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마음의 치유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 하였더라.” (창25:28)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이삭이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요셉이 가로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야곱이 가로되 내게 맹세하라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 하니라.”(창47:29-31)
오늘 25장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오늘은 이 야곱을 한번 생각해 보면서 우리 신앙의 교훈들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배안에서 이미 있었던 일들로부터 시작을 해서 오늘 나중에 읽어드린 성경본문은 말하자면 이 야곱의 인생의 마지막 죽기직전에 나오는 기사입니다.
이삭은 40세에 결혼을 했는데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민하며 하나님 앞에 잉태하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이삭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 아내 리브가의 태를 여서서 잉태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쌍둥이가 배었습니다. 그래서 쌍둥이가 그 뱃속에 있는데 그런데 쌍둥이가 쌍둥이를 가진 사람들에게 배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아이가 때가 되면 놀잖아요. 안에서 그리고 주먹으로 뻥뻥 치고 발길로 뻥뻥 치고 머리로도 박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아이가 둘이 태안에 들었는데 속에서 서로 싸우는 거예요.
그래서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되어서 태속에서 벌써 서로 두 아이가 싸우나? 그러면서 이 이삭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다. 그러면서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것은 리브가에게만 충격이 아니라 이삭에게도 큰 충격이었죠.
두 국민이 어떻게 한 아버지 속에서 아이가 낳으면 쌍둥이가 어떤 쌍둥이든지 간에 아이가 낳으면 그게 한 국민이 되어야지 어떻게 두 국민이 되느냔 말이에요. 또 두 민족이 되는데 그 다음에 또 이 세상에서는 큰 자가 어린 자보다 큰데 여기서는 큰 자가 어린자보다 작고 어린 자가 큰 자보다 더 커서 오히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이런 예언이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리고 기한이 차니까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애가 붉고 갓옷 같고 그래서 에서라고 그랬고, 그다음에는 또 다른 아이가 쫒아 나오는데 그게 야곱이에요.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형보다 먼저 나오려고 그러다가 결국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그러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이제까지 이해하던 야곱을 좀 새로운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해야 되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인생에 있어서 이 야곱이 그 후에 살아온 모든 삶에 이 사건은 엄청난 영향을 주었단 말이에요. 배안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야곱은 어떤 의미에서 에서보다 훨씬 많은 가슴에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야 했던 사람이에요. 그렇게 상처를 많이 가지고 살아갔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받은 백성이면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들을 마음껏 누리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죠. 하나님이 결국은 이 도망가는(야곱이 결국은 형의 축복을 빼앗고 도망을 가잖아요.) 야곱에게 나타나시죠. 28장에서……. 그러면서 그야말로 정말 하나님이 필요한 상황이거든요.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잘 모르지만……. 그러면 하나님! 하나님! 내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나의 갈 길을 도우시고 그리고 나를 인도해주시옵소서. 나는 당신이 필요하옵나이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내세우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나의 가는 길에서 지키시고 그리고 내 양식을 주시고 나로 평안히 아비의 집에 돌아가게 해주시면 그러면 뭐도 하고……. 뭐도 하고……. 그러겠나이다. 마음의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을 줄 모르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도 받을 줄을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이 야곱이 그렇게 큰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자기가 언약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이면 ‘내가 하나님 이런 상황에 있는데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구해주시고 그리고 나를 인도해주시옵소서.’ 기도할 수 있는데 조건을 내거는 것이에요. 그것이 무엇이에요? 마음의 상처가 하도 많으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일방적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자유함이 이 속에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이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하는 것이죠.
우선 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런 상처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남이 모르는 이 고통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영향을 주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아주 변덕이 심하거나 혹은 아주 교회에서 말이나 아니면 또 그 행동이나 그런 것들을 통해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뒤집어 보면 그 속에는 그런 상처가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때는 한없이 헌신하다가 어떤 때는 갑자기 냉담하게 돌아서고 하는 이렇게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굴곡이 크고 그리고 변덕이 심한 사람들은 속에 가만히 뒤져보면 그 안에는 남이 알지 못하는 깊은 상처와 골이 있어요.
그러니까 속에는 그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계속 하고 있으니까 겉모양은 세련되어 가는 것이에요. 그렇죠? 점점 커서 권찰이 되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혹은 목사가 되고 신학을 해서 전도사가 되고 그러면서 점점점점 겉모습은 제법 헌신되고 그리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그래요.
