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죄의 기원과 결과
“내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내가 그곳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녹취자: 허혜숙
저는 창세기를 읽으면서 이 성경 구절이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보다 더 슬픕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인간의 모든 허무, 이런 것을 한 폭의 그림처럼 느끼게 만들어주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결국은 이렇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사람을 우리들이 현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알고 보면 이것도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육체를 두고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육체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그것은 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충만한 생명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인간의 육체의 불사라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묻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생자필멸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현대 생물학에서 그런 케이스가 발견이 됩니다. 그리고 언제 한 번 설교하면서 자료를 다 뽑아서 말씀을 드렸는데 인간의 생명이 90세만 살아도 사실 지금은 평균 이상을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90세 정도인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린랜드 상어는 600년을 살고 어떤 거북이는 1300년을 살았다고 하고 또 이론적으로 끊임없이 생체번식을 통해서 죽지 않은 생물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인터넷 들어가서 찾아보십시오.
그러니까 분명히 그런 불사의 삶을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지정하신 것입니다. 육체도 그렇게 될 수가 있었습니다. 최대의 절망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저는 언제 그런 것을 느끼느냐 하면 너무 힘들면 링거를 맞습니다. 링거를 맞는데 자력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너무 좋잖습니까? 그런데 너무 할 일은 많은데 육체가 다운이 되었을 때 링거를 맞는데 링거를 맞은 지가 약 10년이 된 것 같습니다. 이 링거가 너무 재미있는 것은 몸이 너무 안 좋을 때는 링거 수액이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몸의 상태가 약간 기운이 남아있고 밥을 든든하게 먹고 체력을 보강한 상태로 가서 링거를 맞으면 액이 들어갑니다. 링거를 맞으면서 열일곱 시간을 잡니다. 링거를 맞으면서 4~5시간 자고 돌아와서 밥을 안 먹고 약기운에 취해서 수면제 하나 먹고 바로 그 약 기운데 자면 밤 11시 반이나 한시에 깹니다. 당이 떨어지면 잠이 깨니까 꿀물을 한 잔 마신 다음에 다시 수면제 한두 알을 먹고 다시 잠을 청합니다. 그러면 그 날 모두 약 열 여섯 시간 정도를 잡니다. 그렇게 자고나면 요즘은 그렇지 않은데 예전에 그렇게 링거를 맞고 아침에 눈을 떴는데 내가 열여섯, 열일곱 살 때 맞은 아침입니다. 아, 정말 상쾌한 아침이구나, 아무 곳도 안 아픕니다. 그런 희귀한 경험을 몇 번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이 구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가 타락하지 않고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매일 그런 싱싱한 젊음 속에서 살았을텐데 이제 죽음의 기운이 스르르 스며들어온 것입니다. 완전성에서 멀어져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참 인간이 어떤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 자체가 이대로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흙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자연사의 경우 흙으로 돌아갈 가까운 징조가 서서히 나타나면서 죽음의 기운이 아주 천천히 생명의 기운을 삼키면서 영원한 침묵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육체가 전부 다이다 라고 한다면 사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아우구누스 말대로 에피크로스 학파가 이긴 것입니다. 이것이 다라면 쾌락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사실은 승리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영원히 불멸하도록 하나님이 남겨두신 것입니다. 아멘. 여기에서 우리들이 소망을 가지고 누가 내가 죽을 때가 되고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과도하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희망이 이렇게 우리의 육체의 죽음을 맞이해도 영생을 누리는 우리의 생명이 있다는 것에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도입부가 굉장히 은혜롭죠? 기대가 되죠? 그럼 넘어가 봅시다.
