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03.토요일교역자특강네번째
시작되는 신자의삶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다라고 그래서 영생의 시작을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안에서는 삼위하나님과의 교제로 보고 그래서 결국은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영생의 인간적 공동체적 지평으로 펼쳐지게 되는데 이것이 결국 성도의사랑이에요. 교통이고, 결국은 삼위간 교제의 모상이 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삼위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심이 삼위 안에서 각 위가 서로의 완전하심과 그리고 완전하심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또한 성도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교통함으로써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사랑의 성도들간의 사랑하는 그 근거가 삼위 안에서의 각 위의 서로 사랑하심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하심 때문에 완전하심 때문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인데, 그 아름다움의 정체가 바로 각 위의 완전하심이고 그리고 삼위의 질서 안에서 각 위의 완전하심 때문에 삼위 하나님은 서로를 사랑하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한 분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는 거예요. 그러면 똑같이 교회가 사랑의공동체라고 하는 이 접근을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그릇된 방식으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오늘날 교회가 사랑이기 위해서는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 무엇을 계속 해주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것은 마치 레오 10세에게 쓴 마틴 루터의 편지가 생각나게 하죠. 그 편지속에서 서신속에서 마틴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우리 자신의 변화는 사랑을 가져다 주지만,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자신에게 믿음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우리가 카톨릭에서는 바깥으로 끊임없이 어떠한 선행을 하고 공로를 쌓아 감으로써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으로, 존재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그 오늘날 우리들이 하는 접근이 다분히 카톨릭 적인 것이 아닌가 반성을 해보자 이거에요. 즉 교회가 사랑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일들을 하고 이러이러한 일들을 함으로써 그것이 그것을 통해서 교회 자신이 그 사랑이 되어 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죠. 로이드 목사님은 자신의 책속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남겼어요. 교회는 이 세상의 미담을 남기기 위한 공동체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가슴을 훈훈하게 해주는 어떠한 좋은 일화를 남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다라고 교회는 이러한 세상의 평가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진리안에서 자기의 그 변화된 본성대로 흘러갈 뿐이에요. 그래서 교회가 사랑이라 할 때 그 사랑은 삼위 하나님의사랑이 성도들의 마음안에 있어서 그것이 실질적으로 성도들과의 관계속에서 행사됨으로써 교회가 사랑이 되는 거죠. 사랑 자체는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한번 맺은 관계를 지속하려고 하는 정신의 성향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사랑이 있으면, 교회가 사랑이 있으면 교회는 움직이는 생물체처럼 절대로 가만히 있을수가 없어요. 그 안에서 각양 놀라운 변화의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뻗쳐 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찼을 때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래서 그 사랑이 뭐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공동체 안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성도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사랑의 근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그 성도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여받은 아름다움 때문에 아름다운 거거든. 그것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지. 우리의 육체가 죽게 되면 980원 정도의 가치가 되는 비료래요. 비료로서 치면 980정도의 가치가 있는 말하자면 물질이라 얘기에요. 그거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매우 존귀한 사람들이 되는 것처럼 성도들 안에 무슨 아름다운 것들이 있겠어요. 그러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관계를 맺은 그 관계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그것을 통해서 결국은 그 성도들이 그 말하자면 아름다운 일치를 이루고 그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그 성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과 똑같이 비례하는 것이다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안에 형제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누가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지평을 이루어 만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 의미가 바로 예수님께서 둘째도 이와 같으니라고 하시는 의미에요. 굉장히 깊은 뜻이 있는 것이에요. 둘째도 이와 같으니라고 하시는 이것이 그 두 지평이 그렇게 하나의 사랑안에서 만나는 거예요. 어쨌든 여러분 공부 많이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54페이지에서 뭘 이야기 하는가 하면, 사람의 존재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 했거든요. 사랑의 목적을 이야기 했는데 존재의 목적은 그래서 이제 아가페의 사랑과 까리따스 Caritas의 사랑을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지순애 사랑이 목표를 일치하게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사랑과 사람의사랑이 어떻게 일치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섬김의 목표가 되는지 지난 시간에 설명을 한 거예요. 매우 중요한 내용이었어요. 이것을 기초로 하여 57페이지 내용을 넘어가면 개관을 먼저 하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러한 그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이해하고 그리고 교회를 그러한 일치 속에서 바라보게 되면 사랑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두 가지 어려움이 동시에 있는 거예요. 뭐냐 하면 항상 까리따스의 사랑을 간직하지 못하는 나, 이게 제일 큰 문제이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지체들에게 여전히 그러한 부패함이 남아있기 때문에, 미완성된 성도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관계가 끊어지고 막히고 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말하자면 사랑을 완성해 가는 아픔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57페이지 시작을 사랑의 아픔이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대한 처방은 오직 이렇게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많은 분쟁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가장 중요한 원인은 둘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영원에 대한 무관심과 그리고 헛된 이기심이에요. 그런데 놀라운 것이 뭐냐 하면 다음 시간에 올 때에는 이것 가지고 올 때 <도덕적 통치>를 같이 가지고 와요. 그래서 뭐냐 하면 내가 <도덕적 통치>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했죠. 영원은 시간속에 있는 사랑은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시간속에 있는 인간의 영원은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을 알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바로, 그렇죠. 영원을 이해하는 방식이 사랑을 통해서 영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에요. 완전히 파악한다고 말할수 없지만, 사랑하기 전까지는 영원을 이해할 수 없고 영원은 곧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그래서 참된 빛이요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그리고 진리여 아름다운 진리여, 참된 빛이여,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여. 원본 외웠었는데 잃어버렸는데 아주 아름다워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렇게 그 노래를 하죠. 참 신비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들어요. 기록을 하면 더욱 좋을 텐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반드시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며, 개별교회에 대한 사랑은 필히 이 보편 교회에 대한 사랑의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개별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개별교회들이 다투고 경쟁하고 그러한 그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영국에서는 스펄전목사님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저 멀리 교회가 보이면 항상 함께 타고가던 동역자들에게 우리 저기 있는 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랬다고 해요. 교단은 다르고 그래도 우리 저교회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신앙도 문장속에서 좀 부족한게 그러한 보편교회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에요. 사실 이것이 종교개혁이 잃어나면서 끊어졌어요. 그런데 사실은 어떻게 보면 종교개혁 자체가 그 개혁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잃어버린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가르침과 그 교육을 통해서 상실한 보편교회를 되찾고자 하는 운동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현저하게 흐려져요. 제가 개혁파 정동주의를 연구하면서 아쉬운 아주 강하게 아쉬운 점이 그거예요. 보편교회에 대한 철저한 사랑, 이러한 것들이 현저하게 아쉬운 거예요. 치혈한 신앙의 논쟁속에서 그 서로에 대한 보편교회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쉬운 거예요. 그래서 나보고 왜 서울신학대학교 갔더니 장로교 목사님이, 성결교 목사님도 안와서 장학금 안주는데 장로교 목사님이 와서 주느냐고.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입니다. 고신에 갔을 때도 그래요. 우리 교단 목사님들이 열린교회 보면서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의도로 여기 온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장로교의 교리를 내세우면서 그것이 성경적이고 옳은 각성을 학문적으로 강력하게 논쟁할 수록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깊이 끌어안고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이렇게 사랑하며 베풀고 그가 이단에 속하지 않는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섬기면서 사는 것이 그것이 건강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57페이지 읽어보세요.