그런데 결국은 뭐냐 하면 내면의 문제를 치유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신앙생활이 말하자면 그 깊이 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언제나 그 내면에 있는 문제들은 사단의 갈고리가 되어서 -강아지를 보면 끈을 묶어 놓잖아요? 아무리 끈을 길게 묶어 놓아도 또 끈을 길게 묶어놓으면 묶어놓을수록 강아지는 자유롭겠지요. 그렇지만 아무리 길게 묶어놓아도 그 길게 묶어놓았다는 사실 때문에 이 강아지가 자기가 그 줄에 매이지 않은 것처럼 자유롭게 살 수는 없어요. 어는 한 순간에는 어떤 사람이나 혹은 어떤 먹을 것이나 목표물이 있을 때 자기는 깜박 줄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막 달려간다고요. 달려가다가는 마지막에 이 줄에 탁 치이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깊이 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가 참 완전하게 하나님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내면의 무거운 문제들이 치유를 받아야 해요. 그래야지만 그 가슴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야지만 그 가슴에서 진정으로 부흥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을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하나씩 더듬어 가보겠습니다.
먼저 말이에요. 이 마음의 상처 이런 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에요. 벌써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에요. 무슨 뜻이에요? 이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뱃속에서는 신앙이 없으니까) 우선 그의 인생은 처음부터 버림받은 것의 연속된 생애였어요. 우선 무엇이에요? 자기는 그렇게 먼저 태어나고 싶었지만 그러나 신앙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리고 신앙의 측면이 아닌데서 말하자면 운명이 자기를 버렸어요. 그래서 맏이가 되지 못하게 한 것이죠. 속에서 그 형으로 태어날 에서와 싸우면서 결국은 그는 진 것이죠. 그 속에서 버림받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떼려고 막 약을 먹고, 옛날에는 뭐 풀 같은 것을 뜯어먹고 그러잖아요? 유산시키려고……. 그러다 태어난 아이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 깊은 심령 속에 거절 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부모가 나를 버렸다. 아이를 가졌는데 남편이 죽어버리든지 아니면 남편이 아내를 버렸다든지 할 때에 이 아이는 이미 뱃속에서부터 거절 감을 갖는 것이죠. 버렸다! 나를 버렸다! 그러면서 그것이 살아가면서 모든 삶의 표출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것이 자기의 인생 속에 마음과 생각 속에 아주 단단한 일부가 되어가지고 그 인생이 걸어가는 길마다 늘 쫓아다니면서 고통을 주는 것이에요.
야곱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어요. 뱃속에서부터 그는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그리고 신앙 밖에서 말하면 운명이 자기를 버렸다! 먼저 태어나고 싶고 맏이가 되고 싶은데 자기를 버렸다! 속에서 형이 자기를 버렸다! 태어나고 보니까 그러나 그 속에서 이 아이가 그렇게 비록 나중에 태어났지만 그러나 그가 형보다 더 축복된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았고 하는 것들을 이삭이나 리브가가 신앙적으로 제대로 가르쳐주지를 않았어요. 그것이 이제 이 가정에 커다란 비극의 씨앗이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태어나고 보니까 그 다음에는 두 번째로 아버지께 버림을 받는 것이에요. 무슨 뜻이에요? 분명히 리브가와 이삭은 두 민족이 복중에 있는데 민족이 나뉘고 어린 자가 큰 자보다 더 하나님의 선택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아버지 이삭은 큰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에서를 편애하고 사랑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에서를 좋아하고 어머니가 그 야곱을 좋아하게 된 것은 동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선, 후의 사건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버지가 에서를 너무나 편애하니까 그러니까 처진 아들을 어머니가 품에 감싸고도는 것이에요.
이 리브가도 이 야곱을 사랑한 것이 순수한 사랑이라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 때문이라든지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처진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라는 것이죠.
이삭이 이 에서를 사랑했어요. 사냥한 고기를 좋아함으로 사랑했다고 하는데 뭐 아버지가 고기를 못 먹어서 환장을 했나요. 고기를 좋아해서 아들을 사랑했게……. 이것은 성경의 표현이고 우선은 이삭과 에서의 관계가 어떤 관계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당시에서는 장자가 너무나 중요하니까 맏아들로 태어난 그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고 그 너무나 사랑한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했다라고 하는 그 관계를 오늘 성경본문에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태어나서 그 다음에는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가 하나님을 그렇게 믿지 못하고 그러잖아요? 머리를 많이 굴리고……. 그게 아버지가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에요.
