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을 치는 것과 가르치는 것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지난 시간에는 돈을 꿔주는것에 대하여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양을 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드릴테니 해당이 되는 사람들은 깊이 각성하고 교회의 질서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었고 신앙적인 제자였습니다. 디모데가 나이도 어린데 경험도 미숙한 가운데 목회지에서 많은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이 안쓰러운 마음에 이 사랑하는 아들이요 제자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가르치는 권한의 위임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이때가 초대교회였는데도 가르칠 수 있는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들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고, 있다가 없어졌지만 선지자들도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언도 물론 있지만 구약의 말씀을 잘 풀어서 모세오경의 정신을 그 변화된 시대에 맞게끔 말씀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성경교사들이었습니다. 거기에 또 누가 나오나 하면 목사가 나옵니다. 이 목사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목양의 질서 속에서 한 지역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가르치는 직분이 많았고 또 교사가 나옵니다. 이 교사는 오늘날 주일학교 교사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박사입니다. 그래서 학문이 아주 높은 사람이 전문적으로 신학과 성경을 가르치는 직분이 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서구에는 중세시대에도 교회의 박사라고 해서 고매하고 높은 학문을 가진 사람, 특히 신학과 성경에 대하여 그런 출중한 사람을 교회의 교사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교회가 교회의 질서를 거론할 때 그 교사를 목사 다음에 거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비록 학문에 있어서는 그 교사만 못해도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자로서 가르치고 다스리고 그리고 거기에 그를 학문적으로 도와서 일하는 그런 전문적인 교회의 박사가 있었다 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왜 장로는 안 들어가는가 하면 장로는 원래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를 목양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인 기능은 가르치는 기능이고 소극적인 기능은 잘못했을때 그것을 바로잡는 기능인데 장로들에게는 적극적인 가르치는 기능이 없고 교회의 목회자를 도와서 바르게 하는 일에 이바지하도록 그렇게 장로를 세워서 일을 하였습니다. 목사는 한편으로는 장로의 기능을 하고 그래서 교회를 치리하고 바르게 하고 한편으로는 말씀을 가르치므로 목양을 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 두가지 기능을 목사는 함께 가지고 있고 그리고 장로들은 한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고 교사는 이쪽 한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교회가 양날개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렇게 세워진 질서 속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교인들이 많이 늘어 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전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의 교사나 목회자나 선지자나 혹은 사도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기가 쉽지 않은 지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목회적인 지혜를 가지고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목회의 훈수를 두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훈수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화를 입은 가운데 교회를 위한 성경의 저자로서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또한 단순한 충고가 아니라 주님이 이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요, 이 말씀을 통해서 또 교회의 질서가 세워지는 것이라고 우리가 이렇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면 핵심은 이런것 같습니다. 네가 혼자 몸으로 그 많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니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충고해 줄게 어떻게 하는가 하면 너희 교회의 일꾼들에게 교인들을 가르치는 그 일을 부탁해라 그러면 그 사람들도 너의 교인을, 양떼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매우 중요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두 조건이 붙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첫째로는 이렇게 너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말씀 그러니까 그것을 여기에서 뭐라고 이야기했는가 하면 결국은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치는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가르침이라는 것은 결국은 둘로 나뉘어 지는데 믿어야 할 교리와 살아야 할 교훈입니다. 