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통한 은혜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4-5)
녹취자: 조은경
디모데후서가 쓰여진 것은 로마에서 2차 투옥을 당하고 순교하기 직전의 일이었습니다. 이때의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고 에베소 교회는 여러분 잘 알다시피 사도행전 19장에서 큰 부흥이 일어나면서 사도바울에 의해서 설립된 교회입니다. 성지순례에서 에베소를 가본 분은 알지만 로마시대에 아주 굉장히 번영한 도시였고, 그 당시에 거기 인구가 2만이 되었다고 하니까 그 당시에 2만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도시였습니다. 어마어마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도시 시설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아주 깜짝 놀랄 정도로 아주 도시계획이 잘 되어있고 굉장히 번영한 도시인 것이 유적지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켈수스의 유명한 도서관이 지금은 기둥만 남았지만 5만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하는 켈수스 도서관의 흔적이 있고 소동을 벌였던 큰 원형 극장을 비롯해서 길과 모든 것들이 당시의 번영을 말해줍니다.
도시는 언제나 세상의 정신으로 넘실대는 곳입니다. 이 에베소 교회가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 책망을 받았던 내용 기억하십니까?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 이 도시의 커다란 세상의 정신이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넘실대는 곳이 도시고 에베소에 교회가 있다고 하는 얘기는 에베소라는 도시의 정신과 하나님의 교회 두 말이 결합된 것입니다. 그런 도시의 정신은 출렁거리는 도시와 교회는 마주하여야 했고 굉장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 병약한 몸을 이끌고 디모데가 목회사역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감옥 속에 갇힌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죽음을 앞두고 너무나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간절히 보고 싶어 했는데 이런 유언과 같은 고백 속에서 우리는 디모데의 신앙이 어떤 신앙이었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 설교의 요점입니다.
성경에 보니까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함이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우선 디모데의 신앙은 눈물이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수많은 동역자들을 만났지만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신앙의 인격은 눈물이 흐르는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이 디모데의 신앙 인격이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열어보아도 우리는 디모데에게서 그렇게 어두운 선교지를 꿰뚫으며 지나가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하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디모데에게서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누리던 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탁월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런 게 거의 느껴지지 않는 연약한 육신의 고통을 받으며 힘겹게 목회를 하고 있는 이 디모데를 생각할 때마다 비록 그런 카리스마가 없지만 눈물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생각할 때에 디모데의 신앙의 특징이었고 인격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하고 모두 헤어지고 난 다음에 제가 순교야 하지 않겠지만 죽을 때가 되서 여러분들을 이렇게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제 마음속에 어떤 인상으로 남을까요? ‘아무개 전도사 먹는 걸 참 좋아하던 사람. 아무개 목사 피부가 참 팽팽하던 목사. 아무개 강도사 늘 개념 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협의도 안하고 독단으로 하던 사람’ 이렇게 남을 것인가, ‘아무개 강도사 늘 숙제도 안하던 사람’ 이런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감옥 속에서 순교의 순간을 맞으면서 디모데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때 디모데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그림은 그의 눈물이었습니다. 이 눈물이 단순히 힘들어서 흘리는 그런 눈물로 사도바울이 기억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눈물을 생각하여 보기를 원함은 하면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부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긍정적인 이야기들 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것이 믿음에 대한 이야기, 그 믿음이 외할머니 루이스, 엄마 유니게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목회자인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그림은 눈물이 있는 목회자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눈물이 있는 목회자,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맡겨놓으면 그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눈물로 목회하는 그런 사람들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예화)제가 아직 담임목회를 하지 않던 교수 시절이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무슨 이유인지 교수가 된 저를 찾아왔습니다. 몇 명이 같이 대화를 하고 밥도 같이 먹고 그랬는데 우연히 그 중에 한 목사님이 아주 열렬히 목회를 하던 분이었습니다. 신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교회를 개척을 해서 하던 분이었는데 자기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릴레이 기도를 700 몇 시간짜리를 짰다는데 한 사람이 두 시간씩 강대 아래에서 자리를 딱 지정해서 그 자리를 비우지 않고 기도를 계속 이어가기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거기에 할머니 한분이 앉으셨는데 두 시간이 끝나고 당신은 가야하는데 교대할 사람이 안온 겁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좀 더 기도하던지 아니면 그냥 가버릴 텐데 이 할머니가 몇 시간이 기다려도 안 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를 비우지 말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이 할머니가 거기서 오줌을 싸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깔깔거리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는 목회자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는... 