무슨 얘기냐 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라는 개념이 이 아이에게는 들어오지 않는 것이에요. 왜? 그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신앙이 아직 어리고 영적으로 어리니까 잘 안 들어오고 아버지라는 개념은 늘 자신을 배신하고 따돌리고 그리고 형의 편만 들고 자기의 상처를 주던 그 아버지 밖에는 들어올 것이 없는 것이에요.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도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아버지에게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개념이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이에요. 그런 개념이 들어오기 어려운 것이에요. 그러니까 경건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라는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그러는데 아버지는 자기를 버린 것밖에 없고, 천대한 것 밖에 없고, 형을 사랑하고, 자기를 따돌리고……. 그리고 집안의 중요한 모든 문제는 자기들 둘이서 다 의논하고 그러면서 결국은 마지막까지도 그에게 축복하려고 하는 그러한 것들을 모두 보면서 이 야곱은 두 번째로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가 그 자기가 선택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뱃속에서부터도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도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자기의 선택과는 상관이 없이 그렇게 상처를 많이 받으면서 결국은 그것이 신앙의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신앙이 물론 모든 것을 다 해결하지요.
그러나 신앙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하지만 그러나 문제보다도 더 큰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야 해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제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변화되지 않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들이 이런 문제들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그리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하나님 앞에 드러나고 그리고 해결을 받고 그래서 그 하나님이 우리들을 치료하시고 고치시는 그러한 데로 우리들이 나아가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에요.
이 야곱이 이렇게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에요. 그 속에서 같이 살아가지만 그러나 그 아버지를 통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읽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두고두고 영향을 끼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아버지를 볼 때에 그 아버지가 늘 조건적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에요. 왜? 큰 아들이니까! 그다음에 어때요? 고기를 잡아오니까! 또 어때요? 아버지를 잘 공경하니까! 반대쪽은 또 어때요? 큰아들이 아니니까! 리브가가 감싸고도니까! 맏아들이 아니니까! 이런 개념들이 들어오는 것이에요.
그런 것들이 그대로 28장으로 넘어가서 어떻게 해요? ‘하나님 나를 이렇게 인도해주시옵소서! 그러시면 내가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되고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전을 짓겠사옵나이다.’ 한 번도 아버지께로부터 거저 오는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요. 그래서 보면 대부분 강한 사람들……. 혼자서 자기 할 일을 잘하는 강한 사람들…….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뒤에 자기 나름대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자기 혼자 잘 하는 대신 어느 부분에서는 그 깊고 은밀한 부분에서는 도저히 혼자서 어떻게 못하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런 것들을 철저하게 포장하고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데 사람에게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이해가 가요.
그러나 문제는 더 전진해서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 모든 것들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문제를 회피하려고 해요. 마치 사마리아여인을 찾아오신 예수님이 네 남편을 데려오라! 그러니까 뭐에요. 인생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시려고 부르시는 것이에요. 그때에 사람들로부터 그런 문제를 해결 받아 보거나 혹은 사람들로부터 신실하게 자기의 문제를 애정을 가지고 다가와서 해결해주는 경험들이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자기에게 오셔서 내가 그 문제를 드러내면 치유하고 고쳐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안 생기는 것이에요.
철야는 하고 금식도 하고 기도원에도 올라가고 교회봉사도 열심히 하는데 그것은 안 생기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겉으로는 점점 풍성한 것 같은데 속에서는 아주 깊고 숯처럼 새까맣게 타 그런 가슴을 부여안고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어때요? 그게 우리 인생의 가장 핵심부에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것이 자리 잡고 그 다음에는 모든 생각과 행동과 말과 그 모든 것에 다 영향을 끼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그런 사람일수록 더욱 더 신앙에 열심을 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외부적으로 드러난 자신의 삶이나 행동을 통해서 자기를 입증 받고 싶어 하는 것이에요. 야곱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어요. 이 야곱이 결국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일 수밖에 없었던 어떻게 보면 이 야곱이 그 장자권을 형으로부터 빼앗았으면 뭐 어마어마한 미래의 축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어떤 신앙적인 깊은 믿음보다는 그것보다는 그런 식으로 버림받으면서 살아온 것들을 보상받고 싶은 것이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형에게 가서 세상에 오늘로 말하자면 집에서 점심을 열심히 먹고 있는데 형이 와서 ‘야! 밥 좀 줘!’ 그러니까 형한테 하는 이야기가 ‘주민등록증 나 줘 그러면 밥 줄게’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것이에요. 왜 그래요? 그것이 아무런 효력을 못 갖다 준다고 해도 말하자면 순간적으로나마 그렇게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결국은 무엇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냐 하면 이렇게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계속해서 오래가는 것이에요. 그리고 신앙생활에 아주 깊이깊이 영향을 주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서 속으로 얼마나 그 아버지를 증오했던가를 알 수 있잖아요.
