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녹취자: 김명진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39절부터 9장 3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지난주부터 복음전도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평소에 늘 사모님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여보, 내가 죽거든 다른 모든 일을 하기 전에 여기에 봉투가 있는데 이것을 뜯은 후에 장례를 치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살아생전에는 봉투를 전혀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 죽는 것 아닙니까? 때가 되어 목사님을 하나님이 불러가셨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사모님이 생각해 보니까 옛날에 목사님이 내가 죽거든 먼저 봉투부터 뜯어보라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서재에 들어가서 서랍을 열고 봉투를 뜯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장례식 식순과 장례를 집전할 사람의 이름과 기도할 사람의 이름이 실려 있고 성경 본문이 실려 있었는데 그 성경본문이 바로 로마서 8장이었습니다.
로마서 8장은 위대한 승리의 장이라고 불립니다.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능가하고 초월하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다 말한 다음,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다 말한 다음에,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 택하신 자들을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고 결국은 자기의 힘으로 이루려고 해도 해도 이룰 수 없는 그 구원을 하나님의 의로 이루시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합당한 사람으로 영화롭게 하셔서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을 말하면서 그는 말합니다. 자신을 향하여 죄인이라고 송사하는 율법과 양심과 그 모든 송사를 향해서 하나님이 의롭다하신 자를 누가 감히 송사하겠느냐, 그러면서 그 유명한 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가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것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자가 없다.” 이 고백을 한 다음에 사도는 갑자기 감격에 차서 외치면서 한없는 환희 가운데 승리를 외치면서 노래를 하다가 갑자기 톤을 바꾸어 깊은 시름에 잠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9장의 장면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니” 사도의 마음속에 성령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도 자신이 생각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께서 사도의 마음속에 오셔서 이 사도로 하여금 지울 수 없게끔 생각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어떤 신적인 강제력으로 사도의 마음속에서 그 무엇인가를 자꾸 생각나게 해줍니다. 그런데 그것은 잊혀 지지 않고 계속해서 성령이 내안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령이 무엇인가를 증거 할 때에 사도의 마음은 끊임없이 고통하고 큰 근심 가운데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성령이 사도의 마음속에 무엇을 증거 했기에 사도의 마음속에서 그치지 않는 고통과 큰 근심과 가슴을 에는 것 같은 아픔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갑자기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환희에 넘치는 놀라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승리를 이야기 하고 같은 인격 안에서 어떻게 놀라운 승리의 기쁨과 가슴을 에는 듯한 고통이 공존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가슴을 에는 것 같은 고통과 온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며 외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그 감격스러운 기쁨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것은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 밖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는 결코 기쁨이 있을 수 없고 기쁨이 있는 곳에는 고통이 머물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잔이 가득차면 물이 가득차고 쏟아내고 나면 잔이 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의 잔이 다 쏟아지고 나면 그 안에 기쁨이 들어갑니다. 기쁨이 쏟아지고 나면 쏟아지는 것과 같은 속도로 고통이 들어갑니다. 이것이 세상에서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이 말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큰 감격을 누리는 인격 속에 큰 고통이 공존합니다. 큰 고통을 느끼는 인격 안에 큰 기쁨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회상할 과거가 있는 사람끼리 과거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가장 충만하게 기뻐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가장 눈물을 많이 흘렸던 때입니다. 주의 하십시오. 눈물을 많이 흘렸던 때가 은혜가 충만한 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먼저 충만했기 때문에 그 충만한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누리고, 예수의 넓은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 때에 사실은 그 때에 가장 눈물이 많았습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생각해 봅시다. 그럼 그 때 왜 울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고 예수의 넓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 때에 흘리는 눈물과 이런 은혜가 없을 때에 흘리는 눈물은, 눈물은 같아도 눈물의 의미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놀라운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했을 때 우리는 가장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은, 그 고통이 있었는데도 늘 기도할 때는 고통스럽지만 기도하고 눈물을 닦고 나면 그 고통이 사라지고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우리 안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팔복가운데 “애통하는 자여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참된 애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나면 사람들 마음속에 큰 슬픔이 찾아옵니다. 그 슬픔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도도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있는 이런 순서를 따라서 슬픔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런 슬픔이 전에 사도에게는 없었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사람은 이마가 튀어 나오고, 배가 튀어 나오고, 머리가 벗어지고, 키는 짤막하고, 목은 있을까 말까하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아주 추남입니다. 