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이에 돌을 굴려다가 굴 어귀를 막으매 왕이 그의 도장과 귀족들의 도장으로 봉하였으니 이는 다니엘에 대한 조치를 고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더라 왕이 궁에 돌아가서는 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그 앞에 오락을 그치고 잠자기를 마다하니라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 굴로 가서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단 6:16-20下)
누구든지 인생을 남이 부러워하는 정도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거듭 거듭 경고하는 바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장난처럼 살다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의 말 듣고 남의 말대로 실험을 해보다가 갈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인생은 언제나 심각하고 진지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든지 그것은 우리 자유이지만 그러나 살아온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책임을 지고 이 후의 세계에서도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흔하지 않지만 저는 때때로 인생의 말년에 젊어서는 한 없이 많이 고생했지만 학처럼 고고하게 늙어가는 그런 노인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이어져왔을까? 하는 어떤 신비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무엇을 소유하느냐에 의해서 우리 인생의 모양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평생 무엇을 찾고 추구해 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읽은 소설 가운데 나다니엘 호든의 ‘큰 바위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싸움터에 나가서 열심히 싸움을 하고 돌아온 승리를 쟁취한 군인을 가리켜서 사람들은 저 큰 바위 얼굴, 전설에 의하여 언젠가 이 나라에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이 나라의 귀인이 되리라고 하는 그 예언이 성취된 사람으로서 그 군인을 예를 들었을 때에 끊임없이 승리를 추구하며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살아온 그 사람의 눈에는 말하자면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성품도 돈과 같아질 것입니다. 돈의 어원이 어디에서 됐냐? 어떤 사람은 자꾸 돌기 때문에 돈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지만 따라서 인생에서 돈을 찾고 추구하는 사람들은 살아가는 모습이 돈을 닮아갑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돈처럼 지저분한 물건이 있습니까? 오늘은 내 주머니에 있었는데 내일은 저쪽으로 가고 모레는 절로 갑니다. 어딜 가도 한군데에 정착을 안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주인과 이별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주인이라고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돈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돈을 벌기위해서 돈의 속성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지조가 없습니다. 말 뒤집는 것은 다반사입니다. 속이는 것도 불사합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관계도 끊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가슴에 칼이라도 겨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돈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가 읽은 이 성경 속에는 이미 오래전에 살다간 인물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의 목표를 가져야 된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한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다니엘이었습니다. 알다시피 그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예루살렘에서 이방의 땅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귀족 청년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라가 다 멸망하고 성전까지 무너진 가운데 이 젊은이들이 포로로 끌려간 것은 주전 605년의 일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계속 높이셔서 오늘 성경에 읽은 대로 이제 다니엘이 다리오시대에 120명의 도지사들이 있는데 그 중에 3명에 총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놀라운 출세였습니다. 바벨론시대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바벨론이 망하고 메대가 들어섰습니다. 이미 느부갓네살왕, 그 다음에 벨사살왕, 그리고 다리오왕,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세 왕이나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은 국사를 섬김에 있어서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다니엘을 이방인으로서 남의 나라 땅에 와서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말하자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라고 하는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정치가의 그 시기와 모합이 얼마나 비등했겠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요히 자기 할 일을 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이 다니엘을 매장하기 위해서 요새 말하자면 정보기관을 시켜서 사람을 붙여서 뒷조사를 하고 뒤졌습니다. 어디에서도 법적으로 이 사람을 흠잡을 수 있는 그러한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직자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지켜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나라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어디를 뒤져봐도 당시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공금을 횡령하고 유용하는 일 없었습니다. 어디를 뒤져봐도 이권을 주는 대가를 청탁을 받아서 자금을 챙기고 그리고 재산을 불법하게 증식한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었습니다.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직장 다니면서 보면 무능한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교회 다는 것은 열심히 다니는데 세상 살아가는 것은 빵점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만약에 세상이 여러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해서 우리를 불러주셔서 세상에 보냈을 때에는 그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자리에 섰을 때에만 우리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승진도 못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고문관 취급을 받으면서 저 사람을 우리 회사가 데리고 있다고 하는 것은 참 대한민국 근로기준법 때문이라는 그런 생각밖에 줄 수 없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직장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차라리 드러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가능성이 없는 꿈이 아니겠습니까?