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심령이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녹취자: 최연희
오늘은 제2장 심령이 가난한 자 사실상 첫 번째 복이죠? 여기서부터 우리 공부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본문을 읽어볼까요? 시작,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이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랬는데 이게 그 그리스어 성경에 ‘마카리오스’라고 나옵니다. ‘마카리호이’라고 나오는데 이건 복수이고 마카리오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근데 이게 이제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 복이 행복을 의미할 때 크게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베라카’라는 복이고 이것은 이제 ‘바라크’, ‘축복하다’라고 하는 그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이것은 아주 넓은 의미의 복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심지어는 감정적이고 물질적인 복까지를 모두 의미합니다. 당연히 이 ‘베라카’는 믿는 사람들만 받는 복이 아니라 불신자도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그래서 그 창세기에 보면 39장이죠,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을 때에 하나님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셨다 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도표를 보시면 이와 대조적으로 ‘에쉐르’라는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좁은 의미의 복입니다. 어떤 의미의 복이냐면 언약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리는 신령하고 영적인 복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 ‘복이 있나니’라고 시작된 이 말씀이 바로 이 에쉐르의 복입니다. 그 진정한 행복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 ‘에쉐르’의 복이 핵심이 되고 그 위에 이제 그 ‘베라카’의 복이 그 ‘에쉐르’의 복을 핵심으로 할 때 그 때 진정한 행복이 되지 않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 그 다음에 이제 보시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해서 ‘심령’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게 이제 ‘프뉴마’입니다. ‘프뉴마’, 이것을 그 원래 그리스어 단어에서는 ‘호흡’, 후 (하고) 숨을 쉬는 것 그 다음에 ‘생기’, 그 다음에 인격의 한 부분으로서의 ‘영’, 또 사람의 생각과 정서 의지를 주관하는 ‘마음의 핵심적인 자리’ 이런 것을 뜻합니다. 영혼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이제 그 마음이 영혼의 기능이잖아요? 그런 기능 중에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원래 ‘프뉴마’가 이제 영혼, 혼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심령이 가난하게 된 것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푸투코스’라는 단어인데 경제적으로 파산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구걸하는 사람 혹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사는 상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제 그 옆에 그림을 보시면 여기 이렇게 그림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집이 쫄딱 망해서 이제 아이들과 같이 피난 가듯이 이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이제 이렇게 다 얼어 죽을 정도가 되었는데 누군가가 와서 도움을 준다고 그러면 그 도움을 받아들이겠어요? 안 받아들이겠어요? 받아들이겠죠? 그런 거지 신세가 된 마음, 심령이 그렇게 된 사람들이 복이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심령의 가난함이란 무엇일까요? 심령의 가난함은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 이외에 아무데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마음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그런 상태인 줄을 잘 모른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게 바로 마음을 쏟는 기도이고 중심을 찢는 기도입니다. 그 간절한 몸부림과 그 안타까움 속에서 부르짖는 그것이 바로 가난한 심령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심령은 당연히 집중된 마음입니다. 가난한 심령은 집중된 마음입니다. 당연히. 왜냐하면 오직 도움이 거기로부터만 온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동굴 속에 갇혔습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이 캄캄합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아주 바늘같은 구멍으로 명주실 같은 빛이 들어옵니다. 그럼 뭐만 보이겠어요? 오직 그것만 보겠죠? 왜 그럴까요? 빛이니까? 아닙니다. 그 빛이 주는 의미 때문입니다. 왜? 바깥 세계가 그것으로(7:57)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암시한다기보다는 명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의미 때문에 그 빛으로 마음과 생각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보여주는 바입니다.
자, 그럼 다시 한번 돌아와서 보면 심령의 가난함은 어떻게 얻어질 수 있나요?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시켜서 하나님과 관련시켜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심령의 가난함은 아닙니다. 왜? 돈이 생기면 다시 부유해질 테니까 말입니다.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비참한 상태를 직시하면서 하나님 말고는 전혀 도움받을 길이 없다고 아주 깊이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오직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 그게 심령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모든 믿음을 가진 마음은 가난한 심령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기심에 모든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하지 않고 자기 바깥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간절히 바라면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마음이 찢어집니다.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 말씀을 꿀송이처럼 빨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 없이 살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심령의 가난함을 가진 사람의 기도는 한나의 기도와 같고 마음을 쏟아놓는 예레미야의 기도와 같습니다. 그때 자신의 온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 앞에 빨려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의 마음이 통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교통을 통하여 예수 죽으심이 내 마음에 경험됨으로써 죄가 죽고 그 부활의 생명이 경험됨으로써 생기를 잃어버리고 마른 뼈 같던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생명인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을 때 선포되는 말씀은 자신 앞에서 흩어지고 기도는 하늘의 보좌에 이르기 전에 공중의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모습은 있지만 그 속에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언젠가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그 목숨을 걸고 매달렸던 때가 있죠? 회심의 때 혹은 그 회심의 경험이 반복되던 때 있잖아요? 그때 어땠습니까? 하나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죠? 그런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은 절대적인 순종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 때에는 하나님 말고는 누구의 그 말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제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말씀하시면서 천국 백성의 특징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시고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주시지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을 통째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심령이 가난한 것이 기초가 될 때 애통하는 사람도 될 수도 있고 온유한 사람도 될 수 있고 그 다음에 의를 위해 핍박받는 사람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심령의 가난함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을 지키며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요즘 느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 쉽게 굳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하루에도 몇 번씩 물처럼 하나님 앞에 쏟아놓아야 한다. 