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적 헌신과 개별적 충성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Ⅰ. 본문 해설
로마서 12장부터는 이제 구체적으로 전반부에 펼쳐졌던 교리들을 토대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며 살아가야 할지 구체적인 실천과 적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특별히 12장은 우리들이 알다시피 너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유명한 영적예배에 대한 권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12장부터 뒤에 나오는 구체적인 삶의 교훈들과 11장 마지막에 나오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니라. 영광이 세세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찬송과 그 사이에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죠. 위대한 교리를 앞에 두고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는 12장에 앞부분에 영적예배가 고리가 되고 그 뒷부분에는 구체적인 삶의 내용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A. 거룩한 산제사로 바침
우리는 여기에서 포괄적인 헌신과 개별적인 충성사이에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오늘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거룩한 산제사로 바쳐진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들을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사도가 여기에서 “너희 몸을” 이라고 하는 부분을 한번 유의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사도는 굳이 그런 위대한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한 후에 하필이면 그냥 너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산제사라고 하면서 마치 영혼을 제외해 놓은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서신서 전체에서 신약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인간론을 제시합니다. 인간론은 영혼과 육체가 합쳐진 그런 통합적인 존재로서의 인간관이에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항상 우리의 영혼과 몸 이 두 가지의 균형을 항상 유지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아주 신비해서 처음 만들어질 때도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고 그것으로 육체를 삼으셔서 영혼을 창조하셔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죠. 그래서 영혼으로는 하나님과 관계하고 또 육체로는 이 세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영혼을 통해 또 다른 영혼과 영이신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통하고 육체로는 인간과 그 밖에 이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많은 인간과 사물과 더불어 관련을 맺는 것이죠. 이렇게 통합적인 존재로 봐야지만 이게 진정한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어서 그래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가운데 우리가 낙원에 있게 될 그때에도 그것은 완전한 구원을 이룬 인간의 존재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직 육신을 입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부활과 함께 이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렇듯 균형 잡힌 것이 사도바울의 인간관이었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서 굳이 주님 앞에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하면서 너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는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특이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영적인 예배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까? 영혼을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서 영적예배가 되는 것이지 몸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것을 우리의 영적예배니라고 하시는 것은 성경 전체가 가지고 있는 일관성과 어긋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몸은 성전에 나오는데 그래서 성전 뜰만 밟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규탄하고 책망하시는가 하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는 아예 그렇게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시면서 누군가 나타나서 하나님 대신 성전의 문을 닫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그렇게 영적인 면에 치중하셨는데 오늘 여기에서는 거꾸로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영적인 예배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즉, 바울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영혼과 육체를 아우르는 통합적인 인간관에서 변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영적인 예배는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까지도 모두 아울러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헌신을 동반하는 것이 참된 영적인 예배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B. 개별적 충성이 요구됨
그러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새삼스럽게 너희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강조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개별적인 충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보여주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느 순간에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그리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한다든지, 또 처음 회심이 아니라 믿음 생활을 해나가다 어느 때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거나 혹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님 향한 사랑으로 우리의 심령이 가득히 뜨거워지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거기에 안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거의 일방적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열렬히 기도한다고해서 기도 그 자체에 우리를 감동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다른 우상들에게 비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회개의 역사와 자기 신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생겨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간구하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기는 했지만 그 자체 안에 우리에게 뜨거운 사랑의 정동을 불러일으키고 주님을 향한 은혜의 효과를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라 이런 말씀이죠. 올바르고 경건하고 열심히 잘 사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그렇지 못해도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공로와 상관없이 이런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지극히 작은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불현듯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많은 예배의 경험들, 기도의 경험들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지만 우리들이 그렇게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가지고 실제적인 삶 속에서 주님을 올바르게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은 더더욱 쉬운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감동은 우리로 하여금 포괄적으로 우리 자신을 전부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많은 은혜를 받고 강력한 회심을 경험하면 이제는 추호도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각오와 결심이 생기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포괄적인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헌신의 각오는 어느 정도는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적용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렇게 주님 앞에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이 후의 삶이 저절로 훌륭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맨 처음 주님을 섬기겠다고 섬김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처음에는 강력하고 아주 커다란 감동을 가지고 들어왔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감동을 상실하고 하나님 앞에 잘 섬기는 길에서 이탈하는 게으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를 통해서 포괄적인 헌신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개별적으로 개개인의 삶속에서 개별적인 하나하나의 섬김 속에서 충성스럽게 살 것이 요구가 된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키에르 케고르 라는 사람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어요. “인류라는 추상명사를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이죠.
