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땅을 기경하라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 10:12
녹취자: 이병두
호세아 선지자는 주전 8세기 중반에 이스라엘에서 예언을 하던 선지자였습니다. 비록 그는 이스라엘에서 예언하는 선지자였지만 그의 정신적인 고향은 남왕국 유다였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는 북왕국 이스라엘 뿐 아니라 남왕국 유다에 대한 예언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는 세속적으로는 매우 부강한 나라가 되어 있지만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잃어버리고 번영 속에 부패해가는 민족을 보면서 눈물로 예언했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음란하기로 이름 난 디블라임의 딸 고멜에게 장가를 가고, 그와의 비극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방탕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었던 선지자였습니다.
이 선지자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묵은땅이라고 하는 것은 처녀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전에 곡식을 심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들였던 과거가 있는 땅, 그러나 지금은 버려두어서 잡초만 무성하게 된 그러한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땅을 새롭게 갈아엎고 기경하라고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각성과 현실의 개혁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과거와는 비교될 수 없는 신앙의 자유 속에서 번영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는 45년 전에 주일학교 학생이었습니다. 50년 전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여러분만 할 때, 20 대 초반에 회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우 가난한 시대를 지났습니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 말고 내가 직접 본 맨 끝의 교회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45 년은 좀 넘고 50년은 좀 안 되는 그런 시대의 교회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고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그때에도 우리의 교회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때도 여전히 문제가 있고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에는 이단들이 그렇게 많아서 교회가 몸살을 앓았고, 교회가 이런저런 일로 싸움하는 것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많은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활기가 있고 순순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열정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개척을 할 때에 이렇게 모든 것을 구비하고 개척하는 적은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냥 아무 땅에나 시유지에다 말뚝을 박고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깔고 그리고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교회에 몰려왔습니다. 특별히 전도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교회만 서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변화되고 그 사람들이 또 전도하고 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교회에서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래도 그때에는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생생하게 기억을 합니다. 주일이면 목사님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설교하시던 광경이나 혹은 새벽 네 시 반이면, 새벽 종소리를 들으면서 새벽기도를 가던 일을 기억합니다. 동네 어구에는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은 소위 전도 부인들이 블록 몇 장을 놓고 올라가서 목소리를 높이며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간증을 땀을 뻘뻘 흘리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간증하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열심히 전도하는 광경이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러한 신앙의 열정들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 묵은 땅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입니다. 이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남의 징표인데, 하나님께서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신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자기 같은 죄인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에 아무 희망이 없다는 절실한 믿음, 이것이 바로 회심의 핵심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여러분 가운데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런 회심을 경험했을 것 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모를 때에는 내 마음대로 살았는데, 어느 한순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알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을 때 하나님의 복음 앞에서 여러분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에 4대 성인 중에 한 사람으로만 알던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큰 고난이 자기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깨닫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더러운 인간의 죄를 위해서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 십자가 피의 공로로 자기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신앙의 고백으로부터 기독교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자기가 죄인이라는 고백이 있고, 하나님이 지극히 거룩하시고 높고 위대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첫사랑의 때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시작입니다. 이 신앙이 우리의 묵은땅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대의는 우리 인간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탕자처럼 먼 길을 떠났고, 스스로는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중심이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 복음의 밝은 빛이 그 지성 속에 비치기 전까지는 자기가 죄인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이 복음의 빛이 어두운 지성에 비친 것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은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세속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야 할 그 자리의 중심에 사람을 놓는 것이 세속주의입니다. 오늘날 우리 조국 교회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분명한 가르침이 바로 이 회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는 이 신앙의 진실한 고백이야말로 죄인이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복음으로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될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신앙이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분이시고 자기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를 짓고 악에 빠진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평면적인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납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이천년 전의 일이지만 성령께서는 그 복음의 의미를 믿는 사람들에게 이천년의 간격을 뛰어 넘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오늘날 현재적으로 내 마음속에 경험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기 전에 먼저 나 같은 죄인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죄 없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일생 동안 선한 일을 하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며 무지한 자에게 진리를 가르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비참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보게 됩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양손과 발에 못박히고 온몸이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고 결국은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고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쏟으신 그 모든 처참한 고난의 광경을 보게 될 때,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죄인으로서 죄를 짊어진 제물로서 하나님 앞에 복수를 당하시는 끔찍한 형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좀 들으셔야지 그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여기를 보십시오. 뭐 그렇습니까? 예배 태도가! 이것 좀 소리 좀 조금 덜나게 해 주면 안 됩니까? 방송실? 계속 하겠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 주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으신 탁월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거룩하고 엄위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나 같은 인간은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유대인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형벌을 가하신 것입니다.이 흠 없고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비천한 죽음을 당하시고 처참하게 못박혀 찢기신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그 순간 고백을 하게 됩니다.