그게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웃기는 겁니까. ‘안 오면 가서 화장실 갔다가 와서 오줌 누고 와서 다시 기도하면 되지 하나님이 강대에만 계시고 화장실엔 안계신가?’ 그런데 목회자의 마음속에는 그게 웃음거리가 안 되고 눈물이 흐르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네 눈물을 생각하여” 라고 한 것은 예전부터 디모데는 바울과 동역을 했습니다. 무슨 일을 맡겨주던지 이 사람 속에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사역을 감당해야하는 눈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에 대한 회개의 눈물, 진리를 새롭게 깨달아가고 그것을 기뻐하는 눈물, 이런 눈물이 바로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남은 디모데의 신앙 인격의 부침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 반대로도 생각해봅니다. 가끔 내가 가고나면 ‘김남준 목사 죽은 지 5년 되는 날입니다.’ 그때까지 5년 되도록 사람들이 모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몇 사람이라도 모여서 기억을 하고 추도예배를 드린다면 그때 나는 여러분들 마음속에 어떤 사람으로 남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눈물이 있는 신앙의 인격으로 남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이 사람이 비록 디모데를 생각할 때 큰 카리스마 이런 것들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이사람 속에는 언제나 신앙 인격의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거짓이 없는 순수한 믿음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훈을 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5절에서 “내가 교훈을 주는 데에 이 교훈의 목적은 정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란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이 곤경에 처한 디모데에게 편지를 주어서 교훈을 하는데 이 교훈을 받아서 디모데가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목회를 하길 바랬냐하면 정결한 마음을 갖고, 선한 양심을 갖고,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디모데에게 첫 번째 편지를 보낼 때에 기대하던 바가 디모데후서에서는 인정하는 것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이 디모데의 믿음의 특징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구나.” 하는 것은 어느 한 시점에서 발견한 잠시적인 특징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보면서 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믿음이 참 순수하고 거짓이 없는 믿음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해보고 싶을 것입니다. ‘거짓이 있는 믿음이 있나?’ 그리고 ‘거짓이 있는 믿음이라면 도대체 그 믿음은 뭘까?’ 그리고 ‘거짓과 믿음이 어떻게 일치를 할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믿음에 관한 성경의 용례를 보면 아주 좁은 뜻으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아주 좁은 뜻으로 쓰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좀 더 넓은 뜻으로 쓰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믿는 마음과 정신의 작용입니다. 예를 들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난 것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개념과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개념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으리라” 할 때 그 믿음도 이렇게 주님의 선물로서의 믿음과 내가 복음적 사실을 믿는 정신과 마음의 작용을 아울러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더 넓은 뜻으로 사용되면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또 하나가 있는데 삶 전체 속에서 그 믿음을 고백하며 사는 신행일치의 모든 삶을 포괄적으로 믿음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는 것은 바로 구원론적인 의미에서만의 믿음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삶의 믿음까지 모두 포괄하는 그런 용례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할 때에는 세 번째 용례로 사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믿음, 혹은 어떤 복음적 사실을 내가 신뢰하는 마음과 정신의 작용 뿐 아니라 삶 전체가 합치된 그런 삶의 고백으로서의 확장된 외현으로써의 삶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짓이 있는 믿음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도 받았고 내가 예수그리스도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확증되고 펼쳐지는 삶이 진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결국은 거짓이 있는 믿음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사실은 세 번째 의미로서의 믿음생활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봐야 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거짓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참이 아닌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에는 거짓이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이 주신 복음적 사실을 믿는데 있어서도 거짓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다른 것을 믿을 수는 있지만 거짓으로 믿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약에 그런 말이 성립한다면 그것은 안 믿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되는데 사람을 믿었다든지 아니면 성경을 누구의 어록을 믿었다든지 하는 것은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을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잘못된 믿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들이 선물로 받은 믿음, 마음과 정신의 자원이라는 그 믿음을 외현을 뻗쳐서 확장해서 삶으로 연장시키는데 있어서 거기에 어떤 속임이나 가식 그 다음에 오류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준이 되는 무엇이 있어야지만 거기에 끊임없이 합치될 때 이것이 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디모데를 생각할 때에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들어간 것은 거짓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선물로써의 믿음을 자신이 믿고 그것을 삶으로 확장시키고 연장시키는데 있어서 부족하고 병약한 몸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진실하려고 애썼던 그것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은 것입니다.
