳곳에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 하는 번역입니다. 그것을 왜 그렇게 번역을 했냐면 킹 제임스 버전에서 그 책을 번역을 할 때 ‘서번트’(servant)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원래 희랍어 단어는 여러분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둘르스’라는 단어입니다 ‘둘르스’는 ‘서번트’(suervant)가 아니라 ‘슬레이브’(slave)입니다. 서번트와 슬레이브가 어떻게 다르냐면 서번트는 낮은 신분이기는 하지만 그 주인과 계약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머슴과 노비는 다릅니다. 서번트는 우리로 말하자면 머슴입니다. 머슴은 주인에게 세경을 받습니다. 신분은 아주 하찮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깔보고 필요하면 엎드려서 주인의 신발의 밑창이라도 핥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장가를 가서 머슴이 애를 낳습니다. 그 애는 주인 것 아닙니다. 자기가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예는 애를 낳으면 개가 새끼를 낳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당연히 개 주인의 것입니다. 그런 논리를 가지고 보면 슬레이브와 서번트는 말도 안 되고 더군다나 그 당시에는 출근하는 서번트 들도 있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일하고 저녁에는 퇴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면 그만 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러면 그렇게 다 그런 차이를 알면서도 킹 제임스 버전이 둘로스라는 단어를 서번트라고 번역을 했을까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인 맥락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네가 노예제도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슬레이브라는 말을 차마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할 때의 그것은 노예입니다. 자기 소유가 아무것도 없이 예수에게 매인사람 그래서 자기의 가진 것 모든 것은 다 예수의 것이고 예수의 처분대로 사는 사람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합니다. 희랍어에 ‘스티그마타’인데 그것은 가축이나 특히 노예의 경우에 도망갈 수 있으니까 이놈을 등을 벗겨서 심하면 얼굴에다 찍었다고 합니다. 등이나 팔뚝 같은 데에 그 집안의 문장을 불로 달궈서 찍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을 가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팔뚝을 벗겨보면 이 노예가 누구네 집에 속한 노예인지 알 수가 있답니다. 표입니다. 흔적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예수표가 찍혔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의 노예이고 예수의 소유다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와 예수의 관계는 출퇴근하는 계약 관계가 아니라나는 운명적으로 예수께 매인 슬레이브, 종이다. 그런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매 순간 목회자인 우리가 우리의 신분을 충분히 누구인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인들 때문에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신 그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참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그림을 보시면 우리 몸은 전체가 약 60조개의 세포로 되었습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뇌와 같은 특수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세포가 끊임없이 죽고 다시 살아납니다. 넉넉잡고 6개월 정도면 모든 세포가 다 다른 세포로 교환이 됩니다. 끊임없이 세포가 죽고 또 다른 세포가 살아나기 때문에 비유하자면 우리 몸은 60조개의 꼬마전구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깜빡 깜박하면서 죽어가고 다시 태어나는 것에 의해서 우리가 생명이라는 것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굉장히 재미있는 게 죽는 것이 없이는 생명이 아니다 입니다. 죽는 것이 끊임없이 그 안에 함께 있을 때 그것이 생명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설명하면 굉장히 어려운 것은 세포의 죽음에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게 ‘아포토시스의 죽음’과 ‘네크로시스의 죽음’입니다. 네크로시스의 죽음은 세포가 괴사되거나 그냥 세포가 죽는 것입니다. 타격을 입거나 다른 이유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아주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는 것이 아포토시스입니다. 아포토시스의 죽음은 죽을 이유가 없는데 세포가 무슨 이유때문인지 생생한데 자살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아직도 모릅니다. 왜 자살을 하는지 한 세포가 아직 살 수 있는데 확 죽어버립니다. 죽는 순간에 ABP라는 화학 에너지가 나옵니다. 에너지가 동력이 되어서 옆의 세포를 돌리는 것입니다. 세포의 분열이 일어나고 몸이 생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어떻게 되냐면 아무 세포도 죽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세포가 강인한 힘으로 온몸의 영양분을 빨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세포들만 죽지 않기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커진 세포의 덩어리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습니다. 그것을 의학적으로 암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암은 아무도 죽지 않으려는 세포들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목회자가 마지막 순간에 죽어야 되는데 자기는 소송을 하건 칼부림을 하건 때려죽여도 죽을 수 없어 그렇게 판단을 하고 덤벼들게 될 때 그 때 목회자를 중심으로 교회는 암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암은 어떻게 됩니까? 놀라운 게 기력이 다 빠진 노인네들은 암이 걸려도 잘 안 죽습니다. 