자, 죄의 기원입니다. 한 사람의 죄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이 부분이 ‘모트 타모트’ 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화자의 의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 you shall die 라고 하면 내가 반드시 너를 죽일 거야, 화자의 의지가 표현되듯이 이것은 예외가 없는 어떤 필연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 선언을 하시는데 여기에서 죽는다는 의미는 당연히 육체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혼의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라고 흔히 불리는데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선악과라고 간단하게 해석을 했는데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사람들이 흔히 기독교를 걸고넘어지는 대목이 전도하다 보면 이 대목입니다. 아니 그 선악과를 왜 만드셔서 왜 따 먹게 만드시냐? 좀 더 나은 사람은 아니 그것을 따 먹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하와가 혹시 약해서 그것을 따 먹겠다고 손을 뻗쳤을 때 손목을 부러뜨리시든지 아니면 손을 꽉 잡으셔서 안 돼 하고 했으면 되지 않냐? 이렇게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아주 유치한 차원에서 본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 닮은 성품을 주셨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사람이 아주 커다란 임무를 맡길 때에는 그것을 할 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아파트에 줄반장을 한다 그럴 때 아파트 전체 말고 아파트의 줄 대표 그 사람의 그릇과 수백 개의 동이 모여서 한 해의 지출이 관리비가 천억을 넘어가면 수백 개의 동 대표를 할 사람의 능력이, 그릇이, 같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줄반장은 훌륭하게 해도 그런 정도의 규모의 일은 못 할 수가 있습니다. 평촌 동 반장은 훌륭히 한 사람이 대통령도 훌륭히 한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겨주신 임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뭐냐하면 하늘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데 이 땅은 당신의 대리자로 인간을 세우셔서 대신 다루시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위치가 천사도 부러워할 위치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에게는 아주 뛰어난 학습능력, 어떤 학습능력? 하나님에 대해서 학습할 수 있는 능력, 그 다음에 사람에 대해서 학습할 수 있는 능력, 자기 자신을 학습할 수 있는 능력, 그 다음에 이 창조의 세계의 모든 물질과 생물의 세계를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아울러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 그 꼭두각시 인형극 그것이 처음 시작된 나라가 체코라고 합니다. 어디에나 있었겠지만 아주 발달한 나라가 체코라고 합니다. 예전에 체코슬로바키아라고 했는데 지금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었습니다. 위에서 여러 명이 연출을 해서 인형극을 만들어내는데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인간을 만들어서는 이 엄청난 임무를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 의지입니다. 의지인데 자유로운 의지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어느 정도 존중하셨느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을 선택한다고 할지라도 존중해줄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 자유로운 의지가 인간에게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만든 기계이지 인간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지성과 의지를 인간에게 알게 하셔서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고 가꾸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하와도 나오는데 아담은 맨 처음에 이 사람은 perfect한 사람이었습니다.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unsafe 안전하지는 않은 perfection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얼마든지 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순종을 택할 수도 있고 불순종을 선택할 수도 있는,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자유의지를 가지고 불순종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하나님과의 언약이 있었습니다. 내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는데 먹지 않고 이 명령을 지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요 만약에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으면 사망할 것이다 라고 하는 언약의 결과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이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한 이 명령이 그냥 지금까지 계속 되었을 것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시적인 기간 안에서 주어졌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여기에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인데 인간들이 이 굉장히 많은 질서가 다 깨지는 것입니다. 세계만 하더라도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악이라고 하는데 이 악은 크게 도덕 악, 자연 악 두 가지로 나뉩니다. 도덕 악은 인간이 윤리적인 결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악입니다. 내가 물건을 훔치기로 했다, 내가 누구를 때리기로 했다, 이런 것은 도덕 악입니다. 그런데 자연 악은 갑자기 국지성 호우가 한 시간 당 200mm가 내려서 산사태가 나고, 일본을 보니까 갑자기 비가 내려서 언덕 위에 집이 있는데 위에서부터 무너져 내려서 쓰레기더미 처럼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옵니다. 무시무시한 홍수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자연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이러한 자연 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완전한 화해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두 개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고 이것은 자연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것을 땅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땅이 저주를 받는 것은 인간을 통해서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인간이 잘못하면 땅이 저주를 받고 저주를 받은 땅은 인간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냅니다. 그러면 인간은 다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신토불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또 다른 의미에서 성경적인 사상입니다. 인간의 몸과 땅이 결코 두 개가 아니고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많은 성경의 경우를 보면 특히 역사서에 사무엘서나 역대기에 보면 하나님이 경고를 하십니다. 