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특강 2010/05/15)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5-1)
본문 읽음...
B의 첫째 단락에 보면 인간의 본성은 사람의 영혼의 본성이고, 성령론은 하나님의 영이신데 그 영이 우리 영혼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죽 나오는데 존 오웬이 퓨리마터로기아 성령론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인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이 인간 안에 들어왔다는 개념도 존재론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관계론적 측면으로 봐야 합니다. 특별이 우리가 사경회 때 ‘라카프팔라치오’ 교리를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우리 개개인을 향한 사랑이 결국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분여다’ 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데 우리들이 그것만 생각하면 안 되고 웨스트민스터에서 나온 말인데 존오웬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 개념, 제 1권에서 기독론 안에서 창조론을 다룹니다. 존오웬의 신학은 철저하게 기독론적인 신학입니다. 이번에 발견한 하나님의 형상 문제를 똑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의 분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존오웬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관계론적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관계론적이냐 존재론적이냐 많은 분쟁이 있어왔는데 루터파에서는 관계론적으로 보고 다른 한편에서는 존재론적으로 봅니다.
표준적으로 개혁파에서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것을 완전히 관계론적으로 본다면 무슨 문제가 나오냐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본질이 없다라고 말하면 이신론적으로 가거나 또 다른 초월성으로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오웬은 당시의 무슨 문제와 관련이 되냐면 내가 여러분에게 말했던 ‘경건의 비밀’ 그 문제와 관련이 됩니다. 무슨 뜻이냐면 ‘알미니우스’ 주의가 일어나면서 ‘소피니우스’ 주의가 발생하면서 일반도덕과 경건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삶이 혼돈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것을 너무 존재론적으로 생각해버리면 인간 안에 그런 도덕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는 커다란 능력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개발하고 채워 가면 도덕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 그것과 그 다음에 영혼이 거듭나고 변화되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거룩한 삶으로 이루어지는 도덕,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혼돈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이 문제와 관련이 되냐면 성도가 구원과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분여 받는 모든 복락, 그 다음에 영혼의 변화를 비롯한 모든 특징들은 결국은 기독론적으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자가 하나님의 형상도 누리고 하나님의 사랑도 받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임 바 되고 성령의 내주도 누리게 되고, 그 외에 많은 언약백성으로서의 분깃을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면 안 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중보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예수께서 중보하신다라고 할 때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받아서 개별자들에게 나누어준다라는 의미로 생각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분여 속에 우리들을 참여하게 하시는 근거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내가 음식을 먹어서 영양분이 생기면 눈이나 코에 영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먹고 몸 자체가 유익을 누리면서 생명의 기관을 타고 우리 몸속에 전파되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분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을 비롯한 개혁파 전통주의자들과 초기의 종교 개혁자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구원의 중심이라고 보았던 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이 구원론적인 기독론이라고 말한다면,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이 이 기독론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구원론을 위한 기독론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론을 위한 구원론, 기독론을 위한 교회론, 기독론을 위한 창조론, 기독론을 위한 종말론 이렇게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이 새로 고안해 낸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자신들이 상쇄화 시켜서 발전시켜 냈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게 기독론을 그 모든 신학과 우주론의 중심에 세우려고 했던 교부들의 흔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개혁파전통주의자들이 존 오웬과 같은 사람의 이런 표춘적인 노력들은 자기시대의 발전도 있었겠지만 충분히 고대 교부들의 근거를 가지고 유실된 것들을 다시 정교하게 복원해 나가는 한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 중요한 예가 우리가 지난번에 공부했던 ‘레카피탈로치오’의 교리가 그것입니다. 전체를 장엄하게 기독론중심으로 그러는데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설명을 이런식으로 총체적으로 하는 것들을 유실되어버리니까 굳이 기독론을 그렇게 우주론적으로 모두 펼쳐서 그리스도의 글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존오웬과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Person of Christ'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모든 것들에 대한 문제의 답을 찾는 것입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칼빈은 물론이고 후대의 사람들이 ’솔루스 크리스토스‘를 왜 찾게 되는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구원론 중심적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솔리데오 그로리아‘가 결국은 ’솔루투스 크리스토스‘의 구현입니다. 