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녹취자: 박지성
아마 이 세상의 학문 중 신학처럼 독특한 학문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학문이 자신의 삶과 완벽하게 결탁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수학자가 수학적인 삶을 못 산다든지 경제학자가 비경제적으로 산다든지 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철학이나 윤리학 쪽으로 가면 좀 문제가 됩니다. 내가 아는 어느 학생이 자기네 학교에서 제일 실력이 좋은 규범윤리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있는데 제일 규범이 없이 생활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좀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신학은 더 크게 문제가 됩니다.
신학이 무엇이냐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신학이 어떤 점에서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문은 어떤 사물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유추하고 체계를 만들면서 과거를 해석하고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학은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가느냐와 직접적으로 관계된다는 점에서 이 신학은 학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학이 학문이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뭐냐면 결국 신학의 지향점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그 신학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전달될 때에는 논리의 형태를 가지고 전달이 되고 언어와 그리고 학문의 논리의 형태를 가지고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독특성들을 고려하면 신학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 중의 최고의 학문이면서 가장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학문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신학이 이미 본래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파편화된 불행한 시대에 신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대부분이 어떤 식으로 신학을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가늠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문제들이 어디에서 나오느냐면 이 신학이라는 것이 원래 어떤 기능을 가진 것인가 하는 것, 신학의 목표 그리고 신학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선 신학은 무엇인가? 사실 신학이 무엇인지 그 자체에 대해서 그렇게 파고들면서 정의를 내린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마치 생물학을 하는 사람들이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별 설명이 없이 생물학을 시작하듯이 신학을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신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definition에 대한 어떤 헌신이 없이 그냥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제가 책을 읽으면서 만난 신학에 대한 최고의 정의는 17세기 화란의 신학자였던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라는 사람이 ‘실천신학’이라고 하는, ‘TPT’라고 하는데, ‘Theoretico-practica theologia’라는 이름을 가진 책인데 그 책의 제 1장에서 그는 신학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을 합니다. ‘독트린아 에스트 비겐디 데오’ 그것이 뭐냐면 ‘신학이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페르크리스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이것이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가 내린 신학의 정의입니다. 이 정의를 18세기의 미국의 석학인 조나단 에드워즈가 계승을 합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그것을 옮겨서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the theologi’혹은 ‘knowledge of God’ 그렇게 얘기하고 ‘is to live to God’ 혹은 ‘living to God’, ‘to God through Christ’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분석을 하자면 ‘신학이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그것이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신학의 명제입니다.
그럼 도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정의해보면 이제 신학이 보다 더 분명해집니다. 자, 그러면 제일 먼저 ‘산다’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산다’고 하는 것은 그냥 생존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하나님의 창조물들 중 인간은 그 사는 방식이 동물이나 식물과는 다릅니다. 식물은 그냥 거기에 있어서 생장할 뿐입니다. 그러나 동물은 감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적인 감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형상으로 자연의 모든 이치들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도덕적인 이치들을 파악해서 책임 있는 존재로서 자신의 지성 속에서 의지를 가지고 자기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이 지성과 의지를 사용해서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를 수시로 선택하며 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붙은 ‘to God’ 혹은 ‘to world God’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그러한 삶의 지향점이 어디를 향해야 하겠는가를 보여줍니다. 그 지향점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의 원인이실 뿐만 아니라 목적이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고 볼 때 그렇게 우리가 아는 지성으로써 의지를 가지고 순간순간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파악하고 거기에 우리들이 의사를 결정함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께 합치시키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to God’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태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존재라는 사실, 지금도 하나님에 의해서 유지되고 지탱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 하나님께로 향하여 살도록 그것을 우리의 삶의 가장 큰 가치로 알고 살아가도록 그런 삶을 영위해야 할 존재라고 우리들이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페르크리스 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는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하자면 중심이 되는 것이고 누구도 그리스도가 아니면 신학을 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없지만 그래도 이것을 잠깐 말씀을 드려야지만 여러분들이 왜 신학을 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모든 백성들과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맺었지만 맺은 모든 사람이 언약관계에 충실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언약관계에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살게 하는 어떤 동력이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다트 엘로 힘’이라는 것입니다. ‘다트’는 명사이고 다트는 ‘야다’라는 동사에서 나옵니다. ‘야다’는 창세기 3장에서 제일 먼저 사용되었고 그 단어가 “아담이 하와와 동침함에” 할 때에 제일 먼저 사용됩니다. 그래서 영어의 ‘know’라는 단어에는 성교하다는 뜻이 있고 ‘knowledge’는 성교라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히브리적인 사유의 방식은 경험을 통하는 것이 아니면 진정한 앎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가서 여자들이 “나 저 남자 잘 안다”고 얘기하면 큰일 납니다. 그럴 정도로 ‘야다’에 대한 의미의 전통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언약관계에 합당하도록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그 어떤 영혼과 정신의 원동력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이게 없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것이고 이것을 버린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이것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고 이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호세아 4장에서 책망할 때 뭐라고 책망 하냐면 “이스라엘이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음으로 나도 그들을 버려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할 때에 그 ‘다트’가 바로 지식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미래의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영광스러운 종말론적인 전망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신대원 학생들이니까 그 정도는 다 알 것 아닙니까? 대답하십시오. 그런 전망이 뭐냐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가득하리라. 거기에서 전망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지식의 나라입니다. 그 지식의 나라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나라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피터롬바로두스의 센텐티아 명제집에 대한 커멘트리’ 해석에서 하나님의 천국의 행복의 본질을 이야기하면서 천국의 행복은 지식의 행복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지성에 있어서의 행복입니다. 먹고 마시는데 있는 행복이 아닙니다. 이렇게 구약에 다트사상이 내려오다가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지만 모든 사람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모두 다 동일한 깊이로 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년 동안이나 데리고 다녔는데도 이 바보 같은 제자들은 못 알아들었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그렇게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오순절의 성령강림사건이 있고나서 제일 먼저 지성의 벼락을 맞는 것 같이 폭풍과 같은 깨달음이 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입니다.
