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게으름과 교만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녹취자:이경순
참 놀라운 게 이 게으름이 단순한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의 정신에 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게으른 자의 정신 상태를 이 지혜 자가 해부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게으른 사람은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그리고 게으른 사람이 고집도 강합니다.
1. 영혼의 실증은 무엇 때문에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까?
영혼의 실증은 결국 쉽게 얘기하면 은혜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영혼의 실증이 오는 것입니다. 열렬한 사랑이 있으면 왜 권태감이 들겠습니까? 사랑에서 멀어지니까 권태가 찾아오듯이 부패한 죄 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무슨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까? 요요입니다. 굉장히 잘 보셨습니다. 이런 사람이 열심히 운동을 해서 빠졌습니다. 빠졌는데 이 사람의 속에서 여전히 음식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으니까 다시 무절제하게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반복되면 몸이 압니다. 그래서 자기를 확 빼버리려는 는 것을 알고 영양분을 움켜쥐고 놓지를 않는답니다. 그러니까 살을 뺄 때는 기습하듯이 빼라고 합니다. 문제는 백 명이 다이어트를 했을 때 그것을 평생유지하고 사는 사람이 일곱 명이랍니다. 열 명이 빼려고 했다는 것이 아니라 감량에 성공한 사람 중 유지하는 비율이 칠 프로랍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결국은 두 사람이 겹쳐있습니다. 회색 사람은 여전히 남아있는 부패한 본성입니다. 하얀 사람은 거듭난 새 본성입니다. 이 두 개가 늘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우리의 몸에 방탕한 식생활의 습관을 못 끊듯이 우리의 부패한 죄 성도 역시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죄 성이 하나님의 은혜에 싫증이 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싫증이 나면서 육체는 열렬하게 살아야할 목표를 잃어버리므로 게으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선한 육체의 욕구에 대한 육체의 반역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야지 몸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싫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몸이 못하겠다고 느끼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몸에 그러한 감각을 주셔서 무리하지 않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건강이 나빠지고 심각해지려면 징후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전같이 몸이 가볍지 않고 힘겹습니다. 그런 것은 벌써 이상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미련 맞게 이것들 모두 육체에 속한 것이야 하고 그 규칙을 깨버리면 큰 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 안에 있는데 이러한 육체의 연약한 부분들과 영혼의 싫증이 만나면서 그러면서 우리를 더 깊은 영혼의 침체로 데려가고 게으름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2. 잠언 26:16절은 게으른 자의 특성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불경건한 고집으로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일곱 명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중요한 것은 실제로 지혜롭다가 아니라 지혜롭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자기보다 머리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게으른 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일곱 명이 전부다 놀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 엄청난 무지 그리고 무지막지한 저 무시 그것에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의 게으름이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파고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경건한 고집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거절하고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되거나 그 사랑에 감동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자신의 비합리적이고 정욕적인 집착을 끝까지 고집하면서 결국은 그 게으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생활이 게으름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에 오랫동안 감염되어 있으면 정신까지도 파괴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 거룩한 삶에 방해가 되는 고집은 죄인의 부패한 본성과 결탁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고집스러움에서 죄 성을 빼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결국은 죄 성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자기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신앙의 위대함은 우리는 언제나 항상 잘못될 수 있는데 신앙은 우리를 완전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지 않을 때 자기를 부인하게 만들고 깨어지게 만들어 주는 게 신앙의 힘입니다. 그래서 소위 이야기하는 자기 꺾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생각이 꺾이고 그 사랑에 자기사랑이 꺾여서 그렇게 감화되는 이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게으른 사람도 부지런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성으로 완고한 고집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는 꺾이고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경험과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자기 고집을 꺾는 것입니다. 도라지가 나오는데 지금은 모두 가동된 채 먹지만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는 할머니가 도라지를 사오십니다. 통 도라지는 좀 쌉니다. 그것을 사다가 껍질을 까서 쓴물을 뺍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에 묻히면 써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아주 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의 입맛에는 안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인간의 완악한 고집과 게으름 그러면서도 교만함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물속에 들어갈 때 거기에서 그것들이 다 빠져나가면서 그러면서 쓴물이 빠지면서 그 사람의 악하고 나쁜 것들이 다 빠져 나가고 순전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도라지를 시장에서 사다가 그냥 씹어 먹으면 써서 뱉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찬물에 하루쯤 담가서 쓴물을 싹 뺀 다음에 갖은 양념을 해서 방금을 묻혀놓았을 때 정말 따뜻한 밥에 김 한 장하고 그것만 있어도 충분히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맛있습니다. 방금 묻혀서 도라지가 아삭아삭한 채 탁 올라와 있고 파릇파릇한 야채가 더 추가되었다면 얼마나 맛있습니까? 