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팔복 산에 오르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5;1-2)
녹취자: 허혜숙
성도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날씨가 엄청 추워졌습니다. 건강에 꼭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부터 팔복에 관해서 공부할 텐데 팔복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너무나 많이 들어봤기 때문에 진부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이 팔복이 가지고 있는지 또 그것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은 그리 쉽게 경험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깊이 있는 팔복을 오늘부터 공부해보겠습니다.
(영상)
성도 1 : 제 삶을 이끌어주시는 말씀은 잠엄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입니다. 때때로 두려운 마음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고 말하면서 마음 한 편에는 나를 위한 길이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따라 순종하고 싶지만 막상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그것만은 안 하고 싶다고 하기도 하며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기로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고 정한 나의 계획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계획이 되길 바라며 혹 내가 세운 그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나에게 나빠 보이는 일도 지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 보이는 일들이라면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나빠 보이는 일들 가운데서 저도 주와 함께 기뻐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저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은 하나님이 나를 위한 틀림없는 사랑의 길임을 흔들림 없이 붙들고 싶습니다.
네, 영상을 시청해 보셨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팔복을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가 이 팔복이 산상수훈 속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수훈이라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길이 남을만한 교훈이라는 뜻이고 산상이라는 것은 산에서 그런 교훈을 주셨다 이렇게 우리가 일컫는 것입니다.
팔복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산상수훈인데 산상수훈 중에서 맨 앞부분에 나오는 일부분을 가리켜서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우선 팔복이 산상수훈의 맨 앞머리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산상수훈 중 팔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복이 있도다’이렇게 시작이 되는데 그 복의 조건이 ‘무엇을 하면,’ 또 ‘어떤 일을 성취하면’ 이런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인격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이 팔복은 다이아몬드 같은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를 깨끗하게 깎습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가격이 나가는지 보려면 3C라고 하는데 ‘clear’얼마나 투명한지, ‘cut’ 얼마나 정확하게 깎았는지, 세 번째는 ‘carrot’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에 의해서 다아아몬드의 가격이 결정된다고 하는데 최근 소도비 경매장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엄지 손가락보다 한 배반 정도 되는 두툼한 것이 나왔는데 236억 정도 된다고 하는데 얼마나 비싼 보석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하나인데 그 하나의 다이아몬드를 여덟 면으로 깎았다고 치고 이렇게 돌리면서 한 면씩 보여준 것이 팔복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팔복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격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좀 더 포괄적으로 보면 ‘사람 됨,’ 그 사람 됨됨이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 산상수훈을 어떻게 보느냐에 크게 네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이것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는데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 그 자체가 그 면에 있어서는 율법의 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 율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이것이 도저히 이 지상에서는 인간이 성취할 수 없는 종류의 표본이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지 못한 인간을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그 끝에까지는 못 간다고 할지라도 그만큼 그 방향으로 가게끔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없이는 내가 결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알려주는 일종의 프로그램적인 이상으로서 제시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두 번째 견해입니다. 세 번째 견해는 이것들이 항상 있는 기준이 아니라 종말이 이제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곧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승천하실 텐데 그때 부터가 말세입니다. 종말에 통용될 수 있는 한시적인 윤리적 기준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견해가 결국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윤리적인 이상인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율법적인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그 가까이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크게 네 가지 견해로 나뉘는데 제가 보기에는 네 번째 견해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가장 합당한 견해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되어있지만 원래 그리스어 성경에는 이러이러한 자의 행복이여 이렇게 됩니다. ‘복이 있도다’ 혹은 ‘이러이러한 사람의 행복이여’ 이렇게 됩니다. 어떠한 사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행복이여’, 혹은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행복이여. 