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성화와 마음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녹취자 : 장미연
이 장은 아무도 바꿀 수 없는 항로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 신자의 마음은 성화의 작용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성령께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성화의 작용을 이루어 가십니까?
먼저 답부터 이야기하면 성화의 작용이라는 것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작용이라는 것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본성이 결국 마음 안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성화의 작용이 시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작이 되기보다도 의식 속에서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의 마음은 성화의 사령부다. 성화 작용의 사령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성화의 작용을 이끌어 가십니까? 성령께서 마음의 변호와 성도들의 순종을 통하여 성화를 이루어 가십니다. 자, 이렇게 보면 커다란 배가 있습니다. 수천 톤도 그렇게 큰 배는 아닙니다.
(예화) 제가 가르쳤던 제자 한 사람이 자기가 17만 톤 배를 몰아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배도 파도가 치면 엄청나게 출렁거린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의 힘이 인간의 힘보다 참 크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쨌든 수천 톤의 배를 움직이는 것도 작은 키 하나로 움직입니다. 이것을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커다란 배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수천 톤의 커다란 배도 작은 키를 움직여서 항로를 변경하듯이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배의 키와 같습니다. 이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움직이는데 이게 인간의 마음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를 본성을 순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용인데 그 주체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선도적으로 일을 하십니다. 제일 먼저 첫 번째 나오는 것이 성화를 이끄시는 성령님이 계시고 이어서 신자의 마음이 변화 됩니다. 신자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변화될 때 이 작용은 성령님이 인간의 마음을 쉽게 이야기 하면 기계를 다루듯이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라 여기에서 신자의 마음과 그 마음을 선하게 바꾸시는 성령님 사이에 신비로운 작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신비롭게 이루어져서 성령님이 하시면서 또한 신자의 마음속에서 신자가 결단을 하는 이러한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도가 순종합니다. 순종한 성도는 자기가 순종했다고 생각안하고 성령님이 자기 마음을 바꾸셨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을 바꾸심으로써 순종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2. 마음에서 이루어진 성화의 작용은 신자의 성품과 삶에서 드러납니다. 이것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방법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마음에서 비롯되는 성화의 작용은 신자의 성품과 삶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방법에 대해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람이 있는데 깨달음이 올 것입니다. 깨달으면서 이제 비로소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성품을 발견합니다. 오늘 오전에 설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이런 질서라면 이런 질서를 거역하면서 인간이 또 다른 질서를 만듭니다. 그러면 이 질서와 이 질서 사이에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면 이렇게 잘못 세워진 부분들을 허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을 파괴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복수하는 의미에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는 보다 더 건설적인 의도가 있습니다. 사람이 세운 질서가 아니라 바꿔 놓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라고 본 다면 그렇게 하나님의 질서를 떠나서 인간이 이렇게 빨간 질서를 세웠을 때 하나님은 이런 질서를 고집하기 위해서 이런 부분들을 허물어 버리십니다. 이렇게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부패한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패한 성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혹은 분노하고 우울해지고 하면서 부패한 성품과 맞서서 싸울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신자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이렇게 싸울 때 하나님이 싸우는 가운데 성령님이 항상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부패한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 깊이 뿌리가 내린 것입니다. 마음에 가서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이것들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거룩한 성품의 새로운 성향이 형성되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런 질서를 따라서 살도록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바뀐 성향이 새로운 삶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니까 자기가 실질적으로 잘못된 이 본성으로부터 수많은 삶으로 표출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고 사람들과 다투고 분쟁하는 이런 모습입니다. 이걸 깨달으면서 자기의 마음을 통해서 삶을 보고 그 다음에 반대로 삶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감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진리의 빛이 들어오니까 마음을 통해서 어떻게 그것이 삶으로 발전될지가 보이고 삶을 진리로 비춰보니까 이런 식의 삶이 어떠한 본성에서부터 나왔는지가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없을 때와는 비교되지 않는 유리한 위치에서 삶을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2차 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에게 졌잖아요. 사실 처음에는 미국이 염려했거든요. 진주만 습격을 당하고 나서 전략가들은 전쟁에서 이긴 이유가 많이 있지만 하드웨어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면 세 가지가 미국의 승리를 가져 왔다고 봅니다. 물론 원자폭탄입니다. 미국보다는 연합군의 승리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트랙터라고 합니다. 트랙터가 새로 나오면서 일본 사람들이 인력을 동원해서 3년을 공사 해야지 되는 비행장 복구를 트랙터를 이용하면 3개월이면 끝났다고 합니다. 그 두 가지와 함께 강력한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레이더입니다. 레이더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봅니다. 발전된 레이더 때문에 이겼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레이더에 엄청나게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어마 어마하게 빠르게 날아오는 음속 7, 8 소련에서는 15인가를 개발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3정도 까지 개발했습니다. 마3는 초음속에 대한 미사일인데 일본은 마5 정도까지 만들었고 미국은 8내지 10정도 간다고 하는데 최근에 소련이 약 15내지 20배 미사일을 발견했는데 현재에 있는 어떤 무기로도 방공망으로도 막을 수 없다. 그렇게 얘길 했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굉장히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미사일을 스테인리스로 처리가 되어서 나오기 때문에 레이더에 안 잡힙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스테인리스를 탐지할 수 있는 레이더를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이러면서 창과 방패의 싸움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군비를 이런데 투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용기와 결단 이런 거 매우 중요하지만 이것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없다면 사실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것을 깨달으면서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자기 죽음이 요구되는가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3. 오늘날의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죄와 싸워 이기는 승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제 당당히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죄와 싸워야할 우리다 그리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어떻게 보면 모순이지요? 그런데 모순이 아닙니다. 이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부패했지요? 죄와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위 이야기하는 결사의 싸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지는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은혜 안에 살아가도록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승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항할 결심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죄와 함께 먹고 마시다가 죄를 대항할 결심을 갖게 되는 게 하나님이 마음에 은혜를 베푸심으로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천국 비유가 나오면서 길가에 떨어진 씨, 돌짝밭, 가시나무, 떨기 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모두 다 구원에 이르지 못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오직 옥토에 떨어진 씨만이 말씀이 열매를 맺어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말씀에 부딪힘이 없는 것이고 이것은 살짝 정서적인 자극이 온 것이고 이것은 좀 잘하는 것 같으나 결국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제대로 생명을 펴 보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상징한 것이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어떤 밭에 떨어졌느냐에 따라서 각기 다른 형태가 나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지 엘더라는 신학자가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드릴로 무엇인가를 뚫고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마음에 오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인격체이기 때문에” 결국 이것은 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어떤 마음이 되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말씀에 다른 결과를 만드는 것입니다.
