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수 선교사 파송예배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1-12).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이 일은 일은 일이지만 이 세상의 일하고는 다릅니다. 이 세상의 일은 좋은 일의 계획이 있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과 자원이 있고 그리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일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영혼을 살리는 이 생명의 사역은 그렇게 계획과 사람과 자원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복음사역자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회복시켜 가시는 그 원리는 죽음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거니와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느니라.” 한 알의 밀이 모두 죽는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죽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밀을 잘 보면 밀 제일 끝에 밀 눈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다 죽는 것이 아니라 밀 눈을 싹틔우기 위해서 밀이 썩는 겁니다. 그때에 밀은 썩고 밀 눈은 살아서 또 다른 많은 밀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파송될 수 있겠습니까? 김옥수 전도사 마음에 예수님이 계셨더니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셔서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끔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니까 “너는 열방을 위해서 나를 대신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거라.” 한 알의 밀인 김옥수 선교사가 자기 안에 있는 밀의 눈인 예수님께 “아멘”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후로는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을 위해 봉사하는 이 일은 절대로 사람이 이 세상의 일을 경영하는 눈으로 보고 평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자원이 있고 다른 사람이 깜짝 놀랄만한 지혜로운 계획이 있고 그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그것은 모두 주변의 요인일 뿐입니다.
밀의 눈이 아무리 비옥한 땅에 뿌려져도 눈인 시절에는 주위의 비옥한 땅에 그 비옥한 양분을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썩는 한 알의 밀이 그 즙을 먹고 싹이 트고 뿌리가난 후에야 땅의 양분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복음사역의 길은 자기 죽음의 길입니다. 아무리 좋은 선교의 계획이 있고 든든한 후언교회가 있고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기도의 용사들이 즐비하고 가족들이 헌신적으로 김옥수 선교사를 돕겠다고 약속해도 그것을 먹고 하나님의 일이 꽃피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후원을 교회가 담당하고 사역의 어려운 점을 선교회가 담당해주고 노후를 담당해주고 그런 계획이 다 있어도 그거 가지고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비옥한 땅일 뿐입니다.
한 알의 밀의 눈이 싹이 틔여서 싹이나고 잎과 줄기 가지가 자라서 번성한 나무가 되기 전에 먼저 한 알의 밀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위의 사람이 피 눈물나게 그대를 위해 기도한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대신해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목회의 길이란? 선교의 길이란? 외로운 길입니다. 그런 거룩한 고독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복음사역을 위해서 죽어 본적이 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목회자를 위해 금식도 한다는데 아내는 또 나를 위해 얼마나 사랑으로 기도하겠어요. 성도들은 마음을 다해서 목회자와 함께 교회를 섬기려고 하고 복음의 열정에 불타는 성도들은 목회자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열방에 복음을 전하고 낙도 오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물질도 시간도 내몸도 젊음도 아낌없이 드립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내가 외로운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토양일 뿐입니다. 주위의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다가 피를 토하며 죽어가도 그들이 나누어질 수 없는 내가 직접 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보시면서 선교와 목회에 꽃을 피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학문이 모자랐나요? 능력이 부족했나요? 그런 출중한 복음사역을 한 사람이니 동역자가 모자랐겠습니까? 이방선교의 아버지였고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놓은 사람 아니였습니까? 그런데 오늘 뭐라고 고백합니까?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내어 준바 되어서 죽고 죽음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 이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겠어요. 얼핏 보면 이 성경구절은 “내가 예수를 죽인 사람이다.”라는 가책을 짊어지고 평생 겸손하게 산다는 뜻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예수 죽인 것” 이 아니라 “예수 죽으심” 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죽으심을 내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내 몸에 나타나게 하는 것 그렇게 하면서 사니까 죽음은 내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양떼들 안에 역사하느니라.