우리가 어느 순간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때에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습니다. 죽는 데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어디든지 저를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토해놓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또 그렇게 토해 놓을 때에 그 말이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진심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쉽지만 실제의 삶속에서 매일매일 개별적인 일들로 주님을 섬길 때에는 항상 그렇게 뜨거운 은혜가 언제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 하나님 앞에 헌신할 때에는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고난을 당한 것에 깊이 감격하면서 주님이 나를 위해 이렇게 많이 희생하고 죽으셨는데 이제 내가 무엇이 주님을 위해 아깝겠는가? 그래서 주일학교도 하고 뭐 성가대원도 하고 또 주차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겠다고 헌신을 하고 식당에서 주방봉사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섬기는 것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오나 눈이오나 계속 됩니다. 가장 좋은 거야 열렬하고 뜨거운 은혜 생활을 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처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그 첫 마음의 감동이 언제나 살아 역사해서 그 자리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고 그 자리에서 섬기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자리라는 그런 감격이 있으면 최고죠. 그런데 누가 변함없이 그런 삶을 매일매일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종자자체가 그 속에 교만함이 있고 부패함이 있어서 그래서 처음에 그 마음이 쉽게 식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만물의 모든 부패하는 것보다도 쉽게 상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누가 매일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스럽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 속에 강하게 역사하고 언제나 살아있는 감격으로 주 앞에 충성하는 것은 백점이고 자신이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 뜨거울 때는 뜨거우니까 당연히 하나님 앞에 감격적으로 헌신하고 때로는 염려와 근심, 섬기는데서 오는 갈등과 어려움, 그리고 우리는 진공에서 나 혼자 이 일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짊어진 수많은 멍에들이 있고 그리고 수많은 짐들을 짊어지고 주님을 섬깁니다.
(예화)우리 교회 오셔서도 두 번이나 설교하고 돌아가신 한국의 유명한 구약학 학자이고 존경받는 스승이었던 김희봉 목사님이 수업시간마다 당신이 몸소 학생들을 위해 기도해주셨어요. 그때마다 3년 동안 한 번도 빼놓은 적이 없이 들은 기도의 내용이 바로 이것이에요. “우리 학생들이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학교를 들어왔는데 후고의 염려가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달라.” 무슨 뜻이냐면 후고라는 것은 뒤를 자꾸 돌아본다는 뜻입니다. 신학 공부를 해야겠는데 가정에 자꾸 분란이 생기고 애가 아프고 아내가 병이 들고 아내만이에요, 아내 집안에 있는 사람 누구 하나가 죽을 병이 들어도 그게 전부다 가정의 평화를 흔들어 놓잖아요. 그러니까 연결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닌 거예요. 그런 것들로 인해서 뒤를 자꾸 돌아봐야 되는 어려움이 없이 공부에 전념하게 해달라는 거죠.