인자 몸이 약할 때 암은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젊고 왕성한 사람이 암에 걸리면 순식간에 죽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세포활동이 모두 활발하니까 암도 죽음의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온 세포의 영양과 힘을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암덩어리가 커지면서 결국은 그 충만한 생명 때문에 몸 전체가 죽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광경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천문학에서 아주 유명한 창조의 기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쳐보면 다 떠있는 유명한 광경입니다. 지구로부터 약 7천 광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우주 먼지입니다. 먼지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기둥 중에 제일 긴 것은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거리가 빛이 4년을 달려가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상상할 수 없이 어마어마하게 큰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이것을 우주를 관측하다가 발견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이 기둥은 어떻게 만들어지냐면 별이 자기 수명을 다하게 됩니다. 몇 십 억년 지나다가 그러면 마지막에 폭발을 하게 되는 겁니다. 평소 크기의 수천 배 수만 배 되는 어마어마한 별로 변하고 폭발을 하면서 별의 일생이 끝납니다. 그러면 별이 그렇게 폭발하면서 어마어마한 열을 내면서 거기에서 온갖 광물질이 생겨나게 됩니다. 온 우주에는 지구처럼 이렇게 다양한 원소가 한군데 모여 있는 그런 별이 많지 않습니다. 금을 예를 들자면 인간이 금의 소중하다는 것을 알면서 끊임없이 연구해온 것은 어떻게 하면 이 금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러면 아마 세계적인 부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성공을 못했습니다. 이유가 50억도의 열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물질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름처럼 되어서 한군데 모인 것입니다. 이게 이렇게 모여서 수많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모인 먼지들이 모여서 서로 부딪히면서 핵융합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막 돌면서 점점 더 융합 반응을 하면서 뭉쳐집니다. 저 끝에 군데군데 반짝이는 것이 매달려있는데 저게 먼지 끝에 수많은 세월을 매달려 있다가 폭발을 합니다. 폭발과 함께 떨어져 나와서 별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저게 별의 자궁입니다. 여기에서 수많은 별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별은 아무데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별의 요람에서 태어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떨어져 나가고 그 떨어져나간 별들은 다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중력에 의해서 이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무슨 이야기가 되냐면 새로운 별들이 탄생하는 것은 언젠가 어떤 별들이 폭발하고 죽은 그 잔해들을 가지고 그것을 재료삼아서 새로운 별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에 10년도 더 지났는데 이것을 저 혼자 공부하면서 어느 순간에 깨달으면서 여러 달을 감격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주이고 아까 그것은 세포인데 몸에 있는 아주 작은 세포의 세계의 원리와 그 다음 이 온 우주에 있는 이 어마어마한 천체속의 세계와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이 무한대의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똑같은 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별들이 죽음으로서 그 죽음 속에서 별들은 태어나는 것입니다. 태어난 별들은 언젠가는 죽고 죽는 그 별들은 먼지를 남기고 그 먼지 속에서 살아져간 별들 때문에 또 다른 별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안에서 자신이 죽을 때 그 죽음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으로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 세포로부터 온 우주에 이르기까지 마지막에 신자 한사람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똑 같은 원리가 관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무엇인가 죽는 것이 있을 때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 바깥에 적용해보면 가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모든 식구가 다 자기 욕심대로만 살아가려고 합니다. 애비라는 인간도 돈 벌어서 자기입만 알고 자기만 호강하려고 하고 가족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식들도 자라면서 아버지한테 그것을 배워서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 맘대로 살고 가정 같은 것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식구들이 마지막에 그 집안에 남아있는 그 아내까지 그래 너희들이 그렇게 산다면 내가 굳이 희생할 필요가 없지 그리고 내 지르면 집안은 다 붕괴되어버리고 망가집니다. 한 사람이 참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밀알이 되어야합니다. 그게 남편일수도 있고 아내일수도 있습니다. 혹은 자녀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돌아옵니다.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족이 사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죽을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죽는 사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결국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자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봅시다 우리에게는 많은 자아의 욕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이 속에서 막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목회하셨으니까 한번쯤은 그 교회를 그만둘 생각을 안 하신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기분 좋을 때 모든 교인들이 목사님을 떠받들어주고 충분한 사례금과 명예 그리고 보상 모든 것을 해줄 때 ‘아 집어쳐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언제 자기가 손해 보는 것 같고, 찌그러지는 것 같고, 고통 받는 것 같고, 내가 고생해봐야 여기서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고, 이럴 때에 가슴을 파고드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어디를 가면 내가 밥을 못 먹고 살까 내가 어디를 가면 이보다야 낫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만둬라 더럽고 치사하지 않냐 그런데 맞아 그리고 자기가 불끈 살면 그러면 자신의 목회의 길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리고 주님이 그런 고난의 길을 참고 잘 이기시고 마지막에 치욕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으니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누가 이 세상에서 나를 모두 좋다고 하겠는가 나도 내가 싫을 때가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 한쪽에서 무엇인가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생명이 되살아납니다. ‘아! 