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리스도와 구원 사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녹취자: 김은영
4장. 그리스도와 구원 사건입니다. 구원 사건의 핵심은 딱 두 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그래서 지난 부활절 때도 그리스도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신학적인 설교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는 매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한 2년에 한 번 정도씩은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뼈대입니다. 그래서 핵심이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펼쳤던 기독교 선교는 선교의 역사의 장을 바꿔놓게 됩니다. 그것이 사실 이 사람하고 너무 안 어울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지독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이었고,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었고, 율법주의자였는데 어떻게 기독교에 이렇게 엄청난 공헌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의 삶과 사역, 신학.
신약 성경 전체의 절반 정도를 사도 바울이 씁니다. 그러니까 많은 학자가 사도 바울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아주 현저하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도 바울의 삶과 사상, 사역, 선교 이것을 모두 확장했을 때, 그것들은 계속해서 어디서부터 발화가 되어서 이렇게 펼쳐져 나가게 되었느냐 하는, 소위 얘기하는 동심원입니다. 이렇게 놓고 그리면 그것을 타고 들어가면 컴퍼스에서 핵심이 나옵니다. 그것이 다메섹에서의 경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무엇을 경험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거꾸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하찮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은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었는데, 그것을 뒤집은 사건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나온 얘기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저주하신 자라면 다시 살려낼 리가 없고, 살려내신 자라면 저주할 리가 없는데, 어떻게 이 두 가지 모순된 사실이 병존할 수 있느냐? 거기서 깨달은 것이 속죄 사상,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가 죽으신 것이 자기 죄 때문이었다면 하나님이 자기 죄 때문에 죽은 죄인을 살려내실 리가 없지만, 그러나 죽으신 죽음이 자기의 죄가 아닌, 우리 힘으로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이었다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죽음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래서 하나님이 더욱 살리실 이유가 있었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설교한 그날 많은 사람이 주님을, 그 다음주인가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그 해석이 그것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산상 세미나에서 제가 한 말 있는데, 부활의 세 번째 지평이라는 발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서점에 요만한 논문이 있는데, 읽어보시면 첫 번째 지평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짜 부활하신 사건, 두 번째 지평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 우리가 구원받은 사건 그리고 세 번째 지평이 날마다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경험, 이것을 이제 세 번째 지평이라고 본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누가 그러더라고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몇 주 전에 설교했을 때, 목사님의 유언적인 설교 같다고 그랬는데, 사실 아직 죽을 날은 좀 더 남아있는 것 같은데 유언적인 설교라고 그래서 기분이 좀 묘했는데, 유언적인 설교라기보다는 이제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결국은 그 진리를 모르고 그 진리에 적용되지 않는 삶을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사실은 뭐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뭐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물질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가져도 결국은 그것으로써 인생의 고통의 문제는 해결이 안 된다는 점에서 기독교를 통한 행복이라는 것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삶(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런 것을 표어처럼 많이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가 하는 것들을 여기 그리스도와의 연합,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책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그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부활이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 그리고 또 살아났는데 이렇게 장소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고, 이런 공간을 통과하고, 하는 그런 종류의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 자체가 과학적으로 입증이 안 되니까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했다는 부활의 경험이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지극히 주관적인 종교의 경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객관적인, 과학적인 사고 체계 자체를 무너뜨려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부활은 사실이 아니고, 그리고 신화적이다라고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첫째는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 속에는 부활 사상이 없었다.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다음에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은 예수님과 맞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사상은 정치적 메시아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때로는 기적을 동원해서라도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서 다윗 왕국과 같은 번영된 나라로 만들, 이상적인 특별한 하나님의 종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그것과는 예수님과는 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다. 이렇게 다른 나라를 자꾸 말씀하시는 이런 것들이 예수님과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과)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적그리스도와의 투쟁, 부활, 온 세상의 심판주가 되는 것에 대해 가르치셨는데, 유대인들의 사상에는 그것은 메시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결국은 제자들의 부활 사상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닌, 완전히 주관적이라고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를 계시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잖아요. 그런 믿음을 초대교회가 이미 굉장히 폭넓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 그러니까 the Son of God이라는 표현을 안 쓰십니다. 명백하게 쓰지를 않으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구약의 맥락에서 보면 예수님이 만약에 자기가 명백하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이런 메시지를 중심에 놓고 선포하면 그 당시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씀을 아주 심하게 오해할 것이라는 염려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은 소위 얘기하는 구약에 나오는 신자 사상입니다. 신자(神子). 하나님의 아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은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면 구약에서 진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의 나라, 이스라엘을 엄청나게 부흥시키고 번영시켜서 큰 나라가 되게 하는 세상 왕국의 번영을 가리키는 그것을 할 사람이 신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아까 가지고 있는 (앞에서 언급한) 이런 사상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 예수님이 자기를 만약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하면 이 사람들이 곧바로 이런 개념과 연결시키면서 자기가 이 세상의 죄를 위해 희생당하고, 죽으시고, 그 피로 구원하셔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이루실 거라는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다 차단해버리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를 신자라고 표현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인자(人子)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뭐냐 하면 사람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인자입니다. 인자.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킬 때 인자라고 하는데 그때 표현이 the Son of Man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정관사 the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그 아들이다. 