너무 중요하니까 말씀드립니다. 이것에 대해서 눈을 깊이 뜨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깔끔하게 정리를 못했는데 학문적으로 깨끗하게 정리를 해서 이 기독교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원래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던 사람도 아니었고 다메섹으로 가는 것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처벌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가기 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허망한 풍설을 퍼트린 것입니다. 그 풍설이 무엇 이었냐면 예수가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가는데 그는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할 수 없게끔 직접 만났고 대화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에서는 이 두 가지의 명제가 조화를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나무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증거입니다. 신명기서에 나오지 않습니까? “나무에 매달아 죽인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 그러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사람이면 다시 살아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부활의 전통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부활하고 승천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세의 승천기라는 외경도 있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보지 않았던 에녹, 모세, 그다음에 엘리야와 같이 산채로 올라갔던 이런 사람들의 전통은 하나님께 아주 특별히 인정을 받았던 하나님의 사람 중 극히 일부에게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실만큼 훌륭한 분이었다면 죽이셨을 리가 없고 죽일 만큼 저주 받을 죄인이라면 살리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명제가 자신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그때 폭풍과 같은 깨달음이 임하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의 죽음이 예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 내포적 대속의 교리를 그 안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하늘 천장이 찢어지면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찬란한 빛이 이 탁월한 젊은 청년 바울의 지성 속에 찬란하게 쏟아 부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엄청나게 많은 학문들을 했으니까 그런 속에서 그냥 한 번에 확하고 빛이 들어오면서 파편처럼 흩어졌던 구약의 증거들이 확 모이면서 구약의 이 뒤웅 치는 역사가 한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위대한 기독교신학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냐면 소위 얘기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다트 엘로 힘’이 ‘Christological conversion’을 하게 됩니다. 기독론적인 대전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구약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약에서는 ‘그노시스 크리스 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대치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컴퓨터에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혹은 ‘지식’, 혹은 희랍어 콘코드스에서 ‘그노시스’를 쳐보면 수 없이 많은 단어가 나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핵심이고 ‘그노시스 크리스 투’ 이것 하나를 필두에 놓고 나머지 그의 모든 신학은 거기에 매달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생애적인 비전에 대해서 빌립보서에서 뭐라고 하냐면 “이 전에 있는 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목표가 뭐냐면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기위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하는 선교적인 소명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얘기하면 너무 길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예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추상적으로만 알던 것을 예수님이 성육신하고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오셔서 예수님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창조했으며 그 인간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룰 때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한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예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도 바울의 에베소, 골로새, 빌립보, 로마서 모든 서신의 어디를 펴든지 간에 깔려있는 중요한 사상은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구원이 전부가 아니라 이것은 겨우 시작일 뿐이고 여기서부터 이제 치열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라는 구원의 목표가 제시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라고 책망할 것도 없고 흠도 없고 거룩한 사람으로 닮아가라고 강요합니까? 그것은 바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합니까? 아직까지도 죄가 남아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이 때에 그런 긴장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하게 살아감으로써 자신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경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그렇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이유는 그것이 바로 참으로 인간이 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하기 전 인간을 창조하셨던 본래의 의도대로 인간을 돌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중간적 경륜이라고 봐야합니다. 뒤에 나오는 ‘페르크리스 툼’이라고 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하는 이것은 그렇게 한두 시간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럼 엉성했지만 대충 설명을 끝냈습니다. 신학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다가 보태고 싶은 것이 있는데 ‘성령 안에서’ 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결국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산다’는 이 신학의 정의에 삼위일체적 구주를 완성함으로써 우리들이 본래에 이 신학의 중심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논리는 헤르만 바빙크가 창조를 설명하면서 ‘이 세계는 성부에 의해,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다’라고 한 창조의 언급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신학의 정의를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산다는 것이 문제인데 그래서 알기만 하면 안 되고 실제적인 삶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이 지식과 실천하는 삶을 묶어주는 브리지가 바로 경건입니다. ‘경건’ 혹은 ‘그라티아’, ‘은혜’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할 때 제일 먼저 지적해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을 받은 사람만이 신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만이 학문으로써의 신학을 올바르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계속 자라가는 영적인 성장이 있어야합니다.
MD를 마치고 THD를 한다고 해서 이것이 영적 성장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박사를 가지신 분들 중에는 영적으로는 유치부 학생도 안 되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만나봤습니다. 이것은 별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렇게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의 삶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 생각과 언행심사와 모든 것을 영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신학을 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결국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상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총체적인 사상, 그 사상의 얼개를 통해서 그 사상의 체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세계와 역사와 인간과 자연의 세계를 바라보고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포괄적인 세계에 대한 설명을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그런 말로 억지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플라톤을 공부하면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면서는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무한한 긍지를 느꼈습니다. 루터와 칼뱅을 공부하면서는 내가 가톨릭 교인이 아니고 개신교도라는 사실에 대해서 무한한 긍지를 느꼈다면 한 7년 전부터 제가 심취하기 시작한 17세기 개혁파정통주의를 공부하면서는 내가 기독교인 중에서 개혁파의 교인이 된 것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선조들에 대해서 자랑스럽습니다. 위대한 조상들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철저한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공부를 하기 싫다면 소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군인으로 소명을 받았는데 총칼은 싫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의사로 소명 받았는데 환자와 만나는 것이 싫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독서하기가 싫은가요? 소명이 아닐 것입니다.’ 굳이 이 길을 갈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할 수만 있으면 재고해보라는 것입니다. ‘굳이 이 길을 가야되겠는가?’ 학생모집도 어려운데 이런 이야기하는 게 학교에 좀 미안하지만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신학교에서 강의할 때마다 소명처럼 느끼면서 학생들을 내보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신학교를 그만 둔 학생이 대충 어림잡아 200명 정도 됩니다.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길이 그렇게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미 벌써 입증됐지 않습니까? 3학년이 되었는데도 자기가 읽은 책이 한 키도 안 되는데 벌써 소명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이 되지 않았습니까? 뭘 더 증명을 합니까?
