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과 나의 목회(성화론을 중심으로)
존 오웬과 나의 목회라는 주제를 가지고 열린 교회를 담임하시는 김남준 목사님 나오셔서 강해를 해주시겠습니다. 아 많이들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전혀 반가운 눈빛이 아니에요. 저희 교회 다니시던 지체들 말고 외부에서 오신 분들 한번 손을 들어보세요. 아유, 주류를 이루었네. 손 내리세요. 자, 그럼 우리 잠깐 기도하고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세미나라고 그러지만은 뭐 특별히 엄청난 준비를 하고 올라온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강의안은 여기서 강의하는 순서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집에 가지고 가서 또, 아무것도 안 들려서 보내면 너무 섭섭하니까 하나씩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집에 가셔서 읽어보시면 되겠습니다.
존 오웬이라고 하는 인물은 제가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지금부터 한 그 10한 3,4년 정도 전인 것 같아요. 물론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에 청교도들에 관한 것을 배우면서 이름을 살짝 들었던 적은 있지만 그러나 뭐 그리고 잊혀졌습니다. 잊혀졌고, 그러던 가운데 제가 개인적으로 그 부흥을 경험하고 그리고 한참 내 경험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있었던 때에 제 손에 들려졌던 책이 리바이벌 캔 잇 레이디 해븐이라고 하는 그 피크린 출판사에서 나온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그 원서였습니다. 노란 카바로 돼있는 작은 책이었는데 그거를 제가 교수 되고 나서 병아리 교수던 시절에 그래서 이제 학과 수업이 끝나고 나면 야간 학생들이 올 때까지 시간이 좀 있어요. 그래서 교수실에 앉아서 한 장씩 보기 시작했는데 아 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경험을 이 사람이 아주 기가 막히게 똑같이 역사적으로 그것을 입증하면서 써내려 간 거죠. 그래가지고 정말 거의 그 책에 전부 다 밑줄을 긋듯 싶이 하면서 책을 거의 다 읽어 갔을 무렵에 책 한권이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간됐는데 서문갑 목사님이 번역한 부흥이라는 책이었어요. 그때서야 그걸 보면서 아, 이게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구나 그리고 알게 됐죠. 그러면서 이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글들을 읽게 되면서 그러면서 거기서 오웬이라는 사람이, 청교도가 특별히 자주 거명이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리고 오웬의 이름도 들먹여 졌지만 또 뭐 그렇게 오웬이라는 청교도 사상에 대해서는 뭐 그렇게 아참 우리가 옛날에 생각했던 것처럼 뭐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기 좋아하고 뭐 율법주의적이고 이러한 사람들이 아니라뭔가 이렇게 영적으로 커다란 줄기를 이루었던 사람들이었구나 라고 하는 것은 알게 되었고 그쪽에 대해서 계속 좀 책을 읽어야 되겠다 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병아리 교수 시절에 뭐 밀려오는 강의 뭐 거기에다 뭐 또 무슨 박사과정 한다고 그리고 보따리 싸가지고 다니고 뭐 보통 복잡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또 이제 그 오웬에 대한 집중적인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다 얼마 있다가 아 우연히 지금 어느 책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우연히 그 책을 읽다가 존 오웬에 글을 읽게 되었어요. 근데 쭉 읽어내려 가는데 좀 어렵기는 하지만 뭔가 이 사람이 굉장히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에 살짝 읽은 내용이 뭐 였었나 하면 죄 죽임에 관한 내용을 살짝 이렇게 읽었어요. 야, 정말 신선하다. 야, 뭐가 있구나, 이렇게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월이 흘러서 저는 교회를 개척을 하게 되었고 진짜 그 힘든 개척이라고 하는 과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존 오웬의 글들을 논문도 몇 편 읽고 글도 몇 편 읽었지만 그렇게 뭐 다른 책들 읽는 그런 정도 수준에서 보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개척을 하고 나서 몇 년 정도 지났을 땐데 엄청난 영적 침체라고 그럴까요, 영적 침체라기보다도 하튼 견디기 힘든 그 내면에 고통을 겪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너무 힘겹고 내가 여태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해야 된다, 성경은 이렇게 믿어야 되고 그리고 우리가 은혜생활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 된다고 그러고 많이 가르쳐줬는데 또 그 당시에도 내가 계속 가르치고 있었고 열정적으로 설교하고 있었는데 제 영혼에는 웬지 모르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 밀려왔고 그리고 좀처럼 거기에서 회복되질 않았어요. 급기여는 제 마음이 정말 가난해질대로 가난해져가지고 정말 어떻게 그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그 열렬한 기도와 은혜 속에서 목회도 출발했고 그렇게 글도 쓰고 했는데 사람들이 나를 보면 불꽃 목사님 그랬는데 그땐 내가 속으로 그래요. 나 불꽃 없는데. 불꽃이 아니라 진짜 맹물같이 된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너무 괴로워하고 기도도 할 수 없고 괴로워하면서 그때 괴로워했던 게 뭐냐 하면 정말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내가 또 있다. 그리고 이거는 정말 목회적인 환경이나 내 생애에 만났던 수많은 난관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강적이 내안에 들어있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어요. 그때 기다렸어요. 그 경험을 언젠가 한번 간증을 했는데 “하나님, 나는 도저히 더 이상 글도 쓸 수 없고, 더 이상 설교도 할 수 없고,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이렇게 그 위대한 부흥을 꿈꾸라고 이렇게 외치면서 살았는데 나는 그런 부흥과 가장 거리가 먼 이런 처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어떡합니까?” 그리고 그 날 저녁도 드러누워서 베개를 베고 드러누었는데 눈물이 쭉 흘러요. 그렇게 곤고하고 눈물이 흐르는데 기도는 잘 안돼요. 그때에 하나님이 음성이 들린 건 아니야. 음성이 들린 건 아니고 갑자기 그런 마음이 내게 드는 거야. “야, 얘야. 뭘 그렇게 고민을 하냐. 오웬을 읽어라.” 아니 음성이 들린 건 아니고 내 마음에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거죠. 그런데 그것도 성령님이 인도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아주 또렷하게 생각이 나. 내가 사랑하는 종 오웬이 있지 않냐? 그러고 나서 부랴부랴 제가 부랴부랴 오웬을 찾았어요. 근데 제가 그 전에 사놓았는지 그 일을 계기가 되서 사놓았는지, 아 그전에 책을 사놨던 것 같아요. 이제 그 오웬 전집을 제가 샀거든요. 근데 그거 사고 싶어서 산 게 아니라 그 어느 책에선가 로이든 존스를 읽었는데 그 배다니 존스가 시집 올 때, 그 로이드 존스 목사님 시집 올 때, 원래 그 아내들이 장롱도 해오고 그러잖아요. 그 뭐라고 그러죠? 아 혼수. 다 필요 없으니까 오웬 전집은 꼭 사갔고 와라 그랬데요. 그래가지고 그 생각이 나서 그 원서 파는 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거기 있더라구요. 아 원서 파는 집이 아니라 영국에서 부쳐왔어요. 영국에서 부쳐왔어요. 아 옛날에 그랬던 것 같아요. 아 그랬는데 뭐 잘 기억은 아물아물 해. 그런데 그때 하튼 오웬 전집은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그때야 처음으로 그 사실 오웬 전집 한번은 이렇게 들쳐는 봤거든요. 사실 사온 책이니까 그런데 아 이건요, 글씨 출판된 그 책부터가 짜증스러워요. 거의 돋보기를 써야지만 보일정도로 깨알 같은 글씨에다가 그 무슨 소제목 하나도 없이 무슨 뭐 검찰 논고같이 말이지 한없이 나가고 그리고 영어 좀 하려고 애를 썼는데도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이 나와요. 이게 벌써 거의 삼백 한 오십년 전에 영어니까 이거 도대체 그 뜻을 가지고 해석을 해도 잘 안돼요. 그 시간이 다른 원서 읽는 것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요. 그러니까 시간이 넉넉해서 몇 칠씩 쫙 붙들고 앉았으면 되는데 이게 안돼잖아요? 그래가지고 그때서야 막 뒤졌어요. 그 뒤지니까 딱 생각이 나는 게 뭐냐 하면 그때 살짝 읽었던 그 죄죽임 이라는 게 생각났어요. 그래서 mortification이 어디 있나 막 찾았더니 6권인가 7권에 6권에 막 나오는 거예요. 그때에 너무 아파가지고 거의 침대에 드러누워서 굴러야 될 정도로 많이 아팠어요. 그래가지고 할 수 없이 침대에 이제 뭐 그렇게 바쁘게 살았잖아요. 그러니까 아프니까 스케줄이고 뭐고 다 끊어 진 거예요. 그런데 드러누워서 그 마음속에 들린 음성에 순종해서 일단 그 mortification을 꺼내 왔어요. 그때는 이제 마음가짐이 좀 달랐어요. 왜냐하면 내가 꼭 읽어야 된다. 왜 이거는 이제 뭐 어디 써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의 필요에 의해서니까 그래서 지금도 기억 하는데 전에 그 방배 거기가 몇 동인가? 방배 3동에 우리 집에 살 때 참 거실 문을 이렇게 열면 저쪽에 산이 있고 뭐 집에 습기는 찼지만은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지금은 없어요. 다 팔아버렸어요. 거기다가 베개를 놓고 이렇게 기대가지고 아 새소리도 들리고 좋아요. 오웬을 읽기 시작한거예요. 근데 전에 볼 때는 그렇게 정감도 없고 딱딱하기만 한 책이 읽히기 시작한 거예요. 꼬박 3일을 그 침대에 기대서 그 mortification을 읽었어요. 근데 저희 집사람이 증인인데 읽다가 진도를 나갈 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 아프고 충격적이에요. 그래 그 내가 그래도 그 많은 글을 쓰고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하고 신학교에서 교수도 하고 살았는데 그 mortification, 죄 죽임의 교리라고 하는 것을 쭉 읽어나가면서 그 불과 이게 그냥 아주 그냥 천천히, 한줄, 한줄 천천히 메모해가면서 읽었는데 뭐 하루 열심히 읽어야 한 35페이지 그 정도 밖에 못 읽겠더라구요. 그런데 읽으면서 이걸 계속 읽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집사람한테 그랬어요. “여보, 우리는 짐승이야. 아, 우리는 짐승이야. 나는 너무 막 살았어. 나는 내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리스도안에 약속된 그 아름다운 삶이 어떻게 획득될 수 있는지도 모르고 정말 바람잡이 같이 살았어.” 그래 마음속에 눈물이 가득 고여요. 그런데 그게 한줄기 빛을 던져준 거예요. 나는 여태까지 태어나서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그 실제를 그렇게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철저히 성경적으로 분석해서 보여준 글도 못 봤고 설교도 들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 충격이 어느 정도였냐면 이 단순한 아 이런 거였구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마치 저항할 수 없는 강한 해일이 바닷가에 서 있는 내게 확 떠밀려 와서 나를 공중을 붕 띄었다가 바닷가에 내팽개치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 진리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어마 어마한 진리들이 막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 진리 하나하나에 대한 깨달음이 임하는 그 순간마다 온 몸에 살갗이 비늘이 모두 들고 일어나는 느낌이었어요. 나중에 감동을 너무 받으니까 토할 것 같더라구요. 그럴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것이 이제 제가 본격적으로 존 오웬을 붙들고 매달리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 거예요. 그 다음서부터 이제 특별히 6권과 7권이 존 오웬의 책이 그 존 오웬이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남겨 놓는데 그 분의 책이 지금 현재 23권으로 되어있습니다. 볼룸으로 따지자면 23권 전부다가 한 권이 600페이지가 넘는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깨알 같은 글씨로.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양의 우리 말로 번역을 해서 책을 만들면 100권정도 될 양이에요. 그 정도 양의 어마어마한 방대한 분량을 남겨놓았는데 사실 이 전집 works라고 하는 것이 사실 사람이 works내고 나면 나중에 뒤집어보면 무슨 동아일보에 내 기사도 실리고 뭐 학보에 낸 글들이 쉽게 이야기 하면 별로 내용이 없는 것들이 많이 들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 이분의 글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다 장중한 내용만 담겨져 있는 것이 그게 거의 만 페이지내지 만 이천 페이지 정도 될 정도란 말이죠. 