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Q&A
녹취자 : 장미연
학생이 공부를 할 때 좋은 질문을 하는 것은 그 학생의 자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학생들 질문의 수준은 선생님의 설명의 욕구의 수준을 결정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구역장 공부를 하며 내준 질문을 보면서 선생님으로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들이 질문한 내용들을 하나씩 알기 쉽게 답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1번입니다. 삼위의 아름다움의 모상이 교회인데 현재 교회에서 그렇게 아름다움으로 나타나고 있는 예를 들자면 어떤 게 있을까요?
우리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는 이 세상 어디엔가는 완벽한 교회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였던 초대 교회 조차도 완벽한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더 아름다운 교회는 분명히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어떤 교회들을 주님이 칭찬해주십니다. 그림을 보면 성도가 교회를 사랑하게 되면 교회가 상처 난 부분이 있고 해도 그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면 사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는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아름답지 못한 부분을 보면서 다른 아름다운 부분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그 추한 부분이 온전해지기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까리따스의 사랑이 하는 일입니다.
질문 2번입니다. 평소에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께는 사랑한다는 고백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는 사랑한다는 고백을 잘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시간과 공간 속에 오신 구세주 이십니다. 그러면 사람의 몸을 입기 전에는 물론 하나님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신인 동시에 인간이신 그런 신인 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는 사람의 인격을 입고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분인데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시공간 속에서 삼위 하나님을 드러내고 인간과 교통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충분히 사랑한다고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부이신 하나님은 크게 “하나님 아버지” 라고 할 때 항상 둘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려운 내용인데 잘 이해해 보십시오.
첫 째는 성경에 나온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신적인 본질로서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나눠진 게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의 신적 본질이신 하나님 자신이 아버지로 표명이 됩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은바 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성령님은 그 하나님을 아버지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해석할 때 아들이신 성자가 성부이신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기도나 예배나 찬양을 받으시는 분은 성부, 성자, 성령 이런 식으로 영광을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나눠지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와 기도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그 대상은 결코 위격으로 나뉘어져서는 안 되는 대상입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표현이 나타내는 의미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치 우리 무리와 똑같이 일부가 되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를 해라.” 그런데 그 속에는 이 말씀을 가르치고 계신 예수님 자신이 거기에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할 때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 또 이 기도를 가르치는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모두 포함된 그 삼위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다른 경우는 아주 명백하게 성자가 아니고 성령이 아니신 하나님 아버지 즉, 삼위일체 안에서 3위인 성령이나 2위인 성자가 아닌 성부를 가리키는 적이 있습니다. 이때는 신성의 근원이신 성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44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할 때 그 아버지는 분명히 성자, 성령과 구별되는 제 1 위격으로서의 아버지이시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기억할 포인트는 예배와 기도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그것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할 때 예수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성령님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성부여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의 기도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때는 성부, 성자, 성령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부 하나님은 분명히 성자 하나님에게 또 사람들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은 사랑 자신입니다. 어거스틴이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이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위격이라는 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가장 널리 채용했던 것이 소위 얘기하는 심리학적인 모델 방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사회학적 모델이라고도 하는데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그 자체 이것은 셋이 다른 것 같지만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그 자체가 한 사랑 안에 있는 것처럼 성부는 사랑하는 자, 성자는 사랑받는 자, 성령은 사랑 그 자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사랑 자체니까 성령을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을 사랑하라는 언어적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령 하나님을 우리들이 위격으로 보면서도 성부와 성자는 사랑의 대상이 되시고 삼위일체 전체는 사랑의 대상이 되셔도 성령 위격 하나가 사랑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서점에서 보면 “안녕하세요. 성령님”이라든지 이렇게 성령님과 대화하는 이런 것, 그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다만 성령이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 성령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 성령을 근심시켜드리는 것이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시켜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종종 그런 은유적 표현을 우리에게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질문 3번입니다. 약간 철학적인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존재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두 가지 질서로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는 이미 드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할 때도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하시고 육체는 자연에 속한 것이고 영혼은 정신에 속한 것입니다. 똑같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자연의 질서를 따라서 자연 세계를 만드시고 그것은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입니다. 한자에서 자연(nature)울 설명할 때의 자연입니다. 스스로 자 그러할 연 스스로 그러한 것입니다. 인간 몸 바깥에서 그런 것을 자연이라고 부르고 인간 몸 안에서 자연적으로 그러한 것을 본성이라고 부르는 게 동북아 철학에서 기본적인 사물관입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또 하나의 질서는 도덕질서입니다. 그것은 자연세계는 스스로 의지가 없습니다. 자연세계를 잘 사용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덕적 목적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도덕적인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 질서는 도덕 행위자들 특히 인간, 넓게 보면 마귀, 천사,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들어가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들을 도덕행위자로 만드셔서 도덕적인 결정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타락하고 난 다음에 그걸 제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구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올바른 도덕 질서로 돌아가도록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질서들이 가장 아름답게 어울리는 상태가 하나님이 꿈꾸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의 상태입니다. 