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고 너희는 살고>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여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4:11-12
오랫동안 기도하고 또 준비해오던 우리 황 성현 선교사와 김 세희 선교사가 이제 캄보디아 지역으로 선교사로 파송이 됩니다. 저희 교회가 파송하고 그리고 인터서브 소속 선교사로 이제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캄보디아는 아직까지도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낙후된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선교에 여전히 부자유함이 많이 있고 어려운 환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의 가슴에 캄보디아를 섬기고자 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주셨고, 그 마음을 품던 중 열린 교회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많은 은혜를 받고 헌신하게 되셨습니다. 이제 이 황 성현 선교사는 캄보디아에 이제 교수로서 가고 그리고 그 곳에서 캠퍼스 사역을 교수의 지위를 가지고 하게 됩니다. 그러니 자유롭게 내 놓고 선교할 수 있는 지역 그리고 목사의 신분으로 그것 하나에 전념하는 그런 입장보다는 훨씬 더 어려움이 많은 가운데 선교 사역을 하게 되리라. 이렇게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당신의 아름다운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을 백성들을 위해서 여러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섬기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데 그 여러 모양 중 한 모양으로 이제 황 성현 선교사가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처음 복음이 전해질 때 이렇게 교육과 의료를 통해서 선교가 시작 되었고, 거기에서 많은 지도자, 그리고 지도자들의 자녀들이 복음을 접하면서 한국 초기 개화사상을 꽃피우고 결국은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복음이 번성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황 성현 선교사는 이 캄보디아에서 100이나 200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우리 입에 아스라하게 우리 머리속에 떠올라 우리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초기의 카나다나, 미국이나 호주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들처럼 전설적인 사람이 될 지로 모릅니다. 그만큼 현제로서는 척박하고 어려운 곳에서 복음을 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이 말씀을 통해서 선교의 환경은 척박하고 그들이 지내고 있는 문화는 우리와 다르고, 그리고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잔인한 정치적인 박해가 있었던 비극의 나라 캄보디아 땅이기는 하지만 복음의 원리 성경의 원리가 분명하기 때문에 그 원리를 붙들고 사역을 하게 되면 거기가 캄보디아든지 아프리카든지 북극지방의 에스키모 마을이든지 동일하게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여기 고린도 후서입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안 좋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듣고 마음이 많이 상해서 그래서 책망어린 편지를 썼고, 그 후에 그 교인들에게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많이 회개하고 새로워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치 가출한 아이가 돌아왔을 때 기뻐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고린도 후서를 써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실 고린도 교회 교인과 자신 사이에 마음이 열리지 아니하였더라면 할 수 없는 목회자로서 아주 내밀한 이야기까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털어놓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 된 목양 관계에서 쏟아져 나온 자기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제 기독교 역사에 많은 설교자들이 가슴에 새긴 그 웅변적인 한 선언이 나옵니다. 그것은 뭐냐면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지면서 사는 삶입니다. 사실 이것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 예수님을 섬기면서 살면 되는데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졌다. 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예수가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자책감을 지고 산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있어서 자유만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어떻게 보면 복음적인 사실에 역행하는 것 아닐까요? 정말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우리가 끊임없이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라는 가책을 느끼면서 살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가책을 느끼면서 부자유 가운데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바울을 구원하셔서 그래서 복음 전하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셔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삼으셨고, 그리고 이제 그들은 영원히 정죄에서 해방되었으니까. 그러한 자유 함으로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죠. 그것은 틀림없는 복음적 사실인데 사도바울의 이 고백에는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예수님이 비록 우리를 그렇게 복음으로 완전히 구해주셨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 속에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나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형벌 받을 죄에서 구원해 내서 이제 너는 죄인이 아니다. 너는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그리고 진노의 자식이 아니라. 이제는 사랑 받는 나의 아들이다. 이렇게 불러주실 때 “그렇죠. 주님 제가 왕 같은 제사장 아니겠습니까. 저야 주님의 오른 편에 있는 큰 아들 아닙니까.” 이런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너는 이제 죄 사함을 받은 의인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내 아들이다. 이럴 때 그것을 못 믿거나 부인해서 아니라. 마음으로 그것은 감사함으로 받아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아닙니다. 주님 저는 그저 용서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용서받았으나. 