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라고. 그러기위해서 깨끗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과 다른 습관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 집에 돌아가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에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트집을 잡아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사자굴 속에 던져 넣게 된 것입니다. 사자 굴에 던져 넣는 이 규례에 다니엘이 걸리리라고는 아마 이 왕이 생각을 못했던 모양입니다. 다니엘이 걸렸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하니까 신하들이 하는 말이 “왕이 한 번 도장을 찍으셨으므로 왕 자신도 고칠 수 없나이다.” 그러니까 지도자는 이렇게 경솔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조상들이 남자가 두 가지를 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도장을 찍는 일과 말을 하는 일, 이 두 가지를 잘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도장을 그렇게 생각 없이 찍어 놓고는 걸린 사람이 다니엘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왕이 명하여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속에 던져 넣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왕이 다니엘을 사자 굴속에 던져 넣으면서 왕이 다니엘에게 작별 인사처럼 한 이 한 마디의 말을 오늘 여러분에게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일러 가로되 뭐라고 그러냐면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그리곤 그 이튿날 잠도 못 자고 이른 새벽에 뛰어가서 그 다니엘이 들어있는 그 굴을 들여다보면서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물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었습니다. 이방의 땅에서 그저 한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세상의 많은 임금, 그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 세상에 한 임금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삼대에 걸쳐서 자기의 나라를 섬겨온 정사에 자신을 바쳐온 다니엘을 생각할 적마다 왕에게 떠오르는 인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을 볼 때에 무슨 인상을 가질까요? 사람들이 여러분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릴 때에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떠오르고 있습니까? 혹시 바득바득 우기면서 그러면서 물건 값을 깎으려고 그러는 구두쇠로 여러분을 떠올리고 있습니까? 이름 석 자를 떠올릴 때에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그림이 되고 있습니까?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니엘을 한 번도 이방에 땅에 끌려온 처지에서 이 사람들을 복음화 해야겠다는 엄청난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 지 한 번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줘 봐야 되겠다. 그런 정신으로 산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며 살았습니다. 아침이면 9시에 나가서 관청에 가서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그리고 요즘으로 말하면 5시까지 근무를 했을 것입니다. 월급날이면 월급을 타고 그리고 또 직장일이 끝나고 회식이 있는 날이면 함께 회식을 했겠죠. 그렇게 살았습니다.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을 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뭔가를 누구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줘야 하겠다고 하는 그런 의식 있이 산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왕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더욱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 하는 이름 석 자를 떠올릴 때에 그는 최선을 다해서 국사에 충실하고 정적들이 아무리 그의 예금계좌를 뒤지고 그의 서랍을 뒤지고 인간관계를 뒤지고 뒷조사를 하고 친인척의 부동산을 조사했지만 어디에서도 그가 불법을 행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살아온 많은 삶의 시간들을 나라를 돌보는 이 일에 바쳤습니다.
그러나 왕의 눈에는 이 다니엘이 훌륭한 고관대작의 옷을 입은 관리로 비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다니엘이라고 하는 이름 석 자를 떠올릴 때에 이 다니엘은 높은 관직에 서서 수많은 부하들을 호령하는 그런 사람으로 마음에 떠올랐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다리오 왕에게 이 다니엘이라는 이름 석 자를 떠올 릴 때마다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선왕인 벨사살왕 때에도 그랬고 그 이전의 왕인 느부갓네살 왕 때에도 그랬고 굉장히 긴 세월, 왕이 세 번씩이나 바뀌고 나라가 바뀌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 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 대명사였습니다. 그 어디에서 그가 무엇을 하고 있든지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것이 인격의 특징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다니엘과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 하면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대해서 생각할 적마다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으니 그것은 끌려온 포로 다니엘이었습니다. 전도사였습니까? 다니엘이 목사였습니까? 장로였나요? 아니면 다니엘이 많은 돈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신문에 이름을 내며 그렇게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사회사업가였습니까? 그는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을 하나님께 예배하고 이렇게 모여서 말씀을 듣고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몸 바쳐 헌신하고 복음 전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방에 왕을 위하여 열심히 수고하며 국사를 돌봤습니다. 알다시피 다니엘은 처음부터 이런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회사로 말하자면 과장이나 부장정도로 시작을 했겠지요. 