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녹취자: 김순미
1. 대속을 계획한 주체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죄악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대속의 길을 여셨을까요?(104-106)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길러보면 다 이해가 되지만,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습니다. 요새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들도 많이 있지만 어째든 일반적으로는 모성애 부성애가 있어서 자식이 자식 노릇을 못해도 부모가 사랑합니다. 그게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한 성품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대속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 아직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누군지 확실히 몰랐을 때에 하나님이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창 15:17-18)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게 당시의 고대 근동의 언약체결 의식입니다. 그림이 애매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황소를 반 동강 낸 것입니다. 이것을 횡으로 잘라서 놓은 것입니다. 500kg된 황소를 머리부터 시작해서 반으로 쪼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흐를 것입니다. 그 사이를 한 나라의 왕과 신하가 땅을 부여 받으면서 서로 군신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 체결된 언약서를 가지고 이 사이를 지나갑니다. 무슨 뜻이냐면 ‘둘 중에 누군가가 언약을 파기하면 이렇게 살아있는 소가 쪼개지는 것 같은 신의 형벌이 주어질 것이다.’ 하고 천지신명을 증인으로 불러들이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증인으로 불러 들어서 언약서를 체결을 해서 한 부는 왕이 한 부는 봉신이 한 부는 사당에 보관합니다. 이러한 언약체결 의식에 아브람은 아주 많이 익숙해져 있을 때에 하나님이 쪼갠 고기사이를 지나가시면서 당신을 걸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눈높이로 내려와서 이제 설명을 해 주시는 그러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쨌든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전혀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하고 믿을 만 한 것인지를 교육시키시면서 신앙을 키워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들을 당신께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동기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성품입니다. 한번 창조하신 사람들을 진멸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창조하실 때에 의도하셨던 목적을 그대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 이었으니 그런 대속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형별 받아야할 백성들과 화목 할 수가 화해 할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2. “우리 모두의 죄악” 에서 “죄악”에 단수형 명사가 사용된 이유는 무엇입니까?(107-108)
히브리말로 ‘아온’이라고 읽습니다. ‘죄악’ 혹은 ‘악’ 이라는 의미이고, 단수입니다. 그런데 무수한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다. 혈기를 부리는 여자가 나옵니다.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오늘 아침에도 혈기 부리지 않았습니까? 우리 자매님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온유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또 무엇입니까? 몽둥이 들고 도둑질 하러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신앙적으로 미끄러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죄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많은 죄를 짓는데 이게 단수로 나옵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본질 적으로 짖게 되는 죄악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죄악 되기 때문에 모든 뿌리에 죄가 있습니다. 사실은 이 단어가 수식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복수형이지만 단수형으로 죄가 기록 되니까 많은 죄를 지은 것이 결국 하나로 수렴이 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잘 설명하면 뿌리가 죄가 있고 죄에서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에서는 구분해서 이것을 크라임(crime)이라고 부릅니다. 이거는 이제 형법상의 죄입니다. 씬(sin)으로 불러요. 이것은 마음속에 있는 본질로서 우리 죄입니다. 그래서 sin은 뿌리처럼 끊임없이 죄악이라는 crime을 생산해냅니다. 이 하나의 뿌리에서 인간의 죄악이 시작 되니까 사실 법을 엄격하게 하면 이것을 막을 수 있지만 그러나 이죄는 또 다른 방면으로 갈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인간의 죄의 문제가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뿌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3. 메시아가 대속하여야 했던 죄악의 정체는 무엇입니까?(109-110)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의미가 숨어 있는 것입니까? 어거스틴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이제 절대로 내 자신을 다시는 주인을 삼지 않겠사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 각기 제 길로 간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그냥 내가 좋은 것으로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을 무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죄입니다. 이런 길로 갔기 때문에 인간이 대속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해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양은 ‘온순한 짐승이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으니’ 이렇게 묘사하지만 양은 무지합니다. 그리고 고집도 있습니다. 그래서 각기 자기 마음대로 갑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 올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길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돌아오는 양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어떤 중동 선교사가 제 설교를 들었습니다. 중동 지방에서 원주민이 제일 상스럽게 생각하는 욕이 ‘양 같은 놈’입니다. 선교사가 20년을 넘게 있었는데 들어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이 어딘가 잘못알고 왔거나, 뻥치시나 보다.’ 그리고 진짜 중동 원주민 친구한테 ‘내가 이런 이야기 들었는데 맞나?’ 그러니까 ‘맞다.’ 그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교사를 만나서 누가 우리로 말하자면 ‘xxx 같은 놈’ 그러고 욕을 할 일이 없으니까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그 사람들에게는 최대의 욕입니다. 생각 없고 미련하고 고집 세고 염치 모르는 그런 사람을 가르쳐서 양 같은 놈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죄 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게 다 그릇 행하여 연약함도 있지만 이 안에는 결국은 하나님을 주인 삼으며 그분을 의지하며 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중동 지방 사람들은 양의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이 인간을 양에 비유함 으로써 표현하고자 한 인간의 특성은 무엇입니까?(111)
혼자 살아 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가 너무 어렵습니다. 제가 표현했으면 이렇게 안했을 텐데 뭐 이렇게 말을 비비 꼬는 것입니까? ‘중동사람은 양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성경은 왜 인간을 양으로 비유했습니까?’ 이렇게 하면 초등학생도 다 알아들을 텐데 말입니다. 복잡합니다.
