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마음으로 어린 아이들을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마 19:14).
Ⅰ. 본문 해설
예수님이 어린이를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 교훈을 주셨는데, 어떤 상황 속에서 이 교훈을 주셨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 보면, 그때에 혹은 때에 라고 나옵니다. 그때가 언제였느냐 하면, 물론 이것에 불특정한 시간을 가르킬 수도 있지만, 문맥으로 볼 때에는 아마 1절부터 13절까지 사건이 일어난 때에 바로 그때에 이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안수해주신 사건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 1절부터 나타났던 사건이 무엇이냐 하면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무엇을 여쭈어 보았습니다. 여쭈어 본 내용이 무엇 인고 하니,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자기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이렇게 여쭈러 보았어요. 궁금해서 예수님께 물어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여 비난을 받게 하기 위해 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어떻게 답변을 하든지 간에 걸리게 되어 있는 거죠.
예를 들어서 그래, 내버려도 괜찮다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늘 이야기 하셨던 사랑의 원리에 어긋나는 거잖아요. 그렇죠. 원수도 용서해주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버리면 안 된다고 하면 무슨 문제에 걸리는가 하면 모세는 버려도 된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보다는 모세가 훨씬 더 권위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모세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필혁을 하면 예수님께서 비난거리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셔도 비난거리가 될 수밖에 없고, 저렇게 대답하셔도 비난을 받으실 수 밖에 없는 교묘한 질문이었어요. 이 질문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푸셨어요? 너는 하나님 말씀에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룰찌니라 한 말씀을 못 들어봤느냐. 그러니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는 것이 성경의 원리다. 그랬더니 아, 이제 걸렸구나 하고 그러면 당신보다 훨씬 더 권위있는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서 내버려두라, 내버려도 된다 그랬는데, 그러면 당신은 모세에게 반대하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예수님 말씀이 모세가 그 말을 한 것은 사실인데, 원래의 모세가 그렇게 말했던 것은 임시적인 것이고, 너희들이 워낙 인간이 악했기 때문에 무질서하게 여자를 취하고 버리기 때문에 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면 이혼증서라도 써주라고 하는 것이지, 원래는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혼인제도는 그것이 아니다. 그리고 정리를 하셨어요. 그때에 아이들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아마 예수님이다 그리고 막 나아왔던 모양이에요.
(예화) 제가 예배 끝나고 걸어가면, 아이들이 김남준 목사님이다 그러면서 막 와요. 제네들은 내가 연예인인줄 알아. 텔레비전에서밖에 못 보니까, 나를 동방신기 수준으로 보는 거야. 그리고 만나고나서는 악수를 하고 나서는 어떤 녀석은 막 뛰어가서 자랑을 해요. 나, 김남준 목사님 만났다. 막 자랑을 해요.
아마도 예수님께 나아왔던 아이들의 마음이 그러한 마음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온다고 하니까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께 나아왔던 모양이에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어른들로부터, 부모로부터 많이 들었을 거예요. 그 아이들이 예수님을 뵈옵자, 예수님께 막 나아왔어요. 그래서 그 아이들이 부모의 손에, 혹은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서 막 나아오기도 한 거예요. 그때에 제자들이 꾸짖었어요. 제자들이 꾸짖으면서 왜 꾸짖었겠어요? 그러지 말아라. 예수님은 너희같은 어린 아이들이 다가가서 그렇게 함부로 대할 그러한 분이 아니다. 그리고 이 어린아들을 제자들이 꾸짖었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문맥을 볼 때, 꾸짖은 것이 아이들인지 아니면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아요. 그런데 엄밀하게 생각하면 양쪽 다를 꾸짖지 않았겠어요? 꾸짖었어요. 그것이 제자들의 태도였어요. 이게 바로 사람들의 편견이에요.
