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의 선교 리더십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마9:9~10)”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나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행1:13)”
녹취자: 조은령
하필이면 저에게 왜 마태에 대해서 하라고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태에 대하여 할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성경구절이 신약 여섯 곳에 나오는데 그중 두개는 “예수님의 제자의 이름은 이러하니”하며 나오는 것이 끝이고 나머지 네 구절은 마태복음 9장 9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기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태복음 9장 10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사도행전 1장“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나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입니다.
이것으로 120분 강의를 하라기에 본인들보고 와서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회개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른 땅에서 샘물 파듯이 팠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많이 주신 것 같습니다.
이 강의는 마태의 리더십을 선교와 관련시켜서 생각해보기 위해서 마련된 강좌입니다. 마태라고 하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보시다시피 나오는 구절이 몇 군데 있지만 이름만 거명이 되고 사도행전에서도 함께 기도한 사람의 명단에 마태의 이름이 나온 후에는 신약성경의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또 놀라운 것은 성경 밖의 문헌인 교회사의 문헌에서도 이 마태의 이름은 별로 기록에 나오지 않고 완전히 사라져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강의를 통해서 마태가 신약에서 선교에 어떻게 기여했고 교회 역사가 그의 선교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늠한다고 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료의 결핍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마태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이 어디에서 왔을까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데, 많은 학자들은 시몬을 베드로라고 이름지어주신 것처럼, 이 이름이 마태의 원이름이 아니라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지어주신 이름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의하면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은 ‘레위’라고 불린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도 이것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레위가 지파로서의 레위를 이야기하는 것이냐, 이름을 레위라고 했느냐 하는 것에서는 이름이 레위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 레위가 진짜 레위지파 사람이었겠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이 레위는 사실 마태의 옛날 이름이라기보다는 레위의 아들 마태일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마태가 누구일까 하는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가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마태로 바뀐 사람일 것이라는 의견이 대체적으로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또 이 마태의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여러 번 나오고 또 사도행전에 자주 등장한다면 선교 활동을 위해서 이 사람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었는지 추적해볼 수 있었는데, 마태의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 사람을 통해서 선교 리더십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는 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마태의 선교리더십이라고 했느냐면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붙인 강의 제목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비록 마태가 선교 역사에서 어떻게 활동했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나오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제한된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선교자적인 삶을 삶에 있어서 마태가 경험했던 바들이 아주 치명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제한된 본문 속에서도 훌륭하게 진짜 선교사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리더십의 덕목들을 찾아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여러분들과 함께 두 시간에 걸쳐서 나누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교와 마태를 관련지어서 생각해볼 때 사도행전이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풍부히 담고 있는데 마태의 활동상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의 활동상에 대해서 침묵을 해도 다른 교회사의 기록에서 마태의 이야기가 등장한다면 성경과 같은 권위가 있는 줄거리는 아니지만 참고로 해볼 텐데 신기하게 마태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교부들 가운데 오리게네스트를 비롯해서 혹은 유대인 역사가 유세비우스 같은 사람들의 글 속에 이 사람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모두 신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의 저자 문제를 거론할 때 마태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 역사가들과 교부들의 글들을 통해서 마태가 마태복음을 지은 장본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일치된 증언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록에는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가 썼고 마태복음의 저자는 원래 레위였는데 세리였으나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이라고 하는 상세한 증언까지 나옵니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그치지 실제로 이 사람이 어떻게 설교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추측컨대 이 사람이 사도행전에서 왜 선교 역사의 주역으로 나타나지 않을까에 대해서 몇 가지 의견들로 집약되는데 첫째 견해는 이 마태가 일찍 순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일찍 순교했기 때문에 활동을 기록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도 조금 이의가 생기는데 순교를 했다면 다른 사도들이 순교한 기록이 성경에 모두 나오지는 않지만 성경 밖의 기록들에는 순교의 흔적들이 나오는 사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해서 안나오는 것도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행방불명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를 추측해봅니다. 어떻든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다가 실종되었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찾아낼 수 없는 여러 가지 사고로 인해서 일찍 하나님의 나라로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이 선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선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바울이라는 인물을 사도행전이 추적해 갔다기 보다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교회 확장의 위대한 역사를 써가다 보니까 그 자리 중심에 항상 사도바울이 있었기 때문에 따라 내려가게 된 것이고 더욱이 누가는 바울에게 있어서 비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많은 관심사를 가지고 하나님이 훌륭한 선교의 인물로 쓰신 바울을 추적해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추측이 사실에 상당히 가깝다고 설득할 수 있는 이유는 예를 들자면 가롯유다가 죽은 다음에 맛디아를 대신 선택하게 됩니다. 맛디아가 가롯유다의 자리를 채움으로 말미암아 열두 사도가 꽉 차게 되었고 그 이후에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원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었던 맛디아가 그 이후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맛디아가 그렇게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과 연루된 인물이었지만 사도행전이 선교의 역사를 적어가고 있는 책으로서 열두 사도의 행적만을 모두 따라가며 추적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기록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소외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 가운데에는 사도행전에서 더 이상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 말고 또 있습니다. 이런 모든 사실로 미루어볼 때 선교 역사 속에서 신약성경에서 이 마태의 이름이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 것이 우리들에게 매우 특이한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이 사람이 거의 주님을 섬기지 않았다고 믿거나 아니면 심지어 변절했다고 믿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자료들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들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이 마태는 원래는 세리였는데 이름은 레위였고, 그러다 예수님께 부름을 받아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되었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 사도가 되었으며, 그 후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과 함께 묻어 있다가 나중에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오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고, 승천하시는 광경까지 보면서 그들이 모여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맞을 때까지 그 무리 가운데 있었고, 거기에서 성령강림을 경험했고, 그랬으니까 당연히 이 사람이 다른 모든 사도들, 그리고 거기 모였던 제자들과 함께 복음에 불붙은 사람이 되어서 유대인들에게 담대히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죽는 순간까지 아마 그는 신약성경의 포커스에서는 소외되었지만 어떻든 복음 선교를 위해서는 애쓰고 힘썼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확신을 가지고 추측할 수가 있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마태를 통해서 선교적 삶에 있어서의 리더십을 배우기 전에 리더십과 신앙과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리더십이라고 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자기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을 이끌고 특정한 목적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리더십이란 바로 그렇게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목적을 함께 이루기 위해서 그들을 조직하고 이끌고 감화시키고 격려할 수 있는 영적이고 인격적인 자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리더십의 정의입니다.
그래서 이 리더십은 우리들에게 매우 명백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리더십은 섬기는 사람마다 각각 다른 작은 목표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공통된 목표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들자면 전쟁을 할 때 항상 총을 쏘고 대포를 쏘고 총 끝에 대검을 꽂고 백병전을 벌이는 병사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포를 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면서 기총소사를 해서, 혹은 폭탄을 날려서 아군이 공격하기에 용이하도록 적군의 주력부대를 섬멸하는 공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해안 가까이 배를 접근 시켜서 수많은 대포를 날려서 아군이 공격해 갈 때에 아군의 목숨을 노리는 수많은 진지들과 병참기지를 파괴하는 함포도 있습니다. 거기에서 근무하는 해군들도 있습니다.
