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하나님의 사랑(6)_2010_04_24
몇 번째 과죠? 4과. 4장. 자, 그러면 이제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목사가 기도하고 하죠.
자, 그러면 4장에서는 쭉 넘겨 보시면 사랑과 일치의 문제를 그래서 이제는 제일 먼저 사랑의 자리 문제가 나오고요, 사랑의 자리가 어디인가 그 문제를 다루고요. 그 다음에 이제 교회의 일치 문제를 다뤄요. 진정한 일치가 어떠한 종류의 일치인가를 다루고요. 그래서 그 안에서는, 두 번째 다루고요. 세 번째는 이제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에 대해서 다룹니다, 3번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다루고, 그 다음에 109페이지로 넘어가면 caritas적 일치 그것의 성격이 어떠한 성격이냐 다루어요. 다시 넘어가보면 사랑의 자리의 문제가 나오고 이것을 셋으로 나누어서 설명해요. 실제적으로는 인간의 영혼안에 그 다음에 기능안에 그 다음에 작용안에, 작용적으로 이렇게 나름적으로 나누어 본 거예요. 합리적이라 생각이 되고 교회의 일치의 성격이 뭐냐. 일치가 뭐냐라고 할 때,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바른 관계의 온전함이다. 이것이 일치에요. 그래서 바른 관계의 온전함, 그리고 일치. 바른 관계의 일치 그 다음에 온전함의 일치, 그렇게 설명이 되고, 그리고 이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A번에 사랑의 질서가 재편된 것이고 그 다음에 이제 B편으로 넘어가면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다시 개인적으로는 참회와 믿음을 통해서 회심을 통해서 그래서 사랑의 질서가 재편되고 그래서 회개를 통해 자기 사랑의 질서를 버리고 믿음을 통해 신적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을 한거죠. 그렇게 하고 공동체적으로는 교회의 목적을 받아 들이는 거죠. 그래서 생명의 질서와 사역의 질서를 사모하고 질서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그 교회적인 질서를 받아들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툼이 생겨나잖아요. 그 다툼이 소극적으로는 영원한 것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이고, 적극적으로는 교만과 이기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보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일체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교제의 증진, 그리고 지체들과의 교제의 증진, 이것들을 통해서 이제 그 온전한 일체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보여주어요. 그 다음에 caritas적 성격의 일치의 성격 그리고 나오죠. 양이 상당히 많아요. 획일화가 아니라 하모니화다. 획일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다다 한 음으로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을 해봐요. 이것은 획일화에요. 하모니화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이러한 식으로 해가지고 각기 나눠서 불러요. 그런데 각기 다르잖아요. 그런데 그 속에서 하모니가 이루어져요. 그래서 이제 하모니와 까르따디스, 뒤로 넘어가보면 교회의 최고의 섬김이 무엇이냐 문제가 나와요. 구성이 그렇긴 한데 어쨌든 이렇게 돼요. 다시 처음서부터 보겠어요.
일단 읽는게 좋겠죠. 이 목사님부터 시작하겠어요.
<본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모상이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의 교통의 모상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한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서 교제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완전한 머리이시지만, 그의 몸인 교회는 불완전한 신자들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접붙여졌다는 점에서 이미 완전하나, 아직 잔존하는 부패성으로 충분히 그리스도를 닮지 못했다는 점에서 교회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일치를 이루어갑니다. 그리하여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치와 헌신은 오직 까리따스, 곧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써만 가능합니다.
Ⅰ. 사랑의 자리
이처럼 교회는 삼위 안에 있는 사랑의 모상이며, 이 사랑은 교통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교회의 회원이 되고 그가 중생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삼위 하나님과 연합될 때 그들 안에서 반드시 삼위 하나님의 교제의 모상이 존재합니다. 그런 사랑의 교제 안에서 교회는 불완전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완전한 존재가 되어 가며, 그렇게 교회의 오나전함을 위해 기여하는 가운데 성도의 영혼도 완전해져 갑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기초로 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신자의 마음에서 작용하면서 교제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신자의 죄도, 그리고 사랑도 모두 신자의 마음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 하는데, 이는 신자가 이 마음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하고, 사랑으로 섬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실재적으로는 영혼 안에 있으며, 기능적으로는 애성 안에 있지만, 작용적으로는 마음 안에 있어서 신자의 삶을 주관합니다.
A. 실재적 : 영혼 안에
신자의 까리따스, 곧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은 실재적으로는 그의 영혼 안에 존재합니다. 영혼의 본질은 경향성들과 힘들이며, 기능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지성과 애성, 그리고 의성이 그것입니다. 사랑은 영혼 안에 있는 힘과 경향성으로서, 곧 어떤 대상을 목표로 정하고 거기에 끊임없이 붙어 있고 그것을 즐거워하려는 성향이기에, 실재적으로 영혼안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혼 안에 있는 사랑이라는 힘과 경향성들은 그 고유한 질서를 따라서 인간존재의 다른 기관인 육체, 그리고 그 둘과 관련된 기능 모두에 영향을 미쳐서 마음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사랑의 질서를 따르려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제 여기에서 내 설교를 듣는 동안에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하면서 설교를 들으면 편해요. 우선 인간을 이렇게 본다면 이렇게 원인구가 있다고 치고, 그리고 이렇게 있다고 치고 여기가 이제 이렇게 영혼이 있다면 영혼이 있다면 육체가 있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실재에요. 실재. 이것도 실재. 실재야. 실재. 자, 이것은 이제 실재이고 이것은 기능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영혼대로 육체는 육체대로 분리되지만, 마음은 어디로 갔냐고 물으면 안되는 거죠. 그렇죠. 마음은 하나의 기능이에요. 기능. 그래서 이제 기능이라고 보니까 실재가 아니다. 이게 바로 이분설의 구도에요. 이분설의 구도야. 자, 이렇게 보면 그러면 언제나 이렇게 놓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잘들어요. 이 마음은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능이기 때문에 기능이기 때문에 양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요. 그래서 이 영혼은 본질적으로 ........... , power 이렇게 보아요. 이것은 물질이 아니니까 뭐 이제 영혼, 물질설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어요. 영혼의 무게가 21g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수없이 무게를 다는 거야. 운명하기 직전의 무게와 공통적으로 21-22g의 차이가 있는 거야. 그래서 영혼의 무게가 21g이다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영화도 나왔어. 21g이라는 영화도 나왔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의학적으로 분명히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것은 생명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몸에 들어가 있는 어떠한 힘들이 풀어지면서 그 무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의학적으로는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그래요. 뭐 또 안에 있던 폐에 있던 공기가 빠져 나간다든지 여러 가지 것들 때문에 그런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물질이 아니에요. 이러한 성향이나 그 다음에 경향성이나 힘들 이러한 것들로 작용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힘과 성향들이 이게 어떠한 방향이 있거든요. 방향. 방향이 있단 말이에요. 예를 들면 여기에서 주로 생각하는 것은 도덕적인 방향이거든요. 자연적인 방향도 있고, 도덕적인 방향도 있을 것 아니야. 자연적으로 뭐 자연적인 그러한 방향이 있을 것 아니야. 어떠한 사람은 예술을 잘하고, 머리가 좋지만 예술을 잘 하고 그 다음에 어떠한 사람은 논리에 강하고, 그러한 등등의 성향이 있을 것 아니야. 이러한 성향들이 끊임없이 자연적인 것인지 도덕적인 것인지 간에 이렇게 그 마음의 영향을 주는 거예요. 이렇게. 그리고 또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외부의 사물과 접촉할 때 그 때에 마음을 통해서 그래서 정보들이 들어오는 거죠. 여기에는 이제 감각기관들이 있죠. 