그것을 성경 속에서 끌어내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 두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신앙의 지식이라고 할 때는 믿어야 할 규칙과 살아야 할 교훈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규칙과 살아야할 교훈은 모두 하나인 성경속에서 교리로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믿어야 할 규칙속에서 살아야 할 삶이 나오니까 삶은 교리와 연결이 되고 그 다음에 삶은 교리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지 않고 믿기만 하는 것, 믿지는 않고 살려고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균형잡힌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 관심 자체가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할까 두 번째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성경을 배우고 설교를 듣고 나면 이 두가지가 명료하게 가슴에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서를 단 것이 뭐냐면 충성된 사람들에게 이것을 부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해석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럼 그렇지 당연히 양떼를 가르치려면 충성된 사람에게 맡겨야지 농땡이 치는 사람에게 맡기면 교회가 무슨 꼴이 되겠는가 라고 생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충성되다' 라고 하는 말은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충성되다' 라고 하면 대게 어떤것을 이야기 합니까? 열심히 있는것 그 다음에 또 어떤것이 있습니까? 자기 헌신을 좀 많이 하는 것 그래서 충성되지 않은 사람은 살살 교회 돈만 쓰려고 하지만 충성된 사람은 자기의 자원을 많이 투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또 충성된 사람은 어떤 인상이 우리에게 충성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줍니까? 어려움이 오고 힘들어도 꾹 참고 하는 사람, 일할 때는 온산을 불사를것처럼 뛰다가 베짱이 안 맞으면 사표 쓰고 집어 치우고 떠나가 버리는 그런 사람들 보고 우리는 옛날에 피를 토하듯이 일했어도 그런 사람을 충성되다 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충성된 사람들은 그냥 어려워도 그것을 견디고 하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게 이런것들이 우리들이 보기에 충성스럽다는 말이 가지고 있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그림들은 모두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충성심입니다. 나라를 위한 충성 그 다음에 무슨 동호인 단체를 만들어도 거기에 충성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충성...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충성은 신약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충성은 구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신약성경에서의 충성은 틀립니다. 그래서 이 충성되다 라는 것을 오늘 여러분들이 잘 들으면 양떼를 목회자에게 가르치는 권한을 위임받을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다른 것은 다 몰라도 교사와 그 다음에 영혼을 직접 돌보는 구역장, 순장을 세울때에는 충성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이런 일꾼을 세울때에는 일을 시키면 그것이 위로가 되어서 한번 잘 해보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모험수를 던지면 손해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거기에 딸린 영혼들이 손해를 그대로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된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러면 충성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여러분들이 교역자로서 자기 교구의 구역장이나 순장이나 교사를 세울 때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아무렇게나 세워서 영혼을 돌보는 교사들의 팀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면 결국은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서 자기자신에게 돌아 올텐데, 부메랑이 되어서 자기자신의 목회를 힘들게 할테니까 일꾼에 대하여 엄격하게 선정할 것 아닙니까? 그때 아까 이야기한 것 같은 기준을 가지고 영혼을 돌보는 사람을 선정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있다, 자기돈을 쓸줄 안다, 그 다음에 사회적인 친화력이 있어서 사람들을 입심으로 긁어 모을 수 있다 이런 정도의 그런것 가지고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충성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신약성경에서 충성의 핵심은 뭐냐면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별명을 부르는데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시오 라고 성경이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 자신이 충성된 증인이셨습니다. 무엇을 증거 하셨습니까? 아버지와 구원의 계획을 증거하신 분이시죠? 이후로부터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충성을 받으시는데 모두 아들을 통해 충성을 받습니다. 