<본문>
이처럼 교회를 향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도 완전하고, 그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도 완전하시며, 그들로 자신 안에서 교통하게 하시는 성령님도 완전하십니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칭의의 구원은 완전하나 그들은 아직 온전한 의인의 영에 이르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중생과 함께 새 사람을 입었으나, 여전히 옛사람이 남아있는 존재들이기에 그들이 모여서 이루는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하고, 그래서 까리따스로서 교회와 그 지체들을 사랑하려는 성도들에게는 미완성에서 오는 사랑의 아픔이 있습니다. 이것도 이중적인 미완성의 아픔인데, 사랑받는 대상인 지체들이 완전하지 않은 존재라는 점에서 오는 아픔과 그들을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지체들도 완전하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오는 사랑의 아픔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래서 참 재미있는게, 조나단 에드워즈는 상당히 서민적인 목회자가 아니었거든요. 철학적이고 귀족적이죠. 집안도 그렇고 그래서 이제 그 집안의 사치함 때문에 교회에서 문제가 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Spirituality라고 하는데, 영성이라기보다는 정신, 육체와 대비되는 인간내면의 세계 그러한 것을 가르키는 것이겠죠. 영성이라기 보다는. Christian Spirituality는 그 마르틴 루터도 참된 설교자 하면 그는 고난당하는 설교자 이어야 한다라고 했거든요.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그 고난이라는 shade은 매우 달라요. 그래서 마틴 루터가 그러한 shade를 자기 교회 바깥에서 많이 보았다면 그럼 조나단 에드워즈의 경우는 자기 안에서 많이 본거예요.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성령문제로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때 교인이 726명인가 그랬대요. 그런데 투표를 했는데, 에드워즈 목사님이 계속 계셔야 됩니다라고 투표한 사람이 19명밖에 안되었대요. 그러니까 이제 이렇게 개인적으로는 교인들에게 호감을 주지는 못하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교회의 중심을 이루는 것 자체가 이미 벌써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위원들이 6명인가 9명인가 있었는데 그 위원들 자신이 평소에 에드워즈에 대해서 굉장히 그 신학이 독선적이라 생각을 하고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어요. 그 증거, 그러한 와중에서 미국에서 가장 난해한 책이라 여겨지는 나도 읽었는데 이해는 어느정도 했는데 참 어렵더라고요. 그 책이 나왔을 때, 200권밖에 안 팔렸어요. 그러니까 이미 벌써 에드워즈가 그 교회를 떠날때는 알미니우스 주의가 확 번성했어요. 그래서 고통당하는 영성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되잖아요. 우리의 몸에서 어느 세포가 죽어가면 사실은 그 세포가 아픈 것이 아니라 다른 세포들이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신경세포가 죽어 있으면 감각자체를 느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 왜 뭐죠? 어디 상처나고 하면 다른 곳이 딱딱하게 붓잖아요. 그 장소하고 부은 장소하고 상관이 없는데 예를 들면 상처가 나서 감염이 된다거나 온몸이 욱신거리고 쑤시면서 잠을 못자고 그렇게 되잖아요. 그러한 식으로 되는 거야. 그런데 이번에 여러해 만에 치과를 갔는데 사실은 저번에 스케일링 받고 이번에 간게 내 생애에 있어서 3번째 치과에 간거였어요. 치료를 받고 하는데, 신문을 봤는데 이빨을 관리를 잘 못하면 심근경색, 그 다음에 콩팥, 신장염. 그런데 이것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어? 그런데 이빨 관리를 잘 못하면 잇몸이 상하는데 잇몸이 핏줄이 있는데 여기로 치조가 곯아서 고름이 들어가잖아. 그러면 그 바이러스가 전체로 퍼지면서 콩팥으로 들어가서 신장염으로 일으키는 거야. 그래서 신장염이 심근경색을 일으키는 거야. 그래서 기겁을 해서 달려갔더니 그 의사가 웃으면서 그 원리가 맞는 거라고. 그러면서 잇몸관리도 무지하게 중요하다고 그래서 잇몸 붓고 피나는 사람들 있잖아. 그거 빨리 치료를 해야 해. 계속 들어가는 거야.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연관관계까지 생각안하잖아. 잇몸이 안좋아서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어요. 그거 무슨 상관있나. 그런거야. 치료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의 몸이 이렇게 잇몸이 상해서 고름이 나고 아픈데 그 고통을 신장이 당하고 신장을 통해 심지어는 결정적으로 우리 몸의 심장에서 문제가 생겨가지고, 이게 결국은 몸 전체가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은 참 공평하셔요.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은혜에서 멀리 떠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만족을 못해서 고통을 받지 다른 사람의 죄나 하나님 사랑으로부터의 그 소외된 것을 인해 마음아파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멀어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 때문에 아파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멀어진 것 만큼 자기가 그 사랑에 가까이 다가간 다음에 그것이 극단화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이 아주 정확하게 귀추를 따라서 잃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내가 그 최근 한 몇 달동안 교회에 대해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며 느낀 것이 뭐냐 하면, 우리 교회에 이러한 것들 이야기 하잖아. 내가 옛날에 좋아했던 단어중에 하나가 Heavenly Doctor잖아. 누군가가 무엇이 되고 싶냐고 하면 나는 Heavenly Doctor가 되고 싶습니다. 그때 그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목사는 영혼의 치료자입니다. 의사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사람 하나하나를 놓고 의사가 몸을 만지는 것처럼 목사는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해부하고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영혼의 기능들이 연결되고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망가지기도 하고 그 다음에 새로 고쳐지기도 하는가를 풍부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의사잖아. 요즘 생각한 것은 뭐냐 하면, 그 정도 가지고 안되. 그게 아니고 교회의 교회 그 자체를 하나의 몸으로 보고 교회 그 전체를 고칠 수 있는 그러한 영적인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단말야. 우리의 약점은 너무 소화적이기 때문에 구원도 그렇게 교회론적 구원론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론적 구원론을 펼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신론적 구원론도 아니야. 인간론적 구원론을 펼치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방식은 출발부터가 소화적이에요. 신이라는 것도 결국은 개인의 진위로 떨어지고 구원이라고 하는 것도 개인의 영역으로 떨어지게 되니까 그러니까 이제 파괴적인 신앙을갖게 되고 매우 불건강한 신앙을 갖게 되는 거지. 교회 목적 전체 안에서 영원의 그 영원을 위한 Heavenly Doctor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사람 하나 하나를 다룰 수 있을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에 붙여있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그 능력과 그리고 이해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본문)
더욱이 교회는 단지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만 사랑하도록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은 교통적 사랑이니, 그 사랑의 감화를 통하여 신자 안에 소유하게 된 지순의 사랑도 교통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회가 이 세상으로부터 치열한 핍박에 직면하기도 하는데, 그때에도 교회는 비진리와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까지 사랑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그릇된 사람들과 부패한 죄인들도 그들이 바른 길로 돌아오기까지 인내하며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과연 그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의 사랑이 결국 교회를 향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분리 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 거예요.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봅시다. 어떻게 생각해 임목사는? 교회를 향한 사랑과 신자의 교회를 위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은 어떤 점에서 구별될 수 있고, 어떤 점에서 구분될 수가 없을까.
(대답)
하나님께서 교회도 사랑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교회를 위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은 동일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래서 본인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의 연장선상에서 동일하게 그 세상도 사랑해야 하고 세상도 교회로 돌아올 수 있는 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누가 이야기 또 해볼까. 이 목사가 얘기 해볼까?
(대답)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세상가운데 택하신 당신의 교인들을 더욱더 사랑하시고 당신의 계획안에서 사랑하십니다. 목사님께서 하셨던 말씀 같은데,
(김남준 목사님)
강목사, 보태고 싶은 말있어?
(대답)
두분의 얘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질문)
53쪽에보면, 교통적 사랑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이해가 안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실제에 있어서 보면 사실은 그렇지가 않고 그리스도, 사랑이 자꾸 이렇게 블록에 갖혀있는 거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실제로 적용을 해보면 교회에 있는 부서이기주의 그 다음에 우리 교회만, 우리 교회에만 하는 그러한 개교회 이기주의 이러한 것들은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개교회에 대한 사랑이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뿌리를 내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이 문제에 대해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가 교회와 세상은 구분이 되겠죠.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될까요? 이러한 정도로 놓고 보죠. 이렇게 해서 이것이 하나의 교회입니다. 이렇게 교회. 교회에요. 여기에 이제 많은 성도들이 있겠죠. 성도들이 있어서 그래서 성도들이 이제 사랑으로 이러한 식으로 교통하게 되죠. 그중에 그리스도와 교통하고 이렇게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심으로써 이것이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거죠.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유념해봐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자 이것이 예를 들어서 State 2라고 합시다. 3라고 해봅시다. 그러면 Stage 이전을 더듬어 가보자. 이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러면 이러한 식으로 일치하게 되겠지 않겠어요? 자,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가 현실교회야. 현실교회에 있었는데 똑같이 이러한 사람들이 둘, 셋, 넷, 다섯, 여섯, 이러한 식으로 있지 않았겠어요? 이렇게 되지 않겠어? 그러면 여기는 어떠한 형태가 될까요? 똑같이 이렇게, 이렇게 되지 않았겠어요? 이러한 식으로 그림을 그리면 이쪽으로 계속 뻗어나가고, 이쪽으로 계속 뻗어나가겠죠. 그러면 결국은 이 사람이 이 교회 바깥이었어요. 이 교회가 결국은 이렇게 자란거죠. 그러면 결국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사람이 이렇게 들어오게 된 것은 이러한 사랑의 속성 자체가 어떤 거라 그랬죠? 관계를 맺고 그 다음에 한번 맺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성향이 이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사랑하면 헤어지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서로 사랑하면 굉장히 힘들어져요. 그래서 어느 시인이 인연이란 질긴거야. 인연이란 질긴거야. 마치 가위로 그림자를 자를 수 없는 것처럼 인연은 질긴거야. 이렇게 시인이 노래를 했어요. 작아지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관계를 맺고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죠. 용서라고 하는 것은 이 성향이 자기에게 죄를 지은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에 발산하여 나타나는 하나의 빛깔이 바로 용서에요. 용서. 사랑이,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이 용서이기 때문에 내가 너를 용서는 해주는데 다시 꼴도 보기 싫다. 이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는 거야. 이것은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 여기에서 십몇년전에 이미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도 이러한 사랑의 성향 때문에 이러한 사랑의 성향이 계속해서 밖으로 펼쳐 나가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든지. 이렇게 이렇게 세상을 향하여 전진해가, 세상을 향하여 펼쳐져 나간 결과로서 이 사람이 이게 A라고 합시다. 그 사람이 A'로 들어오는 거란 말이야. 그럼 뭐냐 하면 이것이 교회이고, 그 다음에 이것이 세상이라 할 때 이것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확장되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해가는 과정이야.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됐어?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해가는 과정이에요. 이렇게. 완성해가는 과정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돼요? 여기에 어떠한 사람이 이렇게 들어오게 되고, 여기에서도 어떠한 사람이 들어오게 되고 이렇게 이렇게 될 때에 그러면 요 지점에서 이 사람이 세상이었지만, 이 지점에서는 이 사람은 세상이 되고, 이 사람은 교회가 되는 거야. 이 지점에서는 이 사람이 세상이었지만, 이 지점에서는 이 사람이 교회야. 이 사람을 향한 사랑이 교회 안에서의 사랑이고 그 교회 바깥을 향한 사랑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세상을 향해 확장해 나가는 방식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라는 거야. 선교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세상을 향한 사랑과 교회를 향한 사랑은 이게 사실은 동질의 것일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야. 동질의 것일 수 밖에 없다. Caritas의 사랑. 이게 바로 그리스도께서 둘째도 이와 같으니 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그 다음에 이웃사랑을 통합시킨 하나의 그 설명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이 문제가 신대원 졸업해서 한참 후에까지도 정리가 안되었어요. 굉장히 힘들었어요. 나 자신에게는 어떻게 이것이 일치가 되는지에 대해서 혼란스러워요. 이제 사상적으로 이러한 식으로 형성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교인들에게 교인들에게 자, 교인들에게 사랑을 가르칠 때 교회용 사랑이 따로 있고, 세상용 사랑이 따로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데,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사랑이 동질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서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세상을 향하여 사랑하고 확장해가는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을 개별적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한 점에서 사실은 이 두 사람은 분리될 수 없는 거죠. 만약에 성도끼리 많이 사랑하고 밖으로 흘러가지 않는 사랑이라면 이것은 사실은 진정한 의미의 Caritas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죠. 이것은 경험적으로 우리가 항상 생각을 해보면 잘 입증이 되죠. 성도들이 여러분들이 성장반이나 이러한 것들을 해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가 가득차게 될 때 성도가 그러한 복음의 진리를 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무슨 그때 심정이 어떠한 심정이 될까요? 전도사님, 경험에 의해서, 어떠한 마음이 될까?
