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교회생활, 사랑 안에서 행함
녹취자 : 허혜숙
1.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은 어떻게 다릅니까?(92)
육체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의학자들도 정확하게 정의(definition)를 잘 못 내리지만 육체에서 생명의 기운이 완전하게 소멸된 상태,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 기운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면 인간은 소생을 못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폐소생술 같은 것을 하는 것은 아직 생명의 기운이 남아있기 때문에 충격을 주어서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성경적인 설명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늙고 병들고 마지막에는 종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어떤 상태에서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결국 죽음의 의미가 육체가 죽었다는 의미와 영혼이 죽었다는 의미는 다른 것입니다.
(예화) 어떤 새댁이 시집을 갔는데 배추로 김치를 담갔습니다. 그런데 깜박 잊고 절이지를 않고 김치를 담갔습니다. 남편이 밥을 먹다가 “배추가 살아있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살아있다’라는 말은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동사나 개사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쉬울 것입니다.
영생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렇게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들이 흔히 일상생활에서 쓰는 ‘응, 내가 알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기노스코’라는 단어인데 여러 번 말씀 드렸듯이 이것은 사랑한다는 것과 나누어지지 않는 인간의 총체적인 경험으로서의 앎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이 ‘앎’이라는 단어가 기가 막힌 단어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볼 때마다 우리말이 너무 신기합니다. ‘지식’ 하면 이 ‘앎’하고 일치하지 않습니다. ‘앎’이라는 것, ‘삶’이라는 것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안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그가 보내신 예수를 아는 것이니라” 할 때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을 향해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그런 앎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통해서 여자가 남자에게 눈을 뜨고 남자가 아내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앎이기 때문에 지식과 사랑 이런 것들이 구별되지 않은 총체적이고 인격적인 결합이라는 것입니다.
2.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1) 신자가 지순의 사랑을 갖게 되는 과정을 설명해 봅시다(93)
지순이라는 말은 끝 至자 순결할 純, 더 이상 순결할 수 없는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까리따스’를 옮긴 것이 이것입니다. 인간이 무능함을 경험합니다. 무능하다는 것은 지적인 무능, 의지적인 무능입니다. 알 수가 없고 두 번째는 알아도 그렇게 살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혼자 살 수 없는 비참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의문투성이 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자기가 살고 싶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도 자기사랑의 발로입니다. 살자고 믿는 것이지 예수를 위해서 죽으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금방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도를 많은 것들이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뚫고 나갑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처럼 이상한 종교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서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데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논란이 있지만 저는 이 사람이 맨 처음에 도저히 자기가 살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이것은 결국은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자기사랑입니다. 에로스는 꼭 남녀 간의 사랑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희랍어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쓸 때 신의 사랑은 ‘아가페’,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스톨게’, 형제간의 사랑은 ‘필리아’, 이성간의 사랑은 ‘에로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사실 그리스 신화에서 보면 이 에로스의 사랑이 신 안에서 통합을 이룹니다.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아가페의 사랑을 제외한 모든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말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자기를 중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랑으로 나아갔다가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가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람이 사랑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지순의 사랑을 소유한 신자에게 나타난 사랑의 변화는 무엇입니까?(93)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까리따스의 정의는 아가페 사랑에 감화를 받아서 주어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 까리따스의 효과는 그 사람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는데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무관심주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갖습니다. 관심을 갖는데 그것이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니어서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을 위해서 언제든지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가난 자체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 가난 자체가 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물질에 치우쳐서 그 물질을 사랑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무수히 경계를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해서 집착을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그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재물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까리따스의 효과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끝없이 즐거워하고 그 분께 자신을 합치시키려는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을 가져다줍니다. 어떻게 주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신자는 결국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온 인간을, 인류를.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계를 선의로 대하는 것입니다. 동물에 대한 무자비한 학대, 자연에 대한 파괴, 일순간의 만족을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가져오는 것들, 미식을 위해서 동물들에게 한없는 고통을 가하는 것,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들입니다.
결국 까리따스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이 사랑은 교회 안에만 묶이는 사랑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확장되어 나아가야 할 사랑입니다.
