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설교 복음제시 방법과 전략
녹취자: 백지영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정체성이 오늘날은 매우 혼란스러워지고 있는데, 제기 볼 때 청교도들과 개혁신학자들의 사상을 종합해서 목사의 정체성을 설명한다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다." 이게 목회자의 정체성입니다. 그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렇게 죽어갔던 이유도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었고, 사도들이 핍박을 받아서 순교한 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목회자로서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살지만 그것은 급한 일이기는 하지만 모두 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일은 아니고, 가장 본질적인 일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위탁자로서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그렇게 정리를 하고 나면, 목사가 누구여야 하는가에 대한 정체성이 아주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는 교육을 통해서도 그 일을 할 수도 있고 상담을 통해서도 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나눠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끼리 있을 때에는 말씀을 차분차분히 교육하십니다. 문제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상담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모두 다 중심은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항상 하나님이 ‘케리그마’, 공중(公衆)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그 세 가지 사역 중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 사역하신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에는 공중적 선포가 있었고 가르침과 상담이 병행되면서 이런 일들을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목회자도 교인들을 집단을 모아 놓고 잘 가르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만나서 적절하게 상담을 해서 삶의 지혜를 갖도록 만들어야 주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회자의 교육학적인 활동들이 설교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때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제가 다음에 준비하고 있는 책이 아마 총회 출판부에서 나오리라고 그렇게 알고 있는데, 성수주일에 관한 책입니다. 그건 작년에 제가 신학부에서 발표한 논문을 확장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어떻게 지켜야 되겠는가를 아무리 많이 법을 만들고 규정을 만들어도 주일이 정말 다른 날과는 구별되는 날이라고 하는 것들을 장엄한 영적인 부흥 속에서 사람들에게 느껴지지 않으면 주일이 다른 날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규정을 만든다고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을 안 지키는 사람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교회 지하의 감옥에 가둘 것입니까? 아니면 벌금을 매길 겁니까? 유치장에 보낼 겁니까? 아니면 당회장실에 놓고 고문을 할 것입니까? 제약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일 날 예배 빠지는 사람들을 1920년대의 한국교회처럼 치리할 것입니까? 그때 치리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제도에 관한 것도 매우 중요하고 연구해야 되겠지만, 실질적으로 예배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주님을 만나는 날이 되게끔 만들어서 그래서 그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마음을 갖게 만들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놓고 볼 때 설교의 중요성은 매우 강조되고, 목회자가 일평생 설교할 때 그 설교는 두 가지 사명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됩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디모데서 3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 인간에게 주신 목적을 계승하는 것이 목회사역이라고 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성경을 주신 목적이 불신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효용을 계승하고 있는 목회사역도 역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예수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온전케 하려 하려 함이라", 이것은 그의 인격과 성품, 삶의 행동들이 온전해 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든 죄의 부패성으로부터 본성을 거룩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목회사역의 중요한 두 직무이고, 이것이 하나는 전도설교로 나타나고 하나는 성화설교로 나타납니다. 물론 이 둘은 두부를 칼로 자르는 것처럼 완벽하게 나눠진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강조점이 전도에 있느냐 아니면 전도가 아닌 성화에 있느냐 하는 것은 구분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고전적인 설교학에서 씨 에치 다드(C. H. Dodd)같은 사람이 이야기했던 ‘디다케’(Didache)냐 ‘케리그마’(Kerygma)냐 하는 문제, ‘케리그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인 메시지라면 ‘디다케’는 그 복음적 메시지에 기초해서 구축되는 성도다운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이 두 가지 설교에 모두 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설교를 하다보면 정말 어려운 것이 전도설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이 지금 저처럼 여기 서서 설교한다고 할 때 여기 모인 사람이 모두 교회도 안 다녀본 불신자라고 한다면 그 설교에 대해서 느끼는 중압감은 수요예배 시간에 성도들에게 서 있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중압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설교의 유형은 크게 유인(誘引)형 설교가 있습니다. 학문적인 분류가 아니라 제 경험상 분류인데,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을 예수 믿게 꼬이는 것입니다. 유인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수를 믿었더니 부자가 됐다더라 등등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일방 선포형이 있습니다. 