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예정과 견인(1)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녹취자: 변상윤
벌써 10장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좀 어려운 주제입니다. 예정과 견인이라는 두 교리를 공부하게 되겠는데 예정과 견인을 잘 설명해 주는 로마서 8장 38절에서 39절의 두 구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예정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도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갔던 곳이 장로교니까 신기했습니다. 예정이라는 교리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인데 예정의 교리를 보면서 참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목사님한테 여쭤봤지만 별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다 씨름하지는 않았고 시간이 지나왔는데 요즘도 가끔 예정의 교리에 대해서 혹독한 비판들이 나오고는 합니다. 예정의 교리란 무엇입니까?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서 이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태초부터 종말이 있고 우리는 여기쯤(중간) 서 있습니다. 예정의 교리는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태초와 종말이라는 전체 구조 속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설명을 합니다 예정의 교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때 제일 먼저 우리가 받은 이 구원 사건, 예수를 믿고 구원 얻은 사건과 근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 둘을 연결지으면서 이것을 태초와 종말이라는 전체의 구도 속에서 생각해 보는 것, 이해하는 것, 이것이 예정의 교리 전체가 가지고 있는 목적입니다.
예정을 이야기할 때 먼저 하나님의 작정을 생각해야 되는데 작정이라는 것은 흔히 작정하고 대든다라고 할 때 그 작정과 똑같습니다. 예정은 아까 말한 것처럼 미리 豫자에서 豫定, 이렇게 쓰는데 하나님의 작정은 예정보다 훨씬 범위가 큽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신 지혜로서 세상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해 미리 의지를 가지고 계신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작정에 대한 정확한 해설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에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 일들이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어떤 문제가 생기냐 하면 내 앞에 당장 생기는 많은 일들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서 보호해 달라, 지켜달라는 기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채 세상이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런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사건의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이 세상과 우주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의지를 가지고 그것들을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세기경에, 엄밀하게 말하면 11세기경에 시작이 됐고, 심하게 교회 역사에서 표면으로 불거진 것은 14세기경에 본격적으로 문제가 불거집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면 그 사람은 50여 권 넘는 헤아릴 수 없는 분야에 대해서, 심지어 의술로부터 시작을 해서 해부학부터 시작해서, 아버지가 의사였으니까 늘 그 짐승들을 해부하고 하는 것을 보면서 산 자연관찰자였어서 의학서부터 시작해서 정치학, 시편 철학, 논리학, 수사학, 시학, 윤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유명합니다. 그런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연에 관한, 천체에 관한 수많은 책들도 썼습니다. 그런 많은 것들을 보면 어떤 해석의 논란이 일어나게 됐냐 하면, 모든 것이 이렇게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든 의문은 ‘하나님이 법칙만 만들어놓고 하나님은 없는 것 아닌가? 시계의 태엽을 돌려놓듯이 그렇게 세계를 움직이게 하고 실제로 하나님은 손을 떼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개혁을 외치는 쪽에서는 과학을 가지고 도전을 하면서 성경을 과학에 맞게 해석하려고 했고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성경을 가지고 과학을 해석하려고 했는데 양쪽 다 실패했습니다.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루터나 칼빈같이 성경에 충실했던 학자들도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성경에 이런 구절이 나와 있기 때문에 절대로 지구가 돌리는 없다며 기울어져가는 천동설을 끝까지 주장하게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학과 성경의 조화는 여러 가지 많은 갈등들을 가지고 있어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우주의 이야기를 보지 않습니까? 제임스 망원경을 통해서 더 멀리, 예전보다 100배나 더 상세하게 보게 되었으니까 아름다운 우주 공간에서 일어나는 어마어마한 폭발과 최근에도 기사에서 본 천체 하나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구의 일경 배, 만조 배 그러니까 태양이 지구의 100만 배인데 100만 개가 들어갈 수 있는 태양의 일경 배, 일만조 배 크기라니까 비행기를 가지고 한 바퀴를 도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몇천 년이 돼도 못 돌지 않을까 하는 그런 구체가 발견이 됐습니다. 이 지구는 우주에서 볼 때 결코 큰 별이 아닙니다. 진짜 작은 별입니다. 왜냐하면 비행기 타고 지금으로 따지면 한 30시간이나 한 28시간이면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으니까 대단하게 큰 땅덩어리가 아닙니다. 그런 우주 공간에서 놀라운 현상들이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 아름다운 별들 혹은 놀라운 천체의 질서정연한 우주의 운행, 이런 것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 생각하는데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간 사람도 없고 그런데도 폭발이 일어나고 별들이 생기고 그 궤도를 따라서 별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하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면서 그것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움직여지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 그것을 작정이라고 부릅니다. 