나는 그런 점에서 35장에서 결국은 끝까지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가나안까지만 와가지고 아버지한테로 가지 않고 그 가까운 곳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그래서 세겜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일으키고 결국은 그렇게 해서 창세기 34장에서 커다랗게 깨어지고 35장에서 부흥을 만나는 이런 일들도 결국은 어떻게 보면 말하자면 이런 아버지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아버지 만나보기를 사모하는 그런 열정 이런 것들이 있었다면 그런 것들이 무슨 문제겠어요. 같죠!
그러나 결국은 그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죠. 그런 속에서 이 야곱은 철저하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버림받음,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은 정말 불행한 인생이에요. 그렇게 해놓고 또 결국은 이제 어머니로부터는 타의에 의해서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에요. 왜? 이제 에서가 죽이려고 하니까 떠나보내는 것이죠. 그것은 말이 떠나보내는 것이지 사실은 도망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이번에는 타의에 의해서 어머니께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에요. 그리고 외삼촌의 집에 가니까 외삼촌은 또 철저하게 속여먹으면서 외삼촌으로부터도 또 버림을 받는 것이에요. 그렇죠? 외삼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라헬을 사랑하는데 레아에게 장가가게된 것을 통해서 더 큰 상처를 받는 것이죠. 결국은 그렇게 하면서 세월이 지나는 것이에요. 사람으로부터 받은 이러한 많은 상처들이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계속 끼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일들이 그러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지요.
쉽게 얘기해서 나는 우리 집에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참 좋았을 뻔했지요. 그렇죠? 이렇게 문제가 많고 장자를 편애하는 아버지 아들로 안 태어나는 것이 좋을 뻔했지요. 그리고 그런 형이 내게 없었으면 좋을 뻔했지요. 그런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뻔했지요. 그런 외삼촌이 내게 없었으면 좋았을 뻔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생각이라 이거에요. 왜 그래요? 이미 그것은 내가 선택을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이미 나라고 하는 존재가 삶이라고 하는 공간속으로 던져진 것이에요.
쉽게 얘기하면 신앙적인 입장에서 얘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런 문제가 많은 그러한 여건 속에서 태어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던진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나는 거예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또 신앙을 가져도 그 신앙이 온전히 역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인생을 원망하는 것이에요. 사람들이 원망하는 일들을 다 들어봐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돌이킬 수 있는 일들을 원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가서 바꿔놓으면 되니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에요. 나는 왜 하필이면 이 집안에서 태어났을까? 어떠하냔 말이에요? 왜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일까? 왜 우리 아버지는 빨리 죽었을까? 왜 우리 엄마는 나를 이렇게 길렀을까? 그런데 그것은 이미 자기의 선택을 떠난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에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든 침체의 원인중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쓸데없는 후회에요. 이것은 절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돌이켜 놓을 가능성이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경건하고 거룩하게 근심하는 것이 유익해요.
그러나 어때요?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쓸데없이 근심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되요.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게 되요? 그 자신이 살아온 그 모든 과거, 모든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왜? 그 모든 일들을 우리들의 선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것이다라고하는 그 느낌, 그 믿음, 그 생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철저하게 자기가 여태까지 살아오고 자기가 받은 그 모든 것들이 한이 되어서 쌓이는 것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이 많다고요. 한이 많아요. 그래서 말로 독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오늘 시편에서도 보니까 혀 밑에 독이 있다고 그래요. 말로 독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다 그 속에 한이 쌓여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결국은 그게 우리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안주면 되는데 우리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니까 문제지요. 그리고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과거에 대해서 철저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뭐가 떠오르냐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의심이 가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참된 구원이시다라고 하는 이런 확신에 불타서 신앙생활을 해도 될까 말까인데 그런 것이 없고 속에서 계속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회의가 생기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선을 베풀어 주셔도 그것을 하나님의 참다운 선이라고 믿지를 못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어때요? 그런 것들이 가슴속에서 자라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외면은 마치 잔뜩 병이 든 사람을 화장을 예쁘게 해놓은 것처럼 신앙생활이 그런 식으로 불균형이 되는 것이에요. 그런 사람보고 아무리 기뻐하고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그래도 속에서 제대로 기도가 되겠어요? 그러니까 어때요? 결국은 매일 우리들이 찬송을 하면서 ‘이 땅을 고치시옵서소, 누구를 고치시옵서서’ 그러는데 무엇보다도 자신이 먼저 치료를 받아야 해요. 자신이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잖아요.
