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직의 영적 생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6-27).
녹취자: 이대중
반갑습니다. "자네 정말 제직을 하려나?" 무슨 소리인지 모르시는 분도 계실 텐데요.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라는 제 책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정말 해보실건가요? 아침 7시에 교회에 나와서 계속 설교를 하고 지금 저녁 7시 30분에 또 설교를 하라는 이 잔인함을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래도 아직 부화 직전의 상태인 알속에 있는 여러분들을 교육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은 제직의 영적 생활입니다. 여러분들의 강의안에 제 글이 5페이지 정도로 빽빽하게 실려 있으니 집에 가셔서 잘 읽어보시고 지금은 핵심내용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교회는 제직을 하겠다는 분들만 제직을 시킵니다. 등을 떠밀거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교회가 커지고 나서 한 것이 아니라 지하실에 50명밖에 성도가 모이지 않을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직분을 강제로 하는데 질려서 "우리 교회는 이러이러한 사람을 집사로 임명할 용의가 있으니 본인도 원하면 신청을 하세요." 라는 기준을 가지고 제직을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오셔서 여기에서 교육을 받고 계신 것이며 지금 교육도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마지막에 당의 면접을 통해 합격을 해야 제직이 되겠지만 그때 정중하게 안하신다고 말씀하셔도 우리 교회는 아무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제직되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 없다, 라는 뜻이 아니라 무엇을 하더라도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결단 속에서 그것이 이루어질 때 그 모든 행위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은 잔소리가 아닌 중요한 몇 가지 말씀만 드리려고 하는데 우선 ‘말씀생활’에 대해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열린교회 가까이 이사 오셨기 때문에 즉 집이 가까운 곳으로 와서 열린교회에 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가깝다는 이유 때문에 제직까지 신청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제직까지 하겠다고 하신 것이겠지요.
말씀생활은 세 가지로 정리를 해볼 수 있을 텐데 첫 번째는 예배생활입니다. 말씀을 받는 아주 굉장히 중요한 통로가 예배를 통해서 설교를 듣는 것이며 이것이 말씀생활의 중요한 통로입니다. 이것이 주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으면 다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주일날 말씀을 들으면서 본인이 기도하지 않았던 것을 회개하고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말씀생활하지 않았던 것을 말씀생활하기로 결심하고 가족 간에 불화하고 이기적으로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기로 하고 게을렀던 삶을 회개하고 부지런하게 살고 이런 모든 작용들이 예배시간의 은혜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예배시간에 말씀의 은혜를 계속 받는 것은 마치 물이 저수지에 가득 내려오면 그 물이 이 논 저 논에 대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충만한 은혜를 받을 때에 우리들의 삶의 모든 방면에 신앙적인 생기가 넘쳐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주 통장이 있고 특별 통장이 있지요? 살림살이하다보면 그럴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통장은 학비 나가는 돈이고 어떤 통장은 2년 뒤에 집값을 올려주기 위한 통장이고, 어떤 통장은 시집가면 아이를 과외 시킬 목적의 통장인 이런 통장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 통장에 돈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주 통장에 돈이 많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핸드폰 꺼내서 이체를 시켜 주 통장에 넣어두면 그냥 거기서 빠져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예배시간에 하나님 만나고 깊이 은혜를 받는 것은 주 통장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열린교회를 나와서 아무리 제직을 받아도 예배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은혜가 있는건 있는 것이고 없는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겉모습에 변화가 있어도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여러 가지 동기로 제직도 되고 교회에서 인정도 받고 심지어는 교구 목사님과 친분도 있고 등등 여러분들이 신앙이 생기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지 않는 다면 언젠가는 교회가 싫어지고 교회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아무 일도 교회에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혼자 은혜를 받지 못하고 뒤로 미끄러지고 나면 점점 예배에 나오기 싫어지고 신앙에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토요일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토요일 적어도 저녁 먹은 이후에는 푹 쉬는 것이 내가 해야 될 일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밤늦게 1시가 넘도록 TV영화, OCN, 수퍼액션 이런걸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면 안 됩니다. 