예를 들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의 밝음에 대해 눈뜨고 깊이 감격할 때 그는 유난히 누구를 사랑하게 되는가 하면,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죠.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어요. 그래서 진리를 가르쳐주면 그 진리를 깨닫고 깊은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누가 생각나는가 하면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이 나. 그리고 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과 진리에 대한 경험이 나뉘지 않지만 위격들과의 교통에 있어서는 각각 차별이 있을 수 있으니까 주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놀라운 위로를 경험했다고 치자.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Caritas의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에 꽉 차게 되었을 때 누가 제일 먼저 생각나게 되겠어요? 위로받지 못한채 예전에 자신처럼 소외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제일 가엾은 거야. 이게 가슴속에 밀려오게 되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잘들어요. 자, 한 사람안에 있는 그 어떠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정동은, 정동을 느끼게 되면 이쪽으로 이쪽으로 똑같이 사랑이 뻗어나가요. 이것이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사람이 굉장히 무지한 사람이었는데 진리를 밝은 진리를 깨닫게 되니까 밝은 진리를 깨닫게 되니까, negative한 의미에서, positive한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사랑의 밝음을 깊이 깨닫고 감격을 하게 된거야.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야. 그렇게 될 때, 그래서 이것이 아주 충만하게 가득하게 될 때 그때에 negative한 의미에서는 이 진리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거야. 이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진리가 없어서 시커멓게 어둠속에서 살아가는 거의 동물과 같은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러면서 사랑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사랑하게 되는거야. 또한 한편으로는 자기와 똑같이 진리를 공유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거야. 은혜 받은 성도들이 함께 만나면 시간 가는줄 몰라. 그래서 이 사람에 대해서도 사랑을 느끼게 되는 거야. 긍정적인 방식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혹은 소극적인 방식으로, 적극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게 되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잘들어요. 이 경우네는 항상 사랑이 통을 동반해요. 통. 고통이에요. 아픔을 동반하고. 이 경우에는 무엇을 동반할까? 희. 기쁨을 동반해요. 이 두 가지가 다 쏟아져요. 참으로 진리를 알고 거기에서 정동을 느끼고 충만해지는 사람이 아니면 진리를 아는 사람을 만나서 그것을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이러한 강하고 신령한 기쁨, 이 사랑이 잘 생각을 해봐요. 그렇게 본다면 획일적으로 나누기는 어렵지만 교회가 아주 온전한 모습을 가지고, 온전한 교회이면 교회일수록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쪽 방면은 Intra Ecclesia, 교회 속으로의 사랑이 되고, odd extra Ecclesia가 되겠죠. 교회 밖으로의 사랑이 되지 않겠어? 그러면 이쪽으로 가든지 이쪽으로 가든지 이 사랑은 동질의 사랑이에요. 이해돼? 아니 그게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을 갔다가 요령있게 설명을 했을 뿐이야. 나뉘어 지는 것이 아니야. 다만 이러한 것은 있을수가 있지. 뭐냐 하면 이러한 것은 있을 수 있잖아. 여기에 아주 참 비유가 탁탁 생각이 나면 기분이 참 좋아. 여기에 이렇게 손으로 전등을 붙들고 있어요. 잘들어봐요. 재미있어. 이렇게 빛이 쫙 비춰요. 그런데 여기는 밀가루야. 여기는 빛줄기야. 여기는 전부다 어두움이야. 어두움이야. 그러면 한번 생각해봐요. 밀가루가 확 뿌려져가지고 그게 막 코를 막을 정도로 먼지처럼 가득한 거야. 그러면 이 하나의 빛이 비칠 때 여기는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뿌연 이러한게 나타나지 않겠어요? 캄캄한데는 안나타나고. 빛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이러한 식으로 나타나지 않겠어요? 똑같은 라이트가 비추는데, 내게 물질이 뭐냐에 따라 그 빛이 비춤으로 보여주는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똑같이 교회의 똑같은 사랑이지만 교회라고 하는 이 환경과 그 다음에 교회 밖의 세상이라고 하는 환경은 마치 빛을 전달하는 빛과 만나는 매개의 물질들이 다른 것과 같아서 그래서 사랑이 다른 빛깔로 나타날 수 있어요. 그러나 여기에서 움직이는 것은 똑같은 빛이라고 그렇게 나타나는 거야. 다른 동질의 사랑. 그래서 교회내부적으로, 교회 속을 향한 사랑과 교회 밖을 향한 사랑, 본질적으로는 세상 속으로의 사랑인데 이것은 똑같이 비례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내가 그 뭐죠.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의 확장, 그것이 바로 선교이고 그 사랑의 완성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이러한 식으로. 그러니까 그 교회가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이제 그가 진정으로 얼마나 선교 공동체가 되는가하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이 입증이 되는 것이에요. 그 다음. 계속해서.
(본문)
그러므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적과 같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영성은 고통당하는 영성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많은 날들을 고통의 상태에서 보내어져 세상 속에서 그 존재의 정체성을 확인받았으며 자신과는 다른 이유로 고통하는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의 원천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자의 삶은 바로 이런 교회의 작은 모형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삶의 원형이 바로 그리스도로서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보여주신 삶입니다.
완성된 교회와 미완의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 완전히 섰습니다. 비록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 하늘에 오르셨을 때에는 핍박의 두려움에 떨었던 소수의 무리밖에 없었지만, 이미 보이지 않는 교회는 이룩되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사도들의 복음 전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지상교회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교회의 가시화였습니다. 선교적으로는 이 땅의 교회가 아직 충만한 수에 이르는 성도들을 포함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미완성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리스도의 교회의 완성을 어떻게 두 가지로 본다고 그랬지? 무슨 완성과 무슨 완성으로 본다고 했지? 그 레카프레타치오의 교리를 하면서 제가 두 용어를 제시했죠. 계량적 완전성과 성질적 완전성. 그렇죠? 계량적 완전성은 뭘까?하나님이 작정하신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는 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창조된 이 세계는 완성할 양이 끊임없이 가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그것과 함께 성질적 완성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부패한 요소들이 제거되고 그리고 완전한 교회가 되는 거죠. 그것이 한사람 한사람의 glorification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죠. 그 다음
(본문) 53:50
그리고 교회론적으로도 지상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사역을 통하여 완전한 기초를 가졌으나 실제적인 완전함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미완성입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을 좀 더 상사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원리적인 측면에서 교회와 성도는 완전합니다. 원리적으로 교회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희생에 의하여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완전히 구속을 받은 성도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교회이니 완성된 교회입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공로나 노력이 더하여짐으로써 비로소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미 완성된 교회로서 구원의 연합입니다.
둘째는 실제적인 측면에서 교회와 성도는 불완전합니다. 실제적으로 교회는 여전히 미완성의 상태입니다. 교회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속죄는 여전하고 교회의 회원이 된 성도들의 구원도 취소될 수 없는 완전한 구원이지만, 실제적으로 그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은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취소될 수 없도록 구원을 받은 존재들이지만, 여전히 그들은 미성숙합니다. 그들은 지식에 있어서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 더욱 온전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원리적으로는 이미 완전한 교회이나 실재적으로는 아직 완전하지 않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완전하게 될수록 더 많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사실은 뭐,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 이야기도 사실은 아니지. 주님은 항상 교회를 사랑하시지.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은 개별교회의 사랑이 기초가 아니라 당신의 몸인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을 토대로 개별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편교회의 그리스도의 몸도 건강하고 그리고 아름다울 수 있고 그 다음에 현저하게 온전함에 미치지 못할 수가 있잖아요, 그렇죠? 교회의 지도자들이 부패하고 타락하고 진리의 빛이 사라지면서 그릇 인도할 경우에는 보편 교회가 심하게 병들고 왜곡되는 거죠. 이러할 경우에 실질적으로 그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매우 깊이 느끼는 것은 매우 어려운 거죠. 똑같은 거예요. 우리 개인의 성화나 보편교회의 전체나 마찬가지에요. 참 놀라운게 뭐냐 하면 우리의 몸안에는 우리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어요. 복원하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어요. 지난번에 고성에서 산불이 나가지고 고성군 거의다가 타버렸었어요. 그때에 굉장했었죠. 화재가 난 다음에 가보니까 그냥 고성군 전체가 그냥 목장이 되어 버렸어요. 목장의 풀같이 되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복구될 때 30년이 걸린다고 했어요. 그런데 3년만에 복구가 된 거예요. 다시 생명체들이 다 돌아온 거예요. 정말 놀라워요. 그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도 그렇게 놀라운 복원력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목회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목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하시는 것을 그것을 토대로 우리들이 그 생명이 시키는 대로 일정한 일을 할 뿐이지 결국은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의사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잖아요. 의사는 절대로 아무리 의술이 발달되어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해요. 할 수 없어요. 결국은 의사가 아무리 탁월한 의술을 가지고 사람을 고친다고 하더라도 몸 자체가 자기의 온전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러한 복원력, 복원력 곧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의사의 주치가 가능해지는 거죠. 비유를 하자면 이러한 것 아니겠어요? 물길을 터주면 물이 흐른다고 할 때는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거지, 물흐르지 않는 땅에 아무리 물길을 잘 터준다고 해도 물이 잘 흘러요? 의사는 물을 다시 흐르게 할 수는 없는 거예요. 흐르는 물이 막혔을 때, 그것을 트게 해주는 거죠. 그런점에서 우리 목회가 어떤때에는 온 힘을 다해서 목회를 하다가 내가 거의 돌보지 못하는데, 오히려 내가 돌볼 때에는 미끄러졌던 영혼이 내가 돌보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셔서 그들의 마음을 바꾸시고 변화시키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지.
