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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자와 성화(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녹취자: 양현정
주제 성구를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굉장히 많은 깊이가 있는 신학과 경건에 관한 이야기들을 쏟아 놓고 있습니다. 종말과 구원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옮기신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것입니다. ‘흑암’은 검을 ‘흑’에 어두울 ‘암’입니다. 흑암이라고 하는 것이 영적인 어두움을 대체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무지에서 비롯되는 부도덕, 죄의 상황 이런 것들이 다 여기에 이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런데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권세로 건져내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신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영적인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은 지식과 윤리와 생명과 은혜, 이것의 반대말은 죄, 은혜, 부도덕과 윤리, 이런 것들이 빛 가운데 사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옮기신 것의 구원의 의미입니다. 구원은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마음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가치를 버리게 됩니다. 구원받는 과정에서 이미 회개를 경험합니다. 회심 안에 들어갑니다. 회심의 두 요소 첫째, 죄에 대한 회개,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외워야 합니다. 외우지 않은 지식은 끈이 없는 가방과 같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회개는 총체적인 전환입니다. 메타노에오의 얘기를 한참 했는데 자신의 죄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죄는 어떤 식으로 인식하느냐 하면 처음에는 사람들은 복음의 빛을 받을 때 받기 전에는 죄에 대해 생각하라 하면 이런 죄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음식을 먹고 돈을 안 내고 도망간 것부터 지하철 무임승차 등 작은 죄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이런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체험하고 나면 자기라는 존재 자체가 사실 결국은 죄덩어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서기에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면서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개별적으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마지막에 자신이 죄덩어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 죄를 깊이 슬퍼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죄를 지은 자신이 슬픈 것입니다. 자신을 깊이 슬퍼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결국은 이 죄가 자신에게 얼마나 나쁜 것을 가져다 주었는지, 나쁜것은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죄를 미워하고 떠나게 되는데 이것이 회개입니다. 오웬같은 신학자는 진정한 신학자는 다시 그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증거라고 합니다.
구원을 받으면 성령님이 놀라운 일을 신자의 영혼 안에 행합니다. 첫째는 은혜를 주입합니다. 이것은 생명입니다. 사랑이고 성령님이십니다. 은혜이기도 하고 거의 다 동의어입니다. 성령님이 자기를 분할해서 여기에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 성령이라는 의미는 인간의 영혼과 영이신 하나님이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근거를 심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신자 안에 은혜를 주입하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힘입니다. 그래서 피지컬합니다. 무슨 힘이냐 하면 생명의 힘이고 사랑의 힘입니다. 성령의 힘이기도 합니다. 거듭나고 여기에 은혜가 주어지고 나면 그러면 놀라운 생명이 생깁니다. 당연히 영적 생명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살아가게 하는 힘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확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에너지를 하나님께서 주입하시는 것은 생명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사랑입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이쪽에는 생명이고 이쪽에는 사랑입니다. 생명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본 것이고 사랑은 대상을 필요로 하니까 관계성에 있어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도 잘하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넉넉히 이겨내는 생명력이 솟아납니다.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는 신자 안에 내려온 새로운 내적 생명의 원리를 심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이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도록 하나님이 원리를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은혜로운 환경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이러한 내적 생명이 은혜로운 환경, 늘 아침에 모이면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고 묵상하고 찬양하고 이런 시간을 자주 가지면서 살아가면 신기하게 생명의 원리가 이 생명 그 자체가 점점 풍성해지고 강력해 집니다. 근데 만약에 이런 생명의 부합하지 않는 환경에대가 둡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고 회심했는데 환경이 매우 척박하여 성경 볼 시간도 없고 세속적인 게임을 하고 세상을 위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면 생명이 희미해집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누구를 사랑하고 섬겨야 할 힘이 없습니다. 그것이 원리와 그 생명을 주입하시는 것입니다. 내적인 생명의 원리를 심으십니다. 원리의 보호를 받으면서 은혜가 자랍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예수 중심의 가치관을 갖고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인격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생활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신자에게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늘나라를 맛보기: 빌립보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빌립보는 소아시아 쪽에 있습니다. 빌립보라는 도시 이름은 어디서 생겨났냐면 마케도니아 왕의 알렉산더 대제 아버지가 빌립보였습니다. 아버지를 기려서 빌립보라는 시를 만들고 이 빌립보라는 시를 처음에 계획할 때부터 로마의 축소판으로 계획했습니다. 도시가 예쁘다고 합니다. 빌립보에 못 가봤습니다. 도시를 예쁘게 만들었는데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로마를 못 가면 빌립보라도 가보자고 하여 가는데 너무 아름답다고 합니다. 