4.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와, 죄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 그 변화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마음이 선하게 변화되었을 때는 하나님 때문에 선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선한 마음을 갖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선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악하게 변화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악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악은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모자라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악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고 그 책임은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화) 옛날에 한 번 설교하다가 그런 비유를 들었었지요? 지금도 조심해야 합니다. 브레이크 시스템이 매우 좋아지기는 했지만 언덕에 자동차가 서 있을 때 예전에 보면 자동차 바퀴에다 트럭 운전수들은 이렇게 생긴 나무를 가지고 다닙니다. 바퀴 뒤에다가 괴어 놉니다. 그렇지 않으면 벽돌 같은 것들을 받쳐 놓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뒤로 브레이크가 사이드를 잡아 놓는데 풀리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풀려서 뒤로 내려가면 가속도가 붙으면서 더군다나 언덕이 길 경우에는 상상치 못한 결과를 낳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존 오웬은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그 당시에는 자동차가 없었지만 그 사람의 용어로 설명하면 하나님이 억제하도록 하셨다가 억제를 탁 푸실 때 내려가는데 하나님이 미셔서 가는 게 아니라 이런 은혜의 장치들을 하나님이 억제 하는 것들을 떼버리실 때 그때 탁 하고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임은 이 사람 자신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한 것처럼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무게는 욕망의 무게입니다. 욕망이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서 그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삶을 위한 교육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해야 할 것을 욕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어렵잖아요? 아이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를 욕망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욕망해서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죽어라고 들볶으니까 할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욕망하지 말아야할 것은 잘 욕망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영역으로 들어와서 해결하다 보면 참 신기한 게 운동도 매일 매일 할 때는 보람이 있고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한 한달 안하고 나면 너무 가기가 싫고 가도 빨리 집에 오고 싶습니다. 그리고 온갖 핑계를 댑니다. ‘오늘은 너무 추워. 잘못하다가 감기에 걸리면 운동해서 받는 유익보다 건강을 더 손해 볼 거야.’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절대로 운동이 도움이 안 될 거야. 휴식이 필요해.’ ‘속이 더부룩해서..’ 등등 별의별 이유를 다 대는데 기도하고 똑같습니다. 매일 매일 기도할 때는 하루라도 기도 안하면 못 살 거 같습니다. 매일 매일 말씀에 대해 깨닫고 기쁨이 있으면 세상에 나만큼 무지한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속성반으로 더 많이 깨닫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면 보람이 느껴지고 자기는 너무 너무 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위도식하면 정말 할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왜 저렇게 힘들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똑같이 인간이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그것은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고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인간 자신이 그 마음의 주도권을 가지고 그 죄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은혜가 결핍됩니다. 은혜의 결핍은 세상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넘어져 버립니다. 그 반대로 충만한 사람은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죄에 대한 죄악에 대한 인간의 경향성에 순종하면서 이렇게 뒤로 물러날 때 빨갛던 사랑이 색깔이 변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시커멓게 변하는 것입니다. 해결하는 길은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살려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키시고 일어난 자를 다시 은혜 충만케 하시는 그런 작용을 통해서 인간에게 가르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5. 신자의 성화가 갖는 두 가지 측면과, 성화가 포함하는 두 가지 요소는 각각 무엇입니까? 각주 34번을 읽어본 뒤 성화와 죄 죽임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설명해 봅시다.
성화. 죄인의 전 본성을 죄로부터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죄와 결별하게 하시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셔서 형상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성화의 두 가지 구성 요소는 성령의 은혜로운 작용과 신자의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명하는 것을 내게 주시옵소서. 그리고 원하는 것을 명하시옵소서.”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지금 불구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거, 저런 거를 순종하라. 행하라고 명하셔도 나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먼저 그렇게 할 수 있는 나에게 힘을 주셔야 합니다. 그게 은혜이고 그러면 그 다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명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행하겠나이다. 이런 인간의 선한 의지에 대한 은혜의 선행적인 성격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성’ 이라고 하는 것은 죄책과 오염인데 죄책은 칭의에 의해 해결되고 오염은 성화에 의해 해결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책은 없지만 오염은 남아 있기 때문에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