(질문) 이 문장을 보면서 궁금한 것이 있는데, 밀가루는 신앙생활을 잘아는 사람이고, 많이 미끌어지는 사람, 빗줄기는 조금 마음이..
(김남준 목사님) 난 그러한 이야기는 안했는데,
(질문)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에게 투명하고 맑은 어떠한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불신자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까만 칸막이를 켜가지고 빛을 차단시켜서 아예 빛이 못 들어오도록 바깥의 어두움과 같은 것을 바란다. 이렇게 가정한다면 이 빛은 하나님의 사랑이다라고 할 때에, 사랑의 빛을 비춘다고 할 때에 제가 궁금한 것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잘사는 사람이든 못사는 사람이든, 심지어는 지옥에간 사람이든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한 빛이 비출 것인데 그 사람의 내면의 상태와 반응에 따라서 사랑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빛의 양이 틀린 것인가?
(김남준 목사님)
빛의 양이 틀린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르게 경험되고. 동일한 사랑을.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 그렇게 따진다면 하나님이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가 되는 거거든. 그래서 마틴 루터파 같은 데서 레카파틀라치오 교리 같은 것을 설명하면서 굉장히 어려워했던 부분들이 과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창조에 대해서 후회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을까, 없을까. 그럴 수 없어야 되잖아. 없으면 결국은 마귀하고도 화해를 하셔야 된단말야. 그래서 결국 마지막으로 사탄이고 마귀고 뭐고 전부다 다 정리해서 결국은 본래의 선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시고 타락해서 천사가 마귀가, 귀신이 됐으면 그랬으면 타락한 천사가 됐으면 그 상태도 다시 돌려서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 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그러한 배경들이 이러한 거대한 철학적 사유를 배경으로 하면서 지옥이 없다고 하는 거야. 무조건 그렇게 우기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이 없죠. 그런데 성경에서의 관심은 꼭 무엇하고 똑같은가 하면 하나님의 그 속성을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관한 문제와 똑같아요. 그래서 뭐냐 하면 여기에 이렇게 인간이 있잖아. 그러면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단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사실은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봐봐야 계속 모르는 거야.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이제 이 하나님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나 혹은 교회나 혹은 다른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보면서 여기에서 어떠한 속성에 대한 그 관계를 통해서 어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그 이해가 생겨나게 되는 거야. 이해가 생겨나게 되는 거야. 이렇게 이렇게 이러한 식으로. 그러면 이 사람은 이것을 이렇게 보면서 보면서 아하 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되고 이것은 이렇게 되고. 그러면 여기에 지식들이 이렇게 있을 거잖아. 그러면 이 지식들을 연결시켜서 여기에서 뭐냐 하면 하나님의 두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속성과 그 다음에 속성의 그렇지. 시행방식에 대한 앎을 갖게 돼. 이것이 바로 다트 엘로힘 혹은 그 다음에 γνωσις Χριστός(그노니스 크리스투)가 되는 거야.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되는 거야. 이렇게 이러한 것을 가리켜서 simplicitas라고 하는 거야. 하나님의 simplicitas. simplicitas는 우리가 알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에도, 사랑 그 자체가 이러한 식으로 관철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다시 how로 내려서 생각해 보면 이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은 사랑자체가 무엇인가 우리는 모르는 거야. 그 사랑이 사물과 관계를 맺을 때,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내는가에 따라서 사랑의 속성과 사랑이 시행되는 방식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사랑에 대한 지식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이것 자체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서로를 사랑하신다고 할 때 그게 뭔지 우리가 알겠어? 우리가 이 지상세계에서 사랑하면 만지고 싶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돈도 주고.
우리 딸이 기숙사에 들어갔거든. 3주동안. 엊그제 와서 투덜됐는데 내가 없으면 가족들이 자기를 그리워하고 일상적인 일이 안되고 그래야 하는데 다들 바빠서 자기를 생각할 시간이 없는데 그것 때문에 섭섭하다고. 어떻게 다들 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거야? 각기 다른 사랑으로 나타나는 거야. 참 놀라운 거지. 그래서 있지 그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을 아는 거야. 그래서 어거스틴의 논쟁속에서 과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말할 수 있느냐 언쟁을 많이 벌였고, 루이스벌콥의 조직신학에서도 사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명제에서 회의적으로 생각을 하거든요. 사실은 그게 그렇게 알고보니까 간단한게 아니야.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을 안다는 거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거야. 누가 그러더라고. 목사님, 왜. 목사님은 설교는 그래도 참 이렇게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고 하는 사람에게는 훨씬 쉽게 들려요. 청년부 중에서도요, 그래도 연애라도 했던 애들은 훨씬 설교를 잘 이해해요. 그것도 못했던 사람들은 영적으로 어둡고 정동적으로 무지해서 이게 뭘 이야기 하는지 모른다는 거지.
(질문) 마음속엣 걸리는 부분들이 있는데요.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완전하게 될수록 더 많이 사랑하시는데 한 신자가 성화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교회가 더 완전하게 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다고 봤을 때,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안달하고 성취하려고 하는 그러한 율법주의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것, 어려움들이 있을 것 같고요. 십자가의 사랑안에서 하나님의 그 사랑이 가장 크게 들어났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경험할 때에 하나님의 그 사랑을 더 받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살아가는 그러한 것들이 신자의 삶속에서 더 사랑을 받아야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라고 하는...
(김남준 목사님)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고. 예를 들자면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그것이 우리를 율법주의로 데려가나? 그리고 또 이어서 말씀하시지. 하나님 아버지도 너희를 사랑하셔서 너희에게 그를 나타내시리라. 그것을 우리가 듣는다고 해서 율법주의로 달려가나? 그렇지 않거든.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자기 사랑에 빠져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욱 깊은 사랑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라고 하는 욕망을 가질 때에 그 계명은 궁극적으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과 통일을 이루는 거야. 예수님이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며, 그 계명이 뭐였어요? 그 계명이 결국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 계명을 너희가 지키면 나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요. 아버지도 너희들을 사랑하여 너희에게 그를 나타내 보이시리라.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완전하게 될수록 더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 너무 길다해서 끝났지만, 괄호로 경험적으로 하면 좋겠지. 실제적으로 항상 사랑하시니까.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어? 돌아가니까 아버지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느꼈을 것 아니야. 얼마든지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지.
그리스도께서 교회가 완전하게 될수록 더 많이 사랑하십니다. 이 목사, 문학이 그렇게 어려워? 하정복 목사가 자기 초창기 때에 커뮤니케이션이 안되었던 이야기 알아? 부인이 이제 직장을 다녔는데 자기는 이제 부인을 마음껏 사랑한다고 했는데, 집에 들어갔는데 책이나 보고 설거지도 안하고 이불도 안개주고 방도 안치우고 하니까 이게 뭐냐고 내가 이렇게 힘들게 들어왔는데 당신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이럴 수 있느냐고. 나 당신 정말 사랑해. 칼로 한번 째볼까? 중요한 것은 째 보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청소하고 이불개고, 설거지도 깨끗이 해놔서 아내가 들어왔을 때 맘 상하지 않고 편하게 쉬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에요.
더 많이 사랑하시죠. 그래서 우리가 항상 시간을 염두해두지 않으면, 시간을 염두해두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 그러면 내가 자네가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자네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할 꺼야. 우리가 충성스럽게 목회하고 영혼을 위해서 온 마음으로 헌신할 때 그렇지 않을 때보다 하나님이 더 많이 사랑하신다. 동의가 안되나?
(질문) 사랑의 경험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하신데, 각 개개인에게 기본적으로 각기 다르게 차이가 나타나면 영원히 영화된 상태에서도 경험되는 그 사랑이, 영화라고 하는 그 속에서 모든 사랑이 평균화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각자의 영화의 상태속에서 사랑의 경험차이가 있는 것인지.