감관들이 있고, 들어오게 되면 그러한 것들이 마음에 있어서 어떠한 작용을 일으키게 되죠. 그죠? 작용을 일으키면 이 작용이 영혼에 영향을 주는 거야. 여기에는 이러한 영향을 주는 거야. 영향을 주어서 어떻게 하냐 하면 이러한 영혼의 본질인 힘과 그 다음에 힘과 성향의 어떠한 모종의 변화를 주는 거야. 그래서 우리들이 사람의 영혼이 변화된다고 할 때, 하나님이 중생같은 것들은 하나님이 영혼에 오셔서 직접적으로 이 힘과 방향들을 바꾸어 놓으셔서 그래서 이렇게 마음의 변화들을 맺히게 하기 때문에 중생이 먼저이고 회심이 나중이지만 이후에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많은 것들이 이렇게 마음을 움직여서 이 마음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이러한 차선을 따르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육체에까지 영향을 주는 거죠. 육체에 영향을 주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침팬지같은 것, 막 놀리고 그 다음에 입에다가 물린 다음에 내시경 집어 넣으면 위가 빨갛게 출혈 되어 있거든. 그러한 것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분명히 육체에 영향을 주는 거야. 예를 들면 뭐 그 다음에 뭐 예를 들자면 아주 예쁜 여성을 본다든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호흡이 가빠지고 뭐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인데 육체에까지 영향을 주잖아요. 이러한 방식으로 영혼과 육체는 놀랍게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거예요. 이러한 식으로 보는 거예요. 여기에 대한 논리들이 어디에 나와있냐 하면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하여를 보면 나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인간관에 대한 것들이 상세하게, 그렇게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지성, 지성 이것은 원래 있는 말이죠. 그 다음에 애성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런 말은 별로 없어요. 내가 만든 것이고. 그 다음에 의성이라는 말도 내가 만든 건데,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 지성은 이렇게 보는 거예요. 지식 자체, 그 다음에 플러스 지적 능력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이것은 그러면 똑같은 논리로 보면 이것은 어떻게 될까? 그렇죠. 사람 자체와 그 다음에 애적 능력이 되는 거야. 이것은? 의지 자체와 그 다음에 의적 능력이 되는 거죠. 그러면 왜 이러한 복잡한 구분이 이러한 복잡한 구분이 이러한 복잡한 구분이 이렇게 들어가는 이유는 뭐냐.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처음 창조된 사람과 관련이 되어요. 맨 처음에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그럼 맨 처음에 창조되었을 때 우리가 만약에 그 누구지? 경험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것들은 따릴라 라사야. 백색서판의 상태야. 백색서판의 상태. 백석서판의 상태에서 이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었다가 경험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인데 그것을 잘 믿어지지 않는다 이거지. 분명히 처음 만들어진 사람에게도 지식 자체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사랑도 있고 의지 자체도 있는거다 보는 거죠. 그래서 이제 지적 능력은 다시 나누어지는데 이제 추론 능력, 판단 능력, 그 다음에 추론 능력, 판단 이라기 보다는 변증 능력이죠. 변증 능력 그 다음에 추론 능력이에요. 변증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인데 특별히 그 어떠한 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번쩍 하고 비추어져 오는 그것을 가지고 판단을 하는 거예요. 우리들이 이것을 가리켜서 오성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가리켜서 이성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 다음에 가리켜서 오성이라고 가르켜요. 성경에서는 총명이라고 자주 나와요. 자, 그 다음에 이것은 이제 믿음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고, 이것은 이제 논리적인 지식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같은 능력으로 이제 애적 능력인데,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이잖아. 그런데 사실은 미워하는 것도 사랑 속에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이제 애적 능력을 둘로 나누어서 그래서 애호 능력, 애호 능력과 그 다음에 오혐 능력, 혐오라고 하면 좀 그러니까 바꾸어서 오혐. 이렇게 쓰는 거거든. 난 나름대로 논리가 있는 거야. 왜냐 하면 이 애의 반대말이 오야. 이렇게 애호거든. 오혐이야. 혐.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애의 반대가 오야. 호의 반대가 혐이라고. 좋아하다, 혐오하다. 사랑하다. 이것은 악이라 하지 않고 미울 오자야, 미울 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증오 그러잖아요. 증오. 이렇게. 이렇게 쓴단 말이에요. 증악이 아니라 증오라 하거든. 미울 오. 이렇게 오혐 능력이라는게 맞지. 이것은 뭐냐 하면 좋아하는 것을 잡아드릴 수 있는 끌어 당길 수 있는 능력과 싫어하는 것을 배척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켜요. 합해서 애적 능력이라 부르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의적 능력은 어떻게 부르냐 하면, 이것은 뭐냐 하면 의적 능력은 이행 능력이야. 이행 능력과 그 다음에 저항 능력이에요. 이행은 뭐냐 하면 실행을 하는 거죠. 안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실행을 시키는 능력이야. 저항 능력은 뭘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안 이루어 지도록 막는 능력이에요. 저항할 수 있는 능력. 이게 의지죠. 그러면 어떤 것이죠? 선을 행하려고 할 수 있는 능력, 실행할 수 있는 능력. 악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거기에 저항하는 능력 그런 거죠. 그죠? 죄죽임과 같은 경우에는 이 저항능력 그 다음에 이행 능력 모두가 요구가 되죠. 이행 능력은 적극적으로 은혜를 받아야 하고 저항 능력은 죄의 욕망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부수어 내는 거죠. 이정도 구도로 딱 보고 나니까, 모든 것들이 설명하기가 쉬워 지는 거예요. 그런데 커다란 문제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것을 상세하게 설명한게,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여기에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하여를 보십시오.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좀더 발전이 있으면서 구체화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틀은 그렇게 보는 거죠. 이렇게 놓고 보면 굉장히 그 이해하기 쉬워 지는 거야. 이렇게 놓고. 그래서 애성안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거, 이거를 가리키는 거야. 굉장히 좋은 표현 같아요. 애성. 몇 사람한테 이야기를 들었어요. 참 가슴에 와 닿는 단어다. 지성은 지성이라고 하는데, 애성은, 지성, 사랑, 의지라고 표현하니까 사실은 이게 안 맞는 거지. 지식, 사랑, 의지라고 표현해야 하는데 지성, 사랑, 의지라고 표현하니까 잘 안맞는 거야. 그래서 사랑과 의지의 관계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 의지, 사랑 그 자체를 이렇게 보는 거죠. 이렇게 있는데 여기가 지 이고 여기가 의 야. 애라고 하는 것은 애라고 하는 것은 이미 벌써 애가 없으면 의가 있을 수가 없어. 그래서 애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기능이라기 보다는 의지쪽에 들어있는 기능이라고 보는 거지.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품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당신의 지성과 의지로 창조하십니다. 지성, 의지, 이 두 개가 짝을 이루면서 계속 등장해요. 이게 바로 이러한 그 다음에 지, 정, 의에 대한 기존에 있었던 전통적인 참 구분을 깨고 그리고 이렇게 그 사랑 그 자체가 의지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경험주의적인 설명들을 받아들인 흔적들이에요.
자, 그러면 이제 됐죠. 그러면 이제 사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면, 이것은 이거고.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사랑은 영혼의 경향성이고 힘인데, 힘이 어떠한 도덕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것이 자기 사랑이나 하나님 사랑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요. 영혼의 기능의 모습은 똑같은 거예요. 예를 들자면 이 손을 뻗어서 이렇게 뭔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할 수도 있고, 칼을 들수도 있듯이 사람이라고 하는 그것은 자기 사랑이든 하나님 사랑이든 본질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로 경향성들과 힘이다.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역사하는 거죠. 자, 그 정도로 해놓고 그 다음에 좀더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B. 기능적 : 이성 안에
신자의 까리따스, 곧 하나님께 대한 지순의 사랑은 기능적으로 신자의 애성 안에 존재합니다. 인간 영혼의 세 가지 기능 중 지성은 사물을 생각하고 추론하며 판단하는 기능과 지식 자체로 이루어지며, 애성은 사물을 선호하고 혐오하는 기능과 사랑 자체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의성은 원하는 것을 행하는 지행능력과..