너희들이 나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 이러이러한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돌아오면 하나님이 이런 복을 줄 것이다, 여기에 땅의 축복과 인간의 도덕적 선이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시비를 거는 아주 중요한 기독교의 변증법이 나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지었는데, 그래서 결국은 죄가 세상에 들어왔는데 ‘에이스 엘더’ 에이스는 속으로 엘더는 온다라는 뜻인데 파도 같은 것이 확 밀려오거나 둑이 터져서 물이 확 쏟아져 들어오는 그러한 광경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성장하면 목에 툭 튀어나오는데 그것을 아담스 애플이라고 합니다. 선악과를 먹다가 걸려서 툭 튀어나왔다고 우스개 소리를 합니다. 선악과를 그 사람은 맛이라도 봤으니까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데 우리는 사실 그 맛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는데 옛날에 연좌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8촌입니다. 8촌인데 나는 얼굴도 모릅니다. 그런데 신원조회에서 걸려서 공무원 시험에서 불합격이 됩니다. 8촌이 부역을 해서 이북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8촌의 얼굴도 모릅니다. 그것을 연좌제라고 합니다. 지금은 법적으로 헌법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거부를 당합니다. 옛날에는 8촌 중 한 사람이라도 이북으로 넘어간 사람이 있으면 특히 공무원 경찰, 교사, 특히 군인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임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교직과목을 모두 이수하고 합격을 해놓고 교사가 못 되는 선배들을 여러 명을 봤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될 수가 있느냐? 물어봅니다. 이것을 두 가지로 답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첫 째 답은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었다고 칩니다. 그러면 우리는 육체가 죽지 않고 영혼과 함께 영생불사 하는 몸이 되었을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처럼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면서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 유익은 우리가 당연히 누릴 유익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이라는 조건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은 한 마디로 먹고 싶은데도 참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후에 영생을 누리게 되는 우리는 도대체 그 선악과를 안 따먹는 일에 무엇에 도움을 주었습니까? 없죠? 거저 누리게 되는 것이니까 절대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되는 논증이고 두 번째는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한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면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은 것이 우리가 영생을 누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형벌을 당하시므로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고난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설명이 되려면 여기에 태어난 이 사람과 아담이 시대는 다르지만 연결된 공통의 인성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이 인간의 공통 본성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으면 나는 A라고 하는 특수한 인간인 동시에 인간이면 모두 공유하여야 할 이 B의 공통 본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철학에서는 실제 론과 유명론이라고 하는 유명한 논쟁으로 나중에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론 논쟁과도 관련이 되고 11세기에 아벨라루두루스라는 사람에 의해서 이것들이 정리가 됩니다. 그런데 어쨌든 나는 아담과 아무 상관도 없고 C,D,E 이런 사람들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나는 누구도 대치할 수 없는 독특한 나인 동시에 인간이라면 아담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여야 할 어떤 인간 본성이 있다고 해야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그 인간의 본성에 함께 연합하셨고 그래서 그의 죽으심이 그를 믿는 자들의 영혼을 살리고 인간을 살린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이것을 간단하게 아담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그렇게 되면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심으로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한 사람 때문에 죄가 들어왔다 이것이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어떻게 들어왔느냐? 결국은 죄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 죄에 정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반감입니다. 청소년 때 엄마 아빠에 대해서 반감을 품으면 목소리도 싫고 모든 것이 꼴 뵈기 싫을 때가 옵니다. 그것이 반감입니다. 그 다음에 대적입니다. 적으로 알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감정의 문제이고 이것은 의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감정의 문제이든지 의지의 문제이든지 이것은 이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행동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육신의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태어나면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얼마나 그 원수가 되는 감정이 극렬하게 발동하느냐와 온순하게 발동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본성상으로는 하나님께 천성적으로 적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 동물 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갓 태어난 고양이와 갓 태어난 쥐를 같은 공간에서 길렀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됐다고 했습니까? 둘이 서로 친구가 된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고양이가 쥐를 죽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천성이라고 부릅니다. 천적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향해 어떤 천적의 감정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번에 아웃리치 갔다 온 어느 청년이 간증을 올렸는데 읽고 제가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최근에 12월에 회심을 한 형제인데 기도를 많이 하고 아웃리치를 갔습니다. 시골 할머니를 세 시간 동안 전도를 했는데 그렇게 안 믿으려고 하더랍니다. 마지막에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보면서 이 형제가 아, 내가 저렇게 하나님을 거부하던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이 정말 놀라운 기적이구나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 아웃리치를 가게 된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 등록한 지 3년 미만 된 사람들이 90%를 채웠다고 합니다. 옛날에 다니던 사람들은 늙으셔서 기력이 없어서 젊은 것들한테 물려주고 기력이 쇠하여 그러셨을 것 같은데 다음부터는 힘을 내십시오. 몇 번 갈 기회가 없습니다.
