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동역자
(199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디모데(빌2:19-22) 1995.5.14 주일오후..................................................................... 1
2. 에바브로디도Ⅰ(빌2:20-30) 1995.5.21 주일오후 ..................................................... 6
3. 에바브로디도Ⅱ(빌2:26-27) 1995.5.28 주일오후..................................................... 13
1. 디모데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19-22)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자주장사 루디아의 도움으로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유럽을 전도하는 데 있어서 복음의 전진기지로 한 여인의 헌신적인 동역으로 말미암아 마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준비해 놓고 그 쪽으로 선교의 물결이 가기를 원하는데 이 사람들이 자꾸 아시아 쪽으로 가려 하니까 하나님이 막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교회입니다.
이 편지를 쓸 때에는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이방인들이 모여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헌신적인 교회였습니다. 부자는 아니었는데 이 교회가 가난하면서도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흉년이 들어서 고통을 받는다는 소리를 들을 때에 선뜻 거액의 연보를 내어놓은 헌신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교인들이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는 비록 옥에 갇혔으나 복음은 갇힌 것이 아니다........라고 확언하면서 오늘 모든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디모데는 이 사람들이 문안사절로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다시 자기 때문에 사람들이 근심한다는 것을 듣고 걱정스러워서 다시 디모데를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 디모데가 사도바울의 가장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주위에는 바울을 통하여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위해서지만 동역자의 관계는 대부분 성경에서 보면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동역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바울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바울의 입장에서는 기쁘게 자기의 복음의 동역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다수가 아니라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디모데를 보내면서 디모데를 향한 사도바울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20절에서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랬습니다. 디모데는 먼저 빌립보 교인들을 깊이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과도 빌립보교회와도 뜻을 같이 하였고 빌립보교회와 교인들이 놓여있는 사정을 진실히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보면 빌립보교회를 넘치도록 사랑했습니다. 그는 1장에서 말하기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하나님이 증명하실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이 교회를 뜨겁게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마음으로 빌립보교회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디모데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그 목양하는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교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사정을 가지고 깊이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참된 동역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범적인 동역자는 단지 한 사람을 돕는 것 일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목회자의 인격에 매료되어서 섬기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실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부터 완전한 만족과 사람에게 완전한 기대를 충족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무슨 일로 섬기든지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만족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오히려 눈물로써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자신의 내면 속에 깊이 (노트에 생략됨)
이렇게 한 사역자를 돕는 사람은 그 동기가 단지 한 사역자의 인격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향한 사랑이 그 모든 섬김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가르치는 일만이 영혼을 사랑하는 길만은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 영혼을 향하는 일에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섬김, 모든 인내가 영혼을 사랑하는 일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오래도록 생활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섬김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는 바울 한 사람의 인격이나 능력에 매료된 것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서 디모데는 영혼을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도 역시 바울과 같이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일꾼이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본래 진심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빌립보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빌립보교회가 처해 있는 모든 사정을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고 전해 준 사람이 이 사람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섬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동역자는 이렇게 영혼을 사랑하는 동기에 매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동기 그것을 갖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큰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목사로, 교사로, 집사로, 또 어떤 사람은 기도하는 자로, 지혜로 가르치는 자로, 혹은 능력을 행하는 자로, 사무 보는 자로, 하나님께서 각양의 목적을 위해 부르시지만 그러나 그 모든 교회의 몸은 하나가 되어서 영혼들을 섬기는 이 일을 위해서 봉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아는 것과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볼 때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지만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들에 있어서 모든 선행, 인격, 자격을 능가하는 것은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디모데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기쁘게 디모데를 나의 동역자라고 불러서 택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시간도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 사람을 동역자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사람은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역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역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한 교회에서 만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디모데가 바울과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을 통해서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복음을 위해서 젊음을 드려 하나님의 일을 하되 이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해서 자신을 다 드리는 것 그것보다 가치 있는 것이 없다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바울의 동역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적인 동역자들은 복음의 가치를 아는 데서 그 사명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깊은 체험 없이는 결코 하나님 앞에 오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가치를 알고 그 복음에 붙들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복음을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디모데는 복음의 가치를 새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이 죄인들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고 예수 앞에 나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고 복음 안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는 것 이외에는 참된 소망이 없다라는 복음의 가치를 사도가 깊이 발견한 것입니다. 디모데는 복음이 역사하는 일들을 꿈꾸면서 바울을 섬겼던 것입니다. 남이 볼 때에는 자식이 아비를 섬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섬기는 이 디모데의 마음속에는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알고 복음을 깊이 체험하면 필연적으로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놀랍게 쓰임 받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복음을 깊이 체험하고 복음의 절대적인 가치를 확신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에 대한 가치를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그것을 붙든 사람만 붙드셨습니다. 그렇게 붙잡힌 사람들 주위에는 언제나 전폭적으로 그들을 돕는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디모데를 의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디모데와 함께 일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우리를 의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붙잡은 사람을 그 복음적인 영향을 많은 사람에게 미치게 합니다.
