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을 목표로 설교하라
녹취자: 이경순
최소한 한 20년 사이에 한국교회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에 제일 현저하게 일어난 변화가 구원개념에 대해서 모호해져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과 구원받은 성도에 대한 어떤 또렷한 전선 같은 것들이 다 뭉개져 버린 시대에 여러분들이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커다란 비극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무슨 새로운 지식을 전달해주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전달받고 싶으면 강의안을 가셔서 잘 읽어보셔도 되고 시중에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와 있고 또 이 주제에 대해서도 쓴 저의 책들도 여러 권이 되기 때문에 여러분 불러 놓고 아침부터 밤까지 해달라고 하면 다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필요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브레인워시(문장암기) 입니다. 무엇인가 뇌 속에 잘못 들어 있는 것들을 확 물로 씻어 내버리고 그리고 원점으로 원래의 중요한 가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제가 한번 1학년 전도사님에게 여쭤보겠습니다. 개혁주의 구원론으로 볼 때 사람이 구원을 못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선 이 세상에서 구원 받지 못하면 세상에서는 어떻게 되고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답변)
이 세상에서는 타락한 본성 그대로 살며 하나님을 계속해서 대적하게 됩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받고 영혼이 같이 부활 하지만 영혼은 지옥을 갑니다. 그러면 곽 강도사님 입장에서는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답변)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간단합니다. 은혜를 구원 받는 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정확하게 박병일 목사님 경우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무어라고 답을 하시겠습니까? (답변)
하나님께 자기의 자력으로 전혀 구원 얻을 수 없는 것을 고백하고 예수님께 자기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우리 권사님이 오히려 더 정확한 대답을 주실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이 와서 내가 당신들 설명을 다 듣고 보니까 진짜 예수 믿는 게 좋을 거 같고 나도 정말 구원받고 싶은데 내가 어찌하여 구원을 얻으리이까 물어보면 우리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합니까? (답변)
주님 앞에 나와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입으로 시인하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될 거 같습니다. 박영준 전도사님 그렇게 똑같이 어느 학생이 질문을 하면 어떻게 답을 하시겠습니까? (답변)
예수님을 당신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먼저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을 거부한 우리는 타락했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것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매순간 기억하고 살아가는 것 그렇게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임을 인정하고 살아갈 때 그 삶이 증거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이야기 해 줄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신학적으로 보자면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 이것이 구원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회심’은 ‘컨버전(Conversion)’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신학적으로 구성이 되는데 하나는 이제껏 창조의 목적을 떠나 하나님을 모르고 혹은 대적하며 살았던 모든 삶에 대한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를 구원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구원의 모든 길은 내가 거부한다.” 이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회심을 성경이 다양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칭의’라고도 표현하고 ‘중생’이라고도 표현하고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이 부분을 여러분들이 아주 명료하게 신학적으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신학의 많은 분과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게 해둬야 될 부분이 구원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선 제가 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만이라도 읽고 이해를 하되 저는 저자인데 28번을 제가 쓴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론에 관한 것들을 확실하게 정리를 하고 있어야지만 지금의 사역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요약을 하면 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원수로 태어납니다. 마음속에서 우리들이 실험을 했습니다. 고양이를 경험하지 못한 쥐와 쥐를 경험하지 못한 고양이를 태어나자마자 유리관 속에 넣고 같이 기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지막에 죽였습니다. 그것으로 무엇이 입증 되냐면 고양이가 쥐를 미워하고 죽이는 것은 학습을 통해서 된 것이 아니라 이 속에 있는 천성이라는 것이 입증이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천성이 인간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려고하는 천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완벽하게 원수가 될 수 있느냐?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등대 유주과라는 시에 당나라 시인 진자앙이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전불견고인(前不見古人). 후불견래자(後不見來者). 념천지지유유(念天地之悠悠) 독창연이체하(獨愴然而涕下),” 산에 올라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사람은 옛사람을 볼 수 없고 옛사람은 오는 사람들을 볼 수 없나니 천지에 유유함을 내가 생각하니 홀로 외로워서 눈물이 흐르는구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완벽하게 하나님을 떠날 수 없고 하나님이 신성의 씨앗을 인간의 모든 정신 속에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완벽하게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높은 산에 올라서서 웅장한 광경을 보면 무엇인가 경이로운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참으로 인간은 불가해한 존재이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나님을 미워하며 도망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나님을 못 잊어 하는 존재다.” 그런 존재로 인간이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본성한쪽으로는 하나님을 희미하게나마 찾아가면서 살기 때문에 점집에도 가고 신앙 없는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빌어도 보고 그리고 굿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완벽하게 부인하려고 애를 쓰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약에 타락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그냥 짐승처럼 되게끔 내버려 두셨다면 세상이 거의 완전히 카오스상태에 들어가서 파멸해버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떠난 세상인데도 여전히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래서 사람들이 그 성령님의 일반적인 작용을 받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나라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민주제도가 발전한 나라는 깨끗하고 정의롭고 그렇게 갑질 하려고 수많은 사람들 억울하게 죽이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런 세상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마지막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신학교에서 배운 복음주의적인 교리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예수를 믿어야 한다.” “아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다.” “아니다. 예정이 안 돼 있으면 소용도 없다.”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들이 부분적으로 배웠지만 다 정리를 하자면 결국은 하나님이 성경이 그런 죄인들에게 촉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이 이외에는 너희에게 살길이 없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구원관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왜 문제가 되냐면 “그럼 과연 인간에게 그렇게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능력이 있느냐?” 그렇게 안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 시대까지는 구원론을 구원의 개념을 굉장히 폭넓게 봤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학적으로 넓은 의미의 중생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는 중생, 회심, 성화, 믿음. 이런 모든 것까지 다 들어간 개념입니다. 칼빈도 그런 넓은 의미의 중생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나중에 교리논쟁이 생기면서 논리가 점점 더 정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중생과 회심을 나누는 것입니다. 