아시아의 건축물로 시가지도 너무 잘 정돈되어 있고 그것을 보며 로마를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를 본떠 만든 것이 아름답다니 진짜 로마는 얼마나 아름다울지를 생각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도 바울이 문학적인 유비를 사용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누구지?",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래." "아 그래? 아 진짜 아름답구나. 정말 행복하게 사는구나. 저들은 우리보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우리보다 지위가 높은 것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무시받는 계층의 사람들인데 어떻게 행복할까?" 이 교회를 보면서 이것은 그냥 모형일 뿐이고 이 빌립보라는 도시가 로마의 본을 뜬 것처럼 이 교회는 천국, 하늘나라를 본 뜬 것이래. 그런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아 이게 이렇게 교회에 모여서 사는 이 사람들도 이렇게 아름답다면 이 교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나라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그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사람이 돼라는 뜻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생활하라는 것이 어려운 말이라고 합니다. 정치하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끔 모든 방면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사람으로서 행동하고 생활하면서 살라고 가르칩니다. 교회는 성령의 열매를 맺은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다. 교회는 성화의 삶을 통해 하늘나라를 보여주는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죄인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떻게 주어졌나요? 내적인 원리를 심어 주셔서 이렇게 사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과 윤리: 우리는 우리 인생의 전체에 그리스도표를 건 사람들입니다.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을 받으면서도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이 세상에서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도덕적 결심의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위로입니다. 왜냐하면 윤리적으로 사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위로를 받으면 부도덕하게 살면서 이익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진정한 윤리입니다.
순종을 위한 고난: 시험과 환란을 계속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순종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고난을 생각하며 자기가 받은 고난을 십자가에 투사하면 위로와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옛사람이 죽어가고 새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함께 일어납니다. 옛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본성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본성, 생명,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가게 됩니다. 이 고난이 커다란 유익을 줍니다.
고난 중의 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과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그와 항상 함께 하는 것과 온전히 그를 닮아가려 하는 것은 영원한 복이다.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며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이 두 가지 일의 시작이다. 창조의 사역과 섭리에 의해 부여된 우리 본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함의 분투함은 공평한 가치가 있다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외에 묵상하는 대상을 더 많이 가질수록 계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격멸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변화는 불가능하게 된다. 존 오웬의 시대는 단순한 시대였고 해 떨어지면 자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휘황찬란 하게 불을 켜고 얼마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세월이 되었는데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인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질문해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는 대상을 더 많이 가질수록 하나님의 지혜를 격멸하는 대상이 된다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배교한다는 용어를 쓸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과 그 영광을 깊이, 더 많이 묵상하라고 합니다. 그때 주님을 닮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문제 풀이
1. 성화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구원받은 죄인의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자격입니다.
2.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에게도 성화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원죄에 의해 물려받는 죄책과 오염을 타고나는데 칭의로 말미암아 죄책의 문제를 해결되지만 부패한 본성인 오염의 문제는 여전히 그 사람 앞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생동안 계속되는 성화를 위해서 해결되고 성화에서도 완전히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성도가 죽은 그 순간에 하나님이 그것을 완성하십니다. 나중에 육체와 만날 때 영화에 도달하게 됩니다.
3. 성화의 본질 네 가지는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둘째, 옛사람을 죽이는 것과 새 사람을 살게 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mortification of sin (죄죽임)과 vivification of grace(은혜를 살리는 것)입니다.
성화는 인간의 전 인격에 영향을 줍니다. 성화는 인간이 협력하는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칭의와, 중생과 다릅니다. 회심과 성화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협력합니다.
4. 성화의 삶은 성령의 두 가지 역사로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은혜를 주입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힘입니다. 신자 안에 새로운 내적 생명의 원리를 심으시는 것입니다. 이 원리 안에서 은혜가 보호됩니다.
5. 지속적인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속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이런 순종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지식의 증가, 하나님의 생명의 충만함, 은혜나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런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믿음과 지식, 생명, 이런 것들을 통해서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게끔 만들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