<김남준 목사님>
여기에서 지행능력이 아니라, 이행 능력이에요. 미스 프린트에요. 이행. 이행이라는 단어 알죠? 그 다음에.
<본문>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저항 능력, 그리고 의지 자체로 이루어집니다.
기능론적으로 사랑은 인간 영혼의 기능 중 애성 안에 자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사물을 판단할 수 있도록 두 가지를 주셨는데 하나는 지식이고, 또 하나는 정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물을 보고 지성으로 판단하고 또 마음이 그것에 이끌리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함으로써 그것들을 판단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것은 이제 존 오웬의 그 설명이에요. 그래서 존 오웬 뿐만 아니라 이것은 전체적으로 합의하는 내용이에요. 누구든지 그렇게 보았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사물이 무엇인가 하는 판단을 지성으로 하고 마음이 이끌리거나 배척하거나 그렇게 하면서 판단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두 가지는 서로 영향을 미쳐요. 그래서 저 사람이 안 좋은 사람이다 생각하면, 그가 하는 행동들이 다 이상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 다음에 저 물건에 대해서 잘못 알게 되면 이후에 일어나는 그 물건의 작용들을 전부다 오해하게 되는 거죠. 그 다음.
<본문>
그런데 정서를 움직이는 이 사랑은 또한 의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어떤 것들을 선호하게 하거나 혹은 혐오하게 함으로써 사물을 판단하는 지성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의지를 이끌어 냅니다.
애성은 애적 능력과 사랑 자체로 이루어지는데 애적인 능력은 사랑과 관련된 영혼의 기능입니다. 이러한 애적 능력은 선호능력과 혐오 능력으로 나뉘는데...
<김남준 목사님>
선호 능력이라고도 하고, 애호 능력이라고도 하고. 선호라고 하는 것은 선택과 관련짖는 거예요. 그래서 선호. 오혐. 이것은 뭐냐 하면 선택하는 거죠. 그래서 선호 능력, 또는 애호 능력 그렇게 부릅니다.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 다음에.
<본문>
선호 능력은 영혼이 좋아하는 것에 마음이 끌리고 그것에 합치하며 또한 그것을 목표로 누리려고 하는 경향과 능력을 가리키고, 또한 혐오 능력은 그것을 싫어하고 배척함으로써 거부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또한 인간의 애성은 하나님께서 생래적으로 주신 사랑 자체를 포함합니다. 인간은 애성적으로 사랑할 능력을 갖추었지만, 사랑에 있어서 백색석판..
<김남준 목사님>
t가 빠졌어요. 타뷸라 a앞에 t가 빠졌어요. 타뷸라 라사. tabula rasa.
<본문>
상태로 태어나지 않고 이미 하나님을 향한 지순애 사랑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여야 하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하여 친절을 베풀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운 영혼 안에서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가장 영혼다움으로 가득차 영혼의 전일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혼은 그 모든 힘들과 경향성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적용하며 살 수 있도록 정의되어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정의가 아니라 정위. 정위. 위치를 잡는다.
<본문>
성도의 온전함은 바로 이처럼 영혼 안에 있는 모든 부패한 본성들을 순결한 사랑으로 변화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 가득차서 그 사랑 안에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자신의 존재목적을 합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구현해가는 삶에서...
<김남준 목사님>
그러면 사랑이라는 것이 결국은 존재의 목적을 합치시키는 거죠. 그래서 너무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의 존재의 목적이 자기 자신의 존재의 목적이 되는 거죠. 부모 사랑이 대표적이잖아요. 부모는 목표가 없어, 자식이 잘 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남편이 잘 되면 되는 거예요. 이번에 홍민기 목사 그 교회에 갔는데, 사모님이 참 피아노를 잘 치시더라고요. 줄리어드 출신인데, 재원이야. 그런데 남편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목회하면서 만족하는 거죠. 그러면서 이제 삼년 됐는데 삼백명 모이니까 잘하고 있는 거죠. 어쨌든 사랑은 그렇게 합치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사실 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꿈을 버리게 되는 거죠.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리는 거야. 결혼하기 전에는 선교를 가겠습니다. 목회를 하겠습니다. 예술을 하겠습니다. 뭘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형제 딱 만나면 그 다음에 없어지는 거죠. 자기 뭐 할건데? 자기의 꿈과 존재의 목적이 생겨나는 거죠. 합치 시켜 가는 과정이에요.
그지, 강성경? 강성경이가 그러한 형제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줘요. 모두 다 그러한 것을 너무 하니까 결혼이 지체가 되는 거야. 언제든지 나를 합치시킬 수가 있다. 그렇게 생각 해야 해. 강성경 전도사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줘야해. 강성경 전도사, 그 김진아가 거기 있드만. 강성경보다 자기가 한 살 어리다고 자랑하대. 그 다음에.
<본문>
행복과 쉼을 느끼는 것입니다. 교회의 온전함은 바로 지체들이 영혼의 온전함을 회복하고 거기에서 비롯된 삶을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래서 이제 기능적으로는 이제 사랑이 대상 안에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되는데 사랑 안에 이제 어떻게 되냐 하면 실질적으로 영혼 안에서 사랑의 성향이 강해지게 되면 그것이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실제로 이 그 영혼의 사랑의 경향성들이 생겨나게 되면 실제로 마음 안에서 아주 강력한 힘으로 역사하게 돼요. 그래서 악한 습관 같은 것도 마찬가지에요. 일단 성향이 형성되게 되면, 그러면 중독같은 것들도 그래서 생겨나는 거예요. 게임 중독에 빠지고 이러한 것들 있잖아요. 그래서 청교도들은 마음 안에 성향이 형성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경계했어요. 그 성향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그 이름을 높이고 말씀을 사랑하고 하는 이러한 것들의 성향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 신앙생활에 저해가 되는 것이 형성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주의 했던 것이죠. 그래서 죄죽임 그럴 때 그 자체가 마음 안에 있는 성향을 영혼 안에 있는 성향을 죽여 가는 거야. 어떻게? 마음 안에 있는 죄의 작용들을 제어함으로써 성향들을 죽여가는 거야. 성령의 역사로서. 그 다음.
<본문>
C. 작용적 : 마음 안에
비록 사랑이 실재론적으로는 영혼 안에, 기능론적으로는 애성 안에 존재하지만, 그것이 직접 사용되는 곳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작용적으로 볼 때, 사랑의 자리가 사람의 마음이라고 봅니다. 인간의 마음은 수많은 행동을 산출해 내는 공장과 같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행동과 대적하는 행동들이 직접 산출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너무나 자주 그 마음의 주인이 인간 자신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책임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에게 영혼을 돌이키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돌이키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움직임이 신자 자신의 의지 안에 있음을 지적합니다. 심지어 신자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동안에도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여’ 작용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의 의지적 활동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게 이제 그 신학적으로 지금 이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이 제가 중국인가 어딘가 가서 자기 깨어짐을 가지고 특강을 했는데, 그 듣던 한 사람이 질문을 하는데, 뭐냐 하면 은혜로만 되어야지 거기에 인간의 의지가 개입이 되면 어떻게 되겠냐고. 그러한 것들은 이제 개혁신학에 대하여는 알고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그 마음의 구조라든지 그러한 이해가 거의 없기 때문에그렇게 인간을 그렇게 보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리가 안되어 있어요. 그래서 결국은 기본적인 개념들이 정리가 안되어 있으면, 논리적인 설교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두리 뭉실하게 뭉뚱그려서, 그렇게 되면 이제 날선 검이 되기 위해서는 논리가 분명해야 해요.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해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에요. 정말 정리가 안되겠어요?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수 없다 그러면 은혜 자체가 의지를 불러 일으키는 작용인데, 그 이야기가 잘 안되죠. 참 그러니까 신학 공부를 잘 못한 거죠. 은혜와 의지가 대립이 되는 식으로 설명을 하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해결이 안되는 거야. 그래서 이제 존 오웬이 자기의 성화론에서 남긴 유명한 이야기가 <Holy Sprit>에서 하나님의 성령인데, 성령이 He works in God, and with God, not without in us and with us, not without us and against us, not without us. 라는 유명한 말을 만들어 낸 거예요.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지. 우리를 거슬러서 우리 없이 역사하시지는 않는다. 이렇게 되는 거죠. 어쨌든 이 문제는 철학에 있어서 굉장히 난해한 것중에 하나인데, 이런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으면 성경을 이해하는 정도도 다르고, 그 다음에 마음지킴의 교리를 더 꼼꼼히 살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본문>
따라서 신자의 마음은 전쟁터와 같습니다. 인간에게 어떤 행동을 촉발시키는 무수한 감정들이 이곳을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하루에 십만가지 정도의 생각이 오간대요. 그러한 것들은 대부분 열매 맺지 못하고 사라지지만, 어떠한 것들은 열매를 맺으면서 행동을 산출하게 되는 거죠. 그 다음에.