목회자와 선교사는 영혼을 살리는 사람이기 전에 자기를 죽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목회를 하면서 선교를 하면서 자기를 죽일 생각은 안하고 영혼만 살리기 위한 비전만 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좋은 땅에 심겨졌지만 밀알이 썩지 않으니까 밀의 눈이 트이지 못하는 그런 식의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사역이 큰 얼마나 열매를 맺고 확장을 하느냐 목회를 잘해서 큰 교회가 되고 성공을 하느냐 선교를 잘해서 선교지에 놀라운 복음전파의 역사가 나타나느냐 이것하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김옥수 선교사의 첫 번째 선교지는 그대 자신입니다. 그게 가장 어려운 선교지 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예수 죽으심을 내 몸에 짊어진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나”라고 하는 이 존재는 부패한 옛 자아인데 이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수구스티누스토)는 말하기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도 죽을 때까지 숙명적으로 옛 사람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짊어진다고만 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도 그랬지만 선교지에 나가면 나는 하나님이 선교지에 항상 복만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형통함만을 주시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난이와도 시련이와도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주위에서 오해를 합니다. 심하면 모략, 중상 심하면 나는 그들을 정말 사랑하는데 그들은 나에게 핍박과 배신으로 갚을 수가 있습니다. 그때 이를 악물고 ‘저 인간들’하고 “아! 고달픈 선교사의 신세여”라고 하면 그것은 예수 죽으심을 짊어 지는게 아닙니다. 고난이 와도 시련이 와도 할 말이 많아도 나를 비방하고 오해하고 모략하고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도 하는게 아닙니다. 그대로 짊어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날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겁니다.
(찬송) 머리에 가시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우리 주님이 지신 그 쓰라린 십자가가 바로 나 같은 죄인 때문에 당하신 십자가구나. 주님이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으니 이번엔 내가 예수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고난 속으로 자기가 지금 당하는 모든 고통을 심리학적으로 투사시키는 겁니다.그 속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면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밀의 눈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하는 고통이 되어서 나의 심령 속으로 깊이 실제화 되어서 밀려옵니다..
그게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예전에도 못 박혔을 뿐만 아니라 계속 못 박혀 있고 지금도 예수와 함께 못 박히는 그 경험이야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셔야 했던 나의 모든 죄에 대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목회자라고 허울은 썻으나 선교사라고 명함은 가졌으나 사실은 자기를 선교하기 싫어하고 자기를 주님 앞에 목회하기 싫어하는 내 마대로 살려는 이 완고한 고집, 그리고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주님이 내 인생에 전부이시고 나는 주님 앞에 쓰레기와 같은 인간입니다. 이런 고백을 따라 살지 않으려는 육적자아의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리스도 예수와 고난을 통해 성례전적인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예수 죽으심을 내 몸에 짊어지지 않았을 때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내 환경을 탓하고 그리고 내 처지를 비관했는데 그게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주께 복종시키시기 위해서 내 마음에 예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진 선교지가 되게 하기 위해서 내게 주신 고난이로구나. 그러면서 내 마음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사랑을 받으실 분은 오직 예수뿐이라는 확신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한 목회자가 한 선교사가 자신의 온 영혼과 마음의 끓어오르는 열정을 담아서 주님의 심장으로 영혼을 사랑하며 그의 영혼을 위해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주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한마디의 밀이 되어 그들에게 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런 무수한 자기 죽음의 길을 가야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죽으심을 내 몸에 짊어진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예수의 생명도 내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이 몸은 살을 가진 육적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내 존재 안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찬송)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자기가 죽은 전도자는 피 묻은 복음을 전하지만 자기가 살아있는 전도자는 침 묻은 복음을 전합니다. 자기가 죽은 목회자는 핏빛 목양을 하지만 자기가 살아있는 목회자는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목회를 합니다. 자기가 살아있는 목회자는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목회를 합니다. 자기가 예수와 함께 죽음을 경험한 선교사는 오직 그 불쌍한 영혼을 향한 주님의 눈물을 닦아 드리는 마음으로 선교를 하지만 자기가 주님 앞에 죽임을 당하지 않은 선교사는 항상 혈기로 선교를 합니다. 예수님이 명절 곧 끝 날에 외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리라.”