중생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한 영혼을 어느 순간에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필요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고 그 중생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중생한 영혼이 자신의 살아있는 영혼의 생명을 두 가지로 입증하는데 하나는 그 복음에 대해서 반응하며 회개하는 것과 그담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을 다 요약하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데 거듭난 모든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이게 우리들이 배우는 표준적인 구원에 관한 진술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좀 더 이야기를 진전시키면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중생은 하나님이 홀로하시는 일인데 이 둘은 시간적인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인 순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이 성경이 중생하라 이렇게 요구하지 않고 “너희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라.” 이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설교를 하거나 목회를 할 때 이렇게 내가 진지하게 외치면 그러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믿으려는 저 사람들의 영혼을 거듭나게 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큰 대지로 들어가서 그러면 ‘구원 얻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구원 얻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김전 강도사님은 어떤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구원 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가장 뚜렷한 차이가 무엇입니까? (답변) 주인의식이 달라진다고 봅니다. 또 그 옆에 전도사님은? (답변)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서 사느냐 살지 않느냐 차이입니다. 나의 삶의 주인이 주체가 하나님이냐 내가 되느냐 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잘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한번 보고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1페이지를 보겠습니다. 2번입니다. “신학적으로 회심이란 좁은 의미의 회심과 넓은 의미의 회심으로 나뉜다. 좁은 의미의 회심은 고유한 의미의 회심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최초의 회심을 가리키고 넓은 의미의 회심은 이러한 회심이 반복적으로 새롭게 경험되는 것을 의미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고유한 의미의 회심이란 거듭난 영혼이 중생한 영혼이 인간 의식 속에서 활동하는 첫 번째 움직임이다.” 애가 태어나면 움직입니다. 그 첫 번째 움직임이 죄에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회심은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구원에 이르는 조건으로서의 회심은 누구도 회심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다.” 아주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회심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회개 중생 칭의 등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는 종말에 재앙을 당할 처지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이미 구약성경에서도 나타난 구원개념이다. 회심의 토대는 거듭남 곧 중생이다 중생은 하나님을 향해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회심은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 영혼이 최초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의식함으로서 보이는 인격적 반응이다.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 홀로 하시는 일이지만 회심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의지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에게 중생하도록 명령하지는 않지만 회심하도록 촉구한다. 중생 없이는 회심이 없으나 일반적으로 중생과 회심의 구분은 논리적인 순서의 구별이다 한 사람의 회심여부는 구원과 직결된다. 성인인 불신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성인을 어느 정도로 보느냐?” 그것을 신학적으로 딱 잘라 얘기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세 살 넘으면 유아세례안줍니다. 저는 만 세 살 넘으면 유아세례주지 않습니다. 그 정도 네 살 이상정도 되면 이 아이들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가져야지만 이제 신앙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놓고 좀 더 보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주 특별한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이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복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뇌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든지 아니면 식물인간상태에 있어서 의식을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든지 이런 경우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회개와 믿음 없이는 구원이 없다. 그러므로 회심에 대한 촉구는 설교자가 천착하여야할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목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목양은 양일 때 하는 것이지 회심하지 않은 것은 야수입니다. 야수는 목양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신령한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에 의해 다스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참된 회심을 통해 하나님 성품과 은혜를 경험하고 진리의 맛을 안 사람들 만이 목양의 질서를 따라 성숙한 신자로 자랄 수 있다. 어린 시절 나의 눈에 비친 조국교회는 회개와 눈물이 있는 공동체였다. 설교자가 된 지금 나는 당시의 뜨거운 찬양과 열렬한 기도의 분위기 저변에 깔린 신학과 신앙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때의 조국교회의 뚜렷한 회심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 때는 어디를 가든지 회개해야 합니다.” 라는 설교를 개척교회에서부터 큰 교회까지 거의 설교를 들으면 열 개중에서 네 개 이상은 그런 종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아주 명료한 대조.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하겠다고 하는 분명한 인식 이런 것들이 명료하게 교회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제가 주일학교 다닐 때를 예를 들자면 아이들이 이런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양)
술 마시고 장구치고 죄만 짓다가 오늘 밤에 죽으면 어찌 하리요
유황불이 펄펄 붓는 지옥으로 슬피 울며 이를 갈며 끌려가겠네
나오라 예수 앞으로 천당에 영생 복 너에게 주리니 예수 믿어라
지금 들어보면 유치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아이들이 그런 찬송을 부르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저렇게 안일하게 술 먹고 타락하고 저렇게 살아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명료하게 주어졌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너무 어려운 시대에 목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처럼 노년에 접어들기 전에 상황은 더 심각하게 어려워질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전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남과 북이 딱 대치되어서 주력부대가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전쟁이 되는데 다 비슷한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서 슬며시 권총 넣고 다니면서 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선이 없는 것입니다. 전선이 없으니까 목회자들에게 전쟁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습니다. 전투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설교도 희미해집니다. 그런데서 교육을 받고 여러분들이 중고등부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신학교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안 그렇지만 어떤 분들은 자기 자신이 확고한 회심의 체험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확고한 회심의 체험이 없고 심지어 내가 신학교에 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그냥 회심의 경험이 없는 게 아니라 절대로 구원받았을 리가 없는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옵니다. 회심의 싸인 이 없습니다. 회심의 증표가 없는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그는 지금 외형적으로는 목회사역을 하고 있지만 그 사람은 근본적 세상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입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이고 큰 죄악인가 하는 것을 불같이 외칠 것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남한에 내려와 있는 공비가 공산주의에 대해서 비판하기를 바라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문제는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고 그리고 왜 우리가 그를 믿는 것이 우리의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문제이고 나아가서는 이 세계와 우주와 관계된 사건인가 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목회에 뚜렷한 가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목회자가 되는 것은 신학교를 다니고 과정을 이수하므로 서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조건을 통해서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만남입니다. 그것은 목회자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나 평신도나 모두 똑같은 것인데 목회자가 당한 정도에 있어서 훨씬 더 깊이 그것을 경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도 바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기본적으로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통유대인이었지만 그는 세 가지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주의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로마시민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의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설교를 보면 그리스 희곡 아라투스에 나오는 글이 인용이 됩니다. 