그렇게 엄청난 양을 토해났어요. 만 한 이천 페이지 내지, 삼천 페이지 될 정도로 그렇게 토해났어요. 그중에서 1부, 2부, 3부로 나누는데 1부는 교리적인 내용들을 다룬 거였고, 2부가 실천적인 내용을 다룬 거였고, 3부가 논쟁적인 내용을 다룬 거였어요. 그리고 이제 그 16권의 전집 이외에 히브리서가 한 육백페이지짜리 책, 6권 정도로 해서 히브리서 주석이 나와 있구요, 아마, 사도시대 이래로 히브리서에 대해서 쓴 가장 완벽한 주석이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그 기록이 갱신되지 않으리라 저는 봅니다. 그랬고 그 다음에 마지막에 라틴어로 쓴 그 성경 신학이라고 하는 그 책을 그 성경 전체에 대한 구속의 역사를 기록한 한 팔백페이지 되는 책이 한권 있고 이렇게 해서 전부 다 23권의 책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한번에 출간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출간된 적이 있어서 어떤 편집에서는 그 권수가 늘었다 줄었다 해요. 세권 정도 편집이 되고 오늘 우리에게 있는 책이 19세기에 편집 된 골드라고 하는 사람에 의해서 편집 된 책이 우리에게 이렇게 권수로 내려와요. 어쨌든 간에 그 중에서 그 6권, 7권, 8권, 9권이 그게 이제 특별히 실천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 것들이에요. 그거를 보면서 이제 여기 저기 읽어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뭐 받았던 감동과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제 간간히 존 오웬의 책들이 번역돼 나왔잖아요. 그죠? 그것들을 또 보면서 은혜를 받았어요. 근데 그 오웬의 글을 보면서 사람들이 읽기 어렵다고 그러거든요. 사실 읽기 어렵다 그러는데 사실 그렇게 얘기를 안 하면 좀 이상한 거예요. 왜냐면 당 시대에 후대의 사람도 아니고 당시대에 청교도들이 살던 그 시대에도 그 사람의 글은 매우 어렵다고 소문이 나 있었구요, 그래요. 그 어려운 것을 다시 또 영어로 번역을 했고 그 번역을 하면서도 능숙한 번역가들이 오웬의 사상을 깊이 이해한 가운데 번역을 한 책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초신자들이 번역을 했기 때문에 그 오웬이 가지고 있는 이 장중한 청교도 사상의 맥락이 완전히 파악이 안됀 가운데 용어나 이런 것들이 잘못 설정되고 이렇게 해서 사실 감동이 잘 안되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몇 권의 책은 도저히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런 번역도 나와 있는 실정이에요. 그런 어려움들이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그러한 어려움의 원인은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요. 우선 첫째는 당시대에 맥락이에요. 당시대에는 그 청교도들의 시대였는데 청교도들이 굉장한 지성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작품을 5만권 정도 남기고 죽었거든요, 근데 그 중에 3만권 정도는 그렇게 탁월한 가치가 있는 책들이 아니고 우리가 읽으면 감동을 받고 깊이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의 깊이를 보여줄 수 있는 이런 책들이 2만권 정도 된다고 지금 이렇게 추정을 해요. 근데 그 분들이 모두 탄탄한 지성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는 이제 성공회와 로마 카톨릭 그리고 개신교 이러면서 종교개혁을 이어받은 그 Puritan들 속에서 그래서 Puritan들은 가지고 있는 Puritan의 청교도 신앙이 보편적인 신앙이 아니었거든요. 보편적인 신앙이 아니니까 그 신앙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됐단 말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교리를 철저히 이해해야 했고 마치 칼빈이나 루터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 헬 희랍교부와 라틴교부들, 그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성경에 대해 해석해 왔던 그 역사적 자료에 대해서 아주 능숙하게 알고 있어야 됐습니다. 그러니까 무식한 사람이 그 당시의 청교도 목사가 된다고 하는 것은 꿈꾸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렇게 해박한 그런 거죠. 그래서 그 번엔같은 사람도 공식적인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해서 무식한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개인적으로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은 지성인이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번엔의 작품들을 보면은 이 사람이 어떻게 솥이나 냄비같은 거를 떼우러 다니던 뗌쟁이었을까? 목사 안수도 안 받았거든요. 그럴 정도로 그 글이 엄청난 학문적인 신학적인 깊이들을 담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단순히 학교교육을 어디서 받았느냐 하는 문제만 가지고는 안돼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그 글들이 논리적이고 그리고 상당히 지성적인 글들이었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 오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질의 문제에요. 이사람은 철저한 학문적인 공부를 통해서 아주 탄탄한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람은 아마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일반 학문 속으로 들어가거나 철학 속으로 들어갔어도 역사에 뭔가 족적을 남겼을 제가 보기에는 오십년이나 몇십년 만에 한번씩 태어날까 말까한 그런 탁월한 천재였습니다. 그런 지성인이었기 때문에 또 이 지성인의 성격이 어떤걸 가지고 있었냐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캐들어가는 그런 철저한 탐구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글을 써내려갈때에 그렇게 자기의 성격에 맞게끔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끝장낼 때가 논쟁을 하고 성경적 진리를 입증하는 습관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그의 작품들이 난합니다. 예를 들자면 만약에 이런 교리를 이야기하잖아요, 이렇게 교리를 이야기하면 실컷 자기 교리를 진술해 놓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반대자들은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거다. 그리고 objection one, objection two, three, four, five 쭉 제기합니다. 반론자들이 이렇게 얘기하면 거기에 대해선 내가 이렇게 답변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거를 가상 반론을 세워놓고 다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또 뭐라고 얘기 하냐면 네가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면 또 반론을 제가할 거다. re objection이야. 그 re objection을 거기서 다 끄집어내고 그거를 또 반론을 하는 거야. 일, 이, 삼, 사, 알파, 베타, 감마 막 쭉 나가면서 한참 있다보면 이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죠, 그렇게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이성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게 하는 중요한 보고가 된다 라고 생각을 한거죠. 그러니까 무조건 믿으라, 진실하게 살아라, 그런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가르쳐줬던 거죠. 그런 것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 오웬의 작품은 써내려가다가 막 치열하게 논쟁이 일어나면은 사람들은 “아,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가.” 그런데 중요한 부분이라서 그렇게 치열하게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논란이 될게 많으며 그렇게 치열하게 논쟁을 하면서 거기서 싹을 반대자들의 모든 의견의 싹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는 거예요. 또 하나 세 번째 원인은 뭐냐 하면 우리는 사실은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거든요. 그런데 비평가들에 의하면 오웬은 이 모든 표현법과 글이 라틴어 풍에서 나왔답니다. 이 사람이 라틴어를 얼마나 잘 했냐면 외국어를 그 당시에 라틴어는 이제 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 교부들이 쓰던 거였어요. 그리고 그리그, 희랍어는 희랍교부들, 그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 제국이죠. 아 그쪽 교부들이 쓰던 거였어요. 그렇게 된 것이 희랍어는 여러분들이 그 학교에서 옛날에 배운 유클리트의 기하학이나 플라톤의 이상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 이런 것들이 쓰여 있는 그 글들이에요. 그러니까 성경, 헬라어하고는 좀 달라요. 그래서 더 고전 글이에요. 더 품위가 있죠. 그런 내용들로 쓰여 졌어요. 거기에서는 인제 요한 크리소스듬을 비롯해서 탁월하게 성경을 해석하던 해석 가들이 거기에 엄청난 글들을 남겨놓고 반대로 이쪽에서는 신학, 철학을 빌린 그런 철저하고 무게 있는 신학들이 발달을 합니다. 그쪽에서 양쪽에서 쏟아내 온 자료가 어마어마합니다. 저한테 그 자료가 있는데 카톨릭에서 모은 것만 거의 백권정도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고 그 양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너무 방대합니다. 그런데 인제 그래서 그 당시에는 신학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희랍어와 라틴어를 해야 됐다 이거죠. 그래서 그거를 아주 능숙하게 해서 희랍어로 말을 하고 라틴어로 연설을 하고 글을 쓸 수 있을 정도까지 거의 완벽하게 언어를 한겁니다. 거기에다가 하나 더 보태어져서 그가 히브리어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그가 랍비들의 글을 거의 섭렵할 정도로 그렇게 엄청나게 히브리어를 공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라틴어를 대하면서 거기서 끊임없이 신학 저작들을 인용하고 공부하는 가운데 라틴어 풍의 문체가 밴 거죠. 그래서 우리는 실험해봐야 알 수도 없습니다만은 어떤 분이 그런 제의를 해요. 오웬의 글을 그냥 앉아서 줄치면서 읽지 말고 일어서서 큰 소리로 읽어보라. 그러면 장엄한 나팔소리처럼 드릴 것이다. 그건 인제 영국 사람끼리, 자기네들끼리 하는 이야기에요. 우리는 뭐 이래도 잘 안 들리고 저래도 안 들리니까. 그런 점에서 그 글들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책을 읽어나갔어요. 그러면서 시시때때로 많은 유익을 얻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저는 그 한때에 처음 부흥을 경험하고 그 복음을 체험하면서 제 생애에 잊혀지지 않는 스승 한 사람을 성경 속에서 만났는데 세례요한이었어요. 지금도 그런 마음은 내 마음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나 세례요한 그분은 내 선생님이기는 하지만 내 스승으로 삼고 싶기는 하지만 가르쳐주신 내용들이 너무 작아. 몇 줄 안나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 그게 남은 유일한 설교에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세례요한에 푹 빠졌을 때에는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한 20년 내로 이 세례요한에 대해서 책을 써서 세례요한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겠다. 열권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한거죠. 그래서 나온 책이 그 세례요한 1, 그리고 나왔다가 나중에 생명의 말씀사에서 “청중은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 라는 제목으로 나왔어요. 지금도 여러 권 쓰라고 그러면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그 분에게서는 정말 그 말하자면은 그 구약의 선지자로서의 강인함과 거룩함, 그 불붙는 열정 같은 걸 느꼈다면은 이 존 오웬은 그 지성과 영성으로 동시에 그 나를 하찮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사람이에요. 그래서 탁월한 지성에 압도당하고 그 탁월한 경건성,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그 헌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 자신이 먼저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그 처절한 몸부림의 흔적 같은 것들을 그의 저작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어요. 