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부드러운 마음의 유지 2
녹취자: 백지영
1. 주의하지 않는 삶의 태도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을 방해해하는 주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신자가 부드러운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주의해야 할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주의한다’라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 남편이 ‘여보, 물 한잔 줘’ 물을 가지고 오다가 그만 잘못해서 물 잔이 떨어졌습니다. 물론 그 컵이 유리잔이 아니라 그냥 플라스틱 잔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이, 조심 좀 하지 이게 뭐야’ 그러면 여러분은 ‘여보, 정말 미안해’ 그리고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앉아 있는 사람이 황제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은 그냥 가는 겁니다. 한칼에.
그러면 이런 생각 안 해봅니까? “왜 그게 똑같은 행동인데 그런 어마어마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올까?” 지위가 높을수록 더 주의 깊음을 요구하는 것이고 주의 깊지 않은 것은 존경심이 없는 것이고 공경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친구가 달라고 하면 휙 건네주어도 선생님이 달라고 하면 요렇게 갖다 주고, 더 높은 사람이 오면, 높은 사람이 옛날 조선시대에 누구였습니까? 임금 그 다음에 스승, 아버지입니다. 군사부일체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구약에서 제사지낼 때 왜 그렇게 율법을 까다롭게 해 놓았을까?”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의미도 있는데,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해 주의 깊게 하기 위해서 까다롭게 만드셨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공경심을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여염집에서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먹고 싶으면 먹고 구르고 싶으면 구르고 삽니다. 왕가는 어떨까요? 뭐가 그렇게 법도가 많습니까? 보통 사람은 숨 막혀서 못살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일본에 왕비가 된 그 여자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국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자매인데. 그런 것입니다. 주의 깊음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주의해야 될 세 가지로 죄, 염려와 세상사랑, 위선 이렇게 네 가지를 꼽은 것입니다. 사실상 염려와 세상사랑은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 염려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뭘 염려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러한 염려, 위선 이런 세 가지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주의 깊음, carefulness 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 매우 조심하고 완전하려는 마음가짐입니다. 그게 공경심의 아주 중요한 표현입니다. 두 번째, 마음의 작은 움직임이 더 커다랗게 발전하기 때문에 그게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보기 위해서는 목표 자체가 완전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음식점 같은 데를 보면 명가(名家)라는 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맛 집 정도가 아니라 거의 완벽한 수준에 도달한 그런 집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예약하고 6개월씩 기다려야 되는 식당이 있다고 합니다. 가본 적은 없습니다만. 그런데 엄청난 말하자면 자신들의 그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 한잔, 소금 하나, 간장 하나도 다 스토리가 있을 정도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집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작은 것에 대해서 깊이 주의하면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삶을 우리들이 살아낼 수는 없지만 살고자 하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지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그 근처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총을 쏠 때 못 맞춰도 과녁을 중앙에 쏘려고 하면서 쏴야지 근처라도 가지 먼 산보고 쏘면 그게 맞겠습니까? 그래서 주의 깊게 살펴야 될 영역이 죄, 세상 사랑과 염려, 위선입니다.
2. 죄가 우리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입니까?
죄가 우리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강퍅한 마음은 세상을 향해 한없이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강퍅해 지는 것입니다. 리차드 십스의 설명입니다. 17세기의 청교도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향해 딱딱해진 마음은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서는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반죽처럼 되어서. 그래서 부드러운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양심을 무디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영적인 생명을 끊어버립니다. 죄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 다음에 영적 생활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충분히 기도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만들고, 말씀의 은혜 없이 살아도 살 수 있게 만들고, 그게 죄가 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니까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갈급한 게 뭔지 잘 모릅니다. 곤고할 수는 있습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어서 도저히 되는 일이 없고 죽을 것처럼 괴로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갈급한 것은 다릅니다. 갈급한 것은 그러면서도 간절히 하나님 앞에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변화 받을 때쯤 되면 갈급한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평안하게 살다가 숨을 조이는 것처럼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고통을 느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영성이란 거룩함을 추구하는 신자들이 획득한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을 일컫습니다. 영성 깊은 신자가 죄를 다루는 특징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두려움과 주의 깊음입니다. 절대로 죄를 만만하게 보지 않습니다. 절대로 만만하게 보지 않습니다. 만리장성 이야기도 나오지만 여진족을 침공을 막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실제로 4천키로 입니다. 미쳤지요. 그 성벽을 넘어 들어와서 중국을 망하게 한 게 아니라, 안에서 다섯 번인가 망합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삶이라는 것도 똑같습니다. 강대국이 망하는 것을 보면 결국은 내부로부터 망하기 시작합니다. 로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도 외부에서 쳐들어와서 무너지기 전에 속에서 이미 다 망가지고 나중에 결과적으로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겠습니다. 영성이라는 말 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영성이라는 말을 구지 쓴다면 거룩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얻게 된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몇 가지 요구가 있는데, 오늘날은 이 spirituality라는 말을 영적인 모든 것, 무당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아우릅니다. 그런데 원래 말하자면 거룩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게 된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주시느냐 하면 끊임없는 성화의 분투를 통해서 특성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특성을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서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영성입니다.