왜냐하면 천국이 너희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식으로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행복의 조건으로 꼽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평안과 물질적인 번영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의 사람들을 표본으로 조사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관이 독특하다고 평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 가족보다 물질적인 소유가 훨씬 앞선 보기 드문 나라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지는 사회과학적으로 여러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성숙하지 않은 물질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우리나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어떻게 보면 경제적으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불편하고 불평등한 나라라고 하는 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그런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할 때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를 들자면 결국은 행복의 조건을 소유로 보느냐 혹은 존재로 보느냐 무엇인가를 많이 소유함으로써 행복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물질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진정한 행복은 존재에 있다, 즉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훨씬 더 인간의 사람됨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은 무엇을 소유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일을 행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이 되는 것에 있다, 그런데 이 되는 것과 갖는 것, 행하는 것이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면 그 사람이 무엇을 갖고 싶은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돈, 명예, 부 이런 것들을 계속 갖고 싶은 사람들은 그 사람이 성품 자체가 굉장히 물질적이고 번영 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친구, 추억,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이렇다면 이 사람은 중요한 가치가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 사람이 갖고 싶은 것이 지식, 경험 등등의 것이라면 이 사람은 지식 추구, 지식지향 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이치에 의해서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할 때 그 하는 일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느 것이 지배가치를 가지고 있느냐? 그 사람에 있어서 어떤 것이 우월한 가치를 제공하느냐에 의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천국과 천국 백성의 삶을 말씀하시면서 제일 먼저 팔복의 사람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팔복을 탐구해보면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왜 행복하지 않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세기에 기독교 역사에 오르게니스라는 교부가 있었습니다. 굉장히 위대한 교부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독교 교리가 지금처럼 잘 확립되어 있지 않았었고 이제 막 교리가 서는 상황이었는데 이 사람은 굉장히 그리스 철학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삼위’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굉장히 힘들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철학에서는 결국은 그런 어떤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힘으로서의 개념이 일자 하나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로마 시대에는 기독교가 가장 고통을 받았던 것 중 하나가 다신교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잘 못 설명했다가는 삼신 론에 빠지게 될 것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부 하나님이 제일 위고 그 밑에 성자가 종속되고 그 밑에가 성령이라는 식으로 엄격하게 말하면 진정한 신은 성부 하나뿐이라는 식으로 설명을 해서 기독교의 유명한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삼위일체 종속설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런 어떤 신학적인 중대한 오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런데 삼위일체의 이런 관계 같은 것들은 후에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칼캐돈 같은 공의회들을 거치면서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시대적으로 너무 앞선 시대에, 아직 아무것도 확립되지 않은 시대에 경솔하게 삼위일체에 대해서 자기 이론을 세운 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순교자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도 순교했고 아버지가 순교할 때 박수를 쳤다고 하니까 굉장한 사람이었고 순교할 결심을 하는데 어머니가 말립니다. 그런데 여섯 명의 아우들을 돌보면서 살게 되는데 천재였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교리학교 교장이 되고 재미있는 것은 그 시대에 오르게니스가 쓴 책이 2천 권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중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계산을 해 보니까 4~5일에 한 권씩 써야 되는 분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 하면 당시에 아주 돈이 많은 갑부 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라는 사람인데 이분의 이 천재성과 하나님을 향한 순수성을 알아보고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글 쓰는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워낙 돈이 많았으니까 자신의 재산을 기울여서 배려를 해서 이 학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많은 글을 써서 혼란스러운 기독교를 정돈하는 일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적으로 엄청난 기독교의 토대를 놓게 되는 그런 일들이 오르게니스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참 놀랍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메세나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르게니스는 누가복음 설교에서 이것을 아주 인상 깊게 내놓습니다. 