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녹취자 : 오희열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보겠습니다. 제목을 교정을 봤습니다. “목적이 되신”이 아니라 “목적이신 하나님”입니다. “목적”과 “목표”는 다릅니다. “목표”는 “goal”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하고 그것을 하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려면 하나의 목적, 목적은 더 높은 뜻입니다. 그래서 “end”라고 합니다. “내 인생에 목표가 있다. 정말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다.” 하고, “내 인생의 목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표”입니다. 목표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취업준비를 잘 해야 할 것입니다. 회사에 들어간 다음에는 남보다 승진해야 할 것입니다. 말단으로 있다가 정년퇴직할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목표가 또 생깁니다. 이것이 똑바로 되려면 모든 목표들이 마지막 목표를 이루는데 이바지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합니다. 목적을 가지고 이 목적의 빛으로 목표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펼쳐야 올바른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명령하시니까.” 이것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명령하시니까 해야 하지만 내 신앙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가? 또 기도를 열심히 해서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지도 볼 수 있어야 하니까 끊임없이 목적의 빛으로 목표를 바라보고 목표가 목적을 이루는 데 일직선상에 있도록 올바로 되게 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을 전쟁에서 “전투”와 “전쟁”이라고 합니다. 한 번 전투에서 승리해도 전쟁에서 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투에서 계속 지면 전쟁에서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전투에서 다 졌는데 전쟁에서 이기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투를 할 때는 무조건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이기기 위해 꼭 필요한 전투만 하는 것입니다. A나라와 B나라가 싸우는데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지 파악해서 필요할 때 전투를 하는 것이지 C나라에 가서 전투를 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필요하다면 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우리 인생의 목적을 먼저 설정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목적은 없이 목표만 계속 세우니까 인생을 계속 혹사하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공허하게 되고 혹은 의미없게 되는 일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간이 바쁘시겠지만 신앙서적은 아니어도 카프카의 “변신”을 한 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은 신앙적으로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아주 착실하게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가 벌레로 변하고 나니까 그 목표가 참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족들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정하는 인생의 목표가 얼마나 부질없을 수 있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모르니까 목표를 많이 세워둡니다. 그 목표가 궁극적으로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기반들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번부터는 이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항상 공과가 먼저 나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어떤 구역에는 오늘 공부하고 오늘 따라오게 되겠지만 못 따라오는 구역에는 한 주 먼저 공과가 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배우지 않고 앞서갔기 때문에, 혹은 우리 공과가 늦었기 때문에 배우지도 않고 먼저 가르치고 그 다음에 와서 배우게 되는 일을 없애기 위해서 여기서 나가는 진도가 약간 앞서가게 만든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가는데 많은 사람이 뒤쳐진다고 해서 우리 공과가 뒤로 가지는 않게 말입니다. 그러면 행사가 있는 날에는 그것을 회복해야 하니까 오늘은 두 과를 한꺼번에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일에 우리가 광과를 못 해도 두 과를 소화해서 하고 성탄절 전에도 우리가 두 과를 공부해서 따라오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내용이 “신나”에 비해서 그렇게 광범위하거나 어렵지 않고 “신나”에서 배운 것들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1과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물론 읽어 오셨을 것입니다. 책을 못 받으셨습니까? 오늘 받으셨습니까? 그러면 오늘 읽었어야 합니다. 얼마 안 됩니다. 오늘 저는 침대에 잠깐 누워서 30분 만에 1, 2과를 다 읽었습니다. 읽으시면 됩니다.
1번, 1분단 읽겠습니다.
문제 1) 본문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두 질문을 제기합니다. (1) 첫 번째 질문은 무엇입니까? 저자는 하나님을 어떤 존재라고 말합니까?