그럴 정도로 희랍문학과 문명에 깊은 친밀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유는 역사적으로 로마가 그리스를 쓰러뜨리고 나라를 건설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사실은 헬레니즘의 토대위에 서 있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로마사람들은 헬레니즘에 대해서 상당한 사대주의 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 신화가 이름만 바꿔서 로마신화로 재편됩니다. 그런 것만 봐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 사람은 종교적으로는 유대주의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확고한 신학적인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 사람이 구원 받기 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전 인생의 그림을 다 설명하는 확신합니다. 그것은 그만의 유별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표준적인 신념이었습니다. 첫째 “유대인만 선민이다. 나머지 이방인들은 다 쓰레기다.” 이것이 신념입니다. 두 번째 확신은 “예수는 절대로 메시야일리가 없다.”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남한테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가 직접 대면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그 광경을 경험하면서 이것은 더 이상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이 사람 속에 엄청난 신학적인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혼란이 일어났냐 하면 사실은 바울 신학과 목회 바울의 선교를 바라보는 코어 포커스(core focus)입니다. 이것이 나는 사도바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목회자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팩트, 부인할 수 없는 팩트가 경험되었습니다. “예수가 부활했다.” 이게 팩트입니다. 이 팩트를 인정하고 보니까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했다면 자력부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부활입니까? 죽은 사람이 부활했다면 그것은 인간 자력적인 부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까? 그럼 하나님이 살리셨다면 그럼 그 당시 신약이 아니라 구약시대이니까 구약시대로 돌아가서 부활한 예시가 있는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부활한 예시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표준적으로 모세가 부활했다고 믿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시체는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승천기라고 하는 외경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부활했다고 봤고 그담에 그전으로 올라가면 에녹이 365세를 살고 하늘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신 사건이 나오고 그담에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병거를 타고 올라간 사건이 나옵니다. 등등 이 사건을 구성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엄청나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사람에게만 예외적으로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부활의 맥락으로 본다면 두 번째 팩트는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의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혼란이 또 생기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이 알기에는 “예수가 나무에 매달려 죽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다 믿고 있었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저주하신 사람이면 살려내실 이유가 없고 살려낸 사람이면 저주받으실 이유가 없는데 어떻게 동시에 하나님께 저주 받고 동시에 인정을 받아서 부활할 수 있느냐 거기서 한순간 다윗의 생애 전체를 가르는 획기적인 깨달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번개가 치는 것 같은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속의 교리입니다. “팩트 두 개.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도 팩트이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부활한 것도 팩트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두 개 팩트가 조화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은 탁 깨들은 것이 있는데 그의 죽음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은 죽음이 아니었다.” 이렇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더 사랑스러운 이유가 되어서 예수를 살려주신 것이다.” 그리고는 한 순간에 지성을 찢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라고 하는 사상이 확 들어오면서 이 사람이 이제껏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신앙 구약신앙을 관통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고 로마주의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모든 역사를 관통하면서 “인류의 역사를 움직이는 중심축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구나.” 그것을 깨닫게 되고 그 사상이 씨앗이 되어서 그래서 그것이 아주 원숙하게 펼쳐진 것이 에베소서입니다. 사상이 성숙하면서 로마서가 나오고 그 담에 더 성숙하면서 에베소서가 나오고 완전히 바울의 생애에서 더 이상 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최고도로 만개한 것이 골로새서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는 로마서와는 비교가 안 되는 위대한 서신입니다. 거기서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철학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모든 사도바울의 행적과 그의 쓰신 서신서들은 지금 이야기한 것이 바깥으로 확장되어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제가 하나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깜짝 놀라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보자기의 환상이 나옵니다. 정통 유대인으로 살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율법에 금한 짐승과 곤충 그런 날짐승들을 먹을 수 있느냐 못 먹는다고 했더니 하나님이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어찌하여 더럽다고 하느냐” 그리고 끝납니다. 그리고 갑니다. 다 이야기를 듣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니까 다 통하는 것입니다. “아 그랬구나.” “그랬구나.” 그러는 순간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셨는데 거기 이방인과 유대인이 섞여있었는데 이방인들은 고넬료와 고넬료의 친척들이었고 유대인들은 가이사랴에서 사도베드로와 동행하여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서 있었던 최초의 성령강림사건과 똑같은 사건이 거기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도 베드로가 그때서야 눈이 떠지면서 이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다음에 나타난 현상이 방언입니다. 그런데 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큰일은 경륜입니다. 디스펜세이션(dispensation) ‘하나님이 어떻게 세계를 창조하고 구원하고 완성하고 그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의 드라마 이게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여기에서 ‘magnalia dei’라는 라틴어 이름을 가지고 책을 쓴 사람이 헤르만 바빙크이고 그 책이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 서론』이라고 하는 책이 나온 것입니다. 아주 좋은 책입니다. 여러 번 숙독하십시오. 원래는 그것이 “Our Reasonable Faith”라고 하는 영어로 나왔던 책인데 번역이 된 것입니다. 어쨌든 사도바울의 경우에 보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고 우리 모든 인류의 구원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죽음에 있구나. 그리고 그렇게 죽으면서 우리는 다시 사는구나.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되는구나.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 되는구나.” 하면서 하나님이 한 번에 그를 예수 체험하자마자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서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경우에는 좀 차이가 납니다. 우선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도 예수님이 죽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부활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 때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하나님의 큰 일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승천도 성령강림도 오직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라는 기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 틀이 나중에 10장에서 깨지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결국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한다는 것인데 막연하게 그냥 내 인생의 주도권을 예수님께 맡긴다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학교 다닐 때 선생님 말씀 잘 듣겠습니다. 말해본적 없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Lordship을 인정하고 그 Lorldship을 따라 살아가게 되느냐 문제입니다. 그것은 첫 번째 조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정확하게 가르쳐주어서 그것을 알고 자신이 진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회개하게 해야 됩니다. 중요합니다.