(김남준 목사님)
다르겠죠. 지성의 크기가 다를테니까. 그렇게 느끼는 사랑도 다르겠죠. 그러나 거기에서 느끼는 그러한 사랑의 가장 최소한은 여기에서 느끼는 최대한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경지이겠죠. 그러므로 누구도 좀더 하나님을 많이 알아도 덜 아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좌절을 느끼거나 덜 사랑하는 사람이더라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서 수치를 느끼지 않는 그러한 세상이 되지 않겠어요? 하나님의 별의 밝기도 각기 다른 것처럼 그렇게 해서 또 하늘나라는 나름대로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질문)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이것을 상급론으로까지 사랑이라는 면에 있을 때.
(김남준 목사님)
나는 근본적으로 상급을 믿지를 않는 사람이거든요. 모르겠어요. 더 깊이 연구를 해보지 않았는데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상급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를 할까. 아무리 그 상급을 받으면서 나름대로 뭐 불만을 안느낀다고 해도 그러한 식의 상급이 과연 존재할까.
(질문)
그 상급이 사랑의 차이,
(김남준 목사님)
난 또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각기 다른 그 무엇이 있겠지만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 그 상급이다 그렇게 생각 안해요. 여기서 계속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가서 사랑이 없겠네. 그렇지 않겠죠. 그것을 상급과 연관시키는 것에 대한 것보다는 우리 모두 우리 모두 그 분과의 영원한 관계속에 들어가는 우리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상태의 완전한 완성 그 자체가 더 이상의 상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복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개념 자체가 뭔가 이렇게 주님이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한 것이고 그러한 것이지 그러한 것을 그 영원한 세계에 투사시킨다는 것 자체는 회의적이에요. 루이스벌콥같은 경우는 나의 의견과는 조금 다르죠. 나는 기본적으로는 그래요. 이러한 것 아니겠어요? 아빠가 죽은 줄만 알았는데 돌아오게 되었을 때, 아빠 손에 있는 선물이 그 아이에게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참 좋은 비유네. 한 무슨 준위. 같은 남자이지만 잘 생겼더라고. 그러한 사람이 다 죽었다고 하는데 바다에서 살아서 딸에게 막 돌아왔을 때, 아빠 손에 들려진 그 선물이 과연 딸에게 관심일 수 있을까.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 무슨 상급이 또 필요해? 이 세상에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래서 내가 창세기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 너무나 은혜를 많이 받는데 그러한 기도가 나오더라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대로 살아도 충분합니다. 주님, 당신 자신의 그 영광을 위하여 더 많이 마음을 쓰십시오. 이 세상에서도 그러한 고백이 나오는데 완전한 의인의 영을 가진 상태에서 뭐가 또 필요해? 그렇잖아. 집에 가서 아내들에게 내가 있으면 됐지. 그랬을 때 아멘해야지 그게 아내이지. 너는 없어도 보험이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지. 오늘 저녁에 실행한번 해봐. 내가 있으면 됐지, 해봐요.
그 다음 계속 읽어봐요. 그 다음 사람.
(본문) 1:17:00정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의 공로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은 모두 완전하신 속죄에 대하여 구원받은 사랑받는 성도들입니다.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라지가 많이 섞이고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도, 또 아주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이러한 사실에는 차이가 없기에 하나님은 모든 교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모든 교회가 동일한 사랑을 동일한 정도로 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신자들의 경우를 숙고해 본다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언급된 일곱 교회를 가리켜 누가 교회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이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결코 같지 아니하였습니다.
B. 완성을 지향하시는 하나님
이러첨 지상의 교회는 모두 이미 구원받았으나 아직 온전한 성화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 지체들로 이루어지고, 또한 이미 완성되었으나 지어져 가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구속을 통한 우주적 재창조라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불완전한 교회를 완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교회는 진리와 성령으로써 때로는 핍박과 고난을 통하여서 점점 더 완전하게 되어 가는데, 이는 지체인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거룩하게 되어 그들이 성례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그 모든 성도들을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로 만드시고, 그들의 연합인 교회를 영원하고 완전하며 흠없도록 만드심으로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 온전케 되는 의인의 영이라는 표현은 뭐냐 하면 영화의 상태에 대한 또 다른 그 표현이에요. 성경적 표현이에요. 그 다음.
(본문)
이러한 교리적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사실들을 숙고해야 합니다. 다음 사실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하나는 교회를 안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이며 또 하나는 성도들의 영혼안에 있는 지향성입니다.
1. 완전하게 하시는 하나님
첫째로 교회를 완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죄로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는 도구로 사용하시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교회를 완전하게 하시는 일에 헌신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는 동시에 자신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게 굉장히 신비해요. 그리고 아주 논리 정연해. 무엇인가 하면 잘 봐. 자, 이렇게 해서 내가 아직 사유를 아직 끝내지 못했지만 새로운 용어들을 부여하려고 하거든. 어쨌든지 간에 이러한 식의 교회론들이 거의 사라졌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삼위일체도 내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겠지만 대게 변증가들 이후부터 시작되거나 기껏해야 종교개혁자들부터 시작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되요. 대게 어거스틴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렇게 하면 안되고 초대교회 성경서부터 시작해가지고 속사도, 교부들로부터 시작을 해와야 한다는 거야. 얘기 안했어요? 했죠. 그러한 식으로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론도 그래서 교회론도 말하자면 통시적인 연구가 필요한 거야. 통시적인 연구. 저기 성경부터 시작해서 쭉 사도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러한 교회론.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가장 감사한 것은 이러한 교회론의 루트를 만들어 준 것이야. 읽어보니까 아우구스티누스뿐만 아니라, 히뽈리투스라든지, 텔투니아누스, 이레나이우스 모든 사람들이 막 보편교회에 대한 철저한 사랑을.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는 그리스도인도 아니라 할꺼야. 교회끼리 물고 찢고 험한 일들이 일어나느데 이게 교회가 그럴 수 있겠어. 그래서 그것을 보면 처절한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 통일된 사랑이야. 그런데 이제 용어를 부여를 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있게 되잖아. 그러면 뭐냐 하면, 교회 내적으로는 이게 더 온전해 지기를 바라는 그러한 사모함이 생겨나는 거야. 온전함에 대한 사모함이 생겨나는 거지. 그래서 결국 뭐냐 하면 이러한 사랑이 교회 자신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만들어 주는 거야. 교회 그 자체를 위해 헌신하도록 만들어 주는 거야. 그러면서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 모르는 이 세상이 복되게 되도록, 뭐라고 표현해놨나 모르겠는데 음, 어디 읽다가 말았지?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것들을 느끼는데, 항상 잘 하는 묘사가운데 있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갈망은 무엇과 비례한다고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갈망은 무엇과 비례한다고? 이미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질에 비례한다. 기록을 해두세요.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갈망은 이미 자신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질에 비례한다.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질이 그렇게 별로 좋지 않으면 그렇게 형식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데 그렇게 사무치도록 그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예수님처럼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거야. 그러면 결국 이 보면 Intra Ecclesia에서의 사랑의 국면과 extra Ecclesia 사랑의 국면이 사실 일치하는 거죠. 이렇게 된 것 만큼 이 세상이 망가졌다고 생각을 하고 이 세상을 고치고자 하는 그러한 간절한 사모함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엔 두 개가 같이 가는 거죠. 그래서 그 왜 교회에 등록하고 그 다음에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이 그 저 나름대로 기독교 사업하고 있는 사람들 있잖아요. 건강한 신앙일수가 없어요. 이렇게 일치를 이루어가는 거죠. 그 다음 사람.
(본문)
교회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의 터 위에서 거듭나고 구원받은 성도들이지만, 그들이 더욱 온전한 성도로 성숙됨으로써 보이지 않는 교회는 더욱 온전한 교회가 되어갑니다. 그렇게 될수록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을 공고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의 온전함은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로는, 성도 개개인의 성화입니다. 성도 각 사람이 진리와 성령으로써 자신 안에 있는 불결로부터 순결하게 되어감으로 신자 개개인의 성화는 성례전적으로 교회의 온전함을 위하여 봉헌됩니다. 신자의 성화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각 신자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화의 진전은 곧 그가 지체로서 속해있는 몸인 교회의 성화가 됩니다. 각 신자의 성화의 진전과 함께 그 일을 위한 헌신은 개인의 헌신인 동시에 성례전적으로 다른 지체들의 헌신과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각 성도들이 지식과 사랑안에서 자라가고 실제적으로 사랑과 일치를 이루어 선한 일을 위하여 섬김으로써 성취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교회를 하나님이 당신의 몸을 완전하게 하신다라고 할 때, 두 개의 페이지, 두 개의 국면을 함께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이 마치 인간의 구원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거야. 이미 이루어진, 그 칭의는 그것을 변치 아니하시겠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인간의 끊임없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완성을 신적 완성을 대치하지 못하지만 그 완성을 향해 감으로써 신자는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주님께 순종하면서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처럼 역시 이렇게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는 계획이 있고 하나님이 교회가 서로 그 안에서 자신들이 노력함으로써 온전함의 정도를 나타내어 각각 그 개별교회의 빛깔의 크기가 빛의 크기가 다양해지는 거야. 그 어느 교회는 찬란하게 빛나서 밤바다를 여행하는 수많은 교회와 사람들에게 갈길을 알려주기도 하고, 어느 교회는 거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빛이 흐려지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넓게는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가깝게는 교회가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순종하고 진리로 아름다워지는 거야.
어쨌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거든. 우리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너희가 이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라.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라.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 교회론적으로 그렇게 되는 거야. 우리의 사명은 보편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우리가 보편교회를 위해서 모두 봉사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보편교회를 향한 뜨거운 사랑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개별교회를 위해서 섬김으로써 이 교회가 온전해지는 것이 보편교회가 온전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그러한 마음으로 섬기는 거죠. 자 그다음.