그래서 체계입니다. 지식이고 사상의 체계고 하나는 윤리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명제 두 가지만 가지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개는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열렬히 경건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기도 여기는 깨웠을 테니까 어쩔 수 없이 했겠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과 같이 젊을 때에는 얽매인 것도 없지 않습니까? 철저히 기도하고 하루에 그래도 한 세 시간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은 세 시간은 못합니다. 신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했습니다. 한 학기가 끝나면 무조건 일주일 금식기도를 기도원에 들어가서 하며 한 학기 동안 묵었던 영혼의 때를 씻어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치열한 경건의 추구 속에서 예수를 알아가는 것이 신학의 중심이 되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책을 통해서 공부하는 것과 연결을 이루면서 공부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다음으로 넘어가서 ‘실질적으로 무슨 공부를 해야지 되겠는가?’ 우선 얘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공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면 일반학문은 다 자기 분야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철학은 이 모든 학문을 거의 다 꿰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죽음’이라는 말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문학에는 문학 나름대로의 죽음이 있을 것입니다. 의학은 의학 나름대로의 죽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미술은 미술 나름대로의 죽음의 개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법학은 법학 나름대로의 죽음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학문을 하는 데는 각각 자기 분야의 죽음만 알면 됩니다. 그러나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이 철학 쪽으로 최종적인 죽음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학문들의 지평을 관통한 죽음을 설명해야 되기 때문에 철학을 하는 사람은 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의 의미, 법학에서 이야기 하는 죽음의 의미, 그 다음에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의 의미, 미술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의 의미, 모든 의미를 관통하면서 이 죽음에 대한 사고를 해야 하고 최종적으로 어느 학문에도 적용될 수 있는 혹은 그것을 뛰어 넘는 죽음에 대한 설명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게 제대로 된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신학의 임무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로 공부를 해야 될지 여러분들이 생각을 해보십시오.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잘 못하는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공부를 거의 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목사가 되는 일들은 가깝게 보면 19세기 이후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18세기 이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화) 황당한 일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료선교사가 되라는 소명을 주셨다면서 학교에서 6등급밖에 안 나오는 아이가 의대가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원서 넣어도 안 됩니다. 내가 전도사 때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소명을 주셨어도 네가 1%안에 들어야 간다. 너 공부를 그렇게 안하고 못하는데 그것이 소명일 수 있느냐?” 그래도 자기는 소명이 틀림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간호보조사가 돼라. 그것도 의료 아니냐?” 그 당시에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무슨 공부할 수 있는 지성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 목사의 소명을 받습니까?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상상도 못합니다.
그런데 시대가 좋아져서 이제는 우리처럼 공부 못하는 사람도 자유롭게 문을 두드릴 수 있고 대학에 지원하는 인구도 줄어들어서 이제는 쉽게 지원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까지 흔들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 됩니다. 여러분, 어느 정도 심각하냐면 우리 교회에서 교리반을 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조직신학을 온 교인들에게 교육을 시키는데 신학대학원 졸업하는 학생들이 이 시험을 보면 20점 내지 40점이 나옵니다. 얼마나 공부를 안하는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무슨 공부를 해야 되겠는가? 우선 무슨 공부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입니다. 여러분들이 신학을 하려면 ‘man of books’가 되는 것이 아니라 ‘man of a book’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one book’의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이 모든 학문 탐구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한절 한절 묵상하면서 깊은 의미를 깨닫는 것은 물론 해야 하는 것이고 신학을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준비는 성경을 통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30장정도 50장이면 정말 좋고 너무 많으면 30장 정도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20장 정도라도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데 전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통일성을 찾으면서 성경을 매일 20∼30장정도 전체의 통일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하루에 성경의 한 책씩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리포트 쓸 시간도 없고 너무 바쁘니까 학기 중에는 그렇게 못하더라도 방학 중에 그렇게 하고 20장 정도씩 읽으면서 통일성 있게 이 성경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터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것은 성경공부반에 들어가서 창세기 공부, 출애굽기 공부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 지식이 대부분 자기의 것이 아니고 남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직접 읽으면서 이 속에 담겨진 의미를 파악해야합니다.
그러나 번역 성경은 매우 불완전합니다. 나올 때 마다 달라지는 것을 보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웃지 못 할 번역들이 있고 이번에 나온 번역된 성경에도 여전히 그런 흠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누구도 말 못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다닐 때 5경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읽으면서 26개의 영어성경을 같이 놓고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킹 제임스 버전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제가 찾아낸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강의도 했습니다. 킹 제임스 버전이 훌륭하기는 훌륭하지만 요즘은 킹 제임스버전이 아니면 영감이 안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무 무리한 이야기입니다. 명백한 하자가 너무 많습니다. 결론은 뭐냐면 원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휴, 무슨 원어를…’ 여러분도 웃는 것 보니까 걱정이 됩니다. 웃음이 나옵니까? 원어를 공부하지 않겠다는 것은 해군이 바지에 물을 안 뭍이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육군이 흙을 싫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원어를 공부하려면 구약은 우선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공부해야 하고 신약은 희랍어를 공부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최소한의 공부입니다. 히브리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서정적인 언어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 보면 하나의 단어에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뜻이 들어있을까 할 정도로 놀랍니다. 희랍어는 가장 정확한 언어입니다. 그래서 이 두 언어를 함께 공부함으로써 구약의 그림 같은 언어를 신약의 칼 같은 정확한 언어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냐면 어떻게 라고 물을 시간에 직접 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인터넷에도 강의하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들어가서 그것을 질질 끌면 안 됩니다. 일주일동안 다 전폐하고 매달려서 한 번에 문법을 끝내고 그 다음에 창세기부터 펼쳐놓고 참고도서 놓고 읽어가야 합니다. 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다가 히브리어를 두 번 포기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선생님들이 잘못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정말 좋은 선생님을 신학대학원에서 만났는데 두 시간 강의를 듣고 나니까 ‘옛날 선생님들이 어쩜 그렇게 히브리어를 못 가르쳤을까?’ 하고 깨달으면서 다음에는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겨울에 사역이 무지하게 많았지만 어쨌든지 간에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는데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해서 한 달 만에 17장까지 읽었습니다. 가장 오래 읽은 날은 빵하고 물하고 오강하고 가져다 놓고 앉은 자리에서 17시간을 히브리어 성경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읽기 전까지 안 일어나리라’고 마음을 먹고 읽어나갔습니다. 원어로 많이 읽으면 나중에 한글성경을 읽어도 대충 히브리어로 이랬지 하고 쭉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좋은 사전을 참고해가며 계속 읽어나가는 것입니다. 아람어는 좀 다른데 히브리어를 하면 조금만 공부하면 됩니다. 그러면 아람어 본문들은 아람어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희랍어를 공부해야합니다. 희랍어는 히브리어보다 조금 쉽습니다. 희랍어도 셋으로 나뉘는데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같은 작품을 읽을 수 있는 ‘호메릿 그릿’, 그리스 고전을 읽은 ‘아틱 그릿’, 그리고 ‘꼬이네’입니다. 그런데 꼬이네만 하지 말고 가능하면 ‘아티카’까지 해서 교부들의 작품을 띄엄띄엄이라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여러분들이 원어 공부에 매진을 해야 합니다. 하루에 4시간씩, 최소한 1년만 하면 뻥하고 뚫립니다. 한 2년을 하면 더 시원하게 뚫립니다. 그렇게 하면서 신학대학원 시절을 졸업하기 전에 최소한 성경을 많이 읽었다. 두 번째, 히브리어 원문과 헬라어원문, 아람어 원문을 찾아만 놓으면 그래도 대충 읽을 수 있는 정도까지만 해도 여러분들이 그렇게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제 학부에 그 정도 하면 가장 좋겠습니다. 학부시절에 4학년 마칠 때 그러고 들어오면 좋습니다.