그래서 뭐냐 하면 그 전통을 다니엘서 같은 묵시문학에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냐면 13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단 7:13) ‘인자 같은 이’ 이것은 아주 초자연적인 존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신의 아들과 대조가 되는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구약에서 인자 같은 이는 하나님의 아들 같은 초자연적인 성격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으신 것은,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실은 왕들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다윗의 왕국 같은 나라를 부흥시키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인자로 왔다. 그래서 나의 관심사는 세상의 왕국이 아니라 너희들이 온 세상이 구원을 받고 구약의 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인자, 바로 그 인자이다. 그 사람의 아들이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이 세상 나라의 번영을 위한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는데, 그런데 내가 바로 구약이 말하는 그 초자연적인 존재다. 그런 뜻으로 예수님이 인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심오하죠? 굉장히 깊이가 있는 사연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 자기 계시의 비밀이 여기에 인자라는 말속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 그러냐 하면 여기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여기서도 인자라는 말이 쓰입니다. 그런데 이 인자도 역시 뭐냐 하면 그냥 겸손하게 그냥 나는 사람의 아들이다. 그런 이야기라면 굳이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다 태어난 사람들은 다 사람의 아들이지 누구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사용하실 때는 이것을 그냥 인간의 아들이라는 보통 명사의 의미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구약의 묵시 문학적인 배경에서 초자연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신적인 존재로서 내가 여기에 왔는데 나는 왕들이 그랬던 것처럼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 때 했던 설교와도 연관이 되는 건데, 일단 첫 번째는 종교적인 음모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자신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왜? 주권이 없으니까 못 죽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제시대에 우리가 우리나라 사람을 우리가 스스로 법정을 못 만드니까, 우리에게 사람을 처벌할 권한이 없으니까 일본 법정에서, 일본이 만들어 놓은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해야지만 우리가 처벌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사람들도 체포는 자기가 하되 로마 군인들, 로마 당국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압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선동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웃기죠.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냥 사형시키라고 그러면 되는데, 아주 콕 찍어서 여러 가지 사형 방법 중에서 딴 것을 쓰지 말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종교적인 음모였다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얘기인데,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굳이 선동하여 예수님을 죽이라고 말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얘기하냐면은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이 사람을 어떡하면 좋겠느냐 이렇게 묻죠. 그때 우리에게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습니다. 이 고백은 뭐냐 하면은 결국은 육적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영적인 이스라엘과 상관이 없이 가이사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이 땅의 백성들일 뿐이다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결국 선택된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맺었던 관계가 끝났음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명기에 보면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이 구절에 호소하면서 예수가 혹시 부활했다는,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이런 종교적인 음모를 가지고 십자가 처형을 고집했던 것입니다.
이제 아까 한 얘기로 가면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리고 대화까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의 죽음이 자기 죄로 인한 저주였다면 부활할 수 없었는데, 자기 죄로 인한 저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 때문이어서, 결국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정당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사도 바울만의 경험이 아니라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었고,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서, 그러면서 오히려 이 십자가에 못 박혀 힘없이 죽으셨기 때문에 그야말로 그분이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셔서 부활하신 메시아다. 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확신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 1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으로 제자들은 메시아사상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으로는 제자들이 메시아사상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세 가지 이유가
1)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 속에는 부활 사상이 없었기 때문에 부활 사건만으로 예수가 메시아라고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 얘기입니다.
2) 그다음에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이 예수님과 안 맞았다.
왜냐하면 이렇게(예수님은 적그리스도와의 투쟁, 부활, 심판주가 되신다고 가르치셨는데 유대인들은 그것이 메시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겼음)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은 부활 사건만으로써 예수가 메시아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다음에
문제 2번.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자신을 누구로 알리셨습니까?
구원자, 인자로 알리신 것입니다.
문제 3번. 그리고 인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신적인 존재.
3번 이어서. 그리고 자신을 신자가 아니라 인자로 소개한 이유는?
새 언약의 대표자이기 때문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하나님의 아들 사상의 틀 안에서 자신을 이해할까 봐 예수님께서 일부러 신자가 아니라 인자로 자기를 소개하신 것입니다.
문제 4번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방법으로 죽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꼭 십자가에 죽이라고 요구했던 것은 하나님이 저주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기독교의 씨를 말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문제 5번. 예수의 부활을 통해 제자들이 깨닫게 된 사실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의 죄로 인한 저주가 아니다.
그다음에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렇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덧붙이자면 문제 1번은 아까 말씀한 것처럼 예수님을 부인하는 많은 사람이, 제자들이 부활 사건에 대한, 부활 사건이 있지도 않았지만, 주관적으로 그 사건을 너무 강하게 경험한 나머지 예수를 메시아로 만든 것이 아니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1번 문제를 낸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경험한 것만으로 제자들이 메시아사상을 가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이기 이전에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들 속에는 이런 부활 사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관적인 경험 하나를 가지고 예수를 메시아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것보다도 훨씬 더 큰 틀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그들이 믿고 있었다. 더 다른 근거에서. 그러니까 제자들의 주관적인 부활의 경험 하나가 사실은 메시아 아닌 예수를 메시아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근거에서 이제 구약의 근거로부터 시작해서 이제 참 하나님이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 메시아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였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통해서 확신하였기 때문에 부활의 경험이 그것을 인친 것이지, 주관적인 부활의 경험 하나가 무작정 예수를 근거도 없이 메시아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라는 얘기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