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쉴 수 없는 복음전도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40-42)
녹취자 : 장주은
몇 주 전부터 수요일은 복음전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이 5장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사도행전에서 성령강림사건이 주어진 다음에 계속 복음의 열심이 전파되다가 한번 교회에 커다란 위기가 다가오게 됩니다. 그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던 헌금을 안 드리고 슬쩍 속여서 얼마를 떼어 두었다가 감춘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 하면 아나니아도 죽고 삽비라도 죽었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그대로 적용이 된다면 오늘날 교회는 시체가 즐비할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서 5장이 보여주는 것은 한 사람이 헌금을 떼어먹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5장을 기점으로 해서 2장에서부터 폭포수와 같이 쏟아져 나오던 하나님의 복음전도의 역사가 5장 1절에서부터 멈춘 것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고 나서 다시 온 교회와 이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고 나니까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아지고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하는 새로운 복음전파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들을 고려하면서 사도행전 5장을 읽어야 합니다. 이 5장의 사건은 개인이 하나님 앞에 헌금을 떼먹으면 이런 징벌을 받는 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교회의 순결에 관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성경은 개인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순결에 대한 위협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흥이 강하게 일어났던 때에는 심판의 역사도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성령이 인정해주시고 기뻐해주시는 강력한 역사가 일어난 곳에 그 성령이 동일하게 죄를 책망하시는 역사도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를 책망하고 중생케 하는 강력한 성령의 책망이 있는 곳에는 강력한 성령의 위로가 있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기쁨 주심이 없는 곳에는 죄에 대한 분명한 책망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성령이 오셔서 어떤 사람에게는 죄에 대한 책망을, 어떤 사람에게는 놀라운 기쁨을, 어떤 사람에게는 책망과 즉시로 놀라운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하나님은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사도들도 이 사건을 심각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고 나니까, 교회가 다시 거룩함을 회복하고 순결을 회복하고 나니까,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의 열심이 전파되는 것이 오늘 읽은 본문 앞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냐 하면 복음전파라고 하는 것도 교회의 영성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순결하고 그 교회가 거룩한 성령의 은혜로 충만해질 때 그 교회는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도 열심히 복음을 전파고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니까 대제사장들이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나중에 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니까 우린 안정할 수 없다, 결국은 때려서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문맥입니다. 40절부터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옳게 여겼다는 것은 기독교라고 하는 사상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무너뜨릴 수 없고 하나님이 아니신 것이면 내버려두어도 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죽이지 않고 채찍질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1절을 먼저 해설해야겠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복음전파의 역사는 항상 희생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시대든지 간에 모든 교회의 성도가 일체단결해서 복음을 전했던 시대는 거의 없습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유능한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졸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전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때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고 나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복음전하는 사람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전도하지 않는 성령 주심, 이것은 성경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성령이 사람들에게 오시고 그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게 되면 그 성령 체험을 가진 사람들은 그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오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지만 관계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오시자 하나님이 내게 느껴지고 관계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확신이 생기고 그 하나님이 내가 하는 일을 지금 기뻐하시고 나와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내가 지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누리니까 보다 더 확실하게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신앙의 놀라운 감격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런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를 누리면서 사는 것에 놀라운 신앙의 행복을 느끼게 되니까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전부다 복음 안에서 약속된 바입니다.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행복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이러한 행복 안으로 들어오기를 사모하는 열망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설교를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간증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개인적인 전도를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고래고래 길거리에서 소리를 치면서 불특정 다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무엇으로 하든지 말로 하든지 글로 하든지 무엇으로 하든지 어찌하든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들어야겠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복음전도의 역사에서 복음전도자로서 한 시대를 연 사람들로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한 나라의 복음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복음의 불을 붙인 모든 사람들은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체험하고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되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믿지 않는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인생에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을 포함해서 신앙이 피상적이던 시대에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구원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의 차이가 아파트 당첨된 것과 안 당첨된 것보다도 차이가 없는 것 같은, 그렇게 사람들에 의해서 이 신앙의 가치가 평가절하 되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들끼리 있으니까 평범하게 생각해봅시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있는 아주 특별한 신앙을 가진 사람 말고 그냥 평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연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오늘 교회에 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사건보다도 더 중요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부업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악세사리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농담처럼 신앙생활 합니까? 