더군다나 그것은 고추장에 넣어서 비벼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습니까? 나를 사용해 달라고 자꾸 그러는데 하나님이 쓰실 수가 없습니다. 은혜의 물속에 들어가서 그 게으름과 교만 싫증 이런 쓴물들을 좀 빼내고 하루를 쓰임 받아도 주님의 마음에 시원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 고집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깨어짐의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깨어진다고 하는 것은 결국 두 가지인데 새로운 지성의 깨달음 새로운 의지의 감화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가운데 그 말씀과 부딪히면서 결국은 사람이 깨지는 것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지만 에드워즈를 읽으면서 자신이 티끌 같아지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고 나니까 그 앞에서 자신을 고집하거나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벼가 잘 익었습니다. 이렇게 고개를 숙입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말을 하지만 그러나 말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1970년에 런던에 와서 600명의 목회자를 모아놓고 강연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그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제가 다시 사역을 시작한다면 3배는 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나는 너무 많이 설교하고 조금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려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은 자기의 부족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성향 적으로 말하기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항상 그것이 그 사람의 성화생활을 허물어뜨리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말하기만 기뻐하지 말고 든 것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 느끼고 크게 말하는 사람보다는 많이 경험하고 조금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영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익은 벼일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자기가 깨어지고 자신 안에 있는 게으름과 싫증의 본성을 깊이 직면하면서 그것을 뉘우치고 변화되어본 사람들만이 사람들에게 이런 깨달음을 주고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정말 천성이 부지런해서 조금도 자신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학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썩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항상 자신의 본성이 저절로 좋다고 생각하면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히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채에 걸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장 좋은 점도 하나님의 말씀에 걸러내어서 동기와 이런 것들이 참된 지를 다시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충성되다 게으르지 않다 이런 것들은 한결같이 하나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 안에서 절제를 배웁니다. 그러면서 육체와 영혼 그담에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움 사이에서 조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받은 은혜가 풍성한 사람일수록 이렇게 수그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5. 성경에서 지혜와 자주 짝을 이루어 등장하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알 수 있는 지혜를 얻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충성이 바로 지혜와 짝을 이룹니다. 잘 하였도다 라는 이야기는 자기 일에 있어서 이미 일머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이 충성될 수는 없습니다. 빚나간 열심히 충성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지혜로운 사람은 충성을 통해서 지혜를 얻고 그렇게 지혜를 얻은 사람은 그 일이 무엇이고 누구에게로부터 왔는지 알기 때문에 충성스럽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열심을 품고 부지런히 사는 사람에게 주시는 열매입니다. 충성스럽게 살면 예기지 못하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보면 결국은 게으름과 악은 짝을 이루고 이것은 지혜를 대적합니다. 그래서 게으른 자의 마음에는 지혜가 깃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혜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순전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게으름과 악에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혹시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선을 헤치는 악한 지혜이니 이것은 지혜로움이 클수록 하나님 앞에 받을 형벌이 큰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이 지혜는 충성과 맞닿아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어찌하든지 잘하고 싶고 그래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일에 대해 배웁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롭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도의 삶은 끊임없이 분투하는 삶입니다. 안으로는 부패한 본성과 싸우고 밖으로는 끊임없이 유혹과 시험을 만나면서 싸웁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둘 사이에 끼어있지만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앞에 충성하고 싶다는 사람 충성되게 살겠다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왜 안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충성되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런 사람으로서 주님 앞에 분투하면서 살 때 게으른 본성이 남아 있지만 결국은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고 부지런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한 때는 아침에 일어나면 세숫대야에 손을 얹고 멍하니 있으면 할머니께서 등짝을 내리치면서 이 녀석아 이렇게 게을러서 뭘 하고 살래 그러셨던 사람인데 이렇게 부지런해졌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목표도 없이 게으르게 살면서 반성도 안할 사람들을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의 일꾼 삼으셔서 부지런하게 하시니 감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메뚜기도 한철입니다. 목사님 너무 힘든데 그만 하십시오 멀고 힘든데 가지 마십시오. 메뚜기도 한철입니다. 이제 겨울이오면 메뚜기가 아무리 다니고 싶어도 날씨가 허락을 안 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지막 인생의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 권사님들 이야기 기억하시죠? 구역장 그만둔다고 그러지마 이제 안 불러줘 젊었을 때는 일 년 쉬고 나면 빨리 오세요. 복귀하셔야줘 하였지만 그러니 우리가 남은 때를 게을리 살수가 있습니까? 충성되게 부지런히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