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1장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잠26:14)
녹취자 : 강정아
게으름의 정체는 싫증입니다. 돌쩌귀는 우리말에서 적합한 말을 찾기 힘들지만 영어로는 hinge입니다. 문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위, 아래에서 잡아주는 것입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돌때에 문짝을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떠나면 땅바닥에 떨어져버리기 때문에 위, 아래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어서 돌쩌귀를 따라서 돌게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문짝이 돌쩌귀를 다라서 도는 것처럼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못 일어나고 이래저래 계속해서 돈다는 것입니다.
1번.
성경이 게으름을 혐오해야 하는 악으로 보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게으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성경이 게으름을 심각하게 보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사고방식은 예전하고 훨씬 다릅니다. 이 책이 나오고 나서 제가 책 한권을 데이비드 웰즈박사에게 보냈습니다. 몇 번 같이 만나서 대화를 한 적이 있어서 보내드렸는데 제가 받은 두 통의 편지 중 한통에 이렇게 쓰여 져 있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몇 달 전부터 담임목사님이 잠언의 말씀을 설교하고 있는데 이 책을 받으니 너무 반갑숩니다. 제가 막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이 없습니다.”
2004년도에 이 책이 나왔을 때의 사회랑 14년이 지난 지금의 사회랑은 전혀 다른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만약 누가 이런 식의 책을 쓴다고 하면 굉장히 가학적인 책이라고 평가받을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의 정신이 wellbeing, 편히 쉬기, yolo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니 즐기자는 등의 목표를 설정하는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달려가는 인생 자체를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런 내용들이 현대인들에게는 굉장히 낯설게 느껴질 수 있고 14년 전에 이 책이 나왔으니 베스트셀러가 됐지 지금 태어났으면 묻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편견 없이 성경을 읽는다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 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게으른 삶을 칭찬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종종 휴식을 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목표가 있는 휴식입니다. 가다가 신발 끈을 매기 위해서 쉬는 것은 갈 길을 다가기 위해서 신발 끈을 매는 것이지 신발 끈을 풀기 위해서 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성경은 게으름을 악으로 봅니다. 그리고 가장 회개하지 않는 죄가 아마 게으름일거라고 생각합니다. 게으른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우리 성도의 부주의와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사랑을 받으면서 이 게으름이 뭉게뭉게 우리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오신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첫째는 생명을 얻게 하고 둘째는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이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생명을 주는 것이 구원이라면 풍성히 얻게 하는 것은 구원과 함께 그 위에서 주님이 주신 모든 자원과 복들을 충만히 누리면서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잠언 6장 17절에 게으름의 가장 큰 유혹 중하나가 잠입니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잠을 많이 자는 성도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잠을 좀 자는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제가 아프기 전까지는 이 문제에 대해 단호했습니다. 6시가 이상 자는 것은 죄다! 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모든 영적인 사람들은 부지런했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제가 아프고 보니까 잠에 대해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게으름 책 속에서도 수면의 문제를 아주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사실은 수면에 관한 기독교적인 삶의 지침을 이해하게 하려 고 했습니다.