그러나 다수는 열광하다가 떠나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동역자가 되려고 하다가 실패하게 됩니다. 대접받으려 하고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디모데를 구원하셨고 하나님은 디모데가 바울에게 메이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디모데가 복음의 가치를 굳게 붙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디모데는 하나님께서 붙드셨고 같은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전파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혼자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복음 하나를 붙든 사람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붙드는 것입니다. 복음에 붙잡히기 전에는 기도도 깊어질 수 없습니다. 열심도 빗나간 열심히 되기 쉽고 예수의 참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자기를 더 거룩케 하고 싶은 열망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은 열망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깊이 헌신된 사람인데 이 바울을 통해서 디모데는 복음을 새로 보게 되었으며 복음을 위해 수고하게 되었습니다. 고용을 당했습니다. 세상의 사조와 풍조를 쫓아가며 하나님을 섬기기는 쉽지만 복음 하나에 생명을 걸고 외골수로 교회를 섬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21절에서 보니까 저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니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열광하기는 쉬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며 사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자기 일보다 그리스도의 일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삶, 이런 것이 디모데가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삶입니다. 자기의 일을 구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일은 버리고 그리스도의 일 때문에 거기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 바로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복음에 붙잡혀 수고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 우리는 개인의 일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 자신을 섬기도록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일꾼을 돕는 동역자들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는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믿음 안에서 디모데가 자기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일을 할 때에는 바울의 동역자이지만 인격적인 관계는 자식과 아비처럼 묶인 이유는 그들은 살과 피보다 더 깊은 복음을 나누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 안에서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관계가 없고 미워해야 할 사람을 한 형제로 만들어 주는 힘이 복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기 자기의 목적을 위해 살아 갈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적인 동역자로 부름을 받게 된 일들이 바로 말씀으로 말미암아 영혼들이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되 신실한 목회자 아래에서 깊은 감화를 받으면서 자라가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동역자라고 불러 주었지만 디모데는 바울을 아버지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를 존경하나 존중하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드렸습니다. 바울을 바울되게 하신 하나님은 그들 주위에 많은 동역자를 두셔서 함께 일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위해서 기도했겠습니까?
교인과 교역자의 인격적인 관계가 지속되려면 먼저 말씀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제자를 삼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는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삶 또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감화를 받게 하는 삶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리고 내가 깊은 곤궁에 처해있을 때 생각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르치는 이상의 삶을 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늘 뜨겁게 사랑하지만 그 표현은 절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자식의 사랑 속에서 잠겨져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바울이 디모데를 회상할 때 눈물을 생각했습니다. 디모데는 좀 유약한 사람이었고 디모데가 이렇게 복음 하나에 매여서 충성스럽게 바울을 도움으로 하나님의 복음의 사역을 이루는 온전한 일꾼이 되기까지 그는 태어난 것이 아니고 만들어졌습니다. 불과 물의 시련을 통과하면서 연단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되어지도록 모범적이 동역자가 되기까지 하루 아침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래 참는 가운데 연단되어지며 성숙되며 디모데라고 하는 사람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연단은 정해진 목표를 향해서 받는 시련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시련을 통해서 뭔가 결과를 맺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온갖 연단을 받으면서 복음의 가치를 더 확신하고 자기와 바울과 맺은 관계를 더 깊이 확신하고 그 속에서 깨닫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더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일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것이 이런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고 인내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서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서있고 그리스도가 엎드린 곳에 나도 엎드리고 그가 십자가를 지고 간 길을 나도 걸어 올라가고 이러한 목표가 있고 삶을 향한 몸부림이 그에게 연단이 되게 만든 것입니다.
이 연단은 피해 갈수록 안 깨집니다. 연단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들로 열린교회에서 이런 좋은 동역자로 하나님을 깊이 알아 가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2. 에바브로디도Ⅰ
“나도 속히 가기를 주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 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함이니라”(빌2:24-30)
지난 시간에는 디모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모범적인 동역자 두 번째로 에바브로디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은 로마 옥 속에 있었습니다. 그 때 이 빌립보교회가, 아마 에바브로디도 요즘으로 말하면 전도사쯤 되었을까요, (? ) 쓸 것을 보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문안하러 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대신해서 왔다가 그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큰 병에 들어서 몸져눕게 되어 제 날짜에 빌립보교회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이 이미 빌립보 교회에 사람들의 소문을 통해서, 에바브로디도가 바울 선생님을 문안하러 갔는데 거기서 병에 걸려서 제 날짜에 못 온다는 소문이 빌립보 교회에 들렸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근심하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 전도사가 가서 아프다는데 어떻게 되었나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에바브로디도가 그 교인들의 근심하는 소식을 듣고 또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지말고 속히 가보라고 하면서 이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 교회로 돌려보내는 이 이야기를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큰 일에 쓰이는 사람이 있고 작은 일에 쓰였기 때문에 성경에 그렇게 유명하게 안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꼭 하늘나라 상급의 다과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이 어디에 사용하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지만, 그 중에는 크고 훌륭한 일에 쓰임 받을만한 지도자적인 자격을 갖지는 못했지만은 자기가 처한 그 위치에서 정말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해 나갈만한 그런 일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에바브로디도도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성경이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든지 선교의 한 장을 새롭게 연 사람이었다든지 그런 역사적인 인물로서 그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빌립보 한 교회를 돕는 말씀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바브로디도를 보면서 우리들은 바울과 함께 동역하는 모범적인 동역자의 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에바브로디도와 바울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동역자의 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에바브로디도는 누구인가 하면 바울 자신의 고백으로,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며 함께 군사 된 자라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 에바브로디도가 자기와 함께 복음사역을 위해서 동역하는 동역관계 이전에 한 형제였다는 사실을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육신의 한 형제 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피로 구속함을 입고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역의 관계는 바로 이런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동역의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각자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한도 안에서 그 관계가 지속됩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동역의 관계는 먼저 탄탄한 형제 됨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동역의 관계에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주일학교 선생을 할 때 주일학교 교사들이 먼저 그 안에서 전도사님과 한 형제 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각자가 예수를 만난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그 사람들이 모여서 한 형제 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정확하게 말해 그 동역하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형제 됨의 그 관계의 깊이는 각자 하나님과 그 자신이 아버지와 아들 됨의 관계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다시 말해 함께 모여서 모인 동역자들이 형제 됨을 누리는 그 깊이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녀 됨을 누리는 그 깊이에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관계를 누리고 사는 것과 함께 모였을 때 형제 됨의 관계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극단적이어서 개인적인 관계만을 아주 중시하고 형제 됨의 관계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라는 그런 어떤 신앙의 변화 이런 것들을 촉구하지 않고 함께 모여서 서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것 같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데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생각할 때에 그 사람은 내 졸병이라든지 내 비서라든지 내 부하라든지 그런 생각이 든 것이 아닙니다. 무슨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까? “그는 나의 형제라”입니다.