재정적으로나 건강에 있어서나 모든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진공에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섬기면서 나갈 때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이 우리 안팎에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요. 또 백번 양보해서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지극히 평안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쉽게 요동치기 때문에 환경의 변화가 없어도 우리의 마음이 요동이 쳐서 혹은 작은 환경의 변화가 일어난 다음에 마음이 더 크게 출렁거려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게 되는 적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섬긴다고 하면서 그것은 너무 부끄러운 것이죠. 일 년을 섬겼어도 정말 근심과 염려로 껍데기만 섬긴 시간을 빼고 또 근심과 염려는 없는데 내 마음이 미끄러져서 다른데 팔리고 유혹을 느껴서 마음을 온전히 실어서 섬기지 못한 것 빼고 양쪽 다는 아닌데 육신적으로 너무 약해서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것 빼고 또 육신은 건강했는데 영혼이 맑지 못해서 열매가 없는 것 빼고 열심히 섬겼지만 마음 중심이 바쳐지지 못한 것 빼고 이렇게 빼고 나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심 직한 향기로운 제물로서 주님을 섬긴 시간은 얼마나 짧은지 알 수 없습니다. 요번에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면서 이렇게 바쁘게 살긴 살았는데 저는 정말 게으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이렇게 순결하고 깨끗한 헌신으로서 그렇게 하나님의 보기에 최상급의 열매처럼 그렇게 섬겨드린 시간이 얼마나 됐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총체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은혜의 체험과 함께 우리들이 막연히 주님을 위해 충성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예배 끝나고 눈뜨고 돌아가는 순간부터 우리는 수 없는 하나님의 섬김을 대면하게 되요. 그것에 있어서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서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게으르고 충성스럽지 못하게 산 다음에 ‘은혜가 없었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부모들이 여러분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돌보실 때에 항상 여러분들이 사랑스럽고 엄마로서 밥해주고 빨래하고 기저귀 빨고 운동화 닦아주고 먹여 살리고 교육시키기 위해서 돈 벌러 나가는 그 길이 날마다 룰루랄라 하는 길이였겠습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어떤 때는 자식 기른 보람을 느끼면서 감격하며 그 일을 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근심과 염려와 걱정에 휩싸여서 돈 벌러 나가는 그 길, 여러분들을 돌보는 그 노동을 감당하기 어렵게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헌신했기 때문에 감정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산거예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주님을 향한 충성도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에요. 교회에서 일을 시켜보면 재능도 있고 굉장히 헌신도 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굴곡이 너무 심해요. 그래서 이게 감정적으로 잘 받쳐 줄 때에는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로 헌신적으로 일 하는데 어느 한 순간 마음이 상하든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정서가 따라주지 못할 때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해요.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지도자로 뽑으면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성숙한다고 하는 것은 뭘 의미하냐면 꿋꿋해지는 거예요. 감정이 없을 수가 없고 그리고 마음에 밀려오는 정도의 크기가 변함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성숙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은혜를 계속 유지할 뿐만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숙이에요.
(예화)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철이 없고 까부느라고 ‘엄마 나 오늘 화났어.’ 뭐라고 잔소리를 하면 ‘나 기분 나빠서 오늘 학교 안 갈 거야.’ 하고 가방을 팽개치고 떼를 쓸 수 있죠? 없죠. 맞아야죠. 초장에 잡아야 해요. 유치원 때부터 잡아야 해요. 그런데 어쨌든 그런다 이거에요. 그것도 귀엽게 봐주지만 고등하교 들어가고 대학을 들어갔는데 아니면 시집을 갔는데 ‘엄마, 나 오늘 기분 나빠. 나 오늘 처녀할 거야.’ 그리고 집안을 훅 뛰쳐나와서 친정으로 도망가고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꿋꿋함이 없는 거죠. 그래서 의외로 교회에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이렇게 기복이 심한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보편적으로 포괄적으로 헌신되는 경험은 많이 했는데 개별적인 일에 있어서 충성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충성스럽다고 하는 말은 우리 집 아이가 게임에 충성합니다. 그렇게 말을 안 해요. 물론 겉으로 모습을 보면 충성을 하는 것 같죠. 열심히 매달려서 밥도 안 먹잖아요. 밥을 먹으려고 하면 화를 내잖아요. 그리고 막 자꾸 하지 말라고 했더니 엄마를 죽여 버렸잖아요. 그 정도로 충성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충성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충성이라는 것 자체는 취미나 자기가 좋아서 하는 여가활동 그런 데는 사용을 안 하는 거예요. 우리의 본성이 그것을 하기 힘들어하는 어려운 희생과 부담을 느끼게 하는 가치 있는 일에 날마다 자기와 싸우며 복종시키면서 헌신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충성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죠. 골프에 정신이 팔려서 골프를 치러 다니는 골프광한테는 골프에 충성한다고 말을 안 해요. 그러나 그것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말을 어느 정도 쓸 수 있는 거죠. 왜? 싫을 때나 좋을 때나 그렇게 하니까. 그래서 박세리 선수가 처음 세계를 제패했을 때에 신문에서 대서특필했잖아요. 그 어린 딸에게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밤 12시에 공동묘지에 끌고 가서 담력을 키우기 위해서 혼자 달리기를 하게 했다는 거예요. 그게 취미생활이에요? 그게 진짜 충성이죠. 그런 거예요.