복음의 기초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셔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실체를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철저하게 보이실 때 그때 복음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첫째 시간에 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복음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은 그 소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입니다. 얼마나 죄 가운데 있고 소망이 없고 그렇게 죄 가운데 살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끔찍한 것이고 이렇게 인생의 목표 없이 살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인생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모든 인생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깊이 느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이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피상적인 복음밖에 아는 것이 없으니까 전도도 피상적인 전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사도들이 오늘 다시는 이것을 전하지 말라고 하면서 채찍질해서 놓아주었더니 사도들은 뭐라고 했냐하면 그 이름을 위해서 이렇게 비참하게 매 맞고 욕을 먹고 능욕을 당하게끔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주었습니까? 무엇이 사도들로 하여금 능욕을 받고 멸시와 천대를 받는데 자기를 멸시와 천대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 자리에 세워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는 확신에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그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듣게끔 말하는 것이 자기가 평탄한 가운데 능욕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뛰어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도 달랐습니다. 성격도 달랐습니다. 또 부르심을 받은 때도 같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체험과 다양한 사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다양한 면들을 체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체험이 어떠했든지 교회에서 위치가 어떠했든지 그들이 언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든지 또 어떠한 교훈을 들으면서 이제껏 살아왔든지 그들은 인생 자체가 전폭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말하는 일에 매였습니다. 붙잡혔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하게 이야기하면, 심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로 태어날 때 그때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어디에도 전도학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전도학교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는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공부를 해야지만 겨우 전도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사고가 오늘 성경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그는 물동이를 메고 올 때만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깨달았습니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자기 안에 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신 것과 자기의 죄를 사해주신 것을 깨닫게 되자 그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온 동네로 다니며 성경에 약속된 그 메시아를 내가 만났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삶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일 하나에 매였고 이 일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 이름을 위해서 능욕 받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강림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 사건을 통해서 성령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방언과 예언과 그리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하시던 똑같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단지 사람들인 이 사도들을 통해서 신의 아들이 하시던 위대한 일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놀라운 은혜를 받고 그들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책망하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시체로 실려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할 정도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삶의 이유가 그런 권세들을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그 목표가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한가지의 그들의 모든 삶의 목표가 꽂혀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복음을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기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자로 세우셔서 설교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직장을 다니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학교를 다니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두신 것은 방법이 어떤 방법으로 살아가든지 궁극적으로 그 살아가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온 세상에 알리셔서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자기의 영적인 지위를 높이거나 혹은 자신의 종교적인 만족을 위한 성령의 체험들이 추구되고 있는 것은 다분히 신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신학은 전도하지 않는 성령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구석구석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본 사람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본 사람만 전도한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 사람도 전도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만져보지도 못하고 그 아래 서보지도 못한 그 십자가의 증인들이 되게 만들었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이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게 만들었던 요소는 무엇이었습니까? 성령이었습니다. 성령이 오시자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증거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성령은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이 그리스도에게 매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성령을 체험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천박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뭔가 많이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실 때 피상적으로 알던 신앙이 확실해 지게 됩니다. 그리고 얕았던 신앙이 깊이를 더하게 됩니다. 형체가 불분명하던 신앙이 분명한 형체를 갖게 됩니다. 이런 모든 놀라운 역사가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와 성령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성령 받지 않고는 전도할 수는 있어도 전도에 있어서 성과는 성령을 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차이를 가져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받든 못받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은 명령입니다. 그래서 5장에 보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 하면 우리는 그 일에 증인이라고 말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매일 나태와 안일 속에서 긴장 없이 매일 가서 자기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돈 벌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긴박함이 없는 나태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도우실 여지가 있는 삶을 살아야지 성령이 도우실 것 아닙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들어가야지만 지팡이와 막대기가 필요할 것 아닙니까? 