그리고 아주 차가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고 나니까 정서가 풍부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고 나면 목석과 같은 사람이 어린아이와 같이 정서가 변합니다. 정서가 메마른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정서만 변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변했기 때문에 그 변화된 심령이 인격에 영향을 미치고 그 하나님과의 사귐 때문에 정서의 세계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사도는 똑같이 말합니다. 큰 고통을 느끼게 된 때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가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무엇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는 놀라운 특권을 내가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 사도가 깊이 체험했습니다. 예수의 놀라운 사랑과 헤아릴 수 없는 그 크신 사랑을 내가 받고 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천사들이나 깊음이나 높음이나 악한 세력들이나 그 어떤 것들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이, 그 사랑의 은혜가 나에게 미치고 있다는 이 감격을 이 사도가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의 마음속에 깊은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동족을 향한 슬픔이었습니다. 나와 같이 이 참된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이 놀라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커다란 슬픔이 이 사도의 마음을 지배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감격한, 진실로 그 사랑을 깊이 체험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동일하게 임하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사랑으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사도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도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놀라운 십자가의 구원이 얼마나 큰지 자기의 인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크고 놀라운 사랑을 내가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 사도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만삭이 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 같은 자신에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나타나 주셔서 예수의 놀라운 그 구원을 보이시고, 무지로 말미암아 참된 생명의 길을 걸어가고 참된 복음의 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기 위해서 있는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는 그때에 예수그리스도는 강권적인 은혜로 사도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도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련된 하나님의 차별이 없는 구원의 은혜를 깊이 누리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은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면서 점점 깊어져 갔습니다. 한 번의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지만 그러나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자기를 만나주신, 그래서 자기를 구원하신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전파하기 위해서 그는 복음에 매인 생애를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이 사도의 삶 과정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사랑으로 그에게 다가오시고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자기의 마음속에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의미는 구원의 가치를 알고 구원에 합당하게 살 때 우리에게 더 광대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약속된 놀라운 특권과 은혜를 누리고 활용하고, 그것을 인해 기뻐하고, 그것을 누리는 즐거움과 특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삶을 끊임없이 살아갈 때, 그 때 비로소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그것이 단지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는 그것이 아니라 오늘 그 구원을 잃어버리고 그 구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놀랍게 임하고 그리고 그 놀라운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게 될 때 그 때 눈뜨게 되는 것이 비로소 잃어버린 영혼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결코 교육으로 될 수 없습니다. 전도를 하는 방법은 가르쳐 줄 수 있지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은 훈련이나 교육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구원받은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를 오늘 알고, 그것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끼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깊어지고 그렇게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우리는 구원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알면 알수록 그는 그 은혜로부터 멀어진 동족들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사도는 사실 유대인들을 위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몫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인해서, 자기 동족들로 인해서 마음 아파하고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방인 가운데 충만하게 일어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유대인 가운데 일어나지 않는 그 구원의 역사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위해서 사명을 받고 사도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는 부름을 받고 이방을 누볐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전하고 전하는 곳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실상의 죽은 자들이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구원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사망가운데 허무한 것에 종노릇하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예수를 알고, 참된 구원의 의미를 깨닫고, 그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누리며 예수의 넓은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며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온갖 얽매인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풀려서 살아가고 있는 놀라운 세계를 보았습니다.