그래서 롬 11장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느니라‘ 그것이 결국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모든 세계의 학문적인 것들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운명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여기의 교회의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분여를 받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방황하던 인간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다가 그리스도예수를 만나서 기쁨의 삶을 살고 그것이 감사해 무릎을 꿇고 봉사를 해서 이것을 하나님께 올린다고 생각하지만 존 오웬 같은 경우는 그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께 올려지기에 적합할 정도로 순결한 섬김이나 심지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까리따스의 사랑조차도 하나님께 올려지기에 적합한 정도로 훌륭한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그리스도예수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께 올려 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로 올려지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그렇게 올려지고 내려지고 하면서 피조물은 그 모든 선악 간에 그리스도를 의존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절대의존의 운명 아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맨 처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인간들이 미처 인간들조차도 깨닫지 못했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했던 인간이 타락하자 그리스도의 중보를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가득한다고 하는 의미 자체가 주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투스 크리스투스’는 영어로 말하자면 ‘Hole Christ'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체적인 그리스도라는 뜻인데 영어로는 설명이 안 되지만 교회에 몸이 있는데 현실교회에는 불신자도 섞여있는데 그것을 엄밀히 구별해 내는 일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완벽하게 구별해내는 것이 불가능하고 설령 그것을 구별해 낼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 안에 안 믿는 사람이 있다고 칠 때,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한 형제로서 사랑하고 돌보고 해야지 그것을 구별해내서 차별대우한다는 것을 옳은 일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결국은 교회의 참된 모든 구성요소들이 아닌 사람들조차도 사랑의 원리로서 이들을 대하는 그런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칼빈 같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를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형상이 잔존해 있는 것이다라는 것에서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본문 읽음...
여기에서는 연합의 교리를 이야기 하는데 신자의 중생과 회심은 시간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당신의 영원한 계획들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 가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맨 처음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 안에는 이후 종말까지 영원히 일어나게 될 모든 일들에 대한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창조뿐만 아니라 타락, 타락 후에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저항하고 멸망 받을 사람들에 대한 지식도 있었을 것이고, 구원받을 사람들에 대한 지식도 있었을 것이고, 그 지식이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가 배제된 지식이라면 사실은 피조물에 의해 끌려 다니시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한 의지도 있고,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있는 것들이 구체화되어가는 과정이 역사의 전개 과정이고, 구속사의 전개과정이고, 그래서 구속사의 전개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그리스도의 몸을 작정하신 그대로 완성하여 가시는데 하나님이 당신의 작정하신 교회를 완성 해 가시는 완성의 방법이 개량적 완전성과 성질적 완전성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개량적 완전성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의 수를 채우시는 것이고, 성질적 완전성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계속 거룩하게 성화시키셔서 당신이 의도하셨던 그 표준으로 가게 하시는 것인데 이것은 신자의 성화가 이 세상에서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교회의 완전하게 거룩한 상태도 그것으로 종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 모든 것들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실제적인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이 그를 중생시키시고 회심시키시는 일로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는 것은 개개인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청교도 중의 한 사람이 ‘하나님에게는 자녀만 있지 손자는 없다’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라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아들만 낳으시지 딸도 없다. 아들만이 상속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긴 것입니다. 희랍어에 ‘테크논’이란 말이 있고 ‘피오스’란 말이 있습니다. ‘테크논’은그냥 ‘얼라’입니다. ‘피오스’란 말은 법적 상속권이 있는 아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피오스’로 불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손주가 아니라 자식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중생하고 회심하는 과정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예수께 접붙여집니다. 사람이 누구를 통해서 접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의 구원론 속에서 교회가 개입이 되거나, 또 다른 성인들의 공독이 매개가 되거나 하는 것들은 다 부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그리스도의 생명의 몸에 접붙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원리적으로는 거듭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예수의 몸에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그 연합은 중생과 함께 붙어지는 연합이지만 회심은 그것을 느끼는 것이고 실제적인 연합은 사랑을 통해서 증진되기도 하고 후퇴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청교도 중의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의 역할을 못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 누구냐 라고 할 때에 원리적으로는 구원받은 사람들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은혜에서 미끄러진 사람들도 사실은 실천적으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몸답게 못 살기 때문에 제외된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눈이 부어서 고름이 줄줄 흐르면 눈의 역할을 못하게 되는 것처럼 그렇습니다.