설교가 선포와 설득으로 이어지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끝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설교는 복음적인 설교입니다. 구원 메시지에 있어서 복음이 중심이 되어도 그들이 살아가는 삶과 접촉을 이루고 그 접촉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설교자 속에 기독교 사상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있어서 어떤 신학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설교함으로 그 사상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에게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기독교의 위대한 인물이 있는데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분입니다. 4세기에서 5세기를 살았던 이 위대한 교부 없이는 사실 우리가 기독교를 말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렇게 오랜 세기동안 영향을 끼쳤던 인물입니다. 이 분이 자신의 책속에서 전도에 대해서 정의를 했습니다. "전도란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던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도는 어떤 제품을 팔 때에 피알(PR)에 넘어가서 제품을 구입한다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복음적인 전도설교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그것도 전도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식의 유인형 메시지들은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종교를 믿었을 때 확고하게 복을 받는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예수를 믿으면 항상 우리에게 달콤한 복이 오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의 양심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상당 부분을 속이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서 따르는 믿음의 길을 낙관적이고 항상 즐거운 것이라고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길을 고난과 죽음, 핍박과 미움 이런 것들로 연결시킵니다. 그러면 이런 성경의 회피할 수 없는 도드라진 메시지를 내버려 두고, 예수를 믿어서 성공하고 이 세상에서도 잘 된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설명을 하는 것이 과연 성경을 떠나서 우리의 양심상 과연 그것이 공정한 메시지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교구에서 아주 유명하신 어른입니다. "아무개 권사님이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그 자식이 첫째는 예일에, 둘째는 하버드에, 셋째 프린스턴에 들어갔습니다." 마음속에서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그 권사님보다 더 신실한데 대학 못 들어간 집안도 있습니다. 나도 열심히 예수 믿었는데 우리 아들 예일에 못 갔습니다. 한국에 있습니다. 심정적으로 그 권사님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도 "아무개 권사가 예수를 잘 믿으니까 하나님이 자손들도 복을 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내 쏟아놓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공식화될 수는 없고. 그러면 여러분 중에는 첫째 아들이 하버드 간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여러분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까?
이런 이야기들이 60년대 70년대에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현대인들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짜증이 납니다. "이 상식 이하의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설교를 하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제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넘어갑니다. 여전히 사회에 소외되고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에 모인, 혹은 그런 많은 사람들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예수 믿는 분들은 아니었지만 제가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에 업혀 다녔습니다. 가족들에 의해서. 그리고 꾸준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제 나이 열다섯, 우리나라 나이로 열다섯이고 만으로 따지면 열네 살 2개월쯤 되었을 때 일이었습니다. 주일날이었습니다.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사는 게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죽는 것은 그 어린 나이에도 하나도 안 무서웠습니다. 사는 게 무서운 것입니다. 왜 무서우냐? 내가 인간으로 살아야 된다는 게.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하고 풀포기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사는 게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그 무서움의 근원이 뭔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 인생에 나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엎드려서 질문한 게 뭐냐 하면,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은 정말 존재하나? 세계는 나와 문제가 있는가? 죽음 후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주일학교도 다녔지만 선생님들이 가르쳐주고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을 귀기울여보기도 했지만, 나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아무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아무 고민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게 무슨 득도의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고민이 없는 게 아니라, 나 같은 그런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별로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한 사람도 그렇게 방황하고 있는 나한테 다가와서, "남준아, 너 하나님을 왜 믿니? 하나님이 이 세계를 왜 창조하셨는지 아니? 그리고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니?" 물어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끔 질문을 하면 어린마음에 저 선생님, 저 전도사님도 정리가 안 된 것 같았습니다. 왜 예수를 믿는지를 나에게 설득시키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논에 엎드려서 그 주일 날 2월이었습니다. 찬바람이 막 부는데 한없이 울었습니다. 목 놓아서 울었습니다. 