예수의 복음이 한 도시에 미치고 그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발 앞에 회개하고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을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를 사도는 보았던 것입니다. 한 덩어리 흙처럼 잠시 썩어서 사라질 재물 하나를 붙들고 거기에 생명을 걸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손을 내려놓고 영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부모는 우리를 버려도 우리를 영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놀라운 변화들을 사도는 보았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들을 사도가 목격하면서 그는 여전히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며 살아가는 어두움 속에 있는 동족들을 보았습니다. 말로 그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말로 설득하고 무력으로 할 수 있다면 무력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돈으로 설득할 수 있다면 돈이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십자가의 놀라운 구원을 받아들이고 그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아멘하고 그 구원 속에서 놀라운 은혜를 받는 이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의 은총은 결코 돈이나 재물이나 말로 살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지고 그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진 심령 속에 복음의 밝은 빛이 비춰지고 그 빛 앞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인하여 복음 앞에 참답게 회개하고 자기의 삶을 돌이키는 실존적인 회개가 없이는 결코, 영혼의 거듭남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쉽게 얘기 하면 이 일은 바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는 대 사도였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한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이적적인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사랑하는 친족, 바리새인이었던 내 아버지, 그리고 여전히 바리새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내 친척들과 형제들을 위한 구한, 이것은 자기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이에서 사도는 고통하며 아파하며 그 영혼들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성도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그는 세상이 동의해 줄 수 없는 것 때문에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하찮게 여기는 것 때문에 한없이 즐거워하고 그것을 기뻐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살아계실 때에 무엇을 인하여 기뻐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그리스도께로부터 명령을 받고 복음을 들고 이스라엘의 잃은 양들에게로 찾아갔던 그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어떤 때에 그들이 한없이 즐거워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의 이름이 나고,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잘 먹고 잘 살게 된 때 그들이 기뻐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증거할 때에 그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아멘하며 그 예수의 구원 앞에 응답하였을 때 그들은 기뻐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원의 능력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모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혼탁케 하는 어두움으로 역사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그들의 영혼을 혼미케 하는 악한세력들이 거꾸러지고, 쫒겨 나가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힘차게 그 영혼을 녹이고, 그들을 회개시키고, 참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났을 때 그들은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핍박을 받고(……) 이름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기들을 세워주신 그리스도예수의 은혜를 찬송했습니다. 모두들 슬퍼하는 그 자리에서 그들은 기뻐했고 노래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꿈이 이 세상에서 예수그리스도, 자신들은 이미 받았고 느끼는, 그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예수의 그 넓은 사랑을 사람들도 알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고 말하는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고 말하는 것은 옛날 하나님과 요즘 하나님처럼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참 믿음을 지키며 죄악이 관영하고 오류가 온 땅에 가득하고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자녀들이라도 해치기 위해서 울부짖는 이때에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인지를 이 세상에 보여주며 걸어가는 신앙의 길은 넓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도는 오늘 누구에게도 없는 그 가슴 저미는 고통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가 호소하는 것은 결코 내가 이런 정도의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나를 상당히 영적인 인물로 대우해달라고 지금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내가 거짓말을 아니한다. 성령이 내 안에서 증거하고 계신다. 그것은 이 비할 바 없는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나를 그 끔찍한 죄와 편견과 충성되이 살아도 생명이 없고 헌신되게 살아도 오히려 하나님께 거치는 돌이 되었을 그 인생을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리하여 구원으로 돌이키게 만들어 주신 이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있다. 너희들이 이 사랑을 아느냐.” 마치 이 세상에 바울은 8장을 펴 나가면서 마치 이 세상에 자기 혼자만 그 놀라운 사랑을 받는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로 광대하고 무한하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연역한 자기가 울어야할 그 자리에서 함께 우시고, 고통 받는 그 자리에서 함께 고통을 치르시고, 시련을 당하는 그 자리에서 함께 시련을 당하시고, 고통하실 때 사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서 그를 통하여 나타난바 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위대한 분인지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어떻게 사셨고 그 놀라운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내게 미치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 사도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 수 없었습니다. 자기와 같이 죄인된 자를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지푸라기 같은 인생을 찾아오시며 그 인생의 고통을 헤아리시며 그를 죄 가운데에서 구속해 주기 위해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인격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를 붙들었습니다.
