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장 사랑 안에서 교제함
녹취자: 허혜숙
1. 신자와 교회는 모두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1) 영혼을 창조하심과 인간의 중생함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어떻게 나타납니까?(148~149)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시는 장면이 창세기 2장 7절에 나타납니다.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 말이 참 어려운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내피쉬 하야’라는 단어입니다. ‘내피쉬’라는 말은 영혼이라는 뜻도 있지만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영어표현으로 'There is not a soul in the street' 하면 ‘길거리에 사람이 한 사람도 안 보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된지라” 이것을 생령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결론이면 땅의 흙을 재료로 해서 사람이라는 것이 지어지고 이것은 사람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기가 불어넣어져서 산 사람이 된지라 라고 한 것은 영혼입니다. 번역이 잘 못 되어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되니라” 이것이 결론이면 땅의 흙을 재료로 해서 사람이라는 것이 지어지고 이것은 사람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기가 불어넣어져서 산 사람이 되니라” 그러면 이것은 영혼입니다. 영혼을 하나님의 일부를 불어 넣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훅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으신 행동이 창조의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 각 사람의 영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후에는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들지 않고 생육을 통해 태어나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이 하나하나 창조하셔서 그 육체와 만나게 해 주시는데 그 시점이 수정 난 때냐 아니면 어느 때냐 하는 것은 우리들이 정확하게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든 그런 원리에 의해서 태어나게 되는데 이때에 당연히 모든 만물이 성령 안에서 창조가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과 매우 닮은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이것은 성령 안에서 인간의 첫 번째 창조이고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우리의 영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영혼과 육체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하늘의 생명과 사랑을 상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영광도 상실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할 때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라는 것이 인간의 영광이 쭉 뻗어서 하나님과 맞닿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그 영광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에 ‘fall short of’라고 나옵니다. 그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원래 인간의 지위는 아주 영광스럽고 아름다운데 그 지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타락의 결과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시면서 결국 하나님의 재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다시 부여하고 이런 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할 때 물 같은 성령, 혹은 바람 같은 성령이라는 의미도 되고 우리를 정결케 쇄신 시킨다고 하는 의미도 됩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이 재창조가 성령의 주도적인 사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영혼의 창조와 재창조 이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교회를 창조하심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을 설명해 봅시다.(150~152)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중생을 통해서 교회에 접붙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믿는 무리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맨 처음에 어떤 식으로 이 교회가 이루어졌는지 보십시오. 교회를 멀리 보면 구약까지 내려갈 수가 있고 좀 더 가깝게 보면 예수님 오신 때로 내려갈 수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신약의 교회는 오순절 성령이 오심으로 성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때에 예수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아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도 모르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오심으로서 그들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면서 교회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생을 통해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짐으로서 이 사람들도 생명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접붙이면 원가지의 생명의 힘으로 그 가지가 접붙여져 자라듯이 마찬가지로 접붙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교회가 맨 처음 성령이 오심으로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인 교회에 접붙여져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는 것도 당연히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이 창조 될 때 인간의 창조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두 번째 중생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립되는 것도 성령 안에서 성립되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불완전한 교회는 두 가지를 누림으로써 점점 더 온전해져 갑니다.
1) 첫째는 용서입니다.
