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2팀실장수련회
2016
제4장 우리를 위해 형벌을 받으신 그리스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녹취자: 이경순
이 판화가 너무 멋있지 않습니까? 제가 한때 이 판화를 너무 좋아하고 너무 매료가 되어서 제가 서른네 살에 교수가 되고 4년 후에 서울에 있는 신학교에 있을 때 교수실에 걸어놨던 판화입니다. 투박하게 그린 이 판화에서 이 남자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의 표정을 한번 보십시오! 묘사가 기가 막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해서 감격하는 사랑과 눈물 이런 것들이 다 섞여 있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은혜로운 판화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우리를 위해 형벌 받으신 그리스도입니다. 당연히 대속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 제사 제도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인 대속의 개념을 보여줍니다. 대속이란 무엇입니까?(84-85)
‘대속’이란 한자에서 ‘대신한다’라는 개념이고 ‘무엇인가 값을 주고 산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에서 잘 쓰는 단어는 아닙니다. 대속이라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한 형벌을 다른 이가 대신 당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대속입니다. 제사제도는 일반적으로 존 오웬 목사님 같은 경우는 인간이 타락하면서 즉시 계시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사제도가 창세기 4장에서나 되어야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창세기 4장 보다 훨씬 더 뒤로 가는 게 아닌가, 이렇게 보는데 존 오웬 목사님은 즉시 계시되었을 거라고 보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이 예배행위는 제사를 동반한 것이라고 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부터 추적해 나가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사제도를 주셨을 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용서를 가르쳐주시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메시야를 계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제사제도가 타락하자마자 즉시 주어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밀접한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제도 자체가 메시아를 바라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사라는 것은 짐승을 죽이는 것입니다. 죽여서 그것을 제물로 하나님 앞으로 바치는 데 그대로 소나 혹은 양을 그대로 목을 조른다든지 숨을 못 쉬게 해서 죽은 것을 드린 것이 아니라 해체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실현식 교육방식’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닭을 잡을 수 있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요즘은 닭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잡아놓은 닭을 사면됩니다. 예전에는 닭을 다 잡아 먹었습니다. 파닥파닥 뛰어다는 닭을 잡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목을 비틀고 가슴에다 칼을 꽂아야 합니다. 피를 다 쏟아내야 고기가 맛있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 튀겨서 털을 다 벗겨냅니다. 그담에 칼로 배를 가릅니다. 우지직 소리가 날정도로 갈비뼈를 꺾어서 그 내장들을 다 긁어내고 마지막에 손가락으로 갈비사이사이에 들어있는 허파까지 긁어 내야합니다. 닭은 그래도 좀 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게 개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게 양이라고 생각해보고 만약에 500킬로그램이나 되는 소를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제사를 드리면서 느끼는 인간의 느낌은 ‘너무 무섭다.’ 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 어떤 것도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다루지 않는데 죄는 이런 식으로 다룬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 죄는 네가 졌는데, 왜 죄 없는 이 짐승이 죽어야 하는가?’ 거기서 대속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 “이 예수는 하나님이 그의 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므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하심이니”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단어는 ‘화목제물’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제사는 제사의 목적과 방식에 의해서 분류가 됩니다. 그러면 방식은 예를 들자면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는 ‘번제’입니다. 그리고 액체를 뿌려서 드리는 제사는 ‘관제’입니다. 관제, 소제, 화제는 제사방식입니다. 또한 이 제사가 무슨 목적으로 드려지는가? 에 따르면, 이스라엘 전체가 드리는 ‘속죄제’, 제사 가운데 하나님의 성물을 불결한 상태에서 접촉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물건들에 대해서 죄를 범한 것들은 ‘속건제’ 라고 드립니다. 이 ‘화목제’ 는 그야말로 화목을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화목’ 이란 히브리말로 ‘샬롬’ 이라는 것입니다. ‘샬렘’ 이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이것은 상태 동사로써 ‘평화롭다’ 이런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무엇인가 훼손된 것이 없는 온전한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게 예쁘게 만든 케이크가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갖고 와서 망설여집니다. 요즘은 너무 아름답게 장미꽃처럼 휘감아서 만드는 케이크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손을 대기에 너무 아깝습니다. 그게 샬롬 때문입니다. 너무 완전해서 훼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를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과의 샬롬,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샬롬, 그 샬롬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모두 펼쳐지고 그 샬롬을 지향하는 사람 자신 속에서 정신과 육체 영혼과 마음 이 모든 것 사이에 완전한 균형이 이루어져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안정되고 평화로운 상태 이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예를 들면 살면서 걱정이 확 밀려오면 샬롬이 깨집니다. 정욕이 확 하고 일어납니다. 샬롬이 깨집니다. 정욕이나 아니면 욕망이나 이런 것은 아닌데 몸에 기운이 없으면서 기운이 쑥 빠지는 것도 샬롬이 깨지는 것입니다. 샬롬은 정신과 육체가 아울러서 완전한 조화와 균형의 상태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그런 샬롬의 상태에서 살게 하시게 하시려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샬롬의 상태에서 계속 세계의 아름다움이 증진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샬롬이 다 파괴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 샬롬에 이바지도록 살라고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 설교한 형제사랑도 그렇게 깨지면 샬롬이 무너진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샬롬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샬롬을 복원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이고 신자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어째든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화목제를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화목제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표현하신 것은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의 샬롬을 누리고 사람과의 샬롬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의 주제가 만물의 회복과 샬롬입니다. 화목입니다. 그것을 세 번에 다 할 수는 없을 수는 없겠지만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분이 찔린 것이 바로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두 개의 단어가 눈길을 끕니다. 허물 죄악입니다.