이러면 주일을 경건하게 보낼 수 없습니다. 또한 일보따리를 싸가지고 와서 토요일에 일하는 것도 안 됩니다. 적어도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일상적인 삶을 살더라도 저녁을 먹은 후에는 마음속에 예배의 준비가 시작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집에 아주 친한 친구가 온다면 청소정도만 하겠지만 매우 존경하는 스승님이 오시거나 하면 엄청나게 방을 준비하겠지요. 그런 것처럼 여러분들의 토요일은 마음의 방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토요일은 다른 날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 충분히 잠을 자야합니다. 많이 자고와도 예배시간에 졸수 있지만 수면부족은 예배시간에 조는 주요 원인입니다. 예전에는 공기 때문에도 많이 졸았는데 이제는 그런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현재는 최첨단 열교환기 시스템으로 인해 밖이 추울 때는 공기를 데워서 들어오고 밖이 더울 때는 공기를 식혀서 들어와서 대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게끔 해서 쾌적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제가 추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냉방을 세게 하지는 않지만 세게 하는 것도 몸을 굉장히 피곤하게 합니다. 토요일 8시에 드라마 정도 보고 9시 넘으면 독서와 기도 그리고 충분한 수면 이 세 가지를 조화롭게 하면서 육체적인 쉼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날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소한 10분전에는 예배당에 도착해야 합니다. 예배가 이미 시작되었는데 그때서야 들어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일 것입니다. 차가 막히기도 하구요. 하지만 늘 차가 막힌다고 생각하고 10분만 일찍 오시면 주차장에서 넉넉하고 좋은 자리에 주차할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조용히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예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시간에는 여태까지 했던 여러분들의 습관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는지 모르지만 아주 소수의 분들을 제외하고 이런 식으로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설교시간에 앉는다. 다리를 꼰다. 처음에는 예의상 목사님을 주목하고 설교가 지루해지기 시작하면 고개를 숙여서 설교시간을 때울 수 있는 꺼리를 찾는다. 제일 좋은 것이 주보를 펼쳐놓고 교회소식을 보고 헌금이 얼마인지 이름명단 등을 보는 것 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열린교회에서 주보를 만들지 않는 주된 원인입니다. 주보가 오히려 예배시간을 산만하게 합니다. 그리고 주보를 다 보고나면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아예 어떤 분들은 처음에 예배당에 들어오자마자 주무시고 주무시지는 않지만 깊은 묵상을 하시다가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자기 시작합니다. 성경책을 떨어뜨리고 몸이 옆으로 기울면서 다른 사람이 움찔하게 만들고. 핸드폰이 울리면 밖으로 뛰어나가는 데 하나님보다 높은 어디에서 연락이 왔는지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런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거기에 오신다고 하면 제가 말릴 겁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데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사람들. 마치 영화상영관에서 영화 상영을 기다리거나 민방위교육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있는 곳에 하나님이 오시겠습니까?
예배의 자세는 부동자세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 대부분의 교역자들이 예배드리는 태도를 보시면 부동자세입니다. 제가 한창 젊을 때 저도 설교를 들을 때가 가끔 있었는데 그때 제 목표는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깜빡거리기만 하는 것입니다. 졸리거나 피곤하면 숨으로 컨디션을 조절하세요. 하나 둘 셋 넷에 숨을 들이마시고 4초쯤 숨을 참고 숨을 ‘후’ 내시면서 산소 섭취량을 늘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신이 맑아집니다. 목표는 부동자세입니다. 손은 무릎위에 얹고 작은 노트를 준비합니다. 모든 설교를 베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강의를 듣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를 받아쓰는 것은 설교를 객관적으로 듣는 것이고 남에게 전달하는 강의인 것처럼 설교를 듣기가 십상입니다. 이것은 좋지 않은 태도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온 것이지 강의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노트는 날짜와 설교제목을 적고 또는 잊으면 안 될 매우 중요한 사실이나 내가 발견한 충격적인 사실 ‘아’ 하게 만드는 어떤 내용인데 잊어버릴지도 모르는 것 등을 예배전체에서 열 줄 미만 또는 중요 내용이 열 건 이하가 되도록 작성하는 것입니다. 들은 말씀을 다시 생각할 때 엄청 은혜 받은 건 기억나는데 생각이 안날 경우 이 노트를 펼쳐서 보면 생각이 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설교를 회상하기가 너무 좋습니다.