( 찬송 )
날 위해 가시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신 후 누구의 죗값인가
마지막 피한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나의 죄 때문에 주님이 이 세상에 나를 창조하시고, 내 인생으로 당신을 위해서 살도록 작성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둠가운데 살면서 주님을 지독히도 배반하고 하나님을 모욕하고 주님께 욕을 돌리며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과는 정반대의 삶을 산 그 뼛속까지 배인 끔찍한 죄악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그 모든 죄를 당신 몸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내가 대신 당하여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짓이기시는 고통으로 당신의 육체가 다 터지기까지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기뻐하기 보다는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이때 최초로 세 가지 인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 분이신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 분이신가 인간과는 비교될 수 없는 존재적인 격차, 그 탁월함과 인간의 도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그 거룩성 앞에서 우리는 형벌 받아 마땅한 아주 더러운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 아래 있는 아주 더러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거기에서 최초로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서 자기불신과 배신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이 나를 모두 버려도 끝까지 내편인 존재가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자기입니다. 자기는 영원히 자신의 편입니다. 자신은 자기와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이 자아와 인간 존재성입니다. 자기를 믿고 신뢰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이런저런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가치가 내 행복이고, 내가 이 모든 가치에 대한 최종의 판단자라고 생각하는 이 사고방식이 죄의 뿌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통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너를 믿고 이제 것 까지 자의에 충실하며 살았는데 결국은 마지막에 네가 나를 데리고 온 길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데도 그 분을 대적하고 원수처럼 살게 했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나의 죄 때문에 내가 당해야 할 모든 불법을 당하시고 비참하게 온몸이 터지도록 그렇게 죽임을 당하셨구나!’ 하는 사실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부들부들 떠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감지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끔찍한 진노의 아래 이제껏 지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엎드려집니다. 여러분들은 회개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회개하다가 졸도해 본적 있습니까?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방해됩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아니 아무것도 아니기보다는 악한 의미에서 아주 하나님 앞에 나쁜 존재라는 사실, 내가 살아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계가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이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서 아무 희망이 없는데, 그러나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그 자체는 죽고 소멸되기를 원하지 않고 다시 살기를 원하는 존재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복음의 의미가 선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깨닫는 것 입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3장 16절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찬송)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때에 자기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자기가 무너진 것을 경험했다면, 이번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일평생 주님을 배반하고 살았던 죄 때문에 멸망당해 마땅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이 단지 우리에게 감화를 주고 감동을 주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 앞에 지은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고 당신이 죽으심으로써 당신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실 때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당신이 형벌을 당하시고 그 죄가를 갚으신 다음에 당신이 죄를 위해 당한 형벌의 공로를 우리에게 주셔서 당신을 믿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그 공로를 보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랑하셨기에 예수님이 우리 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난번에는 하나님의 거룩과 엄위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떨며 쓰러졌는데 이번에는 마음을 녹이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이 벌레 같고 더러운 죄인을 위해 죽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가슴 저미는 사랑을 보면서 이번에는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립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한 가지 사랑은 파괴되고 또 한 가지 사랑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파괴되는 사랑이 자기 사랑입니다. 예전에는 철저히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한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믿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그러한 철저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가슴이 녹아내리는 그 철저한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예전에는 전혀 사랑한 적이 없는 한 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강물처럼 자신의 마음속에 밀려오게 될 때 이 십자가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영혼과 마음 안에 아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전에는 진노의 자식이었는데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마귀의 자식이었는데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상태의 자유입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죄에 마음과 영혼이 묶여 있어서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렇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믿어질 때, 성령의 강한 역사가 우리를 그 모든 결박으로부터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자유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고, 죄 대신 하나님의 강한 은혜가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시작입니다. 시작!