<본문>
사랑 뿐 아니라 미움이 실제로 작용하는 곳도 마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작용하는 곳도 신자의 마음이며 의심과 거짓이 자리하는 곳도 거기입니다. 사랑도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마음이 사랑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결코 사랑으로 말미암아 일치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마음에 반영되고, 마음의 작용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미칩니다.
<김남준 목사님>
특별히 이제 설명할 내용은 없죠.
<질문>
여기에서요, 지금 기능적, 작용적 딱 잘 안잡히는데요, 왜냐 하면 마음이는 것도 function이라는 것도 기능, 작용 예, 번역될 수 있는 사항인데
<김남준 목사님>
나는 이렇게 나눈 것들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면, 이렇게 본 것이에요. 실재적으로는 영혼 안에 있고 그 다음에 기능적으로는 혹은 작용적으로는 마음 안에 있다하면 되는데, 굳이 기능적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더 넣었던 이유는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 했던, 여기에서 기능을 이야기 한 것은 능력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거예요. 무슨 이야기 이냐 하면 여기에 영혼의 영혼의 성향이 있잖아. 이렇게. 이것이 그 다음에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이게 이제 작용을 하면 이게 바로 행동으로 산출이 되는 거야. 산출이 되잖아. 그런데 이제 이렇게 설명을 해도 되지만, 그러나 내가 뭘 이야기 하고 싶은가 하면, 애성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게 영혼과 마음이야. 마음사이에 존재하는 어떠한 루트라고 생각하면 안돼. 다만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이 마음을 나눌 때, 행동이 산출되는데 여기에 어떤 이렇게 이렇게 이제 여기 성향에 예를 들어보자. 여기에 A를 싫어하는 성향이 있다고 치자. 여기에 A가 등장했을 때, 배척하거나 저항하려는 이러한 행동을 산출하게 될 것 아니야. 그러면 이렇게 될 때에 그것이 마음 안에 일어나는 작용이지만, 이게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작용이지만, 이것은 이 마음 안에 있는 기본적으로 이미 있는 어떤 두 가지의 능력, 아까 이야기 한 대로 애호와 오혐이라고 하는 이러한 능력, 이 능력의 틀 속에서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는 것이지, 마치 마음은 평판적으로 있는데 이것이 수시로 이것이 떨어져가지고 그것이 개별적으로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보는 거죠. 이러한 능력이 그 마음 안에 이미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마음의 능력, 마음의 능력 기능이라고 하는데, 기능의 틀 안에서 이러한 것들이 싫어하는 것들은 오혐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기능을 사용해서 이러한 것들이 일관성있는 것들로 전개되는 것을 볼 때에 이것을 마음 안에 이미 이러한, 마음 안에. 이것은 마음 안에 경향성이라고 해야 하나. 성향이 아니라 경향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마음안에는 성향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거지. disposition이라고 하는데, disposition. 이러한 성향들은 인간의 마음안에 있어서 애호 하거나 오혐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게 기능을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마음에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작용하는 것이지, 이게 산발적으로 어느 사건이 생겨나게 되면은 그것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보는 거예요. 그래서 어쨌든 B번과 C번 두 개는 각각 다른 영혼이 있고, 애성이 있고, 마음이 있다 이러한 식으로 이해하지 말고, 영혼과 마음 이렇게 이해를 하되 이 마음 안에서 이러한 틀들이 있다는 것을 한번 애성이라는 것으로 짚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해를 하면 되요. 자, 그 다음. 그렇게 되고요. 철학책을 찾아봐도 답이 잘 안나와요. 사람마다 말하는 것이 복잡하고 어지러워요. 칼빈도 인간의 영혼이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유익하다 그랬어요. 그래서 공부를 하라고 권면하는 장면이 나오죠. 자신의 마음 속에서는 정리가 다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문맥 자체가 그 당시에는 너무 호기심이 많으니까, 나처럼 설명하고 하면 사람들이 철학의 재판이라 느껴질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너무 안하니까 너무 안하니까 자기 구조가 되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전혀 모르니까. 그런데 그러잖아. 영혼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가끔 물어보는 것, 주님이 나를 만지셨다고 하니까 어디를 만져 주셨냐고 물으는 것과 똑같이 영혼의 변화가 필요하다니까 영혼이 뭔데? 답을 못찾아요. 영혼이 어떻게 변화되는 건데? 빨강색이 노랑색으로 변화되는 거야? 아니면 크기가 커지는 거야, 뭐가 변화되는 거야, 심지어 나의 설교 속에 영혼의 파괴도 나오잖아. 그러한 것은 영혼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 안돼. 어떻게 파괴 돼? 그런데 왜 영혼의 파괴라고 쓰냐. 자기 깨어진다라고 하는데, 뭐가 깨어지냐. 자기가 유리 그릇이야? 그렇지 자기는 유리지. 도자기. 그러한 것들은 그 정의를 분명하게 해놓지 않으면 안되는 거지. 그래서 항상 자기 깨어짐이든지, 도덕적 통치에서든지 나오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definition이야. definition부터 먼저 해야 하는 거야. 제 이야기를 앞으로 여러분들이 설교자가 깊이 있는 설교자가 되기를 원하면 저의 충고를 받아 들여요. 몇 년동안 대게 많이 고민하였고 그렇게 개혁파 정통주의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는데 결론은 뭐냐 하면 철학없이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악보볼 능력이 없이 음악을 공부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판단이 서요. 그래서 이제 칼빈신학교 가서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정말이에요. 저의 충고를 받아 들이고 그리고 자기의 설교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으로 자기가 설교를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안돼요. 감동은 잘들으세요. 감동은 세월이 지나면 감동을 줄 수 있어요. 자기 삶이 진솔하고 진지하기만 하면, 감동을 줘요. 그래서 철가방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잖아. 철가방에 목숨을 걸었다. 유퉁같은 사람은 국밥에 내 인생을 걸었다. 그 사람이 나와서 TV에서 떠드는 것 보면,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감동이 돼요. 야, 누구는 국밥 하나 가지고 청춘을 걸었네. 야, 우리는 뭔가. 그래서 철가방도 감동을 주고 진지하게 살고 자기를 거기에 합치시키려고 쏟아 부으면 똥 푸는 사람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거야. 모든지 뭐는 감동을 안 주겠어. 결국은 감동을 못 주는 무엇이냐 하면 진지함과 몰입, 자기를 쏟아 붓는 일체의 삶이 없기 때문에 오래 예수를 믿고 목회를 해도 감동을 못주는 거야. 감동을 주죠. 뭐든지 주죠. 뭐든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면 감동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아요. 절대로 깊이를 보장하지 않아요. 그러면 결국엔 감동을 줄 수 있는 것도 자기가 몰입하는 그 분야지, 자기가 몰입하지 않는 분야에 감동을 줄 수 있나. 그 모든 삶의 방면에서 그렇게 주님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그러나 사람의 정신과 마음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거예요. 모든 방면에 있어서 그렇게 다 못하는 거죠. 야, 기도도 이 사람은 나와 비교도 안되는 구나. 야, 말씀의 연구도 나와 비교도 안되는 구나. 그 정도야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도 탁월하구나, 죄인들의 심리도 꽤뚫고 있구나. 무슨 경영, 뭐 뭐 현대 과학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인간이 되어서. 그래서 뭐냐 하면 이제 설교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감동이 아니라, 감동은 깊이가 얕아도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거야. 그 감동과는 상관없이 설교가 깊어 지려면 그렇게 여러분들이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 정리된 사고들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이거지. 최근에 여러분들이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최근에 그 여태까지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론을 쓰잖아. 삼위일체론을 이제 왜 쓴 거예요? 삼위일체론을, 조직 신학 전공자가 대답해야지, 삼위일체론을 왜 쓴거야? 모른다고 하면 안돼지. 삼위일체론을 왜 썼던 것 같아? 