관계가 파괴됩니다. 왜 관계가 파괴됐는지 아십니까? 왜냐하면 이 관계를 지탱하게 만든 것이 사랑이었습니다. 범죄 한순간에 이 사랑이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자아와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하나님보다 더 높게 될 것이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는 그것이 오히려 이 세상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비참하게 되는 존재가 되는 것으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비참입니다. 죄의 결과가 원죄가 있는데 원죄는 확실한 것입니다. 뭘 보면 알 수 있느냐 하면 만약에 원죄가 없다면 아이를 교육시키지 않고 내버려두면 선한 사람이 되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악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악을 위한 교육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그런데 선한 사람을 만들려면 엄청나게 교육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보면 얼마나 인간이 악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죄는 죄책과 오염으로 나뉘게 됩니다. 죄책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기가 짊어져야 하는 사법적 책임입니다. 법적인 책임이고 오염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엄연히 존재하게 되는 선천적이고 도덕적인 부패성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비유를 고안해 냈습니다. 차를 몰고 붕 하고 골목길을 달려서 교회로 가는데 운전을 잘 못하다가 어느 집 담벼락을 받았습니다. 차도 박살이 나고 담벼락 한쪽이 부서졌습니다. 주인이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하고 화들짝 놀라서 뛰어나왔습니다. 보니까 아주 친하게 지내는 교인입니다. ‘아이고 집사님, 이것이 웬일이에요?’ ‘아, 집사님 여기 사셨어요?’ ‘이게 웬일이에요?’ ‘제가 운전을 잘 못해서 담벼락을 받았습니다’ ‘집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남편이 이런 것 잘 고쳐요. 안 다쳤으면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차가 외제 차인데 견적 좀 나오시겠어요. 교회 늦으니까 빨리 가세요.’ 그렇게 해서 결국은 죄책은 면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망가진 자동차는 고쳐야 합니다. 그것이 오염입니다. 이 죄책은 예수를 믿은 순간 ‘칭의’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원히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 오염은 일생을 살면서 성화로서 이것을 고쳐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즉시 영혼이 죽은 것입니다. 영혼의 죽음은 제가 더 이상 설명을 안 하겠습니다. 육체의 죽음과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활기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생명력이 심히 약화 되어서 영혼으로서의 제 기능을 못 하는 것, 영혼의 기능은 하나님을 알고 발견하고 사랑하는 것인데 그것을 못 하게 되는 것, 그것을 죽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즉시 육체도 죽여 버리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인간이 없는 창조의 세계를 뭐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죽음을 유보하십니다. 그래서 이만큼 살다가 죽게 하시고 결국은 여기에서 죽습니다. 그런데 이 안에서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고 이 아이는 또 죽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새로운 아이가 또 태어납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대를 이어가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메시야를 약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인을 향한 은총이 주어지는데 제사제도를 하나님이 만드셔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사로 보여주시고 죄인을 용납해 주실 은총을 미리 보여주시고 그 동기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자,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입니다. 뭐냐 하면 가난, 질병, 관계가 깨지고 무지하고 이런 모든 것의 원인이 무엇인가? 아, 돈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 때문이다, 약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인간의 비참 함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도저히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입니다. 그런 인간을 위해서 결국은 하나님이 선제적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기 전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55-58)
아담과 맺으신 언약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두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하나는 문화명령인데 생육하고 번성하라 또 하나는 종교명령을 주시는데 나무의 실과는 따 먹지 말라 이것을 행위 언약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은혜언약은 인간이 죄를 지은 다음에 은혜 언약이 들어오게 됩니다.
2. 아담 한 사람의 죄의 결과는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이치가 정당한 이유를 ‘성경의 대표사상’으로 설명해 봅시다.(58-61)
아담은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이 개인이 아니라 온 인류의 대표자로 맺은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인간의 본성의 이야기를 말씀드렸고 또 하나는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더라면 인간이 누렸을 그 유익에 우리도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도 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3. 죄가 가져온 관계와 파괴 네 가지를 설명해 봅시다 (62-66)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자아와의 관계의 파괴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자기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모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면 하나님이 발견이 되고 그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든 질서들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과 자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4. 죄의 결과인 죄책과 오염을 설명해 봅시다 (66-71)
죄책: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지어야 하는 사법적 책임
오염: 죄를 지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선천적이고 도덕적인 부패성
5.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총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71-76)
육체의 죽음을 유보하시고 메시야를 약속하신 것.
6. 구약의 제사제도는 무엇을 위함이며, 그것의 한계는 무엇입니까?(76-78)
제사제도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
한계는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히 열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막히기 때문에 또 다른 제사를 필요로 함. 그래서 제사는 영원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암시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가져다 줄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