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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자: 백지영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제가 열혈 했던 사십대를 막 시작한 초반에 선포했던 설교가 지금 공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출장 가서도 이것을 계속 만지면서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너무 과격한 표현들을 절제하고 부드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기도생활입니다. 한국의 경건서적 가운데 가장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것이 기도라는 주제의 책입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교회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이나 기도에 관심은 많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도에 관한 책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팔리는 책이 기도에 관한 책입니다. 이 이야기는 기도하는 사람은 더 열렬하고 깊이 기도했으면 하는 마음을, 기도를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내가 기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책의 개관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는데 10과로 되어 있는 이 책을 어떻게 하면 한 번에 설명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아래 그림 하나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이 책은 신앙과 기도라는 것을 다루고 있는데 우선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1부에서는 영어로 표기된 Faith, Soul, Prayer가 나옵니다. 먼저, 신앙(Faith)이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Seeing). 이것은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믿음의 정의이기도 합니다. 그 유명한 성경구절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나오게 된 배경이 있는데,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불뱀에게 물려죽는 징계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게 하시고, 그 놋뱀을 지팡이에 두루 감아서 쳐들면 이것을 바라보는 자는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놋뱀을 쳐자보지 않은 자들은 모두 죽고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만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병원 표시에 보면 십자가 같은 기다란 막대기에 뱀이 칭칭 감겨있는 표식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나온 것입니다. 치료의 상징입니다. 신적인 치료, 기적적인 치료의 상징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정신없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장은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이 바라보는 것은 절대의존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이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고 하는 아주 절실한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기도가 가장 잘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안 되는 것은 사실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겸비함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도는 신앙의 뿌리
2장에서는 기도가 신앙의 뿌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식물은 뿌리를 통해서 영양분을 끌어올립니다. 어떠한 큰 나무도 큰 뿌리를 가지지 않고는 자신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나무마다 좀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식물학자들은 뿌리의 길이가 나무의 높이 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거의 맞는 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60미터의 나무가 있다면 60미터의 뿌리가 뻗어 있다는 것입니다. 큰 나무가 산에 빽빽하게 있지 않고 듬성듬성 있어서 우리가 보기에는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나무 하나 하나는 그 뿌리로 산 전체를 휘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산사태로부터 산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신앙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에 빠진다면 달라지는 것이 무엇일까요? 웃음도 많아집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돈도 많이 쓸 것입니다. 선물을 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 만나고 싶겠지요. 또 뭐가 있을까요? 사랑에 빠지면 말이 많아집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앞에 의미 있는 수다를 많이 할 때 그것은 호감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하면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때는 말이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거의 기도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되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없다는 것은 신앙이 하나님을 향한 교제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막 떠드는 것이 때로는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대신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을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경외하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표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부터 비롯된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나타납니다. 기도가 경건의 가장 중요한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로 강해지는 영혼
세 번째는 영혼(soul)입니다. 여기에 빨갛게 표시된 것이 인간 영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혼과 기도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왜 굳이 기도를 하라고 하실까? 그리고 해주시려면 해주시고 해주지 않으시려면 하지 마시지 마치 기도를 좀 덜하면 잘 안 되는 것처럼 느끼도록, 또 기도를 많이 하면 잘 되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실상 하나님 자신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이는 모두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해 봅시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새로운 것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듣고 기분이 좋아지시면 좀 이상한 분이 아닙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 위에 유일한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나이다. 우리의 모든 인생의 운명이 주님이 손 안에 있나이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나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께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당신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느껴지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종교생활과 도덕생활에 격려를 받게 하십니다. 이는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도덕적으로 격려하시고 종교적으로 북돋우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사진에 놀라운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형형색색의 사진으로 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더 아름다운 광경을 찍기 위해서 남들이 일어나지 않는 새벽에 일어나 산을 오르고 며칠씩 밤을 새우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 사람의 소원은 아름다운 사진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을 오르다보니까 그 사람의 건강이 좋아집니다. (건강은 그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으나 아름다운 사진을 남기기 위한 단 하나의 소원에 덩달아 따라온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드려지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영혼을 아주 강하게 만드십니다.
영혼이 강해진다는 것은 자신의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자신 바깥에서 전개되는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삶, 다른 환경 등을 이겨낼 수 있는 기운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영혼의 힘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그림같이 예뻐도 죽음을 앞에 두고 있으면 아름다울 수 없지 않습니까? 물론 기운만 뻗친다고 해서 모두 예쁜 것은 아니지만 ‘아름답다’라는 것 자체가 생명으로 충만한 것을 반드시 동반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은 영혼의 힘에 있고 이는 선한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으로 1부의 설명이 끝이 납니다.