무슨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쓴 것 같아? 김희찬. 응? 다 가르쳐 줬구만 왜 그래, 삼위일체론을 왜 썼냐니까. 허허. 왜 몰라, 삼위일체니까 삼위일체를 입증하기 위해서 썼을 것 아니야. 그래 안그래, 제목이 삼위일체잖아. 그게 전통적인 학설이었어. 그러니까 삼위일체의 교리를 교인들과 신학자들이 알아듣게 증명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론을 썼다는 것이 전통적인 학설이에요. 그런데 그게 보다시피 만만한 책이 아니에요. 언제 같이 공부하면 굉장히 좋을텐데, 시간이 없으니까. 한 6개월 배워야 하는데, 만만한 책이 아니에요. 누구든지 신학을 함에 있어서 그 책을 통과하지 않고는 신학이 안되는 거예요. 더군다나 신론에 있어서는 우리가 뭐 극자유주의자도 그 삼위일체론은 원천이래는 거야. 요즘에 1960년대 이후로 60년대, 아 그렇죠. 60년대, 50년대 이후로 그러한 삼위일체론 자체가 삼위일체를 증명하기 위해서 쓰여졌다고 하는 전통적인 그 말하자면 관점에 대한 아주 진지한 비판이 일어나는 거예요. 굉장히 매혹적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맞다는 확신이 들어요, 내 마음속에. 그러면 증거가 뭐냐 하면 삼위일체론의 뒷부분에 보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쓸데 없는 일이다. 삼위일체는 그렇게 해서 증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그래. 다 하고 나서, 그러면 하지 말았어야지. 증명도 못하는 거, 자기가 왜 하냐 이거예요. 그래서 이제 새로운 학설이 나오는데 나는 그게 심정적으로 아주 깊이 동의가 돼요. 어거스틴은 그 학설에 의하면, 어거스틴은 처음부터 삼위일체론을 쓸 때, 그 신비한, 신비에 속하는 삼위일체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 그것을 쓴 것이 아니라는 거야. 그러면 뭐냐 하면 영혼의 영혼의 수련을 위해서 썼어요. 군인들이 전쟁을 할 때 유능하게 하기 위해서 평소에 군사 훈련을 하잖아. 영혼의 군사 훈련을 위해서 쓴 거야. 무슨 뜻이냐 하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사유의 능력을 근육을 배양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삼위일체속으로 들어가서 모든 논리력을 동원하면서 사람들의 상상력과 이성의 능력을 자극하는 거야. 그러면서 이 영적인 근육을, 지적인 근육을 길러 주기 위해서 삼위일체를 썼다 이거야. 그래서 이것은 그 자체가 철학서나 교리서가 아니라 교육서란 말이야. 이게 최근에 나오는 학설이에요. 상당한 일리가 있다 보는 거야. 실제로 보면 한참 그러한 설교를 많이 할 때, 젊은 친구들은 능력이 막 뛰어 나잖아. 막 놀랍게 발전해 나가. 사유의 능력들이. 그럴 때에 성경의 진리들을 흡입하고 빨아 들일 수 있는 놀라운 힘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이 책을 총신에 가서 애들 강의하면서 이것을 보여주면서 그랬어요. 이것을 한권씩 줄까, 그랬더니 달래. 주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읽어야 되니까 가져가는 즉시 읽을 의무가 생기고 읽기 싫으면 안가져도 된다. 그런데 가져가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 다 읽을꺼래. 다 달래, 책도 이쁘니까. 가져가더니 그 다음시간에 가서 이야기 해보라 하니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 훈련이 안된 거예요. 놀라워요. 그 다음에.
<본문>
Ⅱ 교회의 일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데에 분명한 도덕적인 목적이 있으셨던 것처럼,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세상을 재창조하심에 있어서도 분명한 도덕적인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러한 목적이 기여하기 위하여 구속으로 회복될 세상의 종자 씨로 선택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아주 분명한 존재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 재창조의 모상으로서 자기 안에서 회복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성도들도 자기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써 자기의 존재목표를 교회의 존재목표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혼자 살아갔더라면 다 할 수 없었을 인간 존재의 목적과 창조의 목적을 공동체적인 섬김을 통하여 이 땅에 실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상의 교회 안에서 신자들은 끊임없이 추루한 자기사랑과 교만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써 성도들 간의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임 목사, 요즘 교역자들이 무슨 스터디 하냐.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하고 있잖아. 같이 모여서 하는 스터디에서.
<대답>
이게 목사님, 시작 하시기 전에 저희가 먼저 이것을 하자 해서 이것을 하던 과정이었어요.
<김남준 목사님>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레카프텔라치오 교리를 그것을 좀 공부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엮어서 누가 좀 애착이 있는 사람이 하면 좋은데, 연관된 것을 딱딱딱딱 묶어서 교회에 관해서 한꺼번에 묶어놓는 거야. 레카프텔라치오 교리가 지금 여기에 나오는 지금 93페이지 앞의 설명이 레카프텔라치오에 대한 설명이거든.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 공동체를 창조하셨고 그렇게 보면 이제 그 뭐야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를 약으로 묘사하잖아. 우리 몸이 병에 걸리면 약을 어떻게 하냐. 우리 몸속에 투입하거나 바르잖아.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성육신 하셔야 되는 거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어요. 필연적으로 인성을 입으셔야 했고,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셔야 했다 이거야. 그래서 그리스도를 그가 medicine, 약이라고 보았던 거야.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어. 약이라 그러는 거야. 그래서 우리 인류 전체의 몸이 약이신 그분을 복용한거야. 그 부패로부터 우리들이 살아가고 마지막에는 허물을 벗어 버리는 거야. 그 허물이 결국엔 영원히 멸망될 자들에 해상하는 거야. 여기도 반론이 굉장해요. 멸망받을 자들이 있다고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강력하게 부인하는 거죠. 루터나 존스토트나 이러한 사람들은. 그러나 개혁파에서는 그렇게 안보죠.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은 그러한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을 굉장히 아릅답게 묘사를 한다고. 그래서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야. 그래서 약을 복용을 하는 거야. 그리스도야. 이제 마지막에 이제 다 회복이 되고 마지막에 그 껍질처럼 남은 허물같은 옷을 벗어 버려서 그것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원히 멸망받을 자들, 완전한 불결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제 지옥의 불길 속에 타오르는 가운데 그때 그 성도들은 기뻐하고 그리고 하나님 그 심판을 통해서 지극히 영광을 받으시는 거야. 굉장히 아름다운 논리죠. 그래서 레카프텔라치오 교리를 공부를 하면 좋겠어. 여러분들이 설교자는요, 내가 어저께도 교회에 가서 달라스에서 설교학 공부하고 온 목사님들에게 설교는 설교를 배움으로써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였던 사람들이 설교자가 되는 거예요. 예배자였던 사람들이, 그래서 훌륭한 예배자에게서 설교자가 나오는 것이지, 절대로 설교를 연구하고 그런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야. 그래서 최고의 설교학 시간이 신학교에서 언제냐 하면 채플시간이야. 채플 때 무엇이 설교고 무엇이 설교가 아닌가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을 때 거기에서 설교자의 가치나 이러한 것들을 인식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란 말야.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안하고 그 건성으로 자꾸 지적으로 접근해서 하려고 하니까 설교가 잘 안되는 거죠. 보면 설교도 자기가 듣고 꺾어졌던 그 설교를 자기가 재탕할 때 그 설교가 가장 힘이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한창때, 설교집을 많이 읽었어요. 스펄전 설교집 많이 읽었어요. 그러한 설교집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이 도전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한 것도 잘 안 읽으려고 하잖아. 읽어봐야 이것이 지적으로 남는 것이 있을까. 그렇지 않아요. 설교집을 많이 읽어야 해요. 설교집과 전기들을 많이 읽어야 해요. 어려운 신학책만 가지고 씨름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것이 되지 않은,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목사와 설교에서 그런 말을 하잖아요. 신학을 전달하는 최상의 도고가 설교라고 본다. 그리고 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은 하나님을 향한 정중한 예배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경배의 정신속에서 말씀이 수납되어야지, 강의하는 것처럼 전달되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그 다음에, 그 다음 사람.