그러면 신약의 복음적 교회가 충성된 사람들을 하나님이 모으시는 방법이 어떤 방법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사람 한사람을 예수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깊이 변화 받고 예수가 누구 인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경험을 가지고 그분 앞에 자기가 복종하고 무릎을 꿇는것을 경험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믿음과 삶에 있어서 초점이 된 사람 그 사람이 충성된 사람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러니까 충성되다 라는 것은 그 뿌리에서 나온 줄기요 가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역자들 잘 들으십시오. 그런데 구역장이라고 세워 놓았는데 전혀 예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일이 반복 되면 사역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두번쯤은 실패할 수 있지만 세우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 수가 그런 사람이다 그러면 목회자들에게 말하는데 당신이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만난 사람을 못 알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중요한 발언이니까 가슴에 깊이 새겨 들으십시오. 그렇게 사람들을 세워서 충성의 기준이 자기에게 아사바사하고 그리고 충성의 기준이 돈이나 팍팍쓰고 충성의 기준이 사람들이나 입담으로 모아들이고 수단이나 좋고 사회의 경험이나 있어서 옆에서 이렇게 저렇게 거둘 줄 아는 사람을 충성의 기준으로 대신해 놓으면 결국 그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분들의 목회가 잠식되게 되는 것입니다. 초점이 예수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에서 충성되다 라고 하는 것은 본성적인 충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거듭난 사람들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이고 예수 만나고 그분에게 꽂히고 그 영광과 그 부요함과 은혜와 그 생명과 교회에 부어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권위의 위대함에 대해서 눈뜬 사람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되었어도 장로가 되었어도 예수 못 만난 사람은 베짱 맞으면 충성 스럽고 베짱 틀리면 배반입니다. 목사라도 그렇습니다. 배신입니다. 아주 더러운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도 목회자들도 눈이 멀어서 전혀 예수 근처에 안간 사람들을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고 일꾼으로 세운 사람이 다른 일을 하면 좀 낳은데 영혼을 직접 돌보는 직분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구역을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관도 안하고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한쪽에서는 목회를 하겠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자꾸 좀 먹으면서 영혼들이 병드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가슴에 담았던 이야기를 지금 하는것이니까 목회자들은 정신 차려서 들으라는 것입니다. 충성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도 충성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교정이 됩니다. 제가 목회자인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니까 들어 보십시오. 예수 안 만난 사람입니다. 만났다 하더라도 신빙성이 의심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구원도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자기 의 속에 뭉쳐진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목회자인 여러분들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다루어 집니까? 다루어 지죠 목사님! 구역장 모여서 회의 하면 말 잘 듣습니다. 길들여진 짐승입니다. 그렇게 다루어지는 것은 다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만나고 깨뜨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교회를 섬기는데 부족하고 교회도 완전한 교회가 아니니까 열받을 때도 있지 그러면 집에 돌아가서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안 만난 사람들은 그런 작용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구역장으로 덜컥 세워놓고 어떻게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골라내는 교역자나 교역자가 구역장 하라고 한다고 자기 분수를 모르고 덥석덥석 맡는 사람이나 주님 보시기에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충성된 사람은 예수 만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충성의 동기 자체가 목회자하고 베짱이 맞는 것이 충성의 동기가 아니고 내가 교회에서 제일 혐오하는 사람이 목사님 목회 도우러 왔다는 사람, 우리 교회에는 별로 없지만 속으로 그럽니다 "아이고 또 왠 바보 하나가 걸러 들어 왔구나! 당신 도움 필요 없으니까 너나 잘하세요 가서..." 교회는 목양 받을 교인들이 오면 거기서 일꾼들이 다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무엇이간데 돕는 자로 오겠다고 목사님 협력하고 싶습니다 하는데 됐습니다. 신학생들 배우고 싶다고 하는데 나는 배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만나서 충성되게 변화될 사람이 필요합니다. 