그러나 다니엘은 한 번도 한 달에 몇 백만 원 주는 월급이나 일 년에 700프로 주는 보너스를 받기 위해서 직장에 다닌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럼에 불구하고 다니엘 이름을 떠올릴 때에 이 왕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이 다니엘의 인격은 떼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대동소이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모두 목사의 길이나 전도사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은 때로는 기저귀를 빨고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주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사람 눈에 여러분이 가사를 위해서 죽도록 고생하다가 죽은 어머니라는 그림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이 잘못 된 것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비록 그렇게 가사 일을 돌보고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소진하는 것 같은 그런 삶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으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의 대부분의 시간을 부흥집회에 참석하는 시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국사를 돌보고 그리고 잠시 후면 있다가 사라질 이방의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청렴하고 결백하게 최선을 다해서 그 나라를 섬기고 왕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월급이나 급료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께 하듯 섬겼습니다. 그러자 그의 인생은 사람들 보기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생애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어떤 식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느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거룩한 봉사를 위해 수고한다고 할지라도 그 거룩한 봉사를 위해 수고하는 여러분이 세속적인 사람이고 그 일을 하는 방식이 세속적이라면 여러분은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고 일이 비록 세상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주께 하듯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정성으로 이 일을 해나갈 때에 여러분은 세상의 일을 가지고도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주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다니엘을 보았을 때에 그는 말했습니다. 사시는 종, 다니엘아. 다니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의 땅에서 갖은 정치적인 박해와 신앙적인 협박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국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겼을 때에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다니엘의 삶을 통해서 증거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아가서 말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하나님이 이미 돌아가신 것처럼 절망하고 낙담에 빠져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참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말로 증거하고 전파하고 깨우치고 사람들에게 알려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이 변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입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핍박과 고난을 견디며 다니는 발은 복이 있는 발입니다.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온 땅에 다니는 그 발이 복이 있는 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전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전하는 그 하나님이 온전히 증거 되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삶을 통해 보다 넓은 의미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만을 위하여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그 하나님의 종이 되어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신앙고백을 드러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전하는 것도 헛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왕 앞에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 하나님을 항상 섬기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던 이 다니엘은 왕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성경구절을 여러 해 전에 보면서 그 항상 이라는 말이 가슴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뭘 말해줍니까? 일 백 이십 명의 도지사를 거느리는 총리로서 이렇게 의연하게 퇴청하여 거의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는 수많은 위기와 난관을 거쳐 왔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항상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고 환경을 제공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왕에게 이렇게 인정을 받고 있는 이 순간에도 다니엘이 사자 굴속에 던짐을 당한 이유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재상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이런 협박과 위협이 있었으니 그가 바벨론에 끌려온 첫날부터 시작된 시련은 얼마나 큰 것이었습니까? 그래서 다니엘 1장 8절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에 끌려왔을 때에 뜻을 정했습니다. 이 세상의 나라, 이 이방의 나라에서 예루살렘에서 하던 것처럼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뜻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전과 같은 결심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별다르고 특별한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뜻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다니엘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를 원하는 마음은 있으나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파도와 시련들은 지난 일 년 동안도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송사하는 악한 마귀의 송사와 끝없는 죄의식 속에 우리의 삶의 기력을 빼앗기기도 하였습니다. 환경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도록 허락해준 때에는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기에 부족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이 다니엘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는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아니하는 이방의 나라 한 가운데에 들어와서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뀌는 위기를 넘기면서 수많은 신앙의 파국에 직면하는 어려움들을 겪었습니다. 박해와 고난과 위기가 있고 시련이 있고 악한 자들의 모함과 도전이 언제나 상정하고 있는 그 자리였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과 자신의 지위를 노리는 위험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그 모든 난관과 파도를 헤쳤습니다. 