Ⅱ. 사람들의 편견
(예화) 지금은 어린이, 어린이라고 부르지만,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계시기 전까지는 어린이라는 말이 없었어요. 애 놈, 애 자식, 애 새끼. 그러한 것이 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래봤자 애, 어린애라는 뜻이었어요. 원래 이 라는 말은 사람에 대해 비교적 높임말이고 인격과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을 이 라고 불러요. 개가 빨빨빨빨 다니고, 깽깽깽깽 다니는데, 아이고 저 이가 왜 저렇게 짖고 다니시나? 안 그런단 말이에요. 개에게는 그렇게 안 써요. 애들이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똥 싸고 그러는데, 아이고 저 이가 변이 안 좋으시네 말 안한단 말이에요. 이 그러면 이미 다 성장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된 이, 든 이, 난 이. 된 사람, 된 이. 모든 것에 탁월한 사람, 난 이. 지식이 꽉 찬 사람, 든 이. 이 가 상당히 높임 말 이에요. 그런데 애 놈, 애 자식, 애는 숫자에도 안 들어갔어요. 헤아리지도 않았어요. 부모의 부속물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죠. 그것을 방정환 선생이 이렇게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을 높일 수 있을까 할 때, 어린이가 된 거예요. 원래는 어린 뛰어 쓰고 이로 써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 분이라는 뜻이에요. 어린 분. 어리신 분이란 뜻이에요. 말이 안 되죠. 이것을 한 단어로 붙여 버린 것이에요. 아주 훌륭한 단어가 탄생을 한 거예요. 그게 어린이에요.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의 생각이에요. 참 놀라운 게 뭐냐 하면, 이 예수님 당시에만 하면, 성경에 보면 사람 숫자가 나오잖아요, 그죠.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 센 것이 나오잖아요, 그죠. 여자하고 아이는 계산할 때 빼버렸어요. 사람 축에도 못 낀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히브리어에서 여사 99명과 남자 1명이 끼어 있을 때, 명령어를 사용할 때 남자 복수 명령어를 사용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실 때 떡을 먹은 사람이 오천이나 되었더라 그러면 그것은 여자하고 아이들은 뺀 거예요. 6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출애굽을 하고 나서 인구조사를 마쳤더라. 그것도 역시 여자하고 아이들은 빼고, 심지어는 병든 사람들도 빼고 나이가 너무 많이 들고 너무 늙어서 군대에 갈 수 없는 사람들까지 뺀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아이들은 사람 취급도 못 받는데, 제자들이 그 좋으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복음의 말씀으로 단련되어 졌는데, 아직까지 정신까지 복음으로 온전히 변화되어서 인간을 향한 인간을 향한 올바른 생각을 가지지를 못하였던 거예요. 그래서 당시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아이들이 나아올 때, 애들은 가라 쉽게 이야기 하면 애들은 가라 그리고 약장수가 애들 내어 쫓듯이 물론 예수님도 신약을 나눠 주시기는 하였지만, 애들은 가라 그리고는 아이들을 책망하였던 것이에요. 이 세속적인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교리반 때에 그런 말을 하죠. 스튜데오 에로구스.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당신은 왜 이 땅에 태어났습니까.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당신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무엇에 대해 공부합니까.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인데, 인간 일반으로서의,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 일반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 나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가장 잘 알 수 있으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을 배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 사람들이 인간이 누구인지를 올바로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성경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이기적인 편견에 의해서 남성 우월주의, 그리고 성인 우월주의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서 인간에 대한 복음적인 참 정신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에요.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님을 많이 따라다니고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을 얻었는데도, 이 사상이 예수님을 닮은 사상이 되지를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인간을 바라보시는 관점과 제자들이 인간을 바라본 관점은 현저한 차이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 사랑에 펑펑 울고 기도가 펑펑 쏟아지고 해도 그것 만으로는 온전한 신앙을 할 수 없어요. 그것을 중심에 꽉 붙들고 그리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차근차근히 배워가면서 그러면서 이렇게 잘못된 것들을 고쳐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제자들이 여러분들보다 못한 사람이었어요? 예수님의 숨결을 직접 느끼면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그리고 갈릴리에서 유다에서 수많은 이적들을 맛본 사람들인데, 그렇잖아요.