전국시대에 묵자(墨子)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겸해설’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으로 살자’ 이 사람은 원래 공자를 공부하던 사람이었는데 공자를 공부하다가 깊은 회의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공자의 철학이 수많은 나라와 인간들을 분리시킨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의 철학에 깊은 회의를 품고 새로운 이론을 창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철학입니다. 제가 중국의 철학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동북아에서 나타난 사상가들 중에서 어거스틴의 사상이론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묵자입니다. 공자의 이론은 부모에게 잘 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하고, 친구들 간에 신의를 지키고 이런 것들입니다. 묵자는 그것들 때문에 사회가 망가진다고 본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계의 불행은 사랑이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기 때문에 세상이 불행해 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가족 밖의 사람이 자기 가족을 조금만 해롭게 해도 적대관계에 서게 됩니다. 왕에게 충성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절대주의로 가니까 조금만 왕과 거스르는 사람이 나오면 역적으로 몰아서 능지처참을 하고 없애버려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인’의 사회가 이루어 질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묵자의 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을 하자면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내 새끼 남의 새끼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는 ‘인’이 실현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의견이 너무 이상주의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완벽하게 현실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정치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낮에는 수레를 고치고 기름칠을 하는 우리로 말하자면 카센터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홀로 앉아서 철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귀담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유아교육에서 커다란 반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엄마아빠가 사랑을 많이 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도 하나 둘밖에 안 낳아서 ‘내 새끼 내 새끼’ 하고 감싸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더 행복한 것이지만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게 됩니다. 그렇다보니 자기에게 잘 해준 사람 이외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대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교육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험으로 나오는 것이 여러 집의 아이들을 한꺼번에 묶어놓고 모든 부모들이 같은 자식으로 생각을 하고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상당히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단순히 아파트 평수의 크기대로 아이들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커뮤니티라고 하는 것은 삶을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이상적입니다. 저는 교인들이 모여 사는 것을 반대했던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많이 바뀝니다. 타운하우스 같은 것을 만들어서 연립주택이나 아파트 같은 것을 만들어서 백 가정 정도의 교인들이 모여서 살면서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한층 정도를 넓게 비어서 공동공간으로 만들고 온 새끼들을 자기 새끼처럼 생각하면서 돌보면서 양육하는 방식이 상당히 기독교식 교육에도 성공적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주일 날 달랑 와서 배우는 이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범주의 새로운 이론입니다.
3) 신자가 교회 밖의 이웃을 사랑하는 두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94-96)
대상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신앙이 약하면 자매를 만나도 얼굴이 너무 예쁘면 불신자라도 고려를 하는 것이 남자의 심정입니다. 여자의 경우에는 남자가 상당히 성공을 한 사람이면 데리고 살다보면 회심하고 새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고 유사한 케이스를 찾으면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목적애입니다.
목적애는 결국 나에게 좋은 것이 돌아오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박애애는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진 사람이 그 사랑 때문에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동기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돌아 갈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돌아가는 것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사람에게로, 사람에게로, 사람에게로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지 사람에게로 와서 다시 그 사람에게로 돌아가는 그런 사랑은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이 모든 교회와 인류에 대한 질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을 발견한 것이 생애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날 기독교의 가장 큰 비극이 사랑에 대한 오해라고 본 것입니다. 4년 전에 도올 김용옥씨가 책을 한 권 썼는데 기독교에 일갈을 날린 책입니다. 제목이 도전적인데 『사랑하지 말자』였습니다. 기독교에서 사랑을 어떻게 잘못 전파를 했는지 창가에 서서 한 권을 다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제가 내린 결론은 ‘아, 이 사람이 정말 모르는구나.’ 기독교가 이야기한 사랑을 이 사람은 기독교인을 통해서 듣고 본 본인 이야기로만 사랑을 규정 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뭔가 이론을 연구할 때에는 기독교의 고전 원판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오해되고 miss reading 된 그 개념 말고 원천에 있는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비판할 때 자기 말과 글로 비판을 해야지 ‘어떤 사람이 당신한테 뭐라고 하더라.’ 그렇게 비판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 부끄러웠던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는 방식으로 사랑을 했기 때문에 그런 사랑의 개념을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잘못 된 개념을 심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사랑의 개념은 욱하고 몰리고 미국 떠받들고 통일 반대하고 독재를 찬성하고 불의를 감싸고 이런 것들로 신앙화 하는 사랑으로 알려 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실제로 우리 속에 있어 왔던 부끄러운 역사의 한 토막입니다. 이런 것들을 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이론을 다시 정립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류의 본성적인 연합, 피터마트 포마글리의 연합 세 가지가 지난번에 나왔습니다. 표현은 각각 다르지만 본성적인 연합이 있고 칭의의 연합이 있고 성화의 연합이 있습니다. 본성적인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가지고 계셔서 그 인성과 인류가 가지고 있는 죄에 물들지 않은 본래의 인성이 하나 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머리이십니다.