P120부터 본문 읽음...
이런 종류의 유비가 나올 때에는 전체적으로 취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라는 설교를 하는데 거기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뜻은 빛은 어두움을 비추는 것이고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인데 그것 하나만 가지고 집중해야 되는데 소금의 모든 것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 안 됩니다. 본문을 읽고 점핑을 하면 성경은 사라지고 소금만 가지고 설교를 하면 설교가 끝이 안 납니다. ‘소금은 물에 잘 녹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가서 티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국에다 소금을 넣어보십시오 소금이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풀어져서 스며듭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에게 접근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항상 유비가 나오면 유비가 의도했던 대로 생각을 해야지 설명이 되는 것이지 다른 방면으로 의도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머리로 계신데 모든 분여들을 유통하게 하시는데 이 역할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처음부터 기독론적일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론적이어야 합니다. 존오웬은 이것을 삼위일체까지 끌고 갑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가 성부, 성자, 성령이 있는데 이 교통이 성령이다 라고 하는 것은 새 이야기가 아니고 이미 존오웬에 의해서 설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이 바로 이 교통의 본질이고 그것이 또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구속의 과정 속에서 똑 같이 성부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라고 하는 창조의 모든 이 구도들이 삼위의 구도가 구속사에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섭리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성령 충만 해야 할 당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 질 때에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분여가 풍부해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충만하게 누릴 뿐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통해서 용서하고, 나누어주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서 이 모든 사람들이 구속을 통해서 똑 같이 우리의 모든 육적인 일들과 영적인 모든 것들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본문 읽음.... 신자와 신자의 연합...
그런 진리의 통일성이 사랑에 의해서 완성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콘코르디아’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치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일치라고 하는 것이 획일화된 일치가 아니라 마치 음악이 화음을 이루듯이 다른 것들이 그대로 인정되는 가운데 그 다른 것들이 아름다운 하모니, 연극에서 말하면 앙상블을 이루어서 개개의 모든 것들이 통일을 이루면서 일치를 드러내는 그런 군대 적이고 군국주의적인 통일이 아니라, 그런 하모니를 이루면서 사랑으로 그에게 있는 것 때문에 내가 없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있는 것에 이바지하고, 나의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의 없는 것 때문에 유익하게 빛나는 그런 종류의 하모니를 이루어서 그것들이 높낮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신 은혜와 자원들이 교통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힘이 세면 무거운 것을 들 때 누구를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들면 되니까...
만약에 내가 영어를 잘한다면 그것을 도움을 받기 위해서 누구를 찾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요리를 잘한다면 내가 하면 되지 누구를 찾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고 사람마다 각각 자연적으로든지 혹은 신령적으로든지 다른 은사들을 각기 주셔서 서로를 보완하고 의지하게 하심으로서, 교회 속에서 서로가 서로 다른 것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일치와 조화를 이루어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면서 각자에게 은혜를 주실 때 자기가 가진 좋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합창단 했던 경험을 보시면 혼자 아무리 잘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뭐냐면 소프라노 베이스 테너 베이스가 있으면 목표는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아주 큰 소리로 잘한다면 잘하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한 사람이 잘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소리만 난다면 합창에서는 선생님이 그 사람에게 소리를 낮추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모니를 전체적으로 잘 이루어서 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묻히고 우리 전체의 하모니가 드러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하모니를 이루게 되는데 그런 하모니적인 일치가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통일성입니다. 그 기준이 진리와 성령을 통해서 이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화두가 진리와 성령, 지식과 사랑, 은혜와 지식, 이런 것들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도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구속의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지식과 은혜의 형태로, 성령과 진리의 형태로 수없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드러남 자체가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나타남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읽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치하시는데 결국은 은혜로서 통치하십니다. 무슨 뜻이냐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지체들을 징계하실 때조차도 사실 그들을 파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치시고 일깨우셔서 당신의 은혜로 돌아가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실질적으로 어느 교회는 망하는 교회도 있잖습니까?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 전도하던 교회도 망한 교회가 많잖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보편적인 교회들을 보십시오. 결국은 때로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가 있고 때로는 생명을 거두실 때가 있어도 결국은 그것을 교회론 적으로,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도 당신의 은혜로서 당신의 교회를 부양하신다라고 봐야 됩니다. 사실은 은혜로서, 징계로서 나뉘어지지만 징계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구분이 될 뿐이지 완벽하게 나뉘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본문읽음...