충성의 기준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것이 없이는 누구도 충성스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충성스러울 수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만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도 그 어린 나이에 연약한 몸을 가지고 교회의 목회를 하면서 고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예수님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부족해도 충성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할 때는 자기의 성질대로 해도 그것도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꺽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여러분들의 목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하려면 구역장 세워놓고 교사 세워놓고 설린 관례를 유지하면서 그러면서 그 사람을 추켜 세워 주면서 그렇게 눈치를 보면서 목회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무슨 목회 입니까? 친목회 활동이지... 그것을 첫 번째로 눈여겨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엇을 부탁하였는가 하면 내게 들은 바 무슨 뜻 입니까? 내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디모데에게 전해준 기독교 신앙에 관한 진수, 목회사역에 관한 진수 그것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러면 그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구역장과 교사들을 세울때에는 최소한 대학을 나와야 한다 교인들이 다 대학을 나왔는데 고등학교 졸업한 사람 데려다가 목회가 되겠니? 라고 충고하지 않았습니다. 충성된 사람이면 가르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면 내가 들은 바 그것입니다. 그러면 왜 충성된 사람이라고 한정을 지은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내게 들은 바를 한다리 건너 두다리 내려 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에게서 디모데에게, 디모데에게서 충성된 사람에게 충성된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내려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네다리를 건너 가도 그것이 진짜 본래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해 주려고 했던 기독교 신앙의 진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놀라운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들려준 바가 결국은 누구 안에서 발견한 것이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예수안에서 발견한 것이죠. 자신도 예수를 만났고 디모데도 예수를 만났고 디모데가 목회하는 교회에서도 예수를 만난 충성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가르침은 사도바울을 통해서 디모데에게 전해줄 때 새롭고 디모데가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전해줄 때 새롭지만 이 세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만난 사람이기 때문에 가르침은 생소해도 그 가르침에 깃들여 있는 예수의 정신이 동일하기 때문에 그 가르침이 크게 변질되지 않고 바울의 것이 디모데에 의해서 이해되고 디모데에게 이해된 것이 충성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또 디모데가 거기에서 목회를 했을때 아버지 같은 이 스승 사도바울의 가르침과 편지에 입각해서 목회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는 그 내용 자체가 예수에 대한 것이었고 그래서 사도바울을 통해 받은 것을 가르쳐 주었을때 이것을 가르쳐 주라고 가르쳐 주었을때 그 내용은 평소에 가르치는 예수의 정신이 베어 있는 그 가르침과 한 부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다리를 건너가도 동일하게 그것들이 건너가서 사도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고 교회가 커서 디모데가 모든 영혼을 돌보지 못해도 놀랍게 사도바울에게서 전해주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신이 목회자는 각각 틀리고 가르치는 사람은 충성된자, 디모데, 바울 또 다른 사람 이렇게 나뉘어 져도 동질의 가르침이 교회안에서 유지가 되어서 그래서 그 가르침을 통해 예수를 알고 예수를 알게 된 충성된 사람들은 그 가르침의 맛을 알고 이렇게해서 예수를 만나는 것과 배우는 것, 배우는 것과 예수를 만나는것 사이에 혼연일치를 이루어서 그래서 장소는 다르고 사람은 다르지만 놀랍게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를 사도바울이 가르쳐 준 것입니다. 나는 단연코 이 지혜로 목회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잘 들으십시오. 여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거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거라. 그러면 저희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목회자에게도 영혼을 돌볼 수 있는 권한을 주셨고 그리고 양떼들에게도 또 양떼를 돌볼 충성스러운 사람을 세우셔서 양떼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르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점에 있어서는 신중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목회자에게 양을 돌보도록 주신 권한은 양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위탁된 것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양을 치는 것은 포괄적인 목회권입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은 디모데가 바울에게서 받아서 이 한도내에서 가르쳐 주거라 하고 위임한 범위 안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지난 일년동안 여러분 구역 가운데 대부분의 