그 담에 두 번째는 “이 문제를 해결해주신 분. 내가 이런 죄의 문제를 해결 받도록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구나.” 그리고 그 믿는 것은 단순한 심리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원 얻을 수 있는 다른 모든 길을 포기하고 오직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Lordship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화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던 인간이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분의 죄 사함을 통해서 다시 회복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이 두 가지가 골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생명은 한 생명체를 그 생명체로 있게 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런 생명이 어느 한순간에 생명을 거두어가면 죽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우리교회에서 인턴쉽한 자매의 남편인데 부목사님입니다. 새벽서부터 봉고운전하고 그랬는데 아직 아이들도 어리고 서른 대여섯밖에 안되었는데 부인이 남편이 들어와서 서재에 너무 피곤하게 앉아있더랍니다. “여보. 이 차라도 마시고 기운을 차려봐.” 그리고 문 닫고 나왔는데 아무소리도 안 들려서 한 시간 후 가봤더니 조용히 죽었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생명이 사라지고 나면 그 인간은 그냥 물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생명이 그것을 육체에 적용하지 말고 영혼에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런 영혼의 생명이 있을 때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포츠 텔레비전을 보면 운동선수들이 격렬하게 운동하고 골을 집어넣고 환호를 하고 하는 광경을 다 봅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거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으로 산소호흡 기를 꽂고 병상에 간신히 누워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아무리 환호해도 내가 그렇게 일어나서 실제로 그 게임을 할 수 없듯이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은 이러 이러한 환희의 삶을 살고 싶지만 자기가 영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구원입니다. 그런 것들을 깊이 생각하면서 설교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 안에는 비회심자들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지방에 있는 어느 교회에 갔습니다. 설교를 하러 갔는데 담임목사님은 어디를 가시고 부목사님이 자기네 교회의 자랑을 엄청나게 합니다. 자기네 교회가 이 지방에서 한참 뜨고 있는 교회이고 젊은이들이 몰려오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하니까 교구를 담당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청년들을 담당하고 있답니다. 교구의 인원이 몇 명이나 됩니까. 하니까 한800명 정도 된답니다. 그래서 목사님 교구에서 신학적으로 정직하게 말해서 개혁주의 구원관에 입각해서 그 800명중 목사님이 목회자의 양심으로 생각할 때 진심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 오늘 밤에 죽으면 천당 갈 것 같은 사람이 몇 프로나 됩니까? 하니까 20%랍니다. 그래서 내가 그런데 나한데 뭘 자랑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돌보고 있는 양떼 100명중에서 20명만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나머지는 교회 나오는 불신자인데 뭐가 지금 뜨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똑같이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원래 그렇게 까칠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이 사람들이 좀 젊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 되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들이댔습니다. 내가 또 대 선배이니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뭐가 그렇게 즐거우세요? 당신 양떼 100명중 20명만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는데 나머지는 불신자인데 뭐가 그렇게 나한테 자랑할게 있습니까? 그랬더니 가만히 있습니다. 청년보고 물었습니다. 거기는 얼마나 됩니까. 그러니까 자기는 그래도 50%쯤 되는 거 같아요. 그러냐고 본질로 돌아가서 사역을 해라 사역의 영광은 크기가 아닙니다. 만약에 진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선한 목자를 어디에서 찾으시겠습니까? “큰 교회 목회하니까 선한목자다.” 그렇게 보시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한 침 놨습니다. “절대 그런 생각 갖지 마라. 당신같이 젊은 목회자들이 벌써 그런 헛된 생각을 하고 바람이 들어가면 앞으로 뭘 기대할 수 있겠느냐 지금은 피 묻은 복음의 감격에 빠져서 영혼을 구원하는 재미하나로 살아도 될지 말진데 무슨 요즘 뜨고 텔레비전에 많이 나오고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느냐” 했습니다.