그리고 어떤 언어를 해야 하냐면 라틴어를 공부해야 합니다. 라틴어가 얼마나 중요한 언어냐면 기독교의 값지고 소중한 서방교회의 유산들을 비롯해서 종교개혁시대 이후와 개혁파정통주의 시대의 황금과 같은 작품들이 라틴어로 되어있습니다. 말을 영어로 하던 사람들도 글은 라틴어로 썼고 말을 화란어나 독일어로 쓰던 사람들도 신학서적은 라틴어로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틴어에는 어마어마한 보물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묻혀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라틴어를 안 하기 때문에 이 유산들을 거의 활용을 안 하고 새로 신학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를 공부해야 합니다.
저는 신학대학원 때 라틴어를 공부했는데 왜 공부하는지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꽤 했지만 중간에 ‘아이고, 이 시간에 영어라도하지’ 하면서 사실 내려놨습니다. 나중에 라틴어의 중요성을 깨닫고 50이 넘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제는 까막눈은 면한 신세가 되었지만 내가 여러분들이라면 적어도 모든 것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 라틴어에 매진할 것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를 영어책 읽는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 이것은 여러분들의 학문과 목표에 어마어마한 자원을 제공할 것입니다. 아예 무대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라틴어를 부단히 공부하십시오.
그다음에는 영어를 공부해야합니다. 예전에는 영어를 읽기만하면 됐는데 이제는 읽는 것만이 아니라 읽고, 읽을 뿐만 아니라 쓰고, 쓸 뿐만 아니라 말해서 여러분들의 미래에 기회가 주어지면 완전히 자유롭게는 못하더라도 외국 사람들과 말하고 자기의 신학적인 관점들을 제시하고 비평하고 할 수 있을 정도까지 지금부터 아예 그렇게 단연적인 영어공부를 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서적을 읽는 것입니다. 현대 영어만 하면 안 되고 청교도들의 작품이 있는 16세기 청교도 영어, 그 다음에 17세기,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을 수 있는 영어까지 함께해서 영어로 된 자료들을 빠른 시간에 정확하게 많이 이해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니기 전 학부에 다닐 때 영어공부를 뜻을 세우고 열심히 했는데 시계를 풀어놓고 읽었습니다. 한 페이지를 읽는데 몇 분 이 걸리는가를 확인하며 그 분수를 계속 낮추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한 챕터를 읽은 다음에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을 시간을 재면서 20분 걸리던 것을 15분, 15분 걸리던 것을 10분, 10분 걸리던 것을 5분 이렇게 끌어내려야합니다. 자유롭게 읽을 수 있어야 활용을 하지 한 페이지를 읽는데 반나절이 걸린다고 하면 결국은 마지막에 덮어놓게 됩니다. 그러니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자꾸 한숨을 쉬니까 더 이상 얘기를 안 하겠는데 욕심을 낸다면 독일어, 불어, 특히 불어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연구, 사해사본에 대한 연구, 이런 몇몇 가지들의 주제에 대해서는 꽉 잡고 있는 학자들이 불어권학자들입니다. 불어 중에서 종교개혁학자들의 글을 읽으려면 중세 불어를 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화란에서 개학파에 대한 자료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많아서 그쪽의 언어들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무슨 공부를 해야 하냐면 우선 신학자체의 분과로 들어가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세 개입니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역사신학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기틀이 되고 그 다음 실천신학도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선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조직신학은 우선 기본적으로 복음주의적이고 정통적인 저자들의 작품을 부지런히 숙독을 해서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조직신학의 일곱 권의 내용을 거의 다 머릿속에 넣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의 복음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표준적 입장이라고 하는 내용을 머릿속에 넣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성경신학인데 성경신학을 현대 성경신학만 하지 말고 이전 시대의 성경신학을 공부하면서 기본적으로 성경을 점진적 신학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신학을 하며 교회의 역사를 공부하고 어떤 주제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하는 것들을 함께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실천신학 과목들을 공부해나가야 합니다. 신학을 공부할 때 유의해야 할 것은 뭐냐면 소위 얘기하는 ‘universality’ 보편성과 ‘particularity’ 개별성, 이 두 개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에 있어서 보편성과 개별성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요즘 보면 개혁신학을 사랑한다 아니면 개혁신학을 추종한다는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신학적인 입장이 아니면 그것이 비록 개혁신학 안에 속하고 복음주의 안에 속했다고 할지라고 이것들을 가차 없이 난도질하고 심지어는 감정적인 비난까지 하는데 이것은 그렇게 하라고 주신 교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면 우선 보편성부터 이야기해야합니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기독교 신학이라고 하는 이 학문 자체가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된 형태로 예수님이 혹은 사도 바울이 툭하고 떨어뜨려주고 더 이상 보탤 필요도 없고 확장할 필요도 없고 해석할 필요도 없이 툭 떨어뜨리고 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분명하던 형태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확장되어가고 이단들이 나타나면서 기독교가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교리들이 상세화되었던 것입니다. 이러면서 점점점 신학 쪽으로 발전해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문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은 어떤 사람을 비평할 때 그 시대의 문맥 안에 놓고 비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안 하고 뜬금없이 갑자기 ‘칼빈은 왜 노예제도에 대해서 반대도 안했느냐 그러고도 어떻게 개혁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느냐?’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든지. 아니면 뜬금없이 ‘아무래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관은 우리 개혁주의 구원관하고 안 맞는 것 같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느냐. 그러므로 그의 모든 신학은 쓰레기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문학의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안 됩니다. ‘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성화에 관해서 사제주의의 길을 열어놓은 것 같은 오해를 받을만한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가톨릭신학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문학의 비평의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역사적으로 발전해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전의 오리겐이나 이레네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나 아우구스티누스 이런 사람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이런 사람들은 개신교가 생겨날 것도 몰랐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몰랐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로마가톨릭의 교부가 아니라 보편교회의 뿌리입니다. 