무엇이 이 이방인인 에바브로디도와 유대인인 바울 이 사람을 마음 깊은 곳에서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관계로 만들어 주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 바로 그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든 하나님의 일꾼들과 더불어 동역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깊은 체험을 지녀야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그 안에는 진정한 의미의 형제 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흥이 일어날 때에 사람들은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진심으로. 그러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느낄 때 그리고 그 사랑에 의해서 주장 받는 삶을 살 때 그 때에 비로소 사람을 깊이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야합니다. 이제 6월 4일날 교회 생활 세미나에서 이 이야기를 좀 풍부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함께 한 형제 되어 가는 그런 노력들을 기울이려합니다. 그렇지만 완전한 사랑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지배할 때 그 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울이 에바브로디도와 함께 깊은 형제 됨을 누렸습니다. 그런 형제 됨을 누리는데 지금 그는 나의 형제라고 말하는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입니까? 아니면 바울입니까?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됩니다.
(예화) 같이 공부한 학생이 목사가 되었는데, 한 형제가 찾아와서 ‘형제 대 형제’로서 말 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그 말은 당신 할 말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해야할 말이라고 함.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에게 말하지 않고, 바울이 에바브로디도에게 그는 나의 형제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예수그리스도께서도 우리들에게 그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이 할 이야기를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뭔가 원리가 자꾸 깨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친구와 같이 대해 주신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15장에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얘기는 당신 자신의 죽음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노예나 소유물처럼 보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실 때 우리를 친구처럼 생각하였고 그래서 당신의 다정한 친구인 우리들을 위해서 그 사랑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생명을 버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친구와 같은 놀라운 친밀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그 결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라고 부르면 안됩니다.
옛날에 어떤 정치인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형님이다 그래가지고 교회의 빈축을 산 적이 있는데 그렇게만 따지면 형님이라고 한 것은 또 지나치죠. 친구라고 불러도 됩니다. 예수는 나의 친구다 그렇게 불러도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셔야 할 말씀이지 우리가 그 분에게 할 말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이런 것들을 교회 속에서 지켜나가야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것을 배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는 나의 친구라 이렇게 요한 복음에서 말씀하셨어도 바울은 자신을 감히 예수의 친구라고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다메섹 가는 길에서 만났을 때에 내가 너를 사환과 증인으로 삼았다고 말씀했지만 바울은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자기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환이요 증인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자기의 신분을 고백했습니다. 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종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고백을 한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마음 깊은 곳에서 형제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가졌던 그 권위가 어땠겠습니까? 아마 우리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그런 권위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적은 있었습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 그 분 앞에만 서면은 이상하게 껍데기가 벗겨지는 것 같은, 저 분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내가 이렇게 마음을 한 풀 탁 접으면서 자꾸 이야기를 하는데, 가만히 웃고만 있는데 그 웃음 앞에서 그게 나한테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왠지 껍데기가 벗겨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 사람, 그게 말하자면 권위입니다. 형사들 앞에서 받는 그런 느낌하고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 에바브로디도가 바울 앞에 섰을 때에 말하자면 그런 깊은 권위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형제라고 불러주었습니다. 형제 사이에는, 호적상에 형제로 등록이 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사이에는 무엇이 흘러야 됩니다. 형제애가 흘러야되는 것입니다. 형제의 사랑이 흘러야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내리사랑인 것 같습니다. 물론 교인들도 교역자를 존경하고 사랑 하지만은 그러나 그런 메아리가 잘 안될 때에도, 말하자면 연약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이 위로부터 아래로 흘러 내려갑니다. 형제라고 불러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바로 동역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그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어떻다고 했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고?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지 않고 형제가 서로 물고 뜯으면서 함께 하는 것, 그것은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루어지는 형제 됨의 기쁨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섬기는 관계 속에서 생겨나야 됩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여러분들이 중고등부에서든지 청년부에서든지 혹은 장년부에서든지 다 마찬가지지만, 어디에서 봉사를 하든 그 속에서 형제 됨을 이루면서 자신을 깎으며 진실한 사랑을 나누게 되는 것, 그것도 하나의 훌륭한 훈련입니다.