17년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아주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어요. 오늘날 여러분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무수히 스쳐 지나갔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잘 믿는 뜨거운 신앙의 체험과 함께 매우 명철하고 끊임없이 배우려는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의 사상을 본받으려는 그러한 욕구를 계속해서 갖지 않은 사람들은 그러한 체험을 가지고 있어도 금방 식어 버려요.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살아있는 동안 인간의 참 본분이라는 사실이다 하는 것을 그렇게 배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편견이 오늘도 잔뜩 있습니다. 여러분들 자신의 마음 속에 아이들을 무시하는 마음들이 없습니까? 사랑하기 이전에 무시하는 마음이 있어요. 아이들을 인격체로 알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알고, 그가 아직 충분히 자기 자신이 인간의 성품이 충분히 발현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미성숙했다라고 하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를 멸시하고 천대하는 그것은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배운 것이 아니에요. 이 사상이 세탁이 되지 않으면, 별 우스운 신앙이 다 나오는 거예요.
(예화) 옛날에 서울 시내에 역사가 오래된 교회 하나가 있었어요. 거기에 목사님이 계셨어요. 그런데 이 목사님이 왕족 출신이야. 조선 말에. 그러다가 이 분이 은혜를 받고 그리고 목사가 된 거예요. 그런데 그 교회에 장로님이 한분 계셨어요. 그런데 이 장로님이 그 궁궐에서 말 여물 먹이던 하인이었어요. 그런데 같은 교회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거예요. 당회를 하는 거예요. 당회를 하다가 목사님이 뭐, 왕족 출신이라고 해서 머리도 왕은 아니잖아요. 뭐 그렇게 클 수는 있겠지만은. 그러나 머리의 내용이 그렇지는 않잖아요.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목사님, 사실은 그게 그런게 아니고 이렇게 않습니까?’ 그러면 이 목사님이 ‘네 이놈, 이 고얀놈,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마부가... 저 놈을 당장 끓어 내거라.’ 어떻게 된거죠? 주님은 만났는데, 복음에 의해서 사상이 세탁이 안된거야. 그러면 이렇게 불일치한 행동들이 나오는 거야. 그러면 그분은 주님을 위해서 헌신할 마음이 없었겠어요? 어쩌면 그 목사님도 네 이놈 하고 소리를 칠 때면, 비 복음적이지만, 순교를 각오하신 목사님이실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안되는 거예요. 사상 전체가 세탁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성경은 이 어린아이들을 우리에게 어떻게 대하라고 하는가.
이 세상의 편견은 이처럼 심해요. 더군다나 아이들은 어렸을 때 권력이 없어요. 돈도 여러분들에게 타서 쓰고, 그리고 아이들에게 뭐라고 뭐라고 의견 주장을 해도, 이놈 한마디만 하면 확 찌글어 들게 만들 수 있는 권력이 부모에게, 어른들에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영혼에 대한 폭력이에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거란 말이에요.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권력은 아이에게 있어서 우산과 같이 사용하도록 주신 권력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거예요. 민수기에 보면 자식이 아직 어렸을 때, 하나님 앞에 막 서원을 해. 나는 뭘 할께요. 뭘 할께요 라고 서원을 하는데, 부모가 하나님, 얘가 뭘 모르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해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서원을 이행 안해도 돼. 면제시켜 주는 거야. 하나님이 그러한 정도의 큰 권세를 부모에게 준 거야. 그런데 그 권세는 어떠한 권세인가 하면, 우산과 같이 사용되어야 하는 권세예요. 아이 위에 떨어지는 거짓 사상과 거짓된 삶과 거짓된 악과 이러한 모든 것들이 비처럼 쏟아질때에 부모의 권위로 그것을 탁 막아 줄 수 있는 것이 그게 바로 부모예요. 그게 부모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비인격으로 아이들을 족치는 것 같은 그러한 행동들은 옳은 것이 아니예요. 징계를 하려면 확실하게 징계를 하고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질 못하고 무시하고 모독하고 폭력을 하고 언어로 그 다음에 실제의 주목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예요. 도저히 못 봐 주겠어서 떼려야 겠으면, 아이를 앉혀놓고 무릎꿇고 기도하고 이제는 맞는 거다 하면서 떼려야 하는 거예요. 수시로 폭력을 행한다고 하는 그것은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아이들은 말하자면,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사람으로 말하자면, 가치나 존중받아야 할 모든 품격에 있어서 어른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그러한 풍질이다라고 하는 선입견이 작용을 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편견이었어요.