신자가 죄를 다루는 두 가지가 있는데 두려움과 주의 깊음입니다. 절대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깔보지 마십시오. 깔보지 말고, 이건 나와 전혀 상관없다 자만하지 말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입니다. 첫째는 죄의 커다란 영향력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지만,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목회자 인턴 십에 들어온 학생이었는데 전도사님이었습니다. 한 학기를 공부를 마치고 소감을 이야기하는데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자기는 전도사지만 부끄러운 게 늘 불끈불끈 솟아나는 성적인 욕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잘 몰랐는데 인턴십을 하면서 기도생활을 회복하고 나니까, 자기는 아주 깊이 기도해야지 그런 것을 이길 줄 알았는데 딱 어떤 나쁜 생활이나 욕망이 떠오를 때 기도생활을 하니까 이것을 올라올 때 바로 자를 수 있는 민첩성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신지 아시겠지요?
그래서 우리들이 새벽에 나와서 밤에 나와서 긴 시간 기도하고 그러는 것도 당연히 기본적으로 중요하지만 기도가 필요할 때 즉각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시험이 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제일 두드러진 특성이 민첩성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민첩성이. 그러니까 뭐냐 하면 ‘딱’ 나타나면 즉시 ‘탁’ 칠 수 있는 영적인 순발력이 나와야 되는데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에서도 나온 것처럼 도둑이 넘어오니까 담장만 넘어와 봐라, 들어오기만 해 봐라, 뭘 가져가기만 해 봐라, 다시 오기만 해 봐라, 그렇게 졸음에 취해서 망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런 민첩성입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 짧게, 필요할 때 간절히 기도하는 그 기도가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때 시계를 정시에다 맞춰놓고 정시마다 핸드폰을 울리게 했습니다. 시계가 아니라 핸드폰을. ‘딩동’ 하고 울리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 30초라도. ‘딩동’ 하면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뭐가 일어나면 즉시 기도하고. 그렇게 처리를 즉각 즉각 할 때 그때에 기도시간에 집중적으로 기도하기가 좋은 것입니다. 아멘?
그 다음에 주의 깊음입니다. 내재된 죄, 그래서 시험을 이기는 길에서도 얘기한 게, 여기 사람이 마음이 이렇게 있습니다. 혼자 작동할 때도 있습니다. 상상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환경이 주어집니다. 환경에서 뭔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마음에 정동을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이런 방향 저런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A라는 환경이 내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 다음에 내 마음 A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위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게 만드는 게 주의 깊음인데, 그러니까 지식이 없는 사람은 주의 깊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의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은 동시에 은혜의 빛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또렷하게 살아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자기를 주의 깊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시험에 빠지고 죄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4. 거룩한 근심과 세속적인 염려와의 차이는 무엇이며, 세속적인 염려가 우리의 마음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근심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지만, 세속적인 염려는 세상에 있는 것을 잃어버릴까봐 혹은 얻지 못할까봐 혹은 간직하지 못할까봐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게 근심입니다. 그래서 근심은 사람을 뼈까지 상하게 만듭니다. 아주 그냥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쓴 물이 뼈 사이에서 우러나오게 만드는 게 근심입니다. 그런데 특히 세속적인 염려입니다.