그 속에서 그렇게 만나는 만남이 아주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작은 천국이 이루어져 오랫동안 형제들을 보지 않으면 보고 싶어지고 그리워지는 것 같은, 그런 그리움들이 생겨나는 것 그런 것들이 바로 형제 됨입니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와 그런 관계를 가졌는데 그 관계가 동역의 기초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함께” 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여’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참된 동역의 관계는 말하자면 운명공동체와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공통된 섬김을 통해서 공통된 간절함을 가지고 있어야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전도자였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옥 속에 갇혀있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빌립보교회 뿐 아니라 수많은 교회를 돌보는 사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바브로디도 속에 있는 목표와 옥 속에 갇힌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사역의 목표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공통된 목표의식을 가지고 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공통된 목표의식을 갖지 않고 같은 고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같은 고민을 하지 않으면서 함께 수고한다라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이 동역자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함께 수고하는 것입니다.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였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동역의 관계가 함께 뭘 나누어 먹었다 그런 이야기가 안나오고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였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는 동역하는 그 관계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고와 고생이었고, 그리고 끝없는 영적인 전쟁과 전투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함께 수고하고 나면 그 다음에 대가와 보상이 주어지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는 관계에 있어서는 세상에서의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보상받는 것을 너무 좋아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뭐로 보상을 받겠습니까? 여기에서 다 가불해서 쓰고....
그런데 교회 안에서 보면은, 이런 보상에 대해서 사람들이 의식을 갖게되면 마음이 상하게 되고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끼리 서로 자기가 받는 보상이나 이런 것들을 기대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마음이 상하고 하는 것들은 전부 다 목표가 그리스도로 향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 에바브로다도와 함께 수고하였다 이렇게 말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빌립보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이 사람은 로마 옥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기 가는 길이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떨어져 있어도 함께 수고하는 자였습니다. 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 섬기는 섬김의 모든 가치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이 바울과 그리고 에바브로디도가 동일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런,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역의 관계에 들어선다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일이 잘되는 것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가 부흥한다할 때 속이 꼬이는 것은 전부 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온전한 성령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전도를 했는데 많은 사람이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더라 그러면 설마 하면서 한풀 접는 이런 마음도 전부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네 반은 계속 우승을 하고 많이 모이더라할 때, 그것 인간적인 방법이 아닐까 하는 이런 마음들, 그런 옳지 못한 생각들이 우리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바울은 명백하게 그 동역의 관계가 함께 수고하는 관계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함께 죽을 고생을 하면서 목회를 하기 위해서 고난을 넘치게 받을 때 그 속에서 무슨 동역이고 뭐고 생겨나는 것이지, 평안하고 매일 노는 그런 관계 속에서는 동역의 관계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함께 한 목표를 위해서 몸 바치고 헌신하며 충성할 때 그 때에 참다운 인생의 뜻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학교에 있으면 전도사를 구해달라는 전화가 자주 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별로 추천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추천 후 잘하는 사람에 대한 고맙다는 전화는 오지 않고 일 년쯤 후에 형편없다는 전화만 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추천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꾼이 지극히 소수입니다.
인생의 모든 동기와 그리고 이 세상에서 받을 모든 보상과 인간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오직 목표 하나가 하나님 그리고 그의 영광과 복음의 일을 위해서 수고하도록 자신을 정리시키고, 그 일 하나를 위해서 함께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받으려고 하는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일꾼들이 너무나 소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갈 길이 없는데 교회는 여전히 일꾼이 없어서 기근인 시대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전부 다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군사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이 이 에바브로디도를 추천할 때에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의 사자로 함께 군사된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자기의 목회사역, 선교사역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라고 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진실한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투적인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약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전에 어느 교회에 있을 때에 6개월에 한 번씩 그만두겠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는 매 년 하는 이야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를 쓰는데 그 일이 뜻대로 잘되지 않을 때 얼마나 마음이 타고 안타깝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마다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눈에 군사로 보였습니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이렇게 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전투적인 생애를 사시면서 그렇게 고난을 받으며 살아가셨기 때문에 그 뒤를 따라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그런 전투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사역을 하면서 정말 전투적인 삶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굉장히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충만한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그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좀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를 받은 다음에 받은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인생의 어떤 목표의식에 불타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수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그는 분명한 목표의식 속에 살았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로마도 봐야하리라,( ? )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나니 예수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몸부림 속에서 살았습니다. ( ? )보고 그리고 자기의 복음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 올 때에 그 때에 우리는 전투적인 삶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생각하면 그 사람은 진정한 군사였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에바브로디도가 자기 교인들이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근심한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마음이 상해서 안타까워하고 있는 이런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참된 사랑에서 비롯된 연약함이고 그는 바울이 생각하기에 강한 군사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바울의 동역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로서 살아가는 바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이 또한 군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 주일학교든 선생님이든 청년부 리더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은 우선 좋은 사람이 되기 전에 강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왜? 강한 사람만이 강한 사람을 강한 사람으로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고등부 선생님이 전화하는 것을 우연히 옆에 앉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를 나오지 않는 학생에게, 완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10분 이상 통화하며 마지막 결론은 그래 때가되면 나오겠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영혼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는 강함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하고 전투적인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일주일 동안 교회를 떠나 있으면서도 어디서 흩어져서 어디서 살아가는지 그 모든 영혼들을 하루하루 다 알아야된다 그런 말도 성립할 수 있습니다. 전 옛날에 제자 훈련할 때 집에 앉아 있으면, 그 제자훈련 받는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손바닥 보듯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주일의 생활 계획을 시간 단위로 전부 다 제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일주일 동안 떨어져 있어도 기도로서 그들의 영혼을 지킬 수 있는 그런 군사와 같은 목자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그 품에서 쉼도, 승리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칠 때에도, 복음을 전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 영혼 깊은 곳에 영향을 주고 충격을 줄 수 있는 그런 간절한 몸부림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혼들의 참다운 변화가 그 안에서 일어나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렇게 자기교인들을 위해서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머리 속에 에바브로디도는 군사로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어디든지 영적인 전투에서 밀리고 있는 그 곳에 그를 보내면, 그 영적인 전투의 판도가 변화되리라는 기대를 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동역자의 참된 모습입니다.