집이 가난하고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물론 그때 가난하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우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 아이가 두 손으로 눈물을 씻고 일어섰을 때 결심했습니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기로. 교회에서 잘못해서 그런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기로 했습니다. 제가 여러 사람 교회에서 끌어냈습니다. 못 다니도록. 나하고 세 시간만 이야기하면 전부 다 신앙을 버릴 마음을 갖게끔 만들었습니다. 엄청나게 책을 읽었거든요. 그 당시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예수 한번 믿어보세요. 참 좋아요." 심지어는 "우리 교회 와 보세요. 우리 교회 굉장히 좋아요." 그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아니 전도란 게 자기네 교회 나와야 되는 것입니까? 불교는 귀의(歸依)한다고 표현을 써도 기독교에 귀의한다는 말은 잘 안 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삶 전체를 총괄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상으로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인생관, 세계관을 전수해 주는 것이 전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말의 설복에 의해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도 균형을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서울역에서의 일인데, 버스 타고 가는 사람에게 스피커폰을 들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그것은 옛날에 그런 방식의 전도를 통해서 초대교회 시대 때에 하나님이 사용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 자체가 영원무궁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국의 교회 역사를 보면 어떤 사람이 밭을 캐다가 나무뿌리를 발견합니다. 이놈의 것 때문에 농사를 질수가 없고 땅을 망치는 것입니다. 도끼를 들고 그것을 내리치는 순간에 '확'하는 각성이 일어납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마다 뿌리가 도끼에 찍히리라." 그 자리에 벌벌 떨면서 도끼를 던지고 회개하기 시작하면서 그 동네 부흥이 시작됩니다. 그럼 우리 모두 회심하려면 도끼 들고 나무 찍으러 가야 되겠습니까? 또 실제로 그대로 했다고 하더라도 그 중의 몇 사람이나 그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식과 교양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미국 대사가 위문 공연한다고 가서 찬양집회하고 꽹과리 치는 그런 기독교의 수준을 가지고 우리들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너무너무 수치하고 창피합니다. 그런 것들이 교양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기독교가 아주 몰상식하고 그리고 하층민들이 믿는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지성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미국에서 1960년대까지 칼빈주의자라고 하면 '저는 최고의 지성인입니다.'라는 말과 동일했습니다.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결국 인간의 사상이나 철학들이 가르쳐주는 답들은 반짝이는 빛이 있지만, 그것은 일리(一理)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복음의 진리는 그 모든 사상가들이 찾아내지 못했던, 말하자면 인생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주는 웅장한 체계입니다. 그래서 저는 플라톤을 공부하면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게 자랑스러웠고, 어거스틴을 공부하면서는 기독교인인 것이 자랑스러웠고, 루터와 칼빈을 공부하면서는 가톨릭 교인이 아니고 개신교도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 자긍심들을 가지고 인생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큰 사상이 그 안에 담겨있어서, 사람들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사상이 정말 우리의 인생을 의탁할만하고, 이 사회에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해 줄만하고, 그리고 국가와 사회와 모든 것들이 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라간다면 참 이상적인 사회가 되겠다고 하는 그러한 사상적인 웅장한 구도를 보여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책을 읽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유인형 설교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조금 설교하면 일방선포형의 설교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축구선수가 아주 현란한 드리블로 일곱 여덟 명을 제키면서 자기 골대부터 남의 골대까지 가는데 슛은 절대 못 쏜다면 그 축구선수해서 뭐하겠습니까? 무슨 서커스입니까? 골을 넣고 이겨야지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지로 자기가 그것을 할 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다." 그리고 외치고 지나갔는데, 듣는 모든 사람에게 공감이 안 돼, 요즘 젊은 애들 말로 '헐'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도설교에 적합한 형태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이해를 가지고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뭔가 브릿지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 기독교 신앙이 예수 믿는 사람들만 위한 것인 줄 알았더니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따라야 할 어떤 모본, 그리고 우리 인생에서 도저히 종교를 배격하고는 풀 수 없는 난제들에 대한 해답을 기독교가 가지고 있구나." 그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끊임없이 거룩한 정신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르네상스 시대 때 사람들의 생각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이미 12세기부터 시작이 되어오다가 이것들이 누적되면서 폭발하듯이 14세기에 르네상스가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아주 뚜렷한 관점이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중세교회가 인간에 대해서 가르쳐 온 것은 하나님이 최고이고 그리고 인간은 아주 타락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들이라서 하나님이 자신의 대리자로 교회를 주셨는데, 인간은 말하자면 그 교회의 부속품밖에 안 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핍박하고, 고문하고, 사상을 탄압하고, 그 종교재판과 그 끔찍한 중세의 박해 속에서 인간존엄성에 대한 어떤 이해를 찾을 수가 있습니까?