그 작정 중에서 특별히 도덕성을 가진 피조물들에 관한 작성을 예정이라고 부릅니다. 도덕성을 가진 피조물이 누구겠습니까? 인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마귀, 천사 이런 것들이 도덕성을 가진 피조물입니다. 그들의 구원에 관한 것은 예정이라고 특별히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대충 개념이 잡히시지요? 작정은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가?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은 하나님의 어떤 의지가 자연의 모든 법칙 속에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에드워즈 같은 사람은 이것을 설명하기가 너무 힘드니까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힘이 행사되는 한 방식이다."라고. 해석을 한 것입니다. 저도 그 해석을 지지합니다. 에드워즈는 좀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지만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법칙 그 자체가 하나님이 규칙적으로 일을 작용시키시는 것, 그것들에 대한 질서정연한 법칙을 찾아낸 것이 규칙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질서정연한 규칙성은 누군가 있어서 거기에 힘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해석의 차이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섭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예정을 놓고 보면 예정의 대상이 천사와 마귀, 인간도 들어가는데 신학에서 관심사는 대개 인간입니다. 예정은 둘, 선택과 유기로 갈라집니다. 선택은 인류 중 얼마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것은 이의가 별로 없습니다. 두 번째는 유기가 있습니다. 유기라는 것은 시체 유기하듯이 버리는 것입니다. 이 "기"자는 포기할 "棄"자고 이것이 남길 "遺" 자입니다. 남겨지고 버려진 것입니다. 이것은 유산할 때 유자입니다. 유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푸심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 두심으로써 벌 받게 하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기로 작정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유기와 관련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 버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벌을 받는 것이 정해진 것인데,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인 것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죄인이 되었으니까 모두 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나타남입니다. 그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선택하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셔서 그들을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보면 유기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버린 것이 아니라, 유기는 그것이 아니라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둔 것입니다. 되어야 할 대로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둔 것이고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이 많은 사람이 있는데 일부분은 유기가 되고 나머지는 선택이 됐다는 것이 공평하지 않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공평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멸망을 당해야 될 텐데 일부분의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해내신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대두돼야 될 것은 불공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특별한 은총을 입은 것, 이것이 대두가 되어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유기를 설명합니다. 두 개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선택만 있고 만약에 유기가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한테 말하기는 참 좋은데 어떤 문제가 나오냐 하면, 이것이 만인구원설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나오는데,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안 믿으면 하나님이 못 구원하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생각하시고 이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주셨는데 이만큼의 피는 무효가 된 것입니다.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위해 흘린 이 피는 쓸모없는 피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제한속죄설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것하고도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예정이란 무엇인가 생각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모두 멸망될 인류 중 얼마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고, 유기란 그냥 내버려 두시기로 한 것이어서 부각되어야 될 것은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구원해 주신 것이고 불공평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보고 선택과 유기는 예정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하나를 이야기 하고 하나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적인 입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중심으로 이후가 신약시대이고 이전이 구약시대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이쪽(구약)의 끝은 태초가 될 것이고 이쪽(신약)의 끝은 종말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나라는 사람이 여기서 예수를 믿고 기뻐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이 과거와 미래와 상관이 없이 일어난 일이겠느냐고 생각할 때는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사람이 타락할 줄 몰랐는데 하나님의 예상을 깨고 타락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급히 구원의 길을 준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다음에 구원받는 사람들을 모으시고 태초에는 없던 교회에 대한 계획이 생겨나고 태초에 없던 심판에 대한 계획이 새로 생겨나고, 이런 식으로 땜질하듯이 이루어져서 종말이 온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역사 전체를 알고 계시고 전체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라고 말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인가 부족한 분이신 것으로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석을 할 때 이것을 최대한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이라는 구원 사건을 향해 달려온 역사이고 신약은 예수께서 죽고 다시 사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수많은 백성들을 구원한 역사입니다. 