3. 에바브로디도Ⅱ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 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빌2:26-27)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오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에바브로디도가 무슨 신분이며 어떻게 해서 바울과 동역자가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는 형제였고, 또 함께 수고하고 군사된 자로서 빌립보 교회를 대신해서 바울을 돕는 사람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의 동역자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바브로디도 말고 다른 사람들도 바울 곁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빌립보서 짧은 편지에서는 꽤 긴 지면을 할애하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기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영혼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다른 모든 인간적인 재능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질입니다. 다른 모든 인간적인 자질들은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마음이 그에게 역사하고 있을 때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에바브로디도를 높이 천거하고 있는 이유는 바울이 에바브로디도 속에 있는 교인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게 자기의 영혼이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는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영혼을 향한 이런 뜨거운 사랑이 있으면 다른 것들은 비교적으로 적게 문제가 됩니다. 그렇게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그가 섬기는 사역들이 의식과 위선에 흐르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들을 가리키거나 성도들을 돌아보면서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는 가운데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불행한 것이고, 교회에도 불행한 것이고, 섬김을 받는 영혼들에게도 불행한 것이고, 그렇게 섬기는 자기 자신에게도 불행한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에게 높이 추천 받은 이유는 그 속에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타오르고 있는 목자적인 뜨거운 사랑을 바울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추천할 때 에바브로디도의 마음속에 있는 교인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추천했습니다. 우리는 에바브로디도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에바브로디도에게는 빌립보 교인들을 섬길 수 있는 놀라운 자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이것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위해서 동역자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꼭 가져야 할 필수적인 자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이것은 자질이기보다는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영혼을 사랑하는 동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고, 섬길 수 있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복음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고 영혼에 참된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인도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는 그 속에 예수의 교훈만이 부어져서는 안되고, 예수님이 무리를 민망히 여기면서 가르치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교훈과 함께 마음도 그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돌보는 것, 그것이 있어야지만 비로소 우리는 영혼을 위해서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들이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어떻게 하든지 그 성도를 세우고 그 지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힘을 쓰고 애를 쓰는데 그 일들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의 고통을 받고, 상처를 받고, 시험을 느끼고, 그리고,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일들이 어려움에 봉착하면서도 거의 그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아닙니다. 선한 목자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비록 목회자에게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영혼을 향해서 사랑하는 마음과 그 영혼의 유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갈망들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다른 모든 섬김들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지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그러나, 사람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삶의 차이를 크게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 지식만을 집어넣으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해도 그대로 살 힘이 없거나, 그렇게 살고자 하는 내면의 소원이 없으면, 그 아는 것이 모르는 것과 별로 삶을 다르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영혼 깊은 곳에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며 살기를 갈망하는 데 지식이 없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어떻게 믿는 것이 참 성경적으로 믿는 것인가를 가르쳐 줄 때 그는 마치 힘이 있는 말에다 날개를 달은 것과 같이 그렇게 신앙이 하늘을 향해 박차 오를 것입니다.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을 때 영혼을 돌보고 그 영혼이 자기의 섬김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고, 그 영혼이 자기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참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안에서 자라가기를 원하는 뜨거운 사랑이 그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을 때, 그때에 비로소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능들과 지식들은 놀랍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기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영혼들을 돌보는 도구들을 가진 사람과 안 가진 사람은 섬기는 성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지금은 소를 가지고도 밭을 갈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소로 밭을 갈고 논을 갈았습니다. 소가 큰 재산이었는데, 화전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소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밭을 갈겠습니까? 남자 어깨에다 쟁기를 매어 가지고 사람이 그것을 잡아당기며 밭을 갈았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잡아당기니-(쟁기가 땅 속으로 푹 들어가 땅속으로 한 50cm이상 들어가 잡아 당겨야지 흙이 뒤집어지고 묵은 땅이 기경되는데 그렇게 50cm씩 푹 박으면 사람이 그것을 끌고 갈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20cm씩 박아놓고 그 다음에 졸졸졸 끌고 가는 것입니다.) 기경이 안되는 것입니다. 쟁이마저 없는 사람들은 삽으로 하거나 괭이로 밭을 갈았습니다.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나겠습니까? 똑같이 묵은 땅을 기경해 가지고 밭을 만들고자 하는 그런 열망은 있어도 도구에 따라서 얼마나 커다란 성과를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그 자체가 그렇게 묵은 땅을 기경해 가지고 경작지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개척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갔다 주든지 성과는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본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마음에 꼭 들어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쯤 됩니까? 저는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모르지 여러분들이 마음에 들어하면 많아질 수도 있겠지요)
자기도 그런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어디 그렇겠습니까? 옛날에 어느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마음에 맞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도 내가 마음에 안 듭니다.’ 자기도 자기 마음에 안 드는데, 누가 자기 마음에 들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교회에 일꾼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자질-그것 하나가 충실하면 할 수 없이 그저 부족해도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학교를 나오고, 얼마를 배우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선생이나 중 고등부 선생이나 구역장이나 리더나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얼마나 영혼을 향한 간절하고 진실한 사랑이 있는가? 이것은 인간적인 모든 재능과 선천적인 모든 재질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영혼을 향한 간절한 사랑이 있을 때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향한 간절한 사랑이 있어야지만 영혼들을 향해서 봉사할 힘과 능력이 생겨 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을 향한 사랑이 있는 사람들이 영혼을 돌보고 전도를 하고 그러면 재능에 따라서 성과가 느릴 수는 있지만은 꼭 열매를 걷습니다. 잠시는 실패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꼭 성공을 합니다.