먼저,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에 관한 질문은 크게 두 개라고 했습니다.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누구이신가?” 영어로 하자면 첫 번째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는 “whatness”, “하나님은 무엇이냐?”입니다. 이것은 본질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 다음은 “whoness”, “하나님은 누구신가?” 이것은 성품, 특히 타자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성품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보를 준다고 해도 우리 지성으로 거의 이해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 본질에 대해서 전혀 가르쳐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영이시고,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그런데 그 영은 우리 인간들의 영이나 천사들의 영과는 다른 영이시라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의탁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6장)” 이 두 가지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가장 귀중한 두 가지 교훈입니다. 그 이외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가져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정리해야 할 생각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 자연, 모든 만물과는 다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위 말하는 “유(類)”가 있는데, “유” 아래 “종(種)”이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뭔가를 보고 “이것은 무생물이 아니고 생물이다. 그런데 이것은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다. 식물인데 이것은 풀에 속한 것이 아니라 꽃에 속한다. 꽃 중에서도 이 꽃은 무슨 꽃이다.”하며 범위를 좁혀가면서 우리가 보기에 그와 비슷한 것, 혹은 다른 것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그게 무엇인지를 배워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과 비슷하게 비교할 수 있는 어떤 “종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을 묘사할 때는 부정어법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이 아니시다.”이런 식으로 덜어내면서 오해할 수 있는 것을 다 떠내고 그럴수록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좁아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생각으로부터 우리가 보호받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과 하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계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의 세계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향해 전적인 타자입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한 동아리가 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려운 말로 “초월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월해 계신다.”
그 다음에, 2분단이 문제 1의 두 번째를 읽겠습니다.
문제 1) (2)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지닌 분인지를 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초월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과 모든 만물은 하나님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만물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모든 세계와 관계없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자연세계의 조화, 질서, 그 모든 규칙, 그 속에서 오는 조화로운 어울림, 이 모든 것들은 그 세계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창조한 모든 세계를 초월하는 다르신 분인 동시에 하나님은 당신 안에서 이 모든 세계를 갖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 하나님 당신 안에 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학문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어떤 규칙과 이치들을 배워가는 것인데, 그것을 더 많이 터득한 사람들을 학자, 혹은 전문가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런 법칙과 원리들이 이미 있는데 그 있는 것들을 인간이 지성이 떠지면서 발견해내고 점점 더 놀라운 문명의 발전과 학문의 진보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원리, 원칙, 사물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그런 것들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들에 법칙을 부여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세우신 법칙을 따라서 만물을 당신 안에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원리들이 그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원리들을 인간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되고 하나님과 관계를 필연적으로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내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 안에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면 안 되고 “하나님 안에 만물이 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고 묘사해야 정확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물 안에 하나님이 있다.”고 묘사하는 게 아니라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날 수 없다.” 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자를 잘못 설명하면, 우리가 옛날에 학교 다닐 때 했던 “물활론”같은 것이 됩니다. 물활론(物活論), 애니미즘(animism) 입니다. 모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당신의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왜?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을 보면서 그 자연 사물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다루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무지개빛처럼 다양한 성품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비참에 빠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불의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정의를, 가난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부요함을, 무력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그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찬란한 도덕적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을 우리가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어떻게 드러내겠습니까? 그렇게 눈먼 사람을 고치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시력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연약하고 부족한 것들이 낙심의 이유가 된 다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신앙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더 바라고 기대할 수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3분단, 2번 읽겠습니다.
문제 2)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존재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각각에 대해 설명해 봅시다. 또한 인간이 거루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갖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것은 이미 “신나”에서 다룬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초월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적 격차”라고 합니다. 이런 존재적 격차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발견하게 되고 그 위엄 앞에 인간은 엎드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은 내재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통해서 “도덕적 격차”를 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하심입니다. 나도 사랑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까 내 사랑은 얼마나 불완전한 사랑이었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마치 한 대에 몇 억씩 하는 기타를 가지고 세계 최고의 연주가가 기타를 치는 것과 아이들 장난감으로 사주는 낚싯줄로 엮은 기타를 치는 것과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엮어지면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우리가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1분단, 3번을 읽겠습니다.