설교 한 주 뒤에 인터넷에 들어가서 열린교회 홈페이지를 보면 한 페이지로 된 요약지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제공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컴퓨터로 한 페이지로 요약된 설교 내용이 나옵니다. 예배시간에 설교를 들은 것은 반드시 재독을 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을 때 그때가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집에 가서 설교를 다시 듣는 것입니다. 바쁜 직장생활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전업주부로 계시는 분들은 핸드폰 등을 이용해서 설거지하면서 빨래를 개면서 다림질도 하면서 설교에 집중해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직장인들은 핸드폰을 이용해서 이어폰을 꽂고 출퇴근하는 시간에 들으면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옛날같이 책상에 앉아서 조용히 성경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서 예배시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훈련이 되고나면 올바른 자세로 앉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체적으로 불편하신 분들은 예배시간에 일어나셔도 괜찮습니다. 특히 허리가 아프신 분들은 일어나서 설교가 끊이지 않도록 들으시면 됩니다. 졸리신 분들도 조용히 일어나셔서 뒤에 앉았다가 정신이 드시면 다시 설교를 들으셔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집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입니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임금이 여러분들을 불러서 면담을 하는데 왕이 중요한 얘기를 할 때 핸드폰을 만지면서 딴 짓을 한다면 그것은 국왕 모독죄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정신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어탠티브니스(Attentiveness)' 즉,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자세입니다. 집중하지 않는 사람이 은혜를 받는 것은 흔들리는 잉크병에 펜을 꽂는 것처럼 힘든 것입니다. 잉크병이 가만히 놓여 있어야 잉크를 찍어서 글씨를 쓸 수 있는데 누가 계속 잉크병을 흔든다면 맞출 수는 있겠지만 잉크는 쏟아질 것입니다. 한두 번이라도 집중해서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살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의 삶 전체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그것의 핵심모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시간이 하나님께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찬양의 즐거움을 알고 기도하는 즐거움을 알고 헌신하는 즐거움을 알고 말씀을 경청하는 기쁨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영적인 변화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설교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집중한다는 얘기는 노려본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계속하면서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최근에 한 설교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나는가. 무엇을 해보라고 말씀하셨지요?” “들에 핀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나는가 생각해보라.” “생각해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주어지면 ‘그렇구나’ 하고 주목하는 게 아니라 이게 들어와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화합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학창시절에는 아주 무서운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조회를 하시는데 움찔거리거나 까불 때는 몽둥이로 때리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꼼짝없이 서있기는 했었지만 교장선생님의 얘기를 듣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경청이 아닙니다. 경청은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자기가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을 굴려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씀을 먹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은혜를 못 받으면 자기가 왜 은혜를 못 받는지 분석을 해야 합니다. 은혜를 못 받는 원인이 몇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설교의 관심사가 자신의 관심사와 많이 다르면 은혜를 받기 어렵습니다. 데이트 가기로 약속을 한 딸을 야단 쳐서 청소를 하게 하면 계속 시계를 보면서 청소기를 돌리는데 대충하고 도망갈 궁리를 합니다. 당연한 것이죠. 마음이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너무 없기 때문에 설교가 안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오래 교회를 다녔어도 체계적으로 공부를 잘 안했으면 말이죠. 여러분 대부분은 새가족반과 성장반 교리반까지 하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교리반을 수료하지 않으면 교사 직분도 받지 못합니다.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는 게 필요합니다. 구약개관학교, 신약개관학교 등을 한가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코스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열린교회 신도들은 필수적으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리반을 듣고 자기가 스스로 말씀을 들을때 중요한 것은 책을 보는 것입니다. 책은 열린교회 도서관에 가득 있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제직 교육 일정이 끝나면 열린교회 도서관에 가서 책 빌리는 연습을 하는 게 좋습니다. 교인 등록이 되면 여러분들은 도서관에 회원으로 이미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본인이 읽고 싶은 책을 꺼내서 빌려보십시오. 도서관의 책들은 모두 신학적인 검토를 끝내고 제가 읽어도 될 것 같은 책 들을 비치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 하는 동안에 세 가지 질문에 항상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어디를 읽고 계십니까? 