그러면 좀 더 들어가 봅시다. 결국 야곱이 이와 같이 철저하게 사람들로부터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철저하게 버림을 받는 것이에요. 그리고 피해를 받는 것이에요. 그때 이 야곱은 결국은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꾀로 그 인생의 문제를 넘어보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넘어집니까? 넘어지지 않아요.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에요.
우리들도 이러한 마음의 상황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많이 있다기 보다도 대부분이에요. 이런 내면의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내면의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야곱이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아까 읽어드린 것과 같이 마지막에 죽을 때에 ‘너는 나에게 맹세하라 나를 이곳에 버려두지 말고 그리고 가나안 땅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에 가서 나를 묻는다고 약속해라’ 그렇게 요셉에게 맹세를 하게 하는 것이에요.
결국은 문제가 무엇이고 어떤 식으로 상처를 받고 살아오던 지간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가난한 사람은 그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손을 내미셔서 그리고 우리의 가장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고치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는 것이죠. 그것들을 숨기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지시고 지나가신 다음에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만지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아요. 그리고 오히려 그것이 그 상처가 변하여서 우리에게 있어서 말이죠. 우리의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보물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에요. 왜 그래요?
결국은 야곱이 이렇게 철저하게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그 사건을 다 경험하면서 처음에는 불신앙에서 말미암는 자신의 꾀와 자신의 방식과 자기의 지혜를 가지고 그 시련을 극복해 보려고 마지막까지 깊이 애를 썼지만 마지막에는 결국은 그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신실하시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뜨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참다운 치료는 참답게 우리가 고침을 받는 것, 우리가 참답게 고침을 받는 것은 우리가 수준 높은 메시지만 듣고 수준 높은 신앙생활을 꿈꾸는 것만 가지고는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힘과 이런 은혜들이 우리 안에 회복되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뛸 수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칼루이스와 존슨 얘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결국은 야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가서는 말이죠.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그리고 하나님만이 자기의 참된 유업이 되심을 모든 자손들 앞에 고백하고 그리고 그들을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이 장면을 통해서 그것을 통해서 이제는 이 사람이 이전에 야곱을 축복하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제는 그렇게 자식들에게 속임을 당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편견에 얽매여서 장자에게 축복해 주려고 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작은 아들에게 축복해 주게 되는 이런 우스운 일들을 당하지 아니하고 또렷한 정신으로 하나하나 자식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32장에서 길게 축복해 주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32장이 아니라 마지막 48장에서 아니 49장에서 그렇게 축복해주는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신앙의 위대함과 믿음의 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야곱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과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 말하자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에요. 똑같은 사람이, 비슷한 사람이 있었죠. 그게 누구에요? 바로 요셉이거든요. 그도 부모의 사랑을 받았지만 형들에게 버림을 받고 그다음에 애굽으로 끌려가서 보디발의 집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를 했지만 또 그곳에서 버림을 받고 그러면서 세월이 지나는데도 그에게는 말이에요 오히려 형들이 자기 앞에 나아와서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자기들에게 해를 끼칠까봐 두려워하는 형에게 오히려 뭐라고 해요? 울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을 인하여서 여러분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왜? 당신들은 나를 팔기위해서 나를 해치기 위해서 나에게 악을 행했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꿨사옵나이다.’
그렇게 똑같이 인간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한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극복해서 초극해 넘어설 수 있는데 한사람은 넘어서지 못하는 것, 결국은 무엇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가 부딪히고 있는 의문이나 문제를 능가하는 그러한 은혜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셔서 자기 영혼을 치료해주실 때 그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고 깨닫게 되니까 넓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넓은 마음! 어떻게? 작은 인간의 상처나 고통 때문에 사람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내 인생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어떤 부속으로 사용하고 계시는 커다란 섭리를 보게 되는 것이에요.
그 때에 인간의 고통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의 기계,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섭리가) 들리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오히려 그것을 인하여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게 되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눈을 떠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인생의 그 고통과 그런 상처와 버림받은 하나를 보지 말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어떻게 우리의 인생의 커다란 수레바퀴를 돌리시는가? 그것을 우리들이 볼 수 있어야 되요.
그 때에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것, 상처받은 것, 혹은 피할 수 없이 내가 이런 식으로 태어나게 된 것 등등 내 자신의 선택을 초월하는 그러한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송할 수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하고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이 일이 가능해 지는 것이에요.
이렇게 보다 커다란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그 섭리의 바다 속에서 여러분들이 자유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