<본문>
A.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님
교회의 일치를 말함에 있어서 먼저 기억하여 할 사실이 있습니다. 교회의 일치가 단지 다툼과 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치는 영적인 일치로서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바르고 온전한 관계를 통하여 수립되는 일치이지, 서로의 이해관계의 일칠글 따라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육적이고 조직적인 일치가 아니라, 영적인 일치이며 유기체적인 일치입니다. 이는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신자 개개인의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써 이루게 되는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일치는 단지 이해관계를 고려한 편의적 사랑의 일치가 아니라 지순의 사랑의 일치이며 그 사랑을 통해 성도의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일치입니다.
B. 바른 관계의 온전함과 일치
이처럼 교회의 일치는 관계의 온전함과 일치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관계의 온전함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두 개는 나뉘어 지는 것이 아니죠. 그렇죠? 그렇게 이루어지는 일치에요. 무슨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니까 모든 사람이 그 뜻에 합치하도록 자신이 온전해 질 때, 그러한 일치가 이루어지는데, 그렇게 자기를 포기하고 온전해지도록 가는 그것이 사랑이 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되는 것이죠. 그 다음에
<본문>
그것은 외형적이고 조직적인 일치가 아니라, 영적이고 유기적인 일치이며 사랑의 일치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참된 교회의 일치는 삼위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신자 자신과 다른 지체들의 존재론적인 질서 안에서 수립되는 바른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바른 관계의 일치
첫째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입니다. 교회의 일치는 진실한 참회를 통해 하나님께 용서받은 신자가 다시 사랑으로써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신자들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 욕망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내버려둔 채 일치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정말 교회에 필요한 일치가 아닙니다.
<김남준 목사님>
오늘날 보면, <분열된 복음주의>에서도 보는 것과 같이 이게 그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방법들이 그 소위 이야기 하는 에큐메니컬을 중심으로 일어나잖아. 일어나게 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교회가 정말 사랑으로 넘치게 될 때, 그 이루어지는 일치는 정말 놀라워요. 그러한 경건의, 그러한 교회적인 일치라고 하는 것이 다원화, 다원화, 다원적인 사상이 들어오기, 들어오는 것과 맞물려 있지만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뭐냐 하면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참된 회심을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그러한 영적인 변화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될 때, 일치에 대한 기대는 사라지지 않는 거야. 은혜 받으면 될 것이다라는 것과 그러한 경건의 능력이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 시점에 바로 이러한 그 소위 이야기 하는 연합 운동들이, 외적 일치의 연합 운동들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라고 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거죠. 그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 했던 그 일치가 설득력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때만 해도 자기의 회중들이 변화를 받고 새로워가는 그러한 실제적인 삶, 그리고 그때만 해도 굉장히 논리적인 사유를 많이 할 때잖아요. 수도원에서 뭐했겠어요. 수도원에서 그 공부하고, 수도하고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이러한 일치들을 상당히 현실적으로 볼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교회도 보면 끊임없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성도들이 변화하고 회심하면 목회자가 의도했던 대로 교회가 움직여지지만, 그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거죠. 그러면 깨지지 않고 싸우지 않으려면 결국은 진리라는 표준보다는 각자 놓여진 상황이 어떠한 상황인가 하는 것을 서로서로 이해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상대방을 서로 건드리지 않는 것 밖에는 대안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모습으로부터 현저하게 멀어지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누가 그러더라고. 막 투표를 하면서, 내 의견은 이래요, 이래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얘들아 그거 그렇게 하면 안된다. 사회자가 예수님도 의견이 있으면 손을 드세요. 당신도 어짜피 한표에요. 자 그다음 사람, 교회는. 각주 14부터.
<본문>
교회는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일치에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기도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둘째로, 사람과의 온전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지체들 간의 끊임없는 용서와 사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신자 각 사람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깨뜨려지고, 자기죽음을 경험하고, 또 그분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이렇게 온전한 관계 속에서 만나고 즐거워하는 그 행복은 끊임없는 용서의 실천과 사랑의 극복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교회의 회원인 신자는 이러한 사랑과 헌신으로서 지체들을 세워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제 이게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안 변하잖아. 그리고 인간의 자아는 말이죠. 자기에게 있어서 거의 신적인 존재야.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티끌만한 세상의 욕망이 물질에 대한 욕망이 없어도 그것은 최대의 우상 숭배자가 되는 거야. 그래서 인간이 목숨은 내놔도 자기는 하나님 앞에 깨지기를 원하지 않는 거예요. 의외로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에 많아요. 그러한 것들을 내버려 둔채 목회자들에게 맞춰주고, 교회 분위기에 맞춰 주고 하는 식으로 인생을 영위해 나가는 거죠. 그게 결국은 그 본인에게 그러한 삶이라고 하는 것이 경건에 기반을 둔 삶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제 내가 항상 목회의 영광이 회심이라고. 그분이 그러죠. 내가 어제 만난 분이 기숙사 교목을 하시는 분이에요. 그날 회심 목회에 대해서 강의를 하러 가고 나서 자기가 학생들과 대화를 많이 하고서 충격이었다고 이야기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충격이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충격이죠. 그러니까 얼마나 우리들이 본질로부터 멀어져 있는가를 보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에 의하면 목회할 때, 여러분들 가까이 와서 잘 맞춰 주고, 여러분들의 수족이 되어 주고 그 다음에 돈도 잘 내고, 여러분들에게 접대를 잘 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잖아. 그렇게 되면 안되는 거죠. 진정한 성경이 이야기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의 일치가 아니잖아. 사람이 깨뜨려지고 변화되어야 하죠. 그래서 목회의 영광은 회심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사역을 하고 있는 현장안에서 작지만 그 회심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야 해요. 그래서 간증 거리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해요. 지금 안생기면 앞으로도 생길 가능성이 없어요. 깊이 그러한 문제들을 놓고 고민을 해야 해요. 이렇게 이야기 하면 여러분들에게 아픈 자극이 될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사역을 이루어 가면서 많은 열매들이 교회 전체의 후원을 받고 있는 거예요. 