이것이 신약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이것은 태초 이전까지 넘어가면 그다음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기는 영원이지 않습니까? 영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정신 속에, 지성 속에 우주 창조에 대한 계획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획 속에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아셨다고 말을 해야지 합리적이겠습니까? 아니면 모르셨다? 혹은 알지 않기로 하셨다? 무엇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것은 그냥 매 순간 우연히 발생하는 일이고 당신 자신은 그때그때 대응하기로 하셨다? 이렇게 생각해야지만 이것이 합리적이겠느냐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압도적으로 전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르셨다면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특히 신약에서 영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해석할 때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고 그 계획이 타락과 함께 구체적으로 나타났고 선지자들이 증거한 바이고 그것이 성취된 것이 복음이고 그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들이 구원을 받게 된 모든 조감도가 이미 영원 안에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중에 어떤 것도 하나님이 미리 알지 못하셨던 일, 그런 것은 없고, 하나님이 피조물을 통해서 배우신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학습을 하셔서 조금씩 조금씩 지식이 늘어가시는 그런 분이시기에 과거의 판단은 미숙하였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하나님이 성숙해진다고 하는 이런 식의 주장은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예정의 교리를 사용할 때 전망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역망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역망적이라는 것은 뒤로 거꾸로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회고하는 것입니다. 전망적인 것은 미리 예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자 우리 전도하러 갑시다. 우리 어느 지방으로 선교를 하러 갑시다. 그런데 만약 거기에 하나님이 예정한 사람이 없다면 우리의 선교는 쓸모없는 노력이 될 것이니 먼저 거기에 믿기로 예정된 사람이 있는지 주님께 응답을 받아보고 갑시다". 이런 식의 선교 태도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정을 이야기한 것은 항상 불신자들을 향하여 얘기한 것보다는 오히려 믿는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진 그것을 하나님을 찬송할 목적으로 회고하는 가운데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굉장히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 헤르만 리델보스라고 하는 신학자인데 『바울의 신학』이라는 책 속에서 이것들을 강력하게 주장을 하게 됩니다. 예정의 교리는 당연히 구원받고 은혜받은 신자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결코 그 일이 우연히 순간적으로 발생한 일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의지하면서 미래를 살아가게 하는 좋은 작용을 하기 위해서 예정을 생각하는 것이 신약에 나오는 예정을 말하는 사람들의 태도인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목적을 따라서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해보면 결국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예정하셨는가 하는 것은 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혀 믿을 것같지 않았던 사람이 믿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당연히 믿을 것 같은 사람이 안 믿는 것을 보면서 놀라기도 합니다. 결국 ‘믿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구원받은 자들이 회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경험에 보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금방 회심하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구원받은 이 놀라운 사건이 다메섹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폭발하듯이 터졌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좀 더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고 묵상하다가 보니까 이미 하나님은 자신이 엄마의 복중에 있을 때부터 자기를 부르시고 구원으로 부르시고 사도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가 보니까 만세 전에,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자기 같은 사람이 태어날 것을 아시고, 얼마 동안은 바리새인의 삶을 살 것을 아시고, 어느 순간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돌이켜서 자신의 지성과 믿음을 사용하여 기독교의 놀라운 틀을 놓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스킨 같은 신학자는 얘기합니다. 사도 바울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라는 종교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작은 지역 종교로 생명이 끝났을 것이고 사도바울 덕분에 이것이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정은 끝납니다.