제 사실 많이 읽진 못했지만 칼빈도 읽느라고 읽었거든요. 지금도 칼빈 선생님은 제 마음속에 스승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러나 칼빈을 읽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엄청난 그 차원의 새로운 차원의 기독교 신앙을 보여주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 존 오웬은 1616년에 태어납니다. 런던 근교에서 태어나는데 아버지가 헨리 오웬이라고 하는 목사님이었어요. 근데 이분도 상당히 유능한 목회자였고 동시에 신학자였습니다. 그 밑에서 지성적인 아버지 밑에서 철저하게 훈련을 받으면서 12살 될 때에 옥스퍼드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받게 되는데 학부 다닐 때에 대학시절에 10대 때죠. 한창 거의 천재적인 두뇌에다가 경건한 집안에서 자랐고 그러니까 또 키가 엄청나게 크고 또 이 몸집이 엄청 건장체질이었답니다. 이 사람이 이 젊은이가 인제 신학을 공부해야 되겠다는 열정에 불타서 공부를 하는데 어느 정도로 공부했냐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때까지 공부했답니다. 생명이 위험을 느낄 때까지, 그래서 나중에 젊어서 그렇게 공부하느라고 건강을 소진했기 때문에 사실은 나중에 살면서 여러 가지 질병들에 계속 시달리게 됩니다. 근데 어쨌든 그 천재가 목숨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일 때까지 그렇게 열렬하게 공부를 합니다. 그래가지고 그 교부들의 신학은 물론이거니와 어학, 아까 말씀드린 대로 어학, 관련 학문들, 철학, 인접 학문들을 광범위하게 접하고 그때는 아직까지도 중세시대의 교육법이 상당히 남아있던 시대였거든요. 중세시대의 교육법이 뭐냐 하면 암기에요. 암기. 그래서 제가 칼빈을 연구하면서도 그 터득했던 놀라운 진리가 칼빈이 이미 벌써 22살 될 때에 그 파리에 있을 때에 벌써 많은 사람들이 그 별로 유명하지 않은 젊은이를 아마 유럽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머리 속에 든 내용이 많았단 말이에요. 지금 우리 22살이면 pc방에 가서 게임이나 하고 있을 나인데 이 머리 속에 가득 들어 있는데 그 사람이 공부하던 방법이 뭐냐 하면 철저하게 외우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하루 종일 공부하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전날에 배운 내용을 모두 암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교부들의 전집을 거의 다 폐지까지 암기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날 그때쯤에 인제 로잔에서 스위스 로잔에서 개혁파가 이길 것이냐 카톨릭이 이길 것이냐를 놓고 3일 동안 논쟁이 벌어지는데 그때에 인제 그 발래, 비레, 로망 이런 사람들이 참가를 하고 이 칼빈도 참가를 합니다. 처음 한 이틀 동안에는 자기네들끼리 논쟁을 하게 내버려두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이 얍쌉하고 하얀 얼굴의 창백한 젊은이 칼빈이 일어나서 개혁 신앙이 틀렸다고 비판을 하는 로마 카톨릭 사제들을 향해서 당신이 이야기하는 내용, 당신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우리보고 교부를 무시한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자네는 교부도 못 듣고 온 것 같다. 그러면서 거기서 그 유명한 일화가 나오는 거예요. 어거스틴의 요한복음 설교 제 몇 번째에 보면 그 다음에 누구 무슨 글에 무슨 글에 무슨 글에 하면서 교부들의 글들을 청산유수처럼 인용하고 쪽수까지 대는데 근데 그들 중에는 자기네가 그렇게 교부를 존경한다고 하면서 자기네가 이름도 못 들어보던 교부들이 막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그러므로 하면서 성찬은 이런 것이다. 성찬론이었거든요. 마무리를 딱 짓는데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 수 있었겠어요? 그렇지만 뭔가 영적으로 모르지, 영적으로 뭔가 진리에 관한 최종적 선언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거예요. 그 칼빈이 땀을 닦고 딱 완전 무 원고죠, 앉으니까 그 다음에 카톨릭 수도사 한 사람이 딱 걸어 나오는 거예요. 카톨릭 수도사가 걸어 나오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그런 부흥사였어요. 카톨릭 부흥사였어요. 딱 올라가서 저 말쟁이가 인제 칼빈을 엎을려나보다. 딱 올라가더니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명백한 진리의 말씀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어둠 속을 살아왔다는 것을 저 칼빈 선생의 오늘 이 연설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오늘 사제도 그만 두고 이제 까지 잘못 가르쳤던 모든 죄를 참회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수도사가 되기를 거절하는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때에 수많은 수도사들이 거기를 떠나고 개혁파로 들어와요. 그런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에요. 근데 오웬도 마찬가지로 그런 중세시대에 남은 교육법에 의해서 철저한 암기 속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독서를 해 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그 저쪽 희랍에 나오는 작가들의 글 같은 것들도 수시로 등장해요. 그러니까 그 쪽에 나오는 평범한 문학이나 이 쪽에 대한 이야기들도 고전에 대해서 거의 섭렵을 하고 있었다는 거죠. 특별히 그때는 대륙에서 고전에 연구에 붐이 종교개혁 이후로 계속 불고 있었던 그때였거든요. 그러니까 엄청나게 많은 문헌들을 읽는 거죠. 어마어마하게 읽어요. 근데 그 모든 것보다도 이 사람이 성경을 무지하게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렇게 지성적으로 충만한 가운데 성경적으로 정리가 안 돼있으면 사실은 우리에게 그런 유익을 끼칠 수가 없는데 철저하게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래서 그 성경 concordance도 없던 시대에 성경을 자유자재로 어떤 때는 이런 성경 구절이 있었나 라고 느낄 정도까지 전부 다 파헤치고 희랍어나 히브리어 단어가 나오면 그것이 다른 성경에서 어떻게 쓰여 졌는지에 대해서 거의 완벽한 용례를 동원하는 거죠. 그러면서 천재적인데다가 그렇게 공부를 한거예요. 그래서 나야 이젠 틀렸지만은 내 신학교 다니는 젊은이들한테 내 신학교만 가면 항상 그래요. 목회자가 어떻게 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항상 그랬죠. 한번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까지 공부했다 나와야 된다. 그게 3년일 수도 있고 5년이면 더더욱 좋지만은 그러나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하튼 그렇게 거의 미친 듯이 그래서 말이죠. 이 팔은 공부를 해가지고 여기가 달아야 돼요. 여기가 다 달고 이거는 새 양복이라서 안 달았어요. 근데 이게 달아야 돼요. 이게 달고 그 다음에 이것만 달면 안돼. 무릎을 꿇어서 기도를 해서 무릎이 달아야 돼요. 이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실제로 그의 히브리서 주석이나 배교에 관한 논문 끝에는 항상 자신이 고백하기를 이 글은 심한 통곡과 눈물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 기도,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눈에 눈물이 가득 찬 가운데 신학을 공부해야 돼요. 그 들어 갔다 나와야 돼요. 그런데 그렇게 어떻게 공부 안 하기로 뜻을 세운 사람들 같아. 공부하라고 그러면 전도한다고 그러고 말이지, 맨 기타나 치고 복음송이나 부르려고 말이지, 맨 날 자매들이랑 모여서 커피나 마시려고 그러고 그러면 안돼. 그래서 공부를 해야 돼. 뭐 평신도들이 아멘 해봐야 뭐하겠어. 목회자 될 사람들이 아멘을 해야지. 그 여러분들이 조국 교회 신학생들을 위해서 좀 기도 해줘. 공부 좀 하게 도와달라고. 정말이야. 걱정이에요. 깡통들. 그래서 정말 생명의 위협은 못 느끼더라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까지 공부를 하겠어요? 그러니까 뭐 그 정도는 안 되더라도 몸살 날 정도로 한번 해봐야 되잖아. 그래가지고 철저하게 공부를 해나가는 거예요. 이게 원래 이런 거예요. 성경이 여기 있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이 성경을 한번 읽는 거하고 이제 눈도 잘 안 보이는 할머니가 처음 예수 믿기 시작하면서 한번 읽는 것하고 똑같지가 않다 말이에요. 왜냐하면 성경은 똑같은데 성경을 열 때에 많은 계시들이 쫙 발견되잖아. 이걸 담기는 건 뭐냐 하면은 지성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기는 거야. 어떤 사람은 눈을 뜨고 이렇게 읽어도 지성에 그릇이 요만큼 그 종이컵 그것도 소주 컵 밖에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빛줄기가 쏟아져도 꽉 담았다. 더 이상 안 들어간다. 그래가지고 담아보면 티스푼으로 몇 개 밖에 안돼요. 근데 이런 존 오웬 같은 사람은 말하자면 인류 역사 이래 몇 사람 밖에 가져 본 적이 없는 엄청나게 커다란 다라니를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지성적인 그릇이 있는데 거기에다가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이 역사하셔서 막 빛줄기와 같은 은혜의 계시들을 깨닫게 하시니까 그것들이 지성의 그릇에 막 담기는 거야. 그런데 여러분 퀴즈하나 낼 게요? 비가 막 쏟아질 때 그때에 벌판에다가 그릇을 펼쳐나. 근데 하나는 막 열명이 들어가서 목욕을 할 정도로 되는 커다란 다라니를 놓고, 하나는 요만한 그릇을 놓고 30분을 받으면 물의 높이가 똑같겠어요? 틀리겠어요? 똑같단 말이에요. 작은 컵이라고 해서 높이 올라가고 넓은 거라 해서 퍼지고 그러는 게 아니라 이거죠. 왜? 똑같이 비가 쏟아지니까. 그래서 이 지성의 그릇이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의 경우를 봐요. 사울이었잖아요. 근데 그 사람이 다메섹에서 만나서 놀라운 회심의 경험을 해요. 그 바울처럼 회심의 경험을 한 사람이 그런 정도 강력한 경함 한 사람이 바울 하나일거라다 생각 할 수는 없어요. 교회 역사상으로 말이죠. 다만 그 사람의 탁월한 지성의 그릇이 있었기 때문에 그 다메섹 가는 길에서 만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통해서 자기가 알고 있었던 유대교 사상과 그 다음에 세 개의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유다이즘과 그다음에 로마이즘, 로마시대에 태어났으니까 그리고 헬레니즘 문화 이렇게 세 개를 가지고 있었단 말이죠. 그런 모든 것에 대한 지식적으로 충만하고 철학과 이런 것들에 대해서 그 사도바울의 그 사도행전 설교에 보면 말이죠, 진짜 그 희랍의 저작들이 인용이 된다 말이죠. 아랍투스에서 나온 글들이 인용된다 말이에요. 그런 글들까지 이미 벌써 쭉 섭렵을 한 속에서 거기에 주님을 만나니까 쫙 하고 성령의 계시가 쏟아지니까 그 엄청난 그릇에 한번에 가득 담긴 거예요. 거기 있는 것을 제목만 써놓은 것이 성경이라고. 신약성경. 그렇게 깨달으면 돼요.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를 한거에요. 그래서 제가 이분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게 뭐냐 하면 그냥 이렇게 한없이 커다란 봉우리 옆에 있는 그런 묘목과 같은 느낌을 받아. 그래서 지금 와서 생각을 하니까 십대를 내가 이렇게 목회자가 되고 신학을 전공해서 말씀 사역을 할 요량이었다면 십대를 그렇게 보내선 안됐다 이거에요. 그리고 최소한 세살서부터 이 글을 읽고 쓰는 연습을 해야 된다. 아 진짜에요.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사람이 세 살 때부터 글을 쓰는 연습을 한거 아니에요. 이미 여섯 살 때 논문을 쓴다고. 자연과학에 대해서 논문을 쓴다고. 그렇게 훈련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그게 뭐야. 그냥 20때 맨 만화집이나 다니고 말이지, 20대 때 우린 컴퓨터는 다행히 없었어요. 맨 날 통기타 바람으로 왔다 갔다 하고 그러다가 26살에 회심해가지고 이게 도대체 무슨 죽이니 밥인지도 모르고 그냥 교회 봉사한다고 왔다 갔다 하고 덜렁 덜렁거리고 죄가 뭔가 은혜가 뭔지 구원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가서 맨 날 교회 청소하고 성가대하고 그러면서 살았다 이거에요. 그래서 어느 날 신학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는 일에 딱 부름을 받고 보니까 그 다음에 이게 하려고 하니까 이게 장난이 아니고 어마어마한 지성을 필요로 하는 세계였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렇게 거기서 존 오웬이 철저하게 공부를 합니다. 그 토대가 마련이 됐어요. 그래서 결국 마지막 죽을 때가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는 연약한 속에서 살아요. 근데 이 분을 보면서 이 분의 시대가 아주 격동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왕정이 있었는데 이제 영국은 이제 스코틀랜드하고 영국하고 이렇게 잉글랜드하고 둘로 나눠지거든요. 아일랜드하고. 근데 이제 영국은 이미 헨리 8세 때 전통적으로 이 카톨릭 국가였는데 근데 이제 그 헨리 8세가 결국 결혼문제 때문에 엔볼렌이라고 하는 국녀를 좋아하게 되고 딸만 셋 나놓고 아들을 못나주는 부인을 버릴려고 하는 거죠. 