이때에 우리의 영혼에는 예전에는 없던 세 가지의 새로운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각,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감각,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감각, 이 세 가지의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눈으로 보이는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지성으로 직접 믿음을 통해서 보게 되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이 처음 예수 믿을 때에 두 경험, 즉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철저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험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이 두 가지의 경험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경외이고, 이것이 바로 신학적인 경건의 핵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똑같은 회개의 경험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운데 우리가 죄에 대한 용서를 경험하고,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신뢰하고 받아들였던 믿음을 포기하고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믿음으로 날마다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의 지속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의 신앙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부복하는 깊은 겸손과 하나님의 사랑 앞에 마음이 녹아내리고 자기가 죄에 대해서 깨뜨려져서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고 많은 일을 하지만 자기는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고, 오직 그리스고 예수로 구원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살리심을 얻은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자신의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위대하심 사이에서 주님을 위해 순종하며 사는 이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정확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예전에 어렸을 때에는 교회가 항상 이런 눈물이 넘쳤습니다. 교회 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제가 다니던 교회는 예배가 끝나거나 기도시간이 되면 언제나 이렇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눈물의 기도가 예배당에 항상 있었습니다. 가마니 깔아 놓고 예배를 드리는 주일학교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는 고사리 같은 손을 붙들고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예화) 제가 21살에 회심을 하고 22살부터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2 년 후에 제가 깊이 변화를 받고 24살부터 제대로 된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를 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교인은 100명밖에 모이지 않아서 전도사도 주지 않는 교회에서 제가 교회학교를 책임지고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기만 하면, 평신도에 불과했는데도 지하실에 내려가서 기도하면 아이들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가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회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아이들 중에 어떤 아이들은 방언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번 내려가서 기도하고 올라오면 장판이 질퍽거릴 정도로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됐습니다. 오늘은 모두 사라진 전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오늘도 이 집회 와서 마음이 안 좋아서 여러분들에게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만, 오늘날 이런 묵은땅처럼 되어 버린 신앙의 본래의 풍성했던 본질로부터 멀어진 모습은 우리의 예배 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여러분 예배를 주일마다 드리지 않으십니까? 극장구경도 15분 전에 극장에 가서 표사놓고 기다리는 인간들이 예배당에는 11시에 오기 시작 하고 11시 5분, 10분, 15분, 30분 자기 마음대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우리 어렸을 때는 예배가 보통 2시간 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했습니다. 교인들을 야단칠 때 너희들이 일주일에 2시간 예배드리면 그게 교인인줄 아냐고 야단치셨습니다. 그러다 중학교쯤 되니까 당신들이 교회 와서 1시간 40분 예배드리고 가면 성도인줄 아냐고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소문날 정도입니다. 한 시간이면 예배가 모두 끝납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던 그 교회에 교인이 한 700명 모이는 교회였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확하게 65분에 주일 예배가 끝나서 11시에 시작해서 12시 5분에 끝납니다. 