문제 3) 본문이 무한한 크기와 에너지를 갖고 있는 우주와 영원한 시간에 대해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범위 내에서는 우리가 노력하면 그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아는 비결은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위대하시다고해서 그 키가 수천 미터가 되는 하나님을 우리가 상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서 얼마나 위대하신 하나님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그랜드 케년 같은 곳을 보면 엄청난 계곡인데 물이 지나간 흔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어마아마한 물이 지나갔을 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해변이 침식되어서 깎아지른 절벽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게 됩니다. 심지어 끊임없이 바람이 부딪치면서 모래 사이에 구멍을 내고 굴을 만듭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자연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똑같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배우게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 혹은 신학공부에 있어서 소위 “난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누구도 쉽게 풀지 못하고 설명하는 데에 난해한 주제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예정이라든, 이런 문제들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의지의 자유 문제라든지, 선과 악의 기원의 문제라든지, 시간과 영원의 문제라든 이런 것들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어려운 주제가 되는 이유는 모두 시간과 공간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시간과 공간에 매여서 살기 때문에 공간을 넘어서는 사유, 시간을 초월하는 사유를 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과학에 의해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엄청난 과학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과학에 의해 세뇌되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유가 필요한 이유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완벽한 인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을 재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려움이 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간과 공간을 사유하게 되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나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되느냐, 150억 광년 이하로 보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940억 광년까지 봅니다. 그것을 우주의 크기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측정 가능한 거리에 대한 논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만 볼 수 있지 보이는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은 얼마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우주의 크기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많은 사람들은 아, 그것이 우주의 크기구나 하는데 그게 아니라 어떤 사람은 150억 광년을 측정할 수 있고 보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940억 광년까지로 보는 것입니다. 모두 측정 가능한 범위의 우주의 크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양쪽 다 그게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바깥까지 우주는 연장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런 사실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위대한 일을 행하셨으니까 그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중국에 가서 “뜨악!”했던 것이, 자금성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경복궁 같은 곳은 들락날락했는데 자금성에 들어갔는데 (끝없이 펼쳐지는 것들을 보며) ‘이건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똑같이 나열된 것들이 이제 끝인 줄 알았더니 그 옆에 또 이어지고 옆에 또 이어지고 해서 아홉 개 정도가 쭉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할일 없이 자금성 옆에 계단에 앉아서 계산기를 꺼내어 이 건축비가 얼마가 들었을지 계산을 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런 것을 짓는다면 말입니다.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내가 아는 건축 상식으로 계산해 보니까 300조 원 정도 나왔습니다. 그게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겠습니다. 재미로 한 번 해 본 것입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건물을 보면서 우리가 “이걸 지은 사람들은 얼마나 키가 큰 사람들이었을까? 얼마나 꺽다리였을까? 엄청나게 큰 사람들이 여기서 잤나보다.”하는 바보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과 능력의 크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을 수 없어서 못 지은 것이 아니라 돈도 없지만 중국이 크게 짓지 못하도록 하니까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조그맣게 지은 것입니다.
결국 그런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 그리고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40의 불혹의 나이를 지나서 50의 지천명을 지나고 60의 이순을 지납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돌아봅니다. 그러면 어떤 때는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40대 때 그것 가지고 왜 그렇게 싸웠지?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무슨 상관인데 목숨을 걸고 왜 그랬을까?’ 합니다. 인생을 보는 시야가 너무 좁으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닌데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면서 인생을 좀 더 멀리 보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친구 목사들이 매월 만난 지가 한 23년 되었습니다. 열린교회 개척했을 때 바로 만나기 시작했으니까 말입니다. 매주 만나다가 요새는 너무 바쁘니까 한 달에 한 번 만납니다. 처음에는 만나면 만날 때마다 싸웁니다. 어떤 때는 밤새도록 싸웁니다. 그때 녹음해 놓았으면 좋았겠다고 얘기하기도 하는데, 제자 훈련이 좋으냐 나쁘냐, 한국교회가 어떠냐, 설교가 중요하냐 덜 중요하냐 하면서 맨날 싸웠습니다. 요즘은 아무도 안 싸웁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그렇게 목숨 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에 대한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큰마음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은총적으로 높은 산에 오르거나 광활한 천지를 바라보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북극이나 남극, 아프리카나 대륙, 혹은 태평양을 횡단하지는 못 할지라도 높은 산에 올라가서 안 되면 설악산이라도 올라가서 내려다보며 ‘아, 인간이 정말 하찮구나!’ 하는 생각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정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끊어버리고 오늘 하루에 골몰하면서 살 때는 인간이 더럽게 찌질하게 되는 것입니다.
4번, 2분단이 읽겠습니다.
