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참된 인간의 삶
녹취자: 이미란
1. 인간의 의무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아가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1-1. 인간의 의무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아가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 영혼 안에 있는 창조주에 대한 기억의 씨, 유익과 한계점은 무엇입니까?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행복에 이르는 데서 완전히 제외시키지 않기 위해 인간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semen religionis’라고 하는 것인데 ‘종교의 씨앗’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신앙의 씨앗’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종교란 일반 종교가 아니라 참된 종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종교의 씨앗은 ‘Sensus Divinitatis’라고 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혹은 신성에 대한 의식을 의미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남겨 주신 흔적을 쫒아 그분을 찾게 되는 것을 말하며 그런 가능성을 인간에게 주십니다. 그 씨앗을 인간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인간이 종교에 대해 교육을 못 받았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인간은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희미하게는 알지만 인간의 죄,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서는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의 씨앗, 즉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식의 씨앗은 어느 정도일까?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즉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그 앞에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근거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마음의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기에는 아주 불충분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만으로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볼 수 있는 많은 종교는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이 종교의 씨앗이 생겨나고 그 씨앗을 오해하고 곡해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나 사상들을 이 안에 집어넣어서 체계화한 것이 바로 세상의 종교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결국은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종교의 씨앗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1-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그것이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죄를 짓기 전까지는 특별 계시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신성에 대해서 가르치고 인간에게 종교의 씨를 주님께서 주셨지만, 그러나 죄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을 가르쳐주는 지식으로 충만했습니다. 종교의 씨라고 하는 것인 인간에게 심어 주신 것인데, 타락 이후에 인간 속에 남아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으로 충만했고 이런 자연의 세계가 하나님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어서 특별 계시라는 것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이 구원에 대해서 알려주시기 위해 특별 계시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꿈이나 하나님의 현현, 혹은 환상 같은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에 관한 특별한 지식들을 인간에게 전달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 특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구속에 완성이 되고, 이 특별 계시가 특별한 형태로 남게 된 것입니다. 원래 특별 계시는 이만큼 많았었는데, 이중에서 요만큼만 기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대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에, 특별 계시는 성경보다 사실 더 큰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 계시의 특별 형태가 주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믿는 것은 그 계시를 수납하는 손과 같습니다. 받아들인 계시를 믿고 그것을 잘 추론함으로써 견고한 사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계시가 인간에게 전달하는 지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혹은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속성들의 시행 방식,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독특한 성품이 이 세상 사람들과 맺으면서 그 성품이 나타나는데 이것들이 어떤 식으로 우리 안에서 시행이 되는가에 대한 지식,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속성에 대한 지식과 속성의 시행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렇게 해서 특별 계시는 인간의 본질적인 사명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죄와 구원의 필요성,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배우고 은혜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서 이런 요구를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1-3. 인간이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길은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하신 것이라' 에 설명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복음인데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때부터 바라보고 달려온 사건이었다는 것이고, 이것들이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부분적으로 점점 명백하게 가르쳐져 오면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고 이것을 믿음으로써 구원받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4. 인간의 행복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참된 종교』 는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이 책은 도서관에 가면 있습니다. 굉장히 인상 깊은 말을 남깁니다. 35장 65절에서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제공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가버린다.”라고 말합니다. 즉, 공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제시합니다. ‘공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에 의해 점유된 상태, 사물에 의해 연장된 상태라는 것을 공간이라고 했습니다. 생각을 펼쳐보면,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로 꽉 차 있는 것이고 그 사물이 연장되어 있는 것이고 그 사물이 점유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공간 자체는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공간인 것이고, 다만 이런 물건으로 채워져 있는지, 다른 물건으로 채워져 있냐에 따라 다른 공간인 것입니다. 여기는 그런 게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어떤 것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랑할 대상을 제시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심지어는 인간의 존재도, 심지어 그렇게 사랑하고 분투했던 주체 자체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시간은 그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버립니다.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것들이 모두 있는 것처럼 거기에 궁극적인 사랑을 둘 때, 마지막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생을 주심으로써 창조의 목적대로 살게 하십니다.
2-1. 인간이 창조의 목적대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이것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사랑 가운데,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으면, 거기엔 분명히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알아야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내가 세상과 무슨 관계인지를 알 수 있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지식은 이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인데 이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확히 아는 것만큼만 나를 알 수 있고, 또 하나님을 정확히 아는 것만큼만 세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살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그 공간이 세상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며 거기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끊임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자신이 죽고 나면 이런 얘기할 사람도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고, 살아 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꾸준히 공부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시간 보내지 말고, 부지런히 배워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는 지식이 생깁니다. 이 지식은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됩니다. 전에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내가 누구 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은 죽었는가, 살았는가?’ 라는 질문밖에 없었는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향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성품과 속성과 속성의 시행방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 지식의 빛으로 이렇게 내려와서 세상과 자기를 보게 되면 그 지식 속에서 비로소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는 만났는데 답을 못 얻었다면 확실한 신앙이 아닐 수 있습니다.
2-2. 영생의 고유한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이 영생의 진정한 의미가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영생의 사전적인 의미는 시간 안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전제가 깔려 있습니까? 시간은 영원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서 죄와 죄의 영향으로 완전함을 상실하기 때문에 이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비교적 오래 존재하는 것은 있습니다.