예수님의 생각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어요.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아라.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하라. 여기에서 용납한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말이 안되는 것인데, 억지로 참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마치 길거리에서 반가운 친구를 만나서 그가 그를 만났을 때, 그를 기쁘게 맞아주고, 필요하면 끌어안고 포옹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이들이 선악간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 가운데 우리에게 접근할 때, 그것을 수용하고 받아 들여주는 그 마음과 정신의 태도를 말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용납이에요. 용납. 용납이에요. 그게 진정한 의미의 용납이에요. 그렇게 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아라. 사실 예수님이, 예수님이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에 가까이 오려고 했던 사람들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된 예가 이 어린 아이들 만이 아니잖아요. 소경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그러면서 소리를 지르고 부르며, 눈을 뜨고 싶어서 예수님을 불렀을 때에도,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면서 ‘잠잠하라’고 소리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히려 그렇게 사람들이 보기에 무엇인가 결핍하고 필요에 놓여있고 어린아이들처럼 완전한 사람이 아니어서 미성숙해 보이는, 그러한 인간 존재들을 향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개방하셨어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예요. 그래서 이 성경의 66권에 나오는 모든 기적가운데 최고의 감동적인 기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거예요. 그렇게 내려오셔서 이 땅에 정해진 시간과 공간안에 사시면서 그러면서 수많은 인간과 만나셔서 특별히 병들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어린 아이, 그리고 눈먼 자, 죄많은 여인, 이러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어요. 그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을 향한 편견과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랑하는 이 어린아이들에게 보여주신 태도도 그러한 것들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나타나셔서 접촉하실 때 마다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 찬란하게 비쳤어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거룩한 속성은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속에서 장렬하듯이 눈부신 빛으로 발현되었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칭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였어요.
(예화) 저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하나님은 잘 믿어졌어요. 그런데 어떠한 사람은 하나님이 안 믿어 지는 사람이 있다고 해요. 예수님은 잘 믿어지는데, 하나님이 잘 안믿어 진대요. 그런데 저는 반대였어요. 하나님은 하나님 잘 믿기 전부터 잘 믿어졌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믿어지지 않았어요. 그 중에 가장 큰 걸림돌이 뭐였는가 하면, 왜 하필이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까? 그것도 기적적으로 창조된 것도 아니고, 무수하게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여자의 몸속에서 자궁 속에서 잉태되어 남자 없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끼리는 통할 수 있는 이야기 인데, 누가 곧이 들을까. 그렇게 오해를 살만한 방식으로 왜 이 세상에 오셨을까. 그것이 내내 걸림돌이었어요.
그러나 어느 순간에 예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성경 66권 가운데 최고의 기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 분이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을 만나든지 예수님이 그를 향해 보여주시는 태도는 하늘에 계신 삼위 일체 하나님의 찬란한 속성의 발현이었어요. 그래서 교만한 사람들과 만났을 때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낮추셨으니, 이것은 바로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살아계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엄위를 보여주신 거예요. 불의한 사람들을 준엄하게 책망하시고 심지어는 말하자면 징벌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공의롭게 보복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죄 가운데 빠졌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죄인들을 향하여 보여주셨던 긍휼의, 자비의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그리고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이심을 보여주는 거죠.