김옥수 선교사의 배에 예수의 생명이 충만하게 넘치면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 생명 물을 먹고 새 삶을 사는 수많은 생명들이 영혼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대 속에 그 생명이 없다면 그대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떤 고생을 하든지 내게 없는 것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내게 없는 예수의 생명을 어떻게 다는 사람의 속에 일으킬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이 목회 이 선교는 끊임없는 자기 죽음의 길입니다. 참아야 합니다. 고난도 , 시련도, 외로움도 참고 오해와 박해 비난과 모함 고독과 미래에 대한 염려까지도 모도 견디며 그것을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못 박히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이루고 일생에 무슨 비전을 성취하고 그것이 아니라 나는 점점 썩어서 사라지고 내가 그렇게 죽기 때문에 영혼들은 생명을 얻게 되고 그런 삶이 꿈이어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선교사의 꿈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썩는 것 그래서 나는 다 사라지고 그리고 밀의 눈이신 예수만이 내 안에서 충분하게 살아 날 보는 사람들이 나는 잊어버리고 예수만 생각하게 되는 삶이 복음사역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생명이란 것은 모든 죽음에 항거하는 기능이고 김옥수 선교사 뿐 아니라 이 세상 누구도 자기가 죽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면 그 죽음에 예수와 함께 죽는 그 끔찍한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 누구든지 즐거운 것은 좋고 괴로운 것은 싫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고난을 받으면서 자기 죽음의 길을 가는 고통을 참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게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병아리 선교사지만 5년 10년이 지나면 노련한 선교사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도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떨림으로 무릎을 꿇고 목회의 문을 두드리고 선교의 문을 두드릴 때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주님만이 나의 사랑이시고 내가 주님을 떠나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러던 어린아이 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순수한 사랑이 사라지는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김선교사는 인생 최대의 숙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찬송)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에 받으셨나?
나는 선교사 김옥수가 아니야 나는 복음사역자 아무개가 아니야 나는 하나님을 멀리l 떠났던 더러운 죄인이야. 그런데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서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나 같은 더러운 죄인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믿어지지 않는 이 복음을 주님은 내 마음에 믿어지게 하셔서 위대한 선교의 비전도 큰 교회를 하겠다는 목회의 꿈도 하늘나라의 큰 영광과 상급에 대한 비전도 없이 어떻게 할까? 그 좋은 주님은 나 같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위해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주셨는데 나는 어떻게 하나 주님은 나를 위해 모두 바치셨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머리 끝 부터 발끝까지 내 몸에 흐르는 피 한 방울까지도 모두 예수의 것인데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주님 그 길이 어디이지 모르지만 주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존귀 영광 모든 권세를 받으실 수 있다면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질께요 하고 들어선 길입니다. 그게 뭐였습니까? 사랑이었습니다. 그게 날이 갈수록 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곤고했던 시절에 열린교회 문을 두드리고 그렇게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예배를 드리던 그 한 마리의 어린 양이던 시절에 그 사랑의 마음. 왜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을까? 그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오히려 그 사랑이 날마다 깊어져야 합니다.
목회가 무엇일까? 선교가 무얼까? 그것은 그 선교사의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것입니다. 예수님, 영혼, 하나님의 나라, 가난한 자, 병든 자, 곤고한 세상 이런 낱말만 들어도 눈물이 꽉 차는 겁니다. 나는 살아있고 저희들 가운데는 죽음이 역사하는데 하나님 예수의 죽음이 내 안에 역사해서 나는 날마다 죽고 저희들은 날마다 살게 해 주십옵소서. 그래서 주님이 좋아하시는 그 나라가 나의 선교지에서 목회지에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그게 아닙니다. 나머지는 다 사소한 것들이에요. 얼마나 큰 선교지에서 후배들의 존경을 받느냐. 얼마나 큰 교회를 목회 하느냐. 유명해지느냐. 높은 지위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주님을 더 사랑해서 어디에 가든지 잘 죽는 선교사, 그래서 자신은 예수 죽음의 산 기우고 우리 주님의 생명은 불쌍한 영혼들 가운데서 역사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착한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