기도제목이 무엇인가요? 요즘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가요?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책하고 별로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셨을 것이지만 이제는 책을 계속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야 하는데 은혜가 되고 읽었을 때 성경을 계속 읽게 만드는 책을 고르십시오. 팁을 드리자면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는데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담임목사가 쓴 책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 나온 책들 중에 가장 기초적인 책들을 읽으십시오.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경험하라’ 등은 이미 읽으셨고 성장반에서도 일부를 공부하셨겠지만 전체를 읽고 특히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등 교리적인 책들을 꾸준히 읽어나가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공과 공부하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오늘로 끝냈으니 다음에는 좀 쉬운 책으로 넘어가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라’ 입니다. 이런 책들을 꾸준히 읽어나가시면 설교에 대해 매우 친숙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글로 쓴 것은 설교와 장르가 다르지만 같은 내용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설교에서 은혜를 받으면 책을 읽고 싶고, 책을 읽으면 설교가 잘 들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서 항상 책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유 있는 분들은 책을 사시고 여유가 없으시거나 하는 분들은 도서관에서 빌리시면 됩니다. 도서관에 오천권내지 육천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으니 여러분들이 일주일에 한권씩 읽어도 120년을 읽어야 합니다. 아주 충분한 책입니다. 이 나이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손에 들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품위 있는 일입니까? 책읽기 딱 좋은 나이입니다.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책을 항상 가까이하십시오. 못 읽어도 책은 옆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책을 보는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나는 책을 못 읽었다.” “나는 생각도 없는 교인이구나.” 이런 식으로 책이 자기를 계속 꾸짖습니다. 오히려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미안해서라도 책을 한번 펼쳐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공과공부를 하면서 체계적으로 신학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지식의 토대 위에서 신앙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책만 읽는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이 없이는 어떠한 영적인 성장도 없습니다. 설교는 가슴으로 듣는 게 아니라 머리로 듣고 이해를 하고 이해를 통해서 마음으로 내려와서 마음속에서 역사함으로써 사랑이 일어나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뭔가 초점이 맞지 않았던 것 같던 신앙생활을 접고 열린교회 문화 속에 흡입되어서 성경을 매일 읽고 기도하고 책을 읽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생활입니다. 기도생활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저는 두 가지를 좋아하지 않는 게 있는데 남이 사주는 밥 얻어 먹는 것과 말 섞기 싫은 사람과 마주 앉아서 밥을 먹는 일입니다. 그게 저의 목회에 굉장히 마이너스가 되었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담임목사님과 심방을 갔는데 목사님이 어떤 아이를 번쩍 안아주면서 “이 놈 잘생겼다”라고 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아이였는데 말이죠. 목사님은 그런 걸 잘하셨는데 저는 그걸 잘 못했습니다. 제가 교인 집에 가서 어린 아이를 안으면서 “어이구 이놈 장군처럼 잘생겼다” 이렇게 얘기했더니 교인이 그 아이는 딸이라고 하더라고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 말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생각하는 것조차도 힘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생각하려고 하지 않아도 계속 떠오릅니다. 생각해야지 해서 생각나는 것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닙니다. 생각을 내쫓아도 계속 떠오르는 것 즉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할 때 할 말이 그렇게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열렬하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최고의 표다.”
그 기도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그런 기회를 제공해 주지만 “교회가 나를 열렬한 기도생활로 밀어 넣어 주겠지” 라고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사경회를 통해서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게 해주고 특별기도 모임을 통해서 기도하게 하고 기도 연락 편지로 기도에 동참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순 있지만 물을 먹지 않는 말에게 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기 싫으면 당연히 기도가 안 되는 것이고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나 말씀이 없거나 잘못된 틀 속에 들어가거나 깊은 죄 속에 들어가면 신앙생활이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일날 말씀을 받는 것은 말하자면 불씨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도와 신앙생활이라는 화로에 간직할 때 이 불씨가 그 다음 주일까지 계속 살아있어서 주일날 ‘후’ 하고 바람이 불면 금방 불꽃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십여 년 전에 잡지를 읽었는데 씨 불씨를 사백 삽십년 동안 간직한 가문이 있었습니다. 