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회개와 믿음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녹취자: 김정호
이 책을 2004년도에 쓸 때는 그저 열린 교회 교인이나 읽어주겠지 하며 썼는데 이상하게 계속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확인한 것까지만 34쇄까지 찍혔으니까 그래도 매년 한 1.5쇄 정도 이렇게 찍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구원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참 많구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결국 불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고 진짜 잘 믿으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안 하고 믿는 것은 항상 맹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구원론은 매우 매우 중요하고 구원뿐만 아니라 창조주도 종말에 이르는 하나님의 계획 전체를 보태어서 구원론을 다뤘기 때문에 이 책 한 권을 읽어도 한 곳만 읽어도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공부하는 여러분들의 목표는 이 책을 외우는 것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그냥 제목만 놓고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그런 정도 숙달하는 것이 목표가 되겠습니다.
먼저 회개와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두 개를 합쳐서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회심이라고 이렇게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 회심이 뭐냐면 오늘 설교를 했습니다. 중생은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거듭나게 하신 날짜를 대라 그러는데 댈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 조건이 있습니다. 그걸 딱 맞아 대려면 중생과 회심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면 그러면 말할 수 있습니다. 근데 엄격하게 말하면 그것도 사실은 중생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 날짜를 알아맞히는 게 아니라 회심과 중생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을 때는 그 날짜를 기억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중생이 먼저 있고 회심이 뒤에 따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이거를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느냐는 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근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중생은 사실이고 회심은 의식입니다. 그러니까 사실과 의식이 일치할 수도 있고 아니면 사실이 먼저 오고 의식이 뒤따라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어떤 형제가 있었는데 서울에 올라가면서 학교를 다녔는데 돈이 너무 없어서 너무 배가 고파서 점심을 못 사 먹을 정도가 됐습니다. 너무 힘겹게 살아가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며칠 전에 시골에 내려갔다 오는데 엄마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야, 이거 너 써라” 그러면서 주머니에 뭘 이렇게 집어넣어 주던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래서 주머니를 뒤져보니까 10만 원짜리 수표가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집어넣은 순간 그 수표는 그 형제 주머니에 있었던 겁니다. 그것을 의식하든지 못 하든지 있었던 겁니다.
근데 나중에야 그것을 의식하게 된 것처럼 회심은 중생이 최초로 의식 세계 안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딱 한 번만 그렇게 경험이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그런 회심의 경험이 반복되는 건데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회심이 아니라 성화를 촉진하는 회심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목회의 목표에 대해서 말하기를 회심과 회심의 은혜의 보존. 이걸 다른 말로 말하면 회심과 그 회심의 반복적인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이르는 회심은 다 일회다. 그러나 그 회심은 반복적으로 경험되어야지만 성화를 이루어 간다. 그런데 그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는 딱 한 번이지만 이후에 반복되는 회심의 경험도 똑같은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반복된 회심은 최초의 회심으로 우리를 소환합니다. 그래서 그 첫 번째 회심의 감격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겁니다. 그것 없이는 누구도 좋은 신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더 얘기하고 싶은데 이제 진도를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회심은 이렇게 해서 의식 세계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대상이 죄입니다. 죄. 누구 앞에서 하는 거냐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느낀 사람들만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이것이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말로 한자어로는 이렇게 씁니다. 근데 이게 원래 의미가 잘 전달이 안 됐습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후회한다는 뜻이고 고친다는 뜻입니다. 근데 원래의 그리스에서는 뭐냐면 메타노에오입니다. 메타는 ‘후에, 다시 한 번, 나중에’ 그런 뜻이고 노에오는 ‘생각하다’입니다. 원래의 고전 그리스에서는 이 메타노에오는 회개라는 이런 의미가 없습니다.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적인 체험을 통해서 어떤 직관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확 바뀌어 버리는 것, 그런 것을 메타노에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계속 일어나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 마오저둥의 연설을 들으면서 기독교에서 회심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여태까지의 잡다했던 인생관을 다 버리고 그 마오저둥에 의해서 해석된 정통 마르크스주의도 아닙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하고 마오저둥 등이 설파했던 공산주의하곤 사뭇 다릅니다. 심지어 종교는 아편이다. 그런 말도 마르크스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종교는 인간의 어떤 피할 수 없는 본성적인 것이라고 그렇게 해석을 했지 이제 그렇게 안 봤습니다. 근데 어쨌든 그런 마오저둥의 강설을 들으면서 그 세계를 바라보는 눈,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그렇게 공산주의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메타노에오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기독교에서 차용해 가지고 와서 별도의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여기 이 노에오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노에시스라고 하는데 이게 그리스로 지성입니다. 지성. 그래서 이거는 생각과 관련이 됩니다. 순수 사고와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사물들을 통찰하고 바라보는 시야,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이 메타노에오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적인 회심이 아니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가 친필 사인을 해서 책을 한 권 보내주셨는데 그게 바로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번역된 ‘지성적 회심’이라는 책의 그 원본이었습니다. 근데 나는 그냥 시간이 없어서 번역서로 봤는데 굉장히 잘 쓰셨습니다. 근데 학문에 몰입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약간 좀 읽기가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확실하게 진정한 회심이 지성적인 회심이어야 한다고 하는 그것을 아주 잘 설파한 책입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회개입니다. 회개.