어디 그런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육군이 전쟁을 잘 하기 위해서는 맨몸으로 가서 싸우는 것이 아니니 무기를 만드는 공장에도 군인들이 있을 것이고 군인들이 한번 먹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싸우는 것이 아니니 급식부대도 있을 것입니다. 또 급식을 하고 나면 차라도 한잔 마셔야 힘이 날 테니 커피를 만들어 봉지에 담는 부대도 있을 것이고 심지어는 위문품들을 전국에서 모아서 여러 가지 잡지까지 넣어 보내주는 우송부대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각각 다르고 목표는 아주 다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각각 기여하고 있는 작은 목표는 보다 궁극적이고 커다란 목표인 전쟁에서의 승리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이 모든 작은 개별적인 활동들이 함께 모여서 작용을 하므로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기독교 사역자라고 할지라도 어떤 일에 있어서 리더가 되느냐에 따라서 각각 그 리더십에 있어서 강조되어야 할 각각의 중요성들이 각각 다르게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사역에 따라서 각각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목회자의 덕목이라고 하면 오래 참고 견디면서 한 곳에서 오래 사역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를 하는 사람이 2년에 한번씩 교회를 팽개치고 다른 교회로 옮겨 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다고 해서 교회가 모두 문을 닫는 것은 아니겠지만 목회사역이 옳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교사라고 생각해봅시다. 산지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선교하고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은 선교사가 한곳에 교회를 지어놓고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10년 20년을 떠나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선교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지정된 곳에서 한 교회를 목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지역교회의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각각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강조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개별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활동 속에서의 적용점의 차이 때문에 어떤 덕목들이 중요하게 인정받느냐는 각각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만일 교회에서 뭔가를 섬기는데 교회에 출납하는 많은 헌금을 다루는 일에 봉사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가 비록 기도를 조금 덜 한다고 할지라도 정확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만일 리더라면 교회에서 그런 많은 금전들을 출납하고 정리하는 일을 시킬 때 기도는 많이 하지만 늘 흘리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열 번 계산하면 아홉 번쯤 틀리는 사람, 그리고 돈에 있어서 ‘네 돈도 내 돈, 내 돈도 내 돈’하는 식의 불분명한 경제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쓰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정확하면 좋겠지만, 그 사람보다 기도를 좀 덜 한다고 하더라도 워낙 계산에 밝고 ‘남의 돈은 남의 돈, 내 돈은 내 돈’하며 단돈 10원을 빚지고도 못사는, 경제에 대해서 정확한 사람, 그리고 돈을 계산하다가 만원쯤 틀려도 만원 한 장 가지고 벌벌 떨면서 그 원인을 끝까지 규명하려고 하는 회계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일꾼으로 쓸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거기 있는 사람들은 따지기 좋아하고 꼼꼼하고 빈틈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기 좋아하고 빈틈이 없고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 새가족위원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서서 규율부장 역할을 할 것입니다. ‘옷차림이 그게 뭐요? ...... 그렇게 신앙생활해서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새가족 안내를 한다면 새가족이 남아나겠습니까? 거기에는 돈 관념이 좀 흐릿해도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많이 이해하고 품을 수 있고 언쟁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봉사할 수 있는, 그리고 그런 것에서 보람을 찾는 성품을 가진 사람을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재정위원회에 있는 리더의 덕목과 새가족 팀장의 덕목은 각각 다른 것입니다.
또 교회의 시설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이 무척 어렵습니다. 땀을 수없이 흘려도 하나도 표가 안 납니다. 그래서 관리 파트에서 근무하는 교회 직원들을 보면 늘 미안합니다. 장마 기간 동안 벽돌에 자디잔 이끼가 끼었는데 내버려두면 시커먼 색으로 변해서 무엇으로 닦아도 안집니다. 그러니 그 바닥을 기계 솔로 전부 긁어내야 합니다. 하루 종일 해도 남들이 보면 티도 안 납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의 덕목은 어차피 돈 안 만지니까 돈 계산 정확히 못해도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못해도 됩니다. 그런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리더는 묵묵하고 성실하고 창의적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비교해 봐도 각각 덕목이 다 다릅니다. 한 가지만 더하자면 교회당을 둘러보면 디자인이 깨끗하게 잘 되어있습니다. 디자인 팀이 있어서 현수막도 디자인하고 책표지도 예쁘게 디자인합니다. 그랬더니 우리 교인들의 미적 감각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현수막 디자인하는 지체가 너무 일이 많아 다른 지체를 불러서 일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했지만 계속 격려해서 그 사람을 키워줬으면 했는데 그 지체 앞에서 현수막을 보며 촌스럽다느니 떼어버렸으면 좋겠다느니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상처를 받았답니다. 디자인에 봉사하는 사람은 돈 계산 정확하게 할 줄 모르고 꾸준히 비지땀 흘리며 청소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지 못한다고 해도 창의력이 뛰어나서 남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디자인을 해서 사람들이 감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일에 따라서 각각 개별적으로는 작은 덕목들이 다릅니다. 각각 다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다른 것들이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디자인을 해도 그것은 교회를 위한 일이요 교회를 위한 일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요 청소를 해도 성도들을 위한 일이요 성도들을 위한 그 일은 곧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이고, 새가족들을 돌보는 것은 곧 새가족을 보내주신 예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을 섬기든지 다양한 섬김 속에 다양한 종류의 리더십이 요구되는데 그 중심에 있는 기본 정신들은 -다양한 리더십 모든 것을 통합하는 중심 자리에 있는 이 자질들은-공통적인 것입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돈을 세고 계산하고 교회의 재정을 꾸려갑니다. 교회에 돈이 많이 있을 때는 걱정이 없습니다. 천만 원이 들어왔는데 교회에서 백만 원밖에 쓰지 않는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천만 원이 들어왔는데 교회에서 천백만 원을 쓰겠다고 한다면 쥐어짜며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돈을 꿔야 하나, 지출할 것 중 어떤 것을 뒤로 미뤄야 하나, 미뤄도 선교활동에는 지장이 없을까’하는 것들을 생각하며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면 섬기다가 고통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떤 동기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많은 고통을 참게 만들어 줄까요? 다른 지체들은 주일이면 그냥 유쾌하게 교회에 오는데 자신은 재정팀의 리더이기 때문에 그것을 끌어안고 고민하고 헌금 많이 들어오면 기뻐합니다. 10원 하나 자기 통장으로 옮아가는 것은 아닌데 거기에서 긴장이 오고 고통이 시작됩니다.