시간이 제때 안 마쳐지면 찬송가 348장 1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맞춘다 이것입니다. 그 65분 동안에 소화에 내는 예배 순서가 열세가지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설교 시간이 짧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짧아진 설교시간 그 가지껏 25분도 될 까 말까하는 설교시간에 교인들이 예배를 견디는 태도들을 보면, 부채질하지 마십시오. 그 태도를 보면 가관입니다. 설교 안 듣습니다. 뭐 합니까? 예배 끝날 시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옆 사람하고 주보에 글 써서 필담을 나누고, 소곤소곤 옆 사람하고 이야기 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어디서 더 높은데서 전화가 왔는지 핸드폰 들고 뛰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러고는 앉아서 주보 뒤적거리면서 틀린 글자나 찾고, 헌금 들어온 것을 사람으로 나누고 곱하기 하면서 셈이나 하고 앉아 있고, 그렇게 하고나서 졸다가 성경 떨어뜨리는 사람,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신학자로서 말하는데 거기 하나님 없습니다. 헛수고 하고 있는 중입니다. 거기 하나님이 왜 오시는겠습니까? 괜히 수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날 그렇게 예배를 드려보십시오. 하나님 만날 수 있나! 예배가 끝나면 하나님을 만났으면, 감격 때문에 기도를 해야 될 것이고, 못 만났으면 내가 무슨 죄가 있나 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극장 끝나고 나가는 돗데기 시장하고 똑같습니다. 천천히 나가면 어떻습니까? 쓰러질 듯이 밀고 쏟아져 나옵니다. 거기에 하나님 없습니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여러분들의 이야기인데 웃음이 나오십니까? 며칠 전에도 그렇게 예배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웃음이 나옵니까? 눈물이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코미디입니까 이것이! 다리 꼬고 앉아서 ‘어디 한번 와보시든지 하나님! 난 별로 궁한 것이 없는데, 당신 필요하면 한번 와보시죠!’ 그런 태도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하나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교회 다녀도 그렇게 하면 여러분! 하나님 못 만납니다. 만약에 거기 오신다고 하면 제가 말리겠습니다. 오시지 말라고, 제가 오시지 말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왜?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런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오셔야 되겠습니까? 이 세상 구석구석에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그런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있는 그러한 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모욕을 받으셔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경건의 흔적조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라 이것입니다. 며칠 전 사거리에서 신호대기하면서 교회 봉고 버스가 옆에 선 것을 발견했습니다. 교회 이름이 깹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나는 교회’ 이게 무슨 교회 이름 입니까? ‘당신의 꿈에 우리교회가 날개를 달아드리겠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광고 카피입니다. ‘쉼과 행복 우리교회에 있습니다.’ 무슨 쉼과 행복을 주는지 제가 묻고 싶습니다. 쉼과 행복은 교회나 목사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 그리스도께로 와서 뭐 하라는 것 입니까? 회개하라 이 이야기입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의 길을 걸어갈 때 그 사람에게 쉼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와 함께 멍에를 메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러한 상황이 됐습니다. 교회 건너편 높은 빌딩에서 교회 현관을 내다보면, 알록달록 옷을 입은 사람들이 수없이 꺼먼 교회 육중한 문을 열고 계단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마치 수많은 구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예배 드릴 때는 그렇게 우울해 보이던 사람들이 끝나고 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 속에 하나님을 만나고 주먹으로 뜨거운 눈물을 훔치면서 내려와도 세상이 바뀔지 말찌인데,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에게서 이 세상이 무엇이 바뀌기를 기대를 하겠습니까? 이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죄송한 마음 같은 것들은 읽을 수가 없습니다.
(예화) 통계를 냈습니다. 예배드리고 나오는 사람을 문밖에서 전국에 있는 사람 100명을 찾아내서 예배드리고 나오는 사람한테 물어봤습니다. “지금, 방금 예배 드리셨죠?” “네” “방금, 목사님이 성경 어디를 설교하셨나요?” 100명중 90명이 모른다고 대답을 했고, 그 100명중 50명은 구약이었는지, 신약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춤추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는 교제는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 입니까?