어떤 때에는 위기를 향하여 용기 있게 싸우기도 하였고 어떤 때에는 고난과 시련 앞에 이를 악물고 묵묵히 참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때에는 너무나 고난과 위기가 크고 닥친 환란이 크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뢰하며 하나님 앞에만 눈물 흐리며 하나님 앞에서만 인내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지혜의 팔꿈치로 환란을 치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로 하나님 앞에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섬기며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자신의 설움을 주님 앞에 토로하기 하였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몇 명의 친구들 이외에는 관청에서나 어디에서든지 그는 이방인들에게 둘려 싸여 있었습니다. 극한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도 그의 눈은 인생의 하나의 목표를 향해 불탔습니다. 그것은 이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을 항상 섬기며 살아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오늘 하루를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서 살겠습니까? 그 사람의 삶의 목표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매일 매일의 삶, 항상 자신에게 주어지는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우리 좋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아니라면 그는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인생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들이 불신앙과 우상 숭배가 가득한 이방의 땅에서 자신의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환경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만을 섬기기위해서 애쓰고 분투하며 노력했기 때문에 우리는 다니엘이 한 나라의 재상이었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럴 수 없는 위기 속에서도 때로는 인내하며 때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을 섬긴 믿음의 조상으로 우리 가슴 속에 기억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다니엘이 어떤 부를 누리고 영광을 누렸던 가 그것을 기억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가 섬겼던 하나님이 누구고 그가 불신앙과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이방의 땅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겼냐 하는 것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어떤 속에서든지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눈에는 가끔 하나님을 섬겼던 다니엘아 말하지 않고 항상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하나님을 향한 그 일편단심의 삶을 자신도 어찌할 수 없으리라고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처지였습니다. 언제든지 지나 온 일 년이 그랬듯이 앞으로의 일 년도 역시 우리가 신앙생활하기 좋은 한 해만이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일 년 전에 이곳에서 마지막 94년도 예배를 드리면서 내년에는 뭔가 달라지리라 희망적인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한해를 또 보내면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갖는 것은 세상에 있는 환경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에게 능히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이외는 바라볼 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한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항상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았더니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랬고 그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는 왕실에 위기가 닥칠 적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였고 그의 뜻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왕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여러분, 항상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들은 삶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바벨론 시대와 같은 이 불신앙의 땅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항상 나를 섬겼던 내 아들아, 혹은 내 딸아 이렇게 부르신다면 우린 그것으로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예화) 저는 며칠 전에 고신의료원에서 봉직을 하다가 돌아가신 장기려 박사의 그 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찡 했습니다. 1930년대에 이미 의학을 전공하고 굉장히 일찍이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사후퇴 때에 잠깐 내려갔다 온다고 그랬다가 사랑하는 모든 가족과 완전히 생이별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두고 온 아내와 사랑하는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무려 45년 가까운 세월을 홀로 살아왔습니다. 늘 가족들의 사진을 앞에 놓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2년 전에는 자기 부인이 이북에 살아있다는 사실까지도 편지와 사진과 함께 확인했습니다. 그러면서 살았습니다. 그의 탁월한 의술, 그것이 많은 학계에 주목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에 그에게 남은 것은 병원 옥상에다 허름하게 사택으로 지어준 24평짜리 사택하나 밖에는 그에게 남은 세간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운명하면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비석을 하나 세워주되 그 비석에다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이렇게 써 달라고 유언을 하며 죽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인생을 모두 살고 마지막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감히 ‘나는 항상 하나님을 섬겨왔노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한 해 우리가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 해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했던 것들 많습니다. 환경이 밀고 끄는 대로 순종하는 바람에 항상 주님을 섬길 수 없었던 우리의 삶을 이 시간에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다가오는 한 해에는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하지 않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인내와 때로는 지혜와 때로는 파도를 헤치며 배를 몰고 가는 선장의 용기를 배우면서 우리들이 이 시련의 파도를 거치고 결국은 주님이 보실 때에 항상 나를 섬겼던 사람이라 그렇게 인정을 받는 삶을 우리가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