구역은 목양의 질서를 따라서 질서 있게 잘 따라 왔는데 어떤 구역에서는 구역장 마음대로 구역모임 중에서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놀러도 가고 아니면 교제의 시간도 가지고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몇주씩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공부했다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지금 얼마나 개념없는 행동들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이런 구역장들을 간수하지 못하는 교역자들이 지금 목양의 의무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이탈된 사역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이것 이런시대의 교리 가운데 있었으면 치리감입니다. 구역장인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런 권세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나가서 개척을 하십시오. 그리고 담임목사를 하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하든지 구역공부 시간에 댄스를 하든지 술을 마시든지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나가서 교회를 개척하십시오. 담임목사를 하십시오. 이단의 표를 걸든지 장로교 표를 걸든지 마음대로 하고... 그러나 주님이 세우신 교회 안에서는 그런 질서는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목회자는 어떻게 그런것들에 대해서 모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권한을 주님이 위탁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구역장은 목회자가 아닙니다. 목회자를 돕는 아주 잘 됐으면 목회자를 돕는 예수를 만난 충성된 일꾼들입니다. 그러면 목회자가 양을 전체적으로 치기 위해서 거기에는 심방도 있고, 돌보는 사역도 있고, 가르치는 사역도 있고, 책망하는 사역도 있고, 훈련하는 사역도 있고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일부를 여러분들에게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위탁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질서을 엄격하게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순순히 따라가는 구역원들도 바보입니다. 그것은 구역장에게 거부하여야 합니다. 당신 마음대로 그러는 것이 어디 있느냐? 왜 당신 마음대로 구역예배를 교회에서 받은 지시도 없는데 쉬나? 우리들이 의논해서 야유회를 가고 놀러가고 밥 먹고 헤어지고 이러는 것이 있을 수 있나? 그것은 목회자가 결정해야 할 문제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전도사 하면서 추호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공과공부 하게 되어 있으면 머리가 터져도 해야 합니다. 놀고 싶으면 그것은 교사회의에서 교역자가 확정해야 합니다. 2월25일은 공과 안하고 노는 날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 구역이 한둘이 아닙니다. 교역자들 정신 차리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목장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구역원들은 절대 그것에 동의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질서가 이런 질서가 있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공부 하도록 목양적 질서에서 세워 졌으면 배워야지 도대체 당신이 가져다 준 책의 저자가 누구 입니까? 신학사상이 어떤 사람입니까? 심지어 그것이 담임목사의 책이어도 안됩니다. 마음지킴의 교리를 하게 되어 있으면 하고 이 교리를 쉰다 그리고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를 6주동안 공부한다 하면 일제히 그것에 따라야 합니다. 마음지킴 하지 말고 우리 심심한데 도덕적 통치나 공부하자 그것은 안됩니다. 그리고 심지어 여러분들 가운데 구역예배 말고 구역식구가 열명인데 그중에 서너명만 다른 요일에 모여서 다른 것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 권한을 교회가 부여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개념 없는 일들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것도 오래전에 일어난 일인데 감정이 사라질때까지 가슴에 묻었다가 이제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차분하게 평상심으로 여러분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질서가 그런 목양적인 질서가 있냐는 것입니다. 더 나쁜것 가르쳐 드릴까요? 그 구역은 그래도 나은데 잘못된 것이라도 배우려고 하는 의욕이 있으니까... 흐지부지 하고 공과책 덮어 버리는 구역예배 있죠? 여러분 마지막에 주님앞에 가서 영혼을 그렇게 깨떡같이 가르쳤던 것에 대해서 어떻게 회개하려고 합니까? 만나서 실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다가 몇줄 끄적끄적 하다가 덮어버리고 밥이나 먹으러 가고 그것이 한번이면 모르는데 일년내내 이어질때 거기에 딸려오는 영혼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구역예배에 들어오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접촉점이 없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은 그 구역장에 대해서 신뢰를 안합니다. 저 사람 하나님 못 만난 사람이다. 구역예배를 하면 말씀을 나누려고 잔뜩 준비해 왔는데 이 사람은 생각이 다른데 가 있다는 것입니다. 맨날 밥이나 먹으러 다니려고 하고... 그리고 그 사람이 주님을 못 만난 사람일 경우에는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구역예배가 이렇게 노라리구나! 그냥 구색이구나! 