기도와 내․외부적 작용
2부에서는 사람의 안쪽으로 향하는 기도의 작용과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기도의 작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내부적인 작용으로 첫 번째가 ‘하나님의 말씀’(W: Word)입니다. 기도해야 되겠다는 마음과 기도의 장소, 환경 등 이 모든 것들이 쌓아놓은 나뭇잎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위에서 작용하는 부싯돌입니다. 성냥이 없던 시절에 사용된 부싯돌은 나뭇잎 같은 것들을 잘게 하여 쌓아 놓은 다음에 그 위에 돌멩이를 부딪칩니다. 불똥이 딱 떨어지면서 나뭇잎에 불이 붇습니다.
모든 것을 준비해도 기도가 안 됐던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새벽에 머리까지 감고 새벽기도를 드리겠다고 나갔는데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것들을 진짜 기도로 이어지게 만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불똥이 탁 하고 떨어지면서 인간의 마음에 불이 붙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회개’(R: Repentance)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그냥 기도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기차를 다시 운행하고 싶은데 기차가 선로를 이탈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먼저 기차를 어떤 식으로든지 선로 위에 다시 올려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밀어도 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은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만드는데 맹목적으로 기도할 힘만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바로 회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가 기도의 문을 실질적으로 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는 그냥 그런 줄 알고 지냅니다. 그러나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HD 텔레비전 나오기 전에 찍어놓은 홈비디오 영상 같은 것을 보면 선이 흐리잖습니까? 그런데도 그때에는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것을 보면서 너무 감동을 받았고 풍경이 그렇게 찍힌다는 것에 대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HD 브라운관의 화질이나 양자 TV, 혹은 LG 올레드 같은 것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은 실물하고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입체감에 몰입돼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과거의 홈비디오 같은 영상을 보게 되면 ‘차라리 안 보고 말지’라는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희미하게 보던 것들을 찰칵하고 찍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뜻하시는 바와 우리의 현재의 상태가 어떻게 다른지를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두 개의 초점이 안 맞으니까 흐릿합니다. 그러니 영혼에도, 정신에도, 육체적인 생활에도 영향을 끼쳐서 흐릿하게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고 사는 사람, 영적으로 흐릿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을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흐릿함들이 말하자면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것을 또렷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회개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면 카메라의 조리개가 초점이 좍 맞는 것처럼 탈칵하고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영적 성숙’(M: Maturity)입니다. 깊이 회개하게 되면서 영적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작은 나무도 나무고 큰 나무도 나무인데 크게 자랄수록 나무가 성장한다고 말합니다.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 나무는 스스로 서갈 수 있는 확률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런 성숙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면서 내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 다음 기도의 외부적인 작용을 4가지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는 ‘순종’(順)입니다. 이 기도생활이 하나님 앞에 순종을 배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삶으로서 순종하고 개혁하는 자기 변화의 몸부림이 있을 때 기도는 놀라운 새 힘을 얻으면서 성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해서 답이 안 나올 때마다 자신의 삶을 그 기도 위에 올려놓고, 나의 삶의 어느 부분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성령이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를 살펴야 합니다. 삶의 개혁은 기도의 계획과 함께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삶의 놀라운 폭발력들이 그 기도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고통’(苦)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신앙 안에서 살기를 원하시는데 당신을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교만하게 사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탁월하리만치 겸손하던 사람이 변해서 교만한 사람이 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정신 못 차리고 막 살 때에 그들로 하여금 고통의 문제에 직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기의 살 껍질을 벗겨내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기가 의지하던 것들을 포기하는 겸손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고통을 받아야 반드시 겸손해지는 것도 아니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이 겸손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영적인 민감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미식가들은 절대 음식을 많이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미식가가 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이 먹기 때문이지요. 고독한 미식가에 나오는 그 남자는 많이 먹잖습니까? 그 사람은 워낙 등치나 골격이나 커서 많이 먹게 생겼습니다. 보통 3인분 내지 4인분을 먹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미식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이 먹어도 맛을 모르는 사람이 있고 조금 먹고도 그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까지 모두를 꿰뚫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미식가입니다. 냄새만 맡으면서도 몇 가지 재료가 들어갔는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어느 지방에서 온 어떤 종류의 해산물을 사용하였는지, 신선도가 어느 정도인지까지 압니다. 냄새를 맡아보면 신선도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선 같은 것은 아주 신선하면 아무 요리를 안 하고 그냥 갖다 놓아도 설탕을 뿌린 것 같은 맛이 나옵니다. 오래 되면 물기가 다 빠지고 절대로 맛있는 맛이 나지 않기에 소스를 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요리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많이 겪는다고 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겸손해지는 것도 아니고 고통을 조금 겪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들은 작은 고통에도 크게 반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서 순종하는 길로 돌아섭니다. 그런 사람이 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작은 고통을 통해서도 올바른 삶을 찾아갑니다.