그다음에는 믿음입니다. 근데 이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대상으로 회개하는 것이고 믿음은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하는 믿음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회개했으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근데 그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죄를 깨닫게 하셨지만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영혼의 변화에서 비롯된 죄에 대한 마음의 변화입니다. 죄에 대한 마음의 변화라는 게 무엇입니까? 사랑 혹은 좋아함에서 미움 그다음에 싫어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제가 사실은 음식의 폭이 굉장히 넓습니다. 아주 그 흉칙한 몬도간의 식품이 아니면 웬만하면 먹습니다. 근데 제가 절대 못 먹는 음식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찐감입니다. 찐감.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아니 감을 누가 짜먹나 그러잖아요. 감을 누가 쪄먹나 그러는데 쪄먹었습니다. 옛날에 이렇게 품종이 개량되기 전에 타닌을 많이 품고 있는 떫은 감이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그 감을 그냥 못 먹고 갔다가 두 가지인데 침시로 만들거나 연시를 만듭니다. 침시는 소금물에다가 담가놓고 그냥 항아리에 뚜껑 덮어놓고 그냥 가을에 따다가 내버려 둡니다. 그러면 얼고 녹고 하면서 얼진 않습니다. 소금물이니까 담겨 있으면 그 타닌산이 다 빠져나가서 나중에 떫은맛이 없는 약간 단맛이 나는 그런 감이 돼서 이게 딱딱한 감이니까 깎아 먹습니다. 근데 연시는 업자들은 그걸 카바이트 가지고 강제로 만들던데 우리 집에서는 그냥 사다가 그걸 꼭지를 아래에다 놓고 차례차례 담습니다. 담아서 장독대에다 내놓으면 얼고 녹고 얼고 녹고 하면서 그게 나중에 한참 몇 달을 흘러가면 말랑말랑한 연시가 됩니다. 그럼 그때 먹는 거였습니다. 근데 이제 침시도 시간이 걸리고 연시도 시간이 걸리니까 그때 이제 즐겨 해먹던 방법이 시루떡 찌듯이 감을 쭉 펼쳐놓고 찌는 것입니다. 쪄서 그것을 식힙니다. 그렇게 해서 먹으면 글쎄 뭐라 그럴까 그저 맛없는 감자 더하기 호박 더하기 무하고 합한 거 비슷한 맛이 납니다. 근데 그걸 제가 먹고 하여튼 지독하게 체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한 3∼4학년 때인데 엄청 고생을 했습니다. 그걸 시골에 땅이 있어서 가을마다 우리의 땅을 쓰는 사람들이 그거를 직접 부대에 넣어서 배달을 해줬습니다. 그 지주라고 그 땅 주인이라고 배달해줬는데 그다음서부터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고 지금 생각해도 지금 말하는 이 순간에도 아주 불쾌한 느낌이 들면서 구역질이 납니다. 그런 것이 뭐냐면 사랑하던 데서 미워하는 거, 좋아하는 거 그런 것입니다.