그 정체가 예수님이 위하여 대신 죽어주시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었던 죄인 중에 괴수일 뿐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으면서 살고, 그것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면서 산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선교의 한 원리, 목회의 한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나는 죽고, 너희는 살고” 이것이 선교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선교사에게만 해당되고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적용되는 “나는 죽고, 너희는 살고” 그 정신으로 일생동안을 하나님을 섬겨가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일을 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은 한 가지 일을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을 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한 사람을 무릎 꿇게 하여 자기의 말을 듣게 하는 것, 수 많은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어서 논리정연하게 그들을 징 책 하는 것 보다 힘든 것은 한 사람의 잘못을 지적해내서 결국은 그 사람을 설득해서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자백을 받아내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인데 그 한 사람이 자기 자신입니다.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 그랬습니다. 그 히랍어 본문에 보면 ”휘파고고 에이스 둘로마이“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직역하면 ”쳐서 복종시켜서 노예 살이의 상태로 데리고 간다.“ 그런 뜻입니다. 자유롭게 펄펄 날아다니던 자유인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예의 근성을 불어넣어야 되겠죠. 그러니 보통 채찍질해서는 그가 노예의 처지에 만족하고 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 했는데 그는 교인들을 목회할 때는 그렇게 목회하지 않았습니다. 채찍을 들고, 매질을 하고, 짓밟고, 노예근성을 갖도록 그들에게 징 책을 하면서 그래서 결국은 굴복해서 설설 기도록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죽노라.” 했지 “내가 너희를 날마다 죽이노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미천한 경험이지만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수종 들고 오늘 날에 이르면서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모든 좋은 은혜,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아름다운 발전, 주님의 교회의 모든 찬란한 영광, 이 모든 신령한 기쁨은 모두 목회자를 시체를 밟고 하늘로부터 교회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선교지도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선교사가 본받아야 할 정신은 우리 예수님의 선교정신입니다.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 계신 아름다운 하늘나라에서 지상의 가장 선교환경이 가장 열악한 지상의 나라로 파송을 받으셨습니다. 위협이 있고, 핍박이 있는 땅 정도가 아니라. 태어나시자마자 죽이려고 창칼을 든 사람들이 있는 그 땅으로 파송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맨 몸으로 이 세상에 파송이 되셔서 33년 동안 선교사역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분이 보여주신 그 선교의 정신이 오늘 사도가 본받고 있는 바로 그 정신입니다. “나는 죽고 너희는 살고,” 그 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자기를 깨뜨려서 남에게 유익을 주는 생애였고, 자기를 죽여서 남은 살리고 당신은 부끄러움에 처해서 다른 사람은 존귀케 하시는 그런 생애였습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생명이 있는 모든 곳에 피할 수 없는 본성은 죽음에 항거하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시골집에 가면 집에서 행 길을 건너면 제가 다니던 감리교회가 하나 있고, 그 교회에서 강가 언덕까지 올라갈 때에는 꽤 긴 논밭들이 있었습니다. 그 논 한 가운데 까만 판자로 세운 함석지붕의 집이 있었는데 거기가 바로 돼지 잡는 그런 방이었습니다. 무슨 따로 도살장이 없고 거기에서 사람들이 그냥 공동으로 그런 것을 하나 지어놓고, 필요하면 돼지를 가지고 와서 잡았습니다. 전 과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얼핏 지나가다가 어린 나이에 보니까 돼지를 가마니에 넣고 꽁꽁 묶고 그리고 그 돼지 머리를 망치로 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돼지가 그렇게 만만하게 죽지 않습니다. 또 그 사람들은 숙련된 기술자들이 아니니 좀 기분 나쁜 표현이기는 하지만 결국 골을 박살내다시피 두들겨서 죽이는 것이죠. 그러니 돼지가 안 죽겠다고 그냥 소리 지르는 그 소리가 온 동네에 한 1시간 이상씩 휘돕니다. 그러면 아, 또 한 마리의 돼지 죽는구나.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위해서 죽으면 좋은 일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죽으면 주님이 내 안에 사시죠. 내가 죽으면 내 주위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죠. 내가 죽으면 내게 맡겨진 영혼들이 살죠. 내가 죽으면 하늘이 열리고 내가 섬기는 사역지에 하나님의 복이 부어지죠. 말로야 누가 안 죽겠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요즘 몇 주께 이 주제에 대해서 계속 사유하고 있습니다. 정말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지를 보여주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가르쳐주시기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거니와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느니라.” 하시죠. 그래서 그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죽는 방식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슨 곡식이든지 거기에는 씨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씨는 썩어서 그 씨눈을 태어나게 하는 비료로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쌀에는 쌀눈이 있어서 벼 한 알에 밀알과 마찬가지로 한 알의 밀알에도 밀 눈이 있어서 그 밀알은 좋아 보이지만 그러나 “밀 눈”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밀 눈을 위해서 썩어야할 비료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크지 예수님이 큽니까. 그래서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피하려고 하고 욕심이 생이고, 고난이 오면 도망가려고 하고, 자기에게 유익이 있으면 택하려고 하고 분노하면 혈기부리고 욕망을 자극하면 정욕이 역사하지 않습니까. 이게 자기입니다. 우리는 크고 주님은 우리 안에 작으시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주님이 바로 밀의 눈과 같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위해서 죽으면 주님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사십니다. 