지금은 장로님이 되셨지만 어떤 분들은 교회 지을 때 공사하며 자꾸 돈이 들어가야 하니까 산꼭대기 올라가서 혼자 우셨답니다. 무엇이 그것을 그만두지 못하게 합니까? 디자인을 하는데 아이디어가 안나오는 것을 힘써 그려놨더니 사람들이 누가 이렇게 했냐며 떼어버리자고 합니다. 그래도 참으며 계속 봉사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만듭니까? 관리 직원으로서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데 어느 누구도 와서 칭찬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면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설교 듣고 은혜 받으면 마치 그 목사님 주머니에서 은혜를 꺼내 준 것처럼 찾아와서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빌딩 관리하는 관리 직원 붙들고 ‘이 마당이 깨끗한 것은 모두 당신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잘 한 것에 대해서는 원래 그런 것 인줄 압니다. 그런데 지저분하면 ‘관리 파트 직원들이 청소를 안 했구먼’ 하는 것입니다. 잘되면 원래 그런 것이고 안 되면 책임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꾹 참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변함없이 섬기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맡은 파트에 따라 각각 틀립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섬김의 중심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어떤 군인은 아침부터 밤까지 건빵만 만듭니다. 밀가루를 뒤집어쓰며 물집이 생길 정도로 생고생을 합니다. 다 때려 치고 싶지만 참는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안 나가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사는데 비행기를 몰고 하늘로 뜹니다. 목숨을 걸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폭탄을 떨어뜨립니다. 수없이 폭탄이 날아오고 미사일이 추격하며 거의 죽을 지경이 되고 심하면 한방 맞고 뒤꽁무니에 불이 붙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그 폭탄을 떨어트리기 위해서 적진을 향해서 돌진하게 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가면 분명히 죽는데 ‘제가 가겠습니다’ 손들고 총 끝에 칼을 꽂고 가서 적군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사람, 거기에서 수많은 배고픔과 추위, 질병이 있는데도 물러서지 않고 돌격 앞으로 하게 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건빵 만드는 군인의 동기가 틀리고 비행기 모는 군인의 동기가 틀리고 대포 쏘는 군인의 동기가 틀리고 물 속에서 수중 폭파하는 대원들의 동기가 틀립니까? 동기는 모두 하나입니다. 애국심입니다. 이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나라를 지킬 수 있겠는가 나쁜 놈들이 이 평화로운 나라를 공격했으니 내가 이 백성의 이름으로 너를 징벌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신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월급 받아먹는 때는 애국심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오고 손해 볼 일이 생기고 죽음의 위협이 왔다 갔다 하면 필요한 것은 애국심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섬김 속에는 각각 섬김의 종류에 따라서 다양한 덕목이 우선시 되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정중앙에는 공통된 덕목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덕목의 핵심에는 그 덕목을 생산해 내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리더십의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 예수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들만이 제대로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직원을 뽑을 때도 돈을 만지면서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은 정확하고 양심적인 사람이어야 하고, 관리 파트에서 일할 사람은 튼튼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하루 나오고 하루 결근하는 연약한 육체를 가진 사람은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어도 교회를 사랑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할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동안에는 있지만, 신앙에 의해서 그들에게 희생이 강요되고 고난이 강요될 경우에는 거기 있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각기 자기가 맡은 분야에 있어서 전문성이나 재능도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그가 진짜 제대로 만난 사람인가, 그리고 정말 그의 마음속에 무엇을 하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돌려드리고 그분을 섬기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에게 있는가 하는 것을 봐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섬김에 공통적으로 존재해야 할 원천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물으신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를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면 영혼들을 돌볼 사람에게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물어보시겠습니까? 영혼을 돌볼 목회자에게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시고 교회에서 행정이나 여러 가지 일을 할 때는 “네가 세상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는 일은 달라도 질문은 모두 똑같이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물어보시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각종의 재능들이 있고 달란트가 있는데 이 달란트는 소명과 관련됩니다. 헤르만바빙크라고 하는 신학자는 ‘소명은 재능에 의해서 확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목회 사역에 소명을 받았는데 아무리 설교해도 사람들이 감동을 안받고, 하면 할수록 설교에 아무런 재주가 없다고 하는 것이 더 잘 증명이 된다면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자기 욕심으로 서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셨을 때는 그 속에 재능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런 게 별로 없는데도 소명 받은 경우가 있지 않겠느냐고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한데 더 파보면 압니다. 파보기 위해서 자신이 끊임없이 죽으면서 목숨을 걸고 파보십시오. 그러면 그 속에 놀라운 것들이 묻혀져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던지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모든 섬김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각각 받은 재능의 영역 속에서 여러분들을 인도할 지도자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각기 가지고 있는 재능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잘하고 너무나 훌륭하고 아는 사람도 많고 도구들도 많고 지식도 많고 지혜도 뛰어납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너무 세속적이고 방탕한 사람이라면 여러분들이 그 리더십에 대해서 복종할 수 있겠습니까? 설교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 인격은 엉망이고 세상만 사랑한다면 여러분들의 목자로서 존중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 온지도 아주 오래되었고 성경도 나보다 잘 가르치는 구역장이지만 그의 생활 어디를 살펴보아도 주님을 사랑하는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여러분보다 교회 오래 다니고 열린교회에 말뚝 박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여러분의 리더로 존중해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을 여러분들의 리더로 존중해줄 수 있다면 여러분들도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섬기는 자들의 중심에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경험이 있게 마련이고 모든 하나님을 섬기는 이 소명의 한복판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수를 부었을 때 제자들은 그녀를 나무라면서 ‘그 비싼 향유를 왜 예수님께 부어버리느냐? 가난한 사람들을 그것으로 구제하면 좋을 텐데’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언지하에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이 여자의 행한 일도 전하여져 기념이 되리라”하시며 이 여자의 편을 드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는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섬겨야겠다는 일을 먼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먼저 엎드려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죄인 살리신 주님의 그 놀라운 은혜 때문에 엎어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많이 선교사역을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긴다고 많이 애를 써도 이 섬김들이 제대로 충만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섬기는 개개인들의 기량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사랑하는 진실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의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결국은 예수님을 위해서 그 일을 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무엇을 해도 결국은 자기 자신이 좋은 대로 그 일을 해서 자신이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리더십의 중심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이야기는 곧 그를 향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께 영향을 받는다는 뜻은 이렇습니다. 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사랑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신앙심이 깊다는 것은 ‘믿습니다’를 많이 연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많이 의지한다는 의미와 또 하나는 그분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기 때문에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분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을 향한 신앙심이 깊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신자가 갖게 되면 점점 자기를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게 되면 알게 될 수록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룩하고 위대하신 분이시고 자기는 하나님 앞에 정말 만물의 찌끼와 같이 더러운 죄인이기 때문에 그 거룩하신 주님 앞에 자신이 설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때 -거룩하신 하나님과 비천한 자기 사이에 이 무한한 격차가 있다고 생각 될 때- 그는 누구를 의지하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분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쓰레기 같이 더러운 죄인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고 그분의 그 중보의 공로를 통해서 그렇게 쓰레기와 같이 더러운 죄인인데도 우리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자신에 대한 의지하는 마음들은 파괴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스도가 전부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갖게 될 수록 그분과의 관계가 매우 소중해지지 않겠습니까? 소중해지다 못해 마지막에는 그분과의 관계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깨트리고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순결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무슨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든지 그 사람이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같은 논리에 의해서 그는 순결한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단지 그 사역을 통해서 돈을 안받고 일하는 것만이 순결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하는가 하는 신앙 속에 포함된 개념입니다. 그 분을 깊이 의지하게 되면 그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면 그분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고 안정되지 못한 모든 환경과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인격적인 보호 아래 자기의 모든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자신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순결은 바로 그렇게 모든 소망을 그분께 두고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자신이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주님을 섬기든지 리더가 되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각 부서의 책임을 진 팀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몇 명 안 되는 팀을 데리고 함께 일하지만 거기에서 팀장으로 세워진 사람이 영적인 우위에 있을 때에는 조직이 안정되고 함께 일하는 지체들이 그 팀장을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어린데 어쩔 수 없는 이유에 의해서 리더가 되었다면 그 조직이 계속 불안합니다. 자기들이 다 퇴근한 후에 끝까지 남아서 밤새도록 나머지 일들을 마무리 한다면 그것은 헌신입니다. 일이 좀 서툴다 해도 그렇게 철저히 헌신되어 있고 다른 것이 좀 부족하다해도 많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 점에 있어서는 자신이 항상 그 리더 앞에서 부족함을 느끼면 그 조직은 안정되고 그 리더에 의해서 움직여집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되면 그리스도로부터 끊임없는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코미디 프로를 한참 보면 인기 있는 코미디언의 말을 따라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흉내를 내는데 한참 흉내 내다 보면 따라합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그 코미디언이나 개그맨들을 존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습관이 되어서 따라가는데 만일 누군가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정신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하는 것도 따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성품이 가지고 있는 특징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친화력을 느끼면서 그 사람을 계속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예수님보다 이 세상과 많이 함께 하고 있으면 세상을 훨씬 더 많이 배우고 세상을 향해 마음을 많이 열게 되고 세상과 친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첫 번째 목적이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당신 곁에 함께 있으려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할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할일이 많은 세상이어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다고 우리들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동업자를 모으는 정신으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부족한 제자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제일 기대하신 바는 당신 곁에 두셔서 당신 자신의 삶을 그들이 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영감을 받고 어떻게 주님을 섬기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말로 할 수 없는 이 신비한 것들을 예수님 곁에서 자고 먹고 함께 생활하면서 본받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게리쿠네라고 하는 사람은 이것을 ‘transference of life’ 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삶의 전수’입니다. 삶 혹은 생명을 제자들에게 전수 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메모지에 적어서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감각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오래 지내면서 예수님의 정신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워나가다 보면 예수님이 안 계실 때도 마치 예수님이 계신 것처럼 행동하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을 통해서 얻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금 여기 안 계신데도 마치 예수님이 계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처럼 예수님을 느끼면서 예수님의 분신처럼 삽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수시로 그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촉구를 하셔도 예수님의 뜻을 본받아서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 당신 자신의 모습을 다 보여주면서 ‘이렇게 살아라’고 많이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두 순종했습니까? 절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순종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불순종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심으로 당신에게 영향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을 전수시켜주는 비결들입니다.