또한 우리는 이 고통을 해석할 때 이 모든 고통을 능가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발견하게 됩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가 와서 강의를 하셨는데 제가 전매특허처럼 사용하던 예를 똑같이 드셨습니다. 설교 들으신 분들은 기억날 것입니다. 여기 프리즘이 있습니다. 프리즘으로 빛이 들어 올 때는 무색의 빛줄기만을 보는데 프리즘을 통과한 후 그것은 일곱 가지 색깔로 분광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뉴턴입니다. 뉴턴은 이 빛이 신기하게도 일곱 개의 색깔로 분광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 개로 분광된 빛이 합이면 다시 하나의 빛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굉장히 신비한 것입니다. 일곱 개의 스펙트럼을 합치면 다시 그리로 돌아갈 것 같은데 안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아주 많이 사용한 유비였습니다. 어디서 읽지 않았고 나 스스로 생각한 것입니다. 파악할 수 없고 색깔도 없는 그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자 일곱 개의 찬란한 무지개 빛깔로 빛나는 것입니다. 빨강은 주황이 아니고 노랑은 주황이 아닙니다. 초록은 빨강이 아니고 파랑은 남색이 아닙니다. 남색은 보라가 아닙니다. 각기 다른 색상이 찬란하게 비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찬란한 일곱 가지의 색상을 발하는 것을 보듯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의 빛을 보는 것입니다. 그 찬란한 빛깔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이 관련을 맺을 때에는 하나님의 긍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무릎에 피를 흘리고 있다고 칩시다. 이웃집 아줌마는 왜 다쳤냐고 물어볼 것입니다. 걸어가다가 다쳤다고 하면 옆집 아저씨는 어떻게 걸어가다가 다칠 수 있느냐고 복잡하게 심문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엄마는 그런 질문이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가 무릎이 까지고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나중에 규명해야 할 문제이고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자체를 한없이 가엾게 여기는 것입니다. 긍휼입니다. 만약 불의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을 짓는다면 하나님의 의라는 성품이 연결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이 불의한 그를 꾸짖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성품은 찬란하게 빛납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 전체가 빨주노초파남보로 빛나는 그림책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보지 못할까요? 색맹이라서 그렇습니다. 신앙이 없어서 그렇게 찬란하게 비치는 수많은 빛깔들을 못 보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과학을 전공한 한 분을 압니다. 생물학과 분자생물학, 화학 등을 공부하시던 분인데, 그런 사람의 눈으로 보면 과학적 지식이 일천한 우리들이 못 보는 우주와 자연 속의 찬란한 빛들을 봅니다. 게다가 학문의 영역이 넓혀져 가고 그 지식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이 있을 때에는 그런 눈이 없는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그의 앞에 찬란한 그림책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책 몇 권이 그리는 그림을 통해 이 세계를 보는 사람과 HD급 이상의 화면에서 3D급 동영상으로 펼쳐지는 그림을 통해 이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다시 흑백영화를 볼 수 있겠습니까? 애쓰면 보겠지만 아마 별로 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이미 실물에 가까운 화질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홀로그램이나 3D, 4D, 5D까지 나왔으니 말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이 그림책을 제대로 보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만나고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 아래 세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이 많은 것, 예쁜 얼굴과 출중한 능력으로 좋은 곳에 시집하고 장가가는 것, 사업을 잘 해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일부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주 비참하게 시험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도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그림책처럼 비치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마음먹은 대로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뜻대로 됐기 때문에 쾌재를 불렀지만 후에 땅을 치며 후회한 일이 한 두개가 아닐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펼쳐질 것이니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을 굳게 믿고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일지를 고민하면서 최선을 선택하려고 애쓰는 것,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선책을 하였든지 그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자신 앞에 펼쳐지는 그 그림책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행복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필기를 해 보십시오. T. S. 엘리엇이라고 하는 미국의 한 극작가가 한 이야기입니다. 저의 신학을 잘 반영하는 것이라서 불러드립니다. “경험했으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의미를 파고들었더니 다시 경험되었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정확한 사실입니다. 다시 불러드리겠습니다. “경험했으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의미를 파고들었더니 다시 경험되었다.” 경험이 되살아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도에 관한 세계를 경험했는데 그것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험했습니다만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끊임없이 첫사랑을 이야기 하면서 그 경험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길은 의미를 다시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미 안에서 경험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험했으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이 지식이 주는 의미에 천착하지 않을 때 그는 다시 그 경험으로 돌아가기는 어렵습니다. 메마른 광야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인식이, 의미의 파악이 중요합니다. 파고들면 경험되는 것입니다.