우리 중에 은혜를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요번 주일에 오면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눈물을 펑펑 쏟도록 여러분들에게 감동을 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나는 그런 것이 너무 귀찮다고 하는 사람 어디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개별적인 충성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아요. 그래서 삶으로 입증되지 않는 은혜는 진정한 은혜가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요, 또한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개별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지는 개별적인 임무에 대해서 충성스럽게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한편으로 받은바 은혜를 잘 보존하는 방법이고 또 더 많은 은혜를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주님이 은혜를 많이 주셔도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면 그 은혜는 금방 부패해버립니다. 오늘 밤에 물 붓듯이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셨는데도 몇 주 되지 않아서 싸늘한 얼음같이 식은 마음이 되는 것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포괄적으로 헌신하지 않아도 개별적으로 헌신하는 일에는 매우 인색하기 때문에 혹은 주의를 별로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많은 은혜는 속히 부패하고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쉽게 쏟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이 개별적으로 충성해야 되느냐?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다섯 가지의 원리가 나오는데 첫째는 자신의 분량을 따라서 하라고 말합니다. 이 분량이라고 하는 말은 물론 크기를 가리키는데 무조건 크기만을 가리키는 그런 의미에서의 분량이 아니라 마치 사도바울이 비유로 들었던 그릇의 비유, 은그릇도 있고 금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는데 등등의 그릇이 있는데 바로 그런 그릇이 서로 다른 것을 분량이 다르다는 말로도 사용을 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신의 분량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 모두 포괄적으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교사로, 어떤 사람은 또 목사로 이런 저런 일로서 하나님이 다양하게 사람들을 부르셨잖아요. 그것을 분량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신이 만약에 영혼을 돌보는 교사로 부름을 받았으면 제일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할 것은 교사로서 어떻게 영혼들을 돌보고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구원 얻은 자녀답게끔 살도록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이죠. 물론 그 사람도 교회 여러 방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울 의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분량에 먼저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영혼을 돌보는 교사로 부름을 받았으면 그것이 가장 중심에 와야 하는 것이죠. 주방에 가서 참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죠. 거기에는 거기에 분량을 맡은 사람들이 또 있어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죠.
두 번째는 ‘받은바 은혜를 따라서’ 라고 말합니다. 이 은혜는 모든 분량으로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공급되는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게 하는 자원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각자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면 그 은혜가 각 사람의 분량대로 작용을 해서 그 분량에 어울리는 섬김을 감당하도록 주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이죠. 똑같은 총이지만 육군의 손에 들렸을 때에는 육지에서 전쟁할 때에 그 총을 사용하고 해군에게 들려주었을 때에는 바다에서 배끼리 싸움을 할 때에 그 총을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하지만 그 은혜가 각 사람의 분량에 부어질 때에 그 분량대로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받은바 은혜를 따라 봉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분량이 목사면 은혜를 많이 주시면 목회자의 일을 아주 아름답게 감당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자신의 분량이 장로면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성도들을 섬기고 모본을 보이고 성도들을 다스리는 그 일에 있어서 아주 탁월함을 발하게 되는 것이죠. 만약에 교회를 청소하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분량이라고 하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은혜 없을 때에는 거지같이 청소를 하다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양반같이 청소를 하게 되는 것이에요.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그를 감동시키시면 한번 닦을 때를 두 번 닦고 그리고 한번 섬길 때를 두 번, 세 번 섬기게 되는 것이 바로 받은바 은혜를 따라 섬긴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섬기는 분량은 각각 달라도 그것을 잘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구하여야 할 은혜는 항상 똑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열한달이 지나갑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때에 여러분들의 한 해 동안의 분량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일을 잘 감당해 왔는지 반성해보십시오. 