그리고 모여서 친목하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을 갖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구역예배를 통해서 구역공부를 하면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든지 변화 받는다든지 하는 것은 이국땅에서 들여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질서를 따르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서 생겨나는 영혼의 심각한 손실들 교회 자원의 심각한 낭비들은 누가 책임을 질 것입니까? 그렇게 하고 여러분들이 구역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교사를 세우게 해 달라고 구역장을 세우게 해 달라고 사람이 모자란다고 아우성을 쳐서 몇 명이 필요한 가를 보고 사람을 조달하지 말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인가를 보고 구역원 수를 정해라 20명이면 뭔 상관이 있느냐? 4명 붙들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은 20명도 하고 그리고 10명을 모아놓아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1명을 가져다 주어도 그 양떼를 간수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역장이 되어서 영혼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전도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오면 손님 하나 오나보다 가면 가나보다 어차피 구역식구들 머리수 많은데 몇사람 나간다고해서 뭐가 문제가 되랴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충성된 사람일 수 있습니까? 그리고 구역예배 공과를 펼쳐놓고 공부를 하는데 그것을 결국은 믿어야 할 규칙과 살아야 할 교훈을 가르치는 것 아닙니까? 자기가 안 믿는 것을 구역식구들에게 가르치고 자기가 살지도 않는 것을 구역식구들에게 가르칠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예 그런 가르침의 사역들을 포기하고 구역을 이끌어 간다면 그러면 모여서 그런 구역들이 건져내 질 수 있을것 같습니까? 말씀 중심이 아닌데... 모여서 허튼 소리나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고 분당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는 새신자가 왔는데 구역에 들어 갔더니 새신자 환영한다고 소주집을 갔다고 합니다. 소주 먹고 1차 가지고 안된다고 2차 단란주점으로 가자고 해서 교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것이 개념없는 구역장들이 그렇게까지 끌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진리의 맛을 들이고 깊은데 구역예배 퇴근하면 시간이 어려워요 그런것 다 쓸데 없는 것입니다. 구역장이 진리를 사랑해서 그 진리의 말씀을 먹고 지체들이 기뻐하는 교회들은 지금도 내가 증거 대라면 댑니다. 1시에 구역에배 마치는 남자 구역도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 충만해서 돌아갑니다. 안 피곤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주님 만나니까... 그런 개념없는 무질서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번은 제가 넘어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부교역자들이 교구를 맡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아주 분명하게 나의 생각을 따라서 여러분들에게 표명을 못한 것처럼 여겨져서 불문에 붙이고 넘어가고 처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때 마음이 안 좋았지만 지금은 다 지워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흔들림도 없습니다. 그런데 걱정은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그렇게 되도록 교역자도 깜깜하고 구역장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구역 식구들은 그것을 받아 먹으면서 아무 이야기도 없이 주저 앉아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슨 교회가 그런 무질서한 교회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여러분들에게 그런 권한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포괄적인 목회권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목회자에게 주셨고 목회자에게 주신 그 권한도 오늘 사도바울이 말한바와 마찬가지로 내게 들은 바 그리스도께로 사도들이 받은 바 그 교훈 안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제가 열심히 공부한 것이 신문에 난 것을 아십니까? 누가 와서 그것을 신파조로 잔뜩 써가지고 가서 신문에 났습니다. 지난 주일날 김목사는 목회 15년만에 처음으로 몸이 아파서 동영상을 틀어주고 예배에 설교를 못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은 정확하게 아침 9시에 나와서 밤 9시 10분까지 공부하다 들어갔다. 아주 애절하게 그렇게 썼습니다. 저는 별로 이야기도 안 해 주었는데... 그러면 저도 노는 것 좋아합니다 안 믿어지죠? 저도 쉬는 것 좋아 합니다. 오늘 아침에 정확하게 10시에 올라와서 여태까지 여기에 서 있습니다. 화장실도 안 갔습니다. 저도 설렁설렁 목회하면 저도 좋고 저도 외국 여행하고 싶고 안식년 가지고 싶고 이런 겨울이면 차 타고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슬슬 돌면서 동해안에 가서 놀고도 싶고 저도 쉬고 싶습니다.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목사님이 공부하는 것을 좋아 한다고 하는데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항상 동해안에서 생선회 먹고 대게 먹는것 처럼 그렇게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힘듭니다. 그러면 왜 목회자가 목회를 다 하면서도 남는 시간에 그렇게 해서라도 애써서 그렇게 공부하려는 이유가 무엇때문이겠습니까? 