맞아. 내가 잘못 생각했어.’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깨어져본 목회자만이 교인들을 깨뜨리는 설교를 할 수 있지 자기가 깨어져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목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회개를 안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이지만 한번 우리 스스로를 물어봅시다. 우리 인도하는 예배에서 우리가 인도하는 기도회에서 온 교인이 눈물바다가 되어 본 적이 있습니까? “난 죄인입니다. 난 틀렸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었는데 나는 안 죽었습니다.” 이것을 회개하면서 한번 눈물바다가 되어 본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이 저를 포함해서 이런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인이 오래 예수를 믿어도 죽는 게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자아가 성성하게 살아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칼도 휘두를 수 있는 무서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거꾸러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강단은 목사는 요리사가 아닙니다. 의사입니다. 원하는 것을 먹여주는 셰프가 아니라 매 순간 교인들을 올려놓고 용기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배에 암이 있으면 시퍼런 칼로 배를 가르고 내장을 주물럭거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뇌에 종양이 있으면 빡빡 깎이고 쇠톱으로 뚜껑을 열어버릴 수 있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멸시와 욕을 당하던지 내가 여기서 쫓겨나던지 나는 나를 불러주신 그리스도 앞에서 죽고 사는 사람으로서 충성한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결국 참고 견딘다는 것은 고난을 자기죽음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는 죽어야할 자신이 많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면서 비로소 자기 안에 죽지 못한 것이 무엇이고 잘못 살아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고난은 자신이 죽는 기회입니다. 어떤 목회자도 꽃길을 걸어가는 목회자는 없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저 목사는 꽃길만 걸어가는 것 같다 남들 보기에 그렇지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이 가르쳐주는 참된 목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자기 죽음의 길입니다. 그 담에 끊임없이 참고 견딘다는 것은 결국은 육체의 혈기를 끊임없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는 것만큼 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존 칼빈은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그랬지만 온 몸으로 고난이 무엇인지를 깊이 체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십자가를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많이 사용합니다.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십자가는 비유적인 언어로 이것이 우리에게 적용될 때는 이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거룩함에 이르도록 성숙시키는 이 세상의 모든 시련과 고난들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두 가지를 이야기 하는데 끊임없는 자기부인 자기부인이라는 것은 내가 본성적으로는 어떤 것을 하고 싶지만 어떤 것이 되고 싶지만 말씀의 빛에 의해서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거부입니다. 그것이 자기 부인 이것은 그리스도 제자 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욕심에 이끌리게 되어 있고 그리스도인도 목회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욕심에 이끌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과 양심아래서 부인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아니다 라고 부인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를 지는 마음 크로스 베어링 칼빈은 한 가지를 더 이야기 합니다. 내세에 대한 묵상입니다. 이 세상이 잠시 지나가는 헛된 것이요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소망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참여하게하신 십자가로의 여행입니다. 그래서 이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용기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눈에 보기에는 꽃길만 걸어가는 사람 그 누구도 사실 그렇게 꽃길만 걷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결국은 목회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죽음 속에서 그래서 교회의 다른 세포 속에 자신의 죽음 때문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그것이 바로 목회고 예수님께서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서 당신이 우리에게 생명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심을 입증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메시지는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는 깊이 묵상하면서 매순간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남겨놓으신 그 권한에 끊임없이 동참하면서 그러면서 목회의 끝에 우리가 주님을 많이 닮은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단에서는 정년이 몇 세인지 모르시겠는데 70세입니까? 