보편교회의 신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삼위일체를 안 씁니다. 그 이유 중의 가장 커다란 것이 뭐냐면 소위 가톨릭의 삼위일체론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그랬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논쟁들이 빠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 시대에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서방교부들의 라틴어 전집, 라틴어 코포스, 동방교부들의 그릭코포스 이 전체를 다 읽는 것으로써 신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몇 권이나 되는지 어마어마하게 많겠지만 지금 독일 터널티출판사에서 1940년대에서부터 비평 본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교부시리즈에 의하면 제가 가진 목록에 570권쯤 됩니다. 그것을 읽는 것으로써 그 사람들을 신학공부를 먼저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편교회의 신학을 공부하면서 사고의 폭들을 넓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디까지 수용하고 어디까지 배제할 것인가 하는 기준자체를 개념자체를 자기가 잡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공부하면 자기입장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생겨나는 많은 이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의 이단들 신비운동이나 많은 것들이 자기들은 교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면서 나오는 해석들이 무지하게 많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면 개별성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뿌리로부터 신학이 발전해 왔다는 것을 믿지만 나는 신앙적으로 내 입장이 있습니다. 나는 장로교회의 교인입니다. 혹은 나는 감리교회의 교인입니다. 혹은 나는 재침례교파의 교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고백하는 이 신앙이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신앙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입장에서의 신학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각각의 구원 등에 대해서 알미니우스주의나 혹은 칼빈주의나 이렇게 여러 가지 입장을 가질 수 있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는 설득력도 있지만 나는 신앙적으로 이 입장이 그래도 가장 성경에 근접한 기독교 신앙을 갖는 길이라고 믿는다는 입장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자기의 신앙의 선조들이 남겼던 신앙의 고백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과 여태까지 내려오는 보편성의 신학이 조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를 생각을 하면서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받아들이지 말 것인가를 평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아, 내가 감리교였는데 이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침례교로 갈수도 있고 침례교도였던 사람이 ‘아, 장로교가 맞구나’하고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자기 신앙의 입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복음주의다’ 혹은 ‘개혁주의이다’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개혁주의의 개별적인 신앙의 전통들이 어떻게 되어왔는지를 보편교회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부터 시작하거나 장로교면 칼빈파부터 시작을 해서 내려오면서 마틴 부처부터 시작을 해서 어떻게 그런 갈래들이 내려왔는가 하는 것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신학을 탄탄하게 세우고 이 보편성의 신학과 개별성의 신학이 계속 교감을 하게 해야 합니다. 교감을 하려면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 없는데 어떻게 교감을 합니까? 그러니까 부지런히 그쪽의 자료들을 읽고 탐구하고 이쪽에 있는 자료들을 탐구하고 하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언제 공부를 합니까하는데 공부하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그냥 자기의 일상이 되어야합니다. 목회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시간은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늘 강조하는 것이 고3이론입니다. ‘나는 고3이다.’ 강대에 올라갈 때 백색을 매고 올라갑니다. ‘나는 고3이다.’ 자기 확인을 하며 올라갑니다. 고3은 연애도 대학가서 해야 합니다. 캠핑도 대학가서 하고 놀러도 대학가서 하고 말만 나오면 대학가서 할거라고 합니다. 그것입니다. 우리의 대학이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그때까지 고3으로 살아야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여러분과 같은 때에는 공부를 하다가 한번쯤은 병원에 실려가야합니다.
(예화) 영국의 이튼스쿨을 나오고 캠브리지를 나와서 물리학을 하고 있는 자매가 자기 편지를 공개를 했는데 기숙사 한 동에서 평균 한 명씩 한 학기에 병원에 실려 간답니다. 그것이 몸살이 나서 병원에 실려 가는 것이 아니라 미쳐서 정신병원에 실려 간답니다. 그런 것을 보면 학문의 대국이 그냥 건설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얘기는 여러분들이 신학을 공부하다가 정신병원에 실려 가라고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과라도 실려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학기 공부하고 시골집에 내려가면 “얼굴이 왜 이렇게 핼쑥해졌니?” 그래야지 그냥 피둥피둥해가지고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학자체를 제외하고 무엇을 해야 하냐면 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철학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최근에 제가 화란을 갔습니다. 화란에 현재 살아계신 분 중에서는 세계최고의 마틴 부처 연구가가 계십니다. 영어로 ‘스파이커’, 화란에서는 ‘스페이커르’라는 교수님인데 아펠도르신학교 은퇴교수십니다. 그분하고 교분이 많아서 1년에 한 번 정도씩 뵙고 만납니다. 우연히 식사를 하다가 신학에 있어서 철학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냐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여든 여섯이신 그분은 장인어른도 신학자셨고 대대로 신학자 집안이십니다. 그 분이 그 노인께서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 합니다. 물론 그분은 아주 철저한 개혁신학자입니다. 단호하게 이야기하시는데 ‘철학이 없이는 신학을 공부 할 수 없습니다.’ 탁 잘라서 이야기 하면서 그것도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없이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할 수 있는지를 피터라무스라고 하는 17세기 프랑스의 개혁파정통주의자의 예를 들면서 설명을 하셨습니다. 피터라무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거부하고 플라톤철학만을 가지고 신학의 방법론은 삼으려했던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격이 아주 유별나서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야기를 쭉 하셨습니다. 최근에 제가 또 똑같은 질문을 캐플신학교의 리차드 멀러교수님과 친분이 있는데 미국에서 그분과 차를 타고 가면서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물으니까 아주 단호하게 ‘철학에 대한 지식 없이 신학은 공부할 수 없습니다.’ 하고 탁 잘라서 이야기합니다.