더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인턴쉽을 합니다. 한 2년 동안 제가 건강이 안 좋아서 못했는데 지금까지 20기 정도했습니다. 한 학기동안 와서 월요일마다 오전시간에 나와 함께 스페셜 포메이션을 하고 오후에는 목회사역을 배우는 프로그램인데 어느 날 오늘 이야기하는 이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하게 있습니다. 청년부 주일학교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다양하게 있습니다. 한 16명 정도 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우리합의를 했고 과제를 하나 수행하기로 했습니다. 과제가 한 달 안에 선생님들을 통해서든지 본인이 직접이든지 아이들의 명단을 모두 놓고 이 아이가 정말 구원 받은 아이인지를 100% 완벽하게 감별해 낼 수는 없겠지만 조사를 해보자 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결과를 나온 것입니다. 마지막에 한 달 후에 다 내 놓고 발표를 하는데 이쪽의 전도사님이 초등부를 담당하는데 45명의 아이들을 한 달 동안 자기가 다 면담을 직접 했답니다. 그리고 “너 하나님을 믿니?” “눈물을 흘리고 기도해 본 적이 있니?”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는 것이 정말 느껴지지 그리고 네가 죽으면 정말 천당갈수 있니?” “성령님이 너를 도와주시는 것을 어떻게 느꼈니?” 이런 것을 조나단 에드워즈가 제시한 기준을 가지고 물어보았답니다. 이 친구가 그 조사를 하면서 마치 번개를 맞은 사람 같았습니다. 그냥 신학생으로서의 양심을 걸고 오직 다섯 명만 확실하게 구원받은 아이이고 그담에 7명 정도는 자기도 잘 판단이 안 되고 나머지는 확신하건데 절대 구원 못 받은 아이랍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3페이지 B번에 보면 비회심자들의 특성을 보십시오. “18세기의 잉글랜드의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안의 비회심자들에 대해 통렬한 회심을 촉구했기 때문에 대적 자들에게 에워싸였다. 그러나 그는 일생동안 참된 회심을 촉구하는 설교를 계속했다. 에드워즈가 주장한 내용들을 참고로 비 회심자의 특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 기준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한번 조사해보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가치판단이 자기중심적이다.” 모든 가치를 정할 때. 왜? 내가 좋으니까. “나는 그것을 원해요.” “나는 가기 싫어요.” “내가 그것을 싫어하니까.” 이런 가치판단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고 자기행복을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비회심자들은 기독교인으로 의무를 행할지 모르지만 가치판단에 있어서는 여전히 자기중심이다. 말씀이 기준이 되지 못한다.” 둘째로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그런 것을 깨려고 들어오는 말씀을 자꾸 회피하게 됩니다. 그래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말씀의 달콤함에 대한 미각이 없습니다. “두 번째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없다. 없을 뿐 아니라 싫어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회심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이나 예배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적기쁨 진리의 깨달음에서 오는 희열 이런 것들이 없다. 잠시 보여도 그것은 심리적인 것이지 영적인 것이 아니다.” “세 번째 그들에게는 거룩한 정서가 없다. 즉 하나님의 마음이 없다. 그래서 성령에 의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마음이 없다.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든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가슴아파한다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는 그 일을 생각하며 기뻐한다든지 하는 그런 정서가 없다는 것이다.” “넷째로 그들의 의지는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삶에 있어서 실천적 무신론자이다 논리적으로는 유신론자이지만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무신론자처럼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은혜의 수단들을 배척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거절하지 않아도 삶의 실천에 있어서는 여전히 무신론적이다. 중생과 회심은 중요하다 그것 없이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조국교회의 도덕적 위기의 뿌리를 회심이 사라진 영적 상태에서 발견한다. 아무리 도덕성을 외쳐도 복음을 듣고 회심하지 않는 한 결코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설령 그렇게 회심한 사람들이 도덕적인 삶을 산다할지라도 어느 청교도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것은 길들여진 짐승이 되는 것이다. 이런 속에서 비회심자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분들이 내 이야기를 실천을 안 한 다고해서 여러분들에게 강제할 수단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이 목회자로서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이 돌보고 있는 영혼의 리스트를 다 놓고 한 한 달 정도의 기간을 두고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돌보는 인원이 300명, 400명, 500명 된다면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교사들하고 같이하든지 아니면 믿을만한 사람들하고 같이 해야 합니다. 한 100명 정도 미만이라고 하면 한 한 달 정도만 잡으면 다 면담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면담을 하면서 이 사람이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인지 점검을 해보십시오. 그래서 체크를 하십시오. 그래서 확실하게 “구원받았고 상태도 좋다.” “구원 받았지만 상태가 매우 나쁘다.”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나도 모르겠다.” “절대 구원 받았을 리가 없다.” 하고 표시를 해 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도표를 통계를 완성해서 한번 보십시오.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이 설교를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에 대한 방향이 생겨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성령이 계신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잠시 잠재우거나 약화시킬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누가 옆에서 찬송가 부르는데 도둑질할 사람 없습니다. 애들이 아무리 신앙이 없어도 찬송가 틀어놓고 포르노 보는 애들 없습니다. 주기도문 외우면서 외설잡지 보는 애들은 없습니다. 그렇게 억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거듭나지 않는 사람,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죄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학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럼 만약에 조사를 했는데 100명을 목회하는데 구원 받은 사람이 겨우 10명밖에 안되고 90명은 구원 못 받은 애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계속 설교를 이런 식으로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양보해야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거짓말하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사회개혁에 앞장서야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소용없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장애인들을 모아놓고 100미터를 9초8에 주파할 수 있는 방법을 연설하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부딪힘도 없이 설교가 흩어져가는 것입니다. 어떤 내용들이 깜빡깜빡 와 닫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의 세계를 길어 올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두 번째 질문. “정말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영혼에 대한 연민 때문에 전도사로서 목사로서 내가 돌보고 있는 아이들이 내 밑에 들어왔기 때문에 2-3년이 되었는데도 70-80프로가 구원을 못 받았구나. 그럼 내가 삯꾼이다. 그런 자격지심 때문에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느냐? 이것입니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 - 1691)가 쓴 『회심』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회심이라는 책에서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우리는 울어주어야 합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울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대신 눈물 흘려주어야 됩니다.” 이야기 하면서 회심치 않은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가 울어주어야 할 불쌍한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는 늦게 신학을 했습니다. 야간신학교 들어간 것이 81년도였고 신대원에 들어간 것이 85년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똑같이 그런 상황을 많은 곳에서 같은 상황을 겪었지만 오늘날은 눈물이 있는 목회를 하는 사람을 못 이깁니다. 내가 정말 잊히지 않는 게 있는데 목사안수를 받는데 선배 목사님들이 목사안수를 주면서 너무 기가 막히게 하는 것입니다. 강대 뒤에서 안수를 주면서 선배목사님들이 그 뒤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들은 정말 이상하다. 아니 어떻게 목사안수를 받는데 눈물도 안 나오니?” 그러면서 선배목사님이 손으로 등판대기를 패면서 “야 이놈들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예수 위해 죽으러 십자가 지러가는 날이다. 울어라.” 지난번에 103세로 돌아가신 방재현 목사님이 101세 어느 선교단체에 오셔서 설교를 하시면서 탄식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날엔 설교에 예수의 핏방울이 없답니다. 그럼 오늘 여러분들이 반성을 해보십시오. 한 달이나 두 달 있으면 여러분들이 대다수가 내가 하자는 대로 안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해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양심을 가지고 그러면 그렇게 결과가 나왔습니다. 어째든 절반이든지 10%든지 나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결국은 이렇게 계속 목회를 하면 이것은 계속 이 상태에서 더 나빠진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은 형제 한사람이 복음을 깊이 받고 제일 가슴 아프게 회개한 게 교사생활을 거지같이 했다는 것에 대해서 회개를 했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고등학교 3학년 애들을 가르쳤는데 그로부터 12년 후에 한번 다 추적을 해서 내가 그때 가르쳤던 애들이 어떻게 하고 있나 하고 추적을 해보았답니다. 내가 보기에는 감리교사람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열심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13명인데 12명을 추적을 했는데 놀라운 것은 그때 자기 손안에 넣고 그렇게 같이 밥 먹고 가르침을 받던 아이들이 두 명만 교회 출석하고 10명은 예수 안 믿는답니다. 그리고 30대 초반으로서 바쁜 직장생활 초년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짜 신앙이 들어가지 않으면 신앙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것 정도 껍질 벗어버리면 입사생활 해서 혹은 대학 들어가서 6개월도 안 걸립니다. 그 까짓것 벗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진짜 예수가 들어간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참된 회심을 한 애들은 어떨까요? 정말 주님 사랑합니다.