문제 4)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며,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모든 사물이나 사실들, 진리들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이 지상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 있고 천상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우긴 철학자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모르는 것도 존재하는데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나의 인생에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주관주의적인 것입니다. 운전하다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차를 몰고 막 달렸는데 자기가 못 봤다고 해도 거기에 기둥이 있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면 부딪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생각할 때 너무 주관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몰라도 거기에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청각으로 보면 극초단파부터 시작해서 장파까지 많은 음역대가 있습니다. 초음파 발생기를 놓으면 벌레가 들어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못 듣습니다. 그런데 벌레에게는 천둥치는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찻길 옆에서 사람이 살지 못하는 것처럼 벌레가 도망을 간다고 합니다. 소리의 영역이 180도가 되어도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영역은 아주 좁은 영역밖에 듣지 못합니다. 너무 파장이 길어도 안 들리고 너무 짧아도 안 들립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감촉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감촉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있는 것에 한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뜨겁고 차갑고 무르고 딱딱한 몇 가지만 감촉할 수 있지 그것을 능가하는 새로운 것은 없다고 생각하거나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맛볼 수 있는 맛은 실제로 존재하는 맛 가운데 그거 대여섯 가지 밖에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없다고 느껴지지만 사실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는 광선 가운데 가시광선의 폭은 빛의 파장이 일정한 부분만 우리가 겨우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외선 카메라 같은 것을 보십시오. 고속도로에서 밤중에 너무 졸려서 차를 잠간 세웠는데 “아저씨, 이거 사세요!”하면서 보여주는데 깜깜한 곳을 보는데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러시아제 망원경이라고 합니다. 그걸 사서 뭘하고 뭘 보겠습니까? 80만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이기는 진짜 잘 보였습니다. 저기 깜깜한 곳의 트럭 바퀴에 숨어있는 고양이까지 또렷하게 대낮처럼 보였습니다.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사용해서 보니까 보입니다.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것입니다. 지상적인 영역, 논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성을 가지고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상적인 영역에 속한 것은 성경을 믿는 마음을 통해서 이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생이 중요한 이유는, 이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날 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믿음과 거듭나고 회심하는 일은 떼어낼 수 없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이런 중생한 사람의 영역이 이런 천상적인 영역을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지성 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 진리의 빛 아래에서 사물들을 평가하면서 올바르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믿음을 통해서 이성으로 증명되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에게 목적이 설정되고 이 목적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목적이시다, 그리고 이 목적 아래에서 모든 목표가 배열이 될 때 어긋나는 것들을 배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열네 살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 세 개의 질문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내가 누군지가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가 설명이 되면 나는 인생사용설명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예배드릴 때 종 치는 것이라고 규정이 되고 나면 ‘아, 이것을 예배당에 갖다 놓아야지, 화장실에 갖다 놓을 것이 아니구나.’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좋은 신자가 되어야겠다는 고민과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고민이 따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으면서도 이것에 답을 못 찾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찾아가는 사람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사실은 하나로 되어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이야 말로 참된 진리인 것입니다. true theology, true philosophy, 참된 철학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설명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전자제품 하나만 사도 설명서를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귀찮아서 읽지를 않습니다. 설명서도 아주 두껍습니다. 그리고 자꾸 망가뜨립니다.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A/S 기사가 오면 “이 버튼을 누르셔야지요.” 하고 갑니다. 그때 되게 미안합니다. “작동을 잘못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설명서를 읽으세요.”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설명서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온 몸으로 10대, 20대, 30대, 피투성이가 되면서 아주 조잡한 사실을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아주 당연한 사실들을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손해입니다. 가전제품이야 망가지면 바꾸면 되지만 내 인생은 망가지면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전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놀라시지도 않으십니다.
다음, 3분단이 5번을 또박또박 읽어보십시오.