지금 있는 이 두 가지 기둥을 항상 머리에 넣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도덕적으로 타락하면 땅이 신음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 땅이 저주를 받고 그러면서 자연의 질서도 깨지고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환경계의 이런 커다란 변화가 오면서 인간의 삶이 고통을 받아서 결국은 자연적 질서가 깨진 것만큼 인간의 육체의 생명과 눈에 보이는 세계가 위협을 받고 정신의 질서가 깨진 것만큼 인간이 마음으로 불행하게 되고 불행이 삶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시면 도덕적 행위자들 인간을 비롯한 도덕적인 지성적 피조물들입니다. 판단의 기준이 있는데 존재의 질서입니다. 옆에 삼각형이 되어있는데 파란 것은 원래 우리가 볼 때 하나로 보이는 거라면 밑에 짙은 고동색부터 상처가 난 것처럼 보이잖습니까? 하나님이 볼 때 좀 더 가치 있는 사물들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불평등할 수 있냐?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죽어 가는데 나무를 몇 개 꺾으면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할 때 그 나무도 생명이니까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죽게 한다든지 사람이 동물의 습격을 받을 때 몇 십 마리의 동물을 죽이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그것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 물체니까 인간과 다를 게 없다고 만약에 동물을 죽이지 않을 그런 비이성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잖습니까? 이처럼 모든 사물들이 존재의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이건 중요도입니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하신 분이고 그 다음에 인간이 있겠지요. 그 다음에 인간 이하의 중요한 것들 질서가 지어져 있을 거 아닙니까? 기본적으로 볼 때 우리들이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들어오니까 여러 가지 많은 질서의 구분이 생겨나는 것이지만 예를 들어서 정상적으로 여러분들이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의 강아지가 화분에 끼어서 죽게 되었다면 여러분들은 화분의 식물을 버리겠습니까? 아니면 강아지를 살리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이런 존재질서들이 쭉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점은 영원불변가치 이런 관점에서 이것들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설명함에 있어서 첫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자연세계들을 선의로 대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 얘들이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을 쳐도 독사가 물지 않고 양과 사자가 함께 풀밭에서 뛰노는 그런 화해의 광경이 펼쳐지지 양육강식의 광경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이런 것들이 바로 존재의 질서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존재 질서를 뚜렷하게 나누면 하나님 그 다음에 인간, 사회 이렇게 되어있는 것이고 그 밑에 자연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로 사랑하고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신 하나님 때문에 옆으로 사랑하고 자연의 모든 세계는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사랑을 가지고 선량한 관리자로서 의무를 다하며 선한 마음으로 돌보고 가꾸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본분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묵자를 잠깐 말씀 드리면서 동북아 철학에서 『겸애설』을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렇게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할 때 인간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관계가 가족, 부부, 내가 속한 작은 교회 심지어는 작은 구역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 만남 속에서 우리들이 거기가 가장 먼저 우리가 사랑을 보일 수 있는 영역입니다. “가족들에게 마땅히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들보다 악하니.”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만이 배타적인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을 하면 내가 가족을 그렇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고 내 교회를 좋아하기 위해서는 다른 교회를 싫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합리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 사랑이 온 우주를 모두 휘 돌고 당신 자신 안으로 돌아와 당신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존재의 질서는 가치의 질서고 가치의 질서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덕이고 사랑의 질서를 어긋나는 것이 악이요 불의가 되고 그것 때문에 인간이 불행지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 4번입니다. 영화된 이후 우리가 부활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고 우리의 몸이 새로운 몸을 입어서 영원히 멸하지 않는 몸이 되었을 때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성장하는가? 그 다음에 지상 생활에서의 신앙생활이 그것과 어떻게 관계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답을 하자면 “천국에서도 성도의 사랑은 성장한다.”라고 봐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보면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에 동경 아니면 석경이었습니다.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희미한데 마지막에는 그의 형상으로 변화해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 했고 다른 곳에서 사도 바울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는 얼굴을 마주대하고 보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더 놀랍게 드러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지식과 총명과 함께 자라나는 것이지 사랑 혼자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한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한 번에 우리에게 다 보여주시지도 않거니와 보여주셔도 인간이 그 지식의 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를 발견해서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무한히 계속 되어도 우리는 매일 아침 마다 새로운 지식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지금은 지식이 들어와도 죄와 정욕 이런 것들 때문에 그게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하지만 거기서는 새로운 지식과 총명의 개안이 바로 바로 사랑으로 이어지면서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모든 사람의 지식과 이해력이 똑같습니까?” 정확하게 우리가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려울 거 같지만 성경을 통해서 유추해 볼 때 하나님이 각 각 천국에서도 다른 영광을 이야기 하시는 것을 보고 달의 영광, 별의 영광, 해의 영광 이런 표현이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천국에서도 이런 지식의 크기는 다를 것이고 그렇다면 거기서도 죄는 물론 없겠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크기는 각 각 다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군인이 전쟁을 하는데 말단 소총수부터 전투기를 몰고 공격을 하는 군인에까지 모든 사람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한결 같습니다. 그런데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병과와 혹은 병과 안에서도 각 각 자기 맡은 일을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느냐는 능력의 차이가 나는 것처럼 하늘나라에서 그렇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크고 작은 별들이 하늘에서 어울리며 반짝이고 빛나는 것처럼 그런 모습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마지막 하나는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과 하늘나라의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데 이것도 사실 성경이 무엇인가를 똑 떨어지게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뭐라고 말할 수 없고 또 하나는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하늘나라에 가서 단 번에 얻는 그 지식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유치원 수준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땅에서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주님을 더 많이 알았던 성도들은 하늘나라에서 훨씬 더 익숙하게 주님을 뵈옵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또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만 우리가 열심히 주님을 알아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더 격려가 되지 않을까 생각 됩니다. 물론 주님을 더 많이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이 땅에서 충분히 믿음으로 살면서 보상을 받지만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질문에 매우 즐거웠고 답을 하는 순간도 매우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