우리 집사람 흔히 하는 이야기로 이미 들은것도 상당히 있는데 그것 풀면서 살지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하는데 왜 그럴것 같습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네게 들은 바... 그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 였지만 해석은 수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천년의 역사가 흘러 나와서 어떤 사람은 이 성경 가지고 이단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이 성경 가지고 예수 팔아 먹다가 결국 지옥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열정에 들떠서 엄청 쏟아 놓는데 알고 보니까 쓰레가 같은 사람 사상을 쏟아 놓고 죽은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목회자의 일생 입니까? 그러면 여태까지 내가 성경을 펼쳐서 만나서 덜컥하고 부딪히는 이것이 최고입니까? 이천년 동안 나보다 훌륭한 종들이 이것을 보면서 주님을 만나고 이 샘에서 물을 먹고 그리고 그들도 열린교회 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목회를 하다가 성자처럼 살다가 죽은 수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믿어야 할 규칙이 무엇이고 살아야할 교훈이 무엇인지를 한 없이 그렇게 파내서 가르쳤는데 그것을 들여다 보아야지만 네게 들은 바가 무엇인지 알 것 아닙니까? 그렇게해서 제가 설교 시간에 저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무엇을 하겠습니까? 제가 이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아 영광을 받겠습니까 어느학교 교수로 청빙을 받아 갈까요? 그러면 열린교회 목회자 보다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속은 안 썩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 삶이 아닙니다.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저는 신문에 나는 것도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안 믿을 지 모르지만 신문에서 기사 써 주겠다고 전화와도 전화 안 받는 사람입니다. 안 믿어 지죠? 실제입니다. 저는 관심 없습니다. 오래전에 관심 끊었습니다. 그런것에 아무 관심 없습니다. 그것도 관심 없고 베스트 셀러 내는 것도 한때는 관심 있었는데 이제는 관심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스트 셀러 읽은 사람이 베스트 신자 안 되더라구요. 그러니까 그것도 하늘아래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사가 그렇게 관심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관심 없습니다. 가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한번 앉아 보고 싶은 의자도 없습니다. 그러면 도데체 네게 들은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올바로 전해주고 그 질서를 따라서 믿고 그 질서를 따라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년내내 공부해서 몇 개의 빗만을 얻어도 감사하지 않습니까? 놀면 그것이 나옵니까? 파야지 나오지... 그러면 이러한 질서 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순수한 믿어야 할 규칙과 살아야 할 교훈이 무엇일까 그것을 찿는 것입니다. 찿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가르치는데 교회에는 목양의 질서가 헛으로 되어 있어서 목회자는 이렇게 고민을 하면서 질서를 세우는데 가르치는 사람들이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질서를 흐뜨려 놓습니다. 그러면 자신은 열심히 가르치고 일했지만 자기 나름대로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주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그리고 자기 구역을 너무 사랑으로 뭉쳐지게 하는 구역장들이 있는데 그것도 잘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단 거기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세속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얼마전에 제가 설교하면서 교회에서 허락을 안해주면 우리끼리 놀러 갑니다 할때 그 우리끼리 라는 것이 교회안에서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을 제가 못 박았습니다.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모임을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 이외에 목적으로 그렇게 소집하고 그렇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도하게 인간의 사랑으로 끈끈하게 뭉쳐진 그런 구역 그리고 여러분들이 얼마나 개념없이 행동하는지 보십시오. 교구를 나누어서 교회의 질서가 세워지면 아멘 하고 들어가지 그것을 교구 교역자들에게 전화를 하고 이메일을 하고 심지어는 담임목사 한테까지 전화해서 자기 구역 그리고 안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고 누구 교역자 따라가게 해 달라고 하는것이 어떻게 교회의 집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서 웃으면서 한번 가만히 있어 봐 라고 지나쳤지만 속으로는 눈물이 났습니다. 이것이 내가 15년 목회한 교회의 수준이구나! 제가 고등부 전도사 할때 저는 여러분 데리고 목회하면서도 솔직히 그렇게 열심히 못했습니다. 그때는 더 젊었으니까 목숨걸고 목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80여명의 아이들 중에 40여명이 저를 만나고 거듭났습니다. 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너무너무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걱정하셨습니다. 전도사님이 그렇게 열심히 하고 아이들이 전도사님을 따르고 변화 되었는데 휙 가버리면 전도사님이야 상관이 없지만 우리 교회는 참 큰 일입니다. 