무제 5)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우리와 상관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우리와 상관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체스터턴이라는 사람입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전집을 저도 가지고 있는데 엄청나게 많이 썼습니다. 이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C. S 루이스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정신적인 스승입니다. 문학, 역사, 철학으로 시작해서 모르는 것이 없이 넘나들면서 기독교를 변증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엄청난 거구였는데 여기에는 날씬하게 사진이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촌철살인”의 명언들을 남깁니다. 모두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은 마치 난파선에서 쏟아진 보물과 같다.” 지금 보물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 아십니까? 모르실 것입니다. 저 남해로 가면 중죽도라는 섬이 나옵니다. 거기 여러 사람이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변호사님 아십니까? 그런 일에 변호사님이 개입을 하셔야 돈을 버시는데… 일본군이 아시아에서 약탈한 보물을 중죽도에 숨겨두고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보물의 가치가 2경 원쯤 된다고 합니다. 2만 조. 사람이름이 아니라 2만 조 입니다. 우리나라가 50년 동안 세금을 한 푼도 안 걷고 나라를 꾸려갈 수 있는 보물이 거기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목사 여럿이 거기에 올인을 했습니다. 나도 좀 끼워달라고 할 걸 그랬습니다. 검색해 보십시오. 엄청납니다. 여러 사람이 그것을 찾다가 패가망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은 잘못 뚫었다, 다른 곳을 뚫었다, 우리는 올바른 곳을 뚫을 것이다,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거기 가서 거들면 조금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탐사비용을 댄다거나 말이라도 격려를 하면 1%만 주어도 굉장한 것입니다. 그게 보물입니다. 저는 그것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유럽 어디에서 사실로 발견되었습니다. 왕당하다고 했는데 파보니까 진짜 기관차 속에서 어마어마한 보물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되면 법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그게 완전히 본인 소유는 아니고 국가와 6:4 정도로 나눈다고 합니다. 국민을 위해서라도 발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자 될 사람은 부자 되고 40%면 8000조쯤 되니까 굉장할 것입니다.
난파선에 보물을 잔뜩 싣고 가다가 배가 난파가 되어 박살이 나고 보물들이 확 흩어져버렸습니다. 난파선도 저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았습니다. 잠수부들이 가다보니까 여기저기서 발견됩니다. 그러니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도굴을 한다고 하면 물건을 하나씩 팔면 안 되고 그것이 어디서 도굴이 되었다고 세트가 딱 되어서 그 자리를 보여주면서 유물과 유물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확인해서 팝니다. 마치 산삼을 땅에 심어두고 팔듯이 말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떨어져 나가서 설명을 할 수 없을 때는 그 가치가 뚝 떨어집니다. 어떤 스토리를 발견할 수 있을 때 가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삶을,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만물들이 그냥 난파선에 확 쏟아진 것입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새와 돌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와 네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실존주의자들이 잘하는 질문입니다. 나와 우리 부모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러면서 서로의 상관관계를 묻습니다. 찾아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억지로 부여합니다. 어떤 사람은 동의하고 어떤 사람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물들이 막 흩어져 있어서 여기에서는 이것이 발견되고 저기에서는 저것이 발견되는데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과학이 발달하고 그것들을 보니까 흩어진 보물들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그 밑에서 오랜 세월동안 모래가 쌓이면서 땅 깊이 묻혀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배를 발견하게 됩니다. 흙을 걷어내고 그 배를 탐사해보니까 18세기의 배라는 것을 알게 되고 어떤 나라에서 어디로 가던 선박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고 거기 물건들이 왕궁으로 납품되었다는 것도 발견됩니다. 그러면서 그 나라가 어떤 나라고 어떤 무역관계를 가졌는지 알게 되면서 어디서 무엇이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고 서로 연결이 되면서 왜 그 한 배에 실렸고 거기 흩어진 해안의 보물과 바다 속에서 나온 보물들이 이렇게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검토하고 잘못 생각한 부분들을 고치고 증거자료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사실과 사물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난파선처럼 확 쏟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 모든 보물들을 쏟아내 놓은 그 원천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될 때 설명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난파선을 통해서 모든 그 난파선에서 쏟아진 물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규명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과 모든 사물들, 무엇이 우선순위가 있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까 돈의 의미도 달라지고 가족의 의미도 달라지고 자식의 의미도 달라지고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배우면서 이 모든 세계 안에 있는 의미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으며 이 모든 것들을 통해 그 의미를 하나님께로 귀환하는, 그 모든 의미를 하나님께 다시 귀속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물을 해석할 때도 하나님의 빛 안에서 해석하고 해석된 것들을 이용하고 이것을 활용하면서 하나님께로 환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진리는 믿음으로 학문은 우리 이성으로 해 나가면서 이것들이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끊임없이 이런 비밀들을 터득해가면서 자신이 성숙해 가는 것이 인생의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