그럼 무슨 철학을 공부해야하는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어느 철학에 빠져드는 추종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신학이 망가집니다. 그러면 무슨 용도로 철학을 공부하느냐? 도구적인 용도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이 그 시대의 사람들의 정신을 가장 잘 반영해서 전개한 철학의 틀과 내용들을 가지고 사용을 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주었기 때문에 암암리에 우리들이 그 영향을 받고 있기에 그 틀을 사용해서 전달해주는 것은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철학을 부전공이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심취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심취하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너무 심취하지 말고 꾸준히 흥미를 가지고 읽어 가야합니다.
그러면 어떤 철학들을 공부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스 로마 고대철학입니다. 플라톤 이전의 파르메니데스부터 시작하면 좋지만 어쨌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을 하는 이 두 기둥들을 가지고 공부를 해나가야 합니다. 플라톤이 쓴 전집은 우리나라에서는 완전히 번역이 되지 않았지만 영어로는 많이 나와 있고 그리고 지금 젊은 학자들이 부지런히 번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열의만 가지고 있으면 읽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58권 정도를 쓰고 죽었는데 이 책을 모두 공부할 필요는 없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인 형이상학, 형이상학 안에 있는 특히 신학, 범주론, 분석론 이런 중요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읽고 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합니다.
처음에는 머리가 부서지는 것 같겠지만 그것은 퇴화되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을 지금 일으켜 세워서 김연아처럼 모션을 하라고 하면 다 부러질 것입니다. 왜냐면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처럼 그렇게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하면 할 수 있을 텐데 태어나서부터 너무나 오랜 동안 근육과 뼈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어져버린 것입니다. 머리가 이해가 안 되고 터질 것 같을 때 내가 얼마나 죄악 되게 게으르게 살아왔는지를 회개하고 그것이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해야합니다.
그렇게 계속 탐구를 하면 어느 한 순간에 탁 뚫리면서 철학적인 사유들이 확 밀려오고 거의 모든 것들이 이해되는 단계가 옵니다. 그때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불과 며칠사이에 그런 계기가 옵니다. 모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 경우는 그랬습니다. 좀 과장하자면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까 모든 철학책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 물론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공부해나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중세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중세의 철학이 사라지고 기독교학자들, 목회자들이 이 철학을 해나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철학들이 다른 철학과 함께 원용이 되면서 기독교의 신학의 중심을 세우는 아주 중요한 도구들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 르네상스의 역사,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 해체주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 국제 학술세미나에서 만난 발표자의 발표가 인상적이었는데 그분은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의붓자식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계열적으로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를 정확하게 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가 정확하게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몽주의에 대해서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부크하르트로부터 시작을 해서 부크하르트 이후에 일어나는 나우워 같은 사람들에 의해해 이뤄지는 고전적인 르네상스 해석에 대한 비판까지 섭렵하고 꾸준히 책을 읽으면 계몽주의와 르네상스를 바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북부 이탈리아의 인문주의뿐만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의 예술 르네상스까지 역사를 같이 공부해 나가면서 종교개혁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공부해야합니다.
그 다음은 종교개혁에 들어갑니다. 종교개혁 중에서 1세대, 2세대, 3세대 이 중요한 종교 개혁자들의 책들을 읽어야하는데 그 책들은 이미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글로 번역이 안 된 것이 문제인데 한글밖에 못 읽으면 한글로 읽지만 영어로 읽을 수 있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습니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 멜란히톤, 블링거 같은 위대한 종교개혁가들의 작품들 중의 중요한 작품들을 읽어가야 합니다. 청교도의 전통들은 16세기 이후에 생겨나게 됩니다. 낙스부터 시작을 해서 내려오는 위대한 언약도들과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어마어마하게 남아있는 작품들이 5만권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 작품들 중에서 존 오웬이나 윌리암 퍼킨스, 리즐리 이런 쟁쟁한 사람들의 중요한 작품들을 숙독하면서 대륙의 정통주의와 영국식 언약사상에 대한 쌍무적인 이해를 통한 강력한 경건이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공부를 해 나가면 아까 이야기한 것 같이 경건과 학문을 겸하는 자료로서 아주 훌륭합니다.