나는 오늘 파송 받는 황 성현 선교사와 김 세희 선교사에게 일생 가슴에 지워지지 않도록 가슴에 새기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그대들이 잘 죽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모든 좋은 것, 캄보디아 땅에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은 그대들의 시체를 밟고 캄보디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길은 고난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죠. 그런데 선교지에서는 이것이 어렵습니다. 그것을 가슴에 새기셔야합니다. 선교지에서는 돈도 없죠. 정치적으로 힘도 없죠. 자기 위해주는 사람도 없죠. 친구도 없죠. 그러니까 잘 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본국에서 저처럼 이렇게 목회를 하면 바른 소리 하는 사람들도 있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고, 더 잘하는 사람하고 비교해서 당신은 왜 그렇게 못하느냐고 타박하는 사람도 있으니 낮아질 기회가 많은데 선교의 세계에서는 돈은 없고, 정치적인 힘은 없지만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선교사가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자기가 정말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 아파하고, 자기가 자기 안에 깊이 있는 죽지 아니하는 자기를 발견하고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긴 세월을 선교지를 돌아보면서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이 주제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이 얘기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난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영성은 그야말로 고난의 영성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은 신자가 이 세상에 살아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고난이 없이 그른 목회를 할래? 고난을 많이 받으면서 바른 목회를 할래? 하고 물으면 저는 1분도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그 대신 욕심 같아서는 하나님 앞에 한 가지 기도를 보태고 싶어요. 그 대신 너무 오래 이 세상에 있게 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이죠. 예수님의 생애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생애는 자기의 것이 없는 생애였습니다.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천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본체를 버리시고, 그리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일생을 사셨는데 그분의 생애는 사람만큼도 살지 못했으니 춥고 배고프고 가난하고, 우리의 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그분의 고난에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깊이 죽어야합니다. 선교지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위대한 일을 행하시기를 꿈꾸지 말고, 먼저 자기 안에서 자기 밖에서 일어났으면 하는 그 일이 자기 안에서 먼저 일어나도록 하나님 앞에 많이 엎드려야합니다. 길지 않은 목회 사역이지만 저에게는 매우 길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역을 하다보면 기쁜 때가 왜 없겠습니까. 보람이 있는 때가 왜 없겠고. 그런가 하면 슬프고 외로운 때가 왜 없겠습니까. 가끔은 하나님 이제 내 생명이 충분합니다. 말하고 싶은 때가 있겠죠. 어느 때에든지 환경과는 상관없이 선교사가 자신의 선교지에 엎드려서 눈물이 마르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저는 얼마 안 되는 목회 생활을 통해서 무엇으로도 넘어갈 수 없는 한계와 그리고 시련에 봉착하게 될 때 모든 도움을 끊고 주님 한분께 엎드려서 깊이 자기를 돌아보게 되면 하나님이 자기를 깨뜨리셔요. 그래서 눈물이 흘러나오면 그 눈물이 교회로 스며들어요. 양이 많아야합니다. 그래야 스며듭니다. 샘솟듯 솟아나야합니다. 그러면 그 물이 교회 바닥을 타고 흘러요. 그래서 여기 저기 스며들어요. 그래서 내가 녹일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내가 고칠 수 없는 사람을 고치고, 내가 제거 할 수 없는 사람, 쓴 뿌리의 가슴 속에 스며들어서 마르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성인신의 원리에 의한 섭리입니다. 일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되는 것, 주님이 당신의 좋은 일을 불쌍한 선교지에 병든 영혼이 있는 목회지에. 영광스러운 일을 펼치시기 위해서 가신. 나를 밟고 건너가겠다. 그러실 때에 아멘, 주 예수여 지나가시옵소서. 나는 주님 앞에 한 줌의 티끌일 뿐입니다. 하고 엎드리는 것, 그 정신이 없는 선교, 그 정신이 없는 목회는 그것은 종이로 만든 꽃입니다. 향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는 우리 예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습니다. 무슨 섭리냐면 그렇게 해야지만 그런 잔인한 과정을 거쳐야지만 예수의 그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심으로서 주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가 주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 바쳐서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밟고 지나가시도록 허락해야합니다. 그런데 어렵거든요. 왜 어렵냐면 많이 아파요. 아주 많이 아파서 어떤 때는 차라리 칼로 살을 확 벗겨내고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하냐면 그렇게 아파하며 엎드린 나를 밟고 지나가시는 분이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난을 먼저 받으시고, 그래서 죄 가운데 쓰레기처럼 살다가 죽을 인생을 구원해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아프고 아깝고, 모든 것이 내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깝기도 하고 아프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서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다른 길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가 나의 마지막 보냄을 받은 곳이다. 여기에서 내가 이들과 함께 죽으리라. 그리고 그 때 그 죽을 그 정신으로 살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깨뜨려 남에게 유익을 주고, 자기를 죽여서 다른 사람은 살게 하고, 자기는 부끄러움을 당해도 다른 사람들의 명예는 보존해 주고, 그런 생애를 온 마음을 다해서 살다가 그러다가 주님께 가게 될 때 그 때에 선교의 흔적만 남은 것이 아니라. 외로운 선교지에서 이 애를 쓰는 동안 주께로 더 가까이, 가까이 가고 싶어 했던 정말 주님을 사랑한 한 사람의 신앙의 인격이 캄보디아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지도록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지체들을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기도해 주고, 그 죽음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때에 복음 사역을 위해서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