견인이라는 것은 견인차가 와서 끌고 간다라는 그 견인이 아닙니다. 이 "堅"은 견고하다는 뜻이고 "忍"은 인내한다는 뜻입니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 신적인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구원과 함께 중생과 함께 회심과 함께 시작이 됩니다. 그 일을 계속하셔서 결국 은혜의 목적을 완성하시는 성령님 자신의 지속적인 역사입니다. 견인 교리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들을 끝까지 붙드신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요즘에 와서 한 번 구원받은 것이 영원하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가장 대두가 되었던 것이 칭의의 교리입니다. "Justification" 이것은 법적 용어입니다. 어떤 이유로 어떤 사람을 정당하다고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벌금을 내야 되는데 부모가 대신 내줬으니 너는 모든 조건을 충족했으니까 이제는 너는 정당하다. 이것이 원래 정당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정당하다고 판결을 내릴 수 있는데 이것이 칭의입니다. 칭의를 종교개혁에서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결국은 윤리적인 삶이 강조되지 않았고 윤리가 강조되지 않아서 사람들의 생활이 개판이 됐다는 것입니다. 일단 구원받고 믿기만 하면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데 그다음에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써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니까 윤리도 사라지고 개판인 상황이 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인 교리를 안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측면도 이해를 할 수는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칭의와 성화, 이 두 개가 구원입니다. 칭의는 즉각적으로 얻어지는 구원이고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인데 로마서에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간다고 할 때 앞의 믿음은 칭의를 얘기하는 것이고 뒤의 믿음은 성화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성화가 없는 칭의, 칭의가 없는 성화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칭의가 진짜 칭의라면 이 사람의 영혼 속에서 이미 성화의 욕구가 시작이 된 것이고 성화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성화가 없다면 그 칭의는 자기가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칭의이지 진짜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합적으로 보는 것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화에 관한 설교가 거의 없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일단 구원받은 사람이 들어야 할 설교는 거의 모두가 성화에 관한 설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목표 그 자체가, 구원받기 전에는 구원받는 것이 목표였는데 구원받은 다음에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모든 본성이 거룩한 성령으로 변화되어 죄와 불결로부터 정결해져 가는 것이 성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느냐 안 사느냐에 행복이 달린 것입니다.
지금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성화가 없어도 칭의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거나 아니면 아예 칭의만 가리키고 성화를 안 가리키는 집단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큰 문제가 됩니다. 구원파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구원파의 가장 큰 결함은 성화에 대해서 가르치질 않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특히 칭의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얻는 구원과 회심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이 강조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구원파에 가서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성화를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파로부터 제 설교나 책을 읽고 온 사람들을 수없이 상담하면서 내린 결론입니다. 가르치질 않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모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공정한 판도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하면 무엇이 복잡하게 되냐 하면 성경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계신데 우리가 여기에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붙으면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전 세계로 보면 하나이고 지역적으로 보면 작게 나눠져 있지만 우주적으로 보면 단 하나의 몸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파와 신구교를 막론하고, 죽고 살고 그런 것 막론하고 예수 믿은 사람의 모든 집합이 하나의 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고 여기에 붙어 있어서 예수의 몸이 됐는데 어느 순간에 잘못해서 이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하면 떨어져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회개하면 붙는 것이 되고 붙었다 떨어졌다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예수님이 확 오시면 그 순간에 떨어져 있는 사람은 오랫동안 붙어 있었던 이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 못 받은 사람이 되고 계속 떨어져 있었는데 이 순간에 딱 붙어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으로 취급을 받는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인간의 구원을 장난치듯이 하셨을 리는 없다고 해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성화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의 칭의는 거짓이고 없는 것이어서 칭의는 성화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 사람이 중생했는가, 회심했는가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이 울었는가로 입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의 목적도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함으로써 용기를 내어서 자신도 그리스도를 붙들도록 격려하기 위한 교리입니다. "아 하나님은 한 번 구원하면 일수불퇴 하나님도 마음대로 못 하시는 구나. 그러면 이제 안심이다. 내가 아무리 개판 치고 살아도 마지막에 천국은 보장이 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고방식 자체가 구원받은 사람의 사고방식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견인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구원에 대한 취소 없이 끝까지 구원에 이르게끔 하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그 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계속 붙어 있기를 원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만 하고 문제를 보겠습니다.
문제 1) 작정과 예정의 의미는 각각 무엇이며 예정은 어떻게 나눌 수 있습니까? 작정은 선하신 지혜로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 가지신 의지임. 예정은 도덕적 피조물에 관한 하나님의 작정임. 특히 인간에 관한 것임. 예정은 선택과 유기로 나뉨
문제 2) 예수께서 구원 역사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모든 역사의 중심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창조가 아닙니다. 구속이 중심점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와 그다음에 종말이 양쪽 끝에 있고 무게 중심이 예수의 구원 사건에 있어서 그것을 기점으로 역사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BC 비포크라이스트와 AD 아노도미네, 우리 주님의 시대로 이렇게 나뉘어지지 않습니까? 예수의 구원 사역이 시간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에 있어서 역사의 중심점이 된다는 것, 구약은 구원 사건을 향해 달려온 역사이고 신약은 구원한 역사입니다.
문제 3) 우리가 예정을 회고적으로 이해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정 교리는 은혜받은 신자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신자를 격려하도록 한다.
견인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이 10장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