성도들이 예배에 은혜를 받고, 다른 교역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나누어서 섬겨 주고, 예를 들면 출판부에서 책 만들어 주고, 이렇게 다 섬기고 그 다음에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래서 여러분들의 목양이 수월해 지고 영혼들이 고분고분 하는 것인데, 여러분들이 이제 목회를 직접 할 때에는 그것을 다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 하면, 부 목사님들은 잘 들어요. 훌륭하게 부 목사 했던 사람들이 훌륭하게 담임 목회하는 것 아니에요.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비오듯이 총알이 쏟아지는 그 곳에서 참모장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던 군인이 사단장을 시켜 주면 그렇게 잘 수행하느냐. 그것은 완전한 별개의 문제에요. 그래서 수시로 자기 자신이 정말 하나님 앞에 빈들에 서서 자기를 봐야 해요. 그래서 전도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생짜배기 사람들을 모아 놓고 심지어 불신자들을 회당에 공회당에 가득 집어 놓고 한번 담대하게 설교해 보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이 속에서 영혼들이 회심을 하는 역사들이 일어나는가. 그것이에요. 그래서 지금 같은 좋은 것들이 갖추어지지 못하였던 때에도 아우구스티누스 경우 같은 때에는 주교들이 인정하면 곧바로 성직자가 되었거든요. 오히려 그때에 존경 받고 신학적 깊이가 더 깊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요. 목회자들이 더 많이 나오는 거예요. 신학훈련을 조직적으로 안 받았는데. 왜냐 하면 확실히 검증이 되니까. 이 사람이 수도생활을 하면서 정말 애제자인가. 진리에 관하여 목마른 사람인가 그것은 숨길수가 있겠어요? 어떻게 숨길수가 있겠어요? 그러면 그 다음에 공중들에게 예수를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들을 전할 때 표징들이 나타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가. 이 세가지를 보고 성직자를 시키는거야. 훨씬더 열매가 뛰어나요. 그래서 신학을 배우고 코스를 밟는 것 자체가 자기를 은닉하는 과정이에요. 남이 속는 것은 괜찮은데, 자신도 속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야. 그래서 안되는 것인데, 그것을 하니까. 점점 교회를 할 수 없는 사람인데, 교회를 하겠다고 하니까.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지만.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거든.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공동체 가운데 섞여 사는 동안에는 인식을 잘 못해. 그런데 교회를 세운 다음에 그것을 인식 할 때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 이거예요. 아, 내가 준비가 안되었구나. 그래서 어떻게해. 이제 와서 일수부퇴지. 안된다 이거야. 그래서 항상 이야기 하는 것이 대담하게 불신자들이 모인 곳에서 한번 피를 토하듯이 그리스도를 전하고 완전 두드려도 안되는 강심장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그 사람들이 변화되는가를 보아야 하는 거예요. 그것이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라 이거예요. 하나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다음 사람.
<본문>
2. 온유함의 일치
교회의 신자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따라서 자신을 온전하게 하고자 하는 유일한 동기는 사랑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이게 진리라는 이유 때문에 주관적으로 이 진리를 거스려 살고자 하는 자기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동기가 있어야 하잖아. 동기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라 이거야. 사랑이야. 그 사랑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합치시킬 수 있는 놀라운 힘들이 생겨나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회심을 강조하고 하는 것도 그러한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빼어 나올 수 없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런 거야.
엊그제 이어령 씨가 얼마전에 간증집을 썼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썼어요. 읽고 있는데 아주 재미있어요. 2주 만에 십만부가 팔렸대요. 고맙게도 이어령 교수가 고맙게도 자기 친필싸인을 해서 가지고 왔어요. 거기에 보니까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낙터가 눈물을 흘리게 안흘리게요. 몽골에 낙타가 있는데, 이 낙타가 아주 못된 낙타들이 있대요. 대부분의 낙타들은 안 그러는데, 새끼를 나가지고는 그냥 버려 버린대요. 젖도 안주고 자기를 귀찮게 하면 용서 안하는 거예요. 이럴 때 이것을 치료하는 사람이 있대요. 어떻게 치료를 하는가 하면, 음악으로 치료를 한 대요. 그래서 그러한 못된 낙타들만 모아 놓고 피리를 불고 음악을 연주해서 그 낙타의 눈에서 눈물이 쭉 흐르면서 지 새끼에게 젖을 먹인대요. 음악치료 하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굉장히 신나하는 이야기 일텐데. 짐승도 음악으로 치료가 되는데, 하물며 인간이라면... 결국 뭐냐 하면 인간에게 사랑의 감화가 있을 때 그때에 태도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죄에 대해서 실날하게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들이 심각하게 제고해야 되는 거예요.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자체가 죄에 대한 증오, 죄지은 사람들에 대한 그러한 공격이나 이러한 것들이 동기가 되어서는 안되고, 설교가의 의역심이라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는 안되고, 참된 사랑으로 그들이 나아가는데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그것을 버리지 않고는 참된 사랑으로 갈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목표 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다루어야 하는 거예요. 그럴 때에 죄인들이 죄에 대해 지적을 받으면서도 설교자의 마음 속에서 그 죄에 대한 엄격한 꾸짖음 넘어에서 넘쳐 흐르는 사랑의 초대를 읽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설교자들은 모든 몸으로 설교를 배우고 그리고 설교를 하는 사람이에요. 그 다음.
<본문>
신자는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 때문에 온전함에 이르기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접붙여진 신자의 연합은 영적인 것이며, 그리스도께 붙어있으나 자신들의 개별적인 본성을 가진 채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니 신자들의 일치는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조화적으로 이루는 일치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일치는 신자 개개인이 끊임없이 자신의 구주이시며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교만과 욕심을 버리는 자기 깨어짐을 통하여 실현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이제 우리 학교 다닐 때인데, 목사님이 이제 학문은 없으셔. 그런데 학생들에게 뭔가 나는 전혀 아니었는데, 몇 학생들은 굉장히 감동을 받았었는데. 목사님이 자기 교회 초청을 했는데, 학생들이 가서 충격을 받고 온거야. 수요예배 갔는데, 교회가 아직도 마루에서 예배를 드리는 거야. 그때만 해도 마루에서 예배 드리는 교회가 많지 않았거든. 돈이 없는게 아니라 300명이 모였으니까, 꽤 많이 모이는 거였어요. 그런데 마루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는거야. 방석 없이. 더 충격적인 것은 남자들은 그래도 봐주는데, 여자들은 까만 치마에다가 하얀 저고리를 입고 오는 거야. 그때가 1985, 1986년도 였는데, 그런 것은 성경적인 일치가 아니야. 그래서 이 기독교의 정신은 어떤 유익을 위해서 통일을 기하는 것은 성경적인 정신이 아니야. 오히려 자유롭게 하는 거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사랑의 증거야. 각각 다른 것이 최대한 발현이 되면서, 그것이 더욱 아름다워 지는 거야. 그래서 누군가에게 강력하게 규제하려고 할 때에 이게 성경의 어디 근거를 두고 있는가 반드시 묻고 그렇지 않는 것은 것은 아니라고 보고, 사람들에게 자유함을 주어야 하는 거야. 그것이 성경의 정신이야. 그것 까만 치마, 하얀 저고리, 쪽진 머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각자 투피스, 원피스 다 입고 나와도 반바지 입고 나와도 서로 깊이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관계와 온전함에 일치를 이루는 것에 마음을 기울여야지 똑같은 옷 입고 그리고 마음은 찢어지고 나뉘는 것이 뭐 교회의 진정한 일치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거야. 여러분들이 그러한 것을 버려야 해요. 그래서 그게 이제 마음 깊이 어떠한 지식적으로 정리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가야 해요. 아름다운 일치. 용납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것들이 되어야 해요. 그 다음 사람.