첫 번째 힘이 세어 고집을 부리고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시력이 매우 나쁜 고도 근시어서 3미터만 벗어나면 잘 못 봅니다. 그리고 자신을 방어할 무기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카멜레온은 변신이라도 하고 스컹크는 방귀라도 끼는데 양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양을 만든 것은 양이라고 하는 의미 자체가 혼자 살아 갈 수 없도록 만들어진 동물입니다.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을 의지하며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합니다. ‘와일드 쉽(wild sheep) 산양이 있지 않습니까?’ 산양은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의 동물이 되었습니다. 인간 가까이 있어야 되는데 짐승들을 피해서 계속 위로 올라가니까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위에서 실족사를 합니다. 사실 포식 동물에게는 산양은 도시락에 불과하고 자신을 방어하지 합니다. 인간 가까이에서 보호를 받으며 살아야합니다.
인간이 모든 만물의 뛰어난 영장이긴 하지만,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개가 자살 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극단적인 괴로움이 개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개처럼 되어서 고민 없이 살아야 될까요?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만족한 돼지 보다 고뇌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 그런 고뇌 속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위대함을 입증하면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철학사를 읽어 보면 거기에는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하늘은 무엇인가? 땅은 무엇인가? 신은 누구인가? 자연은 누구인가? 이런 모든 질문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꼭 필요한 이유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나?’ 하는 답이 ‘나는 누구인가?’ 라는 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이고, 인간이 누구인가? 를 규정하는 것을 인간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둘 중에 하나를 택했습니다. 알 수 없는 위대한 자연이라고 하는 신 앞에 하잘 것 없는 존재로 봐 버리고, 두려움에 떨든가 아니면 치고 올라가서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으로 가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이 누구인가? 에 대한 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성경은 우리에게 최고의 휴머니즘을 제시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누구인지 알 수 있고 당연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을 양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확신하는 것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116)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악을 행합니다. 죄를 짓는데 이것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은 우리 속에 있는 죄입니다. ‘아온’이라고 표현 된 것입니다. 이 뿌리 때문에 결국 인간은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이라는 책에서 인간을 네 단계로 분류합니다. 처음 태어나고 죄가 없었던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 타락하고 난 다음엔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인간, 중생하고 구원 받은 다음엔 지를 안 지을 수 있는 인간 그리고 천국에 올라간 후 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인간 이렇게 넷으로 인간의 상태를 구분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구원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은 이렇게 밑바탕에 깔린 죄 때문에 결국은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이 사람이 그래도 자연 계시의 빛을 받으면서 양심의 작용을 따라서 살면 이 죄는 현저히 줄어 들 수 있습니다. 이성 없는 짐승처럼 사는 사람과 매일 매일 인간의 도리를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옛날의 우리의 선비들이 공부하고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이 ‘경(敬’)과 ‘성(誠’)입니다. 경은 하늘을 향해 경건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자신에게로 투영이 되는 것입니다. 성은 인간이 정성을 다해서 이 내면의 세계를 가지런히 하는 것인데 이것이 성리학에 와서는 하늘로 까지 뻗어 가서 이 성이 내면의 원리가 아니라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가 돼서 이 성이 인간 마음의 성이 우주의 성으로 승화한다고 이해합니다. 이런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죄를 짓지 않습니다. 간음, 폭행, 치사한 뇌물 받기 등 양심의 더러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안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결국은 죄악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천국을 향해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번 한주에도 은혜로운 공과를 인도하게 해 주시고 모두 배운 후에는 죄인 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아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