몸이 아프면 쉬어야 됩니다. 그것은 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체질적으로 일정한 수면을 취해주지 않으면 건강에 심각하게 위협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장 하나를 떼어버렸다든가, 수술의 전력이 있다든가, 의학적으로 갑상선이나 여성 호르몬 계통에 교란이 왔을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그런 경우는 물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수면을 줄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정상인 사람에게 수면은 계속 더 많이 자고 싶어 하는 유혹을 느끼게 합니다. 특히 젊었을 때에는 드러눕기만 해도 잠이 쏟아집니다. 반면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지는데 멜라토닌이 분비가 안돼서, 생체적으로 잠이 잘 안 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뒤로 잠이 많은 사람이었던 저는 젊었을 때는 잠을 많이 자는 것 때문에 수면의 방탕에 대해서 가책을 느꼈지만 지금 와서는 더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다. 영원한 딜레마입니다. 결국 주님 의지하면서 살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아주 예외적인 사람이 아니면 자지가 하고 있는 사회에서 뭔가 자기의 뜻을 성취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수면에 방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부지런한 모든 사람들이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부지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이 정상인 상태에서 끊임없이 편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더 자자 더 졸자 더 누워있자 이렇게 하는 것이 삶의 의욕이 없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순응할 때 점점 무기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게으름의 요소 중에서 잠을 얘기했지만 결국은 인간에게는 모두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되는 욕망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사실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하고 싶은 욕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욕망들은 모든 인간에게 다 있습니다. 문제는 참된 신자는 그런 욕망이 일어날 대 거기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항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표가 됩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편하게 살고자 하는 것 자체가 세속적인 사랑입니다. 이런 것들을 경계하지 않으려고 하는 정서,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좇지 않으려는 생각. 지정의. 이렇게 게으름은 전인적인 것입니다.
사실 젊어서는 저 자신의 삶에 대해 인색했던 것 같습니다. 젊어서는 돈쓰는 것도 잘 몰랐고 좋은 곳에 놀러가고 쉬고 하는 것들에 대한 욕망도 거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푹 쉬어야 된다는 개념 자체를 갖기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고 보니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젊은 목사님들이나 직원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물불 안 가리고 자신을 쏟아 부어서 미친 듯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유효기간이 3년에서 5년이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 난 다음에는 육체와 마음이 휴식이 필요합니다. 영혼에도 휴식이 필요하고 마음에도 휴식이 필요하고, 육체에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이 경계는 누가 쉽게 정해줄 수 없습니다. 이 경계가 쉼을 위한 자연스런 요구와 태만해지려고 하는 인간의 방탕 사이를 아주 모호한 경계선이 그려져 있어서 사람들이 넘나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깨어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2번.
우리들이 부지런해진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활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일주일에 5일 정도를 우리의 직업에 헌신하면서 삽니다. 만약에 이것이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라고 한다면 돈을 벌면 됩니다.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회 활동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돈을 버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이 성공적으로 사회활동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업을 통해 자기를 완성해 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이런 목적들을 함께 이루어가야 합니다.
영국에서 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위장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한 의원이 있었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출근하는 시간이면 늘 열심히, 노래를 부르며 청소를 하고 있는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의원이 하루는 차를 세우고 물어봤습니다. “나는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지만 그렇게 행복하지 않은데 당신은 청소나 하면서 뭐가 그렇게 행복합니까?” 의원의 이 말에 그 나이든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청소부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한 모퉁이를 정화하고 있는 중입니다.”
쉼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행복할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 인생의 의미를 어떻게 설정하고 사느냐. 그런 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한다면 돈을 많이 발고나면 인생이 허무해지지 않을까요? 신자는 이렇게 한 편으로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한 편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고 한 편으로는 그 교회와 함께 교회의 일원으로서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자기 자신이 부여한 게 아니라 주님 앞에서 받은 의미이기 때문에 결국 그 의미를 어떻게 구현해가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요? 어떻게 하든지 그 의미를 구현해 가는데 있어서 그 일에 임하는 태도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게으름이 미덕이 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번.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도 도느니라. 문이 아무리 부지런히 움직여도 항상 hinge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게으른 사람은 어떤 일을 반복해서 한다고 할지라도 그 일에 발전은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계속 게으른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모든 좋은 것을 미래로 미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내가 게으름을 부리며 살지만 오늘은 내가 경건생활을 못했지만 내일 해야지~이런 생각을 가지면서 오늘의 게으름을 미래에 부지런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하루하루를 넘기는데 문제는 항상 내일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은 내일은 경건하게 살아야지가 아니라 내일도 경건하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이런 결심을 하는 것은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결심이 계속 반복되고 실행되지 않을 때 반드시 우리에게 예전보다도 더 심각한 무기력을 가져다줍니다. 이고리들을 끊어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국립 발레단의 단장을 지내셨던 강수진 발레리나는 독일에서 수석 발레리나가 되고 한국에 초청을 받고 와서 국립 발레단을 지휘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발을 보면 정상인의 발이라고 할 수 없게 생겼는데 이것은 수없는 연습 속에서 발이 다 뒤틀어진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25세에 은퇴할 때 그의 뼈의 나이가 40세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연습 속에서 자기를 훈련했으면 이렇게 되었을까요?