어거스틴은 교회를 매우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으로 확산되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믿음과 공존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교회는 지상에 있는 교회만이 아니라 보편교회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기독교 세계가 우리처럼 쪼그라든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동시에 인류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저 멀리 이교도들이 있었지만 그 이교도들에 대한 사랑도 이야기합니다. 결국은 그 사랑이 마지막에는 모든 인류를 포괄하는 사랑으로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선교를 사랑의 확장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삼위일체를 8권 8장 12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으리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으리요”라고 똑같은 이야기를 뒤집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과 정의를 연합시키는 이론이 되는 것입니다.
4) 신자는 다른 신자들을 특별히 더욱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97-100)
①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98)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서 모든 믿는 사람들을 하나의 몸으로 만들어서 그들이 하나가 되기를 마치 삼위일체로서 당신이 성령 성부와 하나인 것처럼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신자의 연합에는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이 있는데 이 원리는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그 연합은 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취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실제적인 연합은 사람들이 있는데 하트의 색깔들이 다 다릅니다. 색깔이 있는데 왼쪽 색은 맛이 많이 간 사람이고 이 사람은 맛이 갈려고 하는 사람이고 빨간색 하트는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 충만한 상태인 사람입니다. 1, 2, 3, 4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는지 마음속에 도장을 찍어보십시오. 연합된 지체를 사랑함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다음에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가시적인 교회나 보이는 성도들에게만 집중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 사랑이 미끄러지고 실족한 비참한 인간들에 대한 사랑으로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될 것은 마음의 병이 있어서 그런지 TV를 볼 때 어떤 것을 보면서 분노하지 말아야 됩니다. 세상의 보이는 불행의 현상만 보고 ‘저 자식 죽여 버려야지, 깔아 뭉개버려야지, 폭파시켜 버려?’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그 뿌리가 어디에 있고 그들이 그 뿌리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란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면서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② 신자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임이 이유는 무엇입니까?(100)
좁은 의미의 형상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불신자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타락해서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그러나 일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분도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타락하면 존엄성을 상실한다.’, ‘짐승과 구별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런 이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언제가 좁은 의미의 형상을 못 가졌던 사람이었는데 구속받고 가졌습니다. 아무리 불신자라도 이교도라도 희대의 살인마라도 그는 여전히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대로 갚아줘라.’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칭의,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형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사랑과 동질의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사랑과 일치를 이룹니다. 밸런스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과 형제사랑은 나뉘지를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신자는 사랑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 목적을 교회의 존재 목적과 합치시킵니다.
1) 신자가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교회의 존재 목적에 합치시키는 두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101)
첫째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과 인생의 목적을 하나로 합치시키는 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우리가 예수쟁이가 되려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이 되려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인간이 되는 과정입니다. 참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는 참 인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신자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보이는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 사랑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보이게 되어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보시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파하시던 그 사랑이 바로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크면 희미한 형상을 또렷이 보는데 사람이 사랑이 없으면 뚜렷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 형제인데도 형상이 없는 사람처럼 짐승처럼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황폐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신자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지순의 사랑 안에서 교회의 그것이 합치시키는 과정을 설명해 봅시다. (102-103)
신자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경험하면 지순의 사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뜻에 인생의 목적을 합치시키는데 그것이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교회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이 사람들에게 사랑이 확장되어 나가서 세상 사람들조차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선의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온전한 회복을 위해 기여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