불을 다 피우고 마지막 불씨를 화로의 재에 간직했다가 그 다음날 아침에 그것을 불씨로 꺼내서 화로를 지피기를 하는데 시어머니가 모든 살림을 물려주면서 마지막으로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게 씨 불씨 화로였습니다. 그 며느리가 다시 시어머니가 되어서 다시 며느리에게 물려준 것이 사백 삽십년 동안 불씨가 간직되어 온 것입니다. 그 집은 가스와 전기가 다 들어오는데 그 불씨를 간직하기 위해서 괜히 불을 때던 것입니다. 그 할머니가 그 불씨를 며느리에게 물려주는데 “언제까지 이 불씨가 계속 살아있을지는 모르겠다.” 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그 불씨를 꺼뜨리면 가문에서 쫓겨났습니다. 그것은 아이를 못 낳는 것만큼이나 커다란 가문에 대한 불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불씨를 생명을 걸고 보존을 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주일날 활활 타오르는 시뻘건 숯같은 말씀의 은혜를 받았어도 여러분들이 지금처럼 비 쏟아지는 길 속에서 화로를 들고 집에 들어간다면 몇 분쯤이나 그 불이 계속 탈 수 있을까요?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것을 여러분들이 간직해서 기도생활 가운데 그 불씨를 계속 마음속에서 살려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태까지 기도하지 못하셨던 분들은 제직 훈련을 받는 오늘의 이 강의를 기점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는 데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기도할 시간을 정하십시오. 언제든지 내 마음에 기도할 마음이 생기면 기도한다고 하면 기도가 안 됩니다. 그것이 새벽시간이든지 저녁이든지 밤 시간이든지 아이들을 모두 학교를 보내고 집안일을 시작할 시간이든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못 지키는 때가 있더라도 그 시간을 먼저 정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가 안 되더라도 일단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방법은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감동이 우러나올 수 있게 만드는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마음이 생깁니다. 짧게라도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다시 기도의 펌프질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도생활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기도 모임에 나오고 기도회를 만들고 하는 것은 기도의 힘을 잃은 사람들이 여기에 나와서 기도의 불씨를 얻어가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아이 대학 입시를 위해 기도를 시작하면서 은혜를 받은 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기 시작하면 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전도생활입니다. 전도생활은 여러분들이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여러분들은 새 생명 전도학교에 모두 들어오게 될 텐데 거기에 참가해 보면 전도 실습을 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여러분들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병욱 장로님이 오셔서 강의를 하셨는데 너무나 은혜로운 강의였습니다. 어떻게 전도하는 나를 정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을 전도할 기회로 삼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아기가 있거나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이 데리고 구역예배 참석하면서도 아이를 업고 한 집 한 집 전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집은 반응을 하지 않을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준비된 한 두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고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분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 중에 한 분은 십자가 사경회 할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장면을 묘사한 베르나르의 판화를 디자인해서 만든 포스터를 보고 교회에 오셔서 예수 믿기 시작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분도 있으십니다. 복음을 전해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 복음을 통해서 구원할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는 삶은 그 안에서 항상 기쁨이 샘솟는 삶을 살아갑니다.
네 번째는 봉사생활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왜 제직이 되고 싶으신가요? 왜 집사가 되고 싶으신가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제직을 하겠다고 해서 임명을 하고 훈련을 받고 제직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그 분에게 “이런 봉사할 일이 있는데 당신이 제직이 되었으니 봉사를 해주시겠습니까?” 라고 권고했을 때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거절을 하고 결국 아무것도 안하는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이 제직을 하나의 명예라고 생각하고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까요? 그리고 이것이 무슨 엄청난 명예가 될까요?
교구 목사가 전화를 하고 “집사님 왜 요즘 교회에 안 나오세요?” 이런 전화를 받아야 되겠습니까? 차라리 집사직분을 받지 않고 성도로 있었다면 차라리 이런 전화가 더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왜 교회에 안 나오시는지 왜 주일예배를 안 드리시는지 앞으로도 안 나오실 것인지 이런 것을 물어보는 상황이라면 뭣 하러 집사를 받았을까요? 그냥 형제자매로 다녀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청년들은 나이가 들면 아무나 집사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저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됩니다. 집사가 되었는데 아무런 봉사도 하지 않고 2년 3년이 흘러가면 되겠습니까? 제직의 유효기간은 3년입니다. 3년 지나서 임명될 때 다시 모두 면담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느 교회의 집사였다고 하는 게 하나님 앞에 얼마나 누가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절대 이렇게 되시면 안 됩니다.