오늘 이 사랑이 사도만을 구원하였습니다. 오늘 이 놀라운 사랑이 사도만을 이처럼 죄에서 구원하고, 사도에게만 천국의 소망을 주고 사도에게만 그 모든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던 일들을 버리고 생명과 빛 가운데 걸어가도록 사도에게만 특권이 주어졌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놀라운 사랑이 임했음을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8장에서 한결같이 사도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향하신, 우리에게, 우리가라고 했습니다. 자기와 우리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이 가슴에 미치는 사람마다 그들은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향한 무거운 부담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인생이 이 영혼들을 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여지지 않는다면 그가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사랑은 다 백짓장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사랑은 언어의 고백만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깨달아 안 이 바울은 오로지 하나의 꿈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영혼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영혼이 구원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시급한 것이며 그것이 없이는 인생의 모든 비극에 대한 치료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사도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몇 년 동안 우리 후배들 가운데 공부를 많이 하겠다는 사람들을 교수가 되어서 말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 하러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려고 하느냐, 아주 뛰어난 학문의 재능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에 소명이 있다면 그렇게 살아야겠지만, 저는 오늘도 토레이 목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삶이 그런 삶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성령과 동행하며 그는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생생하게 동행하며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에 자기의 인생을 소진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되고 그 인격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자기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복음 전파를 위한 강제력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가 오늘 그치지 않는 고통이 영혼 속에서, 심령 속에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은 골육친척을 인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몇 주되었는데 우리 교회에 찾아온 형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수님, 저는 어느 날 내 자신이 굉장히 이상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같이 사는데 어머니가 예수를 믿지 않는데 어느 날 자다가 일어나서 생각을 했는데 내가 한 번도, 태어나서 예수를 믿으면서 시험에 들기도 하고, 회복되기도 하고, 많은 체험을 해 봤는데 한 번도 어머니의 영혼을 인해서 울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비추어 보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은 그럴 수 없다고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내게 무엇이 부족한 것인가에 의문을 가지면서 부흥이라는 착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정말 심령에 부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교회를 통해서만 그 시대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살아난 사람들은 방주에 속에 들어간 사람들만 살아났습니다. 지금도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구원의 기쁜 소식은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믿는 사람들을 통하지 않고는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이 그 놀라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자기의 모든 종교적인 삶을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데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기 속에서 그 복음의 놀라운 기쁨과 감격이 역사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 그렇게 내 안에서 그런 예수의 놀라운 사랑과 그 구원의 의미를 깨닫고 그 가치를 붙들면서 구원받은 우리가 그 구원에서 다시 구원을 이루어가고, 우리를 구원한 그 믿음으로부터 다시 믿음으로 나아가는, 이러한 삶을 통해서만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독특한 맛을 드러낼 수 있는데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느끼고 있지 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못된 자식들이 부모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냐고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사도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치르셨던 그 놀라운 희생의 대가들과 영광을 버리고 죽기까지 낮아지셨던 예수그리스도의 복종과 그 구속의 놀라운 은혜를 오늘 우리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이 복음을 모르고 복음 안에서 외인이 되었다면 우리들이 어떤 비참한 인생을 살고 죽었을 것인가를 깨달으면서 우리가 복음의 빚진 자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고 이제는 자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들을 인해서 슬퍼하고 고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팔복에서 이야기하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게 울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복을 받고 있는 사람, 복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나니까 사도가 원하는 것은 내 동족이 구원을 받아야 할 텐데 왜 이들이 그 놀라운 복음의 소식이 제일 먼저 자신들에게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는 그들을 돌이켜서 그들을 예수를 믿게 만들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아무런 도구가 없었습니다. 오직 희망이 있다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것뿐인데 수없이 말했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거절한 것처럼 바울을 거절했습니다.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단지 복음 전할뿐이라는 의식을 가지면서 그 복음이 놀랍게 역사해서 우리 가족과 내 골육지친 중에서 몇 명만이라도 완전하게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그 놀라운 보여주실 수 있다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쉽게 말해서 지옥으로 들어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했습니다. 사도가 지옥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이 속에 있는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타는 마음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끌 수 없습니다. 마치 육체 속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육체의 정욕을 어떤 불로도 끌 수 없는 것처럼 마음속에 일어나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어떤 불로도 끌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도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영혼이 진정으로 구원되기를 바라는 그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기도를 들으시지는 않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가진 사도로 하여금 이 고백을 따라서 일생을 살도록 허락해주시고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선을 다해서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던졌습니다. 가는 곳마다 구원의 역사를 베풀면서 도덕으로도, 철학으로도, 인간의 지식으로도, 선한 행위로도,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 가운데 눌려서 사는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빛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신 그 놀라운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깨닫는 좋은 길은 복음을 전해 보면 압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믿지 않는가를 보면 내가 믿게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치지 않는 고통이 사도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처럼 이 고통은 그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고통이었고 상 받을 만한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도에게 주셨던 복음 전파의 부담을 주셔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구원하기 원하셨던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도록 기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