4번.
게으름의 정신은 삶 전체에 스며듭니다. 그렇게 될 때 혹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이 없거나 매우 적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표에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라는 확고한 목표가 주어지면 그것이 이면적인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이 그것을 위해 재편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전 것을 다 버리고’ 라는 찬송은 정말 예전의 것을 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일을 하고 살아가고 돈을 벌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옛날의 목표와 지금의 목표가 달라졌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의 질서를 재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삶을 재편하는 것도 결국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게으름에 대한 혐오심이 없는 사람들은 게으르지만 게으름에 대한 혐오심이 있는 사람들은 부지런합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되기 위해서 인간이 태어났으니 되고 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무엇인가를 위해서 헌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5번.
돌쩌귀를 따라서 문이 돌고 문은 계속 움직이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이 계속 무언가를 하지만 게으름이라고 하는 돌쩌귀에 묶여 있는데 그 정체는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에 묶여 있어서 무엇을 하든지 자기 사랑을 중심축으로 삶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목표가 없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이것은 자기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알게 된 그리스도인은 똑같이 살아가지만 자기애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받기 이전에 가졌던 삶의 목표와 그 이후의 삶의 목표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게으르다는 것은 이전에 가졌던 자기사랑이라는 중심축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바쁘게 움직이지만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중심에 이 사람을 움직이고 있는 삶의 원리는 결국 자기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애입니다.
우리가 너무 바쁘게 살고 지치면 쉴 수도 있고 입원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조용히 침대에 누워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목표일수는 없는 것입니다. 쉬는 것이 목표라든지 자신이 즐거운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쉬고 또 그렇게 무엇인가를 보충하고 하는 것은 뭔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죠. 이렇게 새로운 목표를 세워서 찾아가려고 하는 열렬함과 열심히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결국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그 안에서 내가 행복을 찾을 것인가, 이런 질문하고 같이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종일토록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의 목표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밤늦도록까지 움직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의 목표에 매달려 있습니다. 모두 자기 사랑입니다. 이럴 경우 굉장히 바쁘지만 무엇을 위해 바쁜가라는 질문을 놓고 보면 사실은 너무나 바쁘지만 게으른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으나 아무 일도 안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 같으나 많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는 경건생활 즉,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 기도회, 여러 섬김,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실행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이 없이 이런 일들을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하고, 얼마나 힘든지 때로 부상을 입은 사람처럼 힘겨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서 이것을 하는가? 질문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많은 섬김을 하면서도 마음이 허해지는 것을 느낀다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성실함과 부지런함이 필요하지만 거룩한 목표에 대한 삶의 재편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하나님을 향해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 게으름은 자신의 영혼을 망가뜨려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뜨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왜 굳이 영적인 게으름으로 묘사했냐하면 이것은 자신의 영혼의 게으름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자기 직업에는 부지런하지만 신령한 목표를 위한 부지런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한테 그릇된 모본을 보이게 됩니다. 부모님이 굉장히 부지런하게 살면서도 치열하게 영적생활을 해나가는걸 보면 아이들이 그때는 투덜거리지만 언제나 부모님의 모본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게으름을 꾸짖고 부끄러워하게 되는 기준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며 살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훨씬 더 부지런해졌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유익을 끼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것입니다. 삶의 외면적인 형식을 떠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며 새로워져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