제가 어제 결혼식 주례를 섰습니다. 서초동에 가서 주례를 섰는데 형제가 우리교회에 다녔는데 판사입니다. 교회에서 자매를 만나서 둘이 결혼을 하는데 이 친구가 21년 전에 지하실교회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을 때 수요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교회를 갔는데 꽤 일찍 갔습니다. 내 성격에 최소한 7시 15분쯤에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벌써 누가 와서 10여명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있으니까 벌떡 일어나서 정중하게 인사를 합니다. “누구세요?” 하니까 저희는 거창고등학교 학생들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왜 왔느냐니까 “목사님이 쓰신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는가』 책을 읽고 너무 은혜 받아서 목사님 만나 뵈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다 드리고 기억은 다 안 나지만 끝나고 나서 책을 한권씩 주고 차를 한잔씩 대접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서 나를 만나고 대화를 나눈 이야기를 학교 가서 하니까 걔네들이 내 책을 읽으면서 은혜 받은 이야기를 들고 부러워하던 후배가 있었는데 그 후배 중 한 아이가 어제 내가 주례 선 아이입니다. 물어보았습니다. “그 때 교회에 왔던 12명 애들은 뭐하고 있냐?” 하니까 한사람도 예외 없이 선교사가 되거나 목사가 되었답니다. 절반은 외국에 있고 절반은 한국에 있답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한번 제대로 들어간 신앙은 웬만하면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안 들어간 신앙은 아무리 포장을 해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 어린 나이에 신앙이 확 들어가면 기본적으로 예수위해 살아야 되겠다는 하나의 사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이 그러한 신앙의 힘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데리고 있었던 조교였는데 자매였는데 처음 교수 생활할 때입니다.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해요?” 그 때 대학에 본고사가 있을 때였습니다. “제 동생 말입니다.” “네 동생이 왜?” “얘가 서울대 갈 실력이 되고도 남는데 저렇게 자꾸 연대 신학과를 간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연을 물어봤더니 그리고 내가 타일렀습니다. “가서 서울대에 독문과를 가라고 해라. 독문과를 가면 신학하기 좋으니까.” 그렇게 타일러서 가서 대학생활을 하고 주님을 더 깊이 만나면서 신학을 하라고 해라해서 서울대 독문과를 들어갔습니다. 그 애가 중학교 3학년까지 반에서 3분에 2도 못 들어오던 여자애이었습니다. 별로 자존감도 없고 집도 그렇게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고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1학년 겨울수련회에서 주님을 깊이 만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해야겠다.’ 하고 물어보니까 신학을 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3때에 3분의 2도 못 들어오고 1학년 때에도 그저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던 애가 하나님 앞에 “나는 구원 받은 사람으로 내 갈 길을 가야한다.”라는 목표가 아이에게 딱 세워지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 목포전체에서 3등 안에 드는 애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서울대 독문과에 들어갔습니다. 영문과에 넣어 볼 수 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독문과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학생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세대에는 비교적 타락한 문화가 확산이 덜된 시대에 우리들이 살았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 중학교 때는 극장을 가면 무조건 정학이었습니다. 미성년입장가불가 상관없이 극장 앞에 왔다 갔다 해도 잡히면 정학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차단이 되었었는데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 확 번진 것입니다. 우리 때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결정적인 계기는 사실은 다윈의 진화론이었습니다. “아 이거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말장 거짓말이구나.” 거기에서 한번 꺾어지고 그 담에 뉴턴 만나면서 한 번 더 꺾어지고 그러면서 결국은 신앙을 버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 그런 것을 만나서 논리적으로 꺾어지는 것이 아니라 향락에 확 눈을 뜨고 초등학교 4, 5학년들이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고 아예 논리적으로 반박을 한다든지 이런 것이 아니라 그런 향락문화에 눈을 뜨면서 결국은 무엇인가를 얽어매는 것 같은 기독교 생활을 발로 차버리는 그런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하기가 너무너무 어려운 시대에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이해하고 그 눈높이로 내려서 또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대화를 하고 그들과 함께 있어주고 놀아주고 들어주고 함께 여행을 해주고 좋습니다.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면서 그들이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도록 변함없는 사랑으로 돌보는 것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안 됩니다. 명료하게 현재의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복음의 진실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되고 무엇보다도 구원의 위대한 역사는 설교와 기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물어보지 않겠습니다. 무안하니까 마음속으로 손을 들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중고등부 청년부 소년부 그럼 물어보겠습니다. 마음속으로 한번 손을 들어보십시오. 그렇게 돼서 결국은 그렇게 예수를 안 믿고 살면 오늘날의 어른들이 살아가는 이 부패한 세상에서의 불행한 인간상을 그대로 그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미래가 있을까요? 또 그중에 대부분은 경쟁사회에서 이긴 자가 되지도 못하고 밀려납니다. 그럼 패배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달픈 생활이 이어집니다. 그런 미래를 다 보면서 여러분들은 정말 화급 성을 느끼고 있습니까? ‘아 , 무엇보다도 긴급동의처럼 중요한 것은 저 인간들의 구원의 문제이구나. 그러니 예수를 안 만나면 소용이 없구나.’ 여러분들의 사역이 담임목사에게 인정을 받든지 안 받든지 여러분들이 이 교회를 떠나서 어느 교회를 가려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긴급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있는 영혼들을 어떻게 하다가 가는 거냐.” 그 이야기입니다. 