우리가 리더십을 배운다고 하는데 누구에게서 리더십을 가장 잘 배울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에게서 직접 배운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안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결이라는 단어도 잘 모르는 초신자에게 ‘성결하게 사십시오’라고 하면, 국어사전을 펴서 찾아보니 ‘종교적으로 깨끗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성결하게 살라고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성결이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을 통해서 뜻은 알았는데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하며 애를 쓰며 기도하고 ‘안 가르쳐주시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해도 그가 성결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었어도 옆에 진짜 주님을 신실하게 사랑하는 형제, 자매가 있어서 그들이 수시로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날마다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면서 살아간다면, 그리고 주님의 모습을 닮지 못한 것을 큰 재산을 도둑맞은 것처럼 슬퍼하고 주님의 모습을 조금 닮게 된 것을 인해서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 세상에 있는 재물이나 이 세상의 금전적인 유익, 신분상의 이익을 위해서 신앙을 팔아먹는 행동 같은 것은 하지 않고 일체의 올곧음과 성실함으로 주님을 닮아가려는 매일 분투하는 형제들을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자기가 보기에는 발 벗고 따라가려해도 따라갈 수 없는 지체들인데 새벽마다 자신이 더러운 죄인이라며 회개하고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죄는 자신이 더 많이 지었는데 왜 앞 사람이 회개할까 생각합니다. 나는 왜 이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죄를 짓고도 회개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의문들을 실제의 성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러한 성결을 가장 잘 배울 수 있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성결을 배운다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께 영향을 받아서 성결한 삶을 사는 사람을 통해서 배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칫 오해받을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왜 자기가 예수님과의 사이에 끼어드는 것입니까?
(예화:어느 집회에 갔더니 설교자가 느닷없이 ‘나는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겠 다’고 하면서 자기는 ‘바울아 너는 비켜라. 내가 예수님께 직접 간다’고 외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다 떼어 버리고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다음에 건너 뛰어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만 가지고 다녀야 한다. 신약 성경의 절반 이상을 쓰고 그를 통해서 기독교를 깨닫게 해주신 바울을 보고 ‘비 켜라. 내가 예수님을 직접 믿겠다’고 하면 그 설교자가 교만한 사람인지 “그리스 도 예수를 내가 본받은 것같이 너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는 바울이 교 만한지 예수님께 직접 여쭈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한 것은 ‘네까짓 것들이 어떻게 예수를 직접 본받겠느냐 나나 본 받아라. 그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하는 뜻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본받는 가장 훌륭한 길은 일생을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온 나를 보는 것이다. 그러면 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원리에 의해서 기독교 복음을 확장시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 선생이 기독교 강요 교회론에서 ‘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을 결함이 없고 순전하고 뛰어난, 오류도 없고 인간보다 지혜롭기 짝이 없는, 천사를 보내어서 목자를 삼지 아니하시고, 허물이 많은 인간을 목자로 삼으셨을까?’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의 목자가 되고 설교를 한다고 해서 제가 신앙의 경지를 득도한 사람입니까? 저는 한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도 저의 계속되는 고민은 ‘어떻게 목회를 잘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은 신자가 될까’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실 리는 없지만 ‘네가 훌륭한 목회자가 될래, 아니면 좋은 신앙을 가진 한 사람의 신자가 될래?’ 하신다면 저는 30초도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선택을 하게하실 리는 없습니다. 두 가지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을 목회하면서 저는 점점 더 좋은 신자가 되어가기를 원합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에게 한번 보여주기 위해서 좋은 신자가 되어가려고 애를 썼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좋은 신자가 되어갔던 것은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깊이 감격할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예수님을 닮는 것뿐이었습니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주님을 닮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그랬더니 바울을 보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 말씀드린 그 설교자를 보면서는 전혀 예수님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차이입니다. 바로 그런 일을 위해서 같은 죄인인 형제 가운데 목회자를 세우시고 영적인 지도자를 세우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에 있어서 리더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 때 두 가지 변화가 그 사람에게 일어나게 됩니다. 첫째는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해서 갑자기 새사람이 됩니까? 물론 그는 어떤 면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낙인찍힌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모든 죄를 예수의 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전에는 진노 아래 있는 죄인이었는데 이제는 용서 받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전에는 마음과 온 영혼이 죄의 사슬에 매여서 죄와 유혹이 이끄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모든 속박들을 풀어주셨습니다. 마치 올무에 갇혀있던 새가 사냥꾼의 올무를 뚫고 나왔을 때 그 속박에서 벗어나서 훨훨 날아가게 되어서, 올무 속에서는 미친 듯이 날갯짓을 하고 피가 나도록 바람을 일으켜도, 어깻죽지가 떨어지도록 날갯짓을 해도, 올무에 갇혀 있기에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올무에서 벗어나자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포수의 올무를 비웃으면서 날아오를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우리에게 해주셨습니다.
전에는 숙명적으로 죄에 졌으나 이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의지하면 이 성령의 은혜로서 죄를 이길 수 있는 자유함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죄성은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본성이 근본적으로는 새롭게 되었지만 그 본성이 하나님 앞에서 계속 새로워져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신앙 안에서 그분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되면 본성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저는 음악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귀로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폭넓게 이해하면서 음악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르가 몇 가지 있는데 글을 쓰거나 명상을 할 때 항상 그 음악이 도움이 됩니다. 생각을 잘 나게 만들고 어떤 음악은 두통이 올 때 두통을 가라앉혀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는데 예수 믿기 전에는 새벽 한 두시까지 라디오 틀어놓고 팝송이나 지금 생각하면 너절한 세상 노래들을 외우고, 들은 소감을 쓰면서 살았는데 제가 찬송을 그렇게 묵상하며 살았으면 지금 훨씬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야로 팝송을 묵상하며 살았습니다. 화장실에서도 음악이 나와야만 편안하게 볼일을 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고 은혜를 받고나니 그 음악이 점점 싫어졌습니다. 지금은 옛날에 잘 듣던 음악이 나오면 견디기 힘들게 짜증이 납니다. 그렇다고 찬송가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듣는 무지한의 경건파는 아닙니다. 그러나 택시를 타도 그런 음악이 나오면 끄자고 합니다. 끄기 싫다고 하면 다른 차를 타고 갈 테니 세우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깨달은 것은 사람이 좋아하는 가락은 본성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성이 신령한 쪽으로 변화되면 거듭나지 않은 가락은 싫은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음악에서도 입증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의 창조의 가락이 나름대로 존재한다는 가설이 있습니다. 그 원형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음악에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에 편안함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젓가락을 두드리며 하는 니나노나 들으면서 자란 아이들의 성품과 클래식을 들으면서 자란 아이들의 성품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고 신앙으로 그분과 연합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본성에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팔복에 나온 것과 유사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만하기 짝이 없던 사람이 계속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 은혜를 받다보니까 정말 자기가 비천한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전에는 자신만만하고 교만하던 사람인데 이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주님을 항상 바라보면서 ‘고단하고 피곤한 이 세상 속에서 나는 누구를 의지할 수 있을까? 예수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하며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본성이 생겨나면서 교만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 앞에서 비굴하게 비비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아주 무자비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온유한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열혈남아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죄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모세입니다. 십계명을 한번에 깨트려버린 사람입니다. 하나 어기려 해도 노력해야 할 수 있었을 텐데 열개를 한번에 깨트렸습니다. 그 돌 판이 무슨 죄입니까? 던지려면 돌 판은 내려놓고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을 한명 들어서 던져야지 하나님이 잘 새겨주신 것을 왜 던집니까? 혈기가 그렇게 살아있던 사람이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 사람은 원래 교만하고 호언장담하기 좋아하고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강력하게 풀무 불에 달구었습니다. 고난의 어려운 계곡을 통과하면서 그 마음이 깊이 녹아졌습니다. 그러더니 본성에 변화가 일어나서 온유한 사람으로 바뀌어갔습니다.