불꽃과 같은 성령의 불기둥이 필요한 광야에 자신을 던져야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나태와 안일과 만족과 무사안일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만 있으면 됩니까?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는, 정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방탕한 육체와 해이한 사고방식만 있으면 그런 삶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비범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 이러한 복음 전도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공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성경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 풍부한 증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으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들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쉽게 이야기 하면 거기서 제자를 삼는다는 이야기는 1차적으로 분사로 나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가르치면서 세례를 주면서 한꺼번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전도대로 교육은 교육대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결국은 그 마태복음 28장 19절, 20절이 주는 지상명령은 핵심적으로 요약하자면 믿지 않은 수많은 족속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Go. 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그들로 하여금 삶의 실체를 보게 하고 복음 앞에 결단하게 만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한국에서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번 그 상황에서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종족이 로마라는 한 울타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종교들은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동 지방의 어느 민족들이 종교가 없는 민족이 어딨습니까? 철저하게 자신들의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제주도만 해도 어림도 없습니다. 81년도인가 강원도로 집회를 한번 갔는데 같이 청년들과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데 놀라웠습니다. 아줌마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예수를 믿으시라고 했는데 안 믿으면 어떻게 되냐고 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더니 그럼 우리 시어머니는 어디 있냐고 합니다. 뭐라고 얘기해야 합니까? 사실대로 얘기했습니다. 그럼 난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고 하니까 천국이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어떻게 시어머니를 불 못에 내버려두고 나 혼자 천국을 가겠다고 예수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죽어도 지옥에 가서 같이 죽어야지. 우리가 보면 웃지만 아주 진지한 표정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주 진지합니다. 그게 결국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그만큼 사람들이 강한 아집과 자기 나름대로의 편견과 불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도 훌륭한 신관이라는 것입니다. 내세가 없다, 그것보다 더 확고한 내세관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근거도 없이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서 그 당시로서는 이해될 수 없는 나무에 매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세주라고 하는 이 말도 되지 않는 미개한 이야기를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겠습니까? 자신을 거의 불가능한 일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뭐라고 하였습니까? 십자가의 도가 이 세상사람 눈에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련한 일 하나에 인생을 걸고 수고하는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에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때 뭐라고 합니까?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할 것이니라.’ 거기서 너희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면 주님이 우리가운데 오십니다. 떠나지 않으십니다. 성령으로 오시니까 떠나지 않으십니다. 범죄 하든 개판으로 살든 주님이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 만족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렇게 교리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예수를 믿고 잘못 살아도 우리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죽은 다음의 일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분명하게 하나님을 위한 삶의 증거들이 드러나지 않을 때 우리가 무엇을 통해서 미래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을 받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데 그렇게 어려운 것을 살아가는데 과연 그렇게 예수를 믿을 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마지막에 우리는 천국 간다, 그것 하나만 가지고 우리가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매일 패배하고 매일 실족하고 회개하고 뉘우친다고 말하지만 그 회개와 뉘우침은 피상적이니까 다시 돌아와서 다음 주 삶을 살면 똑같은 삶입니다. 같은 삶, 같은 삶, 계속해서 연속입니다. 한번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은 바람처럼 흘러가는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나지 않습니까? 안 옵니다. 제가 지금은 여기서 설교하고 있지만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알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불러 가시는 것 아닙니까? 시험을 해보고 다시 할 수 있는 인생도 아닌데 계속 흘러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것은 아는데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될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는 놀라운 표징들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을 통해서 보여집니까? 무엇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과는 뭔가 다른 사람들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그런 약속을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불가능에 가까운 불모의 지대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던지고 살아가는 사람. 오늘 내가 직장에 다니지만 한 달에 백만 원 백오십만 원 끽해야 이백오십만 원 삼백만 원 그 월급 받고 밥 먹고 사는 것들을 위해서 내가 직장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구원의 신앙, 복음의 신앙에 불타고 있는 사람들.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며 모험적인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과 더불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간증할만한 것들을 남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서 저는 한 7,8년 전에 정말 기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들과 함께하시는 표징들이 감출 수 없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야 한다고 하는 복음 전파에 자기 인생의 모든 가치가 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고 자기의 개인의 모든 유익을 포기하며 오직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들, 그 속에는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함께하시는 놀라운 체험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한국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가셨다, 그 이유는 말씀이 충분하기 때문에 성령이 옛날처럼 역사 안하셔도 된다. 성경에 어디 그런 원리가 나옵니까?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런 복음 전파를 위한 모험적인 삶에 자신을 던지고 매 맞고 옥에 갇히는 일까지도 기쁘게 하는 이런 모험적인 인생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놀라운 표징들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옥문을 흔들고 싶으시지만 복음 전파를 위해서 투옥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도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자신을 던지며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미친 듯이 그 일 하나에 생명을 건 사람들이 찾기가 힘드니까 하나님의 이런 역사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가만히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중에서 여러분이 생각할 때 정말 성령이 전폭적으로 도우시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삶의 모습이 우리에게 얼마나 됩니까? 