그러나, 간절히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자신의 유익한 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열매가 적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이 실망을 잘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바울도 에바브로디도를 그렇게 본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를 이야기하면서 그가 제일 먼저 꼽았던 것은 그가 간절히 너희 무리를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얘기는 사도 바울 자신과 같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다.’
그런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추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바로 그런 사람들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배우고 얼마나 많은 재주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배우면 습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은 배워서 습득이 안되는 것입니다. 배워서 습득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배워서 습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향한 사랑이 교회에 결핍되어 있으면 다른 모든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구역장이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성도들을 돌아본다면 반드시 그 구역에는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일학교 선생들이 영혼을 향해서 간절히 사모하며 뜨겁게 그 영혼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 가르침 속에는 사랑이 가져다주는 권위가 깃드는 것입니다.
옛날에 고등학교 다닐 때 식구들로 인해서 고생을 많이 한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죽었습니다. 얼마나 가정 환경이 어려웠는지 머리는 아주 똑똑한 친구인데... 똑똑하니까 자기 자존심도 많고 편견도 많았습니다. 저는 먼저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친구는 후에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등록금 낼 때만 되면 학교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나, 그 때는 등록금을 마감 시간이 되면 선생님이 독촉을 하면서 학생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누구 누구 나와 밖으로 나가.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자존심이 상하니까 등록금 납부기간만 되면 아예 학교를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한 분이 계셨는데,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를 부르시더니, 가서 그 친구를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교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벌떡 일어나시더니 따귀를 냅다 후려 때리는 것입니다. (찬찬히 때리지 때릴 체구도 별로 없는데...선생님은 건장하셨습니다. 쫙 하고 때리는데-하여튼 때리는데 도튼 선생님이었습니다) 때리더니, 엎드려 뻗쳐를 시키고 작대기로 마구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희 학교는 많이 때렸어요. 오죽하면 학교에서 목공소에 몽둥이를 발출을 했습니다. 그래서 싸놓고 때렸습니다.) 막 때리면서 그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놈의 자식, 누가 너보고 학교 나오지 말라고 그랬어.” 그러면서 막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얻어맞고 나왔습니다. 들어가서 공부하라고 그래서 나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선생님이 자기 봉급에서 등록금을 내주었던 것입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학생들 등록금 4-5명 내주면 생활비가 없을텐데 그 등록금을 내 주었습니다. 이미 선생님은 그 아이를 긍휼히 여기고 그런 사랑이 있으니까 자신있게 몽둥이를 가지고 두들겨 패면서도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으니까 그렇게 두들겨 맞아도 그 선생님이 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소위 얘기하는 사랑의 권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돌보고 목양을 하는 데에는 이런 것들이 전제가 되야 하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마음속에 이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목자 되게 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사가 된다, 구역장이 된다, 목회자가 된다, 아니, 이런 것이 안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를 믿고 사명를 감당하며 산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해서 그 사람들이 영혼이 잘되고 축복 받는 것을 인해서 아무 대가 없어도 즐거워하는 것-그 영혼 때문에 즐거워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동역자의 자질인 것입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생각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혼을 깊이 사랑하고 지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반적인 마음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기심과 자기만을 위하는 욕심과 열심들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이 깨뜨려져서 영혼을 사랑하게 되고, 나와는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믿음이 좋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의 공로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즐거이 자신을 허비할 수 있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먼저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임을 깨닫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성도들을 부를 때 하나님을 받는 자녀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영혼의 가치를 알고 그 영혼의 존귀함을 아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가 하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 영혼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심으로 영혼을 사랑하고 무엇을 행하든지 가식이나 외식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섬기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들이 우리에게 주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게 된 아주 작은 교회(톱밥 난로를 피우는)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어느 자매가 그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에는 걸레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 기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청소를 할 때 교회가 나의 이 노동을 통해서 깨끗하게 청소되는 것처럼 이 청소하는 일을 통해서 주일날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기 전에 내 마음도 함께 정결하게 해 주시고,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비록 섬기는 일은 냄새나는 걸레를 가지고 추운 겨울날 손을 불면서 바닥을 한 번 닦고 지나가는 일이지만 그 태도가 어떻냐에 따라서 하찮은 섬김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실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런 자세가 갖추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여러분들을 돈더미 속에 숨을 못 쉬게 만들어져도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를 높은 지위에 올려 주어도 하나님을 향해서 이러한 삶의 자세가 안되어 있을 때,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을 찬송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아 알고 깨달을 때 빌립보 교회들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하나님의 사역에 동역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에 충성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려고 애를 썼고, 또, 율법의 의(義)로는 흠이 없는 삶을 살려고 했던 그 사람이 마지막에 깊이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야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 그런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놀라운 사랑이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영혼들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고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이런 사랑으로 하찮은 일들을 가장 진지하게 그리고 가장 작은 직분을 가장 충성되게 하나님 앞에 수행할 수 있는 이런 마음들을 가지고 있을 때 주님의 더 큰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교인들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했던 사람입니다. 