많은 지성인들이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일까?" 왜냐하면 모든 가르침이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왔기 때문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나오면서 그 중세를 건너 띠어서 기독교의 원래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속사도와 그리고 교부들의 책들을 읽기 시작합니다. 전혀 다른 세상과 지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을 그렇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제가 지난해에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Gnosco Me In Aeternitate)라는 이름으로 책을 냈습니다. 제가 최소 한 10년간의 연구의 집적들이 쌓여서 나온 책입니다. 그 책에서도 상세히 밝혔지만 어거스틴에게서 발견하는 인간은 중세교회가 그리고 있는 교회의 부속품 같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말 존귀한 형상을 가진, 그 존엄성을 가진 아름다운 인간이라는 것을 그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르네상스사상과 결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인간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인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을 향해 항상 죽을 때까지 온전해져 가야 하는 존재이고, 다시 말해서 영혼이 정화되어야 하는 존재이고,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의 의미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있음으로 이 세계가 티끌만큼이라도 아름다워지고 이 모든 백성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비전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 자체를 자기의 만족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대신(對神)적인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웃들과의 관계의 망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상이 바로 조선시대 때에 있었던 유교사상입니다. 그 사람들의 이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이었습니다. 혹은 '수기안인'(修己安人)의 이상입니다. 수기치인이라는 것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도(道)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며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라는 것이 수신(修身) 혹은 수기(修己)입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갈고 닦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고. 그래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치인(治人),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권력자가 큰 권한을 가지고 윽박지르면서 자기 이익을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식의 치(治)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본래 자기가 있어야 할 하늘의 질서의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자꾸 이탈하기 때문에 인간이 불행해 지는 것이니,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진리를 보여주어서 혹은 필요하면 정치적인 힘을 이용해서라도 사회 각 구성원들을 자기 자리에 돌아가게 하는 치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수기치인이라고도 하지만 수기안인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니까 모든 선비들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 하나를 보면 이게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통해서 이 사물의 본질을 보고 그것을 사색을 통해서 그 사물의 의미를 발견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자신의 삶과 이웃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물이 흘러갑니다. 이것이 물이구나, 학문을 통해서 배웁니다. 그런데 물(水)은 물길을 따라 흐르는구나(去), 도덕적인 원리를 터득합니다. 이것을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 법(法)이구나. 이런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에서 있었던 이상(Idea), 피지카(Physica) 어떤 자연학, 그 다음에 로기카(Logica) 논리학, 마지막에 에티카(Ethica)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모두 아우른 것이 조선시대의 지적인 전통입니다. 그런 똑같은 이상을 사실 기독교에서 추구해 왔던 이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방식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라, 그런데 예수님이 논문을 갖다가 들이대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아라. 들에 핀 백합을 보아라." 새삼스러울 게 없습니다. 늘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 자신이 전도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살아가면서 진리의 말씀을 학문적으로 탐구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그것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배우는 학문들을 이해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구조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거기서 발견한 진리를 자신의 삶에 깊이 적용하고 그래서 그 속에서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그리고 그것을 자신 속에 체화시켜서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육화시켜서 그것을 쏟아내는 설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오류와 불결,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자기의 죄 이런 것들에 모두 에워 쌓였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따라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았는가, 그리고 찾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행복이 이 세상 사람들이 돈이나 명예, 자식들이 좋은 대학가서 누릴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행복일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을 목회자가 존재 자체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설교는 그렇게 보여주는 것들의 일부가 언어의 형태로 쏟아져 나온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어느 월간잡지사에서 저에게 인터뷰를 요청해 왔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잡지가 아니라 불신자가 하는 잡지사였습니다. 불신자가 하는 잡지사가 왜 나를 인터뷰하려고 하느냐고 했더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다 하다가 종교순서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교도 했고 불교도 했기 때문에 이번에 개신교 순서인데 목사님을 우리가 편집회의에서 선정했다고, 그래서 오라고 했습니다. 앉아서 한 한 시간 20분 동안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했는지, 우리 인간이 무엇인지,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는지,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과 이 세계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질문하는 대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수첩을 덮으면서 기자가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신부님 그리고 개신교 목사님들도 많이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런데요."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습니다." "그럼 뭐 같아요?" "스님 같으십니다." 그때의 인상을 제가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불신자의 눈에 스님은 철학자처럼 보였고 개신교 목사는 비즈니스맨처럼 보인 것입니다. 사업가처럼 보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사역을 하기 위해서 마음을 쏟고 모든 것을 잘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어떤 비즈니스적인 지혜가 우리 목회에 있어서 필요하다는 것도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사람들에게 비춰야 될 것은 진리의 사람, 지혜의 사람, 그리고 우리 모든 사람이 저 사람을 의지하고 저 사람 말을 따르면 행복해 질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뭔가 우리를 영원한 세계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아우라를 풍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 부족을 알고 노력을 하고 그렇게 하면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두 시간쯤 더해야 하는데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가서 차분하게 읽어보시고, 그리고 12월에 나올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라는 1400페이지짜리 책, 첫 번째 권이 한 700페이지로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한 800페이지가 내년 6월쯤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차분히 사서 읽으시면서 나머지 것들을 보충하시면 되겠습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 좋은 책을 선물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 책 중에서 이 책을 읽어야 된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답변) 정말 좋은 질문하셨습니다. 이 책은 책이 한권처럼 보이지만 책 속에 책이 또 한 권 들었습니다. 문제집입니다. 그 뒤편에는 mp3까지 들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책인데, 제가 어거스틴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고 있던 시절에 교회의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하면서 저를 인내하게 만들어주었던 진리들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제가 기도원에서 삼일 만에 썼습니다. 하루에 350매씩. 이 책은 제가 어거스틴에 관한 박사논문 여덟 권을 독파하고 쓴 책입니다. 제가 아직 여기다 각주를 다 달지 않았지만 결코 가벼운 내용은 아닙니다. 이 책을 여러분이 정독하시기를 바랍니다. 요령을 가르쳐드리자면 mp3 1번을 들으시고 1과를 읽으시고, 2번을 듣고 2과를 읽으시고, 이렇게 하면 좋습니다. 아니면 mp3만 여섯 개를 들은 다음에 책을 다시 읽으면 어렵지 않고 책이 소화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아마 이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의 글재주가 아니라 성령님의 도움으로. 그렇게 확신합니다. 여러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놓았기 때문에 바꿔놓으리라고 그렇게 봅니다. 설명을 하라고 하면 제가 1시간에 걸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단 드셔보십시오.