이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처럼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고 신약성경의 절반을 저술한 위대한 신학자이면 자기 비슷한 사람을 좋아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디모데 너는 사람은 착해 터졌는데 신학적인 아이디어가 부족해. 아니면 너는 열심은 있지만 지성적으로 나하고 대화의 상대가 안 돼. 그럴 것 같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자기가 아주 지성적이고 목회의 아주 탁월한 방법을 가졌고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아주 놀라운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을 묶어주는 것은 그런 인간적인 공통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서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연합시키고 묶는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화)마르틴 루터와 멜란히톤의 관계는 신학사에서도 논란이 많이 되는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르틴 루터와 멜란히톤 사이에 균열을 자꾸 도입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죽는 날까지 마르틴 루터는 멜란히톤을 깊이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멜란히톤이 ‘로치꼬미네스’라고 하는 신학총론을 완성했을 때 루터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 조그만 사람은 신학에 있어서조차 이미 나를 능가해버렸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체구가 아주 작았다고 합니다. 아주 작은 체구의 사람이지만 신학적으로는 나를 능가하는 거인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사실은 멜란히톤은 마르틴 루터가 가진 대부분의 특징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죽을 때 자기는 신학연구와 목회 모든 것을 해나갔지만 멜란히톤이 가장 가까운 제자이긴 했지만 그것을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겐하겐이라는 제자에게는 목회를 맡기고 신학교는 멜란히톤에게 맡깁니다. 부겐하겐이 바로 폰보라 하고 결혼할 때 주례 섰던 (주례를 자기 제자한테 부탁을 합니다) 사람입니다. 그래서 두개로 나눠지게 됩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우리가 서로 달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될 때에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역자로서 교통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이것이 자신의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각자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재능과 은사보다 우월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려서 이 디모데와 사도바울 속에 있는 외모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것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옥 속에서 죽어가면서 보고 싶다고 말을 하게 만들었던 이 영적인 연합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해를 갖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설교를 마무리를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이 디모데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눈물이 있는 신앙,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 흘리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해나가는 그런 신앙의 인격으로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남게 되었을까? 또 어떻게 디모데하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현저하게 거짓이 없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으로 남았을까? 이 병약하고 연약한 디모데에게 놀라운 이런 인격의 특징을 형성하게 만들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개의 요소를 생각하게 되는데 5절에 보면 첫 번째 이렇게 나옵니다.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이것으로 미뤄보아 사도바울은 그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와도 친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름까지 거론되는 것을 보면... 그런데 결국 이 믿음이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서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통해서 이 신앙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그렇게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배웠고 그리고 외조모 로이스에게서 배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평범한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혼자서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받는 것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이런 훌륭한 외할머니 이렇게 우리를 위해 늘 눈물이 있는 신앙을 가르쳐주던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르쳐주던 그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우리 대부분은 두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불신자였고 우리 외할머니는 하나님을 모르고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목회사역이라고 하는 것, 교회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가정을 통해서 이렇게 전수되어야할 이 신앙의 비밀들을 사람들에게 전수해주기 위한 또 다른 영적인 가정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어머니와 같은 우리 교회의 목회사역을 통해서 이런 눈물이 있는 신앙, 거짓이 없는 믿음을 사람을 통해 배워나가게 하는 것이 우리의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 요소는 3장을 한번 보십시오. 디모데후서 3장을 보면 15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이 참된 기준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거짓을 미워하고 거짓이 없는 순수한 신앙을 갖고자 애를 썼고, 또 성경을 알았기 때문에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눈물이 있는 목회사역, 눈물이 있는 경건생활을 함으로써 눈물이 바로 이 디모데의 신앙의 인격의 특징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끊임없이 증진시키는 아주 놀라운 신앙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성경이 없이는 성경을 마음깊이 받아들이고 그 진리의 자신을 비추어보며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과 오류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고 그리고 참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함이니라”고 할 때 우리는 흔히 15절과 17절을 대조하면서 15절은 순수하게 구원과 관련된 이야기로 16절과 17절은 성화에 관한 이야기라고 대조시키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이 믿음이 없고 오류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어서 예수님 믿어 구원받게 하고 성경은 그것을 잘 듣고 깨달으려는 사람들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데 사용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람의 인격과 삶을 온전하게 한다는 기본적인 이야기는 우리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골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믿음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구원을 받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성경의 모든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죽는 날까지 필요하고 그래서 내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 정확하게 말하면 지해. 알고 깨달으려고 하는 것은 믿기 위한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은 알고 깨닫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믿음과 지해사이에 일치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구원 얻는 데에만 예수그리스도를 신앙으로 고백하는 데에만 한번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하늘에 속한 초자연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고 내가 지력이 약해서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부분조차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신뢰 속에서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믿어라 하는 것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믿음은 일생동안 지속되어야할 신자의 또 다른 지성적인 활동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깊이 사랑하고 잘 알면 그러면 믿음이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풍성한 삶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도바울이 옥 속에서 디모데를 생각하며 눈물이 있는 신앙 거짓이 없는 믿음은 결국은 그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해 어려서부터 배우게 된 성경을 통해서 물려받은 신앙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요즘 신앙생활이 메말라있고 눈물이 잊혀졌습니까? 성경으로 돌아가십시오.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순종하려고 애쓰기 바랍니다. 설교를 듣고 한편의 설교에 감격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그 설교가 우리를 성경 어디로 인도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설교를 사랑하지 말고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렇게 성경말씀을 사랑해서 여러분도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