결국 그렇게 풍성했던 땅에 곡식들이 잘 자라서 아주 아름다운 이삭을 매달고 누른 밭이 되어서 하나님이 그 열매를 거두실만한 아름다운 교회였던 시대들이 이제는 그 아름다운 열매들은 거의 사라지고 잡초만 무성하게 된 교회의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사상들이 교회에 깊이 침투하면서 뚜렷하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 진리에 대한 인식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경영하는 마케팅 전문가가 아닙니다. 신학교에서는 진리의 말씀을 외치다가 죽는 그러한 목회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상실했습니다. 영국 청교도들은 “목사가 누구냐?”고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들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피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하여 순교했던 사도들의 후예다.’ 라고 말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처지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목회에 성공을 꿈꿉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예배당에 모이고, 신나는 교회, 당신의 꿈에 날개를 달아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날개를 달아 줄 수 있는지 제가 물고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그 날개를 달고 어디로 날아갈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왜? 당신의 꿈에 날개를 달아줍니까? 신앙은 꿈을 포기하는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메섹 가는 길에 엎드려 졌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앞에 제일 먼저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주여! 뉘시니이까?” 두 번째가 무엇입니까? “내가 어찌 하여야 하리이까?” 고백했습니다. 자기 깨뜨려짐, 자기 부서짐, 자기 무너짐입니다. 자기의 꿈, 종교, 지도자로서의 꿈, 많은 사람들에게 영광과 존귀를 한 몸에 받고자 하는 그 모든 젊은 날의 꿈들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습니다. 거기에서부터 사도 바울의 진정한 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깨뜨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 꾸는 꿈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꾸는 꿈이 되겠느냐 이 말입니다. 이러한 세속주의가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될 때 교회는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고,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며, 그 죄인에게 유일한 희망이 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의 초청 앞에 자기 죄를 회개하고, 그 복음을 믿는 것 이외에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교회의 본분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이 일을 가지고 사람을 설득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강력한 성령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능가하시는 성령의 강한 힘이 사람들의 마음을 굴복시키고, 사람들의 교만한 이성을 꺾어 무릎을 꿇게 만들어 우리가 만난 그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도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된 사람이 자기의 모든 꿈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이유와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나중에 한꺼번에 ‘아멘’하십시오.
어떻게 바뀝니까? 아직까지도 변화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가치는 행복입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의 가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내가 살아있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복음의 진리대로 사는 것, 이 진리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 그래서 심지어 죽음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보며 최고의 행복을 느끼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변화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항상 이 두 가지 감정, 하나님께 대한 떨리는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지 않고, 그 분께로 다가가고 싶은 이끌리는 사랑, 이 두 가지가 복음진리 안에서 성령의 능력과 함께 우리 속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 입니다. 이러한 경건이 성도의 마음속에 있을 때, 그는 그 경건의 정신이 그의 모든 삶속에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처럼 모두 흘러갑니다. 그러면서 깊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든지 자기는 아무 쓸모없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할 거룩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오늘날 신앙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은 교회에서 아주 심하게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교회를 큰 능력으로 무장시키셔서, 이 세상을 향하여 도전하고 죄인들을 깨우치고 회개하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역사를 불러 일으키셔서 한 영혼 한 영혼 하나님 앞에 불러 그들로 거룩한 백성 삼으시는 방편이 세 가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이 세 가지를 사용하면서 온 그 역사를 그러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기도, 그리고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까? 정말 진리의 힘이 우리 예배 속에서 느껴집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개인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최근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신 적이 있습니까? 성경을 읽고 그 성경에 나타난 진리의 힘 앞에 무릎을 꿇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 내 생각이 이제 것 까지 틀렸구나! 이 진리가 맞구나! 이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내가 무지하게 살았구나!’ 그래서 이 진리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이 왜 목숨을 버리기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켜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이것이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태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태도라고 믿었습니다. 이 말씀이 자양분이 되어서 그 말씀이 빛이 우리에게 찬란하게 비췰 때, 끊임없이 이 세상을 바라보고 배우는 세상의 가치관들이 세상의 생각들이 말씀의 진리 앞에 깨뜨려지고 무너지고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우리들이 사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있지만 하나님의 진리가 이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거기에 승복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는 것,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예배시간에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설교는 점점 아침마당 같은 내용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에게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이야기, 그러나 죄인으로 생각하고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사라져갑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회개가 없습니다. 