(본문)
그때 소극적으로는 죄악 된 삶을 버리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섬기도록 헌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뿐 아니라, 지체들과의 관계의 온전함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지향성
둘째로, 성도들의 영혼 안에 있는 성향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혼 자체 안에 두신완성과 목적을 지향하는 성질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교회가 온전하게 될 가능성은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 개개인의 영혼의 지향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이루는 신자 개개인의 영혼안에 있는 원인적인 작용을 통하여 교회는 온전함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신자들의 영혼 안에 있는 원인적 성향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이치는 신자 개인의 성화의 경험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 안에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존재가 되어 가고 선한 일을 도모하며 살, 새 본성을 주셨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 본성을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지향성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지향성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propensity라고 이야기하는데, 지향성, 그 다음에 성향 이러한 것들은 굉장히 어려운 단어에요. 이러한 정도 단어가 쓰이는 것인데, 사실은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사실은 그. 지향성은 뭐냐 하면 자신도 거역할 수 없게끔 이미 자신안에 입력되어 있는 어느 한쪽을 향하고자 하는 성질을 나타내는 거예요. propensity가 하나님께서 이제 뭡니까. 중생으로 거듭나게 하실 때 이러한 영혼의 성향을 바꾸어 놓으시는 거거든요. 성향을 바꾸어 놓으시는 거지. 성향이란 말 자체가 본성에 속한 것이 어느 방향으로 흐른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변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A라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변해서 B라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것을 어떠한 어찌할 수 없는 그러한 어떤 입력된 것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propensity라는 이 말을 쓰는데,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잘 보여주는 단어에요. 그렇게 영적으로 흘러가는데 변화되는 이것이 하나의 그 지향성의 변화인데 하나님이 이렇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맨 처음에 우리 인간에게 맨 처음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부여하시잖아요. 영혼을. 이 영혼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을 찾아가고자 하는 이미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찾아가고자 하는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영혼에게 있어서 이것은 Soul이에요. 영혼에게 있어서 자기가 궁극적으로 그것으로 가고자 하는 지향점이 되는 거죠. 그런데 기독교의 설명이 틀려진 이유는 뭐냐 하면 틀린 점은 이런 거예요. 스피노자의 철학이나 범신론에서는 그 이 성질과,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과 영원의 존재의 본질이 동일해. 이 두 개가. 동일해서 이 영혼이 돌아가는 것 자체가 합일이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 자신 속으로 들어간다고 보는 거예요. 인간의 영혼이 이렇게, 범신론적인 관점이죠. 그래서 뭐 스토아 철학이나 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죠. 우리는 그렇게 안 보고 이미 피조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근접할 수 없는 차별성이 있다고 보는 거거든요.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영원히 하나님을 지향한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그 공락, 지복이라고 그러죠. 지복을 충분히 누리는 지복의 상태에 있는 것. 이것이 영혼히 가고자 하는 끝이에요. 이 지점이. 그거예요. 그러한 점에서 영혼이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인간이 타락을 하게 되지. 타락을 하면서 인간이 결국은 이렇게 처음에는 이러한 지향성도 주셨고, 실제로 이렇게 갈 수 있는 성향도 주신 거예요. 그런데 타락을 통해서 깨뜨려 지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이 가고자 하는 이러한 성향들이 심히 뒤틀린 거죠. 그런데 근본적으로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는 그 원초적인 지향성은 남아 있는 거예요. 지향성은 잔존하는 거예요. 이 성향은 뒤틀려져서 그래서 그런데 하나님 아닌 것들을 향하고 자기 자신을 주인 삼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결국은 자기 애잖아요.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고 돌이키셔서 그래서 이것을 다시 중생을 통해서 그래서 자기 밖에 사랑하는 이 인간을 주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지향성과 성향 자체를 이렇게 일치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항상 위협으로 갖는 거죠. 이렇게 이렇게 완전하지 않고 계속해서 위협을 받는 거죠. 그래서 흔들리는 거죠. 그래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위로부터 끊임없이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grace, 은혜가 필요한 거죠. 교회는 바로 이 일을 돕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해도 안되고 중생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생각해도 안되듯이 똑같이 삼위하나님과 교회가 관련을 맺고 계시다는 사실을 하나가 더 이상의 교회가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해도 안되고 반대로 생각해서도 안된다는 거이지. 그 다음에.
(본문)
a. 목적인으로서
첫째로는 영혼안에 있는 목적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혼은 그 인간 존재에 대하여 목적인으로서의 성격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그것을 가진 인간 존재로 하여금 어떤 목적을 지향하여 살게 하는 원천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인으로서의 영혼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창조의 목적은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잖아요.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름답게 드러내고 그 질서안에서 지극한 만족을 이루면서 발전해가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거죠. 그 다음에.
(본문)
영혼의 이러한 목적론적인 성격은 중생하지 않은 영혼에게도 희미하게 남아있지만, 중생한 영혼에게는 더욱 명확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중생한 신자의 영혼은 그것을 가진 인간존재로 하여금 존재의 방식과 삶이 창조의 목적을 향하도록 원인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신자의 영혼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며 창조목적을 따라 살아갈 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상태를 누리게 됩니다. 영혼 안에 이러한 성향을 가진 신자들의 연합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를 천지창조의 목적을 이루는데 기여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계획은 교회를 성도들의 영혼의 상태에만 맡기셨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가 창조목적을 따라 존재하게 하는 목적인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그러한 구원계획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들이 원하지 않을 때에도, 혹은 그렇게 행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때에도 그들을 인도하셔서 교회가 궁극적으로 그 목적에 기여하게 하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거듭난 성도들의 영혼안에는 목적인이 있는 거야. 그래서 뭐냐 하면 자기 영혼을 창조하신 그 목적대로 살 때에 가장 행복한 거야. 그게 사실 불신자의 상태도 희미하게 남아있는데, 중생했을 때 그것은 분명해지는 거죠. 그래서 이상하게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술마시고 노래하고 진탕한 쾌락에 빠져도 영혼의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거죠. 그런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죠? 이러한 것들을 각자 가지고 있는 모든 영혼의 연합은, 연합이 가지고 있는 목적인으로서의 총합은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그것과 동일한 거다. 그러니까 교회는 그 자체안에 온전하게 되어가서 하나님과의 지복의 상태속에 있기를 원하는 그러한 자체적인 목적인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참 놀라워요. 우리는 부족한데 하나님이 교회의 부여하신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받게 하시고 우리의 부족을 용납해주시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거야. 그래서 힘들어도 열심히 목회하면서 교회에 붙어 있어야 해. 그래서 더 많은 사랑을 경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그 다음
(본문)
b. 완성인으로서
둘째로는 영원안에 있는 완성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혼은 그 자신 안에 전일성, 곧 온전함을 이루고자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 본래 창조될 당시의 온전한 상태에 이르도록 완전하게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영혼안에 이러한 성향이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목적인이 자기 바깥으로 향하여 자기 목적을 향해 가는 거잖아요. 그러면 완성인은 자기 자신이 완전케 되려고 하는 거죠. 그러면 이게 이러한 식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또 이 그림이 모두 적용이 되는 거예요. 이게이게. 이 안에 있는 교회가 진리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같은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는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교회 그 자체를 온전하게 하고자 하는 그 자신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완성인으로서의 성품을 보여주는 거다. 이해되죠? 충분히 소화하고 가르칠 때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폼을 잡으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도들이 권위있게 느껴지도록 하늘에서 내려와서 자신들이 못본 세계를 거의 보고 산 사람들처럼 가르치는 목회자와 가르침을 받는 성도 사이에 굉장히 커다란 하나님의 앎의, 하나님을 아는 앎의 격차가 느껴지는 방식으로 가르칠 때 거기에 진정으로 권위가 있는 거야. 뭐 소리만 지르고 책상만 두드린다고 해서 권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야. 내용이 있어야지 권위가 있는 거지. 그래서 공부를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성질을 부리면 카리스마라 그러고 공부를 못가르치는 선생님이 카리스마를 부리면 그것은 성질이라 그래. 적어놔. 외웠어? 강목사 외워봐. 교역자도 마찬가지야.
그 다음 교역자도 마찬가지야. 신령하고 탁월해서 성도들이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야단을 치면 성질이 아니라 아주 거룩한 카리스마가 되는 거야. 가끔해야지 매일 그러면 안돼. 못가르키면 니나 내나 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카리스마 보이면 성질이라 그래. 성질. 성질. 그 다음
<본문>
그래서 불신자들의 영혼도 그분안에서 자신이 온전하게 되기 전까지는 결코 쉼을 얻지 못합니다.
더욱이 이러한 완성인으로서의 성향은 거듭난 신자들의 영혼 안에서 더욱 뚜렷하게 존재합니다. 그들의 영혼은 육신의 욕구를 따라 살아갈 때에는 고통을 받습니다. 온전함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될 때 영혼은 고통 받고, 온전함에 이르러 영혼이 참으로 영혼 됨으로 가득하게 될 때에는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행복을 느낍니다.
<김남준 목사님>
영혼안에는 영혼 안됨도 있습니까. 그러한 질문도 나오죠. 그러면 내가 물어볼 께요. 영혼이 뭐야라고 한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목사님, 63페이지 그 하단부에 있는데요 영혼이 참으로 영혼됨으로 가득하게 될 때에는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행복을 느낍니다라고 그랬는데 그 영혼이 영혼이 참으로 영혼되지 않은 것으로 가득 찰 때도 있습니까. 그렇게 물었어요, 자 답변해봐.