이런 것들을 목회 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설명 하냐면 공동체 적으로 우리들이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그 때 나타나는 어떤 기도의 능력이나 열기 이런 것들은 개개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왔을 때 그런 기도의 은혜, 성결한 정신, 이런 것들의 총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공동체적으로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할 때 하나님이 그 교회에 참된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적인 갈망이 로이드 존슨의 정의에 의하면 부흥은 사실 집단적인 것입니다. 그 분은 그것을 성령세례로 풀고 그 다음에 성령세례를 집단적으로 받는 것을 부흥이라고 본 것입니다. 성령세례의 개념에 대해서는 각자 차이가 있겠지만 부흥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교회가 한 몸인 것처럼 공동체가 간절히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할 때 하나님이 그 몸 위에 충만한 성령을 부으셔서 그들에게 부흥을 주신 것입니다. 그 원리가 제일 처음에 나온 것이 오순절에 사도들과 제자들이 주님 앞에 모여서 기도할 때 ‘Single heart' 여러 사람인데 하나의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린 것입니다. 그 때에 그 몸 전체가 하나의 마음을 이루면서 주 앞에 간구할 때 주님이 그리스도의 한 몸인 그 교회에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는데 그것이 성령의 부으심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부어지는 거룩한 부흥입니다. 그런 부흥의 핵심은 사실 은사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의 영광, 아름다운 구속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적인 아름다움, 이런 것들이 지상에 부어지고 그것들이 정돈되고 그것들이 주님을 위한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켜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 뜻을 따라 살게 하는 놀라운 능력의 충만함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개개인이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진리를 통해서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쏟아 부을 때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충만하게 채우시는데 교회가 영적으로 그렇게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본문 읽음...
여기에서는 성화론에서 배운 것처럼 원리적인 연합은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항상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밑으로 내려가면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적인 관계 때문에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은 확고하고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관계를 맺으시고 그 관계 안에서 특별한 영적 은총을 누리게 하신 것이 그리스도를 교회 안에 항상 거하시게 하신 하나님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실제적인 연합인데 실제적인 연합은 교회의 사랑 안에서 연합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공동체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그 때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실제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것을 교회론 적으로 볼 때 실제적인 연합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개인의 신자 안에 실제적인 연합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통해서 연합을 느끼게 되고 본질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이런 실제적인 연합이 강화될수록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께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을 자신들이 정동 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담대함과 여유, 그 다음에 희생,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이런 것들을 예수 죽임을 짊어질 수 있는 그런 고백 같은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연합을 누릴 때 두 가지로 나타나게 되는데 첫째는 그리스도를 사랑함, 두 번째는 그리스도를 순종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읽음...
질문.
모두라고 하는 그 부분에 있어서 온전한 신앙고백을 통하여 교회 등장 그 중에서도 불신자가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회에 들어왔는데 온전한 신앙 고백 없이 회심의 증거도 없이 교회 공동체에 있는 그 영혼들까지 포함하는지?
- 토투스 크리스토스교리가 생겼을 때 교회의 문맥을 고려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 때에는 입으로 하는 완전한 고백이 없이는 교회의 회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세례를 받으려면 상당기간동안 신입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문맥을 고려해본다면 외형적으로라도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을 고백하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의 문맥에서는 적용을 달리합니다. 그런 고백을 하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달리 봐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세례를 받든지 말든지 놔두는 것은 교회가 매우 잘못하는 것입니다.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 분명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 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6개월이고 1년을 보면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게 하고, 만약에 교회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들에게 신앙의 엄중성을 진지하게 일깨워서 구원과 하나님의 백성 됨에 대한 의식이 없이 교회에 계속 출석하지 못하도록 복음을 도전을 할 때에 그 사람들이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재보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때까지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이 내게 있어서...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넓게는 선교 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토투스크리스투스의 교리 자체의 목적이 엄격하게 말하면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리 때문에 이미 교회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구획을 짓고 나누어서 너희들의 사랑을 제한하거나 차별하지 말아라 그것을 위해서 토투스크리스투스의 교리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교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교회의 구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미래의 지체들이라는 마음으로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