2. “그가 찔림은”에서 “그”가 될 수 있는 자격은 무엇입니까? 이 자격을 가진 한분은 누구십니까?(87-89)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흠이 없어야 합니다. 짐승으로서 온전한 짐승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하거나 혹은 병들거나 이런 것들을 드리면 하나님께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래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에스겔 43장에 보면 “다음날에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 제물로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하기를 수송아지로 정결함과 같이 하고”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흠 없는 것’입니다. 결점이나 혹은 오류 흠집 이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똑같은 사과인데 매대에 나와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굉장히 큰 사과인데 한쪽이 약간 상했습니다. 싸게 팝니다. 만약에 상하지 않고 저위에 하얀 종이 위에 쌓여서 앉혀져 있으면 한 오천 원은 갈 건데 매대 이쪽으로 나와서 이천 원으로 뚝 떨어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흠’ 때문입니다. ‘흠이 없는’ 그래서 완전한 짐승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데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그 제물을 준비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자신이 온전히 바쳐진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흠 없는 짐승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를 구속하지 않겠느냐 그 뜻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들이 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이 죄를 없애시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에게 화목제물로 주셔서 우리의 죄를 이분이 다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형벌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벌을 당하시므로 우리가 지은 이 죗값을 십자가에서 다 치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 용서를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오래전부터 구약에서는 이렇게 수없는 짐승들이 죽어가면서 죄의 심각성과 그리고 누군가 메시야가 오셔서 이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 시대에 가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는다. 그러셨을 때에 제자들부터가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을 제대로만 믿었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구약시대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가르치셨던 가르치심을 아주 잘 이해했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인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방해물이 유대교였습니다. 유대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후에 생겨난 책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로 바뀝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성경에 대한 해석들이 나오면서 이 사이사이에 민간에서 유행하던 많은 사적인 신앙들이 이 해석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들어내 진 것이 유대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에 푹 빠져버리면 메시야를 발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이 어두워질 것을 미리 바라보면서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허물”과 “죄악”의 원뜻은 무엇입니까? 이를 통해서 알게 되는 인간 존재의 본 모습은 무엇입니까?(89-91)
허물과 죄악이라고 나오는데 여러분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이겠지만 어째든 조금 설명을 드리면 1인칭 복수입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리고 우리들의 죄악들 때문에 결국 여기에 패사라고 하는 것은 금지된 것을 넘어 간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반란’, ‘침범’ 이라는 뜻에 인칭 접미사가 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우리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경계를 넘어가므로 우리들이 그것을 여기서 허물이라고 표현한 것이고 복수로 표현 되므로 서 이것이 죄악이라는 집합적인 의미로 사용 되고 복수로 사용되면서 죄가 얼마나 컸는가, 심각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좀 더 보면 모든 인간들이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자를 향한 하나님에 사랑이 십자가에서 이 둘을 함께 녹여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게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는 불붙는 사랑이 십자가에서 함께 녹아진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참한 죽음은 곧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사람의 허물과 사람자신을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나쁜 짓을 하거나 나에게 해로운 짓을 하면 죄만 미운 것이 아니라 사람도 미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4. 대속의 결과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92-96)
하나님과의 평화와 질병적 죄의 치료입니다. ‘질병적’이라는 것은 ‘고질적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병이 우리 온몸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그렇게 영향을 준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아까는 죄의 짐이 있었는데 이것들을 벗겨주시고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두 가지 사랑을 주셨는데 첫째,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평화를 이루셨고 이것은 당연히 샬롬입니다. 샬롬을 이루셨습니다. 둘째,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우리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서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질병적인 죄로부터 치유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저런 질병적인 상태에서 결국은 오전에 제가 설교한 인간은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리면 결국은 주체적인 삶을 살수 없게 되고 결국은 인간이 자유로운 주체가 된다는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가장 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회복시켜주시는 일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5. 십자가를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과 사랑의 성품이 만나는 곳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96-99)
죄에 대한 강렬한 분노와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십자가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께 심판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계신 죄인으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비참함은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멸시의 표시가 아니라 예수가 짊어진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표시입니다.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 죄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 죄에 대해서 너그러우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해서 심각한 훼손이 우려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죄가 사실은 그리스도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만약에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면 모두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인류가 모두 멸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모순적인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께 죄를 전가시켜서라도 이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 이게 십자가입니다.
6.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감격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99-101)
십자가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성경이 계시해주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계속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것을 증거하고 있고 이런 사랑 속에 있는 사람은 이렇게 성경을 볼 때에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증거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