근데 버릴려면 그때 로마 교황의 허락을 받아야 되는데 로마 교황이 허락을 해주려고 하니까 그 그렇게 허락을 해주면 그 사람이 누구냐면 신성 로마제국하고 연결되는 그 왕가의 사람이야. 신성 로마제국은 그 로마교황청에 충성을 다하는 진짜 돈줄이었거든요. 그런데 그거를 만약 허락을 해주면 그쪽에서 반기를 들텐데 그거를 정치적으로 감당을 할 수가 없으니까 울며 겨자먹기로 니 결혼은 안됀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그다음에 수장령이라는 걸 발표해서 어 영국교회 머리는 이제부터 나다. 교황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선언을 해버려요. 그게 바로 영국 성공회의 태동 동기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성공회로 되고 저쪽은 이제 존 나스 때서부터 정치적으로 가변적이에요. 근데 이 아래는 안그래요. 딱 역사속에서 한번 개신교 국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크롬멜의 혁명이에요. 청교도 혁명이라는 거죠. 크롬멜이 혁명을 일으켜서 왕당파를 누르고 의회파가 승리를 해서 정권을 잡게 되죠. 그때에 이 사람이 존 오웬이 이제 여러 가지 경로를 거치면서 점점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26살 때 알미니안주의의 실상이라고 하는 아주 심오한 논문집을 하나 냅니다. 당시에 그 유럽을 위협하고 있었던 세 개의 이단적 사상이 있었는데 하나는 그 알미니안이즘, 인본주의에요. 그 다음에 소시니안주의 이거는 훨씬 더 과격한 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체계를 허무는 이단이였고 또 하나가 로마 카톨릭이었어요. 근데 그런 과정 속에서 이 사람이 있었는데 그 때에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게 되요. 크로멜은 굉장히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이 사람은 점점더 목회자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죠. 그때에 이제 크로멜이 이 사람을 설교하도록 부릅니다. 근데 한번 딱 설교를 듣고 존 오웬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이 그 말씀의 세계와 은혜, 그 다음에 영역과 그 인품에 감화를 받는 거예요. 그래서 만나 설교 한편 딱 듣자마자 이 존 오웬을 꽉 붙들고 놓칠않는 거예요. 날 좀 도와달라고. 그래서 요즘으로 말하자면은 국가의 목사같은 것을 제의를 받는 거야. 그러면서 이제 종군 목사로서 아일랜드를 비롯해서 따라가게 됩니다. 근데 거기서 크로멜과 14년동안 동역을 하면서 실제적으로 영국을 개혁하지 않으면 이 개혁신앙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영국을 개혁하는 일에 신명을 받치면서 14년 동안을 목사로서 흔들림없이 충성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 나중에 이 크로멜과 헤어지게 됩니다. 헤어지게 된 동기가 뭐냐 하면 올리버 크로멜이 처음에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의회파들이 복잡하게 뭘 그러냐. 이 크로멜이 왕처럼 됐으면 좋겠다. 왕이 되어 달라고 하는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렇게 됩니다. 왕과 같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에 되어서 모든 권한을 한손에 쥔 국가의 수장이 되는 것에 대해서 이제 받아들이게 될 때에 딱 끊습니다. 그리고 이제 올리버 크로멜하고 절연을 하고 그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제 그 존 오웬은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의 부총장직에서도 물러나게 되고 이제 말하자면 외로운 은퇴의 길을 걷게 되요. 이 분을 보면서 이분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 깊은 감동 시키는 것이 지성 말고도 그 또하나는 뭐냐 하면 깊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통찰이에요. 그래서 영적인 세계에 대한 탁원한 통찰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치 이분의 글들을 읽고 저작들을 접하면서 제가 깊이 깨달은게 뭐냐 하면 여태까지 그 내가 배운 기독교가 수박을 갖다주면서 야 애야 수박이다. 이거 한번 먹어봐라. 그리고 계속해서 혓바닥으로 핥다먹는 거를 가르쳐주었다면 이분은 감히 그 수박을 쪼개서 그 속에 있는 빨간 속살을 입에 넣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개념적인 진리들을 탁월하게 해석해서 우리에게 전해줄 때에 그때에 그 자체가 생명이 되고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는 것을 발견을 하게 되었어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올리버 크롬멜과의 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사람은 아주 고고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로서 추호의 흔들림이 없이 거의 그렇게 말하자면 거의 모든 시기하는 사람들이 시샘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권력자 옆에서 영국의 개혁을 도왔지만 그러나 그가 진리로부터 멀어진다고 생각 됐을 때에 감히 그에게 등을 돌리고 적이 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성경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볼 때 그 인품이 정말 나를 매료시켰어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모든 하나님의 종들 중에서 주님이 크게 쓰신 사람이 그러하듯이 이 존 오웬은 철저하게 고난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슬하에 자녀가 11명이었는데 그 11명이 모두 다 어려서 죽어요. 그 중에 딱 하나가 조금 더 사는데 그 아이도 스물 몇 살 쯤 되서 죽어버려요. 그리고 아내도 자기보다 8년인가 먼저 죽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가족들 모두가 어린 시절에 그리고 나이가 좀 들어서 마지막에는 노년에 자신도 남겨 놓고 아내마저도 사별하는 그거를 다 경험을 하고 그리고 이제 의회파가 지고 왕당파가 이기고 찰스 2세가 복위한 다음에 이제 청교도들에 대한 철저한 박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때에 2천명의 기라성같은 목사들이 강단을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그때에 박해받았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이 존 오웬이에요. 그 높은 지위를 누렸기 때문에 더 많은 박해를 받았고 결국은 오마일령이라고 하는 것 선포되어서 청교도 목사들은 정해 준 집에서 오마일 이상 못 나간다고 라고 하는 법이 생깁니다. 그리고 더더군다나 설교할 수 없는 법이 생깁니다. 그런데도 몰래 몰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합니다. 지하 교회에서. 그런 고난의 시절을 겪고 결국은 도저히 설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칩거한 가운데 거기에서 무게있는 저작들을 남기기 시작합니다. 평생을 저도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그분이 쓰신 글을 보면은 아 이렇게 수필 쓰듯이 줄줄줄 써내려간 글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지력이 동원되고 기억과 자료들이 동원되야되는 깊이 있는 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도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책이 있는데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라고 하는 그리스도 죽음 안에 있는 신자의 죽음의 종식이라고 하는 책인데 뭐 400페지 되는 책이에요. 그런데 그분이 너무 건강이 나쁘고 힘이 들어서 근데 그 당시에 토마스 무어를 비롯해서 보편속죄론자들이 생겨나게 되요. 보편 구속론자 이게 무슨 뜻이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못박히신 것이다. 그게 보편 속죄론이에요. 그러나 이제 개혁 신학의 교리는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래야지만 예수님이 구하려고 했는데 결국은 구원을 못 하셨다라고 하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이 안되는 거죠. 그게 제한 속죄론이라고 하는데 그 책 전체가 제한 속죄론이 왜 올바른 것이고 왜 보편 속죄론이 잘못된 것인가를 치열하게 논쟁한 최대의 작품인데 그 작품을 7년 동안 씁니다. 그래서 그가 너무 자기가 힘이 드니까 이런 작품이 너무 필요하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이런 작품을 누가 나타나서 써서 저 알미니안주의자들과 저 보편구속론자들의 성경을 어지럽히는 저 못된 망동들을 진리로 철퇴를 가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아무도 쓰는 사람이 없어서 그 400페이지 책 한권을 쓰는데 7년 동안을 매달렸어요. 그럴 정도로 피를 토하는 열정으로 어마어마한 저작들을 남긴 거예요. 그런데 그 깊이는 굉장한 깊이에요. 굉장한 깊이의 글들을 남기는 거죠. 그런 점에서 굉장히 고난의 시기를 걸어온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존 오웬의 생애 전체는 잠시 행복했던 때 였다고는 크로멜과 함께 이제 그 고난을 가지고 영국을 개혁하는 일에 헌신할 때에 잠깐 햇빛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도 수많은 반대자들의 모함과 질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고의 세월들을 모두 겪으면서 흔들리지 않는 고결함으로 생애를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존 오웬을 가리켜서 칼빈과 칼빈주의 사이에 있는 인물이다. 오웬에게 가장 심오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칼빈이었습니다. 근데 저는 칼빈보다 훨씬 심오하게 발전된 사상을 칼빈이 아니라 오히려 오웬에게서 발견을 합니다. 그래서 이 존 오웬은 그래서 칼빈과 칼빈주의 사이에 있는 인물이라고 불리우고 더 뛰어난 평은 종교개혁이래로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장 탁월한 지성과 영성으로 완벽하게 보여준 사람이다. 또 당시의 이단과 거짓 사상들이 출몰하던 때에 존 오웬은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최후의 신탁이었다. 신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참된 기독교 신앙이 뭐냐 이건 틀렸고 이게 맞다. 그럼 그게 최종적인 답이었다 이거에요. 무엇보다도 이사람의 저작 전체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적인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을 견지한 가운데 써내려 갔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요. 칼빈이 심은 나무가 칼빈이 이만한 나무를 갖다가 심었는데 오웬에게 와서 그 칼빈이 심은 나무가 거목이 되는 것을 느끼게 되요. 거목과 같은. 거기에 엄청난 진리들의 열매가 매달리게 되는 그럴 걸 가져오게 되죠. 특별히 오웬을 지배했던 전체적인 사상은 거룩에 대한 사상이에요. 그래서 이제 그의 저작 중에서 모든 저작들이 탁월하고 그리고 비할데 없죠. 그래서 오웬은 작품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저에게 어떤 불리한 점이 생겼나면은 우리 나라에도 이 청교도 작품들이 많이 번역이 됩니다. 그리고 지금 제 서재에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구할 수 있는 전 세계에 흩어진 현재까지 출간되고 있는 청교도의 책들을 거의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근데 그 청교도 저작들이 전에는 굉장히 사랑스러웠는데 오웬을 깊이 읽고 나고 심취하고 나니까 싱거워요. 그러니까 마치 그 깊게 우러난 진국 설렁탕을 먹다가 터미널 앞에서 싸구려 먹는 것같은 그 봉지에 넣어서 데워주는 그런거. 그런 거 먹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정도로 함량이 미달이라는 것이 느껴져요. 그러니까 굉장합니다. 그렇게 깊이 있게 써내려 갑니다. 근데 그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성화론입니다. 그 작품 모두가 다 엄청난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장중한 무게를 가진 작품이지만 이 사람의 작품을 보면서 놀라는 것이 그거 같에요. 이 6권, 7권이 특별히 죄의 문제를 다루고 성화에 대해 다루거든요, 거기에서 그 나오는 그 죄에 대한 가르침들은 진짜 그렇게 신학을 오래하면서 어디서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리고 그렇게 사람을 찌르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어요. 그래서 제임스 파커 교수도 마찬가지로 그 책을 사람들에게 읽으라고 권하면서 그러나 아플 것을 각오하고 읽어라. 막 찌를거다. 그러나 인간의 죄, 인간의 내면세계를 파헤치면서 그래서 그 사람은 theologian 하나님을 공부하는 신학자인 동시에 phychologian 인간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라고 불리웠어요.