과연 우리들에게 인생이 전투적인 삶으로 다가옵니까? 영적 전투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복음 전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계속해서 사도가 영적 전투에 대해서 계속 얘기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얘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나로 담대히 하나님의 복음을 말하게 해달라, 그것입니다. 영적 전투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 전투를 통해서 이기고 승리하는 교회로 남게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이유, 그리고 교회와 개인이 그런 싸움에서 승리하게 될 때에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게 되느냐, 그것은 말하자면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해서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들을 위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을 사이에 두고 그들을 탈취해 오고 빼앗기는 이 일들이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노래하고 먹고 마시고 교제하고 놀러 다니고 하는 이런 교회에서의 잔치하는 행사를 보고는 과연 이 교회가 영적으로 얼마만큼 강한 교회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성령 없어도 다 밥해서 먹고 야유회 가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고 그 교회가 복음으로 자기가 놓여져 있는 자리에서 세상에 충격을 주고 영향을 주어서 사단의 왕국에 속했던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데려오게 되는 놀라운 일들은 철저하게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힘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적인 상황을 그보다 뚜렷이 알 수 없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자, 사대교회와 같은 교회에는 거의 복음 전하지 않는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모습의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은 각별히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고 자신을 고난 가운데 던지려고 하는 기꺼운 헌신, 기꺼운 고난 받음, 그것을 기꺼이 지불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뭐라고 말합니까? 복음과 함께 영광을 받으라고 말하지 않고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가는 곳에 대접이 없습니다. 복음이 가는 곳에 만약 대접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대접입니다. 복음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멸시와 천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경멸함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벨을 누르고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도대체 먹을 것이 없습니까, 입을 것이 없습니까. 우리가 쌀을 꾸러 갔습니까, 돈을 꾸러 갔습니까. 우리가 왜 얼굴도 모르고 낯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런 모멸과 멸시를 받아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를 향한 멸시가 아니라 복음을 향한 멸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복음과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결탁되어 있는 것입니다.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결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진리를 말하고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있고 또 이 복음이 영광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한없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은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유대인들이 이 사도들을 불러다가 심히 때렸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때린 것입니다. 복음을 미워하는 것들이 사도들을 향한 미움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복음 전파는 예수를 믿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이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을 치러야 되겠다는 결단과 각오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그렇게 우리 자신이 결단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안함과 능욕 받는 것과 모든 것들을 위해서 이런 것들을 지불하려고 하는 대가 지불의 의사가 없이 복음이 전해지리라고 믿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는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박해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할 때에 그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요구되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수가 적기 때문에 교회가 자꾸 문을 닫고 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도 정말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믿고 그 예수의 이름을 위해 살고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자기가 믿고 발견한 이 구원의 놀라운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선교사적인 소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태어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성경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것과 전도하는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보십시오. 예수는 그리스도라,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무엇입니까? 예수는 태어난 한 아이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이 지어진 것이야 깊은 의미가 있지만 예수라고 하는 이름은 고유명사였습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름도 고유명사였지만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말하면 메시아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이 세상에서의 지상 생애에서의 이름이라면 그리스도는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기다려온 그 전 인류의 구속의 소망이신 그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예수는 비하하신 그리스도,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높아지신 예수의 이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떻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은 예수라는 이름은 작은 것이지만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계속해서 예비 된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나와서 그가 모든 인류의 죄를 구속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대망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자기들의 재판에 의해서 정죄당하고 자기들이 박은 그 못에 못 박혀서 자기들이 던진 그 채찍에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채 결국은 자기들이 창으로 찔러서 죽인 그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죄패를 썼는데 그 의미는 조롱하는 의미로 썼습니다. 조롱하는 의미로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패를 써 붙였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 정도로 묶여있을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온 세상의 왕이며 모든 인류의 구속을 위한 구속주가 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믿었을까요?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그때의 시대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부흥의 시대도 가만히 살펴보면 부흥이 일어나면 그 부흥이 일어났을 때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다 예수를 믿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면 거기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나뉘어집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뉘어집니다. 