우리 교단도 70세입니다. 70세면 그냥 교회하고 헤어져야 됩니다. 그리고 원하든 원하지 않던 법적으로 헤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 교단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교단에서는 많은 문제들이 목사님이 70세가 되어서 은퇴하셨는데 그 끈을 안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많은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자기가 이 끈을 안놓으면 교회가 쓰러질 줄 아는 거죠 뭐 대단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붙잡고 있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인데 탁 놔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교인들도 70세 대면 다 헤어질 사람들입니다. 저도 가까이 다가오니까 뭐라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뭐를 그렇게 retire 한다고 하는데 요새는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는 것이 리타이어라면서요 그냥 끝났으면 끝나지. 그래서 제가 어떤 선배 목사님께 이야기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 한번만 하면 족하지.” 저는 목회가 끝나면 목사직도 반납하는 게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평신도 김남준으로 예수를 믿다가 목사가 되었으니까 목사할일 다 끝나면 조용히 목사를 면하고 평신도 김남준으로 살다가 죽는 게 이게 도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 목사님도 정말 멋있데요 자기도 한번 해보고 싶답니다. 우리 아직 나이 있으니까 언젠가 그게 되는지 두고 봅시다 헤어질 사람들입니다. 다 헤어질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에 누가 남나요. 부부가 말입니다. 애들이 다 떠나고 외로워집니다. 저도 아이들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목사 되어서 손자손녀 낳아서 유학을 떠나버렸습니다. 딸 하나 있는데 직장 다닌다고 맨날 늦게 들어옵니다. 젊었을 때에는 딸이 태어나니까 너무 좋은 겁니다. 얘, 선물 사다주느라고 맨날 백화점에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담에 얘가 좀 크고 나니까 아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 담에 아들이 장가를 가서 손녀를 낳았습니다. 맨날 새로 연애하는 기분입니다. 출근하면 집에 결코 안 들어가는데 중간에 한 번씩 얘가 보고 싶어서 들어가야 됩니다. 맨날 뭐 사주려고 유아용품코너에서 하나 사다줍니다. 어느 정도 크고 나니까 할아버지 별로 안 좋아합니다. 요새는 강아지를 키우고 있습니다. 개는 내가 이렇게 강의하고 밤늦게 들어가면 애들은 텔레비전보고 있으면서 아빠 왔다 그러면 예 안녕하셨어요? 하는데 강아지는 미친 듯이 달려와서 꼬리를 치고 짖고 안아달라고 난리입니다. 요새는 강아지 용품 센터에서 머뭇거립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 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부부가 금술이 좋으면 애들 다 떠나도 외로워하지 않습니다. 맛있는 거 먹으러가고 같이 예배드리고 새벽기도도 나옵니다. 부부가 사이가 안 좋으면 애들 다 떠나고 나면 부부사이도 와해가 됩니다. 우리 주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 헤어질 사람들입니다. 사모님하고 살지만 이것도 그냥 일정한 기간이 정해진 것입니다. 넉넉잡고 50년 후면 여기서 다시 만날 사람들 거의 없습니다. 한번 살고 헤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시집장가 안가니까 거기서 다시 가정을 이루고 살일 없습니다. 한번 만나고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과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저는 지금도 목회에 두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24년 전에 교회를 개척하고 5300번을 공식적으로 설교했습니다. 그 원고를 모두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로서 소박한 소원 첫째는 언젠가 얼마 후에 김남준 목사가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합니다. “아 이제 우리 김 목사님이 교회에서 수십 년 목회 하셨는데 오늘 설교가 마지막 설교가 되겠습니다.” 올라가서 성경을 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한 35년 이상 들은 사람이 많이 있는데 마지막 설교에서 사회자가 본문을 읽는데 담임목사가 무슨 설교를 할지 아직도 감을 잡을 수 없는 그런 말씀의 세계를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여태까지 한 설교 중에서 은퇴하는 날 하는 그 설교가 최상의 농익은 설교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두 번째는 어느 날 성도들과 작별하고 헤어질 텐데 그때가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왔던 날 중에서는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이고 앞으로 살아갈 날 중에서는 가장 주님을 덜 사랑하는 날이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마지막에 목회도 사라지고 부부의 인연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다 사라집니다. 우리 주위에도 사모님 먼저 하늘나라 보낸 선배 목사님들 많습니다. 다 사람은 떠나갑니다. 손으로 모래알을 잡는 것처럼 다 미끄러지듯이 떠납니다. 마지막에 남은 분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방황하던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시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던 나를 목회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이 미천한 인간이 주님의 교회의 한 모퉁이를 섬기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탁받은 사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 한분만 남는 것입니다. 그 날에
(찬양)
주님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다 고백하고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달려갈 길을 다 끝냈습니다. 아멘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렇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