리더십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는 리더는 리더를 따르는 사람과 별다른 사람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별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서 자기가 보통사람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지도자가 지도력을 따르는 사람과 별다른 사람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남이 걸어오지 않은 특별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제가 묵상하며 생각했는데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짧은 문장으로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평신도 지도자나 특히 교역자들에게 늘 이야기합니다. 한 지도자가 어떤 상황에서 짤막한 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일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남들이 가보지 않은 그 길을 걷기 위해서 수없이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드는 경험을 한 사람만이 그 일에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리더가 그 리더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과 별다른 사람은 아니지만 똑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이어서는 리더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리더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똑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끊임없이 그분을 닮아가려고 애쓰고 끊임없이 그분께 순종하려고 애를 쓰는 그 일에 있어서 남보다 탁월한 열심을 가지고 그 일에 복종하려고 하고 그 일을 준행하려고 애를 쓸 때 그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의 본성이 계속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도자로서의 향취를 간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같이 가고 있는 그룹이 있는데 중대한 위기를 만났습니다. 이 때 다른 사람들을 모두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무지한의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가 희생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거나 책을 읽을 때는 감동 깊습니다. 몇 해 전에 쉐클턴의 위대한 항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남극을 탐험했던 쉐클턴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남극을 탐험하기 위해 갔다가 빙하에 갇혔습니다. 서서히 얼음이 변하면서 크랙들이 압박을 가하면서 배가 박살이 나서 파괴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누군가가 구조요청을 위해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결국 배가 부서져서 얼음위에 올라가 물개를 잡아먹으면서 연명하는데 탐험대장 쉐클턴이 대원 몇 명을 데리고 작은 배를 타고 1200키로를 항해해 가서 구조대를 요청해옵니다. 돛단배로 노저어서 그 1200키로를 가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시 그곳을 찾을 수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잘 따르는 사람은 거기에 남겨두고 사고치고 언제든지 대드는 위험한 인물들만 데리고 갑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잘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가 떠나도 자기가 거기에 살아있는 것처럼 한데 어우러져서 행동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남겨두면 반드시 거기에서 패가 갈라지고 싸움이 일어나서 누가 죽거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고치는 사람을 다 데리고 1200키로 대장정을 올라 결국 구조대를 요청해서 돌아옵니다.
지도자가 어떤 상황에서 무한한 희생을 감내할 때, 그것은 어느 한순간에 생겨난 인격적인 특징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수한 상황들을 경험하면서 희생하는 것을 끊임없이 결단하고 희생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몸에 배인 정신 속에서 위기 때에 자기의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용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본성의 변화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고 신앙으로 연합할수록 우리의 이기심들이 빠져나갑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며 리더십을 가지게 됩니다. 본성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은혜를 받으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기적이었던 사람들이 이타적인 사람들이 되고 세상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너절하고 세속적이던 사람들이 성결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격을 가지고 있을 때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그분께 연합되고 그분께 영향을 받으면서 얻는 또 다른 유익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지혜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도구 발달의 역사를 보면, 하다가 힘들면 집어치워버리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도구가 발견되는 적이 없습니다.
(예화: 예전에 소주병은 콜라병처럼 병따기로 따야 했다. 한 술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소주를 사먹었는데, 이로 병을 따다가 불편해서 플라스틱 병마개를 특허내서 부 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하나님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심한 지 2년밖에 안됐는데 성가대도 해보고 주일학교 교사, 구역장, 새가족위원,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다고 하는 사람이 섬김을 통해 무슨 지혜를 터득했겠습니까? 그래서 한번 했으면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놀라운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유능한 사람이 되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의 보상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악한 일일 경우에는 해당사항이 없지만 무엇을 하든지 잘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예화: 몇 해 전 휴면 계좌들을 전부 자기의 통장으로 모을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다- 발각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자 어떤 회사에서 그 사람과 같은 짓을 하는 사 람을 찾아내는 일을 맡기겠다고 특채했다는 이야기-도둑이 경비가 된 경우이다)
뭐든지 잘하면 세상에서 이렇게 대우를 받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특정한 일에 종사하게 될 때, 끊임없이 이 속에서 감사하면서 일을 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 사역에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주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주십니다. 그 사람을 점점 더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에 있어서 리더십이 자라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을 잘하게 되면 리더십이 저절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직장생활 할 때에도 업무를 잘 알고 있는 상사 밑에서 근무하는 것은 고달픕니다. 왜냐하면 너무 뻔히 알 기 때문에 ‘넌 왜 쉽게만 하려고 하느냐?’하면서 지적하기 때문에 불편합니다. 상사가 잘 모르면 쉽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큰일이 납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리더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많이 알고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그를 잘 따르며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배워서 제자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따라서 함께 섬기면서 배우게 되면 적은 노력으로도 하나님을 많이 섬겼다고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마태가 가지고 있는 리더십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9장 9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여기에서 우리들이 마태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하나님을 섬기는 선교적 리더십의 첫째는 옛 삶을 버리는 결단입니다.
이 사람은 세리였다고 나옵니다. 성경 뿐 아니라 키케로의 작품에 봐도 이 세리를 창기나 살인자와 동일한 반열에 놓고 평가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 시대의 세금 정책과 관련이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절대로 이민족에게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세금을 걷지 않았습니다. 민족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와서 세금을 걷어 가면 창칼이 무서우니 세금은 내지만 속으로 ‘다른 민족이 와서 우리 돈 다 뺏어 간다’는 마음이 불붙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들의 앞잡이들을 세웠습니다. 앞잡이들을 세워서 한 지역에 일정 금액의 세금을 지정해줍니다. 나머지는 얼마를 걷든지 그것은 그 사람의 재능이었습니다.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먹고 살만큼만 더 걷어서 자기의 생활을 했는데 악랄한 세리들은 그 권력을 등에 업고 사람들을 수탈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돈을 착복했습니다. 자비로운 마음이 없는 세리들은 악랄하게 해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축적했습니다. 같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그 일을 했으니까 유대인들은 그 사람들을 개같이 여겼습니다.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그 권력을 등에 업고 민족을 수탈한 행위니 아주 더럽게 여긴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일제 앞잡이 정도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민족으로부터는 버림을 받고 지탄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여유로운 삶을 살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경에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서 밥을 먹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당한 지위가 있지 않고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재산이 그 사람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지배하던 시대에 친일파가 살기 좋았듯이 이 사람도 떵떵거리며 사는 처지에 있었을 것입니다.