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똑같이 가장 종교개혁 이래로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풀어낸 사람이다. 그래서 죄에 대한 미세 분석에 들어가면은 거의 정말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세밀하게 분석을 해놨어요. 그런데 그렇게 미세하게 분석한 사람이니까 커다란 것에 대해서는 조금 둔할 것은 느낌이 들잖아요. 그런데 1권으로 올라가면은 1권, 1권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독론이고, 2권은 하나님과의 교제 commerce of God 그래서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가 나오고, 3권에서 이어지고 4권에서는 3권에서 성령론을 다루고 4권에서는 신앙론을 다루면서 그 신앙론 속에서는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다루고 5권에서 치이론을 다룹니다. 6권에서 성화론을 다루고 7권에서 성화론을 다루고 8권은 아마 설교집일 것입니다. 9권은 그가 죽은 이후에 나온 유고집들이고 10권에서 이제 그에 대뷰작이라고 할 수 있는 a this play of arminiusism 알미니안의 실상이라고 하는 논쟁적인 작품이 다루어지고 거기 Death of Death가 나오고 그 다음에 11권, 12권, 13권 쭉 그쪽에서 이제 아주 논쟁적인 작품들이 그쪽에서 교회 정치체제와 관련한 작품이라든지 뭐 이런 내용들이 계속에서 나옵니다. 근데 그 1권, 2권으로 올라가면 인제 6,7권에서는 미세하게 인간의 죄를 분석한 그 작품이 그 예리한 현미경같은 작품이었다고 한다면은 그 1권과 2권, 3권 작품으로 올라가면 찬란한 그 영광의 빛이 비치는 그런 작품이에요. 그래서 거기서는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그 신성의 충만한 그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장엄한 작품을 만나게 되요. 그래서 마치 1권을 읽노라면은 에드워드의 작품을 읽는 것같은 그런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그 구도, 펼친 구도가 굉장해요. 제가 요즘에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거를 8주에 걸쳐서 창세기 1장 1절을 설교하고 끝냈잖아요. 근데 그 맨처음에 모티브를 저는 존 오웬의 1권을 읽으면서 발견한 거예요. 그 1권에서 펼쳐나가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 창조속에 역사하셨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 묘사할때에 정말 이 온몸의 비늘이 거꾸로 일어서는 것 같은 그런 감동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갑자기 나의 이 구원이 이게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온 우주 속에 있는 그 하나의 피조물로써 모두 연결된 가운데 그 속에서 나를 하나 선택하시고 구원하셨고 이것은 결국은 필연적으로 나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 구속과 함께 관련이 있다라고 하는 우주론적인 구원론을 열어준 그 작품이 바로 1권이었어요. 그래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장엄한 인식과 인간에 대한 미세한 분석이 사실 만나기가 굉장히 어려운거거든요. 사실 칼빈 선생같은 분이 그런 얘기를 하죠.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이게 비례한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거를 아는 것 만큼 인간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된다 그런 얘기에요. 근데 그거를 완전한 조화를 이뤄요. 그런데 이런 강점이 어디서 나왔나면은 기억해 보세요. 이런 강점이 어디서 나왔냐면은 그 사람의 탁월한 지성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의 체험을 가지고 썼기 때문에 나온거예요. 학부에 그렇게 미친 듯이 공부를 했는데 이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학부를 졸업하고 20대 초반에 아주 중요한 영적인 변화를 경험해요. 그런데 자기 자신이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비참한 인간이라고 하는 율법에 의한 죄의 각성을 경험하게 되면서 석달 동안 먹을 수도 없고 잘수도 없고 사람과 이야기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마치 그 존 버년이 그 abounding grace 죄인 중 괴수에게 넘치는 그 은혜라고 하는 그 자전적 글 속에서 회심 전야에 경험했던 그 엄청난 죄에 각성에서의 경험과 같은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인제 그 존 오웬도 나중에 모든 청교도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그러했듯이 이 죄가 있고 죄에 대한 심오한 각성, 그 각성과 그 죄에 대한 혐오함, 그리고 나중에 그 말하자면 진정한 중생에 이르게 되요. 회심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소위 얘기하는 preparation 준비 preparationism 이라고 하는 한 사람의 회심에는 반드시 그 이전에 전 단계가 있다라고 하는 그 입장에 존 오웬이 서게 되는 거예요. 이게 나중에 18세기에 넘어오면서 조나단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이것이 문제, 중요한 고민거리가 됩니다. 이게 정말 그렇게 될 것이냐 그런 고민을 하게 되죠. 그러다가 1736년에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자신이 그런 preparationism이 옳다라고 하는 것을 조나단 에드워드가 부분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36년에 일어났던 그 부흥에서 1차 부흥에서 그런걸 보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이제 그 모든 광경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그것이 맞지만 또 한편으로서는 회심의 경험이 너무나 다양하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거요. 그래서 그것도 넘어가면 되는데 미국 상황하고 연결이 돼요. 이제 뭐 그 얘기까지 내가 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이 청교도의 구원에 관한 것을 깨닫게 돼요. 그래서 결국은 그의 성화론을 들여다보면은 자기 자신이 이 성화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지 않고는 성경에 이런 진리들을 찾을 수가 없어요. 찾을 수가 없더라고. 왜냐하면 제가 알기는 그 이전에 교부들이 남긴 작품 속에서도 그렇게 죄인의 심리를 묘사하고 죄가 인간 속에 들어와서 역사하는 지를 그렇게 상세하게 해부적으로 펼쳐논 글들이 그렇게 그 자주 대할 수 있는 글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제가 보기에는 최고의 작품입니다. 사도 바울이래로 그 인간의 죄에 대한 가장 그 해박한 연구를 들으라, 그것도 가장 성경적인 죄에 대한 연구를 들으라고 말한다면 난 단연 에드워드 아니 존 오웬의 작품을 꼽고 싶다 이거에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제임스 파커, 얼마전까지 미젠트칼리지에서 그 개혁신앙을 가르켰던 교수님이죠. 그분이 1945년도 그때 쯤에 옥스퍼드 대학의 학생이었습니다. 근데 지독한 영적인 침체에 걸리지요. 근데 여러 가지 교리적인 오해로 인해서 선교단체들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는데 이제 교리적인 오해로 인해서 막 영적인 깊은 혼돈 속에 있는데 선배들이 가르쳐주는대로 아무리 해도 이게 마음의 평안이 없고 죄가 정복이 안되는 거예요. 그때에 존 라일의 홀리리스 라고 하는 책을 읽고 거룩으로 번역이 됐습니다. 그 다음에 그리고 존 오웬의 6권, 7권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영적인 어두움에서 벗어나서 오늘날에 제임스 파커가 된 거예요. 근데 그 6권, 7권에서 다루는 내용이 성화거든요. 오늘 인제 중요한 주젠데. 그럼 이 성화 문제라는 것을 그러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이사람이 생각하는 특별한 차이가 있었냐. 사실 이 사람이 생각하는 거하고 우리 사이에 차이가 있었냐 질문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성화에 대한 교리들이 너무나 개혁주의적이 아니고 그리고 성경에 입각한 성화론이 아니고 또 성화 자체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성화 교리에 대해서 어떤 입장에 있다라고 말할 수가 없는거죠. 이 사람이 보는 것은 이런 거예요. 이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깊이 깨달은게 뭐냐 하면 너무나 많이 그리스도인의 현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현존에 대한 오해가 너무 컸다. 그래서 그 오해가 너무나 커서 결국은 그렇게 잘못된 인식 위에서는 무언가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을 세울 수 없었다 하는 것이 저의 결론이에요. 자 그럼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되는 거죠.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 분과 실제적인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거듭남과 함께 이 신자는 거듭남과 함께 중요한 일이 내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거죠. 예전에는 이 사람이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 속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영적인 어두움이 가득했었고 또 그 복음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하는지 복음교리에 대해서 무지했었어요. 그래서 지적인 눈멈과 영적인 어두움이 함께 이 사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이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이어서 선천적인 부패성을 물려받고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행할 수도 없고 영적으로 선한 계획을 따라서 살 능력도 없는 사람이 됐단 말이죠. 그런데 거듭나요. 인제 우리가 제가 생각할 때에 바르게 가르쳐지지 않는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이라 이거에요. 우린 예수 믿고 거듭나면은 지 멋대로 살면은 그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담뿍 받아서 결국은 천국가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데 이 오웬이 보는 성경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라 이거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을 때 일어나는 영혼의 거듭남은 엄청나게 혁명적인 일들을 우리 안에 해놓는 거죠. 우선 뭐냐 하면 우리를 그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해방되게 만들죠.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했던 강력한 적대감과 거리감들을 해소하고 화목을 누리게 하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실제적으로 죄가 우리를 모두 지배하고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었는데 거듭남을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던 죄와 사망의 법을 끊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심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영적 생명이에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얘기했던 생명과 성령의 법이 너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음이라 하였을 때에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지는 거죠. 근데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다음서부터 그 다음서부터 우리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이후에 거룩한 백성이 되게하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백성이 되게끔 우리를 성화시키시는데 그 성화는 하나님께서 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렇게 거듭나게 하시고 이 죄와 사망의 법들을 무너뜨려버리고 생명과 성령의 법을 우리 안에 새롭게 심으심으로써 이 심겨진 이 법을 통해서 성화를 이루어가신다 이거죠. 근데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연합의 교리에요. 오웬이 오웬만이 아니지만 오웬이 특별히 풍부하게 펼치고 있는 교리가 이 union 연합의 교리에요. 연합. 그는 이제 이 연합을 두 가지로 보는 거죠. 첫째는 원리적인 연합이에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의 자녀가 되고 거듭나는 그 순간 이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와 생명적으로 연합되는 거예요. 