① 교회 안에 용서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53)
용서에 의해서 불완전한 교회가 완전해져 가는데 우리 몸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젊었을 때는 건강하고 복원력이 뛰어납니다. 여러분들 그렇게 안 보시겠지만 제가 야구랑 축구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야구 같은 경우에 공휴일 같은 때 해가 뜨면 나가서 저녁때까지 야구를 하고 놉니다. 어두워서 공이 안 보일 때까지 놉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끙끙 앓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이면 거뜬하게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리고 젊으니까 신체적인 복원력이 뛰어난 것입니다. 상처가 나도 금방 낫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불완전해지기 때문에 조금만 일을 많이 하면 힘들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완전해서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교회도 인간이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보 같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한 교회를 찾는데 스펄젼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그런 교회는 세상에 없는데 혹시 그런 교회를 찾거든 당신은 절대로 거기에 가지 마라” “왜요?” “당신이 가는 순간 불완전해 지니까 당신은 절대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본을 보이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을 못 보인 사람들이 원래 못 된 사람일수도 있지만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요즘 상태가 안 좋습니다. 그러면 옛날 성질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또 돌아서면 후회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전도를 받고 교회를 가다가 차선 때문에 사고가 날 뻔해서 길거리에서 대판 싸웠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교회에 들어갔더니 조금 전에 길거리에서 대판 싸우던 사람이 나와서 설교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기독교를 완전히 끊고 다른 종교로 갔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그럴 수는 있겠지만 교회의 믿음의 본을 보여야 된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자기도 어떤 때는 못하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하고 어떤 때는 못 하고 아니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해결하는 방법이 교회 안에서 덧나지 않게 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는 무조건 죄를 옹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손해를 준 사람을 마음속에서 풀어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럴 권한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에 대해서 당신이 직접 심판하시지만 손해 본 사람이 어느 정도 거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위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을 자기가 나타나서 저 사람을 용서해주고 그럴 권한은 없습니다. 자기가 손해의 당사자일 때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용서가 필요한 이유가 뭡니까? 봅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상태가 변합니다. 그래서 깨집니다. 미끄러져 버립니다. 그러면 무슨 일은 못 하겠습니까? 신자가 미끄러지면 뭐든지 합니다. 여러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두 달 동안 불신 남편한테 잘 하다가 한 번에 바겐세일로 엎어버리잖습니까? 그러다가 또 한 3개월 속죄하고 회개하고 그런 일들이 우리들의 일입니다. 상태가 안 좋으면 이런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② 신자가 다른 지체들을 용서하는 두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154~156)
첫째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왜? 자기도 언젠가는 변질되었다가 벼락 치는 것처럼 열을 받아서 벌렁 나가 자빠져서 은혜에서 미끄러졌는데 하나님이 용서해주셔서 십자가의 피로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받은 죄인인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도 도달할 수 있는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아픔을 보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이렇게 상태가 나쁜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교회를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그들이 명백하게 성경에 어긋나는 죄를 지었을 때에는 치리라는 방법을 통해서 그들을 징계하지만 그것은 죄를 미워하라는 것이지 그 사람을 미워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 사람이 교회가 계속 아플 것이기 때문에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사랑은 자신이 시발역이 되게 하고 미움은 자신이 종착역이 되게 하라.’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랑을 자신이 시동을 건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사랑을 주십니다. 지체들을 통해서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시발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움은 여기에서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퍼붓고 또 다른 사람에게 퍼부으면 처음에는 아주 작은 상처가 덧나서 결국은 팔을 잘라내든지 하는 일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상이 대단한 것입니까? 우리들이 클 때 모두 걸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조금 정도가 심하면 발가락을 잘라내야 합니다. 썩어 들어가서 발가락 다섯 개도 자르고 심하면 발목까지 자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두 가지 하나님의 용서를 먼저 경험했기 때문에, 또 교회의 아픔을 보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③ 진정한 용서란 무엇입니까?(156)
‘용서’란 말은 ‘容恕(용서)’ 이렇게 씁니다. ‘容(용)’은 한자에서 ‘용납한다’는 뜻이고 ‘恕(서)’는 ‘죄를 묻지 않는다’, ‘사죄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풀어준다.’ 하해와 같은 은혜로 나를 용서해 달라고 할 때 용서해 달라고 빕니다.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해 꾸짖거나 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경적인 의미는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랑의 교제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단까지를 포함합니다. 교회에서 그런 교제가 금지된 경우에는 예외이지만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용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우리가 다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다시 시작되게 하신 것입니다. 자,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체들을 사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바울이 옛날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는 핍박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긍휼을 입은 것은 네기 믿지 아니할 때에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 은혜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다’고 개인적인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를 합니다. 진심으로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회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우리를 대하십니까? 3주 전에 제가 설교 했듯이 토끼와 어떤 신사와의 예화를 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와 함께 하는 죄 때문에 우리에게 당신의 친근함을 보여주시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근함을 보이신다면 우리에 대한 교육이 잘 안 되겠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예를 들면 자녀에게 때리거나 하지는 않지만 자녀가 뭔가를 잘못했을 때는 엄마 아빠가 아이에게 냉정하게 대합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는 야단치지 않아도 자신과 엄마아빠와의 관계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반성하게 되는 그런 이치입니다.