누구도 의지할 데가 없어서 비참한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따뜻이 다가가셨던 것, 심지어 간음을 하여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에게 그 많은 오해받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친히 건져 주시고 그를 친히 용서해주신 그것은 그 비참에 처한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이라고 하는 속성을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드러내신 거예요. 그래서 만나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찬란한 하나님의 속성이, 구약에서는 간접적으로 보이던 그 속성이 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찬란한 빛으로 비췄고, 그것이 기록으로 남았기 때문에 신약을 읽을 때, 그 찬란한 하나님의 성품의 빛을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 한 빛을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보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이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거라. 어린 아이들을 미성숙한 자라고 완전하고 인격이 발현되지 않은 자라고, 그리고 판단력이나 모른 것이 어른 만큼 성장하지 못하였다고 이 아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보여주신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들을 예수님께서 마음 깊이 이 세상의 모든 회개하는 죄인들을 끌어 안으실 때의 그러한 마음으로 이 어린 아이들을 용납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만히 보면, 그런 것 보면, 저도 목회 사역이다 뭐다 하며 살면서 참 아이들에게 잘못한게 많아요. 그러고 보면 우리 어렸을 때 아이들이 엄마, 아빠 밖에 모르던 때가 있잖아요. 엄마, 엄마, 아빠, 아빠하면서 껌딱지처럼 달라 붙어서 그냥 뭐 화장실을 가도 치마를 잡고 따라가고, 아빠 출근한다고 하면, 엎어져서 울면서 막 계단 까지 따라 내려와서 아빠 가면안된다고, 울고 그러는 경우 있잖아요. 그럴 때에 아이들에게 충분히 엄마, 아빠를 누리도록 만들어 주어야 해요. 그것이 바로 교육에 있어서 최고의 교육이에요. 충분히 엄마, 아빠를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해요. 그러한 인간 관계를 통해서 주님을 충분히 배우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내게 오는 것을 못하게 오지 말아라. 그래서 아이들이 하나 하나 오면 다 끌어 주는 거예요.
(예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똑같은 사건이 두 교회에서 벌어졌어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 시간에 저기서 아이가 툭 튀어 나오더니 소리를 지르면서 막 뛰어 나오는 거예요. 물론 큰 아이가 아니라, 요만한 애가 막 소리를 지르면서. 어느 교회에서는 설교하던 ‘쟤 뭐야! 쟤.. 빨리 치워!’ 또 다른 교회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어요. 예배가 마지막 일어나서 설교의 은혜를 받고 마지막 일어나서 송영 찬송을 부르는 거예요. ‘만복의 근원 하나님 다 찬송 부르고...’ 착 하는데, 애가 저기에서 막 걸어서 오는 거예요. 막 떠들면서 걸어 오는 거예요. 그리고 이만큼 와서 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같이 기도합시다’ 그런데 부모는 마음이 안절부절 한 거지. 잡으러가면 상황이 더 복잡해 지잖아. 목사님이 여기에 걸어나가서 아이를 안고 올라와서 ‘우리 다같이 기도합시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여자 집사님이 평생 그 교회를 못 떠났대. 그래서 똑같은 사건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래서 그날 성도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은 거예요. 한팔로 들고 기도하는데, 얘도 한팔을 들고... 그래서 나도 심방 가면 어떤 애가 목사님 어떻게 기도해 하니까. 그게 아이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Ⅲ. 예수님의 마음
그러면 우리는 우리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보아야 해요. 다음 세대가 우리가 예수 믿던 열린 교회보다는 훨씬 나은 교회가 되어야 되잖아요. 나는 그렇게 확신해요. 정말 우리들이 이곳에서 주님을 참되고 진실하고 아름답게 섬겼는지는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면도 있겠지만, 다음 세대에 나타나요. 다음 세대에 머리 하얀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이제 건물을 유지할 수 없으니, 건물을 팔까 말까 이것을 의논하고 나면 그러면 잘못 산거죠. 자라나는 세대가 정말 아름답게 자라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 보다는 이 아이들이 훨씬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살거다. 그렇게 되어야 해요. 우리의 시대보다 다음 세대가 더 훨씬 타락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놀라운 기회에요. 우리 시대에는 덜 타락해서 우리가 예수 후지게 믿어서 빛이 별로 안 났는데, 다음 세대는 더 타락해서 더 잘 믿으면 더 찬란한 불꽃처럼 나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어떠한 분이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외국에서 유학을 하다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왜 믿게 되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행복해 보였습니다’ ‘어떻게 행복해 보였습니까?’ ‘목사님, 그 사람들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시대에는 그러한 것들이 더 뚜렷하게 보일 거란 말이에요. 어두울수록 별이 더욱 빛나듯이 그러니까 우리의 자녀들의 교육에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해요. 이 아이들을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해요.