예전에는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는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이 되는 거예요. 이 연결을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자원이 공급되고 그 공급 되는 자원을 통해서 아직까지도 용서받았지만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이 죄의 부패성이 미치는 영향을 극복하고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리고 그 성화의 삶을 살아서 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회복하는 상태가 되는 거라 이거죠. 그런데 죄가 계속해서 실제적으로 방해를 하는 거예요. 근데 오늘날 우리들은 그 죄가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별로 인정하지 않으려하고 그리고 그게 그렇게 심각한 것이라고 생각을 안해요. 그러나 오웬은 그 점에 있어서 한마디로 깨끗하게 정리를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 들어간 새 언약 관계라고 하는 것은 결코 저절로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그런 보증이 새 언약 안에 없다. 그래서 여기서 성화의 교리가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그 성화의 교리가 뭐냐 하면 우리 안에 생명과 성령의 법을 심으시는데 우리가 복음의 원리를 따라서 은혜 생활을 잘하면 이 생명과 성령의 법이 강력해져서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거죠. 죄를 죽이고 은혜는 다시 살려지는 살아나게 된다. 결론적으로도 여러분 속에 은혜가 충만한 때가 있는가 하면 은혜가 사라지는 때가 있잖아요. 은혜가 사라지는 때는 죄가 융성하게 살아나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구해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남아있는 잔존하는 죄, in during sin 이라고 하는 그 오웬의 저작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이 in during sin을 내놓게 되는데 이 작품은 가히 충격적이에요. 만약에 이 작품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번씩 읽고 그 뜻을 이해하게 된다라고 하면은 백년동안 노력을 해도 오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 같에요. 정말이에요. 어마어마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요. 근데 그런 그 작품들을 써내려 가는데 이제 그 그렇게 해서 이 그 성화의 원리가 그렇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죄가 아직 남아있다 이거죠. 모두 파괴되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는 남아있다 이거죠. 그러나 그 죄가 거의 죽을 수도 있고 그러나 완전히 죽을 수는 없어요. 남아있다 이거죠. 거의 죽은 상태가 그걸 모티파이드된 상태라, 죄죽임의 상태라고 말하는데 그런거를 고백했던 때가 언제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이런 고백을 할 때가 사도바울이 개인적으로 완전히 모티파이드된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고백이라고 하는 거예요. 반대로 이 죄가 극성을 부려서 이 영혼 안에서 죄가 기승을 부리는 때가 있다 이거에요. 그것이 이제 사도바울의 경험에 의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도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법에서 건져내리요 라고 하는 그런 입장이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요즘에도 보면 그런 것들이 절대로 구원받은 신자의 경험일 수가 없고 구원받지 않은 신자의 말하자면 거듭나기 직전의 죄에 각성에 대한 그 경험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종종 있거든요. 근데 이제 칼빈이나 오웬은 전혀 입장이 달라요. 최근에도 어느 신문에서 그걸 비판하는 것을 봤는데 잘 모르는 거예요.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신자의 경험이에요. 그래서 그 신자가 죄에 져서 그렇게 처참하게 죄가 융성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돼요. 그래서 이 연합은 두 가지인데 원리적으로는 그렇게 연합이 되게 되는데 그 다음에 원리적인 연합은 끊어지는 법이 없어요. 약화되는 법도 없구. 그런데 실제적인 연합이 문제에요. 실제적인 연합은 뭐냐 하면 우리가 죄를 많이 죽이고 하나님을 깊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의 정도에 따라서 실제적인 연합이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한다 이거죠. 그래서 여러분들도 은혜 생활 잘하고 충만하게 믿음 생활 할 때에는 예수님이 항상 내 안에 계신 것 같애. 걱정할 것이 없어. 주님이 나만 사랑해주시는 것 같고, 주님이 나와 동행해주시는 걸 느꼈어요. 그러나 죄 가운데 빠지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여러분들은 점점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예수님이 왜 나만 미워하시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로부터 멀어지게 돼요. 그런걸 이미 벌써 다 펼쳐서 정리를 해놓은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그 은혜 언약,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와 맺은 그 새 언약이 새 언약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거기서 핵심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이거죠. 그 연합이 원리적으로는 이미 이루어지고 누구도 그건 부인할 수 없는데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성화가 안돼다 이거죠. 그래서 그 이외에 필요한 것이 실제적인 연합이라 이거죠. 그러나 이 실제적인 연합은 가변적이에요. 그래서 부지런히 기도생활 잘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한 기도생활과 그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 헌신적인 간구의 생활을 통해서 이 마음의 틀들이 죄는 거하기에 부적합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거하기에 적합한 틀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the frame of heart 라고 하는 마음의 틀이라고 하는 이것이 사실은 그 후에 조나단 에드워드에게 의해서도 많이 사용화 됩니다. 이게 결국은 마음 속에 있는 경향성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이에요. 그런 마음의 틀 안에서 계속해서 이제 이것이 역사하는 거예요. 그런 경향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죠. 신자 안에 죄가 완전히 박멸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우리가 갈 때까지는 불가능하다 이거죠. 남아있다 이거에요. 그러나 그 죄가 문제가 안된다 이거에요. 왜그러냐하면 하나님이 그 죄를 이기고 은혜 안에서 살 수 있는 놀라운 수단과 그 놀라운 천국의 보고들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라 이거죠. 근데 오늘날 있는 많은 영적인 침체와 신앙의 방탕함과 타락, 그 죄를 이기지 못하는 무력한 그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오웬에 의하면 그 죄를 죽이지 않는 그 무능력한 삶에서 오는 거라 이거죠. 결국은 죄를 죽이지 않는 거예요. 근데 그 죄 자체의 정체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에요. 실제적으로 이야기하면 창조적으로 살지 않으려는 인간의 완고함과 고집이에요. 그래서 자신을 이 온 우주의 중심에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 온 우주의 최고의 가치가 자기의 행복과 만족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살아가는 모든 삶은 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에요. 그 그런 적대감이 죄의 정체에요. 근데 그 죄가 그냥 역사하는게 아니라 반감을 가지고 opposition 대적하면서 역사하는 거예요. 그 죄가 크든지 작든지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대적이에요. 하나님에 대해서 반감을 품고그분에게 칼을 겨누는 대적이에요. 근데 이것을 동시에 가진채 어떻게 영적으로 충만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삶을 살 수 있느냐 이거에요. 그래서 어리석게도 주님은 많은 위로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에게는 뭐 커다란 하나님의 자비가 있고 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다 그랬고 그렇게 얘기하지만 입으로만 나올 뿐이지 자신의 영혼은 그것을 느낄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교회와서 위로나 받으려고 하고 그래서 마치 요리집에 가서 그 요리 주문하듯이 내마음에 맞는 설교나 들으려고 하고 사교생활하듯이 교회 와가지고 친구들이나 만나서 그저 점심이나 먹고 차나 마시고 말이지, 심하면 고스톱이나 치고 말이지, 노래방이나 다니고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은 골프나 같이 치러다니고, 이렇게 하면서 사교 클럽화 되어가고 있는 그런 상황은 도대체 뭐냐 이거에요. 그런 속에서 뭘 찾아 볼 수 있겠어요? 결국은 하나님도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영광 받으실 수 없고 그 사람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행복해 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존 오웬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느냐?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와야 된다. 그 창조의 원래의 목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 자체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신성의 영광을 바깥으로 계속 드러내고 싶어 하셨는데 그것이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이 뭐냐 하면 천지 창조로 나타나요. 그래서 이 창조된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무한한 간격이 있지만 그러나 그 만들어 놓은 창조된 사물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그 속에 깃들게 하신 거죠. 여기 꽃이 있지만 이 꽃은 꽃꽂이 한 사람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건 사람이고 이건 식물이 뿐이에요. 그렇지만 이걸 보면서 이 꽃꽃이 한 사람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우리 이해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에요. 그중에 하나가 인간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이 자기를 원래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그 자리에서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특별히 만들어 놓은 모든 피조물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도록 관리할 사명을 부여 받았으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정해 놓으신 자리에요. 그런데 거기를 죄로 말미암아 이탈했어요. 그래서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구속해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은 완전히 일치하는 거죠.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이 속에서 죄가 아직까지도 역사하는 거예요. 바깥의 죄가 있고.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여기로부터 육신으로부터 해방되기까지는 계속 남아있는 고민이에요. 그것들을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갔고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안 돌아간 거예요. 그래서 자기 안에 남아있는 죄를 끊임없이 죽임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이 창조의 목적에 점점 부합한 사람이 되어가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사람이 되어가고 그렇게 부합한 사람이 되어가면 되어 갈수록 이 세상에 창조의 목적을 이탈한 모든 피조물과 사람들이 보이면서 어떻게 섬겨서 그들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게 할것인가 하는 고민을 갖게 된다라는 것, 이게 바로 선행이에요. 