(예화) 최근에 상어가 한 마리 잡혔는데, 학자들의 판단으로 540살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쯤 태어난 상어가 계속 살고 있다가 이제야 잡힌 것입니다. 바닷가재는 귀족들이나 먹는 음식이었는데,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면 랍스터가 굉장히 많고 엄청 쌉니다. 서민들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싸고 부둣가에서 팔뚝만 한 거 하나씩 사면 12000원씩 밖에 안 합니다. 그 중에서 제일 큰 건 20kg까지 나갑니다. 그것은 보통 사이즈로 안쳐줘서 커다란 망치로 쳐서 잡는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거의 100년 산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100살을 살면 천수를 누렸다고 말하기까지 하는데, 예전 동해안에서 잡힌 거북이는 학자들이 판단하니 1300년 정도 되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 속에서 오래 사는 것은 금방 사라져 가는 인간이 보면, 참 어마어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두 지나가는 하나의 점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하루 살다가 죽는 하루살이나 파리나 비슷비슷해 보입니다. 생기를 잃은 영혼과 늙고 병들어 버린 육체로 사는 것은 영원히 살수도 없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생이 아닙니다. 120세까지 수명이 늘어난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50년을 요양원에서 보낸다면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젊음의 활기를 갖고 몇 살까지 더 살수 있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과학은 그것까지 뛰어넘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 하지만 두고 봐야 할 것입니다.
2-3. 영생의 적용한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을 이해할 때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은 무엇입니까?
영생의 적용한 의미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영생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생명이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때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든지 못 만나든지 어쨌든 인간의 영혼은 영원불멸합니다. 그러하더라도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영혼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인간의 영혼이 이렇게 하나님과 만나서 생명적인 연합을 이룰 때 여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전달되어 그런 하늘로부터 오는 자원들을 가지고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이 모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진정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살아갈 때에 그것이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그런 삶을 살아내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자원이 주어질 때 이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 하늘 자원을 공급받으며 사는 삶, 만물의 닮긴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그 지혜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고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의 선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종말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시 살게 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정한 인간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2-4.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게 하는 도구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그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지식과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고, 그 영생은 바로 지식과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영생의 정체입니다. 그 속에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통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또, 그 지식과 사랑 안에서만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식과 사랑은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기자는 같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것을 음식의 맛을 보는 것처럼 설명합니다. 한번 맛을 보는 것은 참 놀라운 것입니다. 이 음식은 우리가 음식을 보고, 음식의 맛을 느끼고 그것들을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건강을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몸에 좋은 음식에 대해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대로 그것을 먹지는 않습니다. 마늘이 그렇게 좋다고 싫어하는 사람은 안 먹습니다. 요즘 브로콜리가 좋다고 해도 기질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안 먹습니다. 슈퍼 푸드가 10개 있어도, 그 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먹지 싫어하는 것은 먹지 않습니다. 저는 토마토를 정말 싫어합니다. 그것이 슈퍼 푸드인데도 말입니다. 요즘은 그것을 먹어보려고 시도는 해보는데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문뜩문뜩 토마토가 생각이나 먹게 됩니다. 그것은 굉장히 좋은 노력입니다. 그 대신 조심해야 할 것은 그렇게 음식의 맛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칫하면 탐닉하기 쉽습니다. 그것을 항상 경계 하면서도 그렇게 음식의 맛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것을 방탕하면 안 되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무슨 음식을 가져도 다 그것이 그것 같다고 하고 신선처럼 먹는 것을 초월한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하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 즐거움 대신, 영혼을 구원하고 기도하고 교회 와서 봉사하고 이러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말하면, 우리는 조용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워낙 훌륭한 사람이니,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에게는 맛있는 음식이지만,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또 다른 양식이 있으니 죄인들이 회심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 한,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끌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rivaux), 저명한 신학자이자 칼빈에게도 영향을 많이 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아주 놀라운 말을 합니다. “사랑 그 자체는 앎이다.”라는 말입니다. “지식 그 자체는 사랑이다, 둘이 나누어 질 수 없는 것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은 그것은 확실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화) 순간에 일어나는 감정, 여러분들은 그런 적 없습니까? 저는 사춘기를 좀 일찍 겪었습니다. 중학교 14년 2개월 전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런 사춘기가 한창일 때라 영화 한편을 보고 나서 거기에 나오는 여주인공 때문에 3일씩, 4일씩 앓았습니다. 정신과 모든 세계를 다 사로잡아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밥을 먹어도 그 영화 상황이 생각이 나고 그 때 그 사람하고 저와 나이차이가 최소한 많으면 20살, 아니면 15살 이상 차이가 났을 텐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몸살이 나서 병이 날 정도로 영화에 몰입 했습니다. 브로마이드 10대의 가수사진을 잘라서 가지고 다니는데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순간의 열망일 수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 그게 아닙니다.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영화 한편에 나왔다는 것 외에, tv에 나와 현란하게 춤을 추는 금발의 소년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충동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앎이 있어야 하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거기엔 반드시 앎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과 지식은 하나이기 때문에, 지식을 추구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올바른 지식을 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일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은 누구냐 하면 본당에서 눈물 나게 기도하고 열린 공간으로 직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서관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책을 빌리고 책을 읽은 다음에 너무 감격해서 교회 와서 기도하고, 기도하고 나서는 반납을 하고 다음 책을 빌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열린 공간 가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