(질문) 목사님은 전도설교를 어떻게 하시는지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답변) 저는 전도설교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선 전도설교를 할 때 무조건 쉽게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느끼지 마십시오. 그런 강박관렴을 너무 심각하게 느끼면 그 설교가 아주 가벼운 유인형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왜 이 핍박 속에서도 예수는 믿느냐고 어떤 사람이 물을 때 언제든지 대답할 수 있도록 그 대답을 준비하면서 사는 변증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설교를 할 때에 여러분이 확실한 것 하나는 사람들이 설교를 들었을 때 "예수를 믿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유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정한 진리에 입각해야 하고, 그래서 한 사람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나,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세상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하면서 좀 더 돈도 많이 모으고 남을 눌러서라도 자기가 행복을 찾아보려고 했던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의 틀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그런 메시지가 제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맨 뒤 부록에 제가 실지로 교회에서 행했던 전도설교를 뒤에 실었습니다. 분량이 꽤 됩니다. 한번 읽으시면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만약에 설교하라고 한다면 이런 내용들을 어떤 방식으로 설교하실 지를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기도 많이 하고 원고를 잘 준비한 다음에 할 때는 완전히 숙달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쏟아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칼빈이 이야기하는 설교에 있어서 친밀성, familiarity입니다. 가족이 된 것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질문) 전도설교에 있어서 다루어야 할 모든 인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들일까요?
(답변) 근거입니다. "근거가 무엇인가?"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책에다 썼습니다. 어떤 권사님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저 세계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천사다 마귀다 이런 이야기는 안 나오고 불신자가 쓴 것 같습니다. 저승사자가 등장을 합니다. 권사님이 죽었는데 왜 저승사자가 등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묻습니다. "너 누구냐?" "저는 아무 교회의 권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자가 하는 이야기가, "내가 언제 너한테 종교를 물었냐? 너 누구냐?" "저는 한 남편의 아내이고 세 아이의 엄마입니다." "내가 가족관계를 물었느냐? 네가 누구냐?"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살고 있는 강남의 54세의 주부였습니다." "내가 너의 소속국가를 물었느냐? 네가 어디 살았느냐고 물은 게 아니고 나이를 물은 게 아니다. 네가 누군지를 말해봐라." 그러니까 나중에 이 권사님이 완전히 분열증이 일어나서, "하나님 내가 누군지 좀 가르쳐주세요." 그런 것으로 그 스토리가 끝납니다.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미친 듯이 이 세상의 문화에 탐닉해서 살기 때문에 사실은 고민을 안 합니다. 그러나 기반을 공격하면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 불완전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잘 던지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신자들의 마음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의 마음도 이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이런 '사도'나 '명랑'이나 이런 영화들이 뜨고 있는가?" "'아바타'는 왜 그렇게 공전의 대 히트작이 되었고, jtbc의 '밀회'라는 드라마는 명백한 불륜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을 울리고, 그 안에 있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오늘날도 친숙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을 목회자들이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깊이 고민하면서, 세속문화를 멀리하지 말고 세속 문화가 어떠한지 자기가 가서 봐야 합니다. 술집에 드나들고 바(bar)에 드나들어서 거기서 타락하라는 이야기라 아닙니다. 영화도 가서 보고, 볼 때 '아, 재미있구나.' 그리고 입맛을 다시면서 보면 목회자가 아닙니다. 팔짱을 끼고 '무슨 이야기를 하나?', 그리고 그것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코드들이 '밀회'같은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설명해야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수많은 접촉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던지고, 그 세상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논리적인 근거와 가치의 기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논파할 수 있는, 자기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웅장하고 큰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구도를 가지고 그것을 공격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러면서 아우라를 느끼는 것입니다. 더 하고 싶은데 주최 측에서 계속 사인을 보냅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