상세한 이야기는 안나오지만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뭔가 결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예수님에 대한 사전적인 지식을 마태가 가졌을 것이고 또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과의 만남이 생략되어서 보도되었을 뿐, 예수님께서 뭔가 가르침을 주셨을 것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그 생활에 계속 머무른다면 물질적인 부를 누리며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따라감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가난한 나사렛의 목수를 따라가서 목수일 배우려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지위나 신분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결단을 내리고 따라 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거기에 ‘아멘’ 하고 응답한 것을 계기로 옛 삶은 완전히 종친 것입니다. 그의 옛 삶의 방식은 동족들의 돈을 뜯어서 배를 불리면서 재산을 많이 모아 떵떵거리며 살며, 이 세상의 자원을 가지고 자기의 영혼을 속이고 즐겁게 살던 삶이었는데 결단하고 버린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리더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향해 인생을 결단한 적이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모든 옛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 묻은 사람, 그가 비록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세상을 버린 이후에 유명한 사람이 되지 않았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 되지 않았고 아직은 예수님이 아주 높여주신 사람이 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비록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섬기면서 빌어먹다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두고 온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는 확고한 결단을 한 사람, 이 사람들이 리더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안드레를 비롯한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떠했습니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돌아가서 물고기를 잡아 팔아먹고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그 모든 일들을 버렸습니다.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버렸습니다. 더구나 마태가 행하던 이 일은 하나님 앞에서도 아주 극악한 죄악이었습니다. 그것을 결단하고 버린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리더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뭔가 인생의 결정적인 결단을 내린 적이 없이 미적거리면서 한 마음으로는 세상을 사랑하고 한 마음으로는 그리스도를 끊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미련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미련을 동시에 가진 사람들이 된다면 여러분들은 세상에서도 누룩이 아니라 가루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고, 소금이 아니라 사랑 받기 원하는 설탕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귀하게 쓰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세상과 야합하면서 그런 식으로 편한 길을 찾아서 살아갔던 사람들은 절대로 리더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고 되려고 하면 막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혼자 인생길을 걸어간다면 혼자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너절하고 더러운 정신을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특별새벽기도로 모이면서 매일 기도하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이 민족에게 주님이 주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국민 소득 3만달라가 아닙니다. 그까짓 3만달라가 뭐 대단합니까? 정신이 살아있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이 살아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담고 이 백성들을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양떼들로 보고 긍휼히 여기면서 끌어안을 수 있는 목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런 특별한 지도자가 필요한데 매일 쌈질이나 하는 그런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등감에나 빠지는 지도자가 되어서 뭐가 되겠습니까? 백성들을 품안의 자식처럼 생각하고 깊이 끌어안고 갈 수 있는 통 큰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선교를 위해서 봉사하는 공동체인 교회에 있어서는 얼마나 더 많이 필요하겠습니까? 이것은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자격입니다. 그는 결단을 내린 적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결단을 내린 적이 있는 사람, 소돔과 고모라 거리에 앉아서 그대로 멸망당할지 주님이 주신 소알 성으로 피할지 결단을 내린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참된 신자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고 이런 참된 신자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태가 바로 그런 일을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굴복하지 않는 지도자의 이 진실한 강인함은 상황이 불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위기를 만났을 때 강한 결단을 가지고 신앙을 선택하는 결정을 리더가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그가 끊임없이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 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결단을 미루면 내일에는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는 그런 점에 있어서 칭찬 받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9장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항상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데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나는 갈 데가 없는 사람이다”고 하시면서 어디로 따라 오라 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장소적인 의미에서 예수를 따랐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창조적인 그 길을 바로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믿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자신도 따라가겠노라고 하는 결단을 이행하는 것이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니라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단이 결단인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따르는 순종이 있을 때에 결단이 결단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매 없는 수많은 결단을 내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번에는 목숨 걸고 제가 이 일을 꼭 하겠습니다’하는데 헛된 결단을 수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결단이 아닙니다. 참된 결단은 반드시 순종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강요도 없이 마음 깊은 곳에서 결단을 내리고 내려진 그 결단을 토대로 실제로 그것을 이행한 사람이 바로 마태였습니다.
마태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 하신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좋은 길이었습니까? 수많은 사람에게 에워싸이고 환영을 받으신 적도 있었지만 그 때 예수님께서 행복해 하셨던가요?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저분을 임금 삼으면 계속 떡과 물고기를 거저먹을 수 있겠구나’ ‘저 큰 능력을 가지고 로마 나라를 때려 엎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배 두드리고 사는 날이 오겠구나’ 생각했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환영할 때도 예수님의 마음이 기뻤을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데 어디를 가신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이라도 높은 지위에 올라보신 적이 있나요? 돈 통은 언제나 비어있고 가난은 예수님의 친구였고 고난과 핍박이 예수님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정말 끝까지 따라다닌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이 겪는 고난과 고초에 어느 정도는 동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결국 어디로 가셨습니까?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분이 그 머리를 결국 어디에 두셨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두셨습니다. 거기에 머리를 두시기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그분이 결국은 그 모든 머리 둘 곳 없는 생애의 과정을 거쳐서 인간의 구속을 위해서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그 인류 구속의 대업을 이루시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길로 오르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특징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많이 고난을 당한 사람, 예수의 말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고난도 이기고 핍박도 이기면서 그 길을 걸어갔던 모든 사람들은 할 말이 있습니다. 고난을 많이 받으면서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바로 그런 길이었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따르고 순종했는데 지금은 그 세리를 그만두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것이지만 그렇게 마태를 불러내셔서 예수님께서 마태를 어디로 데려가시고 싶으신 것입니까? 베드로를 향하여 하신 말씀 속에 이미 나타나있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품에 안겨있는 요한을 보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이 사람을 내가 올 때까지 남겨둔들 너는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정말 주님을 섬기는 자가 되고, 정말 주님을 섬기되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고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본받게 하면서 주님을 섬긴다면 최상입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모습을 주님이 보시면서 너무 오류가 많고 더러운 것들이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네가 나를 섬긴다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섬김을 받는데, 아무튼 빨리 섬기고 너는 지상에서 사라져라”고 하시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하나님을 매일매일 섬기고 주께 가까이 가는데 섬기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이 “얘야, 네가 정말 나를 섬기려느냐? 정말 섬기려고 한다면 내가 너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대한민국에 가서 평촌에 있는 열린 교회 아무개 집사를 한번 봐라. 나는 너희 모두가 그 사람이 나를 향하여 행한 그 일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 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면 섬기는 자로서 최대의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정신이 있어야 합니까?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세상을 잠시 버리는 것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죽기까지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는 그 순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이 길은 영광과 존귀를 받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며 주님의 뒤를 따라 갈 때에,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영광을 받고 대접을 받으면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원래 이 길은 십자가의 길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시는구나’ 생각하고 그것이 혹시 미혹이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신 길은 대접 받으신 길이 아니고 섬김을 받으신 길이 아니고 오히려 섬기려 하고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신 길이었습니다. 종처럼 노예처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아버지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들을 상전처럼 섬기시는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드러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보라 사랑이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신 것이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 길은 끊임없는 고난과 멸시와 천대를 받는 길입니다. 그 길을 따라서 우리들이 매일매일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궁금한 것은 그런 멸시와 고난을 이기게 만드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멸시와 고난을 이기고 견디게 만드는 힘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연합, 주님과 누리는 연합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로서 우리들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일을 하려고 하는데 때로는 순종하는 것이 쉽고 좋아 보일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한번의 순종을 위해서 죽음을 넘나드는 희생을 치러야 되는 때가 있습니다. 불순종하면 안전이 보장된 길인데 순종하면 어떠한 안전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무서운 길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그때 순종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그 일은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책이나 보면서 생각하는 순종과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순종은 마치 전쟁 영화를 보는 것과 피나는 전쟁터에서 피 흘리고 다리가 찢기면서 폭격을 받으며 전투를 하는 것의 차이와 비슷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들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외치고 거짓을 행하는 사람들을 욕하고 경시하는 것은 쉽지만 여러분 자신이 정직해보려고 애를 써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하겠습니까? 무섭습니다. 많은 고통이 뒤따릅니다. 그런 많은 고통이 뒤따를 때 우리의 힘만으로 그 고통을 이기는 것은 힘이 듭니다. 때로는 온 세상이 나 하나를 따돌리기 위해서 작당을 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기게 만드는 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위로입니다. 이것은 순종을 향하여 가는 그 결단의 길, 결단을 따라서 순종하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 길에서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이기게 만들어주는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에게 순종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때로는 많은 손해를 보고 내가 주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외톨이가 됩니다. 그렇게 외톨이가 되거나 따돌림을 받아서 핍박을 받을 때 우리 마음은 슬픕니다. 때로는 낙심하게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된다고 하지만 일순간에는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 믿음으로 살려고 하고 주님을 향해 내린 결단을 따라서 순종하려고 하니까 내 친구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의 원수가 되었고 나를 핍박합니다. 예수님, 전에는 친구도 있었고 이웃도 있고 가족도 있고 나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이제는 다 나를 싫어합니다. 예수님이외에는 나를 지켜주실 분이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기만 하면 거기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성례전 적인 효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나를 따르기 위해서 희생했느냐? 네게 순종하기 위해서 네가 많은 고난을 당했느냐? 얘야. 내가 바로 그 길을 갔단다’하실 때 우리의 마음속에 십자가의 놀라운 감격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악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지도자는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을 가장 큰 재산으로 여겨야 합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고 나를 소외시킨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편에 서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 세상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자기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리소스틀이 고백한 바와 같이 ‘세상아 네가 정녕 나를 버리려느냐? 내가 먼저 너를 버린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도자로서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 앞에 쓰임을 받고 싶으면 이 모든 이기심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이 진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고 복음을 위해 많이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주님처럼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주님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생명까지 십자가에 놓았습니다. 거기에서 흘린 피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메시아인 동시에 지도자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어떻게 희생의 길을 걸어가서 인간으로서의 참다운 본분을 다할 수 있는 지를 예수님은 온 몸으로, 마지막에는 자신의 심장을 짜서 쏟아지는 한 방울의 피까지 모두 흘려서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따르는 삶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고 섬긴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바로 우리가 받은 이런 감화의 정신을 십분의 일이라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약한 신자들에게 결단을 내린 후에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가는 우리를 보이면서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큰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마음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 그래서 주님이 가시면 그 마음의 뒤를 계속 따라가는 사람, 그래서 존재 전체가 하나님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미말의 찌끼와 같이 가장 작은 목동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순종하십시오.