봉사나 섬김이 얼마나 많은 일이고 큰일인가는 각자 믿음과 형편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하다못해 주일날 와서 쓰레기를 줍더라도 “나는 제직이 되어서 무슨 일을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시간이 많이 없어서 아주 작은 섬김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더라도 아주 작은 섬김부터 큰 섬김까지 여러분들은 무엇이든지 할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는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이런 그림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머리에 붙어있는 몸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냐면 여러분 혼자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 교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머리이신 예수에게 붙어있는 몸이 있는데 거기에 여러분들이 접붙여져서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적합하지 않은 예가 될 수도 있지만 손가락이 절단되었다고 가정하고 이 손가락을 이식하면 다시 핏줄이 연결되고 신경이 살아나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런 것처럼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 순간 여러분들은 몸의 한 지체로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쳤을 때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신 그 자체가 가족 속에서 태어나는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에게는 반드시 아빠와 엄마가 있습니다. 그리고 형 누나 동생이 있고 자기가 선택하지도 않았지만 이모 고모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미줄처럼 연계된 집안에서 자기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한 지체로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수한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과 두 번째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열매가 교회입니다.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보면 설교제목 가운데 ‘물은 피보다 진하다’ 라는 설교가 있습니다. 무슨 뜻일 것 같으세요? 물은 세례를 의미하며 피는 육신의 혈육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보통 ‘피는 물보다 진하다’ 고 하지만 ‘물은 피보다 진하다’라고 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것이 혈통보다도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이 제대로 된 인간이 되었는지는 그의 집안을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가족들에게 인정받는 아버지인가 아들이 얼마나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형제들과 우애가 있는가 이것을 보면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딱 잘라놓고 그 사람만 보면 키가 크고 직장도 좋고 얼굴도 뽀샤시하고 헤어스타일도 최신스타일이고 브랜드 옷을 입었습니다. 패션 감각도 뛰어납니다. 그런데도 날라리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결혼식을 할 때 웨딩마치가 울려 퍼지면 여러 하객들 귀에는 이렇게 들리는 것입니다. “또 속았네.” “또 속았네.”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제대로 된 인생을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지가 드러나는 첫 번째 열매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 모두들 어떻게 사랑하게 하셨냐면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이렇게 사랑하게 하셨고 사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렇게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는데 이것이 죄 때문에 깨어집니다. 그리고 일류 최초의 살인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 이라고 하는 형제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엄청난 충격이 발생하고 오늘날 인류사회에 수많은 분열과 찢어짐과 투쟁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며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끔찍한 세상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세상을 다시 만들고 싶어 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 사랑에 감동된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만든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마지막에 올 세상을 미리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에 올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면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를 먼저 누리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지막에 사라집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서 교회는 하나의 밀알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일단 밀이 자라서 밀대가 솟아나면 밀알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잘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제직 임명될 때 이전에 떠나온 교회에 가서 증명서를 받아왔을 것입니다. 받아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거기에서 안 좋은 일로 교회를 떠나온 사람들은 그 맺힌 것을 모두 풀어야 합니다. 목회자에게 편지하고 자기가 소속되어 있던 지체들에게 편지하여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 있으면 용서를 구하고 오해가 있다면 오해를 풀고 이곳에 와서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다시는 그렇게 상처로 얼룩진 교회 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야 합니다. 어디에 가도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있고 안 좋은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소화에 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소화에 낼까요? 감기가 다가오는 계절인 가을이 옵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병원에 가서 예방주사를 맞습니다. 저도 교역자 직원 모두 같이 가서 주사를 맞습니다. 병원에 가면 간호사가 독감 균을 주사에 담아 몸에 넣습니다. 몸이 허약할 때 독감 주사를 맞으면 집에 돌아와서 끙끙 앓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 약하게 만든 독감 균을 몸에 집어넣어서 몸이 소수의 적군이 침투한 것을 알고 저항을 하면서 면역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방주사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어떤 유식한 표현으로 “인칭적으로 악이지만 비인칭적으로는 선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인칭적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 교회에 혹은 여러분에게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을 통해 어려움을 준다고 했을 때 이는 인칭적으로 볼 때는 악입니다. “왜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을까 진짜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칭적으로는 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소화해 내면서 결국엔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현실적인 것을 극복해 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인칭적으로는 그것이 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사도 예방주사를 놓았다는 이유 때문에 균을 주입했다는 죄목으로 처벌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사의 의도가 사람을 병들게 하려는 게 아니라 더 큰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한 의도로 주사를 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미 안정성이 입증되어서 극히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는 올바른 효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가을에 주사를 맞으면 겨울에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어떤 성도가 “정말 교회가 썩어서 못 다니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이상한 사람들이 많은지요. 목사님 저에게 가장 순결한 교회를 소개해 주십시오.” 이렇게 물었을때 스펄전 목사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대학자에 이를 정도로 학문이 깊지는 않으셨지만 아주 기지가 넘치는 쾌활한 사람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많은 질병에 시달리던 분이셨는데 그 성도의 물음에 이런 조크를 하셨습니다. “형제여 혹시 그런 교회를 형제가 찾거든 당신은 절대 그 교회를 가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그 교회를 가는 순간 그 교회는 불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교회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를 꿈꾸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열린교회에서 진리의 세계를 알고 말씀의 은혜를 알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