참회가 없습니다. 자기의 가슴을 쥐어뜯고 ‘나의 죄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내가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나는 모든 만물 중에 찌끼와 같은 더러운 죄인에 불과합니다. 나 같은 인간을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고백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진리의 말씀에 끊임없이 붙잡혀 살아도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흔들리는데, 아예 이런 진리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사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교회에 나오는 것에 의해서 확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겉모습일 뿐입니다.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이러한 진리는 복음으로 응축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외칠 때 사람들은 깊이 회개하고, 그 복음의 진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가 이러한 복음으로서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복음으로 정면대결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것이다. 어째든지 세상과 더불어 타협을 해서 합의점을 찾아보자고 말입니다. 그러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하나가 기도입니다. 여러분 열렬한 기도가 교회 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열렬한 기도는 한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깊이에 비례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췸을 받아서 자기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으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깨달을 때에 참회와 통회의 기도가 나오고,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하게 될 때에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휘해 살도록 부름을 받은 이 소명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깨닫고, 기꺼이 주님을 향해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만큼 만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이 표리부동합니다. 교회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세상 밖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완전한 이중성입니다. 이러한 이중성 속에 생활하는 가운데 그는 외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외식하는 생활 속에 이중적인 생활의 태도 속에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녹아내리는 세리의 기도 같은 그런 기도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진실함과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사라져갑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교회가 위기가 닥칠 때마다 매달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진액을 쏟으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난 것이 성령의 큰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이기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끊임없이 내 안에 뇌를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모든 변화는 지성을 굴복시키고 어리석은 인간의 사상을 십자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성령의 강력한 권능, 이런 것들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이것입니다. 이런 것들로 하나님이 주신 역사의 밭을 일구어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던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교회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미 후기 근대주의 사회는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진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 세상의 사상과 기독교 신앙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시대에 교회를 내려다보시며, 이 땅에 있는 여러분과 같은 많은 영혼들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이미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잘 나타났습니다. 천국에서 수많은 성도와 천사들의 경배를 한 몸에 받으실 그분이 무엇 때문에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셨습니까?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까지 죄인들을 위해 온전한 희생의 삶을 사신 것이 누구를 위함이었습니까?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린 자를 먹이시고, 자기를 위해서는 기적의 떡을 만드신 적은 없어도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서는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며, 기적의 물고기를 기적의 보리떡을 베푸셨습니다. 어두운 자들에게는 진리의 빛을 비춰 수많은 죄 가운데 버림받은 인간 하나 하나를 구원하여 당신의 나라로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일평생 하신 일은 죄인들은 죄인들을 섬기신 것이었습니다. 무슨 나쁜 일을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악한 인간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게 만드셨습니다. 악인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분을 죽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서라도 우리 같은 인간을 구원하여 다시 당신 앞에 살게 하시고, 생명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일평생 죄 가운데 살다가 멸망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해주셨던 것입니다. 일평생 우리를 위해 섬기시던 그리스도 예수의 몸은 고난에 내어준바 되었고, 그 발에는 못박히셨으니 그 발로 예수님은 죄인들이 있는 모든 동네를 다니시며 복음을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그 손, 겟세마네 동산에서 모우고 땀이 피같이 떨어지도록 기도하셨던 그 손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십자가에 못박히는 망치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찬송)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죄 씻었네
마지막 시대는 참된 신앙은 소수가 되고 참되지 않은 신앙은 다수가 됩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입니다. 복음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주님을 위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