그럼 내가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답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돌보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깊이 만나고 참된 신자가 되어서 행복을 누리면 좋겠습니까? 좋으면 아멘하십시오. 두 번째 묻고 싶습니다. 이것은 마음속으로 손을 드십시오. 그 아멘이 어느 정도의 아멘입니까? 예수님이 이러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너 소원이 무엇이냐? 우리 애들이 모두 오늘 김남준 목사님 강의하신 것처럼 예수진짜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으로 일평생 살다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답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목표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설교하는 교회 뒤편 벽에 못박혀죽을 수 있습니까? ‘내가 그렇게 못 박혀 죽어서 얘들이 진짜 예수 믿을 수 있다면 나는 기쁘게 죽겠습니다.’라는 마음이 있느냐 이것입니다. 목회자에게 그게 없다면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놀라운 회심의 역사를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으십니다. 정말 예수와 함께 죽고 살고자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일이었습니다. 서울시내에 있는 청소년 부서를 인계를 받는데 떠나가시는 전도사님이 나한테 그 공동체를 인계해 주는데 저 뒤에 앉았는데 전도사님의 애들이 하도 예배시간에 떠들어서 고별설교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시간에 종이비행기 날리면서 예배를 드리고 그랬습니다. 그 공동체를 접수를 하고 그리고 한 1년을 어떻게 지냈는데 이것은 정말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하나님. 내가 얘들이 정말 구원 받지 않으면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 때 제가 아직 목사가 안 되고 교수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작심을 하고 토요일마다 교회 철야를 갔습니다. 그래서 설교준비 토요일 날 다하고 제가 걔네들 설교를 하는데 꼬박 하루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교수생활하면서 그리고 집에 와서 가족들하고 저녁 먹고 씻고 한 9시정도 되면 보따리 싸가지고 양복까지 싸가지고 교회를 갔습니다. 교회 앞에다가 담요를 펴 놓고 밤새워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냥 대체 밤을 꼴딱 새우는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빨리 자면 1시 그렇지 않으면 3시 늦으면 다섯 시 어떤 날은 한숨도 못자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을 한 2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오직 제목은 하나였습니다. “다른 것 필요 없고 하나님 나의 목회사역에서 회심의 영광을 주십시오. 왜 어떤 사람은 설교에서 그렇게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는데 내 설교를 통해서는 왜 구원 받은 사람이 없습니까?” 그 때 하나님의 큰 회심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큰 영광을 보았습니다. 내가 말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여러분 자신이 영혼을 어떤 식으로 대하고 있는가를 깊이 반성하고 그리고 정말 죽어가는 사람으로 죽어가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가 하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전 372년의 일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대제는 페르시아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여세를 몰아서 페르시아라는 대제국을 무너뜨린 후 인도를 향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군대의 특징은 소규모이고 아주 민첩성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러한 군대운영방법을 로마가 배웠기 때문에 사실은 로마군대가 한동안 그렇게 강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군대가 움직임이 둔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 군대가 이렇게 빨리 못가나 그리고 조사를 해보니까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거두어들인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수송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값진 보물들입니다 수십조 내지는 수백 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보물들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부대를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전리품을 한군데 모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도 남김없이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나머지는 다 불태우라고 했습니다. 다 불태웠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면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자 그런 일은 계획하는 것이 실행하는 것보다 쉽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소수의 병사들이 투덜거렸을 뿐 대부분의 군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더욱 전투의욕에 불타게 되었다.” 목회자인 여러분들이 먼저 특히 이 젊은 나이에 구김이 없어야 합니다. “내 생명을 가져가시든지 저 아이들의 생명을 주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하나님 앞에 베팅할 수 있을 정도의 순수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 중동부에 가면 ‘테르모필라이’라는 작은 언덕이 있습니다. 해발 15미터밖에 안 되는 언덕인데 여기로 페르시아군대가 쳐들어옵니다. 그리스는 폴리스였기 때문에 빨리 연합군을 결성을 하고 함께 공동전선을 펴야 되는데 이 정치가들이 자기 이익에 따라서 의견이 분분한 것입니다. 그 때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와 함께 스파르타를 위해서 스파르타에서 죽기를 각오한 300명의 전사와 연합군 세력에서 일부 자신에게 동조하는 사람 700명을 데리고 그 언덕 좁은 골목길에서 페르시아 군대의 침공을 막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밀려온 페르시아의 군대가 100만 명이었습니다. 100만 명을 300명이 700명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 골목을 지키면서 결사항전의 의지로 막아냅니다. 그것을 영화로 그려낸 것이 ‘300’이라는 그 유명한 영화입니다. 결국은 그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밀려오면 레오니다스의 군대들 300명이 제지하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시체를 밟고 또 넘어오고 또 넘어오고 하는 격전이 계속 벌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결국은 그 300명의 군사 중 한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수없이 전투를 하면서 방패는 너덜너덜한 걸레가 되어버리고 칼은 다 부러집니다. 