저희 아내는 고기를 거의 안 먹었습니다. 그래서 고기 안 먹으면 큰일 난다고 내가 수없이 다 일렀는데도 안 먹더니 결국은 아파서 사선을 한 1년 동안 오갔습니다. 그 다음부터 고기를 먹는데 이렇게 왜 그렇게 고기를 못 먹었냐고 하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고기를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막 돌아왔는데 할머니가 닭을 막 잡아서 삶은 닭을 막 이렇게 뜯으면서 이거 먹어보라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마루에 앉아서 그걸 몇 점 맛있게 먹었는데 체한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닭 냄새만 맡으면 막 토할 것 같고 고기에 대한 모든 혐오감으로 발전을 했습니다. 그래서 생선조차도 싫어했습니다. 그러니까 건강에 좋을 리가 없죠. 그렇죠? 근데 그런 것이 바로 이렇게 미워하고 싫어하는 고기를 엄청 좋아하다가 그렇게 바뀐 거라고 생각을 하면 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개별적인 죄에 대한 마음의 변화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나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데 주님이 물으십니다. 니가 뭔 죄를 지었냐 그러니까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이 안 나는데 어쨌든 저는 인간이기 때문에 죄에서 떠날 수 없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용서해 주세요.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영적으로 거듭난 자 안에서 일어나는 인격적인 작용입니다. 강요된 자백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깊이 후회를 동반하면서 느끼는 회개입니다. 회개에는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가 있는데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정죄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떠는 회개입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고 이 복음적인 회개는 바로 그 죄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회개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입니다.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는 나왔습니다.
그다음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이제 아주 재미있죠? 그게 뭐냐면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는 분은 성부입니다. 근데 그 계획을 위해서 희생하시는 분은 성자입니다. 그런데 그 희생을 우리에게 적용해서 예수를 믿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근데 이 모든 것들이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믿음을 수단으로 사용을 하게 됩니다. 구조가 좀 복잡해집니다. 근데 아무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뭐냐면 모든 창조와 타락은 인간이 한 것이지만 창조와 구속과 완성의 사역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은 결코 홀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어떤 차이가 있냐면 예를 들자면 창조의 경우에는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구속의 경우에는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다음에 완성의 경우에는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여기가 이거는 성부이시고 여기는 성자이시고 성령이십니다. 근데 여기서는 성자이시고 성부이시고 성령이십니다. 여기서는 성령이시고 성부이시고 성자이십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죠? 이게 무슨 뜻이냐면 창조할 때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일하시지만 성부께서 주도하셔서 일하시고 구속하심에 있어서는 삼위일체가 모두 일하시지만 성자가 주도하셔서 하시고 구속을 적용하시는 것에 있어서는 완성이 아니라 적용입니다. 그렇죠? 그러면 어떡할까 이거를 지우고 다시 쓰겠습니다. 적용. 이 구속을 적용하는 것에 있어서는 성부가 주가 되시고 그다음에 성령이 주가 되시고 성부와 성자가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구속사역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은 함께 일하신다. 근데 그 구속의 창조와 구속의 단계마다 그 삼위 중 어느 한 분이 주로. 영어로 존 오웬은 principally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주로 영화에서 principal 그러면 교장이라는 뜻이 있잖아요. 그래서 principal하게 그래서 주도적으로 사역을 하시는 것이 이런 식으로 이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그리스도의 속죄로 이루어진 구원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된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게 첨가가 돼 있는 겁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되는데 이것을 은혜라고 부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라고 할 때 이중적 원인을 제공하는데 사실 그 은혜가 에드워즈는 성령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다음 믿음은 구원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는 수단이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제가 선물을 이렇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액자를 두 분이 선물을 받으셨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내가 걸어 나가고 손을 내민 공로 때문에 선물이 주어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수단일 뿐이지 여러분들이 뽑혀서 정말 어떻게 보면 행운의 어떻게 보면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구원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을 받아들이는 손이다. 구원을 받아들이는 손이다. 이렇게 해석하시면 됩니다.