그렇게 공부하면서 종교개혁과 청교도, 계몽주의와 쉴라이 마허 이후의 신학이 네 개의 분과로 나눠지면서 밀려들어오게 된 이후의 19세기 자유주의신학, 20세기 현대주의 신학 그중에서도 일어났던 복음주의 적이고 개혁주의 적인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여력이 나면 다른 자유주의 적인 사람들 마르트를 비롯하여 신전통주의 같은 믿을 수 있는 책을 읽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충 철학과 신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공부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인문학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후메리따스’ 사람에 관한 학문입니다. 인문학은 대개 문학, 철학, 역사로 대변이 되고 매우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냐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 중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찍 예수님을 믿게 되니까 출중한 학문이 없이 기독교신앙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교회 안에 딱 갇힙니다. 그리고 세상 친구들도 거의 안 만나기 때문에 우리끼리 통하는 언어와 세계를 가집니다. 그런데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면 뭔 얘기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구원만 이야기해도 ‘구출인가 뭔가? 119구조대의 구출행위인가?’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방언현상이 너무 심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자랐는데 결국은 신학교 가서도 똑같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고민을 하고 저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떠한 용어로 설명을 해야지 저들이 이 기독교에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고 생각할까하는 것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소통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공부를 하려면 지금 회상해 보니까 제일 중요한 것이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이때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때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야합니다. 문학작품은 인생의 답을 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질문을 던집니다. 의문, 질문을 던집니다. 그래서 질문이 많은 사람이 해답도 열심히 찾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인류의 삶을 다 직접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문학을 통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전 다행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요즘은 애들은 문학작품을 안 읽습니다. 돈을 줄게 읽으라고 해도 안 읽습니다. 핸드폰과 아이패드 같은 것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 가져다 버려야합니다. 나는 인터넷에 들어가서 체류하는 시간이 일 년에 10시간이 안됩니다. 난 아직 사진 찍어서 컴퓨터에 올린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내가 바보는 아니니까 15분만 배우면 알 텐데 배우면 뭐하겠습니까? 시간낭비입니다. 난 안합니다. 활자로 된 책을 읽으면서 사유를 넓혀가야 합니다.
문학 작품을 계속 읽어서 자기는 직접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처절한 고민들을 하는 것입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세계문학전집의 “테스”같은 것을 읽으면서 이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그 수많은 의문들 ‘정조라는 것은 무엇인가?’ 여자의 지위와 남자의 지위, 사회적인 폭압 이런 것들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이 어린 청소년의 가슴에서 막 파헤쳐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의문부호들이 막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답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문학을 통해서 질문을 많이 하고 나면 그 다음에 중고등학교에 가면 사상서들을 읽고 싶어집니다. 읽으면 최종적인 답은 아니더라도 물음표를 많이 눈앞에 던져주면 중고등학교 때 사상서를 읽으면서 마침표를 많이 찍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다가 신학을 공부하면 느낌표를 찍게 됩니다. 그래서 물음표, 마침표, 느낌표들이 이해가 됩니다. 물음표 없는 사람은 마침표를 안 찾고 마침표를 못 찾은 사람은 느낌표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다가오는 종교적인 열정입니다. 여러분들은 늦었습니다. 지금 신학을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도스토엡스키 같은 것을 읽겠습니까? 카프카나 이런 것을 읽겠습니까? 늦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틈틈이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나에게 있어서 휴식이란 무엇인가? 휴식은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것이 휴식입니다. 공부는 읽어야 할 책을 읽는 시간이 공부입니다. 휴식은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시간으로 휴식 시간에 그런 것 읽으면서 보충하며 살아가야합니다. 그렇게 문학, 철학, 역사 이런 공부를 해나가야 합니다.
인문학 얘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역사를 교회사책만 읽지 말고 일반 역사도 읽어야하는데 교회의 역사와 일반역사는 밧줄이 꼬이듯이 함께 꼬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 신학을 공부할 때에는 반드시 미국과 캐나다의 교회사를 읽고 미국의 신학을 공부합니다. 왜냐하면 왜 이런 논쟁을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전 세계에 걸친 신학입니다. 그래서 세계 역사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아까 서양철학만 이야기했는데, 저는 동양철학을 공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요새 조금씩 성리학이나 이런 책들을 보고 있는데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동양철학, 정확하게 말하면 동북아 철학의 노장사상이나 이런 것들을 공부하면 신학에 굉장히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율곡이이가 성리학에 대해서 쓴 교재를 읽었는데 그 한 권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학생들에게 신학을 이렇게 공부하라고 가르쳐주고 싶은 내용들의 상당부분을 그 책이 담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를 가만히 생각해봤더니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경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배우는 것이 삶과 일치를 이뤄야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유교의 전통을 따라갈 만한 학문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놀라운 적실성들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책을 읽고 덮으면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제는 세월도 다 지나가고 며칠 전에 책을 읽었는데 오늘 펼치면 너무 새롭습니다. 날로 더욱 새롭습니다. 이렇게 기억력도 희미해져 가는데 언제 그런 공부를 하겠느냐 했는데 여러분들을 젊지 않습니까? 그러니 부지런히 읽으십시오.
(예화) 제가 총신대에서 강의를 해달라고해서 갔는데 다른 것은 못 가르쳐도 공부 안하는 학생들의 양심에 자극을 주어서 공부하게 하는 기술은 있습니다. 그래서 찌르는 것도 핀으로 찌르는 것이 아니라 꼬챙이로 심장을 팍 뚫어서 죽든지 일어나든지 그렇게 하게 했는데 최근에 한 학생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의 강의를 두 시간을 듣고 자기가 얼마나 무지한 인간인지를 깨닫고 공부하기로 뜻을 세웠다는데 대단했습니다. 독서 모임을 만들어서 책을 읽는데 그야말로 건강을 해칠 정도로 공부를 하는데 한주에 5권을 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한 5년만 하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내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한 학기에 한 키는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잡다한 소설이나 이런 것 말고 순수한 신학 책들이 한 키 정도 이렇게 세워서 한 키가 아니라. 한 키를 읽어야하는데 그것 가지고도 모자랍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문학에 있어서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그것까지 공부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에 대한 중요성을 후에 깨달았습니다. 저는 신학을 열심히 했습니다. 