세 번째는 섬김입니다. 오늘 성경 마태복음 9장 10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그랬습니다. 이 마태의 집에 초청된 사람들이 네 부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동료 제자들과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태가 사랑하는 예수님이시니 능히 그 집에 오실 수 있고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도 함께 주님을 섬기는 동료들이었으니 마태의 집에서 밥 먹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세리와 죄인들이 여기에 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같이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살인자와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니 상종 안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먹거나 대화하는 것조차도 불결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것도 한명만 온 것이 아니라 많이 와서 예수님과 제자들과 마태와 한 덩어리가 되어서 함께 식탁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식사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시대 때 유대인들의 식사는 이렇게 우리처럼 둘러앉아서 먹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기대어서 소파에 누운 듯한 자세로 밥을 먹었습니다. 동양에서의 이 식사는 형제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그 사람과 한 형제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보면 라반이 도망간 야곱을 쫓아서 왔다가 드라빔을 찾지 못하자 겸연쩍어 하며 용서를 빌고 이튿날 모두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합니다. 식사를 하게 되는 자체가 ‘아까까지는 내가 너를 우리 재산을 훔쳐간 용의자로 생각하고 죽이려고 따라왔지만 지금 화해하고 보니까 우리가 같이 밥을 먹어야겠다. 우리는 형제다’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여갈사하두다’라는 무덤을 쌓아놓고 증거의 무덤이라 이름하고 ‘너도 나를 치기 위해서 넘어오지 않고 나도 너를 치기 위해서 넘어가지 아니하리라’하는 호의를 보인 것입니다. 형제 됨의 맹약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바리새인들에게 계속 욕먹으셨던 이유가 ‘어찌해서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리와 죄인 속에 병원체가 있다는 것입니까? 죄가 병균입니까? 죄인의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고 해서 죄가 옮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함께 밥을 먹는 것이 형제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너희 선생이 선지자라고 하더라도 선지자가 어떻게 그런 쓰레기 같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전혀 다른 태도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왔다’하시며 밥 먹는 것이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바로 해 너 죄가 뭔지 알아? 내가 하늘에서 다 봤어. 한번 볼래?’ 식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형제들처럼 대우해주시면서 함께 밥을 드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 자신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먼저 그들을 교제 가운데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정신을 마태가 물려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세리의 삶을 포기했고 그 죄악 된 세상에서 발을 빼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함께 사귀던 동료와는 여전히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아직 죄를 못 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고 했는데 기껏 떠나와서 세리 생활이 그립다는 것인가? 왜 친구들을 못 잊고 그리워하고 쩔쩔 매고 결단을 못 내리는 것일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태가 옛 사람, 동족의 피나 빨아먹고 살던 그 탐관오리의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그립기 때문에 지금 동료들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선교적인 마음을 가지고 다시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죄에서는 떠났으나 예전의 자기와 같이 죄인의 길에 서있는 사람들은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찾아간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정신을 본 받아야 합니다.
‘나 세상 자랑 버렸네. 이제 주님만 사랑하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마태는 한번 결단을 내리고 세관을 떠난 후에 다시는 그 세관 근처에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근처 식당에 가서 그 친구들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철저히 옛 삶을 미워했고 그 근처도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어울리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두 끊음으로 자기의 성결을 보호했습니다’하면 ‘역시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될만해’ 하시겠습니까? 그것이 정답입니까?
우리들에게 그들을 정복할 수 있는 정신과 혼이 없이 그들에게 가서 자극을 받고 다시 세리의 일을 하고 고달프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보다는 동족의 피를 빨아서 한번 배불리 먹고 살아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동료를 찾아갔으면 이렇게 죄인들을 불러서 함께 식사한 것이 선교적인 리더십의 모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동족의 피를 빨아서 함께 동료들과 어울려서 술 거나하게 먹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졌던 동기에서 동료들을 초청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힘입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하면서 전혀 새롭고 다른 동기를 가지고 그들과 함께 한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눈을 가지고 보면 세리와 죄인들이 극악무도한 악한 사람들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목자 잃은 양, 주님이 불러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아직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다가간 것입니다.
‘나는 죄를 떠났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관에 갈 일이 없다. 나는 이제 세리의 모든 더러운 삶에서 발을 뺏다. 그런데 너희는 아직도 거기 있지? 더럽다. 그렇게 사느니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겠다’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형제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세리 생활 하는 죄에서 떠났으나 예수의 넓은 사랑이 내 안에 있으니 나는 아직 죄인인 너희를 버릴 수 없다’하는 것, 이것이 선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의 마음입니다. 영혼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없는 마음,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연민이 없는 선교의 마음,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선교입니까? 선교를 통해서 결국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고 죄인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선교 아닙니까? 그 죄인들을 돌아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교의 진정한 목적이 아닙니까? 바로 마태는 그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기 전에 가정주부로서 회개할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 믿기 전에 혹은 예수 믿었어도 썰렁하게 믿을 그 시절에 동네사람들과 모여앉아 돈따기나 했다면 그 죄에서 여러분들이 떠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버리면 안 됩니다. 다시 찾아가십시오. 그러나 다시 고스톱은 치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그들을 영혼으로 생각하고 고스톱 치는 옆에서 전도하십시오. 그것이 죄입니까? 여러분이 예수 믿고 개심하기 전에 춤바람이나 난 사람이었다고 칩시다. 그것은 버리십시오. 다시 카바레 가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버리지 마십시오. 섬기십시오. 우리가 그들을 깊이 끌어안고 주님 없어서 공허한 삶을 살고 있는 그 사람들을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며 섬길 은혜가 모자라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 그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고 내려오셔서 높고 거룩해 보이는 산에 오르셔서 큰 소리로 ‘너희들이 진정으로 주님의 나라에 가기를 원한다면 거기에서 떠나서 이 거룩한 산으로 올라오라 내가 사랑해주리라’고 하셨습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죄는 없으신 분이지만 죄인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셔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사는 곳에 가까이 가셔서 죄로 말미암아 당하게 된 그들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죄 없으신 몸으로 짊어지셔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아파하는 자의 눈에서 피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를 치유하셨습니다.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사랑에 감동받았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 아닙니까?
주님이 이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당신만 품었던 이 마음을 품고 가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여러분에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완악하고 더러운 죄인이 우리에게 있을 때 과연 우리가 침을 뱉고 우리의 신발을 털 정도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해본 적이 있습니까? 더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의 화신이 되어본 적이 있습니까? 단 한번이라도 주님의 마음이 되어서 그들이 주님을 떠나서 그렇게 죄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아파하고 그들의 편이 되어줘 본적이 있습니까?
마태를 통해서 우리는 이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카바레나 다니고 바람이나 피우던 부인들이었다면 여러분들이 개심하고 난 다음에 그 친구들을 여러분 집에 불러 모아서 밥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옛날에 난봉이나 피우고 허탄한 짓이나 하고 다녔던 남성들이라면 깊이 회개하고 난 다음에 같이 난봉이나 피웠던 친구들 모두 불러 모아서 밥 먹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금방 ‘그런 사람들을 불러 모으면 내 체면이 깎일 거야 내 과거가 다 들통 날걸?’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중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도 상당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나니까, 예수님께 은혜를 받고 나니까 마태의 눈에는 쓰레기 같은 죄인들로 보인 것이 아니라 미래에 주님의 아름다운 자녀들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마음 아닙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되십시오.