<대답>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주셨을 때, 그 본래의 존재 목적대로 그것이 기능하고 있을 때에 그 자체로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김남준 목사님>
영혼됨으로 가득한 때에 그렇다고 설명한 것 아니야. 영혼되지 않은 것으로 가득찰 수도 있어요.
<대답>
영혼의 기능이 발휘가 되지 않을 때에
<김남준 목사님>
왜 발휘가 안되냐 이거야. 자, 그대가 이야기 해보자. 이러한 질문을 똑같이 받았을 때, 여기 질문은 성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이거든. 좀더 시원하게 설명을 해봐.
<대답>
사람이 사람됨, 사람답다 할 때 사람답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냐. 그 사람도 사람은 사람이지만 사람으로써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본래의 모습 순전성을 온전하게 갖춘 사람을 참된 사람이라고 하고 거기서부터 멀어진 사람들도 사람은 사람이지만 장래성을 상실한 사람이듯이 영혼도 영혼이 아닌 적이 있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참된 영혼다움이..
<김남준 목사님>
묻는게 그 이야기야. 그것을 피해놓고 하는데 참으로 영혼 됨이 있다고 그랬잖아. 영혼 안됨은 뭐냐 이거야. 영혼이 참으로 영혼 됨으로 가득 찰 때에 그렇게 아름답다며. 영혼 안됨이 뭐냐 이거야.
<대답>
문자적으로 영혼 안됨으로 해석하면 안되고,
<김남준 목사님>
설명을 할테니까 들어봐. 그러니까 형이상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그거야. 이번에 이제 총신에서 성경과 리더십이라는 이상한 과목을 줘서 가르치는데 지난주에 들었던 예가 뭐였는가 하면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하여에서 의지 부분이었거든. 선한 의지의 부분. 학생들이 굉장히 그 쇼킹해 하더라고. 우리 인간이 이러한 식으로 되어 있구나. 기본적인 지식이거든.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이러한 이야기이지. 우리들이 전일성의 개념부터 우리가 정리를 하자. 그래서 그것을 뭐라 그러지? 이게 인테그리타스 integritas 전인통이라고 해요. 이것을 영어에서 integrity 정직이라고도 하지만, 이것은 순전함이거든요. 전일성이라고 했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 일자적 성격으로 가득 찼다 그러한 뜻이에요. 이게 말하자면 존재라 그러자. 존재. 존재이면 이것은 존재가 뭐냐 하면, 있음이 꽉 차 있는 것이 바로 존재에요. 이러한 참된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으신 거야. 하나님이 잘봐요. 잘들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creation, 창조하셔요, 이렇게. 창조를 하시면 여기에서 개별 사물들이 생겨나게 되잖아. 그러면 개별사물들이 생겨나게 되면 예를 들어서 이렇게 돌이다 그러잖아요. 물이다, 물. 제일 좋다. 물이라 해요. 물. 이게 수야. 수. 물 중에 가장 좋은 물. 선한 물이라 칩시다. 어떤 물이 가장 좋은 물이야? 곽전도사. 어떤 물이 제일 좋은 물이야?
<대답>
하나님께서 만드셨던 그 상태로의 물
<김남준 목사님>
바닷물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물의 목적과 용도를 생각하면 돼. 물은 빨간물이 좋다. 왜, 내가 빨간색만 보면 힘이 나거든 그렇게 이야기 하면 안돼. 물의 목적은 색깔을 맞추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죠. 물이 가장 최상의 좋은 상태가 뭐냐 하면 물임으로 충만할 때, 그래서 물아님의 요소가 거의 없는 상태가 최상의 상태라 이거야. 그런데 물임이 뭐냐. 또다른 정의의 상태가 필요한거죠.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증류수와 같은 물, 그러한 상태를 최상의 상태의 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거기에는 그래서 생수기에 있는 물이 썩 좋은 물이 아니야. 그래서 오히려 거기에 여러 미네랄이나 여러 가지 것들이 섞여 있을 때 그러한 물이 더 좋은 물이라 그러지. 어쨌든 그런 거야. 그렇게 놓고 본다면 이것을 하나님이 개별적인 영혼을 창조하시잖아, 영혼. 이 영혼을 창조 하실 때에 육체와 만나잖아요. 이것이 인간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 인간 존재가 선하다 할 때에 이 두 개가 좋은 상태인 것이 좋은 결합을 이루고 있을 때에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면 육체는 빼놓고 영혼을 생각해 보자 그거야. 영혼은 그러면 뭐냐 하면 영혼은 영혼은 이게 영혼은 영혼이 참 좋은 영혼이기 위해서는 영혼임, 이것이 이안에 충만하게 차 있을 때 그때에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 되는 거예요. 영혼아님이라는 것은 도대체 뭐냐. 그러면 생각할 때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하는 거죠. 영혼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 목적과 그 다음에 이 영혼이 자기를 지지하고 있는 성질을 동시에 고려하면 무엇이 영혼아닌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는 거야.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고 합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영혼의 지향인데 이 안에 영혼은 그 본질 그 자체가 경향성이라고 말했잖아. 힘과 경향성이에요. 이러한 것들이 역행하도록 작용하고 있는 어떠한 힘들이 있는 거야. 이러한 것들이 영혼이 아닌 것들이야.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지 않고 영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바람직한 용도에 맞도록 하나님이 주신 성질이 있는데, 그러한 성질과 거스르는 것, 이러한 것들이 하나의 힘으로 영혼속에서 남고 경향으로 남았을 때, 그것은 영혼이 영혼 아닌 것들로 개입되어 있는 상태라는 거예요.
영혼의 본질은 힘과 경향성이에요. 그래서 이 힘이 이방향으로 가든 저 방향으로 가든 영혼이 아까 이야기 했듯이 영혼이 아닐 수는 없는 거예요. 영혼속에 참된 영혼이 아닌 것이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영혼이죠.
<질문>
참된 영혼됨에 대해서 설명할 때, 본질과 지향하는 기능이 일치를 할때에,
<김남준 목사님>
그렇지 일치하는 힘과 경향들이 있을 때에 그것이 참 영혼임이지. 그것이 가득찬 상태.
<질문>
하나님은 그 기능을 제거하고 본질만으로 바꿀 수 있는 건가요?
<김남준 목사님>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거. 하나님의 영은 그러한 모든 담론을 초월해요. 그런 담론은 할 필요가 없는 거죠. 다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물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하는 신학적인 입장을 갖게 되는 거지. 그다음
<본문>
교회는 이러한 영혼을 가진 신자들의 연합입니다. 교회는 지체들의 영혼 안에 있는 완성인적인 성향으로 점점 더 완전해져 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 단지 신자들의 영혼을 성향에만 달린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의지를 가지고 교회를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 가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공동체적인 성숙 또한 신자들의 성숙과 같이 그분 혼자 이루지 않으시고 교회의 구성원들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가십니다.