④ 용서가 복된 이유를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해 봅시다.(159~161)
신자에게는 두 가지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첫 째는 신분의 자유입니다. 예전에는 죄의 종 된 신분이었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신분이 변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것은 영혼의 자유라고도 하지만 상태의 자유라고 합니다. 영혼에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영혼이 사슬에 묶여있었습니다. 개가 사슬에 묶여있으면 사슬의 범위 안에서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멀리 뛰쳐나가려고 하면 줄이 자기를 잡아채는 것처럼 인간은 여전히 이런 줄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줄 범위 안에서 행동하는 것은 자유롭지만 그런 제약을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날아간다든지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추구하려고 할 때에는 우리의 영혼을 얽어매고 있는 죄의 사슬이 우리를 잡아채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훨씬 더 강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끌러주셔서 하나님이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외워야 되는 것입니다. 신분의 자유와 상태의 자유. 신분의 자유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승격된 것이고 상태의 자유는 얽매였던 영혼이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는데 서로 미워합니다. 요즘 가장 힘든 것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다른 사람 욕을 아주 험악하게 할 때 굉장히 힘듭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당신 그 따위로 하면 안 된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미움의 문제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이런 계명 저런 계명도 지키면서 삽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한 용서를 주셔서 살게 하시는 것이 결국은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며 사는 사회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모델케이스를 교회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삶은 그것이 교회 안에서든지 교회 바깥에서든지 불신자든지 신자든지 마찬가지로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건설하시는 사회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뭔가 불의와의 갈등이 있고 빛이 진짜로 비취기 위해서는 어둠과의 싸움이 있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런 이유가 없이 개인적인 원한이나 이익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옛사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먼저 시작하신 용서이고 용서를 통해서 사랑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면 우리는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으면 우리도 없습니다. 이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를 해 줍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하고도 잘 모릅니다. 어거스틴은 용서를 이야기할 때 ‘누군가를 용서하면 최고의 혜택을 받는 수혜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게판을 칩니다. 그리고 고통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해 줍니다. 그러면 용서를 해 준 사람이 자유를 누립니다. 물론 서로가 용서를 하면 책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를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 그 사랑의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교회가 구현하면서 사랑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2) 둘째는 사랑입니다.
① 교회의 참된 기초가 사랑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162~163)
② 신자가 누리는 사랑은 마지막 그 날에 완성될 세계가 어떠한 것임을 보여줍니까?(162)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자신도 계속 변합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교회에 계속 둘러 싸여있습니다. 우리 교회나 다른 교회도 마찬가지로 교회의 잘못 된 것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자신의 몸에 그런 상처가 있다고 하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찌게 집에서 밥을 먹다가 순식간에 아주 조금 데었습니다. 그런데 3일 동안 엄청 불편했습니다. 약도 바르고 했는데 신경이 많이 쓰이고 쓰라리고 따가웠습니다. 우리는 치료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런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했더니 어느 신학자가 아주 훌륭한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나 자신에 대하여 그렇게 행하고 산다.” 는 명답을 했습니다.
결국은 영화의 마지막 날에 교회가 완성이 됩니다. 그러면 인간도 완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이 불완전한 교회의 모습을 끌어안고 아파하고 자신이 헌신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 중심을 모두 헤아려서 그가 한 모든 섬김과 희생이 당신을 향해 바쳐진 것이라고 생각하시면서 그에게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결국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거기에서 모든 염증과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가 ‘나는 그런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그런 완전에 도달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말한다고 장담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며 그렇게 애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