후임에 누가 올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랬더니 얼마나 놀라운지 아십니까? 목회하고 저는 한번 떠나간다고 하면 접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하고 이야기 하면 두 주 후에 갑니다. 항상 그 원칙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런 확신이 있기 전에는 담임목사님 찿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은 심심하면 한번씩 사표 낸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도 목양의 질서에서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기도하고 그만 두어야 겠다 그러면 3주전 빠르면 3주전, 2주전에 목사님 찿아가서 독대해서 제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주님의 응답을 받아서 제가 교회를 사임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제가 3주안에 떠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주일 지나고 나서 밤에 이야기 하면 3주가 남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열심히 수소문 하고 그만두기 전에 누가 왔으면 좋겠다 미리 잘 알아보고 말씀을 드리면 그 다음 주일날 가서 지체들에게 다음주가 여러분들과 마지막 예배입니다 하고 그리고 그 다음주에 가서 잘있거라 하고 떠날때는 언제나 사도행전 20장을 설교하고 떠났습니다. 그랬으니 내가 떠난다고 했을때 아이들하고 선생님들 하고 마지막 악수를 하는데 저 뒤에 있던 나이 든 선생님이 뭐라고 하냐면 전도사님 아이들하고 선생님 몇분은 기절하는 것 같았습니다.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칠팔십명이 돌아 가면서 세시간 동안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중에 몇 녀석은 제가 가는 교회에 따라 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편지를 받았는데 그 중에 한 편지가 인상에 남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곤고했을때 불러 주시던 전도사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던 전도사님 이 세상에 무엇 보다 더 우리가 회심하는 것을 기뻐하셨던 전도사님 우리 모두 선한 싸움 싸우고 새 예루살렘에서 만나십시다 아멘. 동요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인간적인 매력이 없어서 그랬을지 모르지만 2년동안 설날에 세배한다고 찿아와서 2년째에는 오지 말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제는 너희 목회자 찿아 가라.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명백하게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이세상의 단체와 다른 것입니다. 끼리끼리 몰려 다니면서 구역장 누구누구 편이 되고 교구가 갈렸는데도 여전히 이 교구가 맘에 안든다고 저쪽 교구 가고 싶다고 하고 징징거리고 목회자 찿아 다녀서 힘들게 만들고 그 소식을 새로 맏은 교역자가 들었을때 여러분 마음속에서 목회하는 동안에 그 인상이 지워지겠습니까? 저 사람이 담임목사하고 수석 부목사하고 몇사람 찔러서 내 교구로 안오겠다고 애원했던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구나! 그것이 되겠습니까? 고등학생만도 못한 것입니다. 주님이 여태까지 함께 해주신것 감사했습니다. 전도사님 만날 기회는 없지만 어디서든지 선한 싸울 다 싸우고 예루살렘에서 만납시다 그것이 고등학교 2학년 머리에서 나온 신앙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보다는 낳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목양의 질서는 어차피 교역자와 평신도들을 모두 걸쳐서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근거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구역장 제도는 아마 이것 없이 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목회를 해 보면 교인이 100명 정도만 한다면 구역장 필요지 모릅니다. 자기가 하면 되니까... 그런데 교회가 커지면 반드시 구역장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 구역장들이 이러한 성경적인 목양의 정신을 가진 가운데 그 질서 안에서 영혼들을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실 우리 인생의 참된 보람이 무엇이겠습니까? 돈 벌면 교회에 헌금하고 기쁜 일이 있으면 교회에 와서 감사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교회와서 울고 그리고 이일 저일로 섬기는데 가장 영광스러운 일 중에 하나가 영혼을 섬겨서 그 영혼을 회심에 이르게 하는 것을 돕고 회심한 영혼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것 그것보다 훌륭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늘에서 받을 상급에 대해서 다니엘서에서 말하기를 하늘의 빛나는 별과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릇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돌이켜 세우는 것입니다. 나이 들어서 이제는 머리가 쇠하고 돌아 다닐 기력이 없어서 구역장 그때 되면 못합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섬길 기회를 주셔서 하실 때 이 목양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앞에 정말 아름답고 충성스럽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교회의 질서를 이루어 갈 때 그 사람들의 섬김이 기계처럼 아주 아름답게 연결이 되어서 협력하여 선을 이룰수 있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전에는 잘 몰랐으니까 의도 없이 그랬지만 그러나 이제는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 입어서 주님의 교회에서 충성스러운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