주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어요.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Ⅳ. 말씀하고 싶으셨던 교훈
사실 아이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이 아니라, 완악한 죄인들인 어른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싶으셨던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요. 그러면 도대체 무슨 말씀이냐,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주는데, 우선 첫째는 어린 아이의 특성이에요.
A. 어린 아이의 특성
성경이 어린 아이를 모두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무엇이라고 묘사했는가 하면, 어린 아이와 같이 세상 풍조에 떠밀리지 아니하고. 이게 무슨 뜻이에요? 아이들은 판단력이 모자라. 그래서 흔들리는 거예요. 출렁출렁 거리면서 흔들리게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그러한 것들은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신자의 표지로서 어린아이를 묘사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러한 부정적인 것을 말씀하시려고 했던 것이 아니에요. 그럼 뭐냐 하면, 어린 아이의 단순한 특성. 단순한 특성.
(예화) 제가요, 태어나서 가장 태어나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감동적으로 읽었던 문학작품이 ‘성냥팔이 소녀’였어요. ‘성냥팔이 소녀’ 그런데 몇 살때였는지 기억은 안돼요. 뭐, 7살이었겠나. 1학년때였었나. 한글은 알았던 때였음엔 틀림이 없어요. 한글을 알아야지 읽으니까. 그런데 지금도 50년 되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꼭 그림이 그대로 생각이 나고요. 여러 날을 잠들면서 꿈을 꾸었어요. 추운 겨울, 휘~바람이 불고, 성냥을 키는 소녀, 호호 부는 소녀 그리고 얼어 죽은 소녀 이러한 것들을 그러한 인상들이 오래토록 남아 있었어요. 제가 아주 놀라운 재능이 있었는데, 어린 아이들을 가지고 동화를 해주거나 이야기를 해주면, 깜짝 놀라거나 아니면 울거나 이렇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러한 것들이 있었어요. 어려서부터. 그런데 그 아이들이 뭐냐 하면, 아주 단순해서 그래서 단순한 마음으로 잘 믿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 읽는 소설이나 문학 작품류들이 아주 어렸을 때는 어떠한 거냐 하면, 대부분 신화, 전설, 이러한 것들이에요. 문학 작품도 아주 어린 아이용은 그러한 것들을 수집을 해가지고 말하자면, 컨텐츠를 만들어요. 왜 그래요? 어린아이들이 쫙쫙 빨아 들이면서 쉽게 잘 믿는 쉽게 잘 믿는 그러한 마음을 잘 이용해서 어린 아이적에 종교적인 방식으로 선, 악, 옳은 것, 그른 것, 그 다음에 도덕, 이러한 것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는 거예요. 이러한 것들이 확확 들어와서 마음에 박히게 되는 거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예수 믿는 어린이에게 왜 신화를 읽히냐고 그러잖아요. 사실은 그것 꼭 그러한 게 아니예요. 그렇게 따지면, 무슨 베짱이가 개미 집에 밥을 달라고 와. 그런게 어딨어? 그게 말이 안돼잖아. 이 사람들이 전설이나 그러한 것들 속에서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 녹여 놔서 어린 아이적의 상상력을 하게 만드는 거예요. 중심에 하나님을 믿는 좋은 신앙들을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인간의 상상력과 그러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길러 가는 거죠. 그런데에 이것들을 적절하게 잘 사용해야 해요. 잘못 사용해서 아이들을 사상적으로 잘못 만들면 안돼죠. 그러한 것들을 항상 지도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상상의 날개를 확 펴주는 거예요. ‘야, 베짱이와 개미가 있었거든, 베짱이는 여름에 기타만 치고.’ 기타를 어떻게 쳐, 베짱이가? ‘기타만 치고 놀았어. 그러다가 겨울이 되니까 베짱이가 굶어 죽을 정도가 됐어’ 겨울에 어디 베짱이가 있어요? ‘개미네 집에 문을 두드리며 먹을 것 좀 달라고 막 그랬대.’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야지. ‘순 거짓말이거든, 이런 것 전혀 없거든. 그런데 절대, 절대 베짱이는 겨울에 못 살거든.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꾸며 준거야.’ 라고 가르쳐 주면 안 되잖아요.