<본문>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참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이 도익가 되어 온전함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 집니다. 매순간 진리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지체들에게 용서가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의 욕심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사랑을 통해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신자 개개인의 끊임없는 자기 죽음과 자기를 깨뜨려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철저한 희생과 섬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각 성도의 성화의 온전한 정도는 이러한 희생적 사랑으로 통하여 공동체적 차원에서 입증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는 용서와 사랑의 최종적인 열매라고 할 수 있으니 이 일치를 통하여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기관과는 다른 단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렇죠.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겉모양은 다양하고 내면에 있어서는 사랑은 일치를 이루고 해야지. 그런데 거꾸로 겉모양은 제복을 입은 것처럼 통일되고, 그 다음에 속에서는 끊임없이 사랑이 없어서 그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각기 하나님의 질서를 반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미운 거죠. 그래서 질서, 아름다움. 질서의 아름다움은 모든 게 왜 지금 이 방안이 아름답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뭐 다른 공간에 비해서는 아름답잖아요. 천장의 하얀색과 옆에 있는 벽 색깔이 어울리면서 블라인드의 베이지 색 빛깔이 옆에 있는 철문의 틀과 잘 어울리는 거죠. 여기에 만약에 배 선실처럼 동그랗게 창문을 뚫었다면 대게 웃길 거예요. 그죠? 이렇게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직사각형으로 배열을 한 거예요. 에어컨을 동그란 에어컨을 놓을 것이 아니라 각진 에어컨을 놓고,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원리가 이것이죠. 그것의 아름다움이에요. 똑같이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각각의 아름다움 속에서 사랑의 일치가 있는 것이죠. 오늘 여기까지만 합시다. 질문..? 없어요?
질문) 영혼의 실제에서는 이제 영혼의 본질을 설명한 것이라든지, 영혼의 작용을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왜냐하면 habbit이나 power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움직이게끔 하는 경향이나 힘이니까 그 자체에 대한 설명보다는 작용에 대한 설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것과 지식 자체와 지식 능력, 이러한 기능의 설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김남준 목사님) 그렇게 따지면 아무것도 설명이 안돼요. 왜냐하면 영혼은 영혼은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내가 설명을 해줄께요. 하나님이 계신데, 자,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는 첫째는 Whoness, 그 다음에는 Whatness. 누구신가 그 다음에 무엇인가. 이것은 존재론적인 질문이고, 이것은 속성적인 질문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잘 들어봐요. 대게 재미있어요. 나만 재미있는지 모르지만.. 이게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해보자 이거예요. 여기에 인간이 있는데, 하나님을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뭐가 설명이 안되는가 하면 우리들이 무엇이라고 할 때 이러한 사각으로 깎아 놓은 돌이 있다고 치자. 이렇게. 그러면 이것을 볼 때에 무엇이냐 할 때에 이 사람 속에 머릿속에 범주가 이렇게 떠오를 것 아니에요. 그게 뭐냐 하면 탁 보는 거야. 여기에서 컴퓨터 파일이 돌아가는 거야. 생물, 띵. 아니요. 그러면 식물, 땡. 아니요 되는 거죠. 식품, 땡 아니요.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루어 지면서 그 다음에 쭉쭉 나가면서 마지막에 뭐냐 하면 무생물이고 딱딱한 돌이다. 그래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것을 보면 침이 안 나오는 거야. 이해가 되죠? 문제는 인간이 무엇을 볼 때에, Whatness 무엇이냐 생각할 때에 그 무엇이냐를 결정하는 틀들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모든 기준이나 틀들이 뭐냐 하면 크기, 모양, 색깔, 부피, 그 다음에 무르고 단단함, 차갑고 따뜻함, 그 다음에 습하고 건조함, 이러한 모든 물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이게 놈이 되는 거라 이거야. 기준이 되는 거라 이거야. 그것에 의하여 whatness를 보는 거야.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볼 때에 하나님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은 판단이 안되는 거야. 그래서 보니까 결국은 바람잡는 이야기처럼 무엇인가라고 이야기 할 때에 추상적인 명사들이 나오면서 무엇임을 규정하게 되잖아. 이해되죠? 이것을 나누는 것을 가리켜서 메타피지컬이라고 부르는 거야. 형이상학이란 말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이분이 무엇인가 설명이 안된다고 보는 거야. 그러면 결국은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이분이 누구이심은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여기에 있는 많은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들이 있다 이거야. 나무도 있고, 해와 달과 별들도 있고, 그 다음에 머리난 아줌마도 있고, 그렇단 말야. 그러면 그러면 하나님이 이들과 각각 관계를 갖으셔요. 관계를 갖을 때에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변화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때 이것들에게 일어나는 모종의 변화가 있을 것 아니야. 그러면 원래 있었던 것과 변화되는 것들 사이를 보면서 이 하나님이 어떠한 성품을 갖으신 것들인가에 대해서 추측이 되는 거야. 무슨 이야기 인지 알지? 예를 들자면 얼음이 있다 이거야. 그런데 깜깜했는데 얼음이 가만히 있더라고. 그런데 해가 떴어.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것이 슬슬 녹아 내리는 거야. 햇빛은 안보여. 햇빛 자체는 볼 수가 없는 거잖아. 그냥 환하게 되었을 뿐인데, 누가 내려.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태양은 이곳을 방문한 적이 없지만, 아 저 태양은 뜨겁구나. 열이 펄펄 나는구나. 그래서 태양이 없었을 때는 이것이 얼다가 태양이 나타나니까 다시 물이 되어서 녹아 버리는 구나. 없어져서 도로 얼어버리네 그러면서 태양이 이곳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이 물체와 관계를, 얼음과 관계를 갖는 태양을 보면서 태양의 무엇임을 유추하게 되는 거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특성, 이 자체로서는 파악이 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속성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심플리티따스라고 부르는 거야. 하나님의 단순성이란 말이야. 이러한 하나님의 단순성을 가장 닮은 것이 인간의 영혼이야. 영혼을 이러한 구도를 가지고 볼 때에는 없는 거지. 없는 거지. 그런데 이 영혼이 육체와 관계를 맺는다든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든지 이 땅에 있는 사물들과 관계를 맺는 것들을 보면서 이 영혼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뿐이지, 본질을 이야기 할 때에도 그것은 사물들과 접촉하는 것을 기준으로 본질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 이 자체가 무엇이냐고. 설명이 안되죠. 영혼은 물질이 아닌데 어떻게 설명이 되는가 이거예요. 그러면 설명 안되는 것은 다 마찬가지예요. 모든게 다 마찬가지에요. 사랑은 설명이 되겠어요? 사랑은 오래 참는 것. 못된 인간하고 만나는 것 보면서 사랑이 없을 때는 저 자식 못 참았는데, 오래 참게 되네. 사랑에는 이러한 특성이 있는 구나. 발견하게 되는 거야. 그렇게 볼 때에 그래도 이것으로 압축을 한 거야. 조나단 에드워즈는 도덕적인 이러한 것들을 배제한 거야. 이것들이 이제. 이렇게 볼 때에는 사실은 영혼만이 아니라 모든 물질이 돌맹이 자체도 본질적으로는 해빗과 파워로 보는 거죠.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내가 지금 화학 기호는 잘 모르겠는데 돌맹이도 여러 가지 탄소도 있을 것이고, 철도 있을 것이고, 금도 섞였을 것이고 등등 여러 가지가 막 섞여서 되었을 것 아니야. 이러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우연 적인 것이란 말이야. 그러면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창조론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바위를 만드셨을 때, 실제로 이러한 것이 없을 때에 하나님이 형상을 부여하실 때, 이 형상 자체가 이러한 해빗과 파워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물질과 만나면서 그러한 고요한 성질을 갖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점에서 볼 때에는 이것을 본질이라고 이야기 해도 되는 거지. 본질이라고 이야기 해도 되는 거지. 이러한 것들까지 부인한다고 하면 없는 거지. 아무 것도 없다고 봐야지. 자, 또 다른 질문? 질문 없어?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마우신 주님, 오늘도 함께 해주시고, 저희들을 지켜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또 성도들을 세우도록 도와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