지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열렬히 은혜를 구해서 얼마 남지 않은 이 기간 동안이라도 주님 앞에 충성되게 봉사를 한다면 마치 삼손이 마지막에 큰 힘으로 역사해서 죽을 때에 죽였던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죽인 사람보다 많은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분의 남은 날들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 원리는 게으르지 말라는 것이에요. 게으르다는 것은 뭐냐 하면 집중하고 자기를 쏟아 부으면서 주님께 헌신하는 것이 피곤하고 힘들기 때문에 그 피곤함과 힘듦을 마다하고 자기 사랑을 따라서 편안한 것을 택하는 것이 게으름이에요. 그래서 의무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게으름이에요. 게으른 사람은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태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회사에서나 교회에서나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보십시오. 게으른 사람들은 정신이 흐릿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활에 대해서 정확하게 줄을 그을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어디까지가 나의 책임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해야 하는 일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비난받고 책임져야 하는 것인가 라고 하는 분명한 선이 없는 사람들, 마음속에 그런 정신의 선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게으른 사람들입니다. 직장에 나와서 오늘 하루 무슨 일을 처리해야 하는가 생각하고 한주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가를 생각을 하면서 오늘의 할 일을 기록하는 사람들은 목표와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지식이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게으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게으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면 한번 물어보십시오. 불현듯 직원 앞에 다가가서 “자네가 이번 주에 처리해야 할 목록 다섯 개만 이야기 해보게.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세 개만 말해보게. 그 세 개가 앞에 있는 다섯 개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설명을 해보게.” 세 가지만 질문을 해보면 그 사람을 여러분들이 계속 데리고 일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지 아니면 그렇지 않을지, 게으른 사람인지 아닌지를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는 사람, 이것이 중요한 것이죠. 어렸을 때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특징이 있는데 두 가지에요. 공부하는 시간이 많지 않아도 공부를 하는 그 시간에 주위 사람이 말을 걸기 힘들 정도의 집중력이 있어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오늘 해야 할 공부의 목표가 있어서 스스로 자신이 그것에 압박을 받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직장에 와서 오늘에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흔들거리며 사는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들이에요. 여러분들이 교사로 직분을 맡으셨다면 금년에, 이달에, 금주에, 그리고 오늘에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정말 내가 열한달 동안 섬겼으면 잘 섬겼는지, 내 마음의 목표와 선이 없다면 절대로 반성을 할 수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그래서 계획을 세우지 않는 사람이 반성을 한다는 것은 코끼리가 웃을 일이에요. 절대 반성하지 않습니다. 잘못해서 사건이 터져서 뭐 큰 일이 생기면 그때서야 ‘내가 참 잘못했구나.’ 그럴지 모르죠. 그것 말고요, 왜 잘못한 것만 가지고 반성을 합니까? 더 잘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반성을 해야죠. 그러니까 계획이 분명하게 없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어디로 가야될지에 대한 분명한 그림이 없는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게으른 사람들이에요. 근데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죠. 게으르지 않은 삶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분은 좀 야박하게 표현을 하자면 덜 먹고 덜 주무시고 거의 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 생애를 녹여서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했고 심지어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고 하면서 당신의 양식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이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날이 30년이 남았다고 하더라도 그중에 십년은 잠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그다음에 그중의 몇 년은 먹고 마시는데 그다음에 몇 년은 놀러가고 휴식을 취하는데 다 빼고 나면 겉모양이라도 주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 시간들은 불과 몇 시간 되지 않습니다. 게으르면 일을 못하는 것이죠.