이 에바브로디도가 깊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위급한 병 때문에 근심에 빠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근심하고 있는 것은 자기가 병든 사실이 빌립보 교회에 알려져서 그들의 마음에 자기가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사람에게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죽어도 지체들이 살고, 나는 괴로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해도 영혼이 유익을 얻게 되는 삶을 택했던 사람입니다.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지체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유익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사람- 그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 -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이 섬김과 일을 통해서 누가 혜택을 받을 것이냐?, 그것이 나일 경우에 언제든지 그것을 피하려고 하고 그 결정을 통해서 양떼들이 유익을 받고 성도들이 유익을 받게 될 때 기꺼이 그 선택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도록 불러 주시고 싶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우리는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구하고 양떼들의 유익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눈을 멀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결점을 보이지 않게 만듭니다. 그리고 또 장사꾼과 같은 기질을 가지고 가치들을 저울질 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사랑이 그것을 시키는 것입니다. 영혼에게 작은 유익이 되더라도 기꺼이 그 영혼에 유익을 주는 길을 택할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중차한 교회의 일로 인해서 여기까지 왔고 그래서 깊이 분명히 빌립보 교인들이 섬겨야 할 그 일을 섬기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 깊은 병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병과 육신의 고통을 돌아보는 대신에 자기를 위해서 근심하고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들의 근심을 면하게 해 줄 수 있을 지에 대해서 걱정하는 이런 마음을 가진 목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영혼을 위해서 섬기는 우리들이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영혼을 돌보고 섬기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선한 목자가 있겠습니까? 선한 목자는 양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의 유익을 버리는 것입니다. 평안하고 희생을 요구하지 않고 그리고 자신을 허비해야 되는 때가 이르지 아니해야 될 때에는 그가 참 하나님의 일꾼인지 그렇지 않은 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의 유익을 포기해야 하고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버려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때에 선한 목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그 요소가 과연 세상이나 세상이 주는 것들인지 진심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인지, 영혼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고 있는지 그 모든 것들이 바로 그런 때에 판별이 되어 진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꾼으로 불러 주셔서 하나님의 양떼를 맡기시고 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구령(求靈)의 사명을 맡기셨을 때 우리가 진심으로 그 영혼을 사모하고,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면서 살지 않는 사람들일 때, 우리가 선한 목자가 되지 못할 때, 그 때에 선한 목양의 일꾼이 되지 못할 때에 일에 있어서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도 실패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역장을 맡고 있든지, 전도사를 맡고 있는지, 주일학교 선생을 하든지, 중 고등부 선생을 하든지, 청년부 리더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여러분 자신을 거기에 던져야 합니다. 그것은 영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자신을 던져야 합니다. 허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마음도 생겨나고, 가난한 마음도 생겨나고,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서 영혼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무슨 유명한 집회가 있으면 열심히 좇아 다니는데 영혼의 참된 변화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데,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이 찾는 사람으로 여겨 주시겠습까?
여러분,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영혼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지체들의 유익을 위해서 나를 허비하면서 사는 삶이 없다면 가난한 마음이 들 수가 없습니다. 오늘 하루를 물질적인 만족을 누리면서 안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마음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가난해지는 것은 뭔가 높은 곳에 도전할 때에 가난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잔다면 나의 무능력을 한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밥 먹고 놀며 자는데는 능력이 필요 없습니다.
어떤 때 가끔, 특히 설교집 같은 것을 보면서 ‘수 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세상에 어떻게 말씀을 놀랍게 펼칠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게 합니다. 보다 높은 곳에 도전하려고 애를 쓸 때 자기가 얼마나 무력한 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슨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가 설교를 좀 잘하는 것 같다.’ 라고 느낄 때에는 윗필드의 전기를 읽는다. 그러면, 나는 비로소 분수를 알게 된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를 좀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에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때 비로소 자기가 기도에 있어서 얼마나 새까맣게 먼 수준에 있는 사람인가를 깨닫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여,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을 아무런 것들도 없이 그냥 정신적으로만 ‘나는 어차피 주님을 위해서 살 사람이야’ ‘언제, 언제, 언제 사냐구요?’ ‘이 다음에요’ 이 다음에는 여러분의 날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자신을 다 던지지 못하는 이유는 많습니다. 그렇게 이유가 많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 받는 사람들이 드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삶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일들을 하면서도 절망을 많이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위해서 영혼을 사랑하면서 가장 잘 절망합니다.
제가 옛날에 내수동 교회에 있을 때 정말 겸손합니다. 겸손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요즈음도 저는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혼들을 한 74명 맡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한 달에 한 번씩 설교를 하셨습니다. 참 훌륭하십니다. 야단을 안 치시고 그 기관이 마음에 안 든다 생각되시면 한 시간 전에 나오셔서 가만히 앉아 계십니다. 어느 날 헐레벌떡 교회를 갔는데 9시에 예배를 시작하는데 8시 10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컴컴한 예배실에 누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불을 켜니까 목사님이 가만히 거기 앉아서 성경을 읽고 계시는 것입니다. 많이 찔렸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설교를 하러 올라 가셔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 이것 밖에 안 남았냐?’