어린아이들은 이렇게 단순하게 믿는 것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리를 언제 가르치면 제일 좋겠어요? 어린 아이 때에, 그것도 무릎 팍에서 엄마, 엄마 이럴 때에 거기에다가 탁 놓고, 스튜데오 에로구스. 나는 공부한다, 나는 고로 존재한다.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요. 그러면 그것이 가슴에 팍 박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것을 꽉 붙들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내버려둬. 그래서 어떻게 돼요?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특성을 잃어버려서 아주 복잡하고 의심이 많아질 때까지 내버려 둔 후에 이제는 가르쳐야지 하면 이미 늦었어요. 안 받아 들여요.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래서 가정교육이 굉장히 중요한 거야. 그래서 부모로 태어나서 자기 자식을 아주 어린 나이에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심성 속에 분명하게 심어주고, 거기에 합당한 성품을 갖게끔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것이 정말 중요한 거예요. 어린 아이들의 그 잘 믿는 특성,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갖으라는 거예요.
보세요. 예수님이 참 많은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잖아요. 그러면 아멘 하고 믿으면 될텐데,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 어떻게 하면 골탕좀 먹여 볼까. 그리고 머릿속에 지어내서 했는데, 이것은 어린 아이들을 닮은 태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보세요.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예수님이 정말 말씀하고 싶으셨던 교훈이 뭐냐 하면 회심의 영적 특성이예요.
B. 회심의 영적 특성
회심의 영적인 특성이 뭐냐 하면, 은혜 받았을 때 만큼 성경이 달콤했던 때가 없는 거야. 왜 그럴까요? 왜 성경이 그렇게 달콤할까요? 그것은 성경 말씀이 잘 믿어지니까, 이해가 잘 되면서 놀라운 기쁨이 솟아나는 거야.
(예화) 몇 년 전인데, 마당에 앉아 있는데, 어느 집사님이 어느 자매, 오늘 나오셨나 모르겠는데, 어느 자매를 소개 시켜 줬어요. 목사님 이 자매가 불교 신자였는데, 3주 전에 우리 교회 와서 회심했습니다. 3주라 그랬나, 5주라 그랬나. 그런데 제가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헌금도 하고, 십일조 생활도 하고, 새벽기도 한다고 그랬나, 어쨌든 그리고 그래요. 그런데 그래요. 설교가 어렵지 않아요? 아니요. 이해되요? 네. 책을 읽고 있어요. 무슨 책을?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요. 어렵지 않아요? 아니요. 이해되요? 네. 교회에 10년 다닌 사람들은 그게 어렵다고 투덜투덜 투덜이 스머프마냥 투덜 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자매는 태어나서 머리털 나고 처음 교회에 나온 거예요. 그런데 너무 잘 이해가 된다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 했죠. 예수 믿은지 3달 된 자매가 죄와 은혜의 지배를 모두 읽고, 회심을 경험해서 교회 나온지 3개월 된 자매가 회심하고, 그 다음에 누가 선물을 했어요.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을 선물을 했어요. 난 예수 믿은지 몇 달이 안되어서 잘 모르지만, 이것은 아닌 것 같다. 산타클로스지, 이게 무슨 하나님이냐? 판단력이 생겨나는 거예요. 왜 그래요? 잘 믿을 때, 성경은 너무 재미있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는 아주 놀라운 그러한 계시의 진수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게 중요한 거죠. 그런데 그 믿는 마음이 뭐냐 하면, 그 믿는 마음이 그 회심할 때에 그 마음이 놀라운 영적인 특성으로 변하는 거예요.