(예화)미국에 갔는데 저는 가기만 하면 돌아오고 싶어요. 그냥 뭐 가지는 못했고 이렇게 지나가면서 보여주면서 여기 경치가 얼마나 좋으냐고 자랑을 해요. 한 일 년 안식년을 받아서 여기 오셔서 글도 쓰고 푹 쉬다가 가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쉬고 가면 그 동안에 누가 내 일을 대신 해줍니까?’ 그 다음에 일 년 후에 돌아가면 그 일이 전부 밀렸을 텐데요. 언젠가 목사님들이 모인 모임에서 54세가 되어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가셔서 목사 되신 분의 간증을 들었어요.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는 신학교에 들어갈 때에 남들은 20대에 30대에 신학교에 들어가서 늦어도 35세에는 목사가 되는데 자신은 50대 후반이 되어서 목사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신학교 들어가면서 생각하기를 그저 자기는 지는 해, 빚기는 볕에 겨우 목사가 될 테니 그저 그만큼만 일하다가 죽겠지 그랬더니 하나님이 30대부터 못한 모든 일들을 차곡차곡 모아놓았다가 당신 자신에게 농축하여 짊어지게 하시면서 그래서 자기는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하면서 살 수 밖에 없었다고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게으른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번째 원리가 열심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 ‘열심’은 사랑에서 나지 다른 것에서 절대 ‘열심’이 나지 않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는 열심을 품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 열심히는 사랑하는 것을 품게 되어 있죠. 여러분들이 그렇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함으로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전쟁의 역사를 이렇게 보면서 ‘인간의 그 열심히 참 끝이 없구나.’ 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화)옛날에 전쟁 같은 걸 보면 전쟁을 막기 위해 깎아지른 듯 한 절벽 꼭대기에 성을 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절대로 그곳을 침범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로마가 그곳을 무너뜨립니다. 정복이 되요. 어떻게 했냐니까 밧줄을 걸어도 안 되고 대포를 쏴도 도달할 수 없고 특공대도 침투시킬 수 없어요. 뭘 해도 안 돼는 것은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모래를 지어다가 옆에다가 3년 동안 산을 쌓았어요. 그래가지고 이 산이 이 성만큼 높아질 때까지 모래를 쌓은 거예요. 그럼 이쪽에서는 모래를 쌓을 때에 가만히 있었겠어요? 수시로 공격을 하고 그랬을 것 아니에요. 근데 더 모래를 쌓아가지고 3년에 걸쳐서 계속 등짐을 지고 올라가서 모래를 부어서 올라가서 모래로 굽이치게 길을 올라가게 만들어서 모래로 탑을 쌓아가지고 탑 위에서 나무로 된 성을 공격하는 기구들을 탑처럼 만들어서 그것을 쓰러뜨려서 그걸 밟고 올라가서 그 성을 진격을 하는 거예요. 뺑 둘러 포위하고 그러니까 그 위에서 물 먹고 근근이 버티면서 결국은 자신들이 멸망할 것을 알죠. 그게 사실 우리로 보기에는 너무 높아서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와버릴 것 아니에요. 전쟁의 역사는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그것이 뭐냐 하면 목표에 대한 강한 집념이에요. 그리고 충성심이죠. 그것이 그 일을 하게 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을 품고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원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결국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과 함께 일하고 일을 행하지만 일을 섬기거나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모두 주님을 향한 섬김이 되도록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신앙 이외에는 그런 관련을 맺게 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내가 행하는 작은 섬김도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표현되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많이 주님을 섬기고 사람에게 그 대가를 받지 못했다고 섭섭해 하거나 심지어 원망을 하거나 원한을 품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것이 주님을 향한 섬김이 아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주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거기에 계셔서 그 일에 임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낱낱이 아시고 그리고 그 마음을 매순간 순간 예배처럼 받으시면서 당신 자신이 기쁨을 얻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날들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날이 된 것이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미래를 예언했던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이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서 거기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다리오 왕은 불신자인데도 그를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라고 불러주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말 하나에 전적으로 순종할 다니엘이었지만 그가 그렇게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이 자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께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죠. 어려움이 있어도 이런 사람들을 사람에게 원망을 뿜어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섬기는 그 길이 어차피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짐을 져야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Ⅱ. 결론