이게 바로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삶이라 이거죠.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은 기업을 해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구제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쓰지 않고 선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오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순교하고 죽어가는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이 땅에 남아서 학문을 하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목회를 하고 어떤 사람은 와서 그 목회자를 도우면서 영혼의 구령을 위해서 애쓰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라 이거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속에 남아있는 죄에요. 근데 그 죄는 그렇게 하나님이 죄를 죽일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들을 주신 거죠. 기도와 말씀과 성례와 이런 은혜를 통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주어진 그 은혜 가운데 생활하게 될 때에 그때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나냐 하면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이 되는 거예요.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닮은 그 영적 성품이에요. 특성이에요. 그것들이 죄로 말미암아 모두 뭉게져 버리는 거죠. 파괴되어 버리는 거죠. 그래서 그 하나님의 형상이 가지고 있는 영적 작용들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고 다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능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타락해 버린 것이 인간의 형편이라는 거죠. 그래서 외부로부터 오는 도움이 아니면은 도저히 그렇게 하나님과 형상에서 파괴되어버린 그 인간의 위치를 개선할 수가 없는거죠. 근데 그 거듭나고 나면 그런 것들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시는 거죠. 근데 아직까지는 죄로 말미암아 그 형상이 완전히 깨끗해진 것이 아니에요. 그거를 깨끗가게 해 가는 과정이 성화라 이거죠. 그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이 잔존하고 있는 죄로부터 씻겨져 나가고 하나님의 형상은 더 찬란하게 빛나고 그래서 결국은 피조물로서 인간이 본연의 창조시에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된다라고 하는 거예요. 죄를 죽이는 것 만큼. 이 과정 전체를 가르켜서 거룩에 과정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자의 참된 가치는 그 신앙을 빙자해서 복을 많이 받고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고 그러는게 아니라 이거에요. 그게 아니라 이 신자의 참된 인생의 가치는 거룩이에요. 왜 거룩이냐 하면 그렇게 거룩해지므로 말미암아 창조될 당시의 본연의 자기로 그 만큼 돌아가게 되고 그 만큼 돌아가게 될 때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증진되고 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창조 세계 속에 비추었던 하나님의 창조의 찬란한 영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창조 시에 모든 피조물들이 영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는 거예요. 이거를 communication 이라고 그러는데 많은 책에서 이것을 의사소통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전혀 다른 거예요. 의사소통이 아니라 그냥 communication 이에요. 그래서 말하자면 영적인 은사가 교회 속에서 굥유되는 것처럼 모두 함께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단 말이에요. 근데 인간이 그 매인 스위치야. 죄를 지으니까 그걸 타고 죄가 흘러들어 가는 거예요. 그래서 창조 세계가 갑자기 그 영광을 잃어버리고 캄캄한 암흑 천지가 되고 그리고 함께 연합하면서 조화를 이루던 피조물들이 투쟁과 그 다음에 생존의 치열한 그 경쟁 속에서 그렇게 무참한 질서로 무참하게 질서가 깨뜨려져 버린 거죠. 그런데 그거를 돌아가게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 성화다 이거죠. 이것을 통해서 먼저 부분적으로 교회가 이 연합을 다시 회복해서 주님의 찬란한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죠.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존 오웬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자 개인의 이 거룩한 삶을 위한 성화의 진전이야 말로 구원받은 신자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는 거죠. 유일한 길. 그 성화 속에 반드시 그 속에 반드시 이 그 자기 자신이 거룩해져가고 그 다음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피조물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섬기는 그 일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 내적인 연합을 곤고히 해서 거기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보는 거죠. 그러니까 그 열심히 기도해서 돈이나 많이 벌고 응답받아서 부자가 되서 그렇게 살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세상 사랑하는 삶을 십일조로 하나님의 마음이나 달래려고 하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이냐하는 것이 결국은 눈에 가리워진 채 보이지가 않는 거죠.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이 성화가 가장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게 돼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성화를 위해서는 말이죠 끊임없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건데 이걸 방해하는 것은 오직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죄에요. 그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죄를 어떻게 처치하고 죽이는 지를 배우고 그것을 실제적으로 실천해감으로서 빠른 속도로 거룩해져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하지 않으면 아주 강력한 회심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온몸을 던졌던 사람들임데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이 죄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늘 하는 이야기가 짐승처럼 세상을 즐기며 막 살기에는 인생 80이 짧고 그리고 신자답게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게 너무 길어요. 어쨌든 하튼 1년 살다 죽는 것 같으면 이를 악물고 살아서 골인하고 끝내겠는데 금년에는 잘 살았는데 내년에는 마음을 못 지키는 거예요. 그죠? 여러분 주위에서 봐요, 3년 전에 은혜 받아서 봄날이던 사람들이 오늘 어때요? 엄동설한이야. 겨울이야. 아 일년 전에 불 받았다고 펄펄 뛰고 교회 봉사하던 사람이 요즘 보이지도 않아. 그러니까 어때? 막 불 받았을 때 싹 죽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면 회개하고 정결하게 살다가 싹 데려가시잖아요. 그러니까 인생 너무 길다 이거죠. 그러니까 금방 죽을 인생이 아니니까 지금부터 빨리 성화의 교리를 배워요. 우스울 것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 구워 놓으시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시고 그 사랑을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못쓴다 그랬는데 그렇게 고백했잖아요? 그렇게 고백했는데 그렇게 고백한 여러분들이 살아가는게 하나님 마음에 계속 고통이야. “나는 이 세상에 너희가 나 보고 마음에 고통이 뭐냐 하고 니가 묻는 다면 난 니까 이 땅에 살아있는게 난 제일 고통이야.” 웃을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결국은 구원 받은 이후로 단 한번도 정말 “내가 너를 창조해서 거기에 두었는데 죄로 말미암아 그 계획들이 깨뜨려졌지만 니가 구원받고 다시 그 목적이 이루어졌구나. 야, 난 너 너무 좋다. 나는 니가 이 세상에 거기에서 나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내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좋다.” 성경에 보면 그런 사람도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 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을 주시는 거예요. 동행하게 하시는 거예요. 다윗과 같은 사람, 모세와 같은 사람, 바울과 같은 사람,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 동행해 주시는 거죠. 인제 이런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근데 이제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이제 회복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철저하게 죄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냐 하면 여기 팜프렛에 보면 나옵니다만은 그 성화의 작용에 관해서 존 오웬이 명언을 하나 남깁니다. 그게 뭐냐 하면 He, 여기에서 he는 spirit, 성령님이에요. He works in us and with us not against us and without us. 성령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시는데 그거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것이지 우리를 거스려서 우리 바깥에서 역사하시지는 않는다 이거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대두되는 중요한 화두가 뭐냐 하면 순종이에요. 그러니까 순종하는 삶이 없이는 죄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이거죠. 근데 그 순종이 어떤 거냐 하면 그 모든 삶에 모든 범위에 있어서 총체적인 순종이에요. 그렇지 않고 만약에 자기가 연약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거는 내 뜻대로 그냥 불순종하면서 살 수 밖에 없고 딴거는 내가 순종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죄가 한 가지 불순종하는 그 통로를 통해서 모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총체적인 순종이 필요해요. 마음에 죄로부터 시작을 해서 실제 생활의 모든 죄에까지 총체적으로 모든 삶의 방면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야 되겠다. 물론 실제적으로 순종을 못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순종을 해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사는 것만이 죄를 죽이는 실제적인 비결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죄를 죽이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세가 뭐냐 하면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이 요구된다 이거에요.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이 요구된다라고 하는 그래서 오웬의 탁월한 작품 가운데 하나가 spiritual mind did needs 라고 하는 작품이에요. 사실 영적 사고 방식이라는 걸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사실 사고 방식은 아니고 제대로 번역을 하자면 신령한 쪽으로 마음이, 아니 신령한 쪽으로 생각되기 그런 의미에요. 신령한 쪽으로, 뭘 생각하더라도 신령한 쪽으로 생각이 되기, 그러니까 수통태에요. mind did에요 신령한 쪽으로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신령한 쪽으로 생각이 계속 되야 된다라고 하는. 그래서 인제 어떻게 하냐 하면 모든 것을 신령한 쪽으로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되냐 하면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들을 거치면서 그것은 그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입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그 하나님을 느끼면서 교통 속에서 살아가는 걸 이것을 오웬이 보기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영적인 최종적 특성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어때요? 