황성주 박사 책에 보니까 우리 몸이 의로운 근심과 불의한 근심을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나는 어느 정도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건하고 의로운 일로 걱정을 하는 것은 그게 한계를 크게 뛰어넘지 않으면 우리 건강에 도움을 주는데, 세속적인 것들의 염려와 이런 것들은 우리의 모든 심혈관 계부터 시작해서 정신계, 특히 소화기 계통, 순환기 계통까지 모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확실히 우리의 몸이 정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거룩한 근심은 우리를 한없이 영적으로 예민하게 만드는데, 세속적인 염려는 마음을 아주 둔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맹인들이 점자를 읽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손에는 지문이 없습니다. 특히 두 손가락 요정도는 지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앉으면 샌드페이퍼로 이것을 깎아내기 때문입니다. 굵어지면 점자를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어린아이 목살처럼 살갗이 거의 없이 말랑말랑 하게 만들어야지만 빠른 속도로 읽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것입니다. 거룩한 근심은 하나님을 더 온전히 사랑하기 위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출판 기념회를 했습니다. 책을 몇 권 썼는지 잘 모르겠으나 80권정도 된다고 누가 그러는데, 출판 기념회 한 책은 두 권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세 번째 한 것입니다. 그만큼 제게 의미가 컸습니다, 그런데 출판사에 계신 분이 와서 이 책이 이렇게 많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 탄생했다 그랬더니 그분이 나중에 차를 마시면서 ‘누가 목사님을 그렇게 괴롭혀요?’ 그럽니다. 그래서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저 자신이 그러지요’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 교회와 교구의 부흥, 그 다음에 예배의 감격, 구역의 은혜 모임, 이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까? 그 다음에 교회와 교구가 잘 부흥될까? 예배의 감격이 있는 생활이 돼야 될 텐데, 구역모임에 은혜를 주셔야 될 텐데, 이런 것들을 가지고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명목상 이런 근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 때문에 신앙이 뒤로 미끄러지고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목표는 올바르게 정했는데 마음속에서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속적인 염려는 가계부채와 재정상황, 이것이 염려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정의 불화, 불확실한 미래, 이러면서 이런 것들에 자기 마음을 많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가계부채와 재정상황을 생각은 안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많은 시간을 바쳐서 고민한다고 해결이 되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남편, 변하지 않는 사람 데리고 마음으로 많이 고민해봐야 인간이 변화됩니까? 나를 시험하듯이 안 변합니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새벽마다 와서 변화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해도 약 올리듯이 더 못되게 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시험당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염려와 근심으로 해결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염려한들 키를 한 자나 키울 수 있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 시작하면 염려는 끊임없이 줄을 서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아라,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 하면 마음에 각질이 생기고 세상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5. 육신에 대한 과도한 염려와 근심으로 인한 마음의 완고해짐을 방지하기 위한 신자에게 필요한 꼭 필요한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깨끗한 양심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은혜 충만하면 선을 행하게 되고 은혜가 떨어지면 나쁜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환경이나 은혜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올바른 판단이 서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위험한 사람들이 어느 한도에 도달했을 때 정신이 엉켜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사가 우리 마음대로 될 수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라도 정신 줄을 놓아버릴 정도의 약한 정신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게, 한번 정신 줄을 놓고 어떤 일이 일어나면 정신 줄을 똑바로 붙잡아도 잘못된 그 일은 즉시 되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남편한테 성질이 나 가지고 원 바탕대로 퍼부었습니다. 정신 줄을 놓았습니다. 그 순간. 그런데 며칠 기도하면서 깊이 회개하고 정신 줄을 다시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마음의 상처는 가시지를 않는데 이게 몇 달 갈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냥 털어버리면 되지 않느냐?” 자기도 못하면서 왜 남편보고만 하라고 합니까?
그러니까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죄가 태어나서 애들이 부모의 통제를 떠나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처럼 자기가 마음을 다잡아도 그 결과가 계속 자기를 사로잡아 오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그런 판단을 유지하는 게 깨끗한 양심입니다. 온전한 신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그리고 진짜로 자기가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는 한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아신다는 그 말씀으로 위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하찮게 여길 수 있는 마음입니다.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환난과 폭풍도 지나가리라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깨끗한 양심을 지녀야 되는 것입니다. 잘못했으면 진실하게 회개하고,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배상을 하거나 용서를 빌고, 이렇게 해서 양심의 송사를 받지 않도록 철저히 회개해야 되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며 내가 어떤 결핍한 상태를 하나님 다시 만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앞에 매달려야 되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세상을 하찮게 여겨서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며,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내 인생 전체를 뒤집는 게 아니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6. 위선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위선을 생각해 봅시다. 좁은 의미의 위선은 종교적인 의무만을 행하고 마음을 거기에 안 싣는 게 위선입니다. 그래서 위선을 어마어마하게 노력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싣지 않고 종교적인 의무를 행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하고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회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위선은 자기 의를 획득하기 위해 행하는 모든 노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위선을 설명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위선의 정의는 그 안에는 없는 신앙적인 정서에 어울리는 종교적인 행동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좋은 평판이나 비난에 대한 기대 때문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자신 안에는 신앙적인 정서가 없으나 그러나 좋은 평판을 받거나 혹은 비난 받지 않기 때문에 실천하는 것, 이게 의무감하고는 다릅니다. 의무감은 그래도 내가 하나님 앞에 힘이 없지만 내가 성도로서, 구역장으로, 또 장로로, 목사로, 이런 의무를 가지고 때문에 나는 이것을 해야 된다는 것이라면, 하나님 바라보는 것이라면, 위선은 좋은 평판이나 기대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좁은 의미의 위선과 넓은 의미의 위선은 이렇게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한 삶이 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