그럼으로 나는 결론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는 것이 아무리 많고 마음에 계획이 훌륭하고 말이 사람들 보기에 달콤할지라도 그가 충성하지 않는 사람이면 주님이 보시기에는 검불에 불과한 것입니다. 옛날에 전도사를 할 때에 교회에서 일 년에 한 번씩 공동의회를 하는데 교인 몇 명이서 끊임없이 손을 들고 그렇게 역정을 내면서 교회 돈을 왜 이렇게 허투로 쓰냐고 공박을 해요. 그래서 분위기가 매년 그랬어요. 그때마다 교역자 회의를 할 때에 목사님이 그러셨어요. 마음이 상해서 어쩜 그렇게 족집게로 집은 것처럼 십일조 안 내는 사람들만 일어나서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목사님이 나중에 마음이 상하시니까 발언하겠다고 손을 들면 십일조를 내지 않으시는 분은 제자리에 앉으시길 바랍니다고 그랬어요. 주님을 섬기되 충성스럽게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의 모든 섬김이 한끝 한끝 모아져서 주님께 바쳐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래서 좋으신 주님께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 말쟁이인지, 누가 주님께 충성하는 사람인지 우리 주님은 다 아십니다. 사람은 다 이해를 못해서 종종 간신배 같은 사람이 교회에서 영광을 받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사람들의 관심 밖에 머물러 있는 때도 종종 있습니다만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을 아십니다. 그 마음을 아실뿐만 아니라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해 받을 때에든지 그렇지 못할 때에든지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지위와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주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충성스럽게 헌신하면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날마다 더 깊어져 갑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해주시는 것을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언제나 그의 삶 속에서 늘 보여주십니다. 잠시 사람들에게 부끄러울 때가 있죠. 능력이 모자라거나 돈이 없거나 여러 가지로 자신이 사람들 보기에 그렇게 훌륭하게 감당해 나가지 못하는 때가 있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누가 충성된 지를 너무나 잘 아시고 하나님은 그 충성된 사람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충성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가 있습니다. 충성스럽게 사는 동안에 받는 고난이 작은 상처라면 주님은 그 작은 상처를 입은 사람을 아주 훌륭한 병실에서 위로를 받으며 치료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님은 언제나 말이 많아도 충성스럽지 않은 논리적인 사람들보다는 논리가 부족하고 말이 없어도 충성스러운 사람들 곁에 계셔서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들의 비밀을 알게 해주시고 기도 속에서 교통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충성스러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분의 별명을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라고까지 불러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의 별명은 충성이었습니다. 아멘이었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오늘도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말씀을 좀 보고 설교를 계속 준비하면서 왔는데 한해가 어쩜 그렇게 빨리 가는 줄 몰라요. 연초에 사경회 하느라 보따리 싸들고 광림수도원 올라가서 에베소서와 씨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 휙 지났습니다. 우리의 귀 밑에는 흰 머리가 늘어가고 죽음의 기운은 지난해보다 현저하게 우리의 육체를 감쌉니다. 우리의 남은 날들은 정말 티끌 같고 얼마 되지 않은 날들입니다. 그날들은 모두 헛된 날들입니다. 이 세상도 정욕도 모두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만이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이 한 해 동안 맡은 일들을 돌아보고 뚜렷하게 줄을 그어서 내가 정말 이 일을 주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하고 무엇을 했어야 되는지 줄을 그어서 그 줄로 여러분의 한 해 동안의 삶을 재어보기 바랍니다. 모자랐다면 회개하고 지금이라도 덜 자고 덜 놀고 마음을 다해서 열심히 일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남보다 재능이 탁월하고 남과 비교될 수 없는 말씀의 깊은 지혜를 가진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남들처럼 먹고 마시고 쉬고 자고 하는 모든 것을 누리면서 남들보다 더 주님께 섬기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목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머리가 나쁘니 남이 한 시간 교리를 배울 때 나는 두 시간을, 나는 탁월한 은사가 부족하니 남이 삼십분 기도할 때 한 시간을, 나는 손재주와 명민함 떨어지니 다른 사람이 한 시간 섬길 때 나는 두 시간 봉사하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간다면 주님이 어찌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에게 합당한 은혜와 그리고 능력을 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주님을 향해 이런저런 능력을 달라고 눈물로 매달리지 않는 이유는 충성스럽지 않기 때문에 그 기도를 자신 있게 할 수가 없어서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바꾸어서 충성함으로 이렇게 주님 앞에 간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