마지막에 무기를 다 잃어버리자 이빨로 물어뜯고 팔다리가 잘라진 병사들이 이빨로 상대방의 군사를 무너뜨리는 저항 그래서 결국은 일주일 동안 100만 명의 대군이 300명 때문에 그 언덕을 통과를 못합니다. 결국은 그리스 연합군에게 전해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고 정신 차린 그리스 연합군들이 전략을 짜서 페르시아를 물리치기 시작하는데 마지막에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페르시아가 결국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간 것입니다. 그 때 있었던 콜로누스 언덕에 비석이 있는데 그 비석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들이여 라게다이몬(스파르타)에 가면 전해주오 조국의 명 받들어 우리들, 여기에 잠 들었다고” 한사람의 목회자가 눈물을 흘리면 영혼들은 마음에 겨우 가책을 받기 시작하고 영혼들이 뜨거운 눈물 흘리기까지는 목회자의 마음이 수많은 피가 흘러야 합니다. 나는 이것을 “토혈의 목회”라고 부릅니다. 한편의 설교는 설교자의 마음속에서 쏟아져 나온 한사발의 피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를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회심여부를 면밀히 조사하라.” 두 번째 “기도의 계획을 세워라.” 그래서 만약에 이 목회지에서 나를 정말 하나님이 목회자로 불러주셨다면 이 목회지에서 나를 하나님이 목회자로 보여주신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매달리십시오. 마지막 세 번째 “한편의 설교에 목숨을 걸어라.” 이 세상에 나쁜 일이 많지만 목회자가 설교준비 안하고 강단에 올라가는 것은 매춘입니다. 몸 팔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여러분들이 이렇게 젊은 나이에 설교준비안하고 그냥 쪽지에다가 몇 자 써가지고 올라가는 것을 벌써 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목회자가 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되어야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군인으로 따지면 이제 훈련소에서 막 나와 자대에 배치된 이등병정도 되는데 아니 걸을 때는 똑바로 가고 밥 먹을 때도 직각으로 먹어야 되는 때인데 지금 벌써 설교준비도 안하고 요만한 쪼가리에 몇 자 적어서 올라가서 그걸 설교라고 된소리 안 된 소리하고 그리고 자기도 감동하나 없고 자기도 그 말씀을 받으면서 눈물한번 흘린 적 없고 가슴한번 친 적 없는 그 설교를 거기 가서 할 때에 그게 가화 조각이지 그게 진짜 설교입니까? 어느 청교도에 유명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입에서 나온 말은 귀까지 갑니다. 그것도 잘했을 때 귀까지 갑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은 마음까지 갑니다. 영에서 우러나온 말은 영혼까지 들립니다. 무엇보다도 요즘 젊은 목회자들은 기도를 너무 안합니다. 그래서 깊은 설교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만 했을 때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던 책이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이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그런 책 좋아하지 않고 안 읽습니다. 그러나 한번 꼭 읽어보십시오. 21살에 회심하고 24살에 선교사가 되고 29살에 너무 열심히 선교를 해서 과로로 폐결핵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그 생애를 저는 7번을 읽었고 책을 여섯 권을 샀습니다. 정말 우리의 마음을 녹입니다. 마지막에는 너무 기운이 없으니까 설교를 하면 한 사발씩 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담에 설교하러 가야되는데 도저히 말을 탈수가 없어서 말위에 자기 몸을 걸치면 말이 기억으로 그 다음 목적지를 데려다 줍니다. 그럼 거기서 다시 불같이 설교하고 말위에 엎드려서 돌아오고 그러다가 결국은 29살 나이에 죽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큰 딸하고 교제를 하던 사람이 이었습니다. 그가 일기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것을 내 나이 서른 살쯤 되었을 때 곡을 만들어서 붙였습니다. 나는 노래를 부를 테니까 여러분들은 이 가사를 쓰시면 됩니다.
(찬양)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를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내가 여러분만할 때 아주 많이 부르던 찬송가입니다. 어쩌면 여러 날 눈물로 밤을 새우고 피를 토하면서 설교를 해도 대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열매가 없을 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혼들이 회심했으면 하지만 하나님은 눈물로 그 순간을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설령 하나님의 어떤 오묘한 뜻이 있어서 그 많은 철야기도와 그 오랜 금식기도에도 불구하고 영혼들이 회심을 안 해서 여러분들이 마음아파해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설교의 결과에 의해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설교하는 과정을 그리고 목회하는 교인들 수가 아니라 목회하는 그 자세를 통해 하나님이 사람을 인정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저는 신대원 3년을 졸업하고 Th.M. 1학년 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설교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렇지 않았으면 제가 구약을 좋아했기 때문에 미국에 가서 공부해오고 학교 어느 한 구석에 앉아서 토판이나 주물럭거리면서 구약 논문이나 쓰고 히브리어 얘기나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 인생의 길을 바꾼 것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유학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한 번도 유감스럽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목회하고 설교하며 살아오게 하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 하나는 목회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깊이 만날 수도 있고 날라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날라리 목회자는 처음 신학교 다닐 때부터 나는 날라리가 되겠다고 뜻을 세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특별한 일이 안 일어나면 날라리 비슷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와 예수님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땀과 눈물과 피가 있는 생애 이었습니다. 그것을 흘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목숨을 걸고 기도하라 그리고 설교준비하기를 온 마음을 다해서 하라 그런데 내가 도저히 실력이 안 된다 그러면 차라리 남의 설교를 하십시오. 그 대신 정직하게 밝히고 이것은 스펄전 목사님이 1800 몇 년도 몇 월 몇일 주일에 하신 설교 중 일부입니다. 나중에 글로라도 밝히십시오. 그래서 완벽하게 준비해서 설교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