Ⅳ. 불완전한 자들로 완전한 교회를 이루어 가심
교회를 향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은 불완전한 자들을 모아서 오나전한 교회를 세워 가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교회를 불완전하게 남겨 두셨습니다. 말할 수 없이 탁월한 경륜 속에서 하나님은 불완전한 교회를 완전한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신자로 하여금 놀라운 사랑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혼란스러워만 보이는 무질서 속에서, 하나님은 지극히 아름다움 질서를 따라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교회를 통치하시며 완전하게 하십니다. 결국 성도의 영적 성숙은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지혜를 아는 시직에서 자라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A. 불완전하게 남겨두신 하나님
이처럼 교회는 완전하게 세워졌으나, 불완전한 신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가 당하는 고통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고통이기도 하지만, 불완전한 자기 자신 때문에 비롯되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처럼 지상에 있는 교회를 불완전한 채 남겨두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1.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게 하심
첫째로, 하나님께서 이처럼 소중한 당신의 교회를 불완전하게 남겨두신 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교회의 불완전함 속에서 그것을 완전히 타자인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완전한 caritas가 없는 거예요. 그게 자리를 보여주는 거야. 그게. 교회는 공동체적인 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도 그 세상의 악을 완전하게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것도 caritas의 사랑이 없는 거야. 자기도 한때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던 세상에 속한 인간들이었는데 들어온거 아니야.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되지 않기 위해서 기도했을 때, 롯 한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이야기 하면 안되지. 그러한 구약시대에도 caritas의 사랑을 보게 되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그 보면 안되는 거죠. 교회에서 보면 그러한게 있어. 열받으면 발로 차버리고 가고, 그냥 조용히 나가는 것은 조금 나은데, 개판으로 휘젓고 지나가는 거죠.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아주 씻을 수 없는 죄를 교회에 짓게 되는 거야. 그리고는 그 다음에 또 다른 교회에 가서 안착하려 하는데 그게 사실 하나의 교회라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자기가 그럴 수가 없는 거죠. 정말 제가 한 몇 년동안 교회론 공부하면서 정말 나도 무지하게 살았구나 나도 절실하게 느꼈어요. 교회가 다 정상이 아니야. 너무너무 무지막지해. 어떻게 그런지 모르겠고 지난주에 이야기 했지만 돌아가신 다음에도 책이 계속 나와서 우리에게 정의를 끼치고 계신 그분이 목회하시던 교회의 신자들, 그분이 자신이 그러셨는지 후일에 따르던 추종자들이 그랬는지 모르지만 너는 목회자를 깊이 존경하고 그분이 깊이 진리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은 나무랄 것이 없는데, 그렇게 놓고 자기들이 그분이 떠나고 나니까 그분 설교 테이프 놓고 자기네들끼리 모이고 교회 다니지 않고 이러는 것은 잘못된 일이야. 이러한 교회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몸을 또 다시 상처내는 일이라 그거야. 물론 올바른 설교를 듣고 좋은 목양을 받아야 하지만 그 좋은 목양을 받는다는 것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가치이지.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교회는 그 이상이에요. 왜, 모두 그러한 좋은 설교 그 다음에 신실한 목양 그 다음에 교회가 성도들에게 베풀어주는 그러한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서 비롯된 하나의 심부름이라는 거야. 그것이 어떻게 본질을 대체할 수 있나. 그런거야.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여러분도 우리 교회 신학생들 이렇게 보면서 좀 이렇게 사역에 내보내야 되는데 교회가 아프고 힘든 교회에 가서 그 속에서 고난과 함께 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자기가 어떻게 죽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해 지는가 하는 것으로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고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귀한지도 알고 동역자들의 섬김과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도 알고 그렇게 가면서 그게 진정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지 조금 조금 말씀이 있고 여러분들의 교회에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교만하고 그리고 또 그렇지 않은 교회들은 턱없이 무지하고 이러면서 너무너무 마음이 아파요. 그리스도의 교회에요. 내가 그 여러분들은 오십개교회 시골 교회 목회자 세미나 할 때인데 내년에 100교회, 최소한 80교회. 그리고 이게 그 다음에 내가 내가 목회하는 동안 얼마동안 갈지 모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꿈은 내가 목회하는 동안에 여름마다 천교회 세미나 하는 것이 꿈이야. 어마어마하겠지. 이천명이 왔다고 생각을 해봐. 그런 것들이 사실은 처음 출발 자체가 그 무너져 가는 교회들을 보면서 내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아. 요즘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마음들을 구체적으로 주셔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감당해야 겠는가가 고민이에요. 영국 교회도 가서 보면은 마음이 너무 아파요. 무엇인가 그들을 위해서 도와야 되겠다 하는 사모하는 마음들이 생겨요. 그런 것을 보면 여러분들은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제 여러분들중 어떤 분들은 이제 교회를 개척해서 떠나게 되거나 아니면 필요하면 여러분들을 교회를 떠나 보낼꺼야. 그래서 너는 한번 말도 되지 않는 교회에 가서 섬겨 보거라. 그때에 진짜 그곳에서 한알의 밀알로 섬길 수 있을 때, 그때에 여러분들이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 목회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 되는 거야. 말씀의 내 영혼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지격이 없는 목사님 밑에서도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분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고 그리고 눈물로 기도하며 자기는 한알의 밀알처럼 썩어서 교회를 세우게 되는 그런데 이바지 할 수 있을 그때에 그런데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이바지 하면 안돼.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자기를 잃어버리고 나갈 때에 그때에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이 교회에서 참다운 신학을 배우게 된 사람이 되는 거예요. 하루 아침에 그러한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니니까 교구와 자기 맡은 부서에서 끊임없는 자기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 길로 가요. 자, 그 다음
<본문>
여기에는 하나 지혜가 있습니다. 교회 안의 참된 신자와 거짓 신자가 섞여 있는 것을 보십시오. 한 종류의 사람들은 교회의 참된 회원이 아니면서도 보이는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참된 교회는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희생하신 이 세상을 향한 사랑이 자신 안에 얼마나 부족한 지를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기 몸 주신 그 세상이 바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니 신자가 얼마나 그들은 토투스 크리스투스 totus Christus로 여기고 사랑하여야 하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totus Christus가 뭐야, 김동기. totus Christus가 뭐냐니까.
<대답>
모르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게 말이 돼? 집에서 읽고 생각하고 와야지. 바람잡이 전도사 되면 안돼. 뭐야, 조성용 전도사, totus Christus가 뭐야? 어떻게 해?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김. 가견 교회에 들어온 모든 회원들을 그리스도의 참된 몸으로 여김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참여해야 해. 알고자 하는 성향이 인자 속에서 베여 있어서 그래서 유전자처럼 베여 있어서 항상 진지해야 하는 거야. 그 다음 읽어요.
<본문>
사랑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사랑 없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신자는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이 얼마나 자기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참된 신자들이 교회에 가득하다 할지라도, 그들 모두 건강한 신자일리 없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여기에서 참된 신자라고 하는 것은 진짜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중생이 분명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거야. 성질적인 면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 다음.
<본문> 2:06:55
그들 중에는 은혜에서 미끌어진 자도 있고 시험에 들어 마음이 악함으로 가득하게 된 신자도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고통당하는 교회를 봅니다. 이때에 신자는 교회의 그런 모습이 바로 자신안에 있는 옛 본성과 새 본성의 싸움의 확대판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도 교회의 한 지체이기 때문에 그 모든 악한 상황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이 있음을 통감하면서 자신 안에 있는 불완전함 때문에 아파하는 교회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신자는 교회의 참된 희망이 신자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붙들고 계신 그리스도께 있음을 깨닫습니다.
2. 완성을 갈망하게 하심.
둘째로, 불완전하게 남겨두신 교회를 통하여 참 성도들은 교회의 완성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들의 영혼 안에 있는 완성인으로서의 성격이 교회에 투영되어 교회 자체의 완전함을 갈망하는 것이며 이는 신자가 자신의 영혼의 완성을 갈망하는 것처럼 또한 교회에 속한 참된 신자들은 불완전한 교회가 완전하게 되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영혼의 건강은 스스로 온전해지기를 사모하는 데서 유지되듯이 교회의 영적인 건강함 역시 교회 자신의 완전한 교회가 되기를 갈망할 때에 유지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참 신자들은 이미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교회의 터 위에 아직 불완전하게 세워져 가는 교회를 바라보며,
<김남준 목사님>
어느날 교회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아픈 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성질적인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어떻게 하면 교회가 온전하게 될 수 있는가를 바라보지 않고, 너무 현시적이고 과시적이라 이거야. 그리고 성과 지향적이고 과업 중심적이어서 본인은 이러한 이러한 일들을 해서 이렇게 성공했다. 이러한 업적을 이루었다. 이렇게 이렇게 외향을 키울 수 있었다. 이러한 등등의 이야기가 전혀 내적인 이야기들이 생략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교회들로 하여금 계속 그러한 것들에 대한 꿈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거죠. 그러한 것들은 잘못된 거죠. 그 다음.
<본문>
마치 불완전한 자신의 영혼을 보는 것처럼 아파하며 그 완전을 위해 헌신하게 됩니다. 이때 교회의 온전함을 사모하는 그 사랑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영혼과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까리따스의 사랑이 가진 교통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사랑은 하나로 통합됩니다.
신자가 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까지는 그 사랑이 까리따스의 사랑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 자신으 루이하여 그렇게 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존재마저도 자기의 행복과 완성을 위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찾는 그의 사랑은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에로스의 사랑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것은 다시 설명안해도 되겠지. 사람이 맨 처음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갈 때 사실 그것은 사실은 자기 사랑이죠. 예수 안믿고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고 믿는 그 순간까지는 절대로 주님을 만나지 않아.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행복에 대한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한 갈망인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믿음으로 보시는 거야. 그래서 caritas의 사랑과 eros의 사랑이 통합을 이루는 거야. 그 다음.
<본문>
그러나 그가 이렇게 찾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그는 거기서 자기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였던 사랑과는 다른 사랑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여기에서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성적이고 이성적인 사랑 그게 아니고 그 자기 사랑을 포함하는 자기 중심적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사랑. 예술이나 문학에 대한 사랑도 eros속에 들어가는 거야. 그 다음 사람.
<본문>
이때 그는 자기를 긍휼히 여기는 은총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데 이때 신자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이때 신자 안에서 은총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겨나는 사랑이 바로 까리따스, 곧 지순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유래하지만, 하나님 자신 뿐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여야 하는 모든 인간들과 사물들을 향한 사랑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교통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신자는 이미 성화의 길을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존전해지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온전함에 이르기를 사모하는 영혼이 아름다운 것은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더욱 온전해져서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게 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심
셋째로, 하나님은 신부인 교회로 하여금 그 불완전함 때문에 다신 자신을 찾고 의지하게 하십니다. 사랑은 의지하는 것이며, 의존의 감정이 없는 사랑은 지순의 사랑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은 아무도 의지하지 아니하나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은 하나님 이외의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정혼한 신부가 신랑 이외의 다른 남자를 의지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고난 가운데 당신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신자들의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게 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이 세상의 악함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의 영성은 고난의 영성입니다. 교회가 박해를 당하고 성도는 고난을 받아도 생명처럼 소중한 것을 지키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참으로 신자로 살아감에 있어서도, 교회가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더욱 공고히 누리기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절대적인 신뢰로써 당신 자신을 의지하는 의존의 정서 안에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게 세우신 교회를 여전히 불완전한 채로 남겨두심으로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게 하십니다. 교회 안에 조직이 있으나 그들은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많은 일들로 하나님과 성도들, 그리고 이웃을 섬기나 자신들의 섬김의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의 공로를 의존합니다.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가 있으나 설교자를 의존하지 않고 설교자를 붙드시는 성령을 의존합니다.
이처럼 성도는 때로 그분의 말할 수 없는 지혜 안에서 이 땅에 하늘의 많은 복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물들을 의지하지 않고 그 모든 사물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의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는 교회의 불완전함을, 오히려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데에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뒤에는 뭐 특별히 설명 안해도 되겠죠? 여기에서 끝내야 겠다. 자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오늘 배운 것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데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