자 그다음에 의롭게 하는 믿음의 본질.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제는 의롭다 하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게 칭의죠. 이게 칭의를 가져다주는 믿음의 본질이 뭐냐? 이게 첫째는 뭐냐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길에 대한 전적인 포기. 자, 여기는 이제 생각할 여지가 많은데 이게 예수 안 믿을 때는 구원이 뭔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반대로 보면 모든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해지는 길이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모으면 내가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종교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거다. 그건 그 사람에게 그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나는 예술을 계속한다면 캔버스 위에 쓰러져서 피를 토하고 죽어도 나는 상관없다.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예술이 구원의 길입니다. 근데 그 구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구원을 말했든지 간에 그런 것들이 궁극적인 구원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 얘기는 무슨 뜻이냐면 일체의 부에 대한 어떤 욕망을 버리라는 거냐 그것도 아니고 예수를 하지 말라는 거냐 그것도 아닙니다. 근데 돈을 벌어도 그 돈이 영원히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버려야 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건 의롭게 하는 믿음에 본질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또 예술을 계속하는 건 괜찮은데 그 예술로 말미암아 내가 궁극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것도 버려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 모든 것들이 그걸 포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안이 뭐냐면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모든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에는 반드시 지식이 필요합니다. 어떤 지식?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과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 지은 받은 것과 그리고 내가 죄인인 것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과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과 그다음에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마지막에 그 저리로서 그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고 영생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지식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믿음이 또 뭐냐 하면 의지의 동의와 인정입니다. 의지. 그러니까 생각으로만 내가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거기에 동의를 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디죠? 세계에서 가장 신박한 그 숙박업소가 나왔는데요. 그게 이제 부킹 닷컴이나 아니면 아마존이나 하여튼 그 여행사 하는 데 숙박업소가 뜹니다. 뜨는데 되게 비쌉니다. 1박에 몇십만 원 합니다. 자세히는 안 봤는데 굉장히 비쌉니다. 100만 원에 육박하게 비싼데 어떻게 되냐면 유리로 컨테이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절벽에다가 매달았습니다. 그래 거기서 하룻밤을 자는 것입니다. 나는 그럼 돈 주고 자라 도 안 될 것 같은데 그냥 사방이 다 유리 컨테이너인데 벼랑에 간당간당 매달았습니다. 근데 거기를 어떻게 올라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뭐가 이렇게 사다리 같은 게 있어서 타고 내려가고 들어가면 이제 아침에 다시 꺼내줄 때까지 못 나오는 것입니다. 근데 거기서 그 낭떠러지 위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신기합니다. 뉴욕에 그 미식가들을 위한 상품이 하나 나왔는데 뉴욕 높은 고층 빌딩에서 그거 뭐라 그러죠? 곤돌라라고 그럽니다. 저기 이사할 때 쓰는 거 있잖아요. 그것을 팔처럼 쭉 내밀어가지고 완전 바닥까지 유리로 된 컨테이너 박스에서 매달리면서 매달려서 여덟 명이 식사하는 프로모션을 제공했는데 1인당 식대가 250만 원입니다. 근데 저는 거기서 멀미 나서 밥을 못 먹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거를 또 즐깁니다. 근데 무슨 뜻이냐면 혹시 내가 그런 숙박업소가 안전할 것이라고 믿어도 믿는다고 말을 해도 실제로 거기 투숙하지 않으면 의지에 동의가 안 된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삶을 그 믿음의 내용에다가 맡길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래서 의지의 동의가 필요하고 그다음에 구원하시는 은혜를 인정해야 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확신함. 자기를 구원하실 분이 하나님뿐임을 생각함. 구원을 기대하게 하는 모든 것을 부인함. 그래서 선포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하는 이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것이 선포된 복음이고 이것이 가장 간략하게 요약한 우리가 믿어야 될 구원받기 위해 우리가 믿어야 될 내용이다 이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믿음으로 연합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예수께서 하신 일 그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믿음의 결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실제적이고 원리적인 연합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고 믿음이라는 은혜 자체가 생명의 원리다. 순종, 이 믿음을 갖게 되면 삶의 모든 방면에서 순종하며 살고 싶은 주도적인 경향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이제 인클리나치오 크레덴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고자 하는 성향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러한 성향이 결국 우리를 순종하며 살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종교개혁가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유명한 성경 구절입니다.
중생이 가져온 두 결과는 무엇입니까?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게 대한 믿음. 2번 회개가 무엇인지 설명해 봅시다. 첫째 죄에 대한 마음의 변화, 개별적인 죄에 대한 변화, 인격적인 작용, 그다음에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로 나눔. 의롭게 하는 믿음의 본질 네 가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확신함. 의지가 그것을 동의함. 그다음에 그분을 인정함. 그다음에 주어진 방법에 대한 신뢰와 전적인 의존. 이것이 이제 결국은 칭의되고 나면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면 결국은 이런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구원받게 하는 믿음의 가장 간략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킨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 어떻게 참여합니까? 그러니까 우리와 그리스도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적인 연합 안에서 예수가 내 안에 살고 내가 예수 안에 사는 것 같은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행하신 일에 참여하는 것.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었고 부활할 때 우리도 함께 부활했으니 그 죽음과 부활을 죄 죽임을 통해서 그분의 죽음이 경험되고 은혜 살림을 통해서 그분의 부활이 경험되는 이런 생활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는 삶입니다. 오늘 좀 많이 했죠?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