제가 학부 4년하고 신학대학원 3년을 공부했는데 ‘다시 돌아가도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는 부끄럽지만 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다시 살아도 그 이상은 못산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신학이 어떻게 해서 전체가 하나님을 증거 하는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은 30대 중반에야 깨달았습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수생활을 하면서 어느 날 모든 신학의 학문들이 아주 아름다움 연결을 이루면서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거기에 머물러서 심취하다가 청교도에 깊이 빠져서 있다가 어느 한 순간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학문들을 공부하기 시작하고 제가 얘기하는 소위 말하는 통합신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공부해보니까 내가 공부하는 방식이 원래 신학의 전통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모든 학문, 심지어는 예술과 미술, 철학, 유행가까지 이 모든 인간이 만든 학문이라는 것이 어떻게 연결을 이루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모순이 없는 통합을 40대 중반에서야 발견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40대 중반 좀 넘어서 후반으로 들어가면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한 6∼7년 전에 고액을 주고 과외선생님을 데려다가 천문학을 1년 동안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의 나로서는 고액이었습니다. 1주일에 한 번씩 천문학을 공부를 했는데 일 년을 딱 가르치고 나더니 ‘목사님 이제 그만하십시오. 이제 여기서 또 공부하시려면 고차원적인 수학을 공부하셔야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미적분에서 발달된 수학을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거기서 제가 포기했습니다. 1년 동안 천문학을 배우고 신학에서 해결 할 수 없었던 놀라운 것들을 해결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어떻게 천문학과 신학이 연관되는지를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자연과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최근에는 제가 양자역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양자역학은 정말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판을 깹니다. 사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 혹은 예정론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얼마나 유치한 질문이었는지를 양자역학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1920년대의 닐스 보아나 아이젠버그에 이어지는 표준적인 양자역학들을 공부하면서 신학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지평들을 요새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배워야 할 학문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만약에 건축, 미술, 예술, 특히 법학, 마이클 샌델 같은 사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는데 부활하고 있는 뉴칸티즘 같은 사상들 칸트주의의 부활들 이런 것들을 공부해 나가야합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이것들을 공부한 사람들이 마지막에 감탄하는 것은 신학은 너무 예쁘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이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신학이 너무 예쁘다. 신학은 너무 예쁘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신의 책 속에서 모든 성도들이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여야 할 이유를 제시하면서 5번째로 제시하는 것이 뭐냐면 ‘우리는 모두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여야 합니다. 왜? 재미있으니까!’ 그것이 5번째 이유였습니다. 너무 예쁩니다. 그래서 결국 예전에는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해야지만 겨우 만날 수 있었던 하나님을 이 모든 세계 속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내가 천문학을 공부할 때 그 후에 생물학, 심리학, 의학 들을 쭉 하다가 의학은 지금은 중단했는데 그 때 한참 아우구스티누스에 심취해있을 때여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거의 읽었습니다. 그때 금요일마다 여기 기도원에 올라왔는데 제가 여기 단골입니다. 금요일에 올라오면 설교준비를 끝내고 산책을 합니다. 하늘의 별들이 막 쏟아집니다. 그 무한히 펼쳐진 우주의 아름다움 그리고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목적연관을 이루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아요
큰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가 아름답고 어떤 때는 가슴이 시릴 정도로 감격이 됩니다. 그리고 이 무한한 우주에서 나 같이 먼지만도 못한 이 존재가 그 위대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고 내가 그 학문을 하고 있다는 것, 그 학문의 결과로 내가 그렇게 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살게 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한다는 것, 그래서 돌보지 않았더라면 들풀처럼 주목하는 이 없이 창조주 하나님의 앞에 사라져 갈 가치 없는 인간들이 어디 그 뿐입니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대적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망가뜨리는 인간들을 지식으로 인도하고 영혼 사랑함으로 인도해서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생각을 할 때 정말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이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우리는 얼마간 인생을 살다가 이 잠시의 시간의 세계를 지나서 영원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데 우리의 소명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생각하면서 많은 감격을 합니다. 그래서 정말 최고의 복입니다.
이제는 정말 눈물이 납니다. 신학교 다닐 때는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샀습니다. 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죽했으면 1주일의 점심을 굶고 그것을 모아서 원서 한 권을 사가지고 와서 읽었습니다. 지금은 책이 많습니다. 제가 1년에 2억 원어치의 책을 샀습니다. 5만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마다 5천권에서 많으면 8천권을 삽니다. 그런데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전에는 책이 없어서 눈물이 나왔고 요새는 시간이 없어서 눈물이 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바빠도 나보다는 한가하지 않습니까? 내가 일단 교회에 나오면 우리 아내가 나를 만나려고 해도 우선 비서실에 연락을 해야 합니다. 나는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착착 시간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틈틈이 공부합니다.
그런데 이 책들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서가에 들어가면 책들이 막 소리를 지릅니다. ‘목사님! 나 새로 왔는데. 나 좀 읽으세요.’ ‘저 처음 왔거든요. 나 좀 읽어주세요.’ 저쪽에 있는 책이 소리를 치면서 ‘온지 5년 됐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저기 있는 책이 ‘목사님, 나도 읽어주세요.’ 막 사랑받고 싶어서 수많은 책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그 때에 그 아이들을 모두 안아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영적 침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수시로 서가에 들어가서 울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인가? 티끌 같은 인간이 아무것도 모르고 이렇게 살아서 어떻게 하나’하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을 바꿨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자. 하나님께서 내 형편을 아시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하다가 ‘심방가요. 목사님!’ 그러면 전에는 ‘공부도 못했는데 심방가야하나’ 그랬는데 요새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야! 심방이다. 신난다. 공부만 했었는데 이제 심방 간다.’ 그러고 시간나면 공부하고 공부만 하면 좋겠는데 책을 써야하니 책 쓰는 것도 관심이 저 밖으로 밀렸는데 한 7년 하다 보니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날짜도 얼마 안 남았는데 빨리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쓰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지 있는 거 쏟아내는 것은 있으면 쏟나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나갑니다. 제가 하고 싶은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공부할 것이 더 많은데 절반 밖에 못했지만 여러분,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특히 보편교회의 중요한 교부들을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오리겐,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등 중요한 신학자들을 공부해나가야 합니다. 풍부한 적응성과 현실적 실천은 탄탄한 이론적 기초에서 나옵니다. 이렇게 기초 체력을 탄탄하게 연마하고 공부해가서 여러분들의 설교를 한번 들으면 ‘여기가 진리구나. 야! 정말 저 사람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은 높고 크시고 위대하시구나!’ 이렇게 사람들이 깊이 깨닫고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렇게 여러분들이 설교를 한다면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오늘 아무렇게나 살고 있는 생각 없이 허비하며 사는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하던 내일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허락이 안 되었고 여러분들에게는 허락이 되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