제가 정말 정말 감동적인 예를 하나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릴께요. 그게 바로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잖아요. 처음에 보면 두 강도가 예수님을 모두 욕했어요. 그런데 어떤 놀라운 변화가 두 강도중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임했어요. 그랬더니 한 강도를 향해서 비난하는 거예요. ‘그러지 마라. 저분이 하신 일 중에는 잘못한 일이 없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이르는 날에 나를 생각해 주옵소서’ 그러면서 그 천국으로 추수되는 첫 번째 영혼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나요? 거칠고 오만하던 그 모든 지성과 마음이 하나님의 회심의 마음에서 확 녹아질 때, 그때에 몸은 어린아이가 아니지만, 마음이 어린아이가 되는 거예요. 자, 제가 중요한 것 가르쳐 줄께요. 하나님의 말씀의 이 교리를 팍 가르칠 시기는 언제인가 하면, 어린 아이의 시기에 가르쳐야 하는 거예요. 자연적인 어린 아이의 시기를 놓치면, 두 번째 중요한 시기가 오는데 영적인 어린 아이의 시기가 오는 거예요. 회심 탁 했을 때, 그때 막 바로 앉혀놓고 막 받아 먹을 그때에 가르치는 거예요. ‘따라해, 외워. 스튜데오 에로구스.’ 교리를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 주는 거예요.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쫙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것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누구에 대한 비난이요, 심판도 되는 거예요? 예수님 당신을 시험한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판단과 심판이 되는 거예요. 저러한 마음은 회심으로부터 아주 멀리 있는 마음이다. 천국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음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얼킨 마음으로 말씀을 판단하고 성경의 진리를 받아 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완강한 그 마음은 천국으로부터 멀어진 마음이에요. 회심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회심했어도 죄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마음이 천국으로부터 떠난 사람들이에요. 그러한 사람들의 삶은 한없이 건조하고 피곤합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그러면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앙이에요. 여러분, 자연적으로는 우리 어린 아이 때에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먹지 못했어요. 의심과 근심이 없이 꾸밈없는 마음으로 그렇게 주님의 말씀 앞에 다가가지 못했어요. 그러면 영적으로라도 이제는 은혜를 받고 회심한 어린 아이와 같이 회심한 영적 특성을 가짐으로써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은혜를 한없이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오늘 우리 교회에 맡겨진 이 모든 아이들은 비록 그들이 비록 그들이 아직 성인은 되지 않았지만, 거듭난 자녀들은 엄연히 교회의 교회의 영적인 지체들이에요. 그래서 이것은 어느 집안의 아이가 단순히 그 집안의 책임만이 아니라 교회 모두와 연결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자녀들이에요. 또한 설령 그들 중 어떠한 아이들이 거듭나지 못한 채 있다고 할지라도 신학적으로 그들은 언약의 자손이에요. 또한 부모 조차도 교회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라고 할지라도 ‘토투스 크리스토스’의 교리에 의해서 그들 모두를 교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 안으면서 그들이 진정한 교회의 영적인 지체가 되도록 우리가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에요. 온 힘을 기울여야 해요.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어두운 세상에 높이 세우신 등경 위의 등불이요, 말 위의 촛대에요. 거기에 불이 붙으면 환한 빛을 발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 한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가 주님을 만나서 진정으로 변화되고 영혼이 하나님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여름에 어린이들을 위한 이 사역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우리가 직접 참여해서 해야 할 사역인데, 선생님과 목회자들과 그리고 봉사자들이 땀을 흘리면서 애쓰는구나 생각을 하고 우리는 여기에 우리의 마음을 보태어 간절히 기도 하고 그리고 이들을 후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자식 한 자식을 우리의 새끼처럼 여기면서 그러면서 그들이 진정으로 주님을 아는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온 마음을 다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이에요. 특히 부모님들은 아직 회심하지 않은 자기 자식을 위해서 많이 눈물 흘릴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해요. 그것이 최고의 사랑,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가실 때에 많은 여자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여자들이 통곡하면서 예수님을 따라 올 때, 예수님께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그 가시 면류관을 쓰신 채 걸어가시다가 뒤를 돌아보시면서 그 여인들에게 말씀하셨어요. ‘얘들아, 예루살렘의 딸들아. 너희들은 날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거라’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거라. 그렇게 간곡히 부탁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올 여름에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우리들이 간절히 눈물로 기도해서 그 어느 해 보다도 놀라운 회심의 역사, 은혜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우리들이 마음을 다해서 그들을 섬겨 주시도록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