74명이 나왔었는데 다 줄어들어서 35명이 나왔습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내가 이만큼 교회에서 봉사하는데 사례금은 얼마 주고... 그것은 다 지금 좋은 얘기지,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 살수가 없었습니다. 이럴 때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만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그만두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리포트를 내라 하면 하고, 가르치면 그런가 보다 하고, 설교하면 아멘 하면서, 교수한테 꼼짝 못하니까 교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문제를 해결하는 듯이 떠들어도 교회에 가서는 겸비해 지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안 나와서 믿을 수 없고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이 이제 책가방 건너 놓고, 달동네부터 시작해서 한 집 한 집 문을 두드리면서 심방을 다니는 것입니다. ‘왜 안 나오니?’ 하다가 안되면 ‘제발 내 얼굴을 봐서라도 좀 나와라’ ‘내가 이렇게 얼굴이 삭었는데 안 나올래’이렇게 하면서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너무나 비참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무능한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도 내가 죄가 꽤 많다고 생각하는 바이올시다” 이런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삶 전체로 주님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영혼을 섬기고 참 영혼을 사랑하는 그 자리에서 참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어 보려고 하는 그런 구령(求靈)에 대한 갈망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가난한 마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뒷면) 그것은 영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자기 한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 다 그만두고 주일날 교회에 잠깐 나와서 예배나 드리고, 가고 교회를 위해서 아무 것도 섬기는 것이 없을 때 어디서 한계를 느끼겠습니까?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필요로 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다 자기 잘 났지요. 진짜 겸비해 지더군요.
선생들이 세상으로 보면 전부다 학교에서 좋은 일류 대학교 다 나오고, 카이스트에 근무하고, 심지어는 열 단계 성서 교재를 일곱 여덟 번 씩 가르치고, 그리고 대학교수까지 선생님 중에 있는데, 있으면 뭐 합니까? 다 떨어지고 한 사람도 안 남아 가지고 공과 시간 되면 혼자서 앉아서 주여, 주여, 그 기도는 일 주일 동안 해야지, 왜? 거기 와서 그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나 같으면 창피해서라도 얼른 일어나서 찾아오기 위해서라도 나갈텐데 거기 앉아서 주여, 주여 -그것은 일 주일 동안 기도하고, 안 나왔으면 전화를 걸어서 한 사람이라도 불러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아는 사람은 교사를 하고 나서 오히려 주일을 계속 빠지는 사람을 봤습니다. 그것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결국은 그냥 두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 한계를 넘어야 하는데 못 넘는 것입니다. 영혼을 향한 사랑이 부족하니까 그런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런 면에서 교인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 마음속에 있었던 교인을 향한 이런 사랑 자신의 유익을 버리고 교회의 유익을 전심으로 구하고 싶어하는 이런 사모하는 마음들-이게 어느 날 침대에 누워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다 던진 것입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 파트타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쩔 수 없어서 일주일에 몇 번 밖에 못 나오지만은 그것이 내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거기에다 자신을 다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이 잘되는 일을 위해서라면 내가 모든 것을 다 허비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던져야 됩니다. 그런 태도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나아가면 반드시 부흥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리고 설령 하나님이 뜻이 계셔서 그가 그 자리에서는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을 전도하거나 그 영혼들을 부흥시키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는 그 자세가 자신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인격이 고매하고, 마음이 온유하고, 잘 참고, 이해심이 많고, 그리고, 뜨거운 불을 마음에 늘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 치고 영혼을 위해서 수고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과정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에바브로디도를 높이 평가했던 것은 바로 영혼을 향한 이런 간절한 사모함과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교회의 유익을 구하는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추구하는 것을 영혼을 섬기는 삶을 통해서 드러내 보여줄 때 우리가 그런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더 큰사랑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아버지께도 사랑 받을 것이요 나도 저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던져야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래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주일날 나와서 그냥 좌상처럼 앉아서 오는 영혼들을 가리킨다는 -시간이 되어서 가게문을 여는 사람과 같은 그런 태도라면 그 영혼들도 하나님이 데려 가십니다. 정말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고 허비할 때-영혼을 위해서 나의 유익을 포기할 때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 속에 유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기회들을 영혼을 위해서 포기할 때 하나님께서 영혼 속에 참된 유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아가게 만들고 예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버리고 교회의 유익을 구하고 양떼들의 유익을 구할 수 있는 이런 삶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 일에 있어서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옛날에 직장에 다닐 때 기드온 협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선교를 하는데 사람들이 성경을 잘 사지 않아서 기드온 협회에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성경을 자기네 회원들이 가서 그 성경을 직장 앞에서 줄서서 건네주겠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금상첨화인 것입니다. 직원이 엄청나게 많으니까 굉장히 많은 성경을 차에다 싣고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회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늦게 오니까 회원들을 막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밖에 서 가지고 ‘도대체 지금 몇 시인데 인제 오는 겁니까?’ 그런데, 그 회원들이 누구냐 했더니 전부다 한 40, 50, 60세 되신 아저씨 할아버지인 것입니다. 금테 안경을 쓰고, 부티가 나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름을 내노라고 하면 다 아는 유명한 기업체의 회장, 사장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돈 많은 사람이 아니면 기드온 협회에서 명함을 못 내민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돈으로 그것을 찍어 가지고 차에다 싣고, 기사는 저기다 세워 놓고 그리고 자가용에서 내려와서 돌계단에 서서 그것을 직원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늦게 왔다고 회장한테 야단 먹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주고 욕먹는 격인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엄청난 돈 내놓고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겠습니까? 영혼을 건지고자 하는 유익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진정한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정말 가난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가난해져야 된다고 하는데 자신이 보다 자기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삶을 추구하기 전에는 자신의 한계를 인간이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어디 가서 얘기해 봐도 다 저 잘났다고 하지 누가 자기 못난 사람 함께 하는 그런 모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기가 지금 살지 못하고 마땅히 살아야 할 삶에 도전할 때 그때 자기가 깊은 한계를 느끼고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과 전폭적인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안 된다고 하는 갈망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향한 사랑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동역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