그것은 이 팔복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생각할 때 이런 것이 이상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이 내면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특이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것을 아주 놀랍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은 이런 사람이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에 아주 적합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 백성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이미 도달한 인격적인 상태, 사람 됨됨이의 여덟 가지 국면을 팔복으로 선포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은 이 팔복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은 항상 심령이 가난하셨으며, 애통하셨으며, 온유하셨으며, 의에 주리고 목말랐으며, 청결했으며 등등 이렇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 팔복의 사람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더 할 이야기가 많은데 이 정도면 팔복에 대한 서론으로는 우리 수준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자, 예수님이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어마어마하게 높은 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이 과장이 심합니다. 밭을 광야라고 하고 호수를 바다라고 하고 언덕을 산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성지순례 갔을 때 우리들이 “요단강으로 가겠습니다.” 하고 잠깐 쉬고 있는데 요단강으로 안 갑니다. 그래서 “요단강이 어딨어요?” 했더니 “바로 앞에 있잖아요.” 과장을 하면 제가 멀리서 막 뛰면 한 번에 건널 수 있을 정도의 4~5m 정도 되는 아주 작은 개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실개천인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강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어쨌든 언덕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감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앞 4장에 보면 병자를 고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고침 받은 병자들 중 어떤 사람은 돌아갔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예수님을 따랐는데 아마 영혼의 문제 때문에 따랐을 것이라고 우리가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결국은 인간이 질병에 걸려서 주님의 권능으로 나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모든 고통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고통은 계속 되는데 그 고통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다. 그러면 그 원인은 죄다, 그래서 그렇게 깨어짐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왔느냐? 결국 자원의 결핍이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무슨 자원? 우리가 흙에서 우리의 몸, 육체가 창조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직접 영혼을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가 결합됨으로써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육체를 위해서는 지상의 자원이 필요하고 영혼을 위해서는 천상의 자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고방식이 너무 물질중심적이니까 사실 영혼이라는 존재 자체도 사실은 인정을 안 하려고 하니까 영혼에 필요한 자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자원만을 가지고 행복의 전부가 달린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팔복의 첫 번째 선언에서 못을 박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시면서 인간의 심령을 끌고 오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결국은 생명의 문제로 돌아가면 결국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되고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좋은 상태에 있는 것이고 좋은 상태라고 하는 것은 육체도 원래 만들어진 목적대로 작용을 하고 영혼도 원래 만들어진 목적대로 작용을 잘 하는 것이 상태가 좋은 것입니다. ‘이 차 어때요?’ ‘네 상태가 매우 좋습니다. 중고지만 상태가 매우 좋아요. 그런데 시동은 안 걸립니다.’ 말이 안 되잖아요? 좋은 상태라고 하는 것은 자동차의 목적인 어디론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그런 것, 그리고 운전자의 의도대로 통제가 되는 것 그런 것이 좋은 차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만족’이라는 요소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만족을 해야지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예수님이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서 진리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셨고 성경을 사랑하고 배우셨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타고 나신 것과 후천적으로 습득하신 것이 함께 결합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인격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단다, 내가 꼭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니?’ 이런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단다. 그런데 사실 내가 매일 애통하지는 않아. 그래도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니?’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람됨의 경험을 인격적으로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건 대답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분명히 심령이 가난할 때도 있었고 혹은 지금 그럴 수도 있기 때문에 나도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차이점은 예수님은 시종일관 항상 그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만큼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팔복 됨과 우리의 팔복 됨 사이에는 격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요약을 하자면 예수님은 직접적인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지만 우리는 진리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경을 사랑하고 배운 것처럼 우리도 배운다, 그러면 우리도 그런 사람됨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만큼 예수님처럼 항상 그런 사람됨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와 예수의 가난함은 동격이라고 얘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자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말씀으로 구원 받은 것처럼 진리로 참된 행복에 이릅니다. 팔복의 세계에 눈을 뜨십시오. 말씀에 은혜를 받으십시오. 행복이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깊이 읽는 팔복’이라고 나왔는데 이번에 생명의 말씀 사에서 ‘깊이 읽는 여덟 가지 복’이라고 지었습니다.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동일하게 진리의 말씀으로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참된 행복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위대한 서막이 행복에 대한 견해 차이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팔복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진정한 행복에 대한 관점이 성경과 일치하는 지를 점검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혹시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분 중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나신 분이 있으시죠? 