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강 하나님 우리 아버지 1
녹취자: 박지성
안녕하십니까? 김남준 목사입니다. 이제 “깊이 읽는 주기도문” 세 번째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분이시며 또 모든 하늘들과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세 번째로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관한 마지막 표현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기도라는 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 기도하는 인간 사이의 관계를 올바로 규정할 때에 제대로 된 기도를 드릴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합니다. 모두 기원의 의미를 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기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많은 사람들이 비는 간구의 행위가 기도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가 기도할 때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고 또 관계를 갖기를 원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우리 아버지”라는 말 속에 담겨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이라는 이 표현은 모든 인간들 위에 뛰어나셔서 인간들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면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표현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들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가족으로 살아가는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아버지 되심, 다시 말해서 아버지 됨, 혹은 아버지이심에 관한 4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버지시다”라고 할 때에 첫째는 ‘위격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을 가지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라고 해서 우리들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을 위격적 아버지 되심이라고 부릅니다.
둘째는 ‘창조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계신데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만물이 생겨납니다. 더욱이 인간은 바로 이 모든 만물 중에 하나로써 하나님께로부터 기원을 가집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모든 창조된 것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셋째는 ‘신정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이것은 신정정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신정정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셔서 그들을 직접 돌보고 다스리신다는 점에서 신정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넷째는 ‘양자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이는 ‘구속적 아버지’ 되심이라고도 불립니다. 자,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양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아들이 아닌 남의 집 아이를 자기의 집안에 들여서 자기의 아들로 삼아 자기 다른 아들들이 누리는 똑같은 권리를 누리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양자입니다. 우리는 죄짓고 타락해서 하나님의 관계에서 끊어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을 ‘양자적 아버지’ 되심 이라고 부릅니다.
‘위격적 아버지’ 되심은 하나님 안에서의 관계이고 그 나머지는 하나님 밖에 있는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인데 이 양자적 아버지 되심의 위대함은 이 모든 것의 아버지 되심을 훨씬 능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당신의 아들의 영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아빠, 이 아버지라는 호칭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부르실 때도 사용하시던 용어였습니다. 그 아버지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파테르(πατήρ)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아람어의 아빠를 옮긴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용하던 언어가 아람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아버지’ 보다는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당시에 사용하던 호칭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라는 이 명사를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개인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민족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시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개인의 아버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명사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놀랍게도 이런 유대인의 전통적인 관습을 깨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아빠라고 호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매우 낯선 것이었고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시기 전에 모든 삶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 혹은 아빠라고 호칭하셨는데 이 표현은 복음서에서만 약 49회나 등장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표현하셨을 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 전통에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충격적이었을 것이고, 둘째는 이것을 사용하는 방식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친근성, 이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이런 문맥에서 보면 아주 놀라운 교훈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한 나라에 대해서 겨우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여”라는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면서 당신의 마음속에 있었던 기독교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공동체는 모두 가족처럼 함께 있는데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가족관계 속에서 아주 친밀하게 자식이 아빠를 부르듯이 그렇게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라고 부르라는 이것은 일종의 ‘아콤모다치오’(accommodatio)입니다. ‘아콤모다치오’라는 것은 영어 ‘어컴머데이션(accommodation)’인데, 흔히 ‘적응’ 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눈높이 표현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무슨 말인지 모를 때에 아이들에게 알아듣기 쉽도록 약간 논리에는 안 맞는 것 같아도 아이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설명해주지 않습니까? 그것을 ‘아콤모다치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보고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라고 가르쳐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시면서도 사실은 우리의 아주 세밀한 삶속에 간섭하셔서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대하시는데 아빠가 우리가 넘어질 새라, 깨질 새라, 배고플 새라 염려하면서 우리를 돌보고 친근히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의 눈높이에서 이것을 교육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