네 번째는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13절에 보면 마지막으로 마태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렇게 나옵니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이 장면이 무엇인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락방에 모여서 예수님의 분부대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무리들 속에 마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전심으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 무리 속에 마태가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선 이것은 예수님의 당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것은, 승천하시면서 전도하러 가라고 하시고 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터인데,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부어주실 것이다. 바로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와 예수님을 통해서 예고되었던 성령의 부으심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당부였습니다. 그 당부를 따라서 다른 많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틀림없이 이 마태가 다른 모든 제자들과 함께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기도의 시간들을 보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자명합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는데 예수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숨겨두고 허망한 풍설을 퍼트리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큰 박해가 일어난 무시무시한 상황이었습니다. 도망이라도 갔으면 좋겠는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기다리면 무엇을 주신다는 것과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말에는 제자들이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지극히 떨리는 마음으로 팽팽한 핍박의 정치적인 어두움 속에서 그들이 모였습니다. 수만 명이 예수님을 따르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에 오백여명의 형제들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한 사람 한 사람 다 떠났습니다. 소수의 무리들이 남았습니다. 더 큰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왜 전심으로 기도했을까요? 성령이 임하게 해달라고,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했을 리가 없습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 좀 어떻게 해주십시오.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보호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전신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리 속에 마태가 들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경험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지도자는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깨트려질 줄 모르는 강인한 지도자가 폭압적인 지도자입니다. 사람 앞에 강하고 위기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는 강인한 지도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깨트려진 지도자,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두려워 말라고 나를 따라오라고 외치지만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에는 흐느끼는 사람.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도와주소서
이것이 리더십의 비밀입니다. 리더가 하나님 앞에서 강해지면 사람들 앞에서 약해집니다. 무리해서 강해지면 반발을 사고 폭압적인 지도자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약하고 물같이 녹아내리며 눈물을 펑펑 흘리고 ‘나는 더럽기는 쓰레기 같고 능력이 없기는 하루살이와 같습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입니다. 하나님, 나를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하며 깊이 녹아서 물같이 가라앉은 사람은 눈물을 닦고 나면 신령한 강인함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에스라입니다. 에스라가 고토로 돌아가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백성의 지도자들이 타락하고 백성 전체가 이방 여인들과 타락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칼을 들고 가서 다 죽여 버리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너희들이 무슨 일을 행한 줄 아느냐 주모자 나와라’하고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기에 쓰러져버렸습니다.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하나님, 주님이 어떤 은혜를 주셔서 이 백성이 본토로 돌아오고 성전까지 짓게 하셨는데, 이 백성들이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또 범죄 했습니다. 저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주님 앞에 빌 면목도 없습니다. 오 주님 어떻게 합니까?’하며 민족의 죄가 자기 죄인 것처럼 가슴을 찢으며 식음을 전폐하고 심령이 물같이 녹아내리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찾아가서 ‘너희 그따위로 할래? 대책을 세우자’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조용히 성전에 가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늘 보이던 지도자가 보이지 않고 수군수군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에스라 선생님이 성전에 들어가시지도 못하고 거기 엎드리셔서 울고 계시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용서해달라고 비는데 그것은 그 선생님이 지은 죄가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야’했을 때 어린 아이로부터 어른까지 아무도 시킨 사람이 없는데 그 선생님 뒤에서 하나씩 하나씩 무릎을 꿇고 함께 흐느껴 울었습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 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런데 계속 울고 있었나요? 그러면 50점짜리 지도자입니다. 어느 순간이 되니까 눈물을 씻었습니다. 여호하난의 방으로 가서 식음을 전폐하고 매달리며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다 끝나고 난 다음에는, 깨어진 질그릇처럼 하나님 앞에 깨트려졌던 사람, 뜨거운 불길 아래 녹아내리는 샘물처럼 하나님 앞에 녹아내렸던 사람, 연약하기 짝이 없이 깨트려지고 녹아내린 지도자였던 에스라가 눈물을 씻고 기도가 끝나고 났더니 강인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지도하는 지도자의 자격으로 너희에게 명하노니 삼일 안에 모두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라 안 올라오면 가산을 모두 빼앗아버리고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끊어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조금 전 성전 앞에 엎드려 물같이 녹아내릴 때에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강인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완악한 죄인과도 싸우고 그들을 위해 피 흘리기까지 전투할 수 있는 결의를 보여주는 지도자의 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때맞춰서 어마어마한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그 비 앞에 다 서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약하고 깨트려진 사람, 그래서 주님 앞에 불에 달았고 연단되어서 물같이 녹아내린 적이 있는 그런 사람들만이 사람 앞에 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주는 말의 힘은 위대한 것입니다. 수많은 회중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깊이 깨트려져서 눈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진 사람이 주님께 깊이 기도해서 신령한 확신으로 마음을 불붙인 후에 하늘의 평강으로 넘치는 얼굴로 나와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그분을 의뢰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믿으십시오’ 말할 때 사람들에게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났을 때 불안해하는 배의 사람들에게 죄수로 호송되어가는 바울이 ‘안심하라. 어젯밤에 주님이 내게 나타나셨는데 너희 중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뭘 좀 먹고 기운을 차려라’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죄수고 누가 호송하는 군인입니까? 이런 놀라운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과의 평화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절대적인 의존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로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강합니다.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세 번째는 이러한 기도 끝에 그가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강림하신 것은 목적 자체가 성령님 자신이 높임을 받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시고 거룩하신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신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령님이 오신 것입니다. 마태가 그것을 함께 경험한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는 이 영광의 깊은 감화 속에서 나머지 생애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이러한 성령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퀘리그마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퀘리그마는 기독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비기독교 세상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의 선포의 메시지입니다. 그것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강림하시고 나서는 고기 잡으러 가지 아니하고 사람 낚으러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학문에 뛰어나지 않은 범인이라고 인정되었던 베드로가 유창하게 외쳤습니다. ‘너희들이 나무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할 일은 오직 이것이니 지금 너희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 앞에 자복해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유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죄 사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천하의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모두 나와 그리스도 예수 앞에 회개하고 믿음을 가져라’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만 이런 경험을 한 것이 아니라 거기 모여서 기도하고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기독교적 퀘리그마에 불붙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자신 속에 가둬둘 수 없어서 외쳐서 주님의 이 살아계심과 주님의 주님 되심을 증거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분이야말로 유일하게 우리가 구원 얻을 수 있는 메시아이심을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멸시하고 더럽게 여기는 그 십자가가 바로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방법이었다는 사실을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이 복음은 전해졌고 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된 모든 사람들마다 자신에게 이 복음을 전해준 무명의 전도자들을 선생님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지도력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먼저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보다 주님을 사랑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보다 더 가슴 속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선포의 메시지에 불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일생을 살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의 방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품처럼 태어났다가 파도에 쓸리는 거품처럼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환영 받지만 얼마 있다가는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상품 같은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 같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하나님 나라에서 잊혀지지 않는 사람, 세월이 바뀌면 바뀔수록 오히려 그리워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것을 위해서는 이렇게 깊은 기도 속에서 성령을 경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깊이 매달리는 기도를 통해서 성령을 보내셨고 그들이 성령을 경험했을 때는 모두 마음을 다 바쳐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백여명의 사람이 그동안에 많이 빠져나갔는데 그들은 성령강림하시는 이 사건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승천하시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령의 불 받은 사람들이 전해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기도를 받으며 성령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짧습니다. 할일은 많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렇게 주님 앞에 깊이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깊이 경험하고 짧은 순간을 살아도 영혼에 잇대어 살고 한 순간 주님을 섬겨도 영원히 계신 우리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섬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디에 가든지 여러분들이 좋은 지도자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주님을 섬기는 그 대열에 함께 참여시킬 수 있는 복된 지도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