어느 날 의사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갔는데 의사가 말합니다. 암 말기의 끝에 와 계십니다. 현대 의학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족에게 집에서 편히 모시고 잡수시고 싶은 것 잡숫게 해 드리십시오. 한 달이 채 안 남았습니다. 이런 선언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신 분 있으시죠? 그때 인생에 대한 관점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는 치매이거나 정신병자입니다. 왜? 그 선언을 듣기 전의 세상과 그 선고를 들은 후의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예쁜 옷?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디로 가게 되어있는 화려한 여행스케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달에 타는 엄청나게 큰 액수의 적금 의미 없습니다. 그리고 강남에 사 둔 땅이 두 배가 올랐다더라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형선고를 안 받았으면 그것이 엄청난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것 없이? 죽음의 위협 없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자, 이 정도가 서론입니다. 다음 주부터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문제 들어가기 전에 영상 하나가 더 있습니다.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영상)
성도 2: 어렸을 때 할머니 집에 가면 기도방이라고 있었는데 아주 작은 다용도실을 비우고 방석 하나를 두고 할머니께서 매일 한참을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방에 들어가면 할머니와 하나님께서 비밀을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느꼈는데 할머니의 그 기도방을 생각하면서 내 자신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내 능력과 노력을 의지하면서 내 수준 안에서 순종해야겠다는 마음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 안에서 온전하여지기를 소망하는 마음과 주님께 내 전부를 맡겨드리는 그 마음이 회복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형식적이고 의무적으로 변해가는 말씀 읽기와 기도하는 것도 진실한 마음으로,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문제)
병 고침을 받았던 사람들이 여전히 예수를 따랐던 이유는 무엇입니까?(11)
병들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사람한테는 가장 시급한 문제가 병 고침일 것입니다. 그런데 병 고침을 받았어도 여전히 문제가 남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지 육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왜? 영혼이 육신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더 많은 지혜를 가르쳐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2.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인간에게 행복의 조건은 무엇입니까?(11~12)
인간이 결국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는데 분해라기보다는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각각이, 그리고 전체가 원래 만들어진 목적을 따라 살고 자기가 만족했을 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객관성과 주관성의 사이에 걸쳐있는 것입니다. 객관은 진리, 주관은 내가 만족하며 느끼는 것, 이 두 가지가 함께 결합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보시고’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이며 인간이 겪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13~14)
‘보시고’라는 단어가 ‘이돈’이라고 하는 희랍어입니다. 돌아오라는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그러니까 정신적으로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상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참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으로 오해하고 참 행복을 행복이 아닌 것으로 잘 못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게 되면서 인간은 인생의 방향을 잘 못 설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4. 진리의 말씀이 그리스도에게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15~16)
학자들은 이 산상수훈이 예수님이 그대로 전한 말씀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산에서 굉장히 많은 말씀을 하셨고 그 중의 일부를 간추린 것이 산상수훈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제가 매우 다양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진리를 매우 폭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설교는 하루 종일 이루어진 설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설교였는데 우리처럼 ppt가 있거나 서류가 있거나 심지어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이 두루마리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진리를 당신 자신이 진리일 뿐 아니라 진리를 아주 많이 알고 계셨고 어려서부터 성경을 많이 배우고 익혀서 그것을 체험적으로 소화하고 계셨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매일 배추 파는 사람에게 배추 이야기를 하는데 원고가 필요하겠습니까? 매일 눈을 맞으며 살아가는 에스키모 인들에게 눈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무슨 원고가 필요하겠습니까? 자기가 직접 체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런 원고가 필요하겠습니까?
5. 예수께서 사람들을 산으로 이끄신 이유는 무엇입니까?(17~19)
무엇인가 떠들썩한 장소에서 떠나서 이동하신 것일 것입니다. 진짜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 모아놓고 구별된 장소에서 구별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단순히 장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구별되어야 한다. 그래서 특별히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구별된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야 된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서론이었습니다. 비교적 간결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설명하려고 애를 썼는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강의를 다시 한 번 잘 들어보시고 다음 2과를 꼭 읽고 오셔서 2과에서 은혜를 본격적으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