복음이 분명하고 능력이 넘치면 넘칠수록 이 나뉘어지는 것은 더 분명하고, 복음이 불분명하고 능력이 불분명할수록 반응이 애매모호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과 전도하는 것이 교회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신자에게 가르칠 수 있는지 그들은 예수가 곧 우리들을 구원하신 만세 전부터 하나님께로부터 택한바 되어서 우리의 구속을 완전하게 이루신 그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그 가르침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아가서 전도할 때도 그 그리스도가 중심이었습니다. 이게 복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예수가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인가 이야기할 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 구약의 약속, 못 박혀 죽으신 것, 부활하신 것, 승천하신 것, 다시 오실 것, 심판,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얘기하게 되는데 그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면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들이 전하던 바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놀라운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흥왕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들도 그 복음의 도에 복종하고 손들고 주님 앞에 나오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였습니까? 교회가 교인을 굴리거나 재산을 늘리거나 일에 혈안 되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순수한 복음을 그리스도가 예수가 바로 사람들이 그렇게 실패해서 죽었다고 말하는 ...... ( 46:45-49 끊김 )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선한 일을 행하다가 혹은 오해를 받고 죽어간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결실을 거둘만한 상황이라고 믿어지던 때나 혹은 전혀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상황에든지, 어느 상황에서든지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전파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놀랍게 많은 숫자로 급속하게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희락이 있고 치유가 있고 사도의 가르침이 있고 교제가 있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모든 것의 출발은 복음이 전해지고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거저 일어났습니까? 성령이 예루살렘 교회에 유사 이래가 없이 강력한 성령이 부어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혼자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은 이렇게 거룩한 성령을 받고 그 성령에게 미루지 아니하고 성령과 더불어 그 성령의 도구가 되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말도 되지 않는 허황된 교리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진리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이 사람들은 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가르쳤습니다. 오늘은 전해도 소용없을 때 내일 다시 전하고 오늘 가르쳐도 이해되지 않을 때 그 다음날 다시 가르치고 금주에 이해되지 않고 가르쳐도 받아들이지 않고 전도해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시 찾아가고 쉴 새 없이 쉼 없이 그들은 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을 바쳤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쉬지 않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쉬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쉬지 않고 열심을 내면서 어느 일에 자신의 존재와 삶과 능력과 재정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은혜와 모든 노력들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 것이 어디입니까? 그들은 쉬지 않았습니다. 유사 이래 없는 위대한 성령의 능력의 부음을 받았던 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부여잡고 누리고 그리하여 도저히 복음이 들어갈 수 없는 땅에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의 복음을 실어 나르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쉬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지 그들은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편안하고 해이하게 느껴집니까? 그때 우리들이 영적 전쟁의 현장에 서보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를 들어가고 나서 이제까지 이르기를 신학교의 선생으로 있으면서도 한 번도 교회 봉사를 쉬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넉 달 쉬어봤습니다. 넉 달을 교회 옮기는 중간에 자리가 떠서 쉬었습니다. 쉬었어도 예배는 드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심령이 죽습니다. 이게 설교를 안 하니까 이게 뭐 다급할게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돌보고 있는 영혼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예배도 11시 간신히 맞춰서 갑니다. 끝나면 도로롱 집으로 와서 씻고 드러누워서 쉬고 TV나 보고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인지를 설교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전쟁에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긴박감을 스스로 느껴야 합니다. 괴롭습니다. 긴박감은 느끼는데 그것을 이길 수 있고 승리로 장식할 수 있는 능력은 없으니까. 그 괴로움이 약입니다. 그렇게 괴로워야지만 주님 앞에 신령한 은혜와 능력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영적인 삶에 변화가 오는 것이지 욕심이 이끄는 대로 평탄하고 아무런 도전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언젠가 청년이 하나 와서 간절히 기도하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냐고 해서 간절하게 살아야 간절한 기도가 나오지 않느냐 했습니다. 이들은 쉬지 않았습니다. 그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받은 교회가 온 교우들과 더불어 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이 일이 가장 고상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는 이 하나에 자신의 삶을 걸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처럼 당신을 섬기고 진정 당신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복음 전도의 현장으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예수를 믿는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은 예수 믿고 여기서 기다리다가 천당 가게 하기 위해서 남겨두신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이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우리를 쓰시고자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복음을 들고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그런 곳으로 지날 때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아요, 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약은 복음 전도를 위해서 자신을 드려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이 세상이 절박한 영적인 싸움의 전쟁이고 지금도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이 계시는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마시고 누리고 지나가는지 그것은 하나님에게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천당에 올라갔을 때 주님이, 그래 네가 고기를 몇kg나 먹고 왔느냐, 그중에 한우가 몇kg였고 수입육이 몇kg였냐, 그런 것 관심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건강을 유지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잠시 살아가기 위한 수단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는 일에 쓰지 못하면 우리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그런 동일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우리가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기를 그치기로 작정할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이 문을 닫으시는 것이 낫다,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주께서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들이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구원의 길을 보여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