일전에 이런 얘기를 한 번 했습니다. 제가 거의 안 먹는 요리가 곱창입니다. 그런데 텔레비전 홈쇼핑에서 그 곱창볶음을 선전하는데 오랜 세월 동안의 나의 생활의 태도와 마음을 바꾸면서 한번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꼭 저렇게 맛있게 만든다면, 그 홈쇼핑에서 사먹지 않더라도 진짜 곱창요리를 잘 하는 집이 있다면 기름을 좀 많이 도려낸다는 조건 하에 깻잎을 넣어서 볶은 소곱창 정도는 먹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의미에 천착할 때, 의미를 파고들 때 경험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길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제시하는 집단이 이단입니다. 그래서 대개 의미를 찾고 싶지는 않고 경험만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대개 이단의 밥이 됩니다. 이단들의 포교대상 일순위입니다.
셋째는 ‘성령’(聖)이십니다. 기도가 우리를 성령 충만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머리를 맴 돌다가 사라질 수 있지만, 성령은 그 지식을 우리의 가슴까지 실어 날라 우리의 마음에서 능력이 되게 하십니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다 없어졌는데, 정능 너머 세금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를 지나 차를 타고 오르면 청와대 뒤쪽으로 내려오는 북악스카이웨이 끝자락으로 떨어집니다. 세검정 뒤쪽으로 올라가면 삼각산이 있습니다. 삼각산 중에서 제일 높은 곳에 기도원이 있었습니다. 21살에 회심하고 22살 될 때에 목사님을 따라 그 기도원을 다녔습니다. 20대 중반 후반 쯤 되어 보이는 자매들이 아무 도움 없이 불빛 하나 없는 산을 1시간 40분 정도를 오르며 기도원을 찾는 것입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찬송을 부르면서 단신으로 올라갑니다. 그것을 본받으라는 뜻이 아니라 성령 충만하면 그만큼 담력이 있는 것입니다.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생활은 우리를 담대하게 만듭니다. 담대하지 않고서는 얻을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을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담대하게 나를 던지며 걸음을 떼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 충만입니다.
넷째는 ‘교회’(敎)입니다. 기도가 간절하고 열렬해지면 하나님은 이 기도의 영력을 자기가 먹고 입고 사는 일에 국한시키지 않으시고 이 기도를 넓게 펼치십니다. 많은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주님 나라 임하시고 그 뜻 이루어지이라” 그 마음이 우리를 선교하게 하고 교회를 섬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섬기다가 실족하거나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불평하는 자들은 대개 기도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위해서 부르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이것을 감당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애에 가장 기쁘고 행복하던 때는 기도가 잘 되던 때였습니다. 기도가 풍성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모든 삶은 기도입니다. 증기 기차를 가게 할 때에 석탄을 넣고 태워서 그 에너지로 기차를 움직이게 만듭니다. 거기에 장작을 태우면 기차가 안 갈까요? 갑니다. 열량을 얼마나 오래도록 내느냐가 문제가 될 뿐이지요. 옷가지나 쓰레기를 태워서 불길이 일어난다면 기차가 갈까요? 안 갈 이유가 없습니다. 모두다 에너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 생활이 살아 있을 때는 설움과 고통, 눈물과 아픔 등 이 모든 것들을 기도 속에서 태웁니다. 그 자체가 에너지가 되어서 우리의 삶에 사랑이 넘치게 만듭니다. 그 에너지가 확대되면서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해나가도록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생활 하십시오. 다른 것으로는 여러분들의 번민과 고통, 두려움 같은 것들이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어마어마한 기도로 시작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 작은 기도로 시작을 하십시오. 그리고 정기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 앞에 간구할 기도할 제목을 마음속에 기록하면서 하나님 앞에 응답을 구하며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의 삶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한권을 모두 정리해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