그게 심령의 가난함을 유지하는 길이다. 한 사람이 기도 시간에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매달릴 수 있다면 그는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만 생각하면서 산 사람입니다. 수시로 그 마음을 쏟아 놓았던 사람입니다. 그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어떻게 거지 신세가 된 것 같은, 파산선고 받은 것 같은 그런 마음이 천국을 누릴 수 있을까? 천국을 누린다면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파산선고 받은 것처럼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잖아요? 세속적인 정서에서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슬픔보다 크면 슬픔을 몰아내게 되고 슬픔이 기쁨보다 크게 되면 기쁨을 몰아내고 기쁨이 슬픔보다 크면 슬픔을 몰아냅니다. 그런데 이게 은혜의 세계에서는 두 개가 공존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비참하다는 이유 때문에 아주 슬퍼할 때 그만큼 기쁨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 심령이 가난한 마음이 되었을 때 그때 무엇이 부족한 것 같지만 바로 그 마음에 천국이 충만하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애통하는 마음과 애통하는 슬픔과 그 찬양하는 감사가 신자의 마음에 공존하게 되는 게 은혜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한번 돌아보면 그 눈물을 가장 많이 흘렸던 때가 가장 기쁨이 충만하던 때였습니다. 그 눈물의 이유가 거룩함의 눈물이었기 때문에 그 우는 자의 마음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다시 도표로 돌아가 보면 결국은 이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가난하고 또 사고를 만나고 또 늙어가고 때로는 박해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미래에 누릴 그 하나님의 충만한 그 나라의 통치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결국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충만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때에 가난하고 사고를 당하고 늙어가고 박해를 만나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그 괴로운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느끼면서 그러면서 천국을 바라볼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현재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다음에 가게 될 지옥의 무서움에 대해서 자기가 지옥을 보고 왔다고 간증하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옥은 미래에 경험되는 게 아니라 그걸 보고 두려워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지금 경험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보고 왔다고 하고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간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간증 그런 천국에 관한 그 성경의 증언을 보면서 가슴 뛰며 즐거워하는 사람 마음 안에 이미 천국은 경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제 단 것을 먹는 것을 매우 조심하는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어쨌든 설탕 대신 사카린을 먹으라고 권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쨌든 설탕을 매우 경계합니다. 그런데 저희 어렸을 때만 해도 설탕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단 것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집은 매우 부유한 집이었습니다. 그러던 시절에 엿장수가 이제 울릉도 호박엿을 판에다가 널따랗게 꼭 그 떡처럼 깔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가위소리를 울리면서 이제 동네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럼 뭐 어른들은 일하러 나갔고 오후에 아이들이 골목에서 놀다가 새카맣게 몰려옵니다. 그러면 손도 못 대게 합니다. 더러워지니까 손을 뒷짐을 지고 한 줄로 서게 합니다. 그리고는 정말 그 종이처럼 얇게 잘라서 아주 그냥 조그맣게 뭐 그냥 무슨 콘칩 그 가루처럼 만들어서 하나씩 입에 넣어줍니다. 그럼 그 단 것을 그렇게 먹고 싶어하던 아이들이 그것을 먹고 나면은 세상 모든 것이 다 고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애들이 돈 생기면 우리 사탕 사 먹으러 가자 사탕이 최고의 간식이었습니다. 지금은 애들이 줘도 안 먹는 사탕이. 그러면서 이제 고물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천국을 우리에게 매일 맛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한 주간 동안 살면서 슬픔과 고통이 가득하다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그 천국이 맛보기로 우리의 마음에 경험됩니다. 이렇게 이렇게 행복한 곳이구나. 주님의 사랑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찬양)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질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 주시네
주님을 충만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내가 땅에 있지만 하늘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천국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슬프고 가슴 아프고 눈물 나는 일들이 도처에 있는데 내게 경험되는 천국이 그 슬픔과 아픔을 이기게 만들어 주는 그게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진 적이 있습니까?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몸부림쳐본 적이 있습니까? 가난한 마음으로 주 앞에 기도하겠다고 발버둥 쳐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지금 천국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 우리 오늘 본문 중 하나를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가난한 심령으로 돌아가십시오. 첫사랑의 때처럼,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은혜의 보좌로 나아오십시오. 교만한 마음에 울고, 부요한 심령에 가슴을 치십시오. 그런 사람은 이미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자, 문제에 들어가겠습니다.
1번 참된 행복이 무엇에 달려있습니까? 소유에 있지 않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2번 보기에 해당되는 두 단어를 설명해 봅시다. 베라카는 영적이고 정신적인거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 까지 포괄하며 모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포함합니다. 에쉐르는 영적이고 신령한 복이며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누릴 수 있는 언약적 행복입니다. 이 에쉐르가 그리스어로 쓰여진 것이 바로 마카리오스고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한 그 때의 복입니다.
3번 심령이 가난한 이란 무슨 뜻입니까?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직시해서 아는 것, 하나님 말고 도움받을 길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 불쌍히 여기심에 모든 희망을 거는 것, 자기 바깥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것
4번 가난한 마음과 믿음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가난한 마음이 하나님을 찾을 때 그것은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가난한 마음이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을 때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5번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해봅시다. 미래적 측면이죠. 종말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현재적인 측면은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은혜로운 통치를 지금 세상에 살고 있는 내 속에서 누리는 것,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바로 이런 현재적인 측면의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뿐만 아니라 미래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니 금생과 내세에 유일한 소망이 천국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한주도 천국을 누리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