주일날 와서 그 예배 드리면서 은혜를 받아. 받았다고 쳐요. 받고 그리고 뭐 눈물도 조금 흘리다가 말아요. 그 눈물도 좀 흘리고 은혜도 받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눈물도 흘리고 은혜를 받았는데 그리고 나서 간 다음에 그 다음 날은 뭐 때문에 울었는지도 모른는 거예요. 그리고 또 미친 듯이 덜덜 거리며 이 세상에서 사는 거예요. 직장 다니고 밥 해먹고 시장가고 빨래하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다니는 거예요. 그러다가 토요일 되면 아차 내일 주일이구나. 그리고 또 오는 거예요. 그리고 또 눈물 흘리고 가. 근데 그렇게 돼서는 변화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게 그 성실하지가 않아. 일체의 부지런함이 없어. 그래서 삶의 모든 순간에 수시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리고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 그리고 지금 내가 이러한 생각을 가슴에 품는 것이 성령께서 슬퍼하시는 생각은 아닌가,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반문을 하면서 그때 그때 죄를 죽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그런 삶이 될 때에 비로소 우리 안에 죄가 효율적으로 죽게된다 라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 죄가 죽게 될 수록 저절로 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도록 부여되는 실제적인 은혜들은 풍성해진다 라고 하는 거죠. 은혜, 주관적인 의미에서 은혜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도 은혜지만 오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 의지하며 살게 하는 실제적인 은혜 이런 은혜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은혜가 충만하면 영혼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되잖아요. 그런 은혜가 죄를 죽이는 것만큼 이 속에서 계속 일어나서 역사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은 숨길 수 없는 우리 영혼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현상들이에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음 속에서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과 진실한 변화를 통해서 자기가 변화되고 그래서 그 자신의 영혼의 변화가 자기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고 삶을 고치는데 까지 나아가므로서 자기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라고 하는 이 사실을 이게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사실이라고. 그러니까 주일날 와서 예배드리고 하나님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또 주일날 와서 생각하고 또 생각도 않하고 그렇게 하면서 종교적인 그 습관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벌써 그 죄가 그 사람을 지배하는 삶이다 이거죠. 이런 것들을 죄와 은혜의 지배라고 하는 교리 속에서 철저하게 파헤치는 거예요. 그러면서 결국은 이렇게 해서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죄죽임이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거예요. 이런 사실을 이미 벌써 그 전에 이 오웬에게 영향을 끼쳤던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진술을 합니다. 우리의 최대의 적은 공중에 있는 마귀나 이 세상이 아니다. 우리의 최대의 적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다 이거죠. 그러면서 이 성화를 이끌어 나가는 거죠. 저는 이거를 공부하면서 존 오웬을 만나고 그분의 멘토링을 거의 십년을 넘는 세월을 받아오면서 내가 느끼는 건 뭐냐 하면 그 동안에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목회자들이 너무 그릇된 가치관 위에서 교회를 이끌어 왔구나 하는 자각이에요. 그래서 교회의 영광은 큰 빌딩을 소유하거나 수많은 형식적인 신자들이 교회를 드나들고 담임 목사가 신문에 매일 나면서 유명해지는 그런 것들이 교회의 가치가 아니에요. 교회의 진정한 가치는 몇 명을 하나님이 보내주시든지 간에 힘다하도록 피 토하도록 그들을 진실되게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참된 신자의 모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 목회자와 먼저 믿은 사람들이 보여주고 그래서 그 한사람, 한사람을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고 거듭난 그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속에 일어나는 죄를 이기고 죄를 죽이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갈 수 있는가 그것을 가르쳐주고 보여주어서 한 사람이라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세우고 그렇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서 그들에게 가르쳐주고 그것을 경계하게 하고 하는 그것이 바로 목회고 그것이 바로 진실한 목회 사역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의 참된 영광이 교회의 규모나 세상의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목회하고 있는 이 교회 모든 관심이 어떻게 한 명이라도 진실되게 회심하고 회심한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그리고 많은 물질을 써서라도 그에게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고 모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렇게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지 않으려고 하는 죄의 경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복하고 때로는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오게 하는 그것이 바로 목회의 영광이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거죠. 그래서 여러분들 보기에는 열린교회 뭐 교회당 하나 이상하게 미국식 비슷하게 지어났구만 그럴지 모르지만 사실은 미국 보고 이거 지은 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생겨서 할 수 없이 이렇게 세운거지. 무슨 뭐 미국을 많이 갔다와서 뭐에요? 근데 이렇게 평범해 보이지만 저는 하튼 끊임없이 고민했어요. 만약에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목회를 하실까? 그건 너무 멀어. 너무 멀어. 이천년 전에 예수님, 그리고 사실 예수님 시대에는 뭐 그 컴퓨터도 없었고 말이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한 교회당에서 신앙생활 하지도 않았어요. 존 오웬에게로 건너가서 만약에 내 스승 존 오웬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했을거는 하고 싶고 않했을 것은 안하고 싶은 학습자 마음으로 이렇게 십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살아왔어요. 가끔 함께 신앙 생활을 하고 하는 지체들도 목사님 이건 왜 이래요? 이거는 왜 이래요? 그러는데 시간을 내놓고 이야기를 하자면은 한없이 많아요. 그러나 생각없이 지나치는 것은 거의 없을 정도로 고민을 합니다. 그래서 교역자도 많이 세우고 공간도 필요해서 공간도 만들고 그 있는 마지막 목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이 속에서 편안한 교회 생활을 enjoy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이거죠. 진짜 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회심하고 창조의 목적으로 구속을 통해 돌아가고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끊임없이 죽여서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닮기까지 거룩해져 가고 죄 많은 이 세상에 살면서 죄 많은 세상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자신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내게 주신 지혜, 내게 주신 지식, 내게 주신 재물, 내게 주신 시간, 내게 주신 인생의 모든 기회들을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 피조물들을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해서 주님이 바라보실 때에 정말 내가 구속한 백성들이 이땅에 거하는 것이 아름답구나. 이렇게 느끼실 수 있게끔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만들고 싶어요.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말이지 될 것같지 않아. 도대체 말이지 못돼 먹고 말이지 맨날 죄만 짓고 말이지 거스리고 그래요. 그래도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오랫동안 기다리셨다. 지금은 저렇게 철없어서 까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히면 오늘날 자기가 지은 죄를 다 회개하고 아마 더 많이 슬퍼하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다려주고 어떤 사람은 교훈하고 어떤 사람은 책망하고 말로해서 안되는 사람은 글로 써서 보여주고 글로 써서 안 읽는 사람은 귀에 꽂아서 들려주고 귀에 꽃아서 못 알아 듣는 사람은 영상으로 보여주고 영상으로 보여도 얘기 안 되는 사람은 찾아가서 가르쳐주고 찾아가서 안돼는 사람은 불러서 가르쳐주고 앉혀서 안돼는 사람은 눕혀놓고 가르쳐주고 이렇게 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정말 그래서 이러한 시대에는 마치 존 오웬의 때와 같이 거짓이 난무하고 그리고 부도덕과 타락이 가득한 시대 이 때에 우리에게 정말 그리스도 밖에 모르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붙들고 살고 죽는 신앙 그런 신앙 속에서 우리들이 자라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면서 여러분들에게 오웬을 잠깐 소개시켜 드렸을 뿐이에요. 여러분들이 더 많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속에서 자라가시길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 인터넷을 통해 들었던 장중해 보이는 설교의 시리즈들은 대부분 그분의 것을 그대로 베껴왔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먼저 그분의 그분을 통해서 펼쳐진 진리의 세계 속에서 깊이 사로잡혀서 저의 영혼의 변화를 경험했던 말씀이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모유를 아이에게 공급한 것처럼 그렇게 쏟아내는 설교였어요. 아마 여러분들은 그 설교를 꺼내놓고 오웬의 저작을 찾아가 보면은 이 설교가 이 작품 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기화된 새로운 설교가 17세기를 뛰어넘어서 18, 19, 20, 21세기로 건너왔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정직하게 고백을 하고 싶습니다. 그분이 저의 영적인 자양분이었고 저의 지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성경을 알았고 그분을 통해서 지금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가 하얗게되서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결코 그분이 한 이야기를 나 혼자 한 것처럼 떠벌리거나 부정직하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존 파이퍼가 조나단 에드워드를 소개하면서 자신은 에드워드와 여러분 사이에 있는 이류 내지 삼류 교사 밖에 되지 않는다고 고백한 것처럼 저는 영원히 여러분들의 최종적인 스승이 아니라 존 오웬과 여러분들 사이에 있는 이류, 삼류 아니 사류 정도의 교사 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려도 저에게는 한없는 영광이고 존 오웬에게는 한없는 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지 간에 마음에 간절한 소원은 그분을 통해 만나 그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여